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안거결제법문] 간화선, 팔만사천법문을 압축하고 녹인 용광로 > 법회와 설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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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법문 | [하안거결제법문] 간화선, 팔만사천법문을 압축하고 녹인 용광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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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실상사 작성일21-05-27 18:29 조회43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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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5(2021)년 하안거 결제법문 : 실상사 회주 도법스님 

  

간화선, 팔만사천법문을 압축한 용광로

간화선 3대 요체 : 대신심(大信心), 대분지(大憤志), 대의정(大疑情)을 말하다

 

 


 

* * * * *

 

우리가 다시 여름안거를 맞이했습니다. 살면서 참 여러 가지를 하게 되는데 그중에서 어쨌든 스님, 이 산중에서 나에게 부여된 가장 대표적인 일이 법문하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법문이라고 하는 것은 듣는 사람들에게 삶의 안목이 열리도록 하는 일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가 걸어가야 할 방향과 길에 대해서 ‘아, 저 방향으로 걸어가면 되겠구나’ 하고 불신이나 의심이나 혼란스러움이 깔끔하게 걷히도록 해주는 게 법문인 셈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요즈음 제일 어려운 일이 법문하는 일이라는 생각이듭니다. 스스로 부끄러운 마음도 있고, 또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요 근래 나이가 들면 들수록 법문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오늘도 주어진 소임의 하나로 법문을 해야 되는데 무슨 얘기를 해야 될까 궁리를 해봐도 적절한 내용이 잘 안 떠올라서 전전긍긍했습니다. 마침 이번에는 코로나상황 때문에 스님들만 모여서 안거의식을 한다고 하기에 그럼 간화선 얘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간화선이라고 해도 우선적으로 전제해야 할 것은 불교수행이라는 점입니다. 잘 알다시피 불교수행의 기본은 계정혜, 삼학 수행입니다. 실상사에선 삼학수행은 “언제 어디에서나 뭇생명 두루 이익케하는 큰 자비계의 수행. 한결같이 흔들림없는 큰 선정의 수행. 자신의 참모습이 본래붓다임을 참되게 아는 큰 지혜의 수행”이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거듭 강조하는데 무슨 수행을 하든 불교 수행의 기본인 삼학 수행을 근본 토대로 삼고, 그 토대 위에서 해야 합니다. 간화선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점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선방에 살고 있지 않지만 불교사상과 정신을 대단히 잘 압축해서 담아내고 매우 실용적으로 즉각적인 효과를 볼 수 있도록 하는 탁월한 수행방법이 간화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간화선이 천덕꾸러기처럼 취급되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우리가 철없이 가볍게 생각하는 것 아닌가 하는 마음입니다. 한국불교의 전통으로 자리잡아왔던 간화선이 정말 무엇인지, 천덕꾸러기로 취급되어도 괜찮은 것인지, 하는 문제의식으로 지극하게 공들여서 많은 대화와 토론 학습과 연마의 과정을 거친 다음에 천덕꾸러기 취급을 해도 늦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 제가 말씀드리는 간화선 이야기는 다른 분들과는 관계가 없고 오로지 제 나름대로 정리한 것을 진솔하게 말해보려고 합니다.

 

 

간화선 3대 요체 : 

대신심(大信心), 대분지(大憤志), 대의정(大疑情)

 

우리는 보통 간화선을 대신심(大信心), 대분지(大憤志), 대의정(大疑情) 3대요소 체계로 설명합니다. 

 

첫 번째가 대신심(大信心) 입니다. 

▲ 자신의 참모습이 본래부처라는 이해와 확신

▲ 본래부처에 대한 이해와 확신으로 불교(화두)수행을 하면 즉각 이루어진다는 확신

 

저는 간화선을 제대로 하려면 대신심을 바르게 확립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봅니다. 제가 그동안 보고 배운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 부분이 늘 아쉬움으로 남아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선방에서 자신의 본래면목을 찾아야 된다, 깨달아야 된다는 등의 표현을 하기도 하고, 또 다른 개념으로는 본래부처임을 깨달아야 한다, 참되게 잘 알아야 한다고 하기도 합니다. 저는 본래면목이라고 표현이 되든, 본래부처라고 표현이 되든, 제 나름대로 정리한 바에 의하면 붓다께서 깨닫고 제시한 중도, 연기의 실천론과 세계관의 정신을 실천주체로 인격화한 것이 본래면목의 개념이라고 봅니다.

