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법스님_세주묘엄품 9_ 2011.12.11
오늘은 초기불전동호회 회원들이 오셔서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초기불교를 하시는 분들과 우리가 하는 불교가 대승불교인지 초기불교인지 모르는 분들, 또는 그게 그거겠지 하는 분들이 같이 모였네요.(대중 웃음) 덕택에 큰방이 꽉 찬 것 같습니다.
어디에선가 제가 본 글이 생각나는데요. ‘배우고 또 배우고, 익히고 또 익히고, 그러면 실력이 늘어나고, 그런 만큼 사람이 더 높아지고 더 커진다. 반면 덕스럽게 마음 쓰고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계속 작아지고 낮아진다. 노력하면 할수록 더 작아지고 낮아지고 더 비워지고 비워진다.’
어떻습니까. 높아지는 게 좋은 것 같습니까, 낮아지는 게 좋은 것 같습니까? 실력과 능력을 기르면 기를수록 지위도 더 높아지고, 권력도 더 막강해지고, 따라오는 돈도 당연히 더 많아지고 그러겠죠? 반면 덕스럽게 마음 쓰고 살면 살수록 거듭거듭 더 작아지고 낮아지는 삶이 된다고 하는데, 뒷 구절에서 강조되는 내용이 아마 우리가 늘 놓치지 않고 가야 될 부분이 아니겠는가 싶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끊임없이 높아지고 더 커지는 것만 좋은 것인 것처럼 떠들어대고 그에 따라 너도 나도 경쟁적으로 그것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더 많이 갖자, 더 많이 쓰자, 더 편해지자, 더 빨리 하자, 이런 것들이죠.
그런데 그렇게 해서 더 높이 올라가고 더 많이 갖고 더 커져서 삶이 평화롭고 행복하던가요? 제가 보기에는 아닙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이 올라가서 군림하고 내려다보고 행세하고 대접받을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삶이 평화롭거나 행복지지는 않습니다. 경험적으로 보면 오히려 비우면 비울수록,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작아지면 작아지는 만큼 삶은 더 평화롭고 행복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도 더 편안하고 따뜻하고 여유롭습니다.
법회를 할 때마다 청법가를 하는데 ‘덕 높으신 스승님’하고 시작을 하죠. 저는 사실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 내용 자체가 너무 무겁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격식, 형식을 다 깨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하자니 무겁고 재미도 없고… 늘 그렇습니다. 저는 사실 덕이 높은 것도 아닌데, 살다보니 나이를 먹고 연륜이 쌓이고… 그러면서 떠밀려서 자리도 높아지고 마음이 내키든 안 내키든 해야 할 일이 생기고… 그 결과로 오늘 이 자리에 앉게 된 셈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강을 건너는 뗏목
부처님 가르침을 보통 강을 건너는 뗏목에 비유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불교역사의 현상들을 보면 부처님 가르침의 본뜻과는 달리 전개되는 게 공통적인 현상인 것 같습니다.
불교사를 한 번 볼까요? 어떻습니까. 부처님 가르침이 강을 건너는 뗏목이니 당연히 초기불교도 강을 건너는 뗏목이겠죠? 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초기불교라는 뗏목이 너무 좋다. 나에게는 이것 말고는 없다. 죽으나사나 나는 뗏목과 같이 하겠다’라고 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강을 건널 수가 없겠죠. 고통 받는 이 언덕에서 고통 없는 저 언덕으로 가야 하는데 뗏목에 강하게 애착해서 붙잡고 있으면 저 언덕으로 갈 수가 없잖아요.
해탈열반의 저 언덕으로 가기 위해 초기불교라는 뗏목에 올라탔는데 그 뗏목에 갇혀버리면 그 강을 벗어나지 못하니 해탈열반에는 도달하지 못한다는 거죠. 살다 보면 늘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본래의 목적과 취지를 잃어버리고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는 일이 대부분이죠. 당연히 문제가 생기고 폐단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등장하는 게 무엇일까요? 그렇죠. 대승불교라는 뗏목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대승불교라는 뗏목을 갖고 살다보니 또 다시 대승불교에 갇히게 되는 경우들이 생기는 거예요. 초기불교를 비판하고 부정하고 내버리고 새롭고 더 좋은 대승불교라는 뗏목에 올라탔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대승불교라는 이 뗏목이 제일이야, 이게 전부야, 이것 말고는 없어’라고 그것에만 집착하게 되는 거예요. 생각해 보십시오. 실제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강을 건너는 게 목적이잖아요. 아무리 대승불교라는 뗏목이 제일이고 최고이고 전부라고 하더라도 강을 건너려면 그 뗏목을 버려야 가능한 건데 ‘이게 제일이고 최고니까 이것과 함께 할 거야’ 하고 붙잡고 있으면 강을 건널 수가 없죠. 아무리 제일이고 최고의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집착하면 병이 되고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현실을 살펴보면 그런 폐단들이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상황이 그런 만큼 또 다시 필요에 따라 그 다음은 선불교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선불교 역시 세월이 흐르면서 똑같은 폐단을 야기하게 됩니다.
한 번 따져봅시다. 무엇이 문제인가요? 초기불교? 대승불교? 아니면 선불교가 문제인가요? 아니죠? 초기불교도 대승불교도 선불교도 강을 건너는 뗏목일 뿐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뗏목에 있는 게 아니고 뗏목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문제죠.
흔히들 한국불교를 선불교 전통이라고 말합니다. 역시 오래 되다 보니 선불교도 본말이 전도되어서 많은 문제와 폐단이 나타나고 모순과 혼란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모순과 혼란이 생기면 대부분은 어떻게 하죠? 되돌아보게 됩니다. ‘처음에는 어땠을까?’를 묻게 됩니다. 만약 선불교라는 뗏목으로 현재 우리 삶의 문제를 속 시원하게 해결할 수 있다면, ‘왜 이럴까’하고 돌아볼 일도 없고, 초기불교를 다시 찾을 필요도 없었을 겁니다. 그렇지 못하니까 ‘처음에는 어떻게 했을까’ 하고 되묻게 되고, 최근 초기불교에 대한 관심이 유행처럼 나타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문제의 현상인 거죠.
