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귀의와 반야심경 4강 - 인생화두, 그 두 가지 물음에 대한 해답 > 법회와 설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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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법회 | 삼귀의와 반야심경 4강 - 인생화두, 그 두 가지 물음에 대한 해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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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실상사 작성일16-09-10 23:12 조회1,35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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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7.17 _ 7월 보현법회 - 삼귀의와 반야심경 강의 (4강)


인생화두, 그 두 가지 물음에 대한 해답


도법스님 (실상사 회주)


(지금까지 배운 것을 복습한 날이 되었어요)

(전략)

초기경전에 보면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나의 가르침은, 나의 진리는 말을 못 알아듣는 사람 빼고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 누구나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말은 복잡하고 어렵지 않다는 이야기죠. 또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 내용대로 하면 즉각 이루어진다. 다음에 이루어진다든지, 먼 훗날 이루어진다든지, 내생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자리에서 즉각 이루어진다. 그리고 정말로 그대로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인지 또 즉각즉각 이루어지는 것인지 바로 증명된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바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증명된다. 이것이 나의 가르침이다. 이것이 나의 진리다.’
(……)
사실 이 내용은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만약 부처님 말씀이 정말 진실이라면 저는 50년 동안 불교를 헛공부했다는 이야기인 거잖아요. 50년을 했는데도 여전히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지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사실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닌 거죠.

수많은 사람들이 경전을 많이 공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말씀에 대해서는 별로 주목하지 않습니다. 주로 무슨 이야기에 주목하는지 살펴봤더니, 지금 여기에서 보통 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 지금은 이루어질 수 없지만 다음엔 이루어질 거야, 하는 것들이더군요. 또는 현실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전생이야기, 내생이야기, 즉 주로 검증불가능한 신비한 이야기들을 좋아합니다. 전생이야기는 확인할 길이 없지 않습니까? 내생이야기도 그렇습니다. 알 수 없는 것들, 확인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굉장히 관심을 많이 갖고 온갖 공을 다 들이는데, 지금 당장 알 수 있고, 지금 당장 실현되고, 지금 당장 증명되도록 하는 데에는 관심을 갖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어리석음들이 사실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

모든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두 가지 물음 - 인생화두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부처님 가르침을 단순화 시켜 이야기하면 두 가지 물음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두 가지 물음입니다. 이 두 가지 물음을 불교에서는 ‘인생화두’라고 합니다. ‘화두를 들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죠? ‘화두를 깨쳐야 한다’는 이야기도 많이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반드시 알고 싶은, 어쩌면 반드시 알아야 할 두 가지 질문이 주어져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질문을 묻고 또 물어서 이것을 최고로 잘 알고 살아간 사람을 사람들은 성인(聖人)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로 잘 알고 살아간 사람을 현자(賢者)라고 합니다. 세 번째로 잘 알고 살아가려고 노력한 사람을 ‘야, 저 사람 괜찮은 인간이야. 멋있게 산 사람이야.’ 이렇게 평가합니다.

그 인생화두는 바로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입니다. 이 두 가지 화두야말로 성자가 될 수 있는 화두이기도 하고, 현인이 될 수 있는 화두이기도 하고, 괜찮은 사람, 훌륭한 사람, 멋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물음입니다.

 (……)

그런데 이 화두를 놓치고 살면, 이 화두를 투철하게 다루지 않고 내팽겨 쳐놓고 살든가, 건성으로 살든가, 아예 묻어 놓고 살든가 그러면 인생이 엉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도, 사회도 모순과 혼란과 고통의 삶이 계속 되풀이 되는 이유가 인생화두를 제대로 붙잡고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교계에서는 인생화두 이름을 ‘이뭣고?’라고 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삶이 괜찮을까?’하는 물음을 투철하게 물으면서 삶을 가꾸어가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뭣고?’ 화두에 대해 반야심경은 무엇이라고 답하고 있는가?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진 다섯 가지 무더기(색수상행식)가 바로 인간의 모습, 나의 모습이다.’라고 답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이 ‘나는 누구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반야심경의 설명이라면, 그 다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삶이 괜찮아지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 반야심경에서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진 다섯 무더기인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몸을 가지고 있고,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생각하고 기억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분명히 있잖아요. 이 다섯 무더기 모두가 엄연히 있지만, 실제로는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면 일체의 고통에서 자유로워진다고 합니다.

