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2. 18 _ 12월 보현법회
<삼귀의와 반야심경>강의 (7강)
불생불멸(不生不滅), 태어남도 소멸함도 본래 없네
도법스님 (실상사 회주)
스님의 세상사는 이야기
요즘 어디를 가든지 정국 이야기가 화제이고, 저에게도 정국 이야기를 해달라는 요청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나올 이야기는 다 나온 것 같고 더 보탤 이야기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사람들은 주로 ‘이게 나라냐?’라는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거기에는 지금까지의 정치와 사회에 대한 불만,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에 대한 분노와 우리 사회의 현재 모습에 대한 절망과 좌절, 그리고 꿈꾸는 나라에 대한 소망이 뭉뚱그려 담겨 있었죠. 아마도 분노와 절망과 좌절의 마음이 훨씬 더 컸을 것입니다.
며칠 전, ‘세월호 지리산 천일기도추진위원회’ 주최로 실상사에서 ‘이게 나라다’라는 주제로 야단법석을 갖고 우리가 희망하는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때 각자 본인이 원하는 나라를 글로 써보라고 하기에 저는 ‘산내마을나라’라고 썼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제 기억 속에 있는 대통령은 여덟 명입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아마 여기 계신 분들 가운데 50세를 넘긴 사람들은 다 그렇겠지요?
이 여덟 명의 대통령, 정권이 바뀌는 과정에서 그것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무엇을 주었는가를 생각해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별 영향을 받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기본적으로 먹고 사는 것이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 별로 많지 않아서인지 대통령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못한 것도 별로 없었습니다.
비록 그렇지만 누가 집권하느냐에 따라 고통 받는 사람, 억울한 사람들이 생기는 경우가 많으니 한 사회가 굴러가는 데는 아주 중요한 일이기도 하지요. 그런 것을 모른 척 할 수 없는 것이 문제이지 실제 저 개인의 삶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조계종단 총무원장은 대통령보다 더 많이 바뀌었어요. 하도 자주 바뀌니까 기억이 잘 안 날 정도입니다. 총무원장 4년 임기를 채우는 것도 어려웠지요. 문제의 인물로 평가 받는 서의현 스님이 독선적이고 권위적이고 파행적으로 8년을 했는데, 그 이전에는 대부분 1,2년이었습니다. 그만큼 종단이 안정이 안 되었던 거지요. 그러다가 의현스님이 총무원장을 하는 8년 동안 하도 문제를 일으키니까 대중이 들고 일어나서 종단개혁을 외치게 됩니다. 그리고 94년 종단개혁 이후 선출된 총무원장들은 아파서 임기를 못 채운 스님을 제외하고는 모두 임기를 채웠습니다. 그런데 총무원장이 바뀐다고 해서 내가 스님생활을 하는 것에 크게 영향을 받았는가? 생각해보면 그것도 별로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대상이 사람이든 일이든 세상이든 간에 좋은 내용을 기대하고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하고 발전해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기대와 바람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정권만 바뀐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삶의 현장에서 주체적으로 본인이 바라는 삶을 살아내고 필요한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진정한 변화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저 먼 곳에 있는 정권을 바꾸는 것만 갖고는 우리가 기대하고 바라는 것들이 현실 속에서 내 삶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미국대통령이 아무리 바뀌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세계가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영향력이 있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은 현장에서 본인이 희망하는 내용을 자신의 삶으로 살아내야만 변화와 희망이 실현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저보고 정치적이고 실제 정치에 관심이 많다고들 말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정치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정치에 관심을 갖고 정치를 잘해야 한다고 봅니다. 다만 그 관심은 생활정치에 대한 것이지 권력을 중심에 놓고 누가, 어느 당이, 어느 편이 집권하는가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물론 좋은 지도자가 집권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지요. 그리고 그렇게 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해야 한다는 생각은 합니다. 국민들의 고통과 억울함이 해결되고 밝은 미래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조계종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광화문에서 촛불로 표출되고 있는 변화의 바람들, 희망을 꿈꾸는 것들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촛불들의 외침은 정치권을 향한 국민들의 요구이기도 하지만, 국민들 스스로도 느끼듯이 그것은 바란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으로 살아내야 된다는 자기 다짐이기도 합니다.
그 외침이 내 삶의 현장에서 내 사람으로 구현되지 못하면 정권이 백번 교체되어도 각자의 삶에는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정치권력에 거대한 무엇이 있는 것 같지만 스스로 살고 역할하지 않는 한, 실제로는 정권이 바뀌고 변화해도 별다른 것이 없을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광화문에서 표출된 민의는 ‘좋은 정권이 등장하여 국민의 주권이 참되게 실현되는 좋은 나라,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새로운 나라, 미래가 밝은 희망찬 나라를 만들자’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되어야 하겠죠. 하지만 정권이 바뀐다고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본인의 삶의 현장에서 본인이 꿈꾸는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살아내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허망하게 끝날 위험성이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거대한 나라와 정부 쪽 보다는 산내마을나라에 더 관심이 많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희망하는 사회를 만들고, 우리가 희망하는 삶을 살아가려면 우리가 앞으로 그런 이야기들을 내 삶의 현장에서 실질적으로 더 많이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촛불 현상에서 핵심적으로 두 가지를 주목했습니다. 하나는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라고 하는 주권의식이 매우 강력하게 표현된 ‘개인정부’라는 주장입니다. 다른 하나는 주인인 국민의 뜻, 민의가 대단히 평화롭고 자유롭게 표현된 점입니다. 즉 주권자들이 주권자 노릇을 하고 있고, 주권자의 의사표현이 아주 평화롭게 나타났고 평화롭게 행위한 결과 평화롭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강력히 투쟁하지 않고 평화롭게 했기 때문에 힘이 없었는가? 그렇지 않죠? 아주 도도한 강물을 이루었습니다.
아주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대통령, 국회의원, 장관, 기업, 언론 등이 도도한 민심의 강물 위에 떠 있는 돛단배와 같이 되었습니다. 본인들이 아무리 잔머리 굴려봐야 민심의 강물이 명령하는 대로 갈 수밖에 달리 어찌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법적으로 탄핵이 되느냐 안되느냐와는 관계없이 이미 도도한 그 강물의 흐름에 따라 그 강물의 요구에 따라가도록 되었습니다. 누가 감히 도도한 흐름을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 민심의 강물이 희망이 만들어지는 쪽으로 가고 있는지, 낭떠러지로 가고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흐름의 방향을 잘 잡아가는 것이 필요하고, 그 역할을 할 주체들이 필요한데 그것은 잘 안 보이는 것 같습니다. 아직은 더 강력히 몰아붙여서 박근혜대통령을 퇴진시키고 정권교체하자는 정도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정권교체만 가지고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정권교체에 희망을 많이 걸었는데, 경험적으로는 계속 그 희망이 깨졌습니다. 그래서 뜻있는 사람들은 “정권교체만 가지고는 국가의 위기에 대한 해답이 나올 수 없다. 정권교체를 넘어서는 무엇인가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은 정권교체가 최고의 해답이요 유일한 희망인 것처럼 되어갈 뿐 그 이상, 그 너머까지는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국 이야기는 해 봐야 별 수 없는 이야기가 될 것 같으니, 그냥 저의 단순한 생각, 소박한 생각을 말씀드리는 것으로 줄일까 합니다.
그리고 최근에 일어난 일 두 가지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감옥에 있는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에게서 편지를 받은 것입니다. 내용을 간추려 보면 대략 이렇습니다.
하나는 불교계에 너무 고맙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동안 삶을 바라보는 안목과 생각이 너무나 좁고 짧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따라서 지금의 감옥 생활이 삶을 바라보는 안목과 생각을 키우고 늘리는 과정이기 때문에 감옥은 나에게 감옥이 아니다. 그리고 당시 자진출두 문제 가지고 마지막까지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그 문제를 가지고 협상이라고 해서 많은 이야기들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너무 부끄럽고 미안하다. 그런 내용들을 유연하게 잘 소화를 시켰어야 하는데 충분히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쟁적으로 문제를 다루는 것이 정말 중요하고 꼭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것을 천착하면 천착할수록 투쟁보다 화쟁의 길을 가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울 것 같다. 그렇지만 그 길을 가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출소해서 만나면 죽비를 때려 달라.
한상균 씨는 민중운동계에서도 강력한 투쟁가로 소위 강경파로 불립니다. 그런데 이번 사건을 통해 많은 생각을 하고 많은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얼마전에 면회를 갔었는데, 그때에도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사람이란 쉽게 변화하는 존재는 아니지만, 또 이런저런 인연들로 인해서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존재임이 틀림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제 신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종단에서 두 가지 일을 맡고 있습니다. 하나는 자성과쇄신결사본부장이고 다른 하나는 화쟁위원장입니다. 아마도 화쟁위원장만 맡았으면 나에 대한 논란이 이렇게 많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치적 상황에서 결사본부장까지 겸직하다보니까 실제 내용과 상관없이 이런저런 정치적 논란들이 많았습니다.
