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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세상

'동상이몽'에서 '이상동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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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실상사 작성일10-11-25 15:15 조회6,37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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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이몽’에서 ‘이상동몽’으로

 

[법인스님]

 

아름다운 옛이야기가 하나 있다. 중국 동진시대 여산 동림사의 혜원 선사는 ‘그림자는 산을 나서지 않고, 발자취는 속세에 들이지 않는다(影不出山 跡不出俗)’는 글을 내걸고 수도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평소 절친하게 지내던 유학자 도연명과 도교의 육수정을 배웅하다가 그만 이야기에 팔려 건너지 않기로 스스로 다짐한 호계라는 이름의 계곡을 무심코 건너버렸다. 이를 알아차린 세 사람은 한바탕 크게 웃었다. 그래서 생긴 고사가 호계삼소(虎溪三笑). 종교와 사상의 차이에 얽매이지 않는 교유와 맹세의 파기에도 호방한 그들의 모습은 ‘본래 그러함’의 자연이다.

호계삼소의 아름다운 정신은 삼소회로 이어진다. 천주교 수녀, 불교의 비구니, 원불교 교무가 모인 삼소회는 해마다 종교인 음악회를 가진다. 비구니가 찬송가를 부르고 수녀가 찬불가를 부르는 모습은 생경함을 넘어 어떤 경외심을 가지게 한다. 이들은 함께 명상하고 기도하고 서로의 종교성지를 순례하기도 했다.

성스러운 ‘땅밟기’를 통해 서로의 종교에 대해 깊이 이해할 수 있었고 자신들의 종교적 성숙에도 큰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흐뭇하고 절로 미소짓게 하는 땅밟기 풍경과는 달리, 최근 기독교 선교단체가 저지른 봉은사와 동화사 등에서 있었던 일련의 ‘땅밟기’는 우리를 한없이 서글프게 만든다. 다행히 신속한 사과로 잠잠해지긴 했지만 이런 행위들이 일어날 때마다 우리 사회가 이를 바라보는 시각과 해결방법에는 위험한 부분이 많다.  

삼소회의 성스러운 ‘땅밟기’

우선, 어느 일방이 그야말로 일방적으로 저지른 행위를 종교 간 갈등으로 해석하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가령 제사를 지내는 게 옳으냐, 그르냐로 논쟁한다면 종교적 갈등이라 할 수 있다. 특정 음식을 먹어야 하느냐, 먹지 않아야 하느냐로 시비한다면 이는 종교문화의 충돌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자기네 사고와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고 상대의 존재를 비난하고 공간을 침범하는 일은 엄연한 폭력이다.

따라서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난해야 마땅한 반사회적 행위인 것이지, 특정 종교 간 갈등으로 치부할 일이 아니다. 입술을 잃으면 이가 시리다고 했다. 불교계만의 문제라고 묵과한다면 여타의 종교는 물론 평범한 개인 집도 그가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땅밟기’의 폭력을 당할 수 있다. 이들이 내세우는 ‘공격적 선교’라는 말은 얼마나 끔찍한 표현인가.

내가 위험하게 여기는 또 하나의 문제는 ‘몰지각한 몇몇 사람의 행위’로만 축소하는 것이다. 불상 파괴, 사찰 방화, 비난 기도회와 동영상 보급, 공직을 이용한 성시화운동, 공식 예배에서 공개적인 이웃종교 비난 설교 등 이웃종교에 대한 폭력이 수십년간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은 기독교 내에 동조와 후원이 암묵적으로 널리 깔려 있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일이 터질 때마다 종교계의 상층부가 ‘눈 가리고 아웅’ 식의 화해 이벤트로 무마하고 봉합하려는 것 또한 위험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오늘날 예수님과 부처님이 우리 곁에 계시다면, ‘땅밟기’를 선교행위로 용납하실까.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는 최근 유럽에서 불고 있는 불교 열풍을 거론하면서 “무엇보다도 우리는 서로를 개종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말자”고 역설했다. 그는 자신들의 종교적 가치와 문화를 지키라면서, 다만 성숙한 깨달음을 위해 불교가 기독교보다 자신에게 더 많은 것을 가져다 준다고 생각되면 불교 신자가 되라고 했다. 종교적 선택에서 강요와 강제를 경계한 것이다.  

종교 간의 대화 없이 평화 없다

종교학의 창시자 막스 뮐러는 ‘하나의 종교만 아는 사람은 자신의 종교도 모른다’고 했다. 또 신학자 한스 킹은 ‘종교 간의 대화 없이 종교 간의 평화 없고 종교 간의 평화 없이 세계 평화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또 눈을 돌려 보면 많은 종교인들이 평등과 사랑의 가치 아래 소수자를 위해, 생명 평화를 위해, 환경을 위해, 통일을 위해 공동선을 실천하고 있다.

이제 우리 종교 신자들은 차이가 곧 차별이 될 수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에 더욱 충실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다름’은 존중하고 ‘같음’의 가치를 실현하는, 동상이몽이 아닌 이상동몽의 길을 가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 서로를 감동시키는 땅밟기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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