불교역사의 현장을 보면 대체적으로 불교의 정법정신과 어긋나는 경향이 너무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불교안에서 서로를 부정하고 배척하는 거죠. 초기불교는 대승불교를 부정하고 배척하고, 대승불교는 초기불교를 부정하고 배척하고, 선불교는 교학을 부정하고 배척하고, 교학은 선불교를 배척하고 부정하고… 그리하여 서로 반목하고 싸우고 그러죠. 어떤 명분을 갖고 싸우든지간에 다투는 게 평화롭고 행복할 리는 없죠? 아무리 정의로운 명분이라고 해도 마찬가집니다. 다투면서 평화롭고 행복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그렇게 서로를 부정하고 배척하면서 심각한 싸움들이 벌어지니까 원효스님이 나서서 다툼을 화해시키는 화쟁론을 쓰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이 법회에 참석한 분들의 면면을 보면 초기불교, 대승불교, 선불교를 하는 분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매우 뜻깊은 자리입니다. 어떠신가요? 서로를 부정하고 배척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하고 허심탄회하게 소통하고 있습니까? 혹시 속으로는, ‘그래봐야 대승불교가 최고야, 다른 건 다 시시해’ 또는 ‘초기불교가 진짜야, 다른 건 가짜야’ 그러고 계신 것은 아니죠?(웃음) 어떠세요? 만약 그러고 있다면 초기불교를 하든 대승불교를 하든 우리 모두는 불교를 잘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오늘 이 자리는 어떤 의미에선 2600년 불교사에서 있었던 과오나 오류를 반성하고 부처님이 뜻했던 불교를 제대로 해보려는 역사적인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초기불교라고 표현하든 대승불교라고 표현하든 선불교라고 표현하든 교학불교라고 표현하든, 그것은 사람들의 고통과 불행의 문제를 해결해서 평화롭고 행복한 삶으로 인도하기 위한, 똑같은 목적의 나룻배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인정하면서 소통과 공감이 이뤄진다면, 오늘 이 순간이야말로 불교의 본래면목을 제대로 드러내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오늘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할지 혼란스럽습니다. 어쨌든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게 화엄경 세주묘엄품이니 그 이야기를 해야 하겠죠. 처음 오신 분들이 계셔서 경전 구절 하나하나 읽어가는 것은 별로 도움되지 않을 듯합니다. 아마도 총론적으로 정리하면서 설명해야 하므로 중언부언이 될 수도 있겠지만 어쩌겠습니까.
부처님 가르침을 망라하는 말씀
천상천하유아독존 삼계개고아당안지 = 본래부처와 동체대비행 = 인드라망존재와 보현행원
다함께 생각해봅시다. 초기불교가 되었든 대승불교가 되었든 우리 불교사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망라하는 한 마디, 한 구절을 찾는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아마도 팔상성도(八相成道)의 첫마당인 탄생게의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화엄경적 표현으로 하면 ‘본래부처와 동체대비행’ 또는 ‘인드라망 존재와 보현행원’이 아닐까, 싶습니다.
처음 오신 분들이 계시니 잠깐 인드라망이라는 말에 대해 설명을 하겠습니다. 대부분 아시다시피 부처님이 깨닫고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진리를 연기법이라고 하죠. 이 세상은 온통 인연 조건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초기불교에서는 연기법이라고 표현하는데, 그것이 화엄경에 오면 ‘중중무진연기법(重重無盡緣起法)’으로 표현됩니다. 끝은 똑같이 ‘연기법’인데, 화엄경에서는 앞에 중중무진, 즉 ‘겹겹으로 무궁무진하게’라는 수식이 더 붙어있지요.
이 두 가지 표현은 무엇이 다를까요? 굳이 비교해서 본다면 초기불교의 연기법은 부처님이 깨달은 법을 평면적으로 개념화했다고 한다면, 화엄경은 총체적으로 입체적으로 개념화시킨 거죠.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입체적이고 총체적으로 개념화한 중중무진연기법을 더 쉽고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비유로 표현한 게 인드라망이란 개념입니다. 그리고 화엄경의 인드라망 존재, 인드라망 세계라는 개념을 또한 쉽고 명료하게 이해하도록 하는 그림이 바로 저 인드라망무늬입니다.
조금 더 설명을 드리면, 온 우주는 하나의 살아 있는 그물로 이뤄져 있고, 낱낱 존재는 그물의 그물코로 존재합니다. 그물의 그물코는 전부 연결되어 있죠? 그물의 그물코는 서로 의지하고 영향과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존재합니다. 연기적 존재, 연기적 세계를 입체적, 총체적 의미로 표현하면 중중무진연기의 존재, 중중무진연기의 세계, 그걸 비유로 말하면 인드라망 존재, 인드라망 세계인 것이죠.
우리 모두가 그물의 그물코처럼 존재하고 있는 게 실상이라면 너라는 그물코와 나라는 그물코는 하나일까요, 둘일까요? (청중: 하나입니다.) 진짜 하나예요? (네) 지금 대압은 일부분 맞기도 하고, 일부분은 틀리기도 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나라는 그물코와 너라는 그물코가 연결되어 있고 서로 의지해서 존재하니까 하나라고 볼 수 있지요. 그렇지만 분명 나라는 그물코가 있고 너라는 그물코가 있기 때문에 둘이기도 하죠. 그 실상을 중도적으로 표현하면 뭐라고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이기도 하고 둘이기도 한 거죠. 그렇습니다. 이것을 유식하게 한문으로 말하면 불일불이(不一不二)라고 합니다.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또는 ‘하나이기도 하고 둘이기도 하다’는 거죠.
마치 왼손과 오른손의 관계와 같지요. 왼손과 오른손은 서로 다르죠. 그러니까 둘이지요. 그러나 왼손과 오른손은 한 몸입니다. 그러니 하나이지요. 결국 이러한 존재의 실상을 제대로 표현하려면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또는 ‘하나이기도 하고 둘이기도 하다’라고 밖에 달리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어떤 측면을 보느냐에 따라 하나라고 말할 수도 있고 둘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총체적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너와 나는 하나야’라거나 ‘너와 나는 둘이야’라고 고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부처님은 극단적 견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양극단을 넘어서서 중도적으로 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나라는 그물코와 너라는 그물코, 왼손과 오른손을 중도적으로 보고 표현하려면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경전에서는 주로 불일불이(不一不二)라고 합니다. 이것을 상황에 따라 적재적소에 맞게 적용할 때엔 하나라고 표현할 필요가 있으면 하나라고 하기도 하고, 둘이라고 표현할 필요가 있으면 둘이라고 하기도 하는 거죠.
불교의 사유방식은, 어떤 경우이든 무엇이든 이와 같이 양극단을 넘어서서 중도적으로 보고 중도적으로 다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표현이 제일 많이 쓰여 있는 경전이 무엇이죠? (반야심경이요!) 네, 그래요. 반야심경입니다.
예를 들어 ‘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 空不異色)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 그 표현인 거죠. 이게 특별히 복잡하거나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거든요. 그냥 있는 사실을, 언어로 표현해낼 수 있는 한, 가장 적절하게 중도적으로 충실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처음 오신 분들이 많아서 화엄경에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 설명을 먼저 했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는 대부분 이해하고 공감이 될 겁니다. 지금부터는 화엄경을 공부해야 하는데, 가급적 이해가 될 수 있도록 설명하려고 노력하겠지만 시간적 한계가 있기 때문에 경전구절 하나하나를 설명하려면 어려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점 이해 바랍니다.
화엄경의 수행체계 - 신해행증 信解行證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화엄경의 수행체계는 신해행증(信解行證) 네 가지로 설명되고, 이것을 확대하면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 5가지로 설명됩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죠. 여기 실상사 마당에서 정면으로 바라보는 곳이 지리산 천왕봉인데, 천왕봉을 해탈열반의 세계라고 해봅시다.
신(信)이라는 것은 천왕봉에 대해 올바르게 파악하고 이해하고 천왕봉이 있는 방향과 위치를 잘 파악하고 이해하고 확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신심이란 ‘부처님께 열심히 절했더니 부처님 눈에서 광명이 나타났어.’ ‘열심히 기도를 하니 부처님이 꿈에 나타나셨어’ 하는 식으로 부처님의 영험, 기도의 영험을 빋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경전에서 말하고 있는 신심은, 우리가 도달할 목적지인 부처님 나라, 부처님 세계가 어떤 내용인지, 그곳은 어디에 있는지, 그것에 대해 잘 파악하고 이해하고 확신하는 것을 신(信), 즉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게 신심(信心)의 확립입니다.