 

그렇게 봤을 때 대부분 우리는 습관적으로 ‘인간은 죄많은 업보중생’이라는 전제 위에서 불교를 하고 있는데, 과연 괜찮은 것인가 심각한 자기 모순이 아닌가, 하는 물음을 갖게 됩니다. 잘 알고 있듯이 붓다께서 “나는 본래 있는 법을 발견했다”고 했고, 붓다가 발견한 본래 있는 법의 정신이 화엄경에 오면 본래붓다로, 초기 선불교의 자료인 <혈맥론>에선 “견성하지 못한 사람이 하는 장좌불와 등의 수행은 다 정법을 비방하는 것”으로 그리고 그 견성의 사고가 본래면목으로 전개되었다고 판단됩니다. 

 

그렇게 볼 때, 본래부처론에 대한 많은 학습과 탁마를 통해 그 내용을 잘 파악하고 이해하고 확신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따라서 대신심이라는 말속에 첫 번째 들어있어야 할 내용은 바로 이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본래면목, 본래부처로 표현되는, 존재 자체 또는 자기자신 자체의 참모습이 본래부처라는 점에 대해서 적어도 우리의 상식과 지성으로 학습하고 탁마해서 ‘아, 그렇구나’하고 잘 이해하고 확고하게 확신하는 것이 대신심이라는 말 속에 들어있어야 할 첫 번째 내용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는 본래부처에 대한 확신으로 본인이 선택한 화두(또는 염불, 진언 등등) 수행을 해가면 반드시 즉각즉각 효과를 보게 된다는 확신입니다. 

세 번째는 혹 명료하지 않아서 혼란스러울 때는 반드시 스승 또는 도반과 성찰적 대화와 토론을 통해 정리하고 바로잡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는 확신입니다.

 

다음 두 번째는 대분지(大憤志)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대분지’하면 장좌불와나 용맹정진을 떠올립니다.  

뭔가 목숨을 걸고 극기훈련하듯이 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고 고행주의자들처럼 극단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폐단이 매우 우려스러운 현실이기도 합니다. 


“힘을 잘 쓰는 장사는 호랑이 잡을 때 쓰는 힘을 잠자리 날개를 찢는 데도 똑같이 쓴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간화선 3대요소의 하나인 대분지라는 말의 의미도 막연한 짐작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실제적으로는 극단적 태도와 방식과는 정반대로 차분하게, 침착하게, 평온하게, 지속적으로, 줄기차게, 끊임없이, 매순간순간을 의미합니다.

내용으로 보면 요즘 위빠사나 얘기, 명상 얘기를 하는 그곳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내용들이 그 한 마디에 다 담겨있다고 보아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음 세 번째는 대의정(大疑情)입니다.

 

