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보현법회 법문]
화엄경세주묘엄품과...10강 요약문(2012.1.8)
본래부처행이 모든 문제의 치유책
도법스님 (실상사 회주)
그동안 10지, 10회향, 10행을 상징하는 인물들과 그들이 본 부처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지금은 10주를 상징하는 인물들과 그들이 본 부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대부분 같은 내용들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다 같이 천왕봉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라도 5리, 10리, 30리 지점이냐에 따라 표현이 다를 수 있잖아요. 마찬가지로 세주묘엄품에서도 다들 부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인데, 다만 등장인물들이 어느 위치에서 그 이야기를 하는가에 따라 차이가 나는 거죠.
■ 너와 내가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이 모든 병의 근원
오늘은 주약신(主藥神)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겠습니다.
<길상(吉祥)주약신은 일체중생의 마음을 널리 관찰해서 부지런히 거두어들이는 해탈문을 얻었고… 모공현광(毛孔現光)주약신은 큰 자비의 깃대로써 온갖 병의 경계에서 빨리 벗어나는 해탈문을 얻었고… 보발위광(普發威光)주약신은 방편으로 염불하여 일체중생의 병을 소멸하는 해탈문을 얻었다.>
주약신은 일체중생이 온갖 병의 경계에서 빨리 벗어나도록 하고, 또는 병이 소멸하도록 애쓰는 분들이죠. 우리는 ‘병’이라고 하면 주로 몸의 병을 생각하죠. 그런데 실제로는 몸의 병과 마음의 병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 과학이 발달하고 병에 관한 연구가 진전되면서 마음의 병이 낫지 않으면 몸의 병도 낫지 않는다는 게 여러 가지로 증명되고 있어요. 암의 주요인도 스트레스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최근에는 마음을 치료하는 연구가 점점 더 많아지고 심리치유니, 예술치료니 하는 다양한 치유법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의 병이 생기는 핵심적인 원인은 무엇일가요? 그것은 너와 내가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 때문에 존재의 불완전, 불만족, 불충분하다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너는 너, 나는 나로 분리되어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대에 대해 불신하고 의심하고 긴장하고 대립하는 것입니다.
너와 내가 원융무애한 하나라고 인식하면 저절로 완점함, 충분함, 만족함에 대한 확신을 갖데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죄의식, 열등의식, 피해의식, 패배의식, 박탈감, 시기와 질투, 탐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불교의 12연기도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12연기[무명(無明) - 행(行) - 식(識) - 명색(名色) - 육입(六入) - 촉(觸) - 수(受) - 애(愛) - 취(取) - 유(有) - 생(生) - 사(死)]로 보면 ‘명색’에서 분리된 사고가 시작됩니다.
최근에 현대심리학을 전공하신 분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한결같은 말씀이 ‘본래부처론’이 자신들이 연구하는 내용과 유사하고, 심리상담치료에서도 가장 바람직하고 효과적인 치유책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유사한 실험결과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을 키울 때 “너는 문제야, 너는 안돼”라는 지적과 비판을 반복해서 듣고 자라는 아이는 자존감을 상실하게 되고 그로 인하여 열등의식, 패배감에 찌들게 됩니다. 반면에 “괜찮아. 너를 믿어. 잘 할 거야”라는 신뢰와 격려를 받으며 자란 아이는 자존감이 커지고 그로부터 열정과 용기를 갖게 된다고 하죠.
우리 불자들은 어떤가요? ‘중생’하면 보통 ‘업보’니 ‘죄’니 하는 말을 연상하죠? 그래서 무슨 문제가 생길 때마다 ‘원래 업장이 많아서 그래’ 또는 ‘죄 많은 중생이라 어쩔 수 없어’라고 주저앉게 됩니다. 그렇게 살지 말자는 게 불교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본래부처론은 내가 완전한 존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곧 우주이고 우주가 곧 나입니다. 정말 대단한 자존감이죠.
부처님이 사셨던 당시의 인도는 카스트라는 계급제도가 고착되어 있었습니다. 브라만(종교인), 크샤트리아(무사계급, 정치인), 바이샤(농부나 상인 등의 평민), 수드라(노예)라고 하는 네 계급으로 구분했습니다. 그리고 불가촉천민이라고 하여 이 네 계급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짐승처럼 취급받았습니다.