그 다음, 해(解)라는 것은 천왕봉이라는 목적지가 있는 방향과 길, 그리고 그곳에 잘 갈 수 있는 방법과 기술을 잘 파악하고 올바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이 남았나요? 이제 직접 걸어가는 것이 남아 있죠? 걸어서 가든 자전거를 타고 가든 자동차를 타고 가든 목적지를 향해 직접 실천하는 것을 행(行)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직접 걸어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걸어가는 만큼 가까워지겠죠? 그리고 산으로 올라가면 올라가는 만큼 시야가 넓어집니다. 여기서는 천왕봉이 저렇게 작아보이지만 가까이 가고 높이 올라가면 훨씬 넓고 크게 보이겠죠. 천왕봉에 가까이 올라가는 만큼 시야가 더 크고 넓어집니다. 더 가까워지는 만큼 시야가 탁 트이는 현상을 깨달음의 체험이라고 합니다. 즉 증명되는 것이죠. 실천을 하면 체험하게 되잖아요. 체험이 곧 증명인 것입니다. 한 걸음 가면 한 걸음 간 만큼, 열 걸음 가면 열 걸음 간 만큼, 1m 올라가면 1m 올라간 만큼 10m 올라가면 10m 올라간만큼 시야가 트이지 않겠어요? 100m 올라가면 더 다르겠지요.
이와 같이 신해행증(信解行證), 즉 믿음, 이해, 실천, 체험이 화엄경 수행의 기본체계입니다. 화엄경 뿐만 아니라 어떤 불교든 대체로 이와 같은 수행체계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화엄경에서는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십회향에 대해 잠깐 더 설명을 드리면 우리는 보통 회향이라는 말을 끝낸다는 의미로 쓰는데, 회향은 완성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제대로 된 믿음인가, 제대로 된 이해인가, 제대로 가고 있는가, 법답게 제대로 체험되고 있는가를 완성시키는 것이 십회향의 정신입니다. 회향의 정신으로 신해행증이 이루어져야 제대로 된 신해행증인 것이죠.
그동안 세주묘엄품을 공부하면서 십지에서는 체험한 것을 상징하는 인물들에 대해 설명했고, 십회향에서는 완성의 조건을 상징하는 인물들에 대해 설명했고, 오늘은 십행, 즉 그 길을 걸어가는 인물들에 대해 설명할 차례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화엄경은 다른 경전과 차이가 있습니다. 다른 경전들이 연기법의 내용을 평면적으로 다루고 있다면 화엄경은 입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표현을 빌자면, 다른 경전이 수필이나 논문이라면 화엄경은 희곡이나 소설과 같습니다. 무수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하나의 드라마죠. 부처의 이름으로, 보살의 이름으로, 신의 이름으로, 천자의 이름으로, 왕의 이름으로… 온갖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연극으로 치면 연기자들인데, 실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연기자들을 통해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십행을 상징하는 인물들에 대한 얘기인데 사실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내용입니다. 다른 내용이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실상사에서 얘기하는 천왕봉과 한 십리 가서 얘기하는 천왕봉하고 같은 천왕봉입니까, 다른 천왕봉입니까? 같은 천왕봉이겠죠. 그렇듯 똑같은 천왕봉이지만 걸어가는 사람이 실상사에서 천왕봉을 이야기할 때와 십리를 가서 천왕봉을 이야기할 때와는 천왕봉을 설명하는 데 차이가 있겠죠. 그렇듯이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 - 이 다섯 단계로 이야기하는 것도 같은 얘기인데, 가기 전에 이야기하느냐, 십리를 가서 이야기하느냐, 삼십리를 가서 이야기하느냐의 차이가 있는 거죠. 내용이 복잡하게 되어 있기는 하지만 실제 맥을 짚어보면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경전에서 십행(十行)을 상징하는 인물들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등장인물이 주주신(主晝神)인데, 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시현궁전주주신은 모든 세간에 두루 들어가는 해탈문을 얻었고, 발기혜향주주신은 모든 중생을 널리 관찰하고 모두 이익케 하여 환희하고 만족하게 하는 해탈문을 얻었고, 낙승장엄주주신은 끝없이 사랑스러운 광명을 얻는 해탈문을 얻었고, 화향요광 주주신은 끝없는 중생의 청정한 믿음과 이해하는 마음을 계발하는 해탈문을 얻었고, 보집묘약주주신은 넓은 광명심을 모아 장엄하는 해탈문을 얻었고, 낙작희목주주신은 모든 고락을 받는 중생을 깨우쳐서 모두 법의 즐거움을 얻는 해탈문을 얻었고, 광방보현주주신은 시방법계에 차별한 몸의 해탈문을 얻었고, 대비위력주주신은 모든 중생 구해서 편안하고 즐겁게 하는 해탈문을 얻었고, 선근광조주주신은 기쁘고 만족한 공덕심을 부르는 해탈문을 얻었고 묘화영락주주신은 명성이 널리 들려 중생들이 다 이익을 얻는 해탈문을 얻었다.
어떠세요? 재미있으신가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웃음) 전 이런 불교는 안 해야 된다고 봅니다.(웃음)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뭘 하자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조차 알 수 없고… 이런 불교를 해서 뭐하겠어요. 안 그렇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는 다 멍텅구리예요. 알 수도 없는 이야기, 어디에 쓰는지도 모르는 물건을 붙잡고 끙끙거리고 있으니 얼마나 바보인가요. 그런데도 불교를 하겠다고 꾸역꾸역 이렇게 찾아오고 있으니…(웃음) 참 알 수 없어요. 정말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참…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제가 생각할 때 불교는 첫째, 초기불교든 대승불교든, 선불교든 교학불교든, 보통사람들이 함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불교여야 하고, 둘째는 우리 현실에서, 일상의 삶에서 쓸모가 있는 불교여야 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주위를 보면 초기불교 한다는 사람이나, 대승불교 한다는 사람이나, 참선하는 사람이나 교학을 하는 사람이나 대부분 ‘불교는 참 좋은 거야.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늘 이런 얘기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처음 하는 사람도 그렇고 10년, 20년 한 사람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결국 처음 하는 사람이나 20년 하는 사람이나 불교 개념 몇 개 더 아느냐만 다를 뿐, 삶의 내용은 별로 다를 게 없습니다. 저도 그랬어요. 그러다보니 불교를 하면 할수록 바보가 되어가는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에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경전내용을 현실의 언어로 우리의 삶의 언어로 해석하고 설명해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으니 참으로 난감하기만 합니다.
자리족 이타족
사실 맥을 짚으면 간단합니다. 불교를 보통 상구보리 하화중생 자리이타의 종교라고 하죠. 스스로에게도 이익되어서 만족스럽고[자리족;自利足], 다른 사람도 이익이 되어서 만족스러운 것[타리족 : 他利足]이 불교입니다. 그런데 이때 자리족, 즉 자기 자신을 이익되게 해서 원만구족하게 한다는 부분이 잘못 이해되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으로 사는 것을 합리화시키게 되기도 합니다. 마치 주체적으로 사는 것을 제멋대로 사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과 같은 거요.
