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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법회 | [보현법회] 참회와 발원, 내 삶의 주인으로 당당하게 사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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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실상사 작성일21-06-28 17:46 조회37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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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보현법회부터는 실상사에서 매일 아침 '하루를 여는 법석'에서 공부하는 의식문 <참회와 발원>에 대해 공부합니다. 

우리 모두 참회와 발원 공부와 수행으로 삶이 당당하고 자유로워지기를 손 모읍니다.

......


2021-06-20 보현법회 법문


참회와 발원, 

내 삶의 주인으로 당당하게 사는 길

 

- 도법 (실상사 회주) 

 

 

오늘부터는 보현법회에서 <참회와 발원>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참회’니 ‘발원’이니 하는 말은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꼼꼼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대로 따져서 생각해보고 이야기해보고 정리해보지 않은 채 말로만 참회와 발원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교재는 실상사에서 매일 아침 ‘하루를 여는 법석’을 하는데, 그때 사용하는 의식집입니다. 이 의식집에 담긴 내용을 압축하고 압축해보면, 참회와 발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회와 발원은 어쩌면 내 삶의 모습을 비춰보는 거울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거울을 보시죠? 왜 거울을 봅니까? 혹시 무엇이 묻어있지는 않은지, 모양이 잘못된 것은 없는지 거울을 보면서 알게 되잖아요. 거울을 보면서 어떤 문제가 있는지 확인해보고, 나아가서는 그것을 잘 바로잡기도 합니다. 

 

참회와 발원도 그와 같습니다. 내 삶의 모습을 비춰보는 거울과 같습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거울에 비춰보면서 더 이상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뉘우치고 다짐하는 것이 참회, 나아가 삶이 질적으로 향상되도록 하겠다는 마음을 내기도 하고, 확고부동하게 유지하겠다고 다짐하기도 하는 것이 발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과거처럼 살지 않겠다’는 것은 참회, ‘새롭게 살겠다’는 것은 발원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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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해서 사회적 현상으로 세월호 사건을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자식이, 가족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발만 동동 굴러야 했던 그 처참한 사건 앞에서 가족들의 아픔과 슬픔, 국민들의 아픔과 슬픔은 그야말로 국민적 참사였습니다. 그 엄청난 비극적 사건을 겪으면서 온 국민이 스스로 뉘우치고 다짐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세월호 참사로 세상을 떠난 아이들, 어른들을 향해 “우리가 잘못했어. 오늘부터는 내가 달라질게. 생명이 안전하고 평화로운 새로운 나라를 만들게.”하며 뉘우치고 다짐했습니다. 

 

진실한 참회나 발원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로 어떤 계기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어떤 계기를 통해 구체적인 실상, 자신의 모습에 직면했을 때 이루어집니다. 세월호 참사는 온 국민이 자기 삶의 참모습을 성찰적으로 살펴보게 한 큰 사건이요 계기였습니다. 

 

‘내가 잘못 살았구나. 그 결과가 이런 참담한 비극으로 나타났구나.’

우리가 살아온 삶에 대해 성찰적으로 참된 앎이 생겼고, 알게 되니 반성하고 뉘우치게 되었지요. 나아가 “더 이상 그런 삶이 되풀이되게 하지 않겠다. 새로운 삶을 살겠다. 이 나라도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결심하고 다짐한 것입니다.

 

종합해서 보면 참회와 발원은 아이들의 아픔과 슬픔, 유가족의 아픔과 슬픔, 그리고 상황을 바라보고 발을 동동 굴렀던 온 국민의 아픔과 슬픔, 그 아픔과 슬픔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길이죠. “그래, 이 정도면 되었다. 잘 바뀌었다. 제대로 됐다.”고 할 만큼 치유와 회복이 이루어져야 가신 분들을 잘 추모했다, 남아있는 사람들도 잘 살았다고 하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안타깝게도 현실은 치유와 회복의 길을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했지만, 어떻게든 세월호 참사로 일어난 성찰과 반성의 기운들이 우리 시민사회에 작동하여 촛불로 나타났고, 정치권력이 바뀌기도 하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막연해 보이지만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많은 변화와 성숙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렇게 되는 이유가 바로 참회와 발원이 갖는 힘이라고 봅니다. 아픔과 슬픔을 딛고 일어나 힘차게 살도록 하는 힘, 한 치 앞이 안 보이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찾고 나서게 하는 힘은 종교적 언어로 참회와 발원이라고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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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 하루를 여는 법석,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하는 공부와 수행

 

실상사의 <참회와 발원> 의식은 가장 먼저 축원으로 시작합니다.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시방삼세 모든 도반들이 함께 올리는 축원

오늘 하루를 여는 법석에 함께하신 ○○○ 영가시여! 

