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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법회 | 삼귀의와 반야심경 2강 -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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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실상사 작성일16-05-23 17:59 조회1,6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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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4.17. 보현법회<삼귀의와 반야심경> 제2강

  

깨달음의 실천, 반야바라밀


도법스님 (실상사 회주)

 

안녕하세요? 바람이 상당히 사납네요. 바람이 부니까 어떤가요?
좋습니까? 안 좋습니까? 정신없다고요?

 

조금 전 함께 부른 노래에 ‘부처님처럼 정진하자’는 가사가 나오던데, 여러분은 부처님처럼 정진한다고 하면 어떤 장면이 떠오르는가요? 아마 대부분 불교를 하는 분들은 6년 고행의 장면이 떠오를 겁니다. 구체적 모습으로는 갈비뼈가 앙상한 고행상일 것이고요.

붓다의 모습이 아주 강력하게 우리를 압박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아주 무서울 정도로. 대표적인 것이 6년 고행입니다. ‘부처님의 정진’하면 목숨을 건 6년 고행이 떠오르고, 그림으로는 갈비뼈가 앙상한 고행상이 떠오릅니다. 6년 고행이라는 말을 들으면, 고행상을 보면 압박을 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내 경우는 ‘나도 저렇게 정진해야 되는데 나는 도저히 저렇게는 못해’하고 압박과 절망감을 느낍니다. ‘나 같은 업보 중생은, 나 같은 하근기(下根氣)는 도저히 저렇게 못해. 불가능해.’ 하고 부처님처럼 못하는 것 때문에 부끄럽고 죄송스럽고 절망스럽고 그렇지요. 아마 대부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역사의 붓다 일생을 보면 크게 두 번의 출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세속을 버리는 출가입니다. 붓다는 온 세상이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세속을 버리고 출가를 합니다. 온 국가와 민족이 만류함에도 불구하고 출가를 하죠. 당신을 낳고 길러준 부모와 형제, 당신을 사랑했던 아내와 아이, 또는 친구와 이웃들, 그리고 약소국이었기 때문에 늘 강대국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싯다르타에게 기대를 걸었던 백성들, 온 나라가 출가 하면 안 된다고 울고불고 붙잡고 만류했습니다. 그래도 안 되니까 나갈 수 없도록 성문을 지킵니다. 그렇지만 끝내 기어이 출가를 합니다. 그 이유는 당신이 사랑하는 부모, 형제, 당신이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당신이 사랑하는 온 나라 국민들, 더 넓게는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고 있는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 ‘그들로 하여금 진정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길을 찾기 위해 나는 반드시 가야 된다’고 말하며 떠납니다.

 

번째는 수정주의와 고행주의라는 전통적인 진리를 버리는 출가입니다. 그때도 처음처럼 온 세상이 반대하고 비웃고 비난함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버리고 떠납니다. 고행은 길이 아니라고 하며 기어이 버리고 떠나죠. 두 번째 버리고 떠난 것이 바로 수정주의와 고행주의 입니다. “6년 고행은 거룩한 길에 방해된다. 도움 되지 않는다. 그 길은 잘못된 길이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고행은 깨달음의 길이 아니다. 희망의 길이 아니다. 거룩한 길이 아니다. 그 길은 버려야 하는 길이며 절대 가선 안 되는 길이니 절대 가지 말라고 했습니다. 설명을 더하면 그대들이 본받을 것은 깨달음 이전의 향락주의와 고행주의가 아니고 깨달음 이후 깨달음을 실천하는 붓다의 삶이라고 했습니다.

 

붓다가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인들은 ‘부처님처럼 정진한다’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깨달음을 실천하는 붓다의 모습이 아니라 6년 고행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부처나 할 수 있는 일이지 우리는 도저히 못 해’ 하고 주저하거나 물러섭니다. 스스로 업장이 많은 못난 중생, 근기가 낮은 못난 존재임을 한탄하곤 합니다. 바로 이런 점들이 우리를 억압하고 구속하는 모습입니다. 결국 부처를 잘못 알게 되고 불교를 잘못 알게 되고 잘못 알기 때문에 당연히 잘못 하게 됩니다. 아마 세계 불교가 거의 비슷할 거예요. 저도 마찬가지로 수십 년 동안 불교를 그렇게 해 왔습니다.

