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법스님 보현법회 11월 법문
화엄경 세주묘엄품과 실상사.산내마을 법계공동체 8
일상의 거룩함을 알고 대자비심으로 살아가라
도법스님 (실상사 회주)
근래 우리 사회에는 놀라운 혁명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박원순 씨의 서울시장 당선도 그 한 예가 될 것입니다. ‘혁명’이라고 하니까 무시무시한 생각부터 들죠? 혁명이 뭐 별 것이겠습니까. 현실로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현실이 되는 게 혁명이죠. 부처님은 제행무상(諸行無常), 즉 우리 삶은 혁명적으로 이루어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변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든,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든 관계없이 실제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상도, 정신도, 신념도 모두 변해갑니다. 깨어있는 사람은 그 변화를 읽고 그 흐름과 함께 하면서 선한 방향으로 사회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반면 깨어있지 못하면 변화를 느끼지 못하므로 현실에 안주하거나 심지어 그 흐름에 역행하는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삶의 보수화입니다.
불교에서는 특히 현장의 일상에서 깨어있음을 강조합니다. 깨달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현장의 일상에 주목하지 못하고 일상과 현장을 벗어나 특별하게 하는 것만 수행인 양 생각하는 경향마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지 말라고 “마음이 곧 부처다”, “평상심이 도다”,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스승들이 남긴 오도송이나 경책을 봐도 내용은 존재의 거룩함, 일상의 거룩함, 현장의 거룩함에 대한 찬탄이죠. 부처님 말씀도 다 모아서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바로 ‘일상의 거룩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팔정도도 요새말로 하면 상식과 교양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정견(正見)을 예로 들면, ‘잘 보라’는 거잖아요.
전 시간에 화엄경의 수행체계는 신 ․ 해 ․ 행 ․ 증(信解行證)의 네 가지로 나눌 수 있고, 더 나누면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 등 다섯 가지가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십지보살들은 어떤 사람들이고, 그들은 부처님을 어떻게 보았는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오늘은 십회향을 상징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먼저 예를 들어 설명해보죠. “서진암(실상사 산내암자)에 가면 인생의 꿈을 활짝 펼 수 있다. 그러므로 반드시 서진암을 찾아가야 한다”고 가정합시다. 서진암은 실상사 북쪽에 있고, 천왕문과 해탈교를 지나… 매동마을로 해서 올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사람이 인생의 꿈을 활짝 펼 수 있는 목적지와 길과 방법을 모르는 채 삶을 살아야 한다면 그 삶이 숨막히게 답답하고 불안초조하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죠. 이럴 때 비록 목적지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희망의 땅인 목적지와 가는 길과 방법만 확실하게 알아도 가슴 설레지 않겠습니까. 부처님을 공부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를 통해 인생의 꿈을 실현할 목적지와 가는 길과 방법에 대해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간경 ․ 참선 ․ 염불 등 열심히 불교공부를 하는데도 뚜렷한 확신이 확립되지 않는다면 그 불교공부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죠.
화엄경의 수행체계에 따르면 서진암이 어디에 있는지 잘 아는 것을 십신, 서진암으로 가는 길과 방법을 잘 아는 것을 십주, 그리고 그 길과 방법에 따라 실제로 가는 것을 십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회향은 이 십행에 속합니다.
자, 그러면 십회향에 대해 말해봅시다.
사람들은 좋은 것이 생기면 자꾸 자기 것으로 하고 싶어합니다. 내 것, 우리 집 것, 내 편 것…. 십회향은 그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생각과는 달리 실제는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거든요.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전도몽상이죠. 그게 다 두 눈이 어두워서 그러는 거예요. 실제 내용을 잘 보면[正見], 세상은 온통 함께입니다. 그 실상을 모르고 자기 생각에 따라 사리사욕을 일으키는데 그것이 문제입니다. 자본주의사회가 문제인 것은 이 사리사욕을 추구하도록 끊임없이 자극하고, 확대시키고… 마치 그것을 쫒는 것이 인생의 희망인 것처럼 믿도록 만들기 때문인 거죠.