“화쟁위원회와 결사본부는 부패한 자승 총무원장이 자신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만든 것이고, 너를 선택한 것도 철저히 정치적 계산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왜 그 나쁜 총무원장의 방패막이로 이용되는 그 일을 하려고 하느냐?”는 문제제기였습니다. 그때 나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는데, 그 가운데 핵심이 “그래, 총무원장이 정치적 필요 때문에 쇼를 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결사’와 ‘화쟁’이라는 말이 갖는 의미가 한국불교에서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에 이 말이 씨가 되도록 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총무원장이 나를 이용한다면 나도 총무원장을 이용할 것이다. 그 결과는 어찌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한국불교가 좀더 불교다워지고 우리 시애의 희망의 종교가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결사본부와 화쟁위원회를 통해 많은 실험들을 했습니다. 실패한 것도 부지기수고 진행되지 못한 것도 부지기수입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그 활동들이 밑거름이 되어서 말이 씨가 된 것이었습니다.
첫째는 붓다로 살자, 둘째는 대중공사, 셋째는 화쟁실천입니다. 그중에서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대중공사입니다. 대중공사는 조계종단의 주체인 사부대중이 종단문제를 직접 논의하는 광장으로 요즘의 시민의회 같은 성격입니다. 불교계의 광장의회라고 할 수 있겠죠. 이런저런 논란이 있었지만, 나름대로 이 세 가지의 씨앗은 뿌렸다고 봅니다. 이후 얼마나 자리를 잘 잡고 싹트고 자라날 것인지는 불교계의 과제로 남아있다고 봐야겠죠.
‘붓다로 살자’는 확산되지는 않았지만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며 천착해왔습니다. 그런데 마침 포교원장 스님께서 한국불교의 신행 혁신의 내용으로 ‘붓다로 살자 운동’을 하겠다고 해서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중공사’의 경우, 2년간 진행했는데, 모든 대중이 대중공사에서 뭔가 희망의 길이 나올 수 있겠다는 공감대가 이루어졌습니다. 화쟁 역시 방송에서 광고를 할 정도로 불교 안팎에서 중요하다고 하는 인식이 확산이 되었습니다.
‘생명평화의 길을 열어가는 화쟁’이라는 개념과 방법의 제시는 불교가 우리 사회에 나눈 소중한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이 많긴 하지만, 안팎에서 화쟁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점점 많은 사람들이 화쟁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가야할 길인 것 같다고 공감의 표시를 보내오고 있습니다.
특히 결사의 경우 처음부터 지금까지 정치적 논란이 일었습니다. 결사본부가 해온 일이 미래에 대한 대안을 만드는 일이었는데, 그 내용보다는 ‘결사’라는 단어 자체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처음 제안한 것이 총무원장 스님이다 보니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아왔고 여러 사람들이 불편해하고 부담스러워했습니다. 그래서 정치적 논란이 계속되는 결사본부를 발전적으로 회향하고 한국불교의 백년대계를 마련하는 기구로 전환하여 위상을 격상시킴과 동시에 종단정치상황과 관계없이 지속적으로 미래를 준비하도록 하자고 합의했습니다. 아직 가안이기는 합니다만, ‘가칭)백년대계추진본부’로 위상도 높이고 성격도 분명하게 해서 미래에 대한 대안을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계획입니다. 내용은 그동안 모색했던 내용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고 나아가 필요한 대안들을 계속 확대해가기로 했습니다. 따라서 기구가 전환된 만큼 사람도 새로운 분을 모시고 일을 하는 것으로 정리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기회에 결사본부장을 내려놓고 화쟁위원장만 계속하기로 했습니다.
사실은 제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조계종단에 소임을 맡아 서울에 오가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큰 소득이 있다면, 그것은 정말 불교공부를 많이 하게 된 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간혹 “스님이 공부는 안 하고 정치에만 관심을 갖는다.”고 비판을 하는데, 실제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공부를 더 많이 했습니다.(웃음) 시시비비가 들끓는 삶의 현장에서 하는 불교공부여서 나에겐 더 의미가 컸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을 해보니 그곳이 모순과 혼란, 갈등과 대립이 치열하게 충돌하는 현장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끊임없이 도전을 받기 때문에 치열하게 또는 절실하게 문제들과 부닥칠 수밖에 없었고, 그러므로 자신도 더 치열하게 더 절실하게 자신을 향해 실질적인 질문을 던지게 되더군요. “우리가 하고 있는 불교라고 하는 것이 대체 무엇인가”, “시시비비 탐진치가 부글거리는 현장에서 불교인들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순과 혼란, 대립과 갈등의 현장에서 설득력 있는 불교적 해답을 찾고자 골몰해온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도출되어진 것이 앞에서 말씀드린 ‘붓다로 살자’요, 대중공사요, 화쟁실천인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이 가는 것은 ‘붓다로 살자’라는 불교관과 실천론을 도출해낸 것입니다. 제게는 지난 6년 세월이 불교를 넘어 인생을 보는 안목을 훨씬 더 깊고 풍부하게 했습니다. 또 그것을 삶으로 만들어 내는데 실제적인 과정이 되었습니다.
한국불교로 볼 때 ‘붓다로 살자’ 불교가 어쩌면 불교를 가장 불교답게 하고, 불교를 가장 자랑스럽게 하고, 불교를 가장 희망차게 만드는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불교가 모든 사람에게 희망이 되는 불교,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설득력 있고 의미 있는 종교가 되려면 ‘붓다로 살자 불교’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공부해온 법성게, 반야심경도 그 연장선상에서, 그 관점에서 해온 것이었죠. 우리 실상사에서만이 아니라 서울에서도 법성게에 이어 반야심경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광주 선덕사에서도 법성게 끝나고 반야심경에 들어갈 계획입니다. 이렇게 학습하고 탁마하면서 함께 만들어가는 거죠.
제목해설 : 참 자유로 나아가는 참지혜의 길을 간다.
지난 시간에는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참지혜를 실천하는 가르침의 경’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과 더 깊이 천착해 들어가다 보니 ‘참자유로 나아가는 참지혜의 길’이라고 푸는 것이 훨씬 더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보통은 ‘마하’를 大, ‘크다’는 의미로 번역을 하는데, 우열을 나누게 하는 ‘크다’보다는 ‘참’이라는 말이 더 좋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크다’고 하면 규모의 크고 작음, 수의 많고 적음으로 이해하고 사용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크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다른 것으로 대신할 수 없는 그 무엇’을 뜻하기 때문에 - 예를 들어 물은 하면 물만이 갖고 있는 고유의 개성과 가치가 있고, 흙은 흙만이 갖고 있는 개성과 가치가 있듯이 - ‘참’이라고 푸는 것이 훨씬 좋겠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유라는 말도 현실에서는 많이 왜곡되게 해석되고 왜곡되게 쓰여서 생기는 문제들도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목을 ‘참자유로 나아가는 참지혜의 길’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경전자체가 길지 않으니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참자유로 나아가는 참지혜의 길
지금 여기, 자유자재로 관찰사유하는 참 사람 있네.
그는 참 지혜로 실천할 때
인연의 어울림으로 이루어진 다섯 무더기 모두 있지만
실제 비어있음을 잘 이해하여 대자유의 삶으로 나아갔네.
참 지혜의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 사리자여!
그대 몸 그대로 실제 비어있음과 다르지 않고
비어 있음 그대로 그대 몸과 다르지 않으며
그대 몸 그대로 비어있음이며 비어있음 그대로 그대 몸이니
느낌도 생각도 의지도 분별도 그러하네.
사리자여, 모든 사람의 비어있는 참모습엔
그대가 생각하는 태어남도 소멸함도 더러움도 깨끗함도 늘어남도 줄어듦도 본래 없네.
마찬가지로 몸도, 느낌도, 생각도, 의지도, 분별도, 눈도, 귀도, 코도, 혀도, 몸도, 뜻도 없네.
물질도, 소리도, 맛도, 향기도, 촉감도, 기억도,
눈의 경계로부터 귀와 코와 혀와 촉감과 기억의 경계도 없네.
알지 못함도, 알지 못함이 사라짐도,
늙고 죽음도, 늙고 죽음이 사라짐도,
괴로움도, 괴로움의 원인도, 소멸도, 소멸의 길도,
지혜도, 얻음도 없네.
얻을 것이 없으므로 보살행자는
참 지혜로 실천하는 이 길에 의지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음으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항상 해탈 열반의 삶을 살며
모든 붓다들도 이 길에 의지하여 깨달음의 삶을 완성하네.
그런 까닭에 알 수 있네.
이 길은 가장 신비하고 밝고 높은 진언이니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네.
그러므로 이제 그 진언을 말하여라.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어떠세요? 우리말로 훨씬 더 많이 풀었지요. 아직도 조금 미흡한 점이 있다고 느껴지지만 어느 정도는 거의 풀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을 푸는데 저라고 별 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과 계속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다듬고 또 다듬고, 그런 과정을 거쳐 좀 더 나은 쪽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애써 가꾸어가는 우리 삶과 같지요.
그러한 삶을 모범적으로 보여주신 분이 붓다입니다. 그분은 붓다가 되고 나서 어떻게 사셨나요? 애써 노력하지 않고 그냥 재미있고 편안하게 사셨나요? 전혀 그렇지 않죠. 어쩌면 붓다야말로 당신이 알아낸 반야심경의 사상과 정신을 자신의 삶이 되도록 하기 위해 죽음의 순간까지 전력투구했습니다. 붓다의 거룩함, 위대함이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부를 하면서 확인한 것은 존재의 실상, 자신의 참모습을 제대로 아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붓다와 중생의 차이는 제대로 알고 사는가, 모르고 사는가의 차이입니다. 인생을 제대로 알고 살면 붓다이고, 인생을 잘못알고 살면 중생인 거죠.
