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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세미나 주제발표1 가람, 디자인 -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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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9-08-09 11:33 조회2,43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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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발표1    가람, 디자인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건축과 교수)



저하고 바로 뒤에 발표하실 정영선 선생님이 한국정원의 기본설계를 위한 마지막 발표 때문에 미국 LA에 갔다가 어제 아침에 돌아왔다. 그래서 미처 발표준비를 제대로 못해서 발표준비를 안 하고 발표를 하자고 약속했다. 그런데 저는 약속을 배반하고 급하지만 좀 준비를 했다.(웃음) 어제 공항에서도 쓰고 오자마자 정리를 하고 파워포인트를 밤새 준비했다.
오늘 이 자리에는 조성룡 선생님이나 정기용 선생님 같은 건축분야의 전문가들만 오시는 줄 알았더니 스님들까지 오셔서 어떻게 할지 난감하다. 양쪽 분야의 대가들이 계셔서 난감하기는 하지만, 약간의 불교적 지식과 약간의 건축적 지식을 혼합해서 말씀을 드려보겠다.

1. 사찰건축의 두 기원

우선 사찰건축, 즉 가람이라고 하는 게 무엇인가 원론부터 돌아가서 생각을 해보자.
다 아시겠지만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계시던 때는 가람이란 게 특별히 필요 없었다. 석가께서 열반하신 후 사부대중이 크게 둘로 나뉘게 된다. 석가께서 계시던 때는 부처님을 중심으로 출가자와 재가자가 섞여 있었는데, 이제 구심체가 없어졌다고 할 수 있다. 구심체가 없어지고 나니 출가 승려들과 재가신자들 사이에 신앙의 형태 또는 수행의 형태가 달라진다.

1) 승방 굴 Vihara - 출가승려 - 수행 일상 공간 - 자성 해탈

출가 승려들은 자성해탈을 목적으로 하는 수행에 전념을 하게 되는데, 마을에서 떨어진 숲속에 승방들을 만들고 안거를 한다. 많은 형태의 승방들이 있었겠으나, 현재 남아있는 것은 이런 형태로 석굴을 파서 만들어진 비하라 석굴이다. 아잔타에 있는 것이긴 하지만, 대단히 단순한 형태이다. 이 석굴은 가운데에 큰 홀이 있다. 식당으로 추정된다. 승방 굴도 있는데 2인실로 되어 있다. 돌침대가 양쪽에 있는 대단히 간단한 구조로 만들어졌다. 출가 승려들은 여기에 기거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해탈을 위해 수행을 하게 되는데, 이런 것들이 불교건축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것들이 나중에는 지상으로 나와서 승방을 만들게 되고, 더 나아가서 내부공간이라는 하나의 페이스를 만들게 되고, 또 그것이 나중에는 당(堂)이라고 하는 건축물로 바뀌게 된다.
여기서 보이는 것은 무소유, 비움과 같이 출가 승려들이 지향하는 여러 가지 가치들이다. 또 교와 선으로 굳이 나누어 생각해본다면 선(禪)적인 공간, 말이 필요 없는 침묵의 공간(不立文字), 그 침묵 속에서 마음과 마음으로 통하는(以心傳心) 전법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문자가 필요 없는, 이성보다는 직관이 강조되는 공간적 스타일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구체적인 상징과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고, 대단히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세계를 보여준다.

2) 탑파 Stupa - 재가신도 - 신앙의 대상 -타력 구원 :

또 하나의 중심은 재가신도들을 중심으로 생겨나게 된다. 재가신도들은 어차피 일상생활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고 마을에 기거하면서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어찌 보면 수행보다는 신앙의 대상을 더 갈급하게 찾게 된다. 처음에는 부처님 열반 후에 사리 8말을 8개 나라가 쪼개서 인도전역에 흩어져서 묘지를 만들게 된다.
지금 보시는 것이 스투파인데, 현존하는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고 하는 산치 탑이다. 보시다시피 이것들은 승방하고는 좀 다르다. 비하라가 자생적인 해탈을 목적으로 하는 수행의 공간이라면 이곳은 신앙의 공간이다. 여기서는 신앙의 대상을 만들고 자성성불보다는 절대적 대상을 통해서 구제를 받고 싶어 하는 타력신앙의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이 탑 신앙은 나중에 중국에 들어가서 파고다가 되고 우리나라에 들어와 석탑이 된다. 대상이라고 하는 문제로 가면 이 탑은 또 금당(Chaitya)이라고 하는 신앙의 대상적 건물로 바뀌게 된다. 
승방과 비교하면 탑이나 금당에는 대단히 장식적이고 상징도 많다. 이것은 인도에서 중요한 분들이 썼던 햇빛을 가리는 양산이고, 또 난간이 만들어지면서 영역을 뜻하게 되고, 문이 만들어지면서 입구를 뜻하게 되고…
 이런 상징적 조형들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왁 같이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들은 장엄의 주체가 되는데, 불경에도 장엄하게 불전을 꾸미고 헌화하고 공양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여러 차례 나온다. 이러한 상징들은 중국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우주론적인 문제가 되기도 한다.