십회향은 존재의 법칙, 생명의 법칙이 더불어 함께 나누도록 되어 있으므로 우리도 그 법칙에 따라 마음쓰고 살아야 행복하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예를 들어 서진암으로 가는데 열 걸음 가면 열 걸음, 백걸음 가면 백 걸음만큼 진전되겠죠. 그럴 때 그 성과를 사유(私有)하지 말고 골고루 함께 누려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치 태양이 자기 빛의 성과를 사유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거쳐서 서진암에 도달한 상태를 십지라고 하는데, 그것을 우리는 소위 깨달았다, 깨달음을 체험했다, 성인이 되었다, 완성했다고 표현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섯 단계로 설명하고 있지만, 사실 내용으로 보면 같은 내용을 출발점, 중간, 종착점 등의 입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공부하는 십회향을 상징하는 인물들의 삶에 대한 내용도 특별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대충은 다 짐작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도 그냥 넘어가기는 아쉬움이 있으니까 그 중에 하나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광명안천자(光明眼天子)는 모든 중생의 눈을 깨끗하게 다스려서 법계의 창고를 보게 하는 해탈문을 얻었고’
광명안천자의 살림살이에 대한 설명입니다. ‘광명’ 하면 오색찬란한 무지개빛 같은 것이 떠오르죠? 여기서는 그런 게 아니고 어두운 눈이 밝아졌다는 겁니다. 눈이 어둡다는 것은 안 보인다는 거죠. 그러니 좌충우돌 부딪치게 됩니다. 우리가 부닥치는 문제들이 다 눈이 어두워서 그런 겁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견(正見), 주의 깊게 잘 봐야 합니다. 문제를 확실하게 보면 문제를 풀 길이 잘 보입니다. 잘 보는 것, 제대로 보는 것을 광명이라고 합니다.
다음으로 ‘법계의 창고’라는 말이 있는데, ‘창고’ 하면 얼른 떠오르는 게 뭐죠? 그래요. 보물입니다. 온갖 보물이 꽉 차있는 창고를 보게 한다는 것인데, 이게 무슨 말일까요? 바로 존재의 거룩함, 일상의 거룩함, 현장의 거룩함에 눈 뜨게 한다는 것입니다. 눈을 뜨고 보면 지금 여기 자신, 내가 발 딛고 있는 현장,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보물창고임을 알 수 있다는 거죠.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다음 남은 일은 보물을 잘 쓰는 일이죠? 광명안천자는 중생들로 하여금 보물창고를 잘 써서 행복하게 살도록 하려고 애쓰는 대자대비심으로 살아가는 인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광명안천자가 본 부처님은 어떤 분일까요?
‘광명의 그물을 놓아 불가사의함이여, 널리 모든 중생들을 깨끗하게 하사 모두 다 깊은 믿음과 이해를 내게 하시도다.’
인용한 경전내용은 사람들에게 존재의 거룩함, 일상의 거룩함, 현장의 거룩함을 알게 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물고기에게 1억자리 서울당이 좋겠습니까, 물이 더 좋겠습니까? 당연히 자신의 생명이 달린 평범한 물이 더 거룩하지요.
마찬가지로 모든 존재의 그 존재나름의 거룩함의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광명안천자가 볼 때 부처란 중생들에게 일상의 거룩함, 존재의 거룩함, 현장의 거룩함을 잘 알고 확신해서 쓸데없이 다른데 힘쓰고 헤매지 않는 삶을 살도록 하는 대자대비의 존재라는 이야기입니다.
십회향에 대해 열 분의 인물들이 등장해서 자신의 삶과 부처님의 삶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설명하고 있는데, 비록 표현은 다르지만 다루는 내용은 거의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가 내려야 하는 결론은 무엇일까요?