우리가 정신 바짝 차리고 붙잡아야 할 것은, 삶이란 아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앎이란 실제 삶으로 살았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입니다. 붓다는 인생의 이치, 세상의 이치를 전부 깨치고 아셨지만 죽음의 순간까지 일생 동안, 그 깨달음을, 그 앎을 삶으로 살아냄으로써 깨달음, 앎이 완성되도록 하기 위해 온 몸과 마음을 다 바쳤습니다. 그러니까 깨닫기 위해서만 땀을 뻘뻘 흘린 것이 아니고, 깨달음을 삶으로 살기 위해, 붓다로 살기 위해 계속 땀을 뻘뻘 흘리면서 정진하신 거죠. 단순히 깨달았다는 것만으로 붓다를 훌륭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깨달음을 삶으로 완성시켰기 때문에 붓다를 훌륭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 태어남도 소멸함도 없네
우리가 지난번에 “태어남도 소멸함도 없네.”까지 했지요?
반야심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한 마디로 공이라고 합니다. 반야심경은 아주 짧은 경전인데, 그 안에 빌 공(空), 아니 불(不), 없을 무(無)자가 엄청나게 나옵니다. 그 모든 것을 다 묶으면 ‘빌 공(空)’자 하나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이 공(空)자를 제대로 알고 산 사람이 붓다이고, 이 공(空)자를 잘 모르고 사는 사람이 중생입니다. 붓다와 중생의 차이는 이 공(空)자를 알고 사느냐, 모르고 사느냐의 차이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잘 알고 살면 그 삶이 괜찮아지고 잘 모르고 살면 그 삶이 고단해집니다. 잘 알고 살면 그 삶이 행복해지고 잘 모르고 살면 그 삶이 불행해집니다.
경전 상에는 그 표현이 없습니다만, 반야심경에서 강조하는 공(空)의 뜻을 실질적으로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려고 ‘그대가 생각하는’이라는 말을 넣어서 번역했습니다. 그렇게 해야 공의 본래 뜻을 이해하는데, 훨씬 좋지 않을까하는 마음에서입니다.
“사리자여 모든 사람의 비어있는 참모습엔(是諸法空相)
[그대가 생각하는 (당신이 생각하는 또는 내가 생각하는)]
태어남도 소멸함도 더러움도 깨끗함도 늘어남도 줄어듦도 본래 없네.”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 가십니까? 한 마디로 내가 생각하는 것과 실제는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내가 진짜라고 생각하는 것, 내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 등등 이 모든 것들이 대부분 본인의 생각, 사람들의 생각일 뿐 실제와는 전혀 다를 수 있음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비었다’, ‘없다’는 말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아니고 ‘네가 알고 믿는 것처럼 있지 않다’,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있지 않다’, ‘사람이 알고 있는 것처럼 있지 않다’. ‘사람이 생각하는 그대로는 없다’, ‘네가 알고 있는 것과 똑같이는 없다’는 거죠. 철석같이 그렇게 알고 믿었지만 실제로 확인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사람들은 끊임없이 ‘사랑은 영원히’라는 꿈과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사랑이 있다’고 믿기도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떨까요? 우리가 꿈꾸고 믿는 것처럼 실제로 사랑이 영원하던가요? 아마 그 기대와 믿음이 계속 깨져가는 과정이 실제 경험이 아닐까 싶습니다. 설혹 어떤 사랑이 죽을 때까지 지속되어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두 사람이 애써서 사랑이 지속될 조건을 잘 유지해가고 있는 것이지 ‘사랑 자체’가 영원해서 그런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존중과 감사의 조건이 깨지면 바로 사랑도 깨지는 것이 현실이죠. 그래서 ‘너 없이는 못 산다’며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지만 현실에서는 ‘너 때문에 못 살겠다’며 울고불고 싸우고 미워하며 갈라서는 일이 다반사지요. 그러니까 “영원한 사랑이란 실제 있는 것이 아니고 네 생각이고 말일 뿐이야”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이라는 것도 우리 현실의 삶에서 예로 들면, ‘네가 생각하는 영원한 사랑은 네 생각이고 믿음일 뿐 실제 그런 사랑은 없어’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항상 ‘나’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그 ‘나’의 정체성, 즉 내가 나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나는 이래’, ‘나는 저래’. 또는 ‘내가 최고야’. ‘나만이 진짜야’ 등등 그런 ‘나’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내 안에 내 정체성의 근거가 될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바깥’이 없으면 ‘안’이라는 것도 없고, ‘너’라는 대상이 없이는 ‘나’라는 것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나’라고 하는 것의 정체성의 근거는 바로 ‘너’가 되는 것입니다.
몸이라고 하는 것은 또 어떻습니까? 잘 생각해보면, 몸을 구성하는 것도 다 저 바깥에서 들어온 것입니다. 산소도, 물도, 밥도, 눈으로 보는 것도, 귀로 듣는 것도, 코로 냄새 맡는 것도, 몸으로 느끼는 것도, 온통 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것이지 않습니까? 내 몸 안에서 생성된다고 하는 호르몬 등 화학물질조차도 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요소들에 의해 생겨나고 사라집니다. 결국 바깥에서 들어오는 것에 의해 여기 내 몸이 유지되고 내 삶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것’이라고 붙잡을 것도 ‘내 것’이라고 내세울 그 무엇도 없는 것이죠. 다만 우리가 그것을 일상적으로 잘 인식하지 못하고 살기 때문에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뿐인 거죠.
마음, 정신은 또 어떻습니까? 우리의 마음, 정신은 안 그럴 것 같죠? 그러나 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꽃을 보고 ‘야, 저 꽃 예쁘다’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바깥에 꽃이 없으면 ‘저 꽃 예쁘다’는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요즘 사람들이 ‘박근혜 대통령은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죠? 박근혜 대통령이 없으면 내 안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나쁜 사람”이라는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절대 안 생깁니다.
그러니까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나’라고 하는 것의 정체성, 내가 여기에 존재할 수 있는 근거는 ‘내 안에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라 온통 다 내가 만나고 있는 자연, 인연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겁니다. 따라서 나의 정체성이 따로 있다고 여기는 것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갖고 있는 생각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대가 생각하는 태어남도 소멸함도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러한 사실을 잘 알면 우리 삶에 어떤 도움이 될까요? 부처님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살면 그 삶이 자유롭고 평화로워진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 것일까요?
태어남과 죽음을 갖고 이야기를 해볼까요? 우리는 태어남에 대해 없었던 것이 생겨나는 것이니까 대단히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대단히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강한 집착을 갖게 됩니다. 강한 욕심을 부리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그럴 때 그 삶이 과연 편안할까요? 평화로울까요? 어떻습니까?
집착과 욕심은 절대 삶을 편안하게 하거나 평화롭게 하지 않습니다. 집착과 욕심은 모든 갈등과 싸움의 원인이기도 하고 무기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이 탄핵정국도 따지고 보면 인생에 대해 잘못 알고 강하게 집착하고 강하게 욕심을 일으켰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제대로 알게 되면 우리 삶을 부자유스럽게 만들고 불안하게 만들고 황폐하게 만드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겁니다. 불안과 공포로부터 편안해진다는 겁니다.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죽음, 그런 것은 없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태어남은 좋다고 생각하니까 축하하고, 죽음은 나쁘다고 생각하니까 슬퍼합니다. 태어나면 웃고 죽으면 웁니다. 죽음에 대해 울기만 합니까? 대단히 무서워합니다. 어쩌면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큰 불안과 공포의 조건이 죽음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으로부터의 단절이기도 하고, 모든 것의 상실이기도 하고, 알 수 없는 미지의 것이기도 하니까요. 쉽게 말해서 좋아하는 사람, 좋은 인연이 끝나는 겁니다. “더 이상 내가 좋아하는 애인의 얼굴을 볼 수 없어”, “더 이상 내가 사랑하는 아이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없어”, 또는 “내가 좋아하는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없어”, “내가 좋아하는 생활도 할 수 없어” 등등 온갖 것이 슬픔이고 고통이 됩니다. 그리고 내가 좋다고 생각해서 이루어놓은 것들을 다 잃어버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재산일 수도 있고, 명예일 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있고, 지식일 수도 있습니다. 죽음은 이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단절이고 상실입니다.
그리고 죽은 다음의 일도 알 수가 없으니 두렵기만 합니다. 보통 회자되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무시무시하고 겁나는 이야기들이잖아요?
“죽으면 지옥에 간대”
“왜?”
“살아서 죄를 많이 지었으니까.”
보통 우리는 살아서 죄를 많이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죽으면 지옥에 갈지 모른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죠. 그러니 어마어마하게 두려울 수밖에 없는 거죠. 우리는 죽음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고, 고통이고, 두려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슬프고, 고통스러워하고, 두려워합니다. 물론 실제로 죽음 때문에 생기는 고통도 없지 않겠지요. 그러나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를 드렸지만 실제 겪어보면 감당할 만합니다.
