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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세상

우리는 실감나게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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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실상사 작성일10-10-25 14:55 조회5,072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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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실감나게 살고 있는가

(법인스님) 

흔히 가을을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나에게 가을은 독서보다는 걷기와 성찰하기에 더없이 좋은 계절이다. 서울에 사는 수도승이 소음과 공해 속에서 건강과 감성을 잃지 않고, 그야말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사회인과 마찬가지로 꾸준한 운동이 필요하다. 그래서 아침저녁으로 북촌 한옥마을을 거쳐 삼청공원을 즐겨 걷는다.

아침에는 주로 나이드신 분들이 공원에서 산책과 운동을 한다. 그들의 얼굴과 몸에서는 생기가 넘친다. 즐겁게 사는 비법은 몸을 부지런히 놀리는 것이라는 말을 절감하게 된다. 저녁 나절 북촌 한옥마을 골목길에서는 젊은 남녀들이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담소하며 걷기를 즐긴다. 그들의 표정을 보면 낮시간 동안 쫓겼던 속도와 경쟁을 내려놓고 느릿느릿 마음산책을 하는 것이 틀림없다. 이런 젊은이들이 내 눈에는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다.

나에게는 사람의 표정과 분위기를 읽는 별난 취미가 있다. 지하철을 타면 휴대전화와 스마트폰으로 문자통화와 오락게임을 하거나 영화를 보는 사람이 열에 대여섯은 되는 것 같다. 그들은 온통 그것들에 골몰한다. 재미있어 하는 것 같지만 그들의 얼굴은 왠지 건조해 보인다.

무료한 시간을 억지로 때우는 듯한 표정의 사람도 보인다. 혼잡함 속에서 책읽기에 집중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의 얼굴을 보노라면 우선 여유가 있다. 책장을 넘기다가 잠시 멈추고 사색에 잠기는가 하면 샘물 같은 미소를 짓기도 한다. 내면의 여백에서 솟아나오는 은밀한 여운의 충만감이 그들의 표정에서 읽힌다.

지식·기능과 사랑·감성의 사이

모두가 똑같은 오감의 감각기능을 가지고도 표정과 기운이 저마다 다르게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누구는 까칠하거나 무미건조하고, 누구는 깊이 있고 생기발랄한 것은 왜일까? 그것은 아마도 동일한 공간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어떤 사람은 가상현실에 살고 어떤 사람은 생생현실에 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가상현실은 자신의 주체적 의지와 느낌으로 살지 못하고 외부의 조작된 관념과 기능에 매몰되어 스스로 그것들에 속는 줄도 모르고 속으며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요즘 같은 정보화시대에는 가상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날로 많아지고 있다. 그리고 가상현실은 살아갈수록 무료와 권태, 무기력과 우울을 동반하고 있다.

어느 해 한적한 산중 암자에서 겪은 일을 나는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암자 한 쪽 텃밭에 심은 더덕의 꽃향기가 더없이 그윽한 때, 도시에서 사는 한 가족이 와서 머물게 되었다. 초등학생인 그 집 아이는 제법 총명해 보였다. 나는 그 아이에게 더덕꽃을 보여주었다.

아이는 꽃을 보는 즉시 “나, 이거 알아요. 더덕이지요?” 했다. 어린아이가 산중에서 더덕을 알아본 것이 하도 신통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칭찬했다. 그러자 아이의 입에서 설명이 줄줄 이어져 나왔다. “이건 초롱꽃과의 여러해살이풀로 살이 많고 독특한 냄새가 나며 뿌리는 식용하거나 약으로 쓴다.” 마치 눈앞의 교과서를 읽듯 쏟아내고서 쏜살같이 방으로 들어가 오락기에 열중하는 것이었다. 아이의 일방적이고도 전광석화 같은 행동에 나는 잠시 얼이 빠졌다.

그들이 떠나고 더덕꽃이 지기 전에 다른 가족이 암자를 찾아왔다. 그 집에도 그 또래의 아이가 있었다. 나는 아이에게 더덕꽃을 보여줄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코를 큼큼거리더니 천천히 더덕꽃 앞으로 다가섰다.

진정한 재미는 되풀이해도 기쁨

“아! 냄새 좋다. 스님 이게 무슨 꽃이에요?” 나는 더덕이라고 말해주었다. “더덕요? 와아, 더덕꽃에서 이렇게 좋은 냄새가 나는구나. 더덕꽃을 잊지 못할 거 같아요.” 그때 나는 지식과 기능으로만 살아가는 가상현실과 사랑·감성으로 살아가는 생생현실의 경계선을 분명하게 체감했다.

마음에 깊이 갈무리되고, 의미를 동반하지 않는 재미는 쉽게 싫증나고 더 자극적인 것을 원하게 한다. 싫증과 자극의 악순환은 변태를 낳고 병이 된다. 때로는 몸으로, 깊은 사색으로 견디고 체험하고, 그 힘겨움이 여과되면 사는 참맛을 느낀다. 진정한 재미는 같은 것을 되풀이해도 더욱더욱 새롭고 깊이 있는 기쁨으로 오는 것이다.

바람소리는 그 소리를 귀로 들을 때 비로소 바람소리가 되고, 꽃향기는 그 냄새를 코로 맡을 때 마침내 꽃향기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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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은빛호수님의 댓글

은빛호수 작성일

경향신문에 실린 글이었지요.
신문에서 읽으면서 스크랩해둬야지... 하고 잊고 있었는데
실상사 누리집에서 다시 보니 더 반가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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