십회향을 상징하는 인물들의 삶도, 그분들이 본 부처님의 살림살이도 내용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는 일상의 거룩함, 존재의 거룩함, 현장의 거룩함을 아는 것이고, 다음은 대자비심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게 가능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잘 봐야 합니다. 대상은 자신일 수도 있고, 상대방일 수도 있고, 또 현장일 수도 있겠죠. 잘 보면 존재의 거룩함, 일상의 거룩함, 현장의 거룩함, 즉 본래부처가 보입니다. 그리고 본래부처니까 부처답게 살아야겠죠. 부처답게 사는 것을 달리 표현하면 대자비심입니다.
사실 일반적으로는 자기중심의 이기적 행동이 자신에게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정말 그럴까요? 미안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법이 상대를 사랑하지 않고는 자신을 사랑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상대를 욕하면 상대도 나를 욕하겠죠. 스스로 욕 듣게 만들면서 자신을 사랑한다고 할 수는 없잖습니까. 우리 속담에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도 곱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화목하고 평화롭죠.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이게 기적이고 불가사의고 불법의 영험인 거죠.
하지만 실제 경험해보면 언어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한 생각 바꾸는 게 쉽지만은 않죠. 그렇습니다. 그러나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항상 자비심으로 보고, 말하고, 행동하는 수밖에… 그렇게 하다보면 절로절로 무르익기도 하고, 더 풍부해지기도 하고, 깊어지기도 합니다.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도 다른 게 아니라 법의 내용을 병에 따라 이렇게도 이야기하고 저렇게도 이야기하고… 거듭거듭 일러주신 것이거든요. 그러므로 우리가 부처님 제자라면, 불교를 하려면, 일상의 거룩함과 신비함을 보고 이해하고 믿음을 내야 합니다. 죽을 힘을 다해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 길밖에 다른 길이 있지 않습니다.
도법스님 보현법회 11월 법문
화엄경 세주묘엄품과 실상사.산내마을 법계공동체 8
일상의 거룩함을 알고 대자비심으로 살아가라
도법스님 (실상사 회주)
근래 우리 사회에는 놀라운 혁명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박원순 씨의 서울시장 당선도 그 한 예가 될 것입니다. ‘혁명’이라고 하니까 무시무시한 생각부터 들죠? 혁명이 뭐 별 것이겠습니까. 현실로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현실이 되는 게 혁명이죠. 부처님은 제행무상(諸行無常), 즉 우리 삶은 혁명적으로 이루어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변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든,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든 관계없이 실제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상도, 정신도, 신념도 모두 변해갑니다. 깨어있는 사람은 그 변화를 읽고 그 흐름과 함께 하면서 선한 방향으로 사회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반면 깨어있지 못하면 변화를 느끼지 못하므로 현실에 안주하거나 심지어 그 흐름에 역행하는 일도 서슴지 않습니다. 그게 바로 삶의 보수화입니다.
불교에서는 특히 현장의 일상에서 깨어있음을 강조합니다. 깨달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현장의 일상에 주목하지 못하고 일상과 현장을 벗어나 특별하게 하는 것만 수행인 양 생각하는 경향마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지 말라고 “마음이 곧 부처다”, “평상심이 도다”,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스승들이 남긴 오도송이나 경책을 봐도 내용은 존재의 거룩함, 일상의 거룩함, 현장의 거룩함에 대한 찬탄이죠. 부처님 말씀도 다 모아서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바로 ‘일상의 거룩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팔정도도 요새말로 하면 상식과 교양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정견(正見)을 예로 들면, ‘잘 보라’는 거잖아요.