말 그대로 화두를 간절하게 드는 겁니다. 이뭣고 화두를 들기도 하고, 뜰앞의 잣나무 화두를 들기도 합니다. 어쨌든 화두는 삶, 또는 불교의 매우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답입니다. 불법의 심오한 뜻이 무엇입니까? 불법의 참뜻이 무엇입니까? 조사가 서쪽에서 온 본의가 무엇입니까? 더 나아가면 진짜 불교가 뭐요? 대승불교다, 부파불교다, 선불교다, 교학불교다, 초기불교다, 남방불교다, 북방불교다, 온갖 이름으로 불교 얘기들이 이뤄지고 있는데, 진짜가 뭐요 하는 물음입니다. 그중에 특별한 하나가 진짜요? 아니면 당신이 하는 불교만 진짜요? 전체가 다 진짜요? 길이 환해지는 진짜 불교가 뭐요? 하고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도발적으로 질문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불교에 대한 상식이 없는 사람들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불교에 대한 교리적인 지식도 쌓이고 교리에 맞추어 이것저것 해보지만 뭔가 시원하지가 않다. 확연하지가 않다. 불교를 얘기하고는 있지만 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뭔가 아리송하다, 짙은 안개속이다, 정말 답답하다, 어찌해야 할지 참 막막하다. 그렇기 때문에 매우 절실한 마음으로 묻게 되는 겁니다. 안개가 걷히는 진짜 불교가 뭐요? 더 좁히면 진짜 중노릇이 뭐요? 진짜 출가 비구가 어떤 거요? 본인이 너무나 답답하기 때문에 질문을 안 할 수가 없는 거죠. 그 질문은 자신에게 하는 질문이기도 하고 스승에게 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뼛속 깊이 사무치는 질문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답도 피를 토하듯이 토해낸 한마디인 것입니다. 그것이 화두입니다. 

 

“뜰앞의 잣나무”라고 답하기도 하고, “똥 묻은 막대기”라고 답하기도 하고, “삼베가 서근”이라고 답하기도 하고, “없다”라고 답하기도 하고, “이뭣고”라고 답하기도 합니다. 여러 형태로 답을 하는데, 그걸 우리는 화두라고 얘기하는 거죠. 그 화두를 잘 들어야 된다는 뜻에서 강조한 말이 대의정입니다. 대신심, 대분지, 대의정 - 큰 신심이 있어야 한다, 큰 분지가 있어야 한다, 큰 의정이 있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크다[大]’는 말 때문에 엉뚱한 해석들을 하게 되는 경향들이 있는데, 꼭 그럴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물론 이런저런 해석들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중도연기로 표현되어진 불교 세계관과 정신, 또는 본래부처, 본래면목으로 표현되어진 불교 세계관과 정신에 맞게 매순간순간 마음 쓰고 행동해야 된다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대의정이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을 압축하고 압축해서 나타난 것이 화두입니다. 

 

이어서 대의정이라는 말에 담긴 의미를 짚어보겠습니다. 앞에서 대분지를 설명할 때와 마찬가지로 대의정이란 진실함, 간절함, 지극함, 한결같음으로 화두를 든다는 의미입니다. 그 비유를 고양이가 쥐 잡으려고 오롯하게 집중하듯이, 집나간 외아들을 간절히 그리워하는 어머니처럼 해야 된다고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왜 뜰 앞의 잣나무라고 했는가”, 또는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가” 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화두에 대한 의심을 일으키라는 말입니다.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매순간순간 “왜 뜰앞의 잣나무라고 했을까? 불법의 대의를 물었는데, 왜 뜰앞의 잣나무라고 했을까? 잣나무라고 표현한 그 스님의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하고 의심하고 또 의심하고, 의심하고 또 의심하는 겁니다. 앉아서도 하고 서서도 하고 걸으면서도 하고 누워서도 하고 할 수 있는 한 나의 모든 존재를 마쳐서 노는 입에 염불하듯이 간절히 화두를 드는 거죠. 

 

선불교에선 화두를 용광로와 똥파리에 연결시켜 설명하기도 합니다. 용광로가 뭡니까? 뭐든지 들어오면 다 녹입니다. 대승불교도, 선불교도, 초기불교도, 교학불교도 들어오면 녹입니다. 그뿐이겠습니까. 유도 무도, 이쪽 저쪽도, 탐진치 삼독도, 억만겁의 죄업도, 선악 시비도, 기독교도, 유교도, 과학도, 사성제•공•유식 등의 불교도 들어오면 녹입니다. 어쩌면 우리 삶에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그 어떤 것, 그 어떤 하나도 예외 없이 들어오기만 하면 다 녹아난다는 이야기입니다. 같은 내용을 불교의 원형인 붓다의 삶과 가르침에선 “중도로 하면 양극단이 떨어져 나간다, 양극단이 녹아내린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연결시켜보면 화두를 드는 것이야말로 바로 중도행인 것입니다. 붓다가 어떤 사람입니까? 일생을 양변, 양극단에 빠지지 않는 길 또는 떨어져 나가는 길인 중도행으로 살아간 사람입니다. 따라서 화두 드는 것 자체가 중도행의 하나인 셈입니다. 그러니까 화두는 양극단을 떨어져 나가게 하기도 하고, 실상을 드러나게 하기도 하는 중도행인 것입니다. 