아울러 명부전 평생위패 봉안 영가와 실상사 창건 이래 화주·시주 모든 영가들이시여!

 

저희들이 멀고 먼 우주생명의 길에서 인연 맺은 모든 도반들과 함께 영가님을 위해 간절히 축원합니다. 천만년 묵은 어두움이 등불을 밝히는 순간 사라지듯 살아생전 탐·진·치의 마음도, 응어리진 모든 미련과 아쉬움들도, 저희들이 지금 함께 하는 보리심의 참회·발원 공덕으로 즉시 사라질 것입니다. 부디 두려워하지 마시고 활짝 열어젖힌 밝고 맑은 빛의 길을 따라 당당히 가십시오. 분명 날마다 좋은 날일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여는 법석에 함께하는 도반들이시여! 인등·연등 발원 도반들이시여, 우리 절·우리 마을의 도반들이시여, 그리고 실상사와 함께하는 모든 도반들이시여! 자신의 참모습이 본래붓다임을 참되게 앎으로써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당당하게 살아가십시오. 우리 모두 하나로 연결된 그물의 그물코처럼 한 몸 한 생명의 도반임을 확신함으로써 서로 돕고 나누는 화목하고 활기찬 나날 되시길 두 손 모읍니다. 

 

더불어 소유와 독점, 경쟁과 지배의 논리가 낳은 온갖 차별, 노동착취, 빈부격차, 전쟁, 기아, 환경파괴 등 세상의 모든 고통 사라지고, 우리 모두 서로 따뜻하게 존중하고 배려하여 평화로운 우리 절, 우리 마을, 평화로운 우리나라, 한반도, 평화로운 동아시아, 평화로운 지구촌을 만들기 위해 함께 손잡고 정진해 나아갈 것을 가슴 깊이 새기고 또 새깁니다. 

전통적으로 보아온 축원문과는 좀 다르지요? 

불교에서는 생사가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것이나 저 세상에 사는 것이 다르지 않다는 거죠. 조금 더 풀어보면, 살아있는 사람들의 삶이나 죽은 사람의 삶이나 다를 게 없다는 이야기죠. 실상사에서는 ‘생사일여(生死一如), 즉 생사가 다르지 않다’고 하는 정신을 불교수행의 생활현장에 그대로 반영하려고 하는 뜻으로 만든 것이 ‘하루를 여는 법석’의 축원문입니다.

 

‘하루를 여는 법석(이하, 아침법석)’은 실상사에서 매일 아침 사부대중이 함께 모여 수행하는 자리입니다. 전통적인 새벽예불엔 절밖에 사는 재가자들이 참여하기가 어려우니 절에 사는 사람들은 자율적으로 하고, 출근시간에 맞춰 사부대중이 함께 모여 수행으로 하루를 열면 모두에게 좋겠다는 의견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 ‘하루를 여는 법석’입니다. 

 

아침법석은 영가(위패)를 가운데 모시고 둥글게 앉아서 진행됩니다. 불교의 생사관(生死觀), 즉 삶과 죽음에 대한 불교의 관점을 반영하여 산 자나 죽은 자나 함께 공부하고 수행한다는 마음으로 돌아가신 분들의 위패를 가운데 모신 거죠. 

 

아침법석의 내용은 앞에서 읽어드린 축원문, 그리고 예불, 참회와 발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맨 처음 하게 되는 축원문에 보면 영가를 모시는 내용이 가장 먼저 나오는데, 앞에서 말한 생사일여, 즉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니라는 불교의 생사관을 반영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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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를 여는 법석에 함께하신 ○○○ 영가시여! 

아울러 명부전 평생위패 봉안 영가와 

실상사 창건 이래 화주·시주 모든 영가들이시여!