3) 당탑가람제 정착

지금까지 말씀드린 비하라[승방, 堂]와 스투파[塔]를 불교건축의 시원으로 보는데, 이 두 가지는 결국 둘로 쪼개질 수는 없는 것이었다. 출가 승려와 재가불자들을 통칭하는 사부대중이라는 말처럼 출가 승려들의 수행과 재가불자들의 신앙이 결국은 합치게 된다. 이 합치게 된 것이 결국 중국에 들어오게 되고 이것을 당탑(堂塔)가람이라고 부르게 된다. 우리가 받아들인 불교건축은 중국에서 합쳐져 있는 당탑가람의 형식이다. 결국 이런 당과 탑, 그리고 승방이라는 구조가 합쳐져서 전체적인 가람을 이루게 된다. 따라서 사찰에는 이와 같이 신앙의 대상을 장엄하는 크고 화려한 성격들을 갖는 측면이 있는가 하면, 승방에서부터 출발된 절제나 무소유, 비움과 같은 미학적 측면이 공존하고 있다. 이러한 두 극단의 문제, 즉 대중적 장엄의 미학과 초월적인 절제의 미학이 맞물려 있는 것은 불교가 존속하는 한 계속될 불교건축의 운명일 것이다. 이런 면들 때문에 불교건축을 어느 한 측면에서만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불교건축의 이러한 기원을 알지 못하거나 잘못 이해하게 되면, 요즘 현대불사에서처럼 장엄하게 꾸미는 것에만 치우쳐 화려하게만 간다든지, 아니면 지나치게 선적으로 가면서 미니멀리즘 적으로만 간다든지 극단에 치우친 길을 택하게 된다. 이  양 극단을 버리고 변증법적으로 통합된 방향에서 불사의 기준을 마련해야만 한다는 것이 우리가 사찰건축의 기원에서 찾을 수 있는 교훈일 것 같다.


2. 九山禪門

실상사는 구산선문 중에 유일하게 사찰의 가람의 명맥을 유지하면서 운영되고 있는 유일한 사찰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장흥 보림사가 있기는 하지만 실상사에 비해 사세 등이 미약한 측면이 있고, 화순 쌍봉사는 가지산파의 한 방계라고 보기 때문에 구산선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나머지 구산선문들은 폐사되었거나 흔적만 남아 있다.
구산선문이 출발하는 사회적 배경에 대해서는 다들 아실 테니 간략하게만 언급하겠다.
신라 하대로 가면서 경주에서는 왕권쟁탈전이 시작되는데 그 결과 지방에 대한 제어력이 느슨해졌다. 그리고 기존에 있었던 교종중심의 불교는 완전히 귀족화되어 경주의 중앙귀족들과 결탁이 되어 있었다. 경주는 왕권의 무대이고 왕권은 교종이라고 하는 등식이 성립되는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에서 발전한 선불교가 많은 유학생들을 통해서 우리나라에 소개가 되었지만 경주에 진입할 수는 없었다. 선불교는 교종과 배치될 뿐만 아니라 귀족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매우 평등하고 직관적인 불교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결국 선불교는 지방 호족이라고 하는 새로운 세력들이 받아들이게 되면서 지방에 정착하게 된다.
따라서 저는 구산선문에 대해서는 세 가지를 주목해야 된다고 본다. 첫째, 선이라고 하는 내용을 어떻게 건축화 시킬 수 있는가. 둘째, 구산선문의 유력한 지원세력인 호족은 누구인가, 셋째, 지방 호족은 누구인가에서 출현하게 되는 지역성의 문제이다.
 
1) 禪의 건축

선(禪)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건축화 할 수 있는가. 선은 말로 이야기하는 순간 선이 아니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도를 도라고 하면 도가 아니듯이 선을 규정하면 그 순간 선의 문제를 떠나버린다고도 한다. 그러한 선의 문제와 제가 불교를 전공한 사람이 아니라는 한계가 있지만, 여러 가지 선문답들을 들여다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조주선사가 '뜰 앞의 잣나무'를 말했을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뭘까. 결국 일상성 속에 깨달음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일상성 속의 해탈, 이것은 건축적이거나 문화적인 관점에서 보면 비판적 지역주의[Critical Regionalism]라고 이야기될 수 있는 부분이다. 비판적 지역주의는 근대 모더니즘 건축을 강하게 비판해가면서 등장한 것이다. 비판적 지역주의의 기본철학은 건축에 있어서의 도그마나 이념을 거부하고, 일상 속에서 발견되는 사소한 것들, 많은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 속에 건축의 진실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적 지역주의의 시각으로 실상사의 건축을 본다면, 실상사의 건축은 평양이나 서울 또는 미국과 같은 다른 지역에서 올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전라도라고 하는 곳 또는 불교승가의 생활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을 모티브로 삼아서 건축화 시켜낸 것이라고 파악할 것이다. 저는 이러한 비판적 지역주의의 시각이 선문구산의 정신에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역사적으로 가람사를 통해 선종과 교종의 차이를 살펴보겠다.
교종은 하나의 룰에 의해 만들어진다. 고려시대에 이게 첨예하게 드러나는데, 화엄종은 화엄종식의 배치양식을 갖게 되고 법상종은 법상종식의 독특한 사찰구조를 보인다. 화엄종이나 법상종에서 이야기하는 교리체계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선문구산의 사찰구조나 배치형식에 있어서 일정한 체계나 형식이 없이 대단히 자유롭다. 형식이 없다는 것에 대해 약간의 오해가 있을 수 있는데, 형식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 무질서하다는 뜻은 아니다.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하기 때문에 어떤 사찰은 화엄종 스타일의 모습을 띄기도 하고, 어떤 사찰은 법상종 스타일의 모습을 띄기도 하고, 어떤 사찰은 심지어 아무 종파의 형식이 아니기도 하다는 뜻이다. 이것이 자유라고 하는 것이다. 모든 것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새로운 형식을 만드는 것도 자유지만 기존에 있는 형식을 스스럼없이 택하는 것도 자유다.
그래서 선문구산이라고 밝혀진 9개의 사찰들을 보면 9개 사찰에 모두 관철되는 공통성이 없다. 실상사는 전라도에 있는 다른 사찰과 비슷하고 강원도에 있는 굴산사는, 그 일대에 있는 신복사와 유사하고… 이렇게 가는 거지, 선문구산이라고 해서 선종사찰들끼리 일정한 형식을 이룬다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것은 교종의 사찰들과 상당히 다른 면이다. 교종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공통점이 있다. 예를 들어 영주 부석사와 전주의 귀신사는 스타일이 비슷하다. 경상도와 전라도를 남나들면서도 하나의 맥을 갖고 있다. 그런데 선문구산은 그렇지 않다. 그러면 문파끼리의 공통성은 있을까. 거기까지는 아직 연구가 안 되어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선종사찰은 아마도 종파나 문파보다는 지역사회에 훨씬 더 밀착되어 있는 그런 형식을 가졌을 것 같다.