전 시간에 화엄경의 수행체계는 신 ․ 해 ․ 행 ․ 증(信解行證)의 네 가지로 나눌 수 있고, 더 나누면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십지(十地) 등 다섯 가지가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십지보살들은 어떤 사람들이고, 그들은 부처님을 어떻게 보았는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오늘은 십회향을 상징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먼저 예를 들어 설명해보죠. “서진암(실상사 산내암자)에 가면 인생의 꿈을 활짝 펼 수 있다. 그러므로 반드시 서진암을 찾아가야 한다”고 가정합시다. 서진암은 실상사 북쪽에 있고, 천왕문과 해탈교를 지나… 매동마을로 해서 올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사람이 인생의 꿈을 활짝 펼 수 있는 목적지와 길과 방법을 모르는 채 삶을 살아야 한다면 그 삶이 숨막히게 답답하고 불안초조하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죠. 이럴 때 비록 목적지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희망의 땅인 목적지와 가는 길과 방법만 확실하게 알아도 가슴 설레지 않겠습니까. 부처님을 공부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를 통해 인생의 꿈을 실현할 목적지와 가는 길과 방법에 대해 확신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간경 ․ 참선 ․ 염불 등 열심히 불교공부를 하는데도 뚜렷한 확신이 확립되지 않는다면 그 불교공부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죠.
화엄경의 수행체계에 따르면 서진암이 어디에 있는지 잘 아는 것을 십신, 서진암으로 가는 길과 방법을 잘 아는 것을 십주, 그리고 그 길과 방법에 따라 실제로 가는 것을 십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회향은 이 십행에 속합니다.
자, 그러면 십회향에 대해 말해봅시다.
사람들은 좋은 것이 생기면 자꾸 자기 것으로 하고 싶어합니다. 내 것, 우리 집 것, 내 편 것…. 십회향은 그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생각과는 달리 실제는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거든요.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전도몽상이죠. 그게 다 두 눈이 어두워서 그러는 거예요. 실제 내용을 잘 보면[正見], 세상은 온통 함께입니다. 그 실상을 모르고 자기 생각에 따라 사리사욕을 일으키는데 그것이 문제입니다. 자본주의사회가 문제인 것은 이 사리사욕을 추구하도록 끊임없이 자극하고, 확대시키고… 마치 그것을 쫒는 것이 인생의 희망인 것처럼 믿도록 만들기 때문인 거죠.
십회향은 존재의 법칙, 생명의 법칙이 더불어 함께 나누도록 되어 있으므로 우리도 그 법칙에 따라 마음쓰고 살아야 행복하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예를 들어 서진암으로 가는데 열 걸음 가면 열 걸음, 백걸음 가면 백 걸음만큼 진전되겠죠. 그럴 때 그 성과를 사유(私有)하지 말고 골고루 함께 누려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치 태양이 자기 빛의 성과를 사유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거쳐서 서진암에 도달한 상태를 십지라고 하는데, 그것을 우리는 소위 깨달았다, 깨달음을 체험했다, 성인이 되었다, 완성했다고 표현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섯 단계로 설명하고 있지만, 사실 내용으로 보면 같은 내용을 출발점, 중간, 종착점 등의 입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공부하는 십회향을 상징하는 인물들의 삶에 대한 내용도 특별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대충은 다 짐작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도 그냥 넘어가기는 아쉬움이 있으니까 그 중에 하나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광명안천자(光明眼天子)는 모든 중생의 눈을 깨끗하게 다스려서 법계의 창고를 보게 하는 해탈문을 얻었고’
광명안천자의 살림살이에 대한 설명입니다. ‘광명’ 하면 오색찬란한 무지개빛 같은 것이 떠오르죠? 여기서는 그런 게 아니고 어두운 눈이 밝아졌다는 겁니다. 눈이 어둡다는 것은 안 보인다는 거죠. 그러니 좌충우돌 부딪치게 됩니다. 우리가 부닥치는 문제들이 다 눈이 어두워서 그런 겁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견(正見), 주의 깊게 잘 봐야 합니다. 문제를 확실하게 보면 문제를 풀 길이 잘 보입니다. 잘 보는 것, 제대로 보는 것을 광명이라고 합니다.