“지금 여기 내 몸과 마음이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실체가 없다는 것을 잘 이해하면 죽음, 늙음, 아픔에 대한 불안과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고, 실패에 대한 불안과 공포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 반대로 생에 대한 애정과 집착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있고, 성공에 대한 오만과 자만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있고, 탐욕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

반야심경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떠세요? 실패해도 불안하지 않을 수 있고, 성공해도 오만하지 않을 수 있고, 죽어도 불안하지 않을 수 있고, 늙고 아파도 불안하지 않을 수 있다면 사는 것이 괜찮을 것 같지 않습니까?

인간이 잘못될 수 있는 위험성을 단순화시켜 말하면 성공과 실패입니다. 그런데 실패해도 불안과 두려움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고, 성공해도 오만과 자만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어차피 죽은건데 죽음에 직면해도 괜찮을 수 있고, 어차피 늙는 건데 늙음에 직면해도 괜찮을 수 있다면 그것도 좋지 않겠습니까?

 (……)

반야심경은 내용적으로 대단히 훌륭한 경전이며 인생의 희망입니다. 고통과 불행으로부터 벗어나는 길, 평화와 행복을 실현하는 길을 가르쳐주는 경전이니까 인생의 희망이 아니겠어요? 다만 반야심경이 직접적으로 출세하거나 돈 잘 버는데 도움이 되는 가르침은 아닙니다.(모두 웃음) 또는 싸워서 이기는 데, 경쟁해서 일등하는 데, 도움이 되는 가르침도 아니죠.

사실 성공, 일등, 부자, 명예와 같은 것들을 이룬다고 해서 인생이 행복해지지는 않습니다. 권력이 인간을 행복하게 합니까? 명예가 인간을 행복하게 합니까? 부자가 인간을 행복하게 합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돈 있으면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대단한 착각입니다. 그게 다 어리석은 생각이고 지혜롭지 못한 생각인 거죠.
(……)

부처님은 생각이나 말로가 아니라 실제로 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야 내용이 명료해진다고 이야기 합니다. (법상위에 놓인 컵의 물을 마시고) 제가 지금 물을 마셨습니다. 제가 마신 불이 시원한 물일까요, 따뜻한 물일까요? 시원한 물일지, 따뜻한 물일지 여러분이 알 수 있겠습니까? (스님만 알아요.)

그렇죠. 마셔본 사람만 알죠. 그러면 물을 마신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 물은 시원한 물이야’라고 이야기하면 다른 사람이 이게 실제로 시원한 물임을 알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알 수 없죠. 다른 사람이 알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셔보게 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물을 마셔보면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할까요? 필요 없죠.

반야심경에서 제일 먼저 몸, 물질을 대상으로 삼고 이야기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알 수 없는 무엇을 이야기하지 않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지금 눈앞에 있는 실상을 갖고 이야기함으로써 더 이상 이야기를 안 해도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겁니다. 부처님은 삶의 문제를 이렇게 다루어야 된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대화를 하는 이유는 이야기를 계속하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아도 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소통이 잘 되어 문제가 풀렸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물론이고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은 끝없이 이야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대화를 제대로 못했다, 그래서 문제가 안 풀렸다는 것을 뜻합니다.

삶의 기적을 일으키는 최고의 도구는 대화입니다. 삶의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참선도 아니고, 염불도 아니고, 기도도 아니고, 절도 아니고, 대화입니다. 대화를 잘 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대화를 잘 해서 기적이 일어나는 상황에 대해 내려오는 격언이 있는데, 그게 뭔지 아시죠?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 그렇죠. 말 한 마디를 잘 했는데, 천 냥 빚이 갚아졌다 - 이것이 기적일까요, 아닐까요? 기적이죠? (네!) 물어보나마나죠.

여러분은 모두 참선도 많이 하고 염불도 많이 하고 절도 많이 할 텐데, 어떻습니까, 기적이 일어나던가요? 실제 해보면 언어의 위력이 정말로 대단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안타깝게도 언어의 위력, 불가사의한 언어의 위력, 신비를 일으키는 언어의 막강한 힘을 잘 모릅니다. 여기에 우리의 문제가 있습니다.

언어를 잘 다루면 인생의 짐이 100근일 경우, 60~60근은 저절로 떨어져 나갑니다. 대화를 잘 하면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짊어지고 있는 짐 100근 중에 50근이 떨어져 나가면 어떨 것 같습니까? 당연히 날아갈 것 같겠죠?