지금 보여드리는 사진은 굴산선문의 한 지사라고 여겨지는 한계사지다. 돌아가신 관조스님께서 촬영을 해주신 것이다. 한계사지를 보면 아무것도 없으니까 선(禪) 같지 않습니까? 제 능력으로는 어떻게 말로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다. 불립문자로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제 마음이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웃음)

왼쪽 사진은 눈에 덮힌 한계사지이고, 오른 쪽 사진은 눈이 녹은 한계사지이다. 여러분도 보시다시피 얼른 봐서는 이 두 가지 모습이 같은 사찰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다. 오른 쪽 사진은 한계사지 사진을 보면서-이것이 눈이 녹으면 이렇게 가는 거죠. (사진). 눈이 녹아버린 모습은 굉장히 어지럽다. 저는 이 사진을 보면 '이와 같이 어지러운 것들을 덮어버릴 수 있는 눈 같은 건축은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어떻든 이와 같이 선이라고 하는 것은 자유인데, 그 자유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엉뚱한 것을 하는 선택하는 것도 자유지만 아주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 또는 기존에 있던 것을 선택하는 것도 자유다. 그런 면에서 절대자유라는 것이 선건축의 내용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2) 호족의 종교

호족은 나말여초에 있었던 지방 조폭조직의 두목들이다. 호족은 귀족출신이 아니다. 잘 알려진 장보고도 해상호족이고 노예출신이다. 고려 태조가 된 왕건 역시 역대로 4대째 호족으로 해상밀무역을 조직해서 많은 부를 축적했던 조직의 사람이다.
중원에 미륵사라고 하는 절이 있다. 미륵사의 미륵대원(彌勒大阮0은 추정하건대 충주 유씨라는 호족들이 세운 절이다. 충주 유씨는 왕건의 둘째 장인이다. 왕건은 자신도 호족세력이었고, 전국의 호족들과 연합해서 세력을 구축하면서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세우게 된다. 왕건은 정식부인이 22명인데, 어떤 집은 둘째 딸이 마음에 들어서 달라고 했더니 첫째 딸까지 묶어서 보내주었다고 한다. 이것은 왕건이 호색한이어서가 아니라 호족끼리의 결합을 위해서였다. 호족들은 서로를 못 믿기 때문에 어떤 약속도 소용이 없다. 결국 혼인이라고 하는 육체적 결합을 통해서 약속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미륵사는 그 중에 가장 유력했던 호족인 충주 유씨가 만든 흔적이다.
반면에 당시 문화의 중심지였던 경주에는 불국사가 완성되고 석굴암이 완성된 이후에는 이렇다 할 건축적 행위가 더 나타나지 않는다. 모든 귀족들의 관심이 정치에 쏠려 있었고, 결과적으로 경제적 투자가 더 이상 문화적 행위에 쓰이지 않고 모두 정치자금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렇게 되니 결국 전국의 문화적 주도권을 쥐게 되는 것은 새롭게 등장한 지방의 호족세력이 되고 이들이 구산선문과 결합하게 되는 것이다. 충주 유씨의 경우 구산선문쪽은 아니었고 법상종 쪽과 결합하기도 한다. 그 가운데 유일하게 호족의 건축이라고 남아 있는 것이 이것이다.

먼저 이러한 호족들의 성격을 보면, 지방조폭들답게 영역에 대한 욕심이 굉장히 강하다. 영역에 대한 욕심이 꼭 나쁘다고만 볼 건 아니다. 그러한 바탕에서 지역문화가 활성화된 것이다. 고려사회는 21개 호족이 연합해서 만들어낸 국가이다. 고려는 스스로 자기들이 제국이라고 했다. 왜 제국이라고 했는가. 21개 호족이 각각을 다 하나의 국가로 봤기 때문에 20개 정도의 국가를 하나로 통합한 제국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는 이와 같은 연합국가의 성격 때문에 고려는 대단히 다양한 사회를 만들게 되고, 고려가 망할 때까지 지방자치적 전통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지방성, 지역성, 또는 지역완결성이 구산선문의 정신과 고려시대를 관통하는 불교의 전통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데, 정치적으로 표현하자면 중앙집권적인 형태가 아니라 지방분권적이고 지방자치적인 형태로 사찰이나 불교문화가 융성하게 된 것이다. 