다음으로 ‘법계의 창고’라는 말이 있는데, ‘창고’ 하면 얼른 떠오르는 게 뭐죠? 그래요. 보물입니다. 온갖 보물이 꽉 차있는 창고를 보게 한다는 것인데, 이게 무슨 말일까요? 바로 존재의 거룩함, 일상의 거룩함, 현장의 거룩함에 눈 뜨게 한다는 것입니다. 눈을 뜨고 보면 지금 여기 자신, 내가 발 딛고 있는 현장,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보물창고임을 알 수 있다는 거죠.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다음 남은 일은 보물을 잘 쓰는 일이죠? 광명안천자는 중생들로 하여금 보물창고를 잘 써서 행복하게 살도록 하려고 애쓰는 대자대비심으로 살아가는 인물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광명안천자가 본 부처님은 어떤 분일까요?
‘광명의 그물을 놓아 불가사의함이여, 널리 모든 중생들을 깨끗하게 하사 모두 다 깊은 믿음과 이해를 내게 하시도다.’
인용한 경전내용은 사람들에게 존재의 거룩함, 일상의 거룩함, 현장의 거룩함을 알게 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물고기에게 1억자리 서울당이 좋겠습니까, 물이 더 좋겠습니까? 당연히 자신의 생명이 달린 평범한 물이 더 거룩하지요.
마찬가지로 모든 존재의 그 존재나름의 거룩함의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는 광명안천자가 볼 때 부처란 중생들에게 일상의 거룩함, 존재의 거룩함, 현장의 거룩함을 잘 알고 확신해서 쓸데없이 다른데 힘쓰고 헤매지 않는 삶을 살도록 하는 대자대비의 존재라는 이야기입니다.
십회향에 대해 열 분의 인물들이 등장해서 자신의 삶과 부처님의 삶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설명하고 있는데, 비록 표현은 다르지만 다루는 내용은 거의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가 내려야 하는 결론은 무엇일까요?
십회향을 상징하는 인물들의 삶도, 그분들이 본 부처님의 살림살이도 내용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는 일상의 거룩함, 존재의 거룩함, 현장의 거룩함을 아는 것이고, 다음은 대자비심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게 가능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잘 봐야 합니다. 대상은 자신일 수도 있고, 상대방일 수도 있고, 또 현장일 수도 있겠죠. 잘 보면 존재의 거룩함, 일상의 거룩함, 현장의 거룩함, 즉 본래부처가 보입니다. 그리고 본래부처니까 부처답게 살아야겠죠. 부처답게 사는 것을 달리 표현하면 대자비심입니다.
사실 일반적으로는 자기중심의 이기적 행동이 자신에게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정말 그럴까요? 미안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법이 상대를 사랑하지 않고는 자신을 사랑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상대를 욕하면 상대도 나를 욕하겠죠. 스스로 욕 듣게 만들면서 자신을 사랑한다고 할 수는 없잖습니까. 우리 속담에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도 곱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화목하고 평화롭죠.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이게 기적이고 불가사의고 불법의 영험인 거죠.
하지만 실제 경험해보면 언어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한 생각 바꾸는 게 쉽지만은 않죠. 그렇습니다. 그러나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항상 자비심으로 보고, 말하고, 행동하는 수밖에… 그렇게 하다보면 절로절로 무르익기도 하고, 더 풍부해지기도 하고, 깊어지기도 합니다.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도 다른 게 아니라 법의 내용을 병에 따라 이렇게도 이야기하고 저렇게도 이야기하고… 거듭거듭 일러주신 것이거든요. 그러므로 우리가 부처님 제자라면, 불교를 하려면, 일상의 거룩함과 신비함을 보고 이해하고 믿음을 내야 합니다. 죽을 힘을 다해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 길밖에 다른 길이 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