 

왜 그렇게 되는가를 검토해보면 우리가 쉽게쉽게 생각이나 짐작으로 문제를 다루는 버릇이 있습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말씀을 실제 세밀하게 검토를 하고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안 하고 사는 경향이 많습니다. 습관적으로 그냥 ‘훌륭한 분이 말씀한 것이니까 우리도 그렇게 해야 돼, 어른들이 그렇게 말씀했으니까 그렇게 해야 해. 전통이 또는 경전 내용이 그러니까 그렇게 해야 돼.’하고 대부분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결국 부처가 뜻했던 가르침, 부처가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내용들을 다 놓치게 되는 겁니다.

 

법회 시작할 때 불렀던 노래 가사 속에 부처처럼 정진하는 것이 어떤 내용인지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동’이 바로 부처의 정진 내용입니다. 어쩌면 목숨을 걸고 해야 할 정진 내용은 이 세 마디 말로 요약해도 된다고 봅니다.

바른 생각, 바른 말, 바른 행동을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디서 해야 하겠습니까? 법당일까요? 선방인가요? 인도인가요? 히말라야일까요? 아니면 인적이 끊긴 저 심산유곡인가요? (아니요, 지금 여기요) 그렇죠. 지금 각자가 두 발을 딛고 삶을 살고 있는 현장 그리고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붓다의 깨달음 실천이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붓다처럼 그렇게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삶이 괜찮아진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붓다는 그런 진리를 깨달은 겁니다. 그렇게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하는데 꼭 목숨을 걸어야 되겠습니까? 어떻게 생각하세요? 갈비뼈가 앙상해지도록 목숨을 걸고 해야만 가능하겠습니까?

 

사실 그것은 조금만 정신 차리고 마음먹으면 언제, 어디, 누구나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게 한다는 이야기는 무명이 걷혔다는 이야기예요. 무명을 걷은 다음에 그렇게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렇게 정신 차려서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 자체가 곧 무명이 걷힌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행동입니다. 무명이 걷혔다는 말과 깨달았다는 말은 사실 동전의 양면 같은 말입니다. 무명이 걷혔다는 말은 깨달았다는 말이고, 무명에 덥혀 있다는 말은 깨닫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미혹에 빠져있다는 말이죠.

 

우리의 망상, 우리의 전도몽상에 대해 다시 한 가지를 더 짚어 보겠습니다. 붓다처럼 정진하자고 할 때 ‘6년 고행’을 떠올리는 것은 붓다처럼 정진하자고 하는 본의를 잘못 이해하고 본인 습관의 생각을 덧씌우는 거예요. 큰 스님들이 그렇게 이야기 했으니까, 전통적으로 그렇게 해 왔으니까 하고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게 진짜야? 정말 그래?’하고 스스로 검토 해보지 않습니다. 검토해 보면 그것이 망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잘못 알고 믿는 것을 습관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는 거죠. 간단히 이야기하면 정신 차려서 삶을 살 것인가, 습관에 따라서 삶을 살 것인가, 업력대로 삶을 살 것인가. 주체적으로 삶을 살 것인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붓다는 습관에 따라 기존의 길을 가본 거예요. 기성의 길을 따라 고행수행과 선정수행 즉, 6년 고행을 다 해봤는데 해답이 안나오니 그 길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원점으로 돌아와 주체적으로 자기 방식의 길을 갔더니 문제가 풀리더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최근 한국 사회에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무엇인가요? 아무도 혁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네요. 하하하. (선거요) 그렇죠. 선거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이야기 하죠. 그 혁명을 누가 일으켰습니까. 군인이, 정치인들이, 그렇죠. 시민이 일으켰습니다. 시민의 혁명이죠. 시민들이 민주적인 방식으로 혁명을 일으킨 겁니다.

 

우리는 ‘혁명’하면 무시무시하게 전개되는 무엇을 생각하잖아요. 혁명도 등급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인류 역사의 경험상 가장 수준이 높고 바람직하게 이루어진 혁명은 시민이 민주적으로 일으킨 혁명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우리 한국사회가 사네 죽네, 아우성치고는 있지만 사실 상당히 건강하게, 시민의 힘에 의해 바람직하게 변화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뽑고,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뽑았을 때 사람들은 국민들이 무지몽매해서 그런다며 원망을 많이 했습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예요. 김대중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을 뽑았을 때도 사람들이 무지몽매해서 그랬다고 하는 쪽이 있었습니다. 이쪽은 이렇게 생각하고, 저쪽은 저렇게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 잃어버린 20년 이야기도 나왔죠.