그렇다면 실제 태어남과 죽음은 무엇인가? 태어남과 죽음은 끊임없는 변화의 현상입니다. 마치 바다의 파도처럼. 바다에 파도가 생겼습니다. 없던 것이 새로 생긴 건가요? 아니면 있던 것이 그냥 움직인 현상인가요? 없었던 것이 생긴 게 아니라 있는 바닷물이 움직인 것일 뿐입니다. 마치 사람이 앉았다 일어섰다,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그러면 바다의 파도가 가라앉으면 있었던 것이 없어지는 걸까요? 그것도 그냥 움직이는 현상일 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시작과 끝이 아닌 겁니다. 없었던 것이 새로 생겼거나 있었던 것이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변화일 뿐입니다. 변화의 한 현상이 파도가 일어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가라앉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끝내는 바다일 뿐입니다. 잔잔한 것도 바다고, 파도가 이는 것도 바다입니다. 이러나저러나 바닷물입니다. 다만 움직이고 있을 뿐, 변화하고 있을 뿐입니다.
죽음 역시 영원히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변화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죽음의 이별을 하게 되었을 때, 비록 내가 알고 기억하고 있는 그 모습은 아니지만 또 다른 모습, 또 다른 내용으로 어디에선가 늘 함께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아마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나의 관점과 태도도 달라지지 않을까요? 그리고 죽어서 영원히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하는 것과 변화된 모습이지만 어디에선가 늘 나와 함께 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의 마음은 많이 다를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실제를 제대로 파악하면 태어남과 죽음에 대해 잘못 알고 잘못 생각하고 잘못 느끼기 때문에 생기는 탐욕과 집착,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어느 하나만을 좋아해야 할 이유도, 특별히 욕심 부려야 할 이유도 없어지니 편안해질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죽음은 알 수 없는 새로운 곳으로 여행가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어떨까요? 대단한 설렘으로 기다리거나 아니면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되면 죽음은 자연스럽게 또는 흔연하게 또는 여행가듯이 받아들일 수 있겠죠. 얼마나 자연스럽고 평화스럽습니까. 공의 뜻을 잘 알고 삶에 적용하면 삶이 자유롭고 평화로워진다는 말은 틀림없는 것입니다.
사실 ‘불생불멸(不生不滅)’에 대해서만 잘 알면 반야심경을 다 안 것입니다. 공(空)이라고 하는 말이 갖고 있는 내용, 공(空)이라고 하는 말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알려주려고 하는 내용이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이거든요.
우리 절 이름이 실상사인데, 이 ‘실상’이라는 말은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이라는 뜻이죠.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나는 누구인가.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너는 누구인가. 공(空),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 절 천왕문 앞에 걸려 있는 주련을 읽어보셨죠? 거기에는 ‘가득함도 빛나고 비움도 빛나라’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가득함도 빛나고 비움도 빛나는 것이 실상입니다. 그런데 보통 우리는 가득 찬 것은 좋다고 생각하지만 빈 것은 안 좋다고 생각하잖아요. 우리 신도님들은 그렇지 않은가요.(웃음)
그런데 왜 ‘가득함도 빛나고 비움도 빛나라’라고 했을까. 가득함도 비움도 다 쓸모가 있다, 잘 쓰기만 하면 다 괜찮다, 더 나아가 삶을 자유롭고 평화롭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잘 관찰해보면 실제로는 비어있기 때문에 가득함이 생길 수 있고, 비움은 가득함이 가능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지요. 가득함과 비움은 동전의 양면 같은 거예요. 한 손의 손바닥과 손등 같은 관계이기도 하지요. 이것이 있는 그대로의 실제입니다. 이것이 ‘있는 그대로’, 즉 실상,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입니다.
우리 삶이 자유로워지고 편안해지려면 실상, 즉 공(空)의 정신을 거듭거듭 되새기면서 잘 파악하고 잘 이해하고, 실제 삶에 적용시켜보는 것이 삶의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붓다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불자들이라고 하면, 항상 그런 관점과 태도로 삶을 바라보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개인의 삶, 가정에서의 삶, 이웃과 함께 하는 삶, 그리고 이 세상 어떤 일이라고 해도, 우리 삶의 문제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부분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찬가지로 비어있는 참모습엔
그대가 생각하는 몸도, 느낌도, 생각도, 의지도, 분별도,
눈도, 귀도, 코도, 혀도, 몸도, 뜻도 없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내 몸이라는 것이 실제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금강경> 마지막 구절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지요.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인연으로 이루어진 오온의 존재는
꿈과 같고, 아지랑이와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 같네.
마땅히 이렇게 보아야 하네. (그렇게 하면 삶이 편안하고 자유롭네.)
꿈속의 내 몸을 붙잡을 수 있습니까? 아지랑이 같은 내 몸을 붙잡을 수 있겠습니까? 그림자 같은 내 몸을 붙잡을 수 있겠습니까? 물거품 같은 내 몸을 붙잡을 수 있겠습니까? 붙잡을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인연으로 이루어져 분리독립, 고정불면한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사실대로 잘 이해하고 그에 맞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그 삶이 평화롭고 자유롭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붙잡을 수 있다’, ‘붙잡을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는 사람들의 관념일 뿐입니다. 실제는 그런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사실대로 알게 되면 내 몸과 마음을 바라보고 내 몸과 마음을 대하는 태도도 확 달라지겠죠? 내 몸과 마음으로 인해 생기는 여러 가지 불편함과 힘듦도 자연스럽게 떨어져가겠죠. 요즘 언론에 자주 나오는 최순실 씨도 예쁜 피부, 건강한 피부를 위해를 만들겠다고 몇 천만 원짜리 시술을 받고 그러는 거잖아요. 그렇게 되는 이유도 실제 내 몸과 마음에 대해 잘못 파악하고 이해하고 사용해서 생긴 현상인 거죠. 그 결과가 온 나라를 파국으로까지 몰고 갔잖아요. 잘못 알고 잘못 생각하고 잘못 믿은 것을 따라서 대책을 세우면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만들지 않아도 될 문제들을 많이 야기시키고, 하지 않아도 될 고생들을 하게 되고, 그래서 본인도 괴롭고 다른 사람도 괴롭고 국민들도 괴롭게 되고… 이게 중생의 삶인 거죠.
그러니까 자유롭고 평화롭고 행복하려면 이 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나의 참모습, 인생의 참모습에 대해 올바른 이해가 있어야 삶을 제대로, 본인이 희망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내 몸은 없다. 내 생각도 없다. 내 느낌도 없다. 내 의지도 없다. 내 분별도 없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인생은 허망한 거야’, ‘삶은 허무한 거야’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경전에 ‘없다’, ‘아니다’라는 말이 많이 나오니까 자칫 허무한 것으로 느껴질 수 있는데, 그런 이야기가 절대 아닙니다. 불교는 ‘있다’와 ‘없다’를 양극단이라고 해서 부정합니다. ‘인생이 영원하다’고 단정하는 것도, ‘삶은 허무하다’고 단정하는 것도, 인생의 참모습에 대한 잘못된 판단이고 이해입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인생을 어떻게 보는가? 그 양극단을 버리고 양극단을 넘어서서 ‘있는 그대로’ 인생을 봐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인생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듣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인생은 허무한 존재야”, 누군가는 “인생은 영원한 존재야”라고 하죠. “육체는 허망하지만 영혼은 영원해”이런 이야기도 하죠. 불교에서는 그렇게 단정하는 것을 부정합니다. 영원하다는 것도 인생의 한 측면만 본 것이고, 허무하다는 것도 인생의 한 측면만 본 것이기 때문에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 거죠.
그러면 어떻게 보는 것이 제대로 이해하는 것인가. 아까 바다와 파도의 비유를 들어 이야기했잖아요. 파도만 떼어서 보면 허무합니다. 사라져버리잖아요. 그런데 파도가 그대로 바다라고 생각하면 다릅니다. 영원한 것이죠. 거듭 말씀드리지만, 없었던 것이 생기고 있었던 것이 영원히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변화할 뿐입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존재하는 거예요. 그러니 변화하는 현상만 보면 인생은 허망한 것이 되죠. 유지되는 것만 보면 인생은 영원합니다. 따라서 어떤 측면에서 보느냐에 따라 영원하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한 거죠. 또는 영원하지도 않고 허무하지도 않죠. 바다와 파도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듯이 영원함과 허무함도 바다와 파도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을 중도적으로 본다고 합니다.
어떤 경우이든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공(空)의 정신으로 잘 관찰 사유하는 실력을 쌓아야 합니다. 반야심경을 외우는 게 공부가 아니라 그 정신으로 관찰하고 사유하는 것이 공부이고 수행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그렇게 해야 우리가 잘못 알고 믿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잘 쓰기만 하면 더 효과적이고 좋은 내용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경전을 ‘지혜의 경’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불생불멸(不生不滅) 한 구절을 이야기하기에도 벅차네요. 우리 삶을 자유롭고 평화롭게 하는 굉장한 의미를,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효과적으로 잘 쓸 수 있도록 설명해 내는 게 너무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대단히 중요한 내용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또 하고 또 하면서 조금씩 터득해가는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자, 이제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시점에 섰습니다. 모쪼록 참지혜의 길을 끊임없이 천착하고 천착해서 대자유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한 해를 잘 마무리하고 또 새로운 해를 잘 맞이할 수 있도록, 정진했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실상사 보현법회는 매달 세 번째 일요일 오전10시에 있습니다.
현장에서 들으면 더욱 생생한 깨침이 있습니다.