경전에서 이야기하는 자리족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리족이라는 말의 내용을 단순화하면, 아까 말씀드린 천상천하유아독존, 본래부처라는 말입니다. 무슨 뜻인가. ‘최고다’, ‘이 세상에 너 자신보다 더 한 것은 없다’는 거죠. 천하를 다 뒤져봐도 지금 여기, 너 자신보다 더 거룩한 더 위대한, 더 완성된 존재는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어떠세요? 본인이 천상천하유아독존이고 본래부처이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나요? 그 무엇도 부족함이 없으니 저절로 만족하고 무한한 자부심을 갖게 되는 거죠. 따라서 존재자체가 원만구족한 존재임을 스스로 알고 확신하는 것, 자기존재 자체가 본래부처임을 확신하는 것이 자리족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잘났든 못났든, 여자든 남자든, 돈이 있든 없든, 학벌이 있든 없든 무슨 상관이겠어요. 자기 스스로가 본래 부처라고 확신하고 있는 사람이 다시 부처를 구해 히말라야에 가고 인도에 가고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전혀 그럴 필요가 없지요. 실상으로 볼 때 본인이 부처인데 다른 데서 다시 부처를 찾는다면 그 사람이 정상적인 사람인가요? 경우에 맞지 않지요. 미친 사람이든가, 바보든가 둘 중의 하나겠지요. 그렇지 않은가요?
그런데 우리들 대부분은 소를 타고 있으면서 다시 소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믿지 않고 있는 것이지요. 부처님은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실상은 ‘천상천하유아독존’이야”, “너의 실상은 ‘본래부처’야”, “천하를 다 뒤져도 너보다 귀한 존재는 없어.” 어때요? 부족하다면 뭔가 더 찾고 채우고 해야 하겠지만 이미 원만구족한데 무엇을 더 구하고 찾고 채우고 할 필요가 있겠어요?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불제자라면 자기 존재에 대한 무한한 만족감,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게 자리족입니다. 자기 존재가치에 대해 눈을 뜨고 확신하면 더 이상 채울 것도 구할 것도 없어요. 그냥 본래부처로 본래부처답게 역동적으로 살아가면 될 일입니다.
조금 더 예를 들어볼까요? 여기 보니 스스로를 불완전한 중생이라고 여기는 유 선생님이 계시네요. 만약 지금 유 선생님의 눈이 두 개인데 여기에 눈을 한 개 더 붙인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완성도가 더 높아질까요? (대중 웃음)
거듭 말씀드리지만 존재 자체의 거룩함에 눈을 뜨게도륵 하고자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나만 거룩한가? 상대방도 마찬가지지요. 그러므로 존재 자체의 거룩함에 눈을 뜨고 당당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만나는 상대들도 부처님으로 잘 모시게 됩니다. 상대를 잘 모시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은 아직 존재자체의 거룩함에 눈을 덜 떴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불교는 존재의 거룩함에 눈을 뜨느냐 마느냐가 관건입니다. 눈을 뜨게 되면, 즉 존재 자체의 거룩함을 이해하고 확신하면 이타족을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어요. 내가 만나는 상대가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존재요 원만구족한 부처님인데, 어떻게 그 가치를 존중하고 그 거룩함을 잘 받들어 섬기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가 고통 받지 않도록, 늘 빛나도록, 늘 행복하도록 잘 모셔야 마땅하지요. 그게 곧 이타족(利他足)이고, 동체대비행, 대자비행입니다. 결과적으로 자리이타(自利利他)가 동시에 구족한 것이지요. 핵심은 부처님 가르침의 본의에 맞게 하느냐 안하느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면 비록 권력을 간판으로 걸더라도 불교가 될 수 있고, 부처님의 본의에 어긋나면 비록 불교를 간판으로 내세웠더라도 비불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은 십행을 상징하는 신들에 대해 읽었는데, 결국은 자리족 이타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기 존재가치에 눈을 떠서 스스로 만족하고 자부심을 갖고 사는 것, 내가 만나는 사람도 또한 원만구족한 존재이므로 그 가치를 존중하고 배려하고 고마워하고 그 존재로 하여금 늘 빛나고 평화롭고 행복할 수 있도록 받들어 모시는 것입니다. 우리 존재가 그렇고 인생이 그런 것이니까 그렇게 살라는 이야기죠. 그렇게 살면 날마다 좋은 날입니다. 살아서도 좋고 죽어서도 좋아요. 처음부터 끝까지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몇 구절 더 이야기를 해볼까 했는데 해봐야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여서 그만 마칠까 합니다.
오늘 공부하는 십행에 대한 이야기도 앞에서 했던 이야기와 같습니다. 믿음의 위치에서 말하는가, 이해의 위치에서 말하는가, 행위의 위치에서 말하는가, 체험의 위치에서 말하는가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위치에서도 자리족 이타족 이야기를 하고 있고, 이해의 위치에서도 자리족 이타족 이야기를 하고 있고, 행위의 위치에서도, 체험의 위치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같은 내용을 위치만 바꾸어서 거듭거듭 하고 있는데, 어떻습니까. 똑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죠. 그렇습니다. 똑같이 자리족 이타족을 이야기 하는 것인데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그런 거죠. 더 쉬운 예로 들면 한 걸음 가서 말하는 것과 백걸음 가서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죠. 오늘은 이 정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더 해봐야 복잡하고 헷갈리기만 합니다.
정리해보겠습니다. 부처님 탄생게 ‘천상천하유아독존’에 대한 이해와 확신과 자부심이 자리족이고, ‘삼계개고아당안지’의 역동적 실천이 이타족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밥을 주고, 길 잃은 사람에게는 길을 가르쳐주고, 인생을 몰라 헤매는 사람에게는 인생에 눈을 뜨게 해주고, 두들겨맞은 사람에게는 약을 발라주고, 두들겨 맞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도와주고… 부처님 탄생게의 전부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알고 믿고 이해하고 실천하면 우리 삶은 당당하고 평화롭다 - 불교는 이런 것이니 그렇게 하자는 것입니다.
불교가 희망의 종교로 빛나려면
불교는 매력적이고 탁월한 가르침입니다. 그렇지만 교리가 그렇다고 해서 현실에서 불교가 저절로 탁월하고 매력적인 종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가르침이 우리 현실에서 진짜 매력적이고 탁월하게 되려면 실제로 그렇게 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 불자들이 실제로 그런 삶이 내 삶이 되게 하고, 나아가 그런 삶이 사회화되고, 대중화되도록 할 때 불교가 진실로 매력적인 가르침이 되고, 희망의 종교로 빛나게 됩니다. 그러면 불교가 저절로 발전하게 됩니다.
불교의 쇠퇴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쇠퇴하지 않기 위한 해답은 하나입니다. 불교가 불교다우면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면 불교가 불길처럼 타오릅니다. 그 가르침의 이정표가 천상천하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 본래부처와 동체대비행, 인드라망 존재와 보현행원입니다. 더 단순화하면 자리족 이타족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따르는 불자라면,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불교를 제대로 알고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함께 정진합시다. (박수)
도법스님_세주묘엄품 9_ 2011.12.11
오늘은 초기불전동호회 회원들이 오셔서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초기불교를 하시는 분들과 우리가 하는 불교가 대승불교인지 초기불교인지 모르는 분들, 또는 그게 그거겠지 하는 분들이 같이 모였네요.(대중 웃음) 덕택에 큰방이 꽉 찬 것 같습니다.