잘 보면 지금부터 아득한 옛날에 이르기까지 실상사와 함께 한 모든 분들을 모시는 내용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게 해준 분들에 대한 감사가 축원문 안에 함께 담겨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절에서는 기제사든 49재든 영가를 법당에 모시고 정해진 날에 제사를 모십니다. 특별한 행사로 치러지는 경우가 아니면, 주로 제사를 지내는 스님과 제주들만 참여하지요. 

 

그런데 실상사에서는 제사가 접수되면 곧바로 아침법석 한 가운데에 영가(위패)를 함께 모십니다. 그리고 매일 아침 30분씩 살아있는 이들과 죽은 이들이 함께 공부하고 수행을 합니다. 물론 제삿날이 되면 그 위패를 법당에 모셔서 제사를 지냅니다. 어떠세요? 사부대중이 매일 함께 공부하고 수행했으니 함께 하신 영가께서 가시는 길도 훨씬 더 밝겠지요?

 

우리 삶에서 이 세상과 저세상을 어떻게 보고 살아갈 것인가는 굉장히 큰 문제입니다. 실제 삶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불교의 입장은 삶과 죽음이 아니다, 다르지 않다고 합니다. 하지만 산자와 죽은 자들이 직접 소통이 안 되기 때문에 종교의식을 빌려서 함께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실상사에서는 붓다께서 가르쳐주신 뜻을 ‘하루를 여는 법석’을 통해 아주 구체적인 일상수행으로 살려낸 것입니다. 

 

설명한 바와 같이 돌아가신 영가와 살아있는 사부대중이 함께 ‘하루를 여는 법석’ 수행을 2~3년 진행해보니 참으로 유익한 점이 많았습니다.

 

첫째,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유익한 것이 확인됩니다. 우리 모두 돌아가신 분들과 함께 공부하고 수행한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끼면서 현재의 삶에 대한 책임감도 더 커지고 정성스러운 마음도 더 내게 되는 것 같습니다. 개인의 문제도 우리 안에 함께 어울려 있는 것임을 더욱 구체적으로 깨닫게 되기도 하고요.

 

둘째, 당연히 돌아가신 분들에게도 의미 있고 유익할 것이라는 믿음이 확고해집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찌그덕찌그덕 싸움박질을 하면 돌아가신 분들인들 좋겠습니까? 당연히 안 좋겠지요.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어 살아있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참회와 발원의 수행을 함으로써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희망찬 삶을 살아가면 돌아가신 분들이 얼마나 기쁠 것이며 당신 가시는 길도 얼마나 편안하겠습니까.

 

 

어둠은 빛을 밝히면 사라지고, 

무지는 참되게 알면 사라진다

 

축원문의 다음 구절로 넘어가볼까요?

 

천만년 묵은 어두움이 등불을 밝히는 순간 사라지듯 

살아생전 탐·진·치의 마음도, 응어리진 모든 미련과 아쉬움들도, 

저희들이 지금 함께 하는 보리심의 참회·발원 공덕으로 

즉시 사라질 것입니다. 

축원문 내용을 잘 음미해보십시오. 정말 통쾌하고 시원하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보통 전생의 죄업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삽니다. 일이 조금만 잘 안 되어도 ‘전생의 죄업’ 운운하면서 걱정을 하고, 그 전생의 죄업을 빨리 벗어나냐 하는데 잘 안된다고 전전긍긍하며 살고 있는 것이 보통사람인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축원문에 발심과 참회원만 하면 즉각 백겁 천겁 죄업이 바로 사라진다고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도대체 이게 무슨 이야기일까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많은 문제들과 그로 인한 고통과 불행은 왜 생겨날까요? 그 문제는 신이나 부처님이 알 수 있는 일이지 나 같이 업장이 두터운 사람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만 붓다께서는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오히려 본인이 마음만 먹으면 바로 보고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엉뚱하게 망상만 쫒아다닌다고 하십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언제나 함께 하고 있는 자신의 참모습을 성찰적으로 살펴보십시오.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밖을 향해 천지사방으로 돌아다니기 때문에 참되게 알아야 할 자신의 참모습에 대해 칠흑 같은 무지에 빠져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칠흑의 무지 때문에 온갖 가짜 뉴스들이 만들어지고 그것에 속아서 전전긍긍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한 번 차분히 생각해봅시다. 어때요? 인생을 알 수 있습니까? 아는 것 같았는데, 잘 보면 한 치 앞도 알 수 없습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인생은 한 치 앞을 볼 수도, 알 수도 없는 칠흑 같은 어둠입니다. 없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인생을 알 수 없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다, 칠흑 같은 어둠입니다. 동의하시죠?