2016. 12. 18 _ 12월 보현법회
<삼귀의와 반야심경>강의 (7강)
불생불멸(不生不滅), 태어남도 소멸함도 본래 없네
도법스님 (실상사 회주)
스님의 세상사는 이야기
요즘 어디를 가든지 정국 이야기가 화제이고, 저에게도 정국 이야기를 해달라는 요청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나올 이야기는 다 나온 것 같고 더 보탤 이야기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사람들은 주로 ‘이게 나라냐?’라는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거기에는 지금까지의 정치와 사회에 대한 불만,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에 대한 분노와 우리 사회의 현재 모습에 대한 절망과 좌절, 그리고 꿈꾸는 나라에 대한 소망이 뭉뚱그려 담겨 있었죠. 아마도 분노와 절망과 좌절의 마음이 훨씬 더 컸을 것입니다.
며칠 전, ‘세월호 지리산 천일기도추진위원회’ 주최로 실상사에서 ‘이게 나라다’라는 주제로 야단법석을 갖고 우리가 희망하는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때 각자 본인이 원하는 나라를 글로 써보라고 하기에 저는 ‘산내마을나라’라고 썼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제 기억 속에 있는 대통령은 여덟 명입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아마 여기 계신 분들 가운데 50세를 넘긴 사람들은 다 그렇겠지요?
이 여덟 명의 대통령, 정권이 바뀌는 과정에서 그것이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무엇을 주었는가를 생각해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별 영향을 받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기본적으로 먹고 사는 것이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 별로 많지 않아서인지 대통령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못한 것도 별로 없었습니다.
비록 그렇지만 누가 집권하느냐에 따라 고통 받는 사람, 억울한 사람들이 생기는 경우가 많으니 한 사회가 굴러가는 데는 아주 중요한 일이기도 하지요. 그런 것을 모른 척 할 수 없는 것이 문제이지 실제 저 개인의 삶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다.
조계종단 총무원장은 대통령보다 더 많이 바뀌었어요. 하도 자주 바뀌니까 기억이 잘 안 날 정도입니다. 총무원장 4년 임기를 채우는 것도 어려웠지요. 문제의 인물로 평가 받는 서의현 스님이 독선적이고 권위적이고 파행적으로 8년을 했는데, 그 이전에는 대부분 1,2년이었습니다. 그만큼 종단이 안정이 안 되었던 거지요. 그러다가 의현스님이 총무원장을 하는 8년 동안 하도 문제를 일으키니까 대중이 들고 일어나서 종단개혁을 외치게 됩니다. 그리고 94년 종단개혁 이후 선출된 총무원장들은 아파서 임기를 못 채운 스님을 제외하고는 모두 임기를 채웠습니다. 그런데 총무원장이 바뀐다고 해서 내가 스님생활을 하는 것에 크게 영향을 받았는가? 생각해보면 그것도 별로 그런 것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대상이 사람이든 일이든 세상이든 간에 좋은 내용을 기대하고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하고 발전해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한 기대와 바람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정권만 바뀐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삶의 현장에서 주체적으로 본인이 바라는 삶을 살아내고 필요한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진정한 변화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저 먼 곳에 있는 정권을 바꾸는 것만 갖고는 우리가 기대하고 바라는 것들이 현실 속에서 내 삶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미국대통령이 아무리 바뀌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세계가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영향력이 있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은 현장에서 본인이 희망하는 내용을 자신의 삶으로 살아내야만 변화와 희망이 실현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저보고 정치적이고 실제 정치에 관심이 많다고들 말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정치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정치에 관심을 갖고 정치를 잘해야 한다고 봅니다. 다만 그 관심은 생활정치에 대한 것이지 권력을 중심에 놓고 누가, 어느 당이, 어느 편이 집권하는가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물론 좋은 지도자가 집권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지요. 그리고 그렇게 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해야 한다는 생각은 합니다. 국민들의 고통과 억울함이 해결되고 밝은 미래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조계종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광화문에서 촛불로 표출되고 있는 변화의 바람들, 희망을 꿈꾸는 것들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촛불들의 외침은 정치권을 향한 국민들의 요구이기도 하지만, 국민들 스스로도 느끼듯이 그것은 바란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으로 살아내야 된다는 자기 다짐이기도 합니다.
그 외침이 내 삶의 현장에서 내 사람으로 구현되지 못하면 정권이 백번 교체되어도 각자의 삶에는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정치권력에 거대한 무엇이 있는 것 같지만 스스로 살고 역할하지 않는 한, 실제로는 정권이 바뀌고 변화해도 별다른 것이 없을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광화문에서 표출된 민의는 ‘좋은 정권이 등장하여 국민의 주권이 참되게 실현되는 좋은 나라,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새로운 나라, 미래가 밝은 희망찬 나라를 만들자’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되어야 하겠죠. 하지만 정권이 바뀐다고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본인의 삶의 현장에서 본인이 꿈꾸는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살아내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허망하게 끝날 위험성이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거대한 나라와 정부 쪽 보다는 산내마을나라에 더 관심이 많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희망하는 사회를 만들고, 우리가 희망하는 삶을 살아가려면 우리가 앞으로 그런 이야기들을 내 삶의 현장에서 실질적으로 더 많이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촛불 현상에서 핵심적으로 두 가지를 주목했습니다. 하나는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라고 하는 주권의식이 매우 강력하게 표현된 ‘개인정부’라는 주장입니다. 다른 하나는 주인인 국민의 뜻, 민의가 대단히 평화롭고 자유롭게 표현된 점입니다. 즉 주권자들이 주권자 노릇을 하고 있고, 주권자의 의사표현이 아주 평화롭게 나타났고 평화롭게 행위한 결과 평화롭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강력히 투쟁하지 않고 평화롭게 했기 때문에 힘이 없었는가? 그렇지 않죠? 아주 도도한 강물을 이루었습니다.
아주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는 대통령, 국회의원, 장관, 기업, 언론 등이 도도한 민심의 강물 위에 떠 있는 돛단배와 같이 되었습니다. 본인들이 아무리 잔머리 굴려봐야 민심의 강물이 명령하는 대로 갈 수밖에 달리 어찌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법적으로 탄핵이 되느냐 안되느냐와는 관계없이 이미 도도한 그 강물의 흐름에 따라 그 강물의 요구에 따라가도록 되었습니다. 누가 감히 도도한 흐름을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 민심의 강물이 희망이 만들어지는 쪽으로 가고 있는지, 낭떠러지로 가고 있는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흐름의 방향을 잘 잡아가는 것이 필요하고, 그 역할을 할 주체들이 필요한데 그것은 잘 안 보이는 것 같습니다. 아직은 더 강력히 몰아붙여서 박근혜대통령을 퇴진시키고 정권교체하자는 정도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정권교체만 가지고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정권교체에 희망을 많이 걸었는데, 경험적으로는 계속 그 희망이 깨졌습니다. 그래서 뜻있는 사람들은 “정권교체만 가지고는 국가의 위기에 대한 해답이 나올 수 없다. 정권교체를 넘어서는 무엇인가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은 정권교체가 최고의 해답이요 유일한 희망인 것처럼 되어갈 뿐 그 이상, 그 너머까지는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국 이야기는 해 봐야 별 수 없는 이야기가 될 것 같으니, 그냥 저의 단순한 생각, 소박한 생각을 말씀드리는 것으로 줄일까 합니다.
그리고 최근에 일어난 일 두 가지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감옥에 있는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에게서 편지를 받은 것입니다. 내용을 간추려 보면 대략 이렇습니다.
하나는 불교계에 너무 고맙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동안 삶을 바라보는 안목과 생각이 너무나 좁고 짧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따라서 지금의 감옥 생활이 삶을 바라보는 안목과 생각을 키우고 늘리는 과정이기 때문에 감옥은 나에게 감옥이 아니다. 그리고 당시 자진출두 문제 가지고 마지막까지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그 문제를 가지고 협상이라고 해서 많은 이야기들을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너무 부끄럽고 미안하다. 그런 내용들을 유연하게 잘 소화를 시켰어야 하는데 충분히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쟁적으로 문제를 다루는 것이 정말 중요하고 꼭 필요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것을 천착하면 천착할수록 투쟁보다 화쟁의 길을 가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울 것 같다. 그렇지만 그 길을 가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출소해서 만나면 죽비를 때려 달라.
한상균 씨는 민중운동계에서도 강력한 투쟁가로 소위 강경파로 불립니다. 그런데 이번 사건을 통해 많은 생각을 하고 많은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얼마전에 면회를 갔었는데, 그때에도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사람이란 쉽게 변화하는 존재는 아니지만, 또 이런저런 인연들로 인해서 끊임없이 변화해가는 존재임이 틀림없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제 신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종단에서 두 가지 일을 맡고 있습니다. 하나는 자성과쇄신결사본부장이고 다른 하나는 화쟁위원장입니다. 아마도 화쟁위원장만 맡았으면 나에 대한 논란이 이렇게 많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치적 상황에서 결사본부장까지 겸직하다보니까 실제 내용과 상관없이 이런저런 정치적 논란들이 많았습니다.