어디에선가 제가 본 글이 생각나는데요. ‘배우고 또 배우고, 익히고 또 익히고, 그러면 실력이 늘어나고, 그런 만큼 사람이 더 높아지고 더 커진다. 반면 덕스럽게 마음 쓰고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계속 작아지고 낮아진다. 노력하면 할수록 더 작아지고 낮아지고 더 비워지고 비워진다.’
어떻습니까. 높아지는 게 좋은 것 같습니까, 낮아지는 게 좋은 것 같습니까? 실력과 능력을 기르면 기를수록 지위도 더 높아지고, 권력도 더 막강해지고, 따라오는 돈도 당연히 더 많아지고 그러겠죠? 반면 덕스럽게 마음 쓰고 살면 살수록 거듭거듭 더 작아지고 낮아지는 삶이 된다고 하는데, 뒷 구절에서 강조되는 내용이 아마 우리가 늘 놓치지 않고 가야 될 부분이 아니겠는가 싶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끊임없이 높아지고 더 커지는 것만 좋은 것인 것처럼 떠들어대고 그에 따라 너도 나도 경쟁적으로 그것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더 많이 갖자, 더 많이 쓰자, 더 편해지자, 더 빨리 하자, 이런 것들이죠.
그런데 그렇게 해서 더 높이 올라가고 더 많이 갖고 더 커져서 삶이 평화롭고 행복하던가요? 제가 보기에는 아닙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이 올라가서 군림하고 내려다보고 행세하고 대접받을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삶이 평화롭거나 행복지지는 않습니다. 경험적으로 보면 오히려 비우면 비울수록,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작아지면 작아지는 만큼 삶은 더 평화롭고 행복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도 더 편안하고 따뜻하고 여유롭습니다.
법회를 할 때마다 청법가를 하는데 ‘덕 높으신 스승님’하고 시작을 하죠. 저는 사실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 내용 자체가 너무 무겁습니다. 그렇다고 이런 격식, 형식을 다 깨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냥 하자니 무겁고 재미도 없고… 늘 그렇습니다. 저는 사실 덕이 높은 것도 아닌데, 살다보니 나이를 먹고 연륜이 쌓이고… 그러면서 떠밀려서 자리도 높아지고 마음이 내키든 안 내키든 해야 할 일이 생기고… 그 결과로 오늘 이 자리에 앉게 된 셈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강을 건너는 뗏목
부처님 가르침을 보통 강을 건너는 뗏목에 비유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불교역사의 현상들을 보면 부처님 가르침의 본뜻과는 달리 전개되는 게 공통적인 현상인 것 같습니다.
불교사를 한 번 볼까요? 어떻습니까. 부처님 가르침이 강을 건너는 뗏목이니 당연히 초기불교도 강을 건너는 뗏목이겠죠? 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초기불교라는 뗏목이 너무 좋다. 나에게는 이것 말고는 없다. 죽으나사나 나는 뗏목과 같이 하겠다’라고 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강을 건널 수가 없겠죠. 고통 받는 이 언덕에서 고통 없는 저 언덕으로 가야 하는데 뗏목에 강하게 애착해서 붙잡고 있으면 저 언덕으로 갈 수가 없잖아요.
해탈열반의 저 언덕으로 가기 위해 초기불교라는 뗏목에 올라탔는데 그 뗏목에 갇혀버리면 그 강을 벗어나지 못하니 해탈열반에는 도달하지 못한다는 거죠. 살다 보면 늘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본래의 목적과 취지를 잃어버리고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는 일이 대부분이죠. 당연히 문제가 생기고 폐단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등장하는 게 무엇일까요? 그렇죠. 대승불교라는 뗏목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대승불교라는 뗏목을 갖고 살다보니 또 다시 대승불교에 갇히게 되는 경우들이 생기는 거예요. 초기불교를 비판하고 부정하고 내버리고 새롭고 더 좋은 대승불교라는 뗏목에 올라탔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대승불교라는 이 뗏목이 제일이야, 이게 전부야, 이것 말고는 없어’라고 그것에만 집착하게 되는 거예요. 생각해 보십시오. 실제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강을 건너는 게 목적이잖아요. 아무리 대승불교라는 뗏목이 제일이고 최고이고 전부라고 하더라도 강을 건너려면 그 뗏목을 버려야 가능한 건데 ‘이게 제일이고 최고니까 이것과 함께 할 거야’ 하고 붙잡고 있으면 강을 건널 수가 없죠. 아무리 제일이고 최고의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집착하면 병이 되고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현실을 살펴보면 그런 폐단들이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상황이 그런 만큼 또 다시 필요에 따라 그 다음은 선불교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선불교 역시 세월이 흐르면서 똑같은 폐단을 야기하게 됩니다.
한 번 따져봅시다. 무엇이 문제인가요? 초기불교? 대승불교? 아니면 선불교가 문제인가요? 아니죠? 초기불교도 대승불교도 선불교도 강을 건너는 뗏목일 뿐입니다. 따라서 문제는 뗏목에 있는 게 아니고 뗏목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문제죠.
흔히들 한국불교를 선불교 전통이라고 말합니다. 역시 오래 되다 보니 선불교도 본말이 전도되어서 많은 문제와 폐단이 나타나고 모순과 혼란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모순과 혼란이 생기면 대부분은 어떻게 하죠? 되돌아보게 됩니다. ‘처음에는 어땠을까?’를 묻게 됩니다. 만약 선불교라는 뗏목으로 현재 우리 삶의 문제를 속 시원하게 해결할 수 있다면, ‘왜 이럴까’하고 돌아볼 일도 없고, 초기불교를 다시 찾을 필요도 없었을 겁니다. 그렇지 못하니까 ‘처음에는 어떻게 했을까’ 하고 되묻게 되고, 최근 초기불교에 대한 관심이 유행처럼 나타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문제의 현상인 거죠.