또 하나는 원초적 힘, 즉 생명을 꿰뚫는 힘에 대한 것이다. 요즘에 빗대서 예를 들자면, 조폭들이 즐겨듣는 노래는 모차르트가 아니고 주로 네 박자와 같은 노래일 것이다. 이런 종류의 노래에는 원초적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노래들은 졸리지 않다. 저는 호족들이 만들어놓은 조형물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 7층 석탑에서는 다보탑이나 석가탑에서 보이는 비례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날카로운 실루엣도 없고 그저 두루뭉술하다. 탑이 별 거냐, 돌 위에 돌을 쌓으면 탑이라는 식이다. 건축이 뭐 별거냐 이렇게 가면 디자인이 설 땅이 별로 없다.
여기서 더 놀라운 것은 이들이 갖고 있는 도전정신이다. 이들은 고전적으로 만들어진 클래식한 타입, 이미 고착되어 있는 우아한 형식을 거부한다. 일종의 아방가르드인데, 시골아방가르드다.(일동 웃음) 세련되지 못한 전위성이다. 이러한 전위성은 호족들의 정신과 맞닿아 있다.
미륵사 미륵대원에 있는 비의 귀부를 보면 그 시골스러운 전위성을 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귀부는 일반적으로 용의 얼굴을 한 머리, 거북의 몸통, 사자의 발로 만들어지는데, 이 귀부는 그냥 멀쩡한 자라의 모습이다. 또한 이렇게 새끼 자라까지 만들어두는 유머도 있다. 이와 같이 당시 사람들은 이와 같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데 형식에 구애받지 않았고 거침이 없었다.
 이러한 형식을 잘 볼 수 있는 게 운주사에 있는 탑들인데, 저는 그게 호족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대단히 파격적이고 새로운 도전을 한다. 뭔가 세련되지 못하고 유치한듯하지만 그러면서도 힘을 갖고 있다. 우리한테 익숙한 경주의 불국사나 석가탑에서 봤던 우아함, 장엄미와는 정말 다른 이런 정신과 형식들이 호족들의 정신, 호족들의 예술로 남았던 것이다.

3) 지역성

이렇게 봤을 때 지역성이라고 하는 게 대단히 중요한 게 된다. 특히 구산선문의 전통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이러한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 지역의 사회적 프로그램이다. 문화의 중심, 경제적 발신지, 공동체의 핵심으로서 역할을 했던 것이다. 실상사 사부대중공동체가 이미 시작하고 있는 것들인 것 같다.
당시의 기록들을 들춰보면, 상주하는 스님들이 1천명~3천명이 있었다고 나온다. 약간 과장은 있을 수 있겠지만, 어떻든 거대한 장원, 농장이었음에 틀림없다. 당시의 인구로 봤을 때 3천명이 있는 장원은 지금으로 치면 3만 명을 고용한 대기업과 맞먹는 것이다. 그 정도의 경제력을 가졌다는 것이다. 고용창출이라는 말이 좀 이상하지만 이러한 것은 호족들의 경영과 구산선문의 이념이 결합이 되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저는 구산선문 사찰은 지역의 문화적 중심일뿐더러 경제적 발신지였다고 본다. 구산선문 당시에는 사찰이 곧 경제의 주체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구산선문은 아니지만 중원의 미륵사는 정말 그랬다. 미륵대원이라는 여관을 만들어놓고 굉장한 수익을 거두었는데, 이것은 이 지역 호족의 경제적 근거가 되었다. 미륵대원에서 재우고 이곳을 지나는 통행료를 받기도 했는데, 말하자면 지금의 경부고속도로 금강휴게소 같은 것을 독점하고 있었던 셈이다. 중원 미륵사는 종교적 위안을 주는 공간으로서 그리고 경제적 근거지로서 두 가지 목적을 가졌던 것이다.
이와 같은 역할, 즉 문화의 중심, 경제의 발신지, 지역공동체의 핵심이라는 역할이 당시 구산선문이 가졌던 굉장히 중요한 역할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조형적인 면에서는 가람건축의 평지성(平地性)을 들 수 있다. 실상사를 예로 들면, 실상사는 크게 보면 백제문화권에 속한다. 백제문화권의 문화적 특징이 평지성이다. 우선 땅이 평평하다. 그것은 절이 산속에 있느냐 아니냐? 와는 관계가 없다. 산 속에 있더라도 큰 분지를 택해서 평지를 택하는 것이다. 이곳 실상사도 그렇고 속리산 법주사도 경사지지형을 버리고 평지를 택한 경우다.
평지를 택한다는 것은 조형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평지를 택하게 되면 수평적 조형이 가능해진다. 그렇다고 수평적 조형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금산사와 같은 경우처럼 수직적 조형도 만들어진다. 3층, 5층 건물은 경사지에는 올라가기도 어려울뿐더러 위험스럽기까지 하다. 금산사는 평지이기 때문에 이런 형식의 수직적 건축이 가능했다. 금산사는 이와 같은 수직적 조형이 턱 하니 서있고 바로 옆에 수평적으로 대적광전이 놓인다. 아주 대조적인 조형이 두 개가 붙어 있다. 이와 같이 평활한 조형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평지의 영역들은 담장이나 회랑을 통해서 영역화되는데, 그래서 담장이 발달되어 있다. 부석사 같은 경우는 이런 게 필요 없다. 부석사는 계단식으로 나누어지니까 축대 자체가 하나의 건축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지에서는 그렇게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여러 가지 요소가 달라지는 것이다.