 

이어서 똥파리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똥파리는 세상에 못 가는 데가 없습니다. 부처님 머리에도 가고, 임금님 얼굴에 앉기도 하고,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남자도 여자도, 잘난 놈도 못난 놈도 가리지 않습니다. 그뿐입니까. 똥통에도 가고, 시체한테도 가고, 더러운 곳 깨끗한 곳, 좋은 곳 나쁜 곳 할 것 없이 못가는 데가 없습니다. 그런데 딱 한 군데 못가는 데가 있습니다. 바로 용광로입니다. 

 

여기서 똥파리는 뭘 말하고 있을까요? 바로 우리가 늘 문제 삼고 있는 분별망상입니다. 분별망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든 못가는 데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똥파리가 용광로엔 발을 못 붙이듯이 그 어떤 분별망상도 용광로인 화두에는 발붙이지 못합니다. 즉각 떨어져 나갑니다. 화두가 타파되고 깨달음이 이루어진 먼훗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화두를 드는 순간순간마다 번뇌망상이 즉각 즉각 발붙이지 못한다, 떨어져나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영험이, 위력이 대단히 놀랍습니다. 여기에서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잘 알고 있듯이 용광로는 저절로 용광로가 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가열차게 불을 때야 용광로가 됩니다. 화두도 마찬가지입니다. 끊임없이 간절한 마음으로 화두를 챙겨야 화두가 용광로로 작용을 하고 신통 미묘한 위신력이 발휘됩니다. 한 마디로 원리 전도몽상 구경열반이죠. 

 

실제 내용들을 좀 세밀하고 치밀하게 하나하나 짚어서 정리를 해보면 그 위신력이 특별한 상황에서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화두를 한 번 들면 한 번 하는만큼 그 자리에서 바로 그 순간, 두 번 들면 두 번 하는 만큼 바로 그 순간, 즉각즉각 분별망상이 녹아떨어지도록 되어 있는 것이 화두라는 이야기입니다.

 

  

간화선, 팔만사천법문을 압축해서 단순명쾌하게 제시한 것

 

그러니까 팔만사천법문으로 표현되어지는 불교와 불교수행을 잘 녹이고 압축해서 아주 단순명료하게 제시한 것이 간화선인 거죠.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가 옛스승들께서 정말로 피땀 흘리는 노력으로 길을 잘 제시해줬는데, 정작 그 후손들이 그 본뜻을 제대로 연구하고 탐구하여 잘 소화시켜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고 안일하게 건성건성 적당적당하게 하면서 마치 간화선에 큰 문제가 있는 것처럼 괜히 원망하고 나아가 천덕꾸러기 취급하는 큰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이 요즘의 우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대의정, 간절한 마음으로 화두를 들 뿐 아무 조건이 없습니다. 깨닫기 위해서 화두를 드는 것도 아니고 부처 되기 위해서 화두를 드는 것도 아닙니다. 이 부분은 본래부처에 대해 잘 정리하면 깨달음의 문제라든가 부처되는 문제가 명료하게 정리됩니다. 본래부처를 정리하고 보면, 거기서 이미 정리되었기 때문에 화두 드는 자리에 굳이 깨달음을 이루네, 부처가 되네, 삼매에 드네 하는 것들이 끼어들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을 교리적인 개념으로는 공(空), 무상(無相), 무원(無願)이라고 표현을 하죠. 다른 표현으로 하면 ‘구하는 마음 없이’, ‘아무 조건 없이 무심으로’라는 표현이 됩니다. 