그런데 대부분이 언어의 소중함, 언어의 막강한 힘을 몰라서 건성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언어는 잘못 다루면 독이 되고, 잘 다루면 약이 됩니다. 약도 잘 쓰면 약이 되고 잘못 쓰면 독이 되잖아요.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언어를 소중하게 잘 다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의 경우에도 50년 공부를 했어도 잘 안 되는 것으로 볼 때 독으로 작용한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제야 그것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진즉 깨달았으면 누가 ‘큰스님’이라고 불러도 별로 부담스럽지 않았을 것 같은데,(웃음) 그렇게 부르면 여전히 부담스러우니 말이죠. 뭔가 스스로 어설픈 거죠. 떳떳하지 못한 거죠. 이게 다 불교라고 하는 약을 제대로 못쓴 결과 약으로 작용하지 못하고, 독으로 작용했기 때문이죠. 살다보면 이런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이쯤에서 본래부처에 대한 이야기를 가지고 정리를 해보려고 합니다.
이 그림들은 본래부처를 그림으로 그린 것입니다. 본인의 본래면목, 본인의 참모습, 또는 인생의 진면목, 나의 진면목을 경전에서는 본래부처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 일원상은 뭘 상징하는 것일까요? 나의 본래면목, 나의 참모습은 어떻게 생겼는가에 대한 대답이 원상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이 원상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으로는 완전함, 원융무애함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완전하다는 것은 영원, 무한으로 표현됩니다. 시간적으로는 영원한 존재, 공간적으로는 무한한 존재라는 이야기죠.

이 원상은 지금은 원불교에서 주로 쓰고 있는데, 이미 천수백년 전 선불교가 한창 활발발할 때 선사들에 의해 제시된 것입니다. 인생의 진면목, 참사람의 모습, 나의 본래면목을 사람들에게 좀더 사실적으로, 좀더 쉽게, 좀더 명료하게 전달하기 위해 그려진 것이죠.

두 번째 그림은 조계종단을 표시하는 삼보륜입니다.
삼보는 불‧법‧승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이 원상, 즉 인생의 참모습, 본래부처를 잘 알고 살아서 그 삶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불보라고 합니다.
인생의 진면복은 이런 거야, 이렇게 알고 살면 삶이 괜찮아진다고 잘 가르쳐준 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그것이 법보입니다.
그 다음에 ‘나도 부처님처럼 살 거야’라고 뜻을 낸 사람, 또는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 거야’, 이렇게 뜻을 낸 사람, ‘거기에 내 인생을 걸 거야’ 이렇게 생각하고 머리 깎은 사람, ‘그렇게 해서 온 세상 사람들이 인생을 잘 알고 잘 살아서 행복한 사람이 되도록, 괜찮은 사람이 되도록 하는 데, 내 인생의 열정을 바칠 거야’ 이렇게 마음을 내고 머리를 깎은 사람을 출가수행자, 또는 스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집단을 승가라고 합니다. 승가라는 말은 공동체, 집단이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인생을 제대로 알고 살아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하는데 내 인생의 모든 것을 바칠 거야’ 이렇게 마음먹은 사람들의 집단을 승가라고 합니다. 이것이 승보인거죠.

불교의 역사는 원상의 내용을 내 삶으로 살고 또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삶으로 살도록 하고 또 그것이 가능하도록 끊임없이 모범으로 보여주고 명료하게 설명하고 알려준 역사입니다. 영원과 무한의 내용을 가지고 있는 인생의 진면목을 잘 알고 살아가도록 하는 역사를 만들어 온 것이 불교 역사인데 그렇게 인생의 진면목을 잘 알고 살아가는 역사를 만들어 온 집단임을 나타내기 위해 삼보륜이라는 그림이 만들어진 겁니다.

현재 이 그림들의 소유권을 이야기하자면 일원상은 원불교 것이 되었고 삼보륜은 불교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진리라고 하는 것은 누구의 소유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인의 것이고 만인에게 주어지고 만인에게 공평하게 주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의 소유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것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만들어 진 것이 세 번째 그림, 화엄인드라망 무늬입니다. 내용은 같은 것인데, 이 그림은 더 구체화되어 있습니다.