 

자, 지금 이 방안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이라고 한다면 거기 앉아 있는 본인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갑갑하겠죠. 그리고 당연히 불안과 공포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 불안과 공포심 때문에 많은 생각들이 일어납니다. 이곳이 무엇이었을까. 나는 어떻게 될까. 그런데 누군가가 저승사자 이야기를 합니다.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그 무엇도 알 수 없는 나도 그 이야기에 빠져들어 갑니다. 불안과 공포는 더욱 고조됩니다. 어찌할 바를 몰라 전전긍긍, 안절부절 합니다.  

 

그중에서 가장 무시무시하게 전달되는 이야기가 무엇일까요? 바로 저승사자 이야기입니다. 죽음, 알 수 없는 칠흑 같은 저 세상은 무시무시한 곳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언어입니다. “저승사자에게 끌려간다.”, “저승사자에게 잡혀간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이야기들이 우리 머릿속에 들어와서 사실처럼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이 다 무지 때문에 생기고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저승사자 이야기 때문에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저승사자 이야기 자체가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 때문에 만들어진 이야기일 뿐임으로 알게 되면 어떨까요? 그래도 불안과 공포가 계속될까요? 쩔쩔 맬까요?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축원문의 내용은 천수경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천수경 독송해보면 참회문 안에 십악참회(十惡懺悔)가 있고, 바로 이어서 게송이 나옵니다.

 

백겁적집죄 百劫樍集罪 

일념돈탕진 一念頓湯盡

백겁천겁 쌓인 모든 죄업 

한순간(한생각)에 사라지네 

 

여화분고초 如火焚枯草

멸진무유여 滅盡無有餘

마른 풀을 태우듯이 

남김없이 사라지네 

 

아무리 백겁 천겁 만겁 쌓여있는 엄청난 죄업들라고 해도, 태산처럼 쌓여 있는 마른 풀이 불을 지피면 다 타고 깨끗하게 사라지듯이 사라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천수경에선 바로 이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에 대해 불교 세계관과 철학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지금 이야기하려면 복잡해지기 때문에 오늘은 거기까지는 안 가겠습니다. 

 

오늘은 다만, 무지, 즉 어둠을 해결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불교에서는 무명, 무지를 어둠으로 표현합니다. 무지라는 말보다는 어둠이라는 말이 훨씬 실감이 나니, 우리도 어둠을 갖고 이야기를 해봅시다.

 

어둠을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돈이 있으면 되겠습니까? 명예가 있으면 되겠습니까? 권력이 있으면 되겠습니까? 총, 핵무기가 있으면 될까요? 아니면 분노하고 증오하고 공격하면 되겠습니까? 좋아하고 사랑하고 사정사정하면 해결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그 무엇으로도 안 됩니다. 오로지 밝음, 빛으로만 해결됩니다. 그렇습니다. 어둠은 분노와 증오로도, 천하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으로도, 총칼과 핵무기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어둠은 오로지 빛으로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설령 백겁 천겁 백겁천겁 쌓여있는 죄업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것들이 어둠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빛을 밝히기많 마녀 바로 해결됩니다. 어둠과 밝음 이야기를 무지와 앎이라는 말로 가져와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지 때문에 생긴 문제는 다른 것으로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오로지 참되게 아는 것으로만 해결이 가능합니다. 참되게 아는 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여기서 ‘빛’이라는 말과 ‘깨달음’이라는 말은 같은 내용입니다. ‘어둠’과 ‘무지’도 같은 내용입니다. 결국 우리가 실제 삶의 실상을 제대로 알게 되면 무지로 인한 불안과 공포가 만들어낸 현상들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저승사자니 염라대왕이니 하는 것들도 무지의 망상이 만들어낸 환상인 것이죠.  