불교역사의 현장을 보면 대체적으로 불교의 정법정신과 어긋나는 경향이 너무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불교안에서 서로를 부정하고 배척하는 거죠. 초기불교는 대승불교를 부정하고 배척하고, 대승불교는 초기불교를 부정하고 배척하고, 선불교는 교학을 부정하고 배척하고, 교학은 선불교를 배척하고 부정하고… 그리하여 서로 반목하고 싸우고 그러죠. 어떤 명분을 갖고 싸우든지간에 다투는 게 평화롭고 행복할 리는 없죠? 아무리 정의로운 명분이라고 해도 마찬가집니다. 다투면서 평화롭고 행복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그렇게 서로를 부정하고 배척하면서 심각한 싸움들이 벌어지니까 원효스님이 나서서 다툼을 화해시키는 화쟁론을 쓰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이 법회에 참석한 분들의 면면을 보면 초기불교, 대승불교, 선불교를 하는 분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매우 뜻깊은 자리입니다. 어떠신가요? 서로를 부정하고 배척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서로를 이해하고 인정하고 허심탄회하게 소통하고 있습니까? 혹시 속으로는, ‘그래봐야 대승불교가 최고야, 다른 건 다 시시해’ 또는 ‘초기불교가 진짜야, 다른 건 가짜야’ 그러고 계신 것은 아니죠?(웃음) 어떠세요? 만약 그러고 있다면 초기불교를 하든 대승불교를 하든 우리 모두는 불교를 잘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오늘 이 자리는 어떤 의미에선 2600년 불교사에서 있었던 과오나 오류를 반성하고 부처님이 뜻했던 불교를 제대로 해보려는 역사적인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초기불교라고 표현하든 대승불교라고 표현하든 선불교라고 표현하든 교학불교라고 표현하든, 그것은 사람들의 고통과 불행의 문제를 해결해서 평화롭고 행복한 삶으로 인도하기 위한, 똑같은 목적의 나룻배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인정하면서 소통과 공감이 이뤄진다면, 오늘 이 순간이야말로 불교의 본래면목을 제대로 드러내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오늘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할지 혼란스럽습니다. 어쨌든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게 화엄경 세주묘엄품이니 그 이야기를 해야 하겠죠. 처음 오신 분들이 계셔서 경전 구절 하나하나 읽어가는 것은 별로 도움되지 않을 듯합니다. 아마도 총론적으로 정리하면서 설명해야 하므로 중언부언이 될 수도 있겠지만 어쩌겠습니까.
부처님 가르침을 망라하는 말씀
천상천하유아독존 삼계개고아당안지 = 본래부처와 동체대비행 = 인드라망존재와 보현행원
다함께 생각해봅시다. 초기불교가 되었든 대승불교가 되었든 우리 불교사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망라하는 한 마디, 한 구절을 찾는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아마도 팔상성도(八相成道)의 첫마당인 탄생게의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화엄경적 표현으로 하면 ‘본래부처와 동체대비행’ 또는 ‘인드라망 존재와 보현행원’이 아닐까, 싶습니다.
처음 오신 분들이 계시니 잠깐 인드라망이라는 말에 대해 설명을 하겠습니다. 대부분 아시다시피 부처님이 깨닫고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진리를 연기법이라고 하죠. 이 세상은 온통 인연 조건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입니다. 초기불교에서는 연기법이라고 표현하는데, 그것이 화엄경에 오면 ‘중중무진연기법(重重無盡緣起法)’으로 표현됩니다. 끝은 똑같이 ‘연기법’인데, 화엄경에서는 앞에 중중무진, 즉 ‘겹겹으로 무궁무진하게’라는 수식이 더 붙어있지요.
이 두 가지 표현은 무엇이 다를까요? 굳이 비교해서 본다면 초기불교의 연기법은 부처님이 깨달은 법을 평면적으로 개념화했다고 한다면, 화엄경은 총체적으로 입체적으로 개념화시킨 거죠. 그런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입체적이고 총체적으로 개념화한 중중무진연기법을 더 쉽고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비유로 표현한 게 인드라망이란 개념입니다. 그리고 화엄경의 인드라망 존재, 인드라망 세계라는 개념을 또한 쉽고 명료하게 이해하도록 하는 그림이 바로 저 인드라망무늬입니다.
조금 더 설명을 드리면, 온 우주는 하나의 살아 있는 그물로 이뤄져 있고, 낱낱 존재는 그물의 그물코로 존재합니다. 그물의 그물코는 전부 연결되어 있죠? 그물의 그물코는 서로 의지하고 영향과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존재합니다. 연기적 존재, 연기적 세계를 입체적, 총체적 의미로 표현하면 중중무진연기의 존재, 중중무진연기의 세계, 그걸 비유로 말하면 인드라망 존재, 인드라망 세계인 것이죠.
우리 모두가 그물의 그물코처럼 존재하고 있는 게 실상이라면 너라는 그물코와 나라는 그물코는 하나일까요, 둘일까요? (청중: 하나입니다.) 진짜 하나예요? (네) 지금 대압은 일부분 맞기도 하고, 일부분은 틀리기도 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나라는 그물코와 너라는 그물코가 연결되어 있고 서로 의지해서 존재하니까 하나라고 볼 수 있지요. 그렇지만 분명 나라는 그물코가 있고 너라는 그물코가 있기 때문에 둘이기도 하죠. 그 실상을 중도적으로 표현하면 뭐라고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이기도 하고 둘이기도 한 거죠. 그렇습니다. 이것을 유식하게 한문으로 말하면 불일불이(不一不二)라고 합니다.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또는 ‘하나이기도 하고 둘이기도 하다’는 거죠.
마치 왼손과 오른손의 관계와 같지요. 왼손과 오른손은 서로 다르죠. 그러니까 둘이지요. 그러나 왼손과 오른손은 한 몸입니다. 그러니 하나이지요. 결국 이러한 존재의 실상을 제대로 표현하려면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또는 ‘하나이기도 하고 둘이기도 하다’라고 밖에 달리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어떤 측면을 보느냐에 따라 하나라고 말할 수도 있고 둘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총체적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너와 나는 하나야’라거나 ‘너와 나는 둘이야’라고 고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부처님은 극단적 견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양극단을 넘어서서 중도적으로 봐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나라는 그물코와 너라는 그물코, 왼손과 오른손을 중도적으로 보고 표현하려면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경전에서는 주로 불일불이(不一不二)라고 합니다. 이것을 상황에 따라 적재적소에 맞게 적용할 때엔 하나라고 표현할 필요가 있으면 하나라고 하기도 하고, 둘이라고 표현할 필요가 있으면 둘이라고 하기도 하는 거죠.
불교의 사유방식은, 어떤 경우이든 무엇이든 이와 같이 양극단을 넘어서서 중도적으로 보고 중도적으로 다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표현이 제일 많이 쓰여 있는 경전이 무엇이죠? (반야심경이요!) 네, 그래요. 반야심경입니다.
예를 들어 ‘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 空不異色)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 그 표현인 거죠. 이게 특별히 복잡하거나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거든요. 그냥 있는 사실을, 언어로 표현해낼 수 있는 한, 가장 적절하게 중도적으로 충실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처음 오신 분들이 많아서 화엄경에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 설명을 먼저 했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는 대부분 이해하고 공감이 될 겁니다. 지금부터는 화엄경을 공부해야 하는데, 가급적 이해가 될 수 있도록 설명하려고 노력하겠지만 시간적 한계가 있기 때문에 경전구절 하나하나를 설명하려면 어려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점 이해 바랍니다.
화엄경의 수행체계 - 신해행증 信解行證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화엄경의 수행체계는 신해행증(信解行證) 네 가지로 설명되고, 이것을 확대하면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 5가지로 설명됩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죠. 여기 실상사 마당에서 정면으로 바라보는 곳이 지리산 천왕봉인데, 천왕봉을 해탈열반의 세계라고 해봅시다.
신(信)이라는 것은 천왕봉에 대해 올바르게 파악하고 이해하고 천왕봉이 있는 방향과 위치를 잘 파악하고 이해하고 확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신심이란 ‘부처님께 열심히 절했더니 부처님 눈에서 광명이 나타났어.’ ‘열심히 기도를 하니 부처님이 꿈에 나타나셨어’ 하는 식으로 부처님의 영험, 기도의 영험을 빋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경전에서 말하고 있는 신심은, 우리가 도달할 목적지인 부처님 나라, 부처님 세계가 어떤 내용인지, 그곳은 어디에 있는지, 그것에 대해 잘 파악하고 이해하고 확신하는 것을 신(信), 즉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게 신심(信心)의 확립입니다.
