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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후기> <불본행집경>을 어떻게 읽을까 _ 도법스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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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실상사 작성일17-03-27 03:37 조회17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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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법스님 말씀을 정리했습니다.

공부하는 자세와 방법​에 대한 것입니다.

​왜 <불본행집경>을 공부하나?

 

첫째는 <불본행집경>은 경전으로서는 부처님 생애를 가장 풍부하게 잘 담고 있는 것으로 평가한다. 또 한 가지 이유는 부처님 생애에 대해 쓴 현대적인 책들을 봐도 알기 어려운 것도 많고 또 한 가지는 뭔가 놓치는 게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처님 생애를 저술한 내용과 부처님의 실제 삶과 비교해 봤을 때, 아쉽거나 놓치는 것이 있는 것 같다. 불본행집경을 읽다 보면 그런 게 확인이 된다.

 

예를 들면, 요즘에는 출가할 때 “죽어도 나는 돌아가지 않아”라는 마음으로 한다. 그리고 “저는 한 3년만 공부하고 갈랍니다.”하면 절에서도 안받아줄 거다. 집에서 떠날 때도 가족들이 만류를 하니까 “죽어도 안 돌아올거야” 하며 간다. 절에 와서도 “나는 끝까지 세상으로 안 나가고 스님 생활을 할 거야.”라고 한다.

 

그런데 <불본행집경>을 보면, “나는 반드시 출가하겠다.”고 선언하는 것도 있지만, 동시에 “나는 반드시 돌아오겠다.”라고 한다. 그런데 부처님 전기 쓴 사람 중에서 “나는 반드시 돌아오겠다.”라고 한 것에 집중한 사람이 없는 것 같다. 반드시 떠나겠다는 것은 누구나 집중하는데,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부분을 집중한 사람은 없었다. 제가 본 것 중에는.

 

만약에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뜻을 놓고 보면, 한국불교에서 갖고 있는 출가에 대한 생각들은 대단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부처님 출가와 다르고, 출가의 본래 의미와 어긋나 있는 것이다. 부처님이 출가할 때 하고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마음은 세상에 대한, 사람들에 대한, 또는 구체적으로는 내 부모와 아내와 자식에 대한, 그리고 친구, 이웃, 나라, 민족, 또는 이 세상 사람, 이 세상에 대한 조건 없는 관심과 애정 때문에 “나는 반드시 출가하겠다”고도 말하고,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불교인들은 세상의 관심과 애정 때문에 출가를 할까? 그렇지 않다. 거의 개인의 문제다. 물론 출가를 결심할 때는 개인의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개인적인 문제로 출가를 했다고 해도 “반드시 돌아오겠다.”라는 부분이 제대로 공부되지 않는다면 이건 문제가 있는 것이다. 저는 <불본행집경>을 보면서 ‘출가’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불본행집경>을 잘 읽어가다 보면 부처님 생애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부분들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 생애를 공부하는 교재로 이 책을 권했다.

 

경전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부처님 말씀을 가장 원형적으로 담고 있는 것을 니까야라 하고 한문으로 쓴 것을 아함경이라고 한다. 그런 표현이 대승경전에서 달라지는데, 니까야와 아함경에는 정형구처럼 나오는 것이 몇 가지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나의 가르침은 말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로 이해할 수 있다, 바로 실현될 수 있다, 바로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의 가르침, 진리는 바로 이해, 실현, 증명된다는 것이 부처님의 사고방식의 핵심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과 자신감을 갖자​

이 말은 어렵다는 뜻이겠는가? 아니다. 그것은 너무도 명료하다는 것이다. 함께 이야기를 했는데 이해가 안 되는 것, 현실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것, 검증될 수 없는 것은 나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건은 ‘말을 못 알아듣는 사람은 빼고’가 되겠죠. 그런데 여기 말을 못 알아듣는 사람은 있어요? 없죠?(웃음) 이것은 달리 말하면, “너희들 바보 아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해라. 못 배웠기 때문에, 머리가 나쁘기 때문에, 전생에 업이 많기 때문에 등등.. 대부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적어도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실현될 수 있고 증명될 수 있는 것이라는 말에는 인간과 인간의 능력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담겨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신뢰가 ‘천상천하 유아독존’, ‘본래부처’ 등의 표현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읽고 또 읽고 따져보고 또 따져보자​

그러니 우리들도 바보가 아니니까 스스로 야물게 마음먹어야 한다. 따지고 따져서 야물게 읽어야 한다. 대충 읽어서는 안 된다. 물론 처음에는 그래도 이해 안 되는 것이 많을 것이다. 이해 안 되는 부분이 부지기수로 나올 것이다. 그래도 읽고 또 읽고 따져보고 또 따져봐야 한다. 기본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 자신감을 갖고 진지하게 검토하는 것이다. 본인이 진지하게 검토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해하게 설명할 수 있도록 해보자. 그렇게 해서 사람들과 나눠보면서 또 검증해보는 것이다.