3. 가람의 집합성

1) 一世一佛說  - 삼천의 시공간 세계

스님들 앞에서 이런 부분 말씀드리기가 쑥스럽기도 하지만, 스님들은 못들으시는 걸로 하고(웃음) 건축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도식으로 말씀드리겠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삼천세계의 도식이다.
 초기불교, 소승불교의 시대에는 사바세계만 있었다. 부처님도 오로지 석가모니불 한 분이다. 그러다가 윤회라는 문제가 등장한다. 불교는 윤회의 사슬을 끊고 해탈해서 영원한 세계로 가는 것인데, 그게 일반중생들에게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해탈은 다 원하는 바이긴 하지만 논리적으로 봐서 일반중생들이 해탈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것이었고, 어쩌면 몇 겁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마 고대 인도인들이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어차피 해탈하기가 어렵고 그래서 윤회해야 한다면, 사바세계 말고 좀 좋은 세상에 태어나면 좋겠다는 생각도 많이 했을 것 같다. 좀 더 좋은 세상에 태어났으면 좋겠고, 병고도 없고 속 썩이는 사람도 없는 그런 세상에 가고 싶다는 바람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서쪽으로 백만억 굴을 지나면 극락세계가 있다. 그 극락세계는 수명이 거의 무한하고 다 똑같이 잘 생겼고, 밥 안 먹어도 살고, 항상 즐거워서 극락이다. 또 동쪽으로 가면 정유리 세계가 있고, 북쪽으로 가면 연화장 세계가 있고… 그런데 우주는 평면이 아니라 입체이기 때문에 동서남북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뻗어나가서 이러한 세계를 만든다. 이게 대승불교의 우주관이다.
그런데 이 우주관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각각의 세계가 모두 완벽한 곳이고, 이 세계에는 단 한분의 부처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일세일불설인데, 공간적인 개념으로만이 아니라 시간적인 개념으로도 그러해서 한 겁에 한 부처님만 존재한다고 한다.
어쨌든 저는 이 '일세일불'이라는 문제가 사찰 가람의 핵심이라고 본다. 불교문화의 핵심은 일세일불설에 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하나의 세계가 완벽하기 때문에 이것은 삼천 세계 중의 하나가 아니라 이 자체가 전체라는 것이다. 소위 다즉일(多卽一)이다.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가 하나이다. 부분은 전체가 되고 전체는 부분이 된다. 부분은 더 이상 부분이 아니고 전체는 더 이상 전체가 아니다. 그리고 이 세계 사이에는 우열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세계가 각각 그 자체로 완벽한 세계이다. 예를 들어 무한이라는 것은 무한의 두 배가 된다고 해도 앞에서 말한 무한보다 두 배가 크다고 할 수 없다. 무한은 무한에 100을 곱해도 무한이고, 무한에서 1을 빼도 무한인 것이다. 각각의 세계는 이런 면에서 완벽한 세계 구조를 갖고 있다. 이걸 인드라의 그물이라고 한다. 이게 서로 얽혀있어서 어느 하나도 인과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은 없다. 이 세계가 하나의 완벽한 세계를 이루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보살은 여기에 안 낀다. 보살은 산에 산다. 문수보살은 오대산에 사시고, 관세음보살은 보타락가산에 사시고… 이런 식으로 다 주처가 있다.
절은 교리적으로 불국토를 지어놓은 것이다. 처음에 절은 승방의 개념이나 수행의 개념이었지만, 당탑가람제가 되면서 교리와 결합하여 불국토를 재현한 모습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논리적으로는 일세일불이라는 말처럼 하나의 절에는 단 한 분의 부처를 모실 수밖에 없다.

2) 삼천불국토의 재현 네트워크
불국사의 구조를 보면, 대웅전만 떼어내도 하나의 완벽한 절이다. 극락전도 마찬가지이다. 이 각각이 하나의 절이라고 보는 이유는 각각의 전각이 회랑으로 둘러쳐져 영역이 완전히 싸여 있고 입구가 따로 있다. 이 전각에서 이 전각으로 바로 가지 못한다. 대웅전에서 극락전으로 가려면 대웅전에서 밖으로 나와서 극락전 입구를 통해 다시 들어가야 한다. 뒤에 비로자나불이 있고 연화장세계가 있다. 관음전이 있는 보타락가산이 있다. 모두 별도의 입구를 갖고 있고, 별도의 계단을 갖고 있고, 별도의 다리를 갖고 있다. 그런 점에서 형식적으로 보자면 불국사는 적어도 4개의 절이 모여 있는 절이다. 이게 고대 가람형태이다. 교종적으로 설명 드리자면 그렇다. 그런데 여기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불국사에서 하나를 떼어내도 하나의 완벽한 전체가 된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불교적 공간, 불교적 세계에서 중심은 존재하지 않는다. 바꾸어 말하면 다 중심이라는 이야기도 성립한다.
이것이 불교적 세계관과 유교적 세계관이 다른 점이기도 하다. 유교적 세계관에서는 대단히 강력한 중심이 있다. 국왕이든 가장이든 강력한 중심이 있고 그걸 포진해 나가는 형식이다. 불교에서는 그렇지 않다. 불국사를 예로 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부분을 중심이라고 다들 생각하시겠지만, 그건 어떻게 보면 속세적인 사고방식이다. 상징적으로 보면 이것도 중심, 저것도 중심, 모두가 중심이다. 마치 모든 불자들이 하나의 완전한 중심이듯이 이런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것을 조금 더 확장시키면 이렇다. 불교건축에서 건물을 만들 때 문고리를 만드는 장인은 자기가 중심에 서있다고 생각한다. 창문을 만드는 장인도 마찬가지로 창문 자체가 자기의 전부이다. 거기에 많은 심혈을 기울이는 것이다 그런데 유교적 건축은 그렇지 않다. 유교적 건축은 뼈대를 만드는 대목이 최고다. 그리고 문 경첩을 만드는 일은 하청에 재하청까지 간다. 