그 다음, 해(解)라는 것은 천왕봉이라는 목적지가 있는 방향과 길, 그리고 그곳에 잘 갈 수 있는 방법과 기술을 잘 파악하고 올바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무엇이 남았나요? 이제 직접 걸어가는 것이 남아 있죠? 걸어서 가든 자전거를 타고 가든 자동차를 타고 가든 목적지를 향해 직접 실천하는 것을 행(行)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직접 걸어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걸어가는 만큼 가까워지겠죠? 그리고 산으로 올라가면 올라가는 만큼 시야가 넓어집니다. 여기서는 천왕봉이 저렇게 작아보이지만 가까이 가고 높이 올라가면 훨씬 넓고 크게 보이겠죠. 천왕봉에 가까이 올라가는 만큼 시야가 더 크고 넓어집니다. 더 가까워지는 만큼 시야가 탁 트이는 현상을 깨달음의 체험이라고 합니다. 즉 증명되는 것이죠. 실천을 하면 체험하게 되잖아요. 체험이 곧 증명인 것입니다. 한 걸음 가면 한 걸음 간 만큼, 열 걸음 가면 열 걸음 간 만큼, 1m 올라가면 1m 올라간 만큼 10m 올라가면 10m 올라간만큼 시야가 트이지 않겠어요? 100m 올라가면 더 다르겠지요.
이와 같이 신해행증(信解行證), 즉 믿음, 이해, 실천, 체험이 화엄경 수행의 기본체계입니다. 화엄경 뿐만 아니라 어떤 불교든 대체로 이와 같은 수행체계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화엄경에서는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십회향에 대해 잠깐 더 설명을 드리면 우리는 보통 회향이라는 말을 끝낸다는 의미로 쓰는데, 회향은 완성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제대로 된 믿음인가, 제대로 된 이해인가, 제대로 가고 있는가, 법답게 제대로 체험되고 있는가를 완성시키는 것이 십회향의 정신입니다. 회향의 정신으로 신해행증이 이루어져야 제대로 된 신해행증인 것이죠.
그동안 세주묘엄품을 공부하면서 십지에서는 체험한 것을 상징하는 인물들에 대해 설명했고, 십회향에서는 완성의 조건을 상징하는 인물들에 대해 설명했고, 오늘은 십행, 즉 그 길을 걸어가는 인물들에 대해 설명할 차례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화엄경은 다른 경전과 차이가 있습니다. 다른 경전들이 연기법의 내용을 평면적으로 다루고 있다면 화엄경은 입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표현을 빌자면, 다른 경전이 수필이나 논문이라면 화엄경은 희곡이나 소설과 같습니다. 무수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하나의 드라마죠. 부처의 이름으로, 보살의 이름으로, 신의 이름으로, 천자의 이름으로, 왕의 이름으로… 온갖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연극으로 치면 연기자들인데, 실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연기자들을 통해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십행을 상징하는 인물들에 대한 얘기인데 사실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내용입니다. 다른 내용이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실상사에서 얘기하는 천왕봉과 한 십리 가서 얘기하는 천왕봉하고 같은 천왕봉입니까, 다른 천왕봉입니까? 같은 천왕봉이겠죠. 그렇듯 똑같은 천왕봉이지만 걸어가는 사람이 실상사에서 천왕봉을 이야기할 때와 십리를 가서 천왕봉을 이야기할 때와는 천왕봉을 설명하는 데 차이가 있겠죠. 그렇듯이 십신,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 - 이 다섯 단계로 이야기하는 것도 같은 얘기인데, 가기 전에 이야기하느냐, 십리를 가서 이야기하느냐, 삼십리를 가서 이야기하느냐의 차이가 있는 거죠. 내용이 복잡하게 되어 있기는 하지만 실제 맥을 짚어보면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경전에서 십행(十行)을 상징하는 인물들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등장인물이 주주신(主晝神)인데, 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시현궁전주주신은 모든 세간에 두루 들어가는 해탈문을 얻었고, 발기혜향주주신은 모든 중생을 널리 관찰하고 모두 이익케 하여 환희하고 만족하게 하는 해탈문을 얻었고, 낙승장엄주주신은 끝없이 사랑스러운 광명을 얻는 해탈문을 얻었고, 화향요광 주주신은 끝없는 중생의 청정한 믿음과 이해하는 마음을 계발하는 해탈문을 얻었고, 보집묘약주주신은 넓은 광명심을 모아 장엄하는 해탈문을 얻었고, 낙작희목주주신은 모든 고락을 받는 중생을 깨우쳐서 모두 법의 즐거움을 얻는 해탈문을 얻었고, 광방보현주주신은 시방법계에 차별한 몸의 해탈문을 얻었고, 대비위력주주신은 모든 중생 구해서 편안하고 즐겁게 하는 해탈문을 얻었고, 선근광조주주신은 기쁘고 만족한 공덕심을 부르는 해탈문을 얻었고 묘화영락주주신은 명성이 널리 들려 중생들이 다 이익을 얻는 해탈문을 얻었다.
어떠세요? 재미있으신가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웃음) 전 이런 불교는 안 해야 된다고 봅니다.(웃음)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뭘 하자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조차 알 수 없고… 이런 불교를 해서 뭐하겠어요. 안 그렇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지금 우리는 다 멍텅구리예요. 알 수도 없는 이야기, 어디에 쓰는지도 모르는 물건을 붙잡고 끙끙거리고 있으니 얼마나 바보인가요. 그런데도 불교를 하겠다고 꾸역꾸역 이렇게 찾아오고 있으니…(웃음) 참 알 수 없어요. 정말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 참…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제가 생각할 때 불교는 첫째, 초기불교든 대승불교든, 선불교든 교학불교든, 보통사람들이 함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불교여야 하고, 둘째는 우리 현실에서, 일상의 삶에서 쓸모가 있는 불교여야 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주위를 보면 초기불교 한다는 사람이나, 대승불교 한다는 사람이나, 참선하는 사람이나 교학을 하는 사람이나 대부분 ‘불교는 참 좋은 거야.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늘 이런 얘기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처음 하는 사람도 그렇고 10년, 20년 한 사람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결국 처음 하는 사람이나 20년 하는 사람이나 불교 개념 몇 개 더 아느냐만 다를 뿐, 삶의 내용은 별로 다를 게 없습니다. 저도 그랬어요. 그러다보니 불교를 하면 할수록 바보가 되어가는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에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경전내용을 현실의 언어로 우리의 삶의 언어로 해석하고 설명해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으니 참으로 난감하기만 합니다.
자리족 이타족
사실 맥을 짚으면 간단합니다. 불교를 보통 상구보리 하화중생 자리이타의 종교라고 하죠. 스스로에게도 이익되어서 만족스럽고[자리족;自利足], 다른 사람도 이익이 되어서 만족스러운 것[타리족 : 他利足]이 불교입니다. 그런데 이때 자리족, 즉 자기 자신을 이익되게 해서 원만구족하게 한다는 부분이 잘못 이해되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으로 사는 것을 합리화시키게 되기도 합니다. 마치 주체적으로 사는 것을 제멋대로 사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과 같은 거요.