 

그런데 이번은 과거와 달랐던 것 같습니다. 직면한 현상을 잘 봐야만 문제를 제대로 다뤄갈 수 있습니다. 일단은 정부와 여당의 독선과 오만을 국민들이 냉정하게 심판 했습니다. 두 번째는 호남 지역의 주류인 민주당의 변화를 무섭게 요구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양당체제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무섭게 분출했습니다. 양당 정치가 못 쓰겠다하고 탄생한지 석 달 밖에 안 되는 국민의 당을 정당지지 2등으로 끌어 올렸습니다.

 

놀라운 현상입니다. 국민이 참 지혜로웠습니다. 민심이 참으로 지혜롭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매우 절묘했습니다. 누군가가 ‘국민의 승리’라고 했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국민이 슬기롭게 문제를 잘 짚어서 판을 잘 만들어 줬는데 국민의 뜻을 잘 반영하여 잘 할지 못할지는 여전히 남은 과제입니다. 우리가 잘 지켜보고 또 잘 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까지도 해야 하지 않겠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모두 국민의 지혜로움을 가슴에 새겼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 자료를 다 가지고 계신가요? 세 가지 내용을 가지고 만든 것입니다. 하나는 붓다로 살자 발원문(인터넷검색하면 나옴)이고, 두 번째는 인드라망 무늬, 세 번째는 반야심경입니다.

 

(중략)

삼귀의, 반야심경은 일상에서 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적용했을 때 어떤 문제들이 풀리는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삼귀의를 하고 반야심경을 하긴 하지만 형식적인 의식일 뿐 수행의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그리고 실제 삶에 반드시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특별하게 다른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중략)

‘마하’라는 말은 ‘크다’라는 이야기입니다. ‘크다’라고 하면 보통 두 가지를 생각합니다. 규모가 크다, 수가 많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크다는 것은 그런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금강경에서 이야기하는 ‘금강’도 말하고자 하는 바는 비슷합니다. 굳이 설명을 하자면 ‘가장 좋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최고다. 천하를 다 뒤져 보아도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는 뜻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면, 반야심경 제목의 ‘크다’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 살아가는데, 없으면 안 되는 반드시 있어야 되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에 불만 놓아두고 물을 없애 버리면 삶이 가능할까요? 이 세상이 유지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안 되겠죠. 불을 없애고 물만 놓아두면 어떨까요? 마찬가지겠죠? 그렇다면 물의 가치와 불의 가치는 절대적일까요, 절대적이지 않을까요? 절대적입니다. 없으면 안 되는 겁니다.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겁니다. ‘마하’는 이런 의미입니다. 이것이 있어야 만사형통이 된다는 의미인 겁니다. 동서고금 언제 어디에서나 그것은 꼭 필요한 것이다,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가치 있는 것이다, 라는 것을 ‘크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략)

다만, 부처는 늙었지만 그 늙음이 괜찮았습니다. 아팠지만, 죽었지만, 괜찮았습니다. 이 괜찮음을 뭐라고 표현합니까? 그것을 ‘해탈’, ‘열반’이라고 표현합니다. 늙지만 늙음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아프지만 아픔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죽지만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자유롭다고 하면 그것이 해탈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늙지만 늙음 속에서도 편안했다. 아프지만 아픔 안에서도 편안했다. 죽지만 죽음 안에서도 편안했다. 편안하다고 하면 그것을 열반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희망하는 참된 자유로움과 평화로움은 어디를 찾아다닌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재산을 모은다고 권력을 잡는다고 명예를 얻는다고 경쟁에서 승리한다고 해도 결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천하를 엎었다 뒤집었다 해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길은 오로지 자유로울 수 있는 조건, 평화로울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을 때만 우리가 희망하는 자유와 평화는 우리 삶이 될 수 있는 겁니다.

(하략)

*법문내용이 길어 한 페이지에 다 올라가지 않네요. 첨부파일에 전문이 실려 있습니다. 다운받아서 정독하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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