그래서 소위 일세일불설을 확장시키면 어디까지 가는가. 결국에는 부분완결성이라는 데까지 간다. 부분완결성이 있으면 공예라고 하는 게 가능해진다. 유교에는 극단적으로 말씀드리면 공예가 없다. 유교공예라는 말을 들어보셨는가. 유교에서 공예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그러나 불교공예라는 말은 있다. 불교공예는, 예를 들어 물병을 하나 만들어낸다고 해도 엄청나게 만들어낸다. 물론 불교자체로 많은 물건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불교사회였던 고려사회에서 고려청자가 많이 나오는 이유가 그 정신적 뿌리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만약 도자기를 만드는 장인이 '나는 왕이 중심인 커다란 조직사회의 말단일 뿐이야'라는 생각을 가지면 고려청자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 있는 내가 하나의 중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훌륭한 도자기들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세일불설에서의 중심의 문제가 종교의식이 아니라 어떤 사회의식으로 발전하게 되면 모든 구성원이 하나의 건강한 중심이 되는 것이다. 누군가가 대학에서 무엇을 가르치는 만큼 누군가는 도자기를 정말 끝내주게 만든다. 창조의 길은 그런 데서 열린다. 저는 고려청자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고 본다. 모두가 중심이라는 표현은 바로 그런 것이다.
모두가 중심이라는 생각이 사찰건축으로 환원이 되면 어느 하나도 버릴 게 없는 것이다. 설령 사찰에 산신각이 있다고 해도 허접스럽게 내버려둘 게 아니라는 것이다. 승방도 마찬가지이다. 승방도 부속시설이 아니고 승방 자체가 중심이다. 불법승이라고 했듯이. 저는 이런 것들이 다 사찰건축에서 생각해야 할 부분이라고 본다.
그런데 이제 이런 사찰은 더 이상 만들 수가 없죠. 특히 조선시대로 오면. 고려시대는 한 사찰이 하나의 신앙체계를 가졌다. 종파는 여러 개가 있지만 '부석사는 화엄종 사찰'이라는 식으로 명확하게 구별이 되는데, 조선 시대에 오면 그럴 수가 없게 된다. 교파, 종파 따지다가는 다 몰락할 상황이 된 것이다. 심지어 선교의 구분까지도 없애버린다. 국가가 이렇게 몰고 간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가면 좋다는 것은 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화엄종은 비로자나불을 모셔야 되고 천태종은 석가모니불을 모셔야 되는데, 그렇게만 하지 못하고 산신각이든 뭐든 다 받아들여야 하는 사찰경제의 문제에 봉착한 것이다. 그런데 경제적 여건이 되지 않으니 그 많은 신앙체계를 어떻게 다 수합하느냐가 문제가 되었다. 그래도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끝까지 버틴 게 뭐냐면, 바로 '한 건물 안에는 한 부처님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어려우면 한 건물 안에 부처님, 보살님 다 모시면 될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극락전 따로, 대웅전 따로, 심지어 문수전, 관음전도 따로 있었고, 산신각마저도 비교적 작은 형태지만 따로 있었다. 왜 그랬을까.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이렇게는 안 되지만 되면 무슨 문제가 생기는가. 바로 우주를 충돌시키는 문제가 생긴다. 그것은 우주를 파괴하겠다는 거나 마찬가지인 거다.
이런 측면에서 제가 현대사찰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만불전이다. 중앙에 큰 부처님을 모시고, 그 옆에 여러 부처님들을 모아놓은 것이 정말 불교적 공간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서구에서 들어온 극장식 공간일 뿐이고, 그곳에는 하나의 중심이 명확하게 서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 불상들 싹 치워버리고 십자가 갖다놓으면 교회가 되는 공간이다. 이건 정말 심각한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불교가 이런 거대한 세계관을 갖고 있었는데, 이런 공간적 문제를 어떻게 현대화시키느냐가 불교건축의 과제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중심이 여러 개라고 보면 이 사이사이가(건물 사이사이? 또는 영역과 영역 사이?) 매우 중요하게 된다. 이것을 어떻게 연결시키는가 하는 네트워크의 문제가 굉장히 중요하게 되는 것이다. 저는 이 부분에서 건축의 판가름이 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각각 중심을 갖는 공간 하나하나는 정형화되어 있다. 그래서 이 공간을 디자인하기 보다는 이 공간과 공간의 사이를 디자인하는 것들이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 공간과 공간 사이를 어떻게 디자인하느냐에 따라서 좋은 사찰이 되는지가 결정될 것이다. 이러한 공간들의 사이사이가 잘 엮여지면 집단적 아름다움이 돋보이게 된다. 불국사는 하나의 건물이 아름다운 게 아니라 숲과 계단과 회랑, 누각 등이 어우러져서 집합적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불국사 이후로 많은 사찰들이 이런 것을 잃어버렸다. 특히 조선시대 사찰들은 이런 것을 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불전 하나 장엄하는 데 치중했다.

3) 라말려초 실상사의 집합적 구성

제가 최근에 실상사 발굴보고서를 받았다. 실상사처럼 역사가 오래된 사찰은 진짜 추적하기가 어렵다. 파헤치고 또 들어가고 들어가도 건물이 몇 개씩 겹쳐 있어서 한 천년에 걸쳐서 이게 어떻게 변했는지를 뚜렷하게 알기는 대단히 어렵다. 반면에 황룡사 같은 경우는 고려 중기에 폐사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발굴을 하면 그대로 나온다. 그래서 그 당시의 모습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실상사 같이 생명이 오래되고, 지금까지도 불사가 활발하게 진행되어온 곳은 건물들이 있다가 없어지고 있다가 없어지고 그랬기 때문에 어느 시점에서 절의 형태가 어떠했는가를 알기는 매우 힘들다.
그렇지만 여러 가지 가능성을 종합하여 구산선문 초창기의 모습을 추정해본다면 대략 이런 모습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건 단지 추정이기 때문에 똑같지는 않을 것이다.
먼저 금당영역이다. 중문-쌍탑-금당-회랑으로 연결되는 부분이다.
여기가 금당영역이다. 안에 새까만 것은 현재의 건물이다. 원래는 이보다 컸다는 것이고, 칠을 많이 한 부분이 근거가 확실한 건물지이고, 점선으로 그린 것은 제가 추정을 해본 것이다. 실상사에는 이렇게 쌍탑이 있는 금당영역이 하나 있다.
두 번째는 뒤쪽에서 발굴된 강당영역이 하나 있는데, 강당-익랑-회랑이 있다.
세 번째는 당시에도 약사전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현재 약사전이 있는 곳, 즉 동쪽에 있는 동금당지에 또 하나의 영역이 있다. 철불전-회랑이 있는 영역이다.
네 번째는 현재 극락전 쪽에 부도전 영역이 있다.
이 외에도 앞쪽 뜰에 수없이 많은 승방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야 몇 백 명 몇 천 명이 기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실상사를 예로 보면 애초에 구산선문 당시에도 영역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영역들 또한 아까 불국사의 예처럼 하나를 떼어내도 절이 되는 구조를 이미 갖고 있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은 밝혀진 상황만을 말씀드리는 것이고, 제가 보기에는 아마 여기에도 영역이 하나 있을 것 같다.