이 그림을 가지고 내 인생의 참 모습과 내 인생의 거짓 모습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래야 어떤 것이 참 모습이고, 어떤 것이 거짓 모습인지 알지 않겠습니까? 이 그림을 보면 제일 아래가 사람입니다. 또 각자 자기 자신이기도 합니다. 오른쪽에는 네 발 달린 짐승, 왼쪽에는 새와 물고기. 사람 머리 위에 붙어있는 것은 숲, 나무, 식물. 그리고 해와 달. 우주 삼라만상을 아주 단순화 시켜 사실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인생의 진면목, 본래부처의 참 모습, 내 인생의 참모습을 그림으로 보고 알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온 우주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그물의 그물코처럼 이루어져있다는 겁니다. 그물의 그물코는 어떻습니까? 전부 연결되어 있죠. 분리되면 그물코인가요, 아닌가요? 분리되면 그물코로서의 생명이 끝납니다. 온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전부 그물의 그물코처럼 연결되어 있고 서로 의지해 있고, 서로 영향과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존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여기 사람이라는 그물코, 나라고 하는 그물코를 쫘악~ 들어보면 어떻게 될까요? 전체가 따라오게 되죠. 나라고 하는 그물코와 나 아닌 다른 그물코들은 결국 한 몸이겠습니까, 다른 몸이겠습니까? 분리되어 있지 않으니까 한 몸이죠. 그러면 내가 곧 그물 전체고 전체가 곧 나라는 것이 말이 될까요, 안 될까요?

손가락이 다섯 개잖아요. 한 손에 손가락이 다섯 개입니다. 손가락으로 보면 다섯 개가 맞습니다. 한 손으로 보면 어떻습니까? 하나죠? 그 때 이것을 다섯 개라고 해야 할까요? 다섯 개라고 해야 할까요? 굳이 말해야 한다면 하나이기도 하고, 다섯이기도 하다, 하나도 아니고 다섯도 아니다, 라고 말하게 되죠. 그렇게 설명을 해야 중도적으로 설명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손의 다섯 손가락인데 엄지손가락 하나를 들면 전체가 따라옵니다. 전체가 따라오니까 온통 엄지손가락 하나네, 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새끼손가락을 쫙 끌어당겨도 전체가 또 따라오잖아요. 전체가 따라오니까 온통 새끼손가락 하나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겁니다.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표현과 설명이 달라지지만 내용으로는 같은 것입니다. 손이라는 한 물건을 놓고 볼 때 하나라도 단정할 수도 없고 다섯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있는 사실을 사실대로 표현하려고 할 경우, 어쩔 수 없이 다섯이기도 하고 하나이기도 하다, 한 손이기도 하고 다섯 손가락이기도 하다, 또는 하나도 아니고 다섯도 아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중도의 사고방식을 반야심경에서는 ‘색증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리송한데 실제 물건을 놓고 이야기해보면 다섯이기도 하고, 하나이기도 하다, 하나이기도 하고, 다섯이기도 하다, 라는 설명이, 있는 사실을 가장 충실하게 설명하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문제를 중도적으로 다루어야 문제가 잘 풀려 더불어 사는 길이 열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중도적으로 문제를 다루도록 배우고 익히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전혀 엉뚱하게 생각하고 접근하게 되는 거죠.

이렇게 사실을 사실적으로 확인해보면 ‘내가 곧 우주이고, 우주가 곧 나다.’,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가 하나다.’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죠. 부처님 말씀하신 대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법성게>에 ‘일중일체다중일 일즉일체다즉일(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즉 ‘하나 안에 일체가 들어있고 여럿 안에 하나가 있으며 하나가 그대로 일체이고 일체가 그대로 하나이네’라는 구절이 있는데, 바로 이러한 의미입니다.

하나가 곧 전체요, 전체가 곧 하나다. 내가 곧 우주요, 우주가 곧 나다. 이것이 인생의 진면목입니다. 내가 곧 우주고 우주가 곧 나임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을 화엄경에서는 인드라망이라고 표현합니다. ‘망’이 그물이라는 뜻이예요. 현대과학에서는 생명그물이라고 표현합니다. 모두 그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생명은 그물로 이루어져 있다고 증명해주는 그림이고 설명입니다.

지금 여기 자신을 놓고 검증해볼까요? 진짜 나의 참모습을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우주가 곧 나라고 알고 계십니까? 아니면 아래의 사람만 떼어내어 이것만 나야, 하고 알고 믿고 있습니까. 우리는 대부분 사람만 떼어내어 이것이, 이것만이 진짜 나야, 하고 그렇게 알고 믿고 있습니다. 분리시킬 수 없는 것을 분리시키고 거짓된 모습을 진짜라고 알고 믿고 있는 겁니다.