 

자, 무지의 망상으로 만들어낸 환상일 뿐 실제로는 없는 것임을 제대로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더 이상 망상이나 환상에 속지 않게 되고, 끌려 다니지 않게 되죠. 망상으로 만들어진 환상일 분 실제로는 없는 것임을 참되게 알기만 하면 바로 그 순간 망상으로 만들어진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여기까지는 영가를 위한 축원이 영가와 함께 공부하고 수행하는 것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지금부터는 살아있는 분들을 위한 축원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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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삶의 주인으로 당당하게 살기 

 

오늘 하루를 여는 법석에 함께하는 도반들이시여! 

인등·연등 발원 도반들이시여, 

우리 절·우리 마을의 도반들이시여, 

그리고 실상사와 함께하는 모든 도반들이시여! 

자신의 참모습이 본래붓다임을 참되게 앎으로써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당당하게 살아가십시오. 

우리 모두 하나로 연결된 그물의 그물코처럼 

한 몸 한 생명의 도반임을 확신함으로써 

서로 돕고 나누는 화목하고 활기찬 나날 되시길 두 손 모읍니다.

 

지금 읽은 축원내용은 인연 있는 살아있는 모든 분들과 함께 공부하고 수행하자는 내용입니다. 

 

그 다음 구절로 가보겠습니다.

 

더불어 소유와 독점, 경쟁과 지배의 논리가 낳은 

온갖 차별, 노동착취, 빈부격차, 전쟁, 기아, 환경파괴 등 

세상의 모든 고통 사라지고, 

우리 모두 서로 따뜻하게 존중하고 배려하여 

평화로운 우리 절, 우리 마을, 평화로운 우리나라, 한반도, 

평화로운 동아시아, 평화로운 지구촌을 만들기 위해 

함께 손잡고 정진해 나아갈 것을 가슴 깊이 새기고 또 새깁니다. 

 

오늘은 우리 실상사에서 아침마다 함께 하는 ‘하루를 여는 법석’의 축원문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아침마다 돌아가신 영가들과 살아있는 모든 인연들을 위한 축원, 그리고 ‘참회와 발원’을 주제로 공부와 수행을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면 좋겠습니다. 대표적으로 하루를 여는 법석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데 예전과는 다른 실상사의 모습, 새롭게 변화하고 있는 실상사의 모습입니다. 가끔이라도 신도님들께서도 함께 하시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 함께 하고 있는 ‘참회와 발원’은 내 삶의 모습을 비춰보는 거울입니다. 그리고 거울에 비춰봐서 놓친 것이 있으면 챙겨서 더 하고, 잘못한 것이 있으면 뉘우쳐서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불교 공부이고 수행입니다. 나아가 더 좋은 것, 더 새로운 것이 있다면 더 좋은 것, 더 새로운 것을 잘 하기 위해 더 큰 마음을 내고 정성을 쏟는 것이 불교 공부이고 수행입니다.

 

매일같이 ‘참회와 발원’을 함께 독송하고 음미하면서 그 뜻이 내 몸과 마음에 도장처럼 새겨지도록 하면 우리 삶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도장을 찍는다는 것은 확고부동하다, 다른 것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기만 하면 그 자체가 바로 빛을 밝히는 방법이기 때문에 그 내용이 내 몸과 마음에 찍히면 찍히는 만큼, 새겨지면 새겨지는 만큼, 백겁, 천겁 쌓은 죄업이라는 말로 표현되어지는 어둠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면 저절로 삶이 당당해지고 자유로워지고 평화로워집니다.  

 

앞으로는 계속 실상사의 ‘하루를 여는 법석’에서 사용하는 ‘참회와 발원’ 의식집을 갖고 공부를 하게 될 텐데요. 오늘은 시작하는 의미에서 참회발원이란 무엇인가, 돌아가신 분들과 살아있는 사람들이 함께 공부하고 수행하는 것의 의미를 살펴봤습니다. 모쪼록 우리 사부대중이 다함께 ‘참회와 발원’ 공부와 수행을 잘 해서 우리 삶도 당당하고 자유로워지고 평화로워지도록 하시길 바랍니다.

 

다음 법회에서는 ‘하루를 여는 법석’에서 사용하는 ‘예불문’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질의.응답 시간에 나눈 재(齋)에 관한 이야기는 더 정리하여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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