반야심경에 “무소구(無所求) 무소득(無所得) - 더 이상 구할 것도 없고 더 이상 얻을 것도 없다”라고 했듯이 화두드는 행위 그대로 무소구행, 무소득행인 것입니다. 더 이상 더 구할 마음도 얻을 마음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래부처인데 뭘 더 구하고 얻겠어요? 금강경식으로 하면 무아행(無我行), 무주상행(無住相行) 또는 응무소주 이생기심행(應無所住 而生其心行)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죠. 화두 드는 것이 곧 무주상행을 생활화하는 것입니다. 무주상행이 생활화될 수 있도록 하는 실력을 길러내는 과정이 화두를 드는 과정인 거죠. 화두는 뭘 얻기 위해서 이루기 위해서 드는 것이 아닙니다. 


굳이 첨언한다면 화두는 드는 것이 목적입니다. 들기만 하면 분별망상이 떨어져 나갑니다. 그러므로 화두는 잘 되는가 안 되는가 돈오점수인가 돈오돈수인가 또는 어떤 경지인가 따위의 분별망상이 설 곳이 없습니다. 혹 묻고 싶으면 스스로에게 지금 화두를 들고 있는가, 하고 물어서 들고 있으면 계속 잘 들면 되고, 안 들고 있으면 바로 정신 차려서 마음 먹고 화두를 들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즉각즉각 번뇌망상이 저절로 떨어져 나갑니다. 바로바로 번뇌방상의 감옥으로부터 해탈하게 됩니다. 그 어떤 번뇌망상(탐진치)도 절대 발붙일 수 없습니다. 번뇌망상이 떨어져 나간 자리, 발붙이지 못하는 자리, 바로 그 자리 그 상태가 해탈이고 열반입니다.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기만 하면 틀림없이 됩니다. 


혹 교리적으로 연결시켜 해석한다면 화두를 드는 것 자체가 중도행인 것이고 부처행인 것입니다. 중도행, 부처행이 바로 용광로입니다. 화두를 간절하게 지극하게 투철하게 들기만 하면 그 화두가 활활타는 용광로가 되어서 우리가 문제 삼고 있는 모든 분별망상이 다 녹아나게 된다, 다 떨어지게 된다, 그 자리에 바로 본래면목이, 존재의 실상이 환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논리죠. 


그럼 어떻게 되는가. 바로 그 순간, 우리는 편안해지고 자유로워집니다. 편안함과 자유로움이 일상적으로, 살아서도 생활화되어지고 죽어서도 생활화되어지는 상태를 우리는 해탈과 열반이라고 표현하지 않습니까? 그걸 달리 표현하면 현실적인 행복이라고 표현되는 것과 궁극적인 행복이라고 표현되는 것, 그 두 가지가 다 포함되는 거죠. 여기서도 저기서도, 살아서도 죽어서도 그렇습니다. 


오늘은 제가 우리 스님들만 모여 있기 때문에 마침 뭘 얘기해야 될지 궁리하다가 간화선 이야기를 한 번 내놓아보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제 나름대로 파악하고 정리한 것을 간단하게 말씀드려봤습니다. 여기는 아마 간화선을 하시는 분도 계실 것이고, 다른 수행을 하는 분도 계실 텐데요. 저는 간화선이 됐든 위빠사나가 됐든 이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수행이 뜻한 바 내용들을 잘 천착하면 비록 이름이나 형식이 다르다 해도 내용으로서는 우리가 충분히 다 만나고 함께 하게 된다고 봅니다. 또는 때와 장소에 따라서 적절하게 잘 활용하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의 몫이라는 점을 잘 정리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이야기를 끝내겠습니다.


어쨌든 여러 가지로 부족하고 불편함이 많은 산중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장선원과 실상사의 대중으로 안거를 함께 해준 스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무쪼록 한 철을 편안하고 의미 있게 본인에게도 큰 이익이 되고 실상산중에도 큰 힘이 될 수 있도록 잘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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