거짓된 것을 진짜라고 아는 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반야심경에서는 전도몽상에 빠졌다고 이야기합니다. 또 다른 표현으로는 무명에 사로잡혔다고 합니다. 거짓을 진짜로 아는, 이 전도몽상, 무명으로부터 깨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있는 사실 그대로의 참모습을 알면 무명과 전도몽상으로부터 저절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아래의 사람만을 떼어내어 ‘이것만 사람이야, 이것만 나야’라면서 거짓된 모습을 참모습이라고 철석같이 믿으며 살아왔습니다. 전도몽상에 사로잡힌 삶, 무명에 빠진 삶을 살고 있는 거지요. 무명 또는 전도몽상에 빠지거나 사로잡혀 살게 되면 삶은 항상 갈등과 다툼이 되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갈등과 다툼이 되풀이 되면 삶이 편안하겠습니까? 인간다울 수 있겠습니까? 여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따뜻할 수 있겠습니까? 절대로 안 되죠. 당연히 늘 불편하고 불안하고 아프고 슬프고 힘들죠. 그것이 고통스럽고 불행한 삶이죠.

만일 내가 곧 우주고 우주가 곧 나라면 내가 영원한 존재이겠습니까, 아니겠습니까? (영원한 존재요) 무한한 존재이겠습니까, 아니겠습니까? (무한한 존재요) 그렇지요. 그렇다면 본인이 영원한 존재이고 무한한 존재라면 괜찮은 존재일까요, 아닐까요? (괜찮은 존재요) 그렇죠. 틀림없이 물어보나마나 괜찮은 존재입니다.

사실 반야심경도 포현과 설명이 좀 달라서 그렇지 대부분 지금의 이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있는 사실 그대로의 참모습이 ‘내가 곧 우주요, 우주가 곧 나’인데, 그 내용을 다른 개념으로는 뭐라고 표현했을까. 일반적으로 알려진 적절한 개념을 찾으면 ‘일심동체’, ‘동체대비’가 아닐까 싶습니다.

내가 곧 우주요, 우주가 곧 나라는 것은 한 마음이고 한 몸이라는 뜻이잖아요.
내가 내 아픔에 대해 관심을 갖고 또 정성을 다해 아픔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누구나 다 잘 하죠. 내가 지금 아픈데 안 할 수가 없잖아요. 내 아픔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내 아픔에 대해 지극정성을 다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합니다. 인지상정이죠.

대부분 우리는 거기에 머물러 있거나 거기에 매몰되어 있거나 거기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실상을 확인한 것처럼 실제 우주가 곧 나고 내가 곧 우주이기 때문에 온 우주가 한마음 한 몸이라면 어떻겠습니까. 달리 표현하면 온 우주가 곧 내 마음이고 내 몸이다, 그것을 우리는 일심동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일심동체라면 어떻습니까? 누군가의 아픔과 누군가의 슬픔에 대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내 아픔에만 골몰하거나 내 아픔에만 매몰되는 것은 거짓된 모습을 참모습이라고 잘못 알고 믿고 살아오는 가운데 형성되어진 업력의 모습입니다. 무지와 착각과 집착으로 이루어진 업력을 녹여내야 합니다. 자기중심의 이기적 관점에서 삶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은 참모습을 모르고 거짓모습을 참모습이라고 알고 믿고 살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겁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생각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는 한은 그 삶이 늘상 싸움판으로 펼쳐집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참모습을 모르고 거짓된 모습을 참이라고 알고 살기 때문입니다. 참모습은 일심동체입니다. 너는 너고, 나는 가가 아닙니다. 너 없는 나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나없는 너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졌다는 표현은 바로 그 말입니다. 그 내용을 그림으로 설명해보겠습니다.

모두가 다 내 생명은 내 안에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내 생명은 내 안에 따로 있고 네 생명은 네 안에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의 모두가 그렇게 생각활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 확인해보면 어떨까요? 우리의 지식과 믿음이 맞다고 증명되겠습니까, 틀렸다고 증명되겠습니까? 사실 확인해보면 틀렸다고 증명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믿고 있는 것은 대부분 거짓을 참이라고 잘못 알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이나 말이나 글로는 네 목숨은 네 안에 따로 있고 내 목숨은 내 안에 따로 있다고 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사실을 확인해보면 네 목숨은 네 안에 내 목숨은 내 안에 따로따로 있는 그런 생명은 없습니다. 그것은 그냥 생각일 뿐이고 말일 뿐이고 글일 뿐이지 실제로 따로 있는 그런 생명은 없습니다.