지금 실상사의 모습을 보면 이러한 영역의 구분이 무너진다. 예전의 모습에서는 우주를 만들었다는 영역성이 대단히 강하게 나타나는데, 지금의 실상사는 그렇지 못하다. 산발되어 있고 그냥 점적으로 툭툭툭 펼쳐져 있을 뿐이다. 건물과 건물 사이, 건물과 탑 사이의 관계에서 아까 도식에서 보여드렸던 우주관에 근거한 관계성은 찾아보기가 대단히 어렵다. 아마도 조선시대의 험악할 정도로 힘들었던 상황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기록을 보니 19세기에 이 근처 유생들의 방화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굉장히 박해받던 상황에서 이 정도가 남게 된 것 같다.

마지막으로 목탑지가 있는데, 기록에는 고려시대 목탑이라고 되어 있다. 구산선문 초기에는 없었다가 고려시대에 들어와 만들었다는 이야기인데, 왜 여기에 있는지 현재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니까 고려시대에는 고려시대 나름대로 어떤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만 하고 있다. 


5. 복원과 창조

1) 重創의 개념

앞으로 실상사에서 불사를 하신다면 일정한 부분은 복원을 해야 하고, 일정한 부분은 창조를 해야 할 터인데, 제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중창이라는 개념이다. 중창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해주셨으면 좋겠다. 복원이라는 개념자체도 버렸으면 한다. 재건이나 신축이나 재개발과 같은 아파트 용어는 더더욱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 중창이란 무엇인가. 화엄사 사진을 보면서 말씀드리겠다. 노고단을 사이에 두고 실상사가 북쪽에 있다면, 화엄사는 지리산의 남쪽에 있다. 아시다시피 화엄사는 원래 화엄종 사찰이었다. 화엄종 사찰이었을 때는 이 각황전만 있었다. 이 각황전 건물 이전에는 이 자리에 장육전이라는 이 건물보다 훨씬 큰 3층 건물이 있었다. 의상대사가 새겼다는 화엄석경이 이 장육전에 있었다.
그러면 중창이란 무엇인가. 화엄사를 예로 들어서 말씀을 드리겠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것은 화엄사의 역사를 알아야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화엄사는 본래 화엄종 사찰이었다. 그러다가 후삼국 호족시대, 그 격랑의 시대에 줄을 잘못 섰다. 후백제의 견훤편에 선 것이다. 북악파인 부석사는 왕건의 편에 섰고 남악파인 화엄사는 견훤의 편에 섰다. 지리적으로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 결과로 화엄종이 둘로 쪼개졌고, 화엄사는 화엄종으로서의 주도권을 잃어버리고 이후 북악파로 흡수되어 버렸다.
 그 후 화엄사의 주인이 천태종으로 바뀌게 된다. 그런데 종파가 천태종으로 바뀌면서 문제가 생겼다. 화엄종일 때 이 건물에 모신 비로자나불이면 되었다. 그런데 천태종은 법화경을 소의경전으로 하고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종파다. 그러니 요새 말로 리모델링을 해야 하는데, 좋은 방법은 비로자나불을 들어내고 새로 석가모니불을 입주를 시키고 현판을 대웅전으로 고치는 것과 과거의 흔적을 아예 없애버리고 새로운 대웅전을 만드는 것이 있다. 그런데 화엄사는 이 두 가지 방법을 채택하지 않고 대웅전을 별도로 짓는다. 각황전 쪽의 축대는 신라말 경에 만들어진 것이고, 새로 쌓은 대웅전의 축대는 고려 초의 것이다. 한 150년의 사이를 두고 이 축대가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다. 결국 화엄사는 두 개의 중심을 갖게 된다. 비로자나불을 모신 각황전과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 즉 화엄종 시대의 중심과 천태종 시대의 중심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런데 각황전의 규모가 주불전으로 해야 하는 대웅전에 비해 훨씬 컸다. 화엄사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가.
먼저 가람의 주 진입 방향을 현재와 같이 바꾸었다. 원래는 현재 승방이 있는 동쪽 계곡에서 올라오던 것을, 지금과 같이 계곡을 타고 남쪽에서 오르도록 변경했다. 이렇게 되면, 위치상으로 대웅전이 가람의 중심이 되게 된다. 우리가 화엄사 본 마당에 오르려면, 보제루의 동쪽 끝을 돌아 마당에 오르게 되는데, 여기서 보여지는 광경이 바로 화엄사의 주된 표정으로, 이상한 현상을 목격하게 된다. 커다란 각황전과 작은 대웅전의 크기와 높이가 거의 같게 보인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약간의 트릭이 있다. 즉, 본 마당의 입구로부터 각황전은 멀리 떨어져 있고, 대웅전은 가깝다. 또한, 본 마당은 가자의 석단을 둘러 조성하고, 석단 위에 건물들이 배치되는데, 각황전은 석단에서 멀리 물러앉았고, 대웅전은 가깝게 다가앉았다. 이러한 건축적 장치를 통해서 각황전과 대웅전은, 그 절대적 크기와는 무관하게, 상대적으로 같은 크기로 보이며, 두 개의 동등한 중심 전각의 위상을 같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 기법이 한 가지 더 보태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화엄사가 본래부터 쌍 탑이었다고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다. 화엄사는 원래부터 쌍 탑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 원래는 일 탑식 가람이었다.  장육전 앞에는 一자 석축만 쌓고, 그 아래 마당에 하나의 탑을 세웠다. 지금의 화엄사 서탑이다. 이처럼 창건 시에는 1금당 1탑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웅전을 만들면서 탑을 하나 더 만들었다. 이 두 탑의 양식을 비교해보면 거의 200년 차이가 난다. 왜 이렇게 했을까.
 법화신앙계 가람은 흔히 쌍 탑식 형식을 선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컨대, 불국사 대웅전 앞마당의 다보탑과 석가탑은 <묘법연화경>에 나오는 석가모니불과 다보여래를 형상화 한 것으로, 법화신앙의 중요한 장면을 재현한 것이다. 화엄사는 기존의 서탑과 나란히 동탑을 세워 쌍탑 형식을 완성했다. 현재 본 마당에 있는 쌍 탑은 동시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서탑이 단독으로 세워진 후, 150년 후 쯤에 동탑이 추가된 것이다. 자세히 비교하면 두 탑의 차이를 알 수 있다.
대웅전 앞에 새로 추가된 동탑은 자연스럽게 대웅전 소속이 되어, 각황전-서탑 / 대웅전-동탑의 구도가 완성되고, 기존의 1탑1금당제의 화엄사찰의 건축적 형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대웅전+쌍탑제라는 법화신앙의 가람형식을 성공적으로 구현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란히 선 쌍탑 때문에 대웅전이 중심으로 들어온다. 평면도 상에서는 그것을 잘 느끼지 못하는데 직접 올라가면서 바라보면 그렇게 보인다. 이런 게 바로 중창이다. 있는 것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과거의 질서에 쫒아가지 않았다.
만약 과거의 질서를 쫓아갔다면 대웅전이 여기에 있어야 한다. 축이 이렇게 있었으니까. 각황전을 중심으로 여기에 이렇게 세우면 되는 것이다. 아주 쉬운 방법이다. 그런데 화엄사는 굉장히 어려운 방법을 썼다. 직각으로 틀어서. 원래 기단이 여기에 이렇게 있었다. 여기에 기단을 덧붙인다. 덧붙이면서 탑을 한 개 더 만든 것이다. 이런 게 바로 중창이다. 더 나아가 둘 사이가(각황전과 대웅전 사이가?) 이상하니까 여기에는 또 이 방법을 쓴다. 여기에 리듬을 주는데 내려왔다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면서 그 사이를 이 건물들이 연결해주는 것이다.
저는 화엄사 앞마당에 설 때마다 건축가로서 정말 놀랍고 감사하다. 화엄종 사찰에서 천태종 사찰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무려 200년~300년의 차이를 두고 옛것을 살리면서도 새로운 질서를 다시 만들었다. 생태계를 다시 만든 거다. 이런 게 진정한 중창이다. 만약 이전의 질서를 그대로 쫒아갔다면 그것은 중창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맹목적 복원은 중창이 아니다. 새로운 질서를 창조해나가는 것이 진정한 중창의 정신이다. 기존의 틀을 쫓아갔다면 중창이라고 보기 어렵다. 불교적 시간의 개념으로 보면 현재는 과거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미래의 원인이 된다. 현재가 없기도 하고, 실상이 아닐 수도 하지만 미래의 원인이라는 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 되는 것이다.