“화쟁위원회와 결사본부는 부패한 자승 총무원장이 자신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만든 것이고, 너를 선택한 것도 철저히 정치적 계산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왜 그 나쁜 총무원장의 방패막이로 이용되는 그 일을 하려고 하느냐?”는 문제제기였습니다. 그때 나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는데, 그 가운데 핵심이 “그래, 총무원장이 정치적 필요 때문에 쇼를 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결사’와 ‘화쟁’이라는 말이 갖는 의미가 한국불교에서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에 이 말이 씨가 되도록 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총무원장이 나를 이용한다면 나도 총무원장을 이용할 것이다. 그 결과는 어찌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한국불교가 좀더 불교다워지고 우리 시애의 희망의 종교가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결사본부와 화쟁위원회를 통해 많은 실험들을 했습니다. 실패한 것도 부지기수고 진행되지 못한 것도 부지기수입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그 활동들이 밑거름이 되어서 말이 씨가 된 것이었습니다.
첫째는 붓다로 살자, 둘째는 대중공사, 셋째는 화쟁실천입니다. 그중에서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대중공사입니다. 대중공사는 조계종단의 주체인 사부대중이 종단문제를 직접 논의하는 광장으로 요즘의 시민의회 같은 성격입니다. 불교계의 광장의회라고 할 수 있겠죠. 이런저런 논란이 있었지만, 나름대로 이 세 가지의 씨앗은 뿌렸다고 봅니다. 이후 얼마나 자리를 잘 잡고 싹트고 자라날 것인지는 불교계의 과제로 남아있다고 봐야겠죠.
‘붓다로 살자’는 확산되지는 않았지만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며 천착해왔습니다. 그런데 마침 포교원장 스님께서 한국불교의 신행 혁신의 내용으로 ‘붓다로 살자 운동’을 하겠다고 해서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중공사’의 경우, 2년간 진행했는데, 모든 대중이 대중공사에서 뭔가 희망의 길이 나올 수 있겠다는 공감대가 이루어졌습니다. 화쟁 역시 방송에서 광고를 할 정도로 불교 안팎에서 중요하다고 하는 인식이 확산이 되었습니다.
‘생명평화의 길을 열어가는 화쟁’이라는 개념과 방법의 제시는 불교가 우리 사회에 나눈 소중한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이 많긴 하지만, 안팎에서 화쟁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점점 많은 사람들이 화쟁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가야할 길인 것 같다고 공감의 표시를 보내오고 있습니다.
특히 결사의 경우 처음부터 지금까지 정치적 논란이 일었습니다. 결사본부가 해온 일이 미래에 대한 대안을 만드는 일이었는데, 그 내용보다는 ‘결사’라는 단어 자체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처음 제안한 것이 총무원장 스님이다 보니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아왔고 여러 사람들이 불편해하고 부담스러워했습니다. 그래서 정치적 논란이 계속되는 결사본부를 발전적으로 회향하고 한국불교의 백년대계를 마련하는 기구로 전환하여 위상을 격상시킴과 동시에 종단정치상황과 관계없이 지속적으로 미래를 준비하도록 하자고 합의했습니다. 아직 가안이기는 합니다만, ‘가칭)백년대계추진본부’로 위상도 높이고 성격도 분명하게 해서 미래에 대한 대안을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계획입니다. 내용은 그동안 모색했던 내용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고 나아가 필요한 대안들을 계속 확대해가기로 했습니다. 따라서 기구가 전환된 만큼 사람도 새로운 분을 모시고 일을 하는 것으로 정리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기회에 결사본부장을 내려놓고 화쟁위원장만 계속하기로 했습니다.
사실은 제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조계종단에 소임을 맡아 서울에 오가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큰 소득이 있다면, 그것은 정말 불교공부를 많이 하게 된 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간혹 “스님이 공부는 안 하고 정치에만 관심을 갖는다.”고 비판을 하는데, 실제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공부를 더 많이 했습니다.(웃음) 시시비비가 들끓는 삶의 현장에서 하는 불교공부여서 나에겐 더 의미가 컸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을 해보니 그곳이 모순과 혼란, 갈등과 대립이 치열하게 충돌하는 현장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끊임없이 도전을 받기 때문에 치열하게 또는 절실하게 문제들과 부닥칠 수밖에 없었고, 그러므로 자신도 더 치열하게 더 절실하게 자신을 향해 실질적인 질문을 던지게 되더군요. “우리가 하고 있는 불교라고 하는 것이 대체 무엇인가”, “시시비비 탐진치가 부글거리는 현장에서 불교인들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순과 혼란, 대립과 갈등의 현장에서 설득력 있는 불교적 해답을 찾고자 골몰해온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도출되어진 것이 앞에서 말씀드린 ‘붓다로 살자’요, 대중공사요, 화쟁실천인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이 가는 것은 ‘붓다로 살자’라는 불교관과 실천론을 도출해낸 것입니다. 제게는 지난 6년 세월이 불교를 넘어 인생을 보는 안목을 훨씬 더 깊고 풍부하게 했습니다. 또 그것을 삶으로 만들어 내는데 실제적인 과정이 되었습니다.
한국불교로 볼 때 ‘붓다로 살자’ 불교가 어쩌면 불교를 가장 불교답게 하고, 불교를 가장 자랑스럽게 하고, 불교를 가장 희망차게 만드는 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불교가 모든 사람에게 희망이 되는 불교,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설득력 있고 의미 있는 종교가 되려면 ‘붓다로 살자 불교’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공부해온 법성게, 반야심경도 그 연장선상에서, 그 관점에서 해온 것이었죠. 우리 실상사에서만이 아니라 서울에서도 법성게에 이어 반야심경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광주 선덕사에서도 법성게 끝나고 반야심경에 들어갈 계획입니다. 이렇게 학습하고 탁마하면서 함께 만들어가는 거죠.
제목해설 : 참 자유로 나아가는 참지혜의 길을 간다.
지난 시간에는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참지혜를 실천하는 가르침의 경’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과 더 깊이 천착해 들어가다 보니 ‘참자유로 나아가는 참지혜의 길’이라고 푸는 것이 훨씬 더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보통은 ‘마하’를 大, ‘크다’는 의미로 번역을 하는데, 우열을 나누게 하는 ‘크다’보다는 ‘참’이라는 말이 더 좋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크다’고 하면 규모의 크고 작음, 수의 많고 적음으로 이해하고 사용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크다’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다른 것으로 대신할 수 없는 그 무엇’을 뜻하기 때문에 - 예를 들어 물은 하면 물만이 갖고 있는 고유의 개성과 가치가 있고, 흙은 흙만이 갖고 있는 개성과 가치가 있듯이 - ‘참’이라고 푸는 것이 훨씬 좋겠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유라는 말도 현실에서는 많이 왜곡되게 해석되고 왜곡되게 쓰여서 생기는 문제들도 많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목을 ‘참자유로 나아가는 참지혜의 길’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경전자체가 길지 않으니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참자유로 나아가는 참지혜의 길
지금 여기, 자유자재로 관찰사유하는 참 사람 있네.
그는 참 지혜로 실천할 때
인연의 어울림으로 이루어진 다섯 무더기 모두 있지만
실제 비어있음을 잘 이해하여 대자유의 삶으로 나아갔네.
참 지혜의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 사리자여!
그대 몸 그대로 실제 비어있음과 다르지 않고
비어 있음 그대로 그대 몸과 다르지 않으며
그대 몸 그대로 비어있음이며 비어있음 그대로 그대 몸이니
느낌도 생각도 의지도 분별도 그러하네.
사리자여, 모든 사람의 비어있는 참모습엔
그대가 생각하는 태어남도 소멸함도 더러움도 깨끗함도 늘어남도 줄어듦도 본래 없네.
마찬가지로 몸도, 느낌도, 생각도, 의지도, 분별도, 눈도, 귀도, 코도, 혀도, 몸도, 뜻도 없네.
물질도, 소리도, 맛도, 향기도, 촉감도, 기억도,
눈의 경계로부터 귀와 코와 혀와 촉감과 기억의 경계도 없네.
알지 못함도, 알지 못함이 사라짐도,
늙고 죽음도, 늙고 죽음이 사라짐도,
괴로움도, 괴로움의 원인도, 소멸도, 소멸의 길도,
지혜도, 얻음도 없네.
얻을 것이 없으므로 보살행자는
참 지혜로 실천하는 이 길에 의지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음으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항상 해탈 열반의 삶을 살며
모든 붓다들도 이 길에 의지하여 깨달음의 삶을 완성하네.
그런 까닭에 알 수 있네.
이 길은 가장 신비하고 밝고 높은 진언이니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네.
그러므로 이제 그 진언을 말하여라.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어떠세요? 우리말로 훨씬 더 많이 풀었지요. 아직도 조금 미흡한 점이 있다고 느껴지지만 어느 정도는 거의 풀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을 푸는데 저라고 별 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과 계속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다듬고 또 다듬고, 그런 과정을 거쳐 좀 더 나은 쪽으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애써 가꾸어가는 우리 삶과 같지요.
그러한 삶을 모범적으로 보여주신 분이 붓다입니다. 그분은 붓다가 되고 나서 어떻게 사셨나요? 애써 노력하지 않고 그냥 재미있고 편안하게 사셨나요? 전혀 그렇지 않죠. 어쩌면 붓다야말로 당신이 알아낸 반야심경의 사상과 정신을 자신의 삶이 되도록 하기 위해 죽음의 순간까지 전력투구했습니다. 붓다의 거룩함, 위대함이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부를 하면서 확인한 것은 존재의 실상, 자신의 참모습을 제대로 아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붓다와 중생의 차이는 제대로 알고 사는가, 모르고 사는가의 차이입니다. 인생을 제대로 알고 살면 붓다이고, 인생을 잘못알고 살면 중생인 거죠.