실제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봅시다. 저 아득히 멀리 태양이 있습니다. 태양하고 나하고의 관계를 끊어버리면 내 생명이 괜찮겠습니까? 부처님 생명은 어떨 것 같습니까? 하느님의 독생자인 예수님은 어떨까요? 그 누구도 별 수 없습니다. 태양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순간, 우리 삶을 불가능합니다. 만일 실제 내 생명이 내 안에 따로 있는 것이라면 저 멀리 있는 태양이 없어도 괜찮아야 맞잖아요.

불교인들은 주로 내면을 많이 강조합니다. 불가사의하고 신령스러운 무엇이 내면 어딘가에 있다고 그것을 찾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정말 그러한지 한 번 확인해봅시다.
바깥이 있는 내면이 있을 수 있을까요? 한 여름의 무더위는 내 안에서 벌어지는 일입니까,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입니까? (바깥이요)

그런데 왜 내가 더울까요? 어떻습니까? 바깥이 더워도 내 안은 덥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죠?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 뭔가 바깥과는 다른 무엇이 내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고들이 모두 연기적 사고방식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바깥이 없는 내면, 바깥과 분리된 내면은 없습니다. 너 없는 나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금방 확인했듯이 태양이 없는 내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풀이 없는 내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흙이 없는 내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사실대로 확인해보면 결국 인생의 참모습은 일심동체로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일심동체의 내용을 화엄경에서는 동체대비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지식이 아니라 있는 사실 그대로인 일심동체, 동체대비로 세상을 바라보며 그 참모습대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내가 아닌 누군가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보게 됩니다. 누군가의 아픔이 내 아픔처럼 인식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연히 그 아픔을 해결하기 위해 지극정성을 다하게 되겠죠. 그렇게 하면 누구에게 좋을까요? 우선 자기 자신이 좋습니다. 다음으로 상대에게 좋습니다. 얼른 보면 상대가 먼저 좋을 것 같죠? 그런데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여기 캄캄한 어둠 속에 친구가 서있다고 해봅시다. 어딘가를 가야 하는데 어두워서 못 가고 있습니다. 그때 내가 친구를 돕기 위해 촛불을 밝혔습니다. 촛불을 밝히는 순간 빛이 누구에게 먼저 비춰지겠습니까? 나를 먼저 밝히게 됩니다. 그 다음에 상대를 비춥니다. 이와 같이 인생을 참모습대로 살면 자신과 상대방,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유익합니다.

누군가의 아픔에 대해 진실 되게 관심을 가지고 애정을 가지고 정성스럽게 그것을 다루게 되면 우선 내가 편안해 집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면, 싫어하면 내가 편안합니까? 절대 안 편하죠?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갖고 그 아픔을 해결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을 진지하게 하면 일단 내가 편해집니다. 내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분명 스스로도 뿌듯할 겁니다. 사람들도 좋아할 겁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내 자신이 편안해지고 마음이 따뜻해지고 너그러워지는 것, 이것이 무슨 현상인지 아십니까? 전도몽상의 삶으로 얼어붙었던 업력의 얼음덩어리, 미움의 얼음덩어리, 분노의 얼음덩어리, 탐욕의 얼음덩어리, 증오의 얼음덩어리, 이기심의 얼음덩어리가 녹아나는 겁니다. 우리 불자들은 업력을 소멸해야 한다고 계속 이야기하는데 업력을 소멸하는 길은 다른 길이 없습니다. 누군가의 아픔에 대해 진실 되게 관심을 가지고 애정을 가지고 그 아픔을 해결하기 위해 정성을 다해 마음 쓰고 말을 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자비를 실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는 동체대비의 마음을 실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따뜻한 마음만이 얼어붙은 업력을 녹여냅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가 참선을 하고, 기도를 하고, 염불을 하는 것이 다 선하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살기 위해 하는 겁니다. 만약에 참선을 하지 않거나 절을 하지 않거나 염불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정말 누군가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함께하고 관심을 가지고 애정을 가지고 해결하기 위해 한결같이 노력을 하면 그것 자체가 최고의 참선이 되고 최고의 기도가 되고 최고의 염불이 되고 최고의 절이 됩니다.