경전에서 이야기하는 자리족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리족이라는 말의 내용을 단순화하면, 아까 말씀드린 천상천하유아독존, 본래부처라는 말입니다. 무슨 뜻인가. ‘최고다’, ‘이 세상에 너 자신보다 더 한 것은 없다’는 거죠. 천하를 다 뒤져봐도 지금 여기, 너 자신보다 더 거룩한 더 위대한, 더 완성된 존재는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어떠세요? 본인이 천상천하유아독존이고 본래부처이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나요? 그 무엇도 부족함이 없으니 저절로 만족하고 무한한 자부심을 갖게 되는 거죠. 따라서 존재자체가 원만구족한 존재임을 스스로 알고 확신하는 것, 자기존재 자체가 본래부처임을 확신하는 것이 자리족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잘났든 못났든, 여자든 남자든, 돈이 있든 없든, 학벌이 있든 없든 무슨 상관이겠어요. 자기 스스로가 본래 부처라고 확신하고 있는 사람이 다시 부처를 구해 히말라야에 가고 인도에 가고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전혀 그럴 필요가 없지요. 실상으로 볼 때 본인이 부처인데 다른 데서 다시 부처를 찾는다면 그 사람이 정상적인 사람인가요? 경우에 맞지 않지요. 미친 사람이든가, 바보든가 둘 중의 하나겠지요. 그렇지 않은가요?
그런데 우리들 대부분은 소를 타고 있으면서 다시 소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믿지 않고 있는 것이지요. 부처님은 항상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실상은 ‘천상천하유아독존’이야”, “너의 실상은 ‘본래부처’야”, “천하를 다 뒤져도 너보다 귀한 존재는 없어.” 어때요? 부족하다면 뭔가 더 찾고 채우고 해야 하겠지만 이미 원만구족한데 무엇을 더 구하고 찾고 채우고 할 필요가 있겠어요?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불제자라면 자기 존재에 대한 무한한 만족감,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게 자리족입니다. 자기 존재가치에 대해 눈을 뜨고 확신하면 더 이상 채울 것도 구할 것도 없어요. 그냥 본래부처로 본래부처답게 역동적으로 살아가면 될 일입니다.
조금 더 예를 들어볼까요? 여기 보니 스스로를 불완전한 중생이라고 여기는 유 선생님이 계시네요. 만약 지금 유 선생님의 눈이 두 개인데 여기에 눈을 한 개 더 붙인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완성도가 더 높아질까요? (대중 웃음)
거듭 말씀드리지만 존재 자체의 거룩함에 눈을 뜨게도륵 하고자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나만 거룩한가? 상대방도 마찬가지지요. 그러므로 존재 자체의 거룩함에 눈을 뜨고 당당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만나는 상대들도 부처님으로 잘 모시게 됩니다. 상대를 잘 모시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은 아직 존재자체의 거룩함에 눈을 덜 떴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불교는 존재의 거룩함에 눈을 뜨느냐 마느냐가 관건입니다. 눈을 뜨게 되면, 즉 존재 자체의 거룩함을 이해하고 확신하면 이타족을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어요. 내가 만나는 상대가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존재요 원만구족한 부처님인데, 어떻게 그 가치를 존중하고 그 거룩함을 잘 받들어 섬기지 않을 수 있겠어요? 그가 고통 받지 않도록, 늘 빛나도록, 늘 행복하도록 잘 모셔야 마땅하지요. 그게 곧 이타족(利他足)이고, 동체대비행, 대자비행입니다. 결과적으로 자리이타(自利利他)가 동시에 구족한 것이지요. 핵심은 부처님 가르침의 본의에 맞게 하느냐 안하느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면 비록 권력을 간판으로 걸더라도 불교가 될 수 있고, 부처님의 본의에 어긋나면 비록 불교를 간판으로 내세웠더라도 비불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은 십행을 상징하는 신들에 대해 읽었는데, 결국은 자리족 이타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자기 존재가치에 눈을 떠서 스스로 만족하고 자부심을 갖고 사는 것, 내가 만나는 사람도 또한 원만구족한 존재이므로 그 가치를 존중하고 배려하고 고마워하고 그 존재로 하여금 늘 빛나고 평화롭고 행복할 수 있도록 받들어 모시는 것입니다. 우리 존재가 그렇고 인생이 그런 것이니까 그렇게 살라는 이야기죠. 그렇게 살면 날마다 좋은 날입니다. 살아서도 좋고 죽어서도 좋아요. 처음부터 끝까지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몇 구절 더 이야기를 해볼까 했는데 해봐야 그 이야기가 그 이야기여서 그만 마칠까 합니다.
오늘 공부하는 십행에 대한 이야기도 앞에서 했던 이야기와 같습니다. 믿음의 위치에서 말하는가, 이해의 위치에서 말하는가, 행위의 위치에서 말하는가, 체험의 위치에서 말하는가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위치에서도 자리족 이타족 이야기를 하고 있고, 이해의 위치에서도 자리족 이타족 이야기를 하고 있고, 행위의 위치에서도, 체험의 위치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같은 내용을 위치만 바꾸어서 거듭거듭 하고 있는데, 어떻습니까. 똑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죠. 그렇습니다. 똑같이 자리족 이타족을 이야기 하는 것인데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그런 거죠. 더 쉬운 예로 들면 한 걸음 가서 말하는 것과 백걸음 가서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죠. 오늘은 이 정도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더 해봐야 복잡하고 헷갈리기만 합니다.
정리해보겠습니다. 부처님 탄생게 ‘천상천하유아독존’에 대한 이해와 확신과 자부심이 자리족이고, ‘삼계개고아당안지’의 역동적 실천이 이타족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밥을 주고, 길 잃은 사람에게는 길을 가르쳐주고, 인생을 몰라 헤매는 사람에게는 인생에 눈을 뜨게 해주고, 두들겨맞은 사람에게는 약을 발라주고, 두들겨 맞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도와주고… 부처님 탄생게의 전부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알고 믿고 이해하고 실천하면 우리 삶은 당당하고 평화롭다 - 불교는 이런 것이니 그렇게 하자는 것입니다.
불교가 희망의 종교로 빛나려면
불교는 매력적이고 탁월한 가르침입니다. 그렇지만 교리가 그렇다고 해서 현실에서 불교가 저절로 탁월하고 매력적인 종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가르침이 우리 현실에서 진짜 매력적이고 탁월하게 되려면 실제로 그렇게 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 불자들이 실제로 그런 삶이 내 삶이 되게 하고, 나아가 그런 삶이 사회화되고, 대중화되도록 할 때 불교가 진실로 매력적인 가르침이 되고, 희망의 종교로 빛나게 됩니다. 그러면 불교가 저절로 발전하게 됩니다.
불교의 쇠퇴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쇠퇴하지 않기 위한 해답은 하나입니다. 불교가 불교다우면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면 불교가 불길처럼 타오릅니다. 그 가르침의 이정표가 천상천하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 본래부처와 동체대비행, 인드라망 존재와 보현행원입니다. 더 단순화하면 자리족 이타족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따르는 불자라면,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불교를 제대로 알고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함께 정진합시다. (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