 

그런데, 모른 것이 많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무리 검토해도 모르겠다 싶은 경우가 있을 것이다. 어떤 부분은 아예 이해조차 안 되고, 어떤 것은 이해는 가는데 현실적으로 증명이 안 되고… 등등. 그렇더라도 모르는 것 때문에 지나치게 좌절할 필요가 없다. 이해할 수 있는 것만 해도 충분히 불교를 할 수 있다. 내가 이해되고 공감되는 내용만 갖고 해도 삶을 잘 살아가는데 충분하다. 그런 태도로 경전을 읽었으면 좋겠다.

 

편견과 선입견을 벗어나 상식으로 따져보기

 

조금 전에 돌아가면서 나눈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신도님들이 부처님이 이야기한 불교에 많이 가까워지는 것처럼 느꼈다. 과거의 불교에 물들지 않은 젊은 세대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건강한 불교를 해보려는 노력들이 은연중에 영향을 주고 실제로 성과를 내고 있구나, 하는 것도 느껴졌다.

 

그러나 여전히 과제들이 있다. 우리가 좀더 부처님이 뜻한 불교에 가깝게 다가서려고 한다면, 편견과 선입견을 벗어나야 한다. ‘부처님이 특별한 사람’이라거나 ‘이신전심, 진리는 말로 안 되고 마음으로만 전해진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늘 말씀드리건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은 말이 아니다. 한국불교에 그런 것이 너무 많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불교 상식으로 생각해보자. 부처님 생애에서 대표적인 것을 찾아보자.

부처님은 출가하고 나서 처음에는 가르침을 구하러 여기저기 스승을 찾아다닌다. 부처님은 그 스승들의 가르침에 따라 심오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신비하고 특별한 경지라고 했는데, 거기에 해답이 없었다. 그래서 그것을 버렸다. 그리고 부처님이 돌아온 자리는 무엇일까. 바로 상식의 자리다. 불교는 상식이다.

 

이런 것이 정리가 안 되면 불교공부가 진짜 어려워진다.

진짜 특별한 것은 뭘까? 진짜 신비한 것은 뭘까? 상식을 실제 삶으로 사는 것이 최고의 신비, 불가사의인 것이다. 부처님이 위대한 이유도 상식을 온전하게 삶으로 살아가셨다는 것이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아는 것, 당연하게 하는 것이 상식이다.

 

당연한 것이 무엇인가? 이렇게 질문해보자. 사람 목숨이 중요할까? 돈이 중요할까? 사람 목숨이 더 소중하다는 것이 상식이다. 생명을 소중하게 다루면 부처인 것이다. 생명보다 돈을 소중하게 다루면 중생이다. 부처와 중생이 딱 한 끝 차이다. 중요한 것을 중요한 것으로 알고 사는 사람, 중요하지 않는 것을 중요하지 않는 것으로 아는 사람이 부처이다.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요한 것처럼, 하찮은 것을 하찮지 않는 것으로 알고 사는 사람이 중생이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 현대인들은 대부분 몰상식의 시대를 사는 것이다.

그러니, 어때요? 부처님과 중생이 한끝 차이라면 같이 놀아볼만 하죠? 부처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 편견들을 걷어내면 다음이 수월해진다. 이것을 걷어내지 못하면 계속 헤맬 수밖에 없다. 그런 편견과 선입견들을 걷어내는 방식은, 앞에서 말했듯이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와 자신감을 갖는 것, 동시에 말이든 사건이든 진지하게 검토해보고 현실적으로 검증해보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게 하려면 스스로에게도 묻고 상대에게도 물어야 한다. “이게 상식적인 이야기야?”라고.

 

예를 들어, 경전언어로 “생자필멸,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는다.” 상식일까요? 아닐까요? “회자정리. 만난 자는 반드시 이별한다.” 이것은 어때요? 상식이죠? 이것을 교리적으로는 무상으로 표현한다. 즉 변화한다는 뜻이다. 상식의 또 다른 표현이 진리라는 말이다. 우리는 진리라고 하면 머릿속이 복잡해지는데, 세상 이치, 인생의 이치, 이런 것이 진리다. 뭔가 대단한 것을 해야 알아지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하는데, 부처님은 복잡한 것을 다 해보고 못쓰겠다고 버린 것이다.

 

소위 중생의 삶이란 업대로 사는 것, 습관대로 사는 것, 즉각즉각 저절로 반응되는 것이다. 좋은 것 보면 마음에 들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보면 화가 난다. 그렇게 사는 것은 반대는 정신 차려 사는 것이다. 편견, 선입견, 관념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출발점은 ‘묻고 따져보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화가 날 수 있고 화를 낼 수 있다. 그렇더라도 ‘화를 내는 게 맞는 거야, 도움이 되는 거야? 좋은 거야? 살아가는데 유익해? …’ 이렇게 따져보는 것이다. 이런 게 자기성찰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에게 따져보는 것을 잘 하지 못한다. 남한테만 잘한다. 모든 문제는 습관적으로 살기 때문에 벌어진다. 이미 벌어졌다 하더라도 “왜 그랬지? 이게 도움이 돼?”하고 따져보자.

습관에서 벗어나는 것이 깨어나는 것이다. 습관에서 벗어나는 것이 정신차려 사는 것이다. 자신에게 자꾸 따져보는 훈련을 하면 정신차려 살게 되고, 그렇게 되면 몰상식의 삶을 벗어나 상식으로 사는 실력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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