왜 그런가? 얼어붙은 업력의 얼음덩어리가 녹아내려 삶이 편안해지기 때문입니다. 얼음이 녹으면 어떻게 됩니까? 유연해집니다. 따뜻해집니다. 여유로워집니다. 내가 그만큼 따뜻해졌다, 너그러워졌다, 선해졌다, 여유로워졌다는 것은 얼어붙은 업력이 녹아났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은 ‘인생의 참모습이 이렇게 생겼어, 그렇게 알고 실천하면 괜찮게 돼’하고 알려주는 경전입니다. 불교교리를 갖고 설명하다 보니까 접근하기가 복잡하고 어려운데 단순화하면 인생의 참모습을 알고 참모습대로 살면 괜찮게 된다는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참모습을 잘 알 수 있도록 표현한 것이 이 그림입니다. 이 내용대로 잘 알고 사는 삶을 불교용어로 ‘동체대비의 삶’이라고 할 수 있고, 그 사람을 온전하게 사는 사람이 부처님입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내용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참모습, 본래부처가 연기로 이루어진 존재,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진 존재, 일심동체의 존재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일심동체이기 때문에 어떤 문제도 내 문제가 아닐 수 없고, 어떤 아픔도 내 아픔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너무나 당연하게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그 아픔을 치유하고 문제를 풀어내게 됩니다. 그렇게 해야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우리 모두가 좋아집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의 참모습을 제대로 알고 제대로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불교를 하는 이유도 바로 그렇게 살려고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촛불을 밝히면 누구한테 좋던가요? 피차가 다 좋죠. 나도 좋고 너도 좋고. 그렇게 되는 것을 자리이타(自利利他)라고 합니다. 다른 표현으로는 법대로 산다고 합니다. 법대로 살면 나도 좋고 너도 좋습니다. 반면 법대로 안 살면 나에게는 좋은데 상대방에게는 안 좋다든지, 상대방에게는 좋은데 나한테는 안 좋은 상황이 생겨납니다. 실상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리가 먼저고 이타가 나중이라거나 이타가 먼저고 자리가 나중이라 논란을 벌입니다.

적재적소에 맞게, 너한테 적용해야 할 때는 너한테, 나한테 적용해야 할 때는 나한테 적용하는 것이 지혜로움입니다. 법의 정신으로 적재적소에 맞게 하면 너한테 적용했을 경우라 하더라도 너도 좋고 나도 좋게 되고, 나한테 적용했을 경우라도 너도 좋고 나도 좋게 됩니다.

이것이 인생의 진면목을 제대로 알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장담컨대 틀림없이 즉각즉각 증명됩니다. 물을 마시면 더운 물인지 차가운 물인지 바로 알 수 있듯이 증명됩니다. 반여심경에서 이야기하는 내용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 바로바로 증명됩니다.

바로바로 증명된다는 것을 <법성게>에서는 무엇이라고 표현하는가.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 말한 대로 해봐. 그 말이 맞는지 안 맞는지 바로바로 증명이 돼. 해보면 알아. 왜? 참된 말은 틀림이 없으니까.’ 이런 이야기죠.

아까 살펴보지 않았습니까? ‘내 생명이 따로 있어’라고 알고 믿었는데, 사실을 확인해보니 유명무실한 말, 즉 말로만 되고 실제로는 없는 빈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반대로 ‘내 생명은 우주와 한 마음, 한 몸이야’하는 말은 확인해보니 유명유실한 말, 말 그대로 진실이었습니다. 사실을 확인해본 결과 바로바로 증명이 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 확인하면 바로 증명되도록 가르쳐주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증명하는 방식으로 경전공부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냥 지식만 쌓고 있는 겁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증명되도록 다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하고 또 해도 어려워지고 하고 또 해도 복잡해지고, 아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는 것 같기도 한 상태가 되는 겁니다.

오늘 새로 오신 분들이 많아서 이 인연을 좀 더 소중하게 했으면 좋겠다 싶어 이 이야기를 다루다 보니 좀 길어졌습니다. 중도의 관점에서 우리가 인생을 잘 살피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또 우리가 가장 많이 외우는 것이 반야심경인데, 반야심경을 좀 더 실제와 연결시켜 공부를 하면 인생의 짐을 가볍게 하는데, 삶을 좀 더 홀가분하게 사는데 훨씬 도움이 됩니다. 불교를 중도적으로 공부해서 지금 당장 본래부처의 삶을 사는 불자가 될 수 있도록 함께 정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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