우리가 정신 바짝 차리고 붙잡아야 할 것은, 삶이란 아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앎이란 실제 삶으로 살았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입니다. 붓다는 인생의 이치, 세상의 이치를 전부 깨치고 아셨지만 죽음의 순간까지 일생 동안, 그 깨달음을, 그 앎을 삶으로 살아냄으로써 깨달음, 앎이 완성되도록 하기 위해 온 몸과 마음을 다 바쳤습니다. 그러니까 깨닫기 위해서만 땀을 뻘뻘 흘린 것이 아니고, 깨달음을 삶으로 살기 위해, 붓다로 살기 위해 계속 땀을 뻘뻘 흘리면서 정진하신 거죠. 단순히 깨달았다는 것만으로 붓다를 훌륭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깨달음을 삶으로 완성시켰기 때문에 붓다를 훌륭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 태어남도 소멸함도 없네
우리가 지난번에 “태어남도 소멸함도 없네.”까지 했지요?
반야심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한 마디로 공이라고 합니다. 반야심경은 아주 짧은 경전인데, 그 안에 빌 공(空), 아니 불(不), 없을 무(無)자가 엄청나게 나옵니다. 그 모든 것을 다 묶으면 ‘빌 공(空)’자 하나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은 이 공(空)자를 제대로 알고 산 사람이 붓다이고, 이 공(空)자를 잘 모르고 사는 사람이 중생입니다. 붓다와 중생의 차이는 이 공(空)자를 알고 사느냐, 모르고 사느냐의 차이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잘 알고 살면 그 삶이 괜찮아지고 잘 모르고 살면 그 삶이 고단해집니다. 잘 알고 살면 그 삶이 행복해지고 잘 모르고 살면 그 삶이 불행해집니다.
경전 상에는 그 표현이 없습니다만, 반야심경에서 강조하는 공(空)의 뜻을 실질적으로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려고 ‘그대가 생각하는’이라는 말을 넣어서 번역했습니다. 그렇게 해야 공의 본래 뜻을 이해하는데, 훨씬 좋지 않을까하는 마음에서입니다.
“사리자여 모든 사람의 비어있는 참모습엔(是諸法空相)
[그대가 생각하는 (당신이 생각하는 또는 내가 생각하는)]
태어남도 소멸함도 더러움도 깨끗함도 늘어남도 줄어듦도 본래 없네.”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 가십니까? 한 마디로 내가 생각하는 것과 실제는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내가 진짜라고 생각하는 것, 내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 등등 이 모든 것들이 대부분 본인의 생각, 사람들의 생각일 뿐 실제와는 전혀 다를 수 있음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비었다’, ‘없다’는 말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아니고 ‘네가 알고 믿는 것처럼 있지 않다’,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있지 않다’, ‘사람이 알고 있는 것처럼 있지 않다’. ‘사람이 생각하는 그대로는 없다’, ‘네가 알고 있는 것과 똑같이는 없다’는 거죠. 철석같이 그렇게 알고 믿었지만 실제로 확인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사람들은 끊임없이 ‘사랑은 영원히’라는 꿈과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사랑이 있다’고 믿기도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떨까요? 우리가 꿈꾸고 믿는 것처럼 실제로 사랑이 영원하던가요? 아마 그 기대와 믿음이 계속 깨져가는 과정이 실제 경험이 아닐까 싶습니다. 설혹 어떤 사랑이 죽을 때까지 지속되어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두 사람이 애써서 사랑이 지속될 조건을 잘 유지해가고 있는 것이지 ‘사랑 자체’가 영원해서 그런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존중과 감사의 조건이 깨지면 바로 사랑도 깨지는 것이 현실이죠. 그래서 ‘너 없이는 못 산다’며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지만 현실에서는 ‘너 때문에 못 살겠다’며 울고불고 싸우고 미워하며 갈라서는 일이 다반사지요. 그러니까 “영원한 사랑이란 실제 있는 것이 아니고 네 생각이고 말일 뿐이야”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이라는 것도 우리 현실의 삶에서 예로 들면, ‘네가 생각하는 영원한 사랑은 네 생각이고 믿음일 뿐 실제 그런 사랑은 없어’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항상 ‘나’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그 ‘나’의 정체성, 즉 내가 나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나는 이래’, ‘나는 저래’. 또는 ‘내가 최고야’. ‘나만이 진짜야’ 등등 그런 ‘나’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내 안에 내 정체성의 근거가 될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바깥’이 없으면 ‘안’이라는 것도 없고, ‘너’라는 대상이 없이는 ‘나’라는 것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나’라고 하는 것의 정체성의 근거는 바로 ‘너’가 되는 것입니다.
몸이라고 하는 것은 또 어떻습니까? 잘 생각해보면, 몸을 구성하는 것도 다 저 바깥에서 들어온 것입니다. 산소도, 물도, 밥도, 눈으로 보는 것도, 귀로 듣는 것도, 코로 냄새 맡는 것도, 몸으로 느끼는 것도, 온통 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것이지 않습니까? 내 몸 안에서 생성된다고 하는 호르몬 등 화학물질조차도 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요소들에 의해 생겨나고 사라집니다. 결국 바깥에서 들어오는 것에 의해 여기 내 몸이 유지되고 내 삶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것’이라고 붙잡을 것도 ‘내 것’이라고 내세울 그 무엇도 없는 것이죠. 다만 우리가 그것을 일상적으로 잘 인식하지 못하고 살기 때문에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뿐인 거죠.
마음, 정신은 또 어떻습니까? 우리의 마음, 정신은 안 그럴 것 같죠? 그러나 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 꽃을 보고 ‘야, 저 꽃 예쁘다’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바깥에 꽃이 없으면 ‘저 꽃 예쁘다’는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요즘 사람들이 ‘박근혜 대통령은 나쁜 사람’이라고 말하죠? 박근혜 대통령이 없으면 내 안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나쁜 사람”이라는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절대 안 생깁니다.
그러니까 육체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나’라고 하는 것의 정체성, 내가 여기에 존재할 수 있는 근거는 ‘내 안에 무엇’이 있어서가 아니라 온통 다 내가 만나고 있는 자연, 인연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겁니다. 따라서 나의 정체성이 따로 있다고 여기는 것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갖고 있는 생각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대가 생각하는 태어남도 소멸함도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러한 사실을 잘 알면 우리 삶에 어떤 도움이 될까요? 부처님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살면 그 삶이 자유롭고 평화로워진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 것일까요?
태어남과 죽음을 갖고 이야기를 해볼까요? 우리는 태어남에 대해 없었던 것이 생겨나는 것이니까 대단히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대단히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강한 집착을 갖게 됩니다. 강한 욕심을 부리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그럴 때 그 삶이 과연 편안할까요? 평화로울까요? 어떻습니까?
집착과 욕심은 절대 삶을 편안하게 하거나 평화롭게 하지 않습니다. 집착과 욕심은 모든 갈등과 싸움의 원인이기도 하고 무기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이 탄핵정국도 따지고 보면 인생에 대해 잘못 알고 강하게 집착하고 강하게 욕심을 일으켰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제대로 알게 되면 우리 삶을 부자유스럽게 만들고 불안하게 만들고 황폐하게 만드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겁니다. 불안과 공포로부터 편안해진다는 겁니다.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죽음, 그런 것은 없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태어남은 좋다고 생각하니까 축하하고, 죽음은 나쁘다고 생각하니까 슬퍼합니다. 태어나면 웃고 죽으면 웁니다. 죽음에 대해 울기만 합니까? 대단히 무서워합니다. 어쩌면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큰 불안과 공포의 조건이 죽음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으로부터의 단절이기도 하고, 모든 것의 상실이기도 하고, 알 수 없는 미지의 것이기도 하니까요. 쉽게 말해서 좋아하는 사람, 좋은 인연이 끝나는 겁니다. “더 이상 내가 좋아하는 애인의 얼굴을 볼 수 없어”, “더 이상 내가 사랑하는 아이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없어”, 또는 “내가 좋아하는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없어”, “내가 좋아하는 생활도 할 수 없어” 등등 온갖 것이 슬픔이고 고통이 됩니다. 그리고 내가 좋다고 생각해서 이루어놓은 것들을 다 잃어버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재산일 수도 있고, 명예일 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있고, 지식일 수도 있습니다. 죽음은 이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단절이고 상실입니다.
그리고 죽은 다음의 일도 알 수가 없으니 두렵기만 합니다. 보통 회자되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무시무시하고 겁나는 이야기들이잖아요?
“죽으면 지옥에 간대”
“왜?”
“살아서 죄를 많이 지었으니까.”
보통 우리는 살아서 죄를 많이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죽으면 지옥에 갈지 모른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죠. 그러니 어마어마하게 두려울 수밖에 없는 거죠. 우리는 죽음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고, 고통이고, 두려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슬프고, 고통스러워하고, 두려워합니다. 물론 실제로 죽음 때문에 생기는 고통도 없지 않겠지요. 그러나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를 드렸지만 실제 겪어보면 감당할 만합니다.