2) 복원할 부분 :

그러할 때 실상사에서 복원을 하신다면, 복원할 부분은 보광전 영역, 약사전 영역이 되지 않을까 싶고, 목탑지는 더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복원한다고 하여도 보광전 등 고민할 문제들이 많기는 하다. 어떻든 복원을 한다면 이 정도 영역이 되겠는데, 그러면 나머지 부분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실상사 불사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3) 창조할 부분 : 기능 군들

창조할 부분을 기능 군들이라고 생각해봤다. 미래를 창조한다는 입장에서 보면 실상사가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가의 입장에서 말씀드리겠다. 현대적 종교의 기능으로 명상센터, 경전학교와 같은 역할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것도 단순히 명상센터가 아니라 농장학교라든가 귀농학교라든가 치유센터라든가 하는 지역적 기능들로 연결되는 지점들이 미래를 창조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다. 더불어 승방들이 확대된 재가불자들의 수행 공간, 객사, 재가불자센터와 같은 역할들도 앞으로 기대해보는 것들이다.


6. 실상사는? 

마지막으로 요약정리를 하겠다.
먼저 상징과 추상이 동시에 존재하는 불사. 과거의 보존과 미래의 창조가 병행되어야 한다. 둘째, 일상성 속에서 파격의 양식을 대단히 소중하게 생각하는 불사. 이를 위해서는 상식에 바탕을 둔 개성과 창작이 가능해야 한다. 셋째, 지역성 속에서 새로운 생명을 가꾸는 불사. 지역환경에 부응하며 선도할 수 있는 조형이 되어야 한다. 이때 지역적 환경에 부응만 해버리면 매몰될 수 있기 때문에 지역적 환경을 선도해나갈 수 있는 강력한 추진체가 필요하다. 넷째, 다즉일일즉다(多卽一一卽多)의 집합성이 구현되는 불사. 전체가 부분이 되고 부분이 전체가 되는 세계가 구현될 수 있도록 실상사라고 하는 가람 안에 크고 작은 가람들이 조화롭게 있었으면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중창의 정신을 정말 창조적으로 살리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제가 얕은 생각 속에서 유추해본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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