그렇다면 실제 태어남과 죽음은 무엇인가? 태어남과 죽음은 끊임없는 변화의 현상입니다. 마치 바다의 파도처럼. 바다에 파도가 생겼습니다. 없던 것이 새로 생긴 건가요? 아니면 있던 것이 그냥 움직인 현상인가요? 없었던 것이 생긴 게 아니라 있는 바닷물이 움직인 것일 뿐입니다. 마치 사람이 앉았다 일어섰다,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그러면 바다의 파도가 가라앉으면 있었던 것이 없어지는 걸까요? 그것도 그냥 움직이는 현상일 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시작과 끝이 아닌 겁니다. 없었던 것이 새로 생겼거나 있었던 것이 영원히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변화일 뿐입니다. 변화의 한 현상이 파도가 일어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가라앉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끝내는 바다일 뿐입니다. 잔잔한 것도 바다고, 파도가 이는 것도 바다입니다. 이러나저러나 바닷물입니다. 다만 움직이고 있을 뿐, 변화하고 있을 뿐입니다.
죽음 역시 영원히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변화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죽음의 이별을 하게 되었을 때, 비록 내가 알고 기억하고 있는 그 모습은 아니지만 또 다른 모습, 또 다른 내용으로 어디에선가 늘 함께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아마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나의 관점과 태도도 달라지지 않을까요? 그리고 죽어서 영원히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하는 것과 변화된 모습이지만 어디에선가 늘 나와 함께 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의 마음은 많이 다를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실제를 제대로 파악하면 태어남과 죽음에 대해 잘못 알고 잘못 생각하고 잘못 느끼기 때문에 생기는 탐욕과 집착,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어느 하나만을 좋아해야 할 이유도, 특별히 욕심 부려야 할 이유도 없어지니 편안해질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죽음은 알 수 없는 새로운 곳으로 여행가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 어떨까요? 대단한 설렘으로 기다리거나 아니면 기꺼이 받아들이게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되면 죽음은 자연스럽게 또는 흔연하게 또는 여행가듯이 받아들일 수 있겠죠. 얼마나 자연스럽고 평화스럽습니까. 공의 뜻을 잘 알고 삶에 적용하면 삶이 자유롭고 평화로워진다는 말은 틀림없는 것입니다.
사실 ‘불생불멸(不生不滅)’에 대해서만 잘 알면 반야심경을 다 안 것입니다. 공(空)이라고 하는 말이 갖고 있는 내용, 공(空)이라고 하는 말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알려주려고 하는 내용이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이거든요.
우리 절 이름이 실상사인데, 이 ‘실상’이라는 말은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이라는 뜻이죠.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나는 누구인가.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너는 누구인가. 공(空),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 절 천왕문 앞에 걸려 있는 주련을 읽어보셨죠? 거기에는 ‘가득함도 빛나고 비움도 빛나라’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가득함도 빛나고 비움도 빛나는 것이 실상입니다. 그런데 보통 우리는 가득 찬 것은 좋다고 생각하지만 빈 것은 안 좋다고 생각하잖아요. 우리 신도님들은 그렇지 않은가요.(웃음)
그런데 왜 ‘가득함도 빛나고 비움도 빛나라’라고 했을까. 가득함도 비움도 다 쓸모가 있다, 잘 쓰기만 하면 다 괜찮다, 더 나아가 삶을 자유롭고 평화롭게 하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잘 관찰해보면 실제로는 비어있기 때문에 가득함이 생길 수 있고, 비움은 가득함이 가능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지요. 가득함과 비움은 동전의 양면 같은 거예요. 한 손의 손바닥과 손등 같은 관계이기도 하지요. 이것이 있는 그대로의 실제입니다. 이것이 ‘있는 그대로’, 즉 실상,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입니다.
우리 삶이 자유로워지고 편안해지려면 실상, 즉 공(空)의 정신을 거듭거듭 되새기면서 잘 파악하고 잘 이해하고, 실제 삶에 적용시켜보는 것이 삶의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붓다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불자들이라고 하면, 항상 그런 관점과 태도로 삶을 바라보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개인의 삶, 가정에서의 삶, 이웃과 함께 하는 삶, 그리고 이 세상 어떤 일이라고 해도, 우리 삶의 문제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부분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찬가지로 비어있는 참모습엔
그대가 생각하는 몸도, 느낌도, 생각도, 의지도, 분별도,
눈도, 귀도, 코도, 혀도, 몸도, 뜻도 없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내 몸이라는 것이 실제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금강경> 마지막 구절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지요.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인연으로 이루어진 오온의 존재는
꿈과 같고, 아지랑이와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 같네.
마땅히 이렇게 보아야 하네. (그렇게 하면 삶이 편안하고 자유롭네.)
꿈속의 내 몸을 붙잡을 수 있습니까? 아지랑이 같은 내 몸을 붙잡을 수 있겠습니까? 그림자 같은 내 몸을 붙잡을 수 있겠습니까? 물거품 같은 내 몸을 붙잡을 수 있겠습니까? 붙잡을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인연으로 이루어져 분리독립, 고정불면한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사실대로 잘 이해하고 그에 맞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그 삶이 평화롭고 자유롭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붙잡을 수 있다’, ‘붙잡을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는 사람들의 관념일 뿐입니다. 실제는 그런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사실대로 알게 되면 내 몸과 마음을 바라보고 내 몸과 마음을 대하는 태도도 확 달라지겠죠? 내 몸과 마음으로 인해 생기는 여러 가지 불편함과 힘듦도 자연스럽게 떨어져가겠죠. 요즘 언론에 자주 나오는 최순실 씨도 예쁜 피부, 건강한 피부를 위해를 만들겠다고 몇 천만 원짜리 시술을 받고 그러는 거잖아요. 그렇게 되는 이유도 실제 내 몸과 마음에 대해 잘못 파악하고 이해하고 사용해서 생긴 현상인 거죠. 그 결과가 온 나라를 파국으로까지 몰고 갔잖아요. 잘못 알고 잘못 생각하고 잘못 믿은 것을 따라서 대책을 세우면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만들지 않아도 될 문제들을 많이 야기시키고, 하지 않아도 될 고생들을 하게 되고, 그래서 본인도 괴롭고 다른 사람도 괴롭고 국민들도 괴롭게 되고… 이게 중생의 삶인 거죠.
그러니까 자유롭고 평화롭고 행복하려면 이 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나의 참모습, 인생의 참모습에 대해 올바른 이해가 있어야 삶을 제대로, 본인이 희망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내 몸은 없다. 내 생각도 없다. 내 느낌도 없다. 내 의지도 없다. 내 분별도 없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인생은 허망한 거야’, ‘삶은 허무한 거야’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경전에 ‘없다’, ‘아니다’라는 말이 많이 나오니까 자칫 허무한 것으로 느껴질 수 있는데, 그런 이야기가 절대 아닙니다. 불교는 ‘있다’와 ‘없다’를 양극단이라고 해서 부정합니다. ‘인생이 영원하다’고 단정하는 것도, ‘삶은 허무하다’고 단정하는 것도, 인생의 참모습에 대한 잘못된 판단이고 이해입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는 인생을 어떻게 보는가? 그 양극단을 버리고 양극단을 넘어서서 ‘있는 그대로’ 인생을 봐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인생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듣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인생은 허무한 존재야”, 누군가는 “인생은 영원한 존재야”라고 하죠. “육체는 허망하지만 영혼은 영원해”이런 이야기도 하죠. 불교에서는 그렇게 단정하는 것을 부정합니다. 영원하다는 것도 인생의 한 측면만 본 것이고, 허무하다는 것도 인생의 한 측면만 본 것이기 때문에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 거죠.
그러면 어떻게 보는 것이 제대로 이해하는 것인가. 아까 바다와 파도의 비유를 들어 이야기했잖아요. 파도만 떼어서 보면 허무합니다. 사라져버리잖아요. 그런데 파도가 그대로 바다라고 생각하면 다릅니다. 영원한 것이죠. 거듭 말씀드리지만, 없었던 것이 생기고 있었던 것이 영원히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변화할 뿐입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존재하는 거예요. 그러니 변화하는 현상만 보면 인생은 허망한 것이 되죠. 유지되는 것만 보면 인생은 영원합니다. 따라서 어떤 측면에서 보느냐에 따라 영원하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한 거죠. 또는 영원하지도 않고 허무하지도 않죠. 바다와 파도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듯이 영원함과 허무함도 바다와 파도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을 중도적으로 본다고 합니다.
어떤 경우이든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공(空)의 정신으로 잘 관찰 사유하는 실력을 쌓아야 합니다. 반야심경을 외우는 게 공부가 아니라 그 정신으로 관찰하고 사유하는 것이 공부이고 수행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그렇게 해야 우리가 잘못 알고 믿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잘 쓰기만 하면 더 효과적이고 좋은 내용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경전을 ‘지혜의 경’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불생불멸(不生不滅) 한 구절을 이야기하기에도 벅차네요. 우리 삶을 자유롭고 평화롭게 하는 굉장한 의미를,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효과적으로 잘 쓸 수 있도록 설명해 내는 게 너무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대단히 중요한 내용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또 하고 또 하면서 조금씩 터득해가는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자, 이제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시점에 섰습니다. 모쪼록 참지혜의 길을 끊임없이 천착하고 천착해서 대자유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한 해를 잘 마무리하고 또 새로운 해를 잘 맞이할 수 있도록, 정진했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실상사 보현법회는 매달 세 번째 일요일 오전10시에 있습니다.
현장에서 들으면 더욱 생생한 깨침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