본래 종자가 그렇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그 계급으로 태어났다는 사고방식이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을 때, 부처님은 그것을 부정하고 ‘천상천하유아독존’을 설파하셨습니다. ‘모든 존재가 다 거룩하다’, ‘본래 타고나는 종자 따위는 없다’, ‘모든 존재는 행위하는 대로 만들어진다’고 하셨죠. 지금은 누구나 당연하다고 고개를 끄덕거리지만 그 당시로 보면 천지개벽할 말이었어요. 존재의 거룩함을 나타내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사상과 행동은 불교의 원형입니다.
불교경전에서 이야기하는 병은 대부분 무지와 착각의 병을 말합니다. 부처님을 의사 중의 의사, 대의왕(大醫王)이라고 칭송하는 것도 바로 근원적인 병을 치료하는 분이라는 겁니다. 존재의 거룩함에 대한 무지와 착각의 사고방식이 만병의 근원이고, 우리의 평화와 행복을 깨뜨리는 탐욕, 오만, 열등의식 등도 이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천상천하유아독존’, ‘본래부처’라는 존재가치에 대한 이해와 확신이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한 근원적 치유책이 됩니다.
■ 편하고 쉬운 것은 다 독(毒)이 된다
다음은 주산신(主山神)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보봉개화(寶峰開華)주산신은 크고 고요한 선정의 광명에 들어가는 해탈문을 얻었고… 이진보계(離塵寶髻)주산신은 끝없는 겁 동안 부지런히 정진해서 게으르지 않는 해탈문을 얻었고… 금강견고안(金剛堅固眼)주산신은 그지없는 큰 이치의 바다를 나타내는 해탈문을 얻었다.>
여기서 정진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며칠 전에 마을의 귀농자들이 갓난아이를 데리고 절에 와서 차 한 잔을 나누었습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기어보려고 한순간도 쉬지 않고 혼신의 노력을 다하더군요. 거의 2시간 동안을 정말 한 순간도 쉬지 않고요. 그것을 보면서 ‘한 인간이 태어나서 걷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던가’, ‘저절로 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실상을 알고보면 세상의 이치가 그렇게 항상 애써 노력하며 살아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 이치와 반대로 살려고 노력하니 더 힘들어지는 거죠. 우리 머릿속에서는 편하고 쉬운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생각하는대로 편하고 쉽게 살면 다 독이 됩니다. 그 결과가 비만이고 당뇨병이고, 심리병이고, 암이고…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이치에 어긋나는 삶을 추구하면 자신에게도 독이 되고 상대에게도 독이 됩니다.
부처님의 마지막 유언이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는 것이죠? 왜 그러셨겠습니까. 단지 사회윤리적인 차원에서의 말씀이 아닙니다. 이유는 명백합니다. 생명의 법칙과 질서, 존재의 법칙과 질서, 우주의 법칙과 질서, 즉 세상이치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법은 게으르지 않습니다. 이 우주는 정말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죠. 그 결과로 세상도 존재하고 나도 존재합니다. 우리는 법에 의해 태어났고 법에 의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법에 다라 부지런히 정진해야 합니다.
■ 본래부처행이 곧 자리이타의 삶
오늘은 제7주를 표한 주지신(主地神)의 찬탄을 담은 게송을 읽고 끝내겠습니다.
<부처님이 지난 옛적 여러 행을 닦으사 / 중생들에게 무거운 업장 소멸하게 하시니 / 보산중보(普散衆寶)주지신이 이 해탈을 보고 기뻐하였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수행하면서 ‘나는 중생들의 무거운 업장을 소멸시키기 위해서 절한다, 기도한다, 염불한다, 봉사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나는 중생이니까 먼저 내 업장을 소멸해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모든 경전에서는 일관되게 ‘부처님은 중생을 위해서 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이 법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언제나 법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면 왜 법대로 살아야만 할까요? 법에 맞게 보고 생각하고 말하고 생활해야 삶이 평화롭고 행복하기 때문이죠.
만약 어떤 농부가 쉬고 싶고 놀고 싶은 유혹을 떨쳐버리고 지극정성을 다해 수박농사를 지었다고 합시다. 당연히 수박농사가 잘되겠죠? 그러면 누구에게 좋겠습니까. 먼저 수박에게 좋겠죠? 동시에 농부에게도 유익하겠죠. 이게 법, 세상이치입니다. 즉 법에 따라 살면 너도 좋고 나도 좋은 자리이타의 삶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본래부처행이란 이와 같이 세계의 법칙과 질서에 맞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법에 따라 살려면 마땅히 중생을 위해서 살아야 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진정 자신을 위해서 잘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저절로 평화와 행복의 삶이라는 불가사의한 기적이 일어납니다.
너와 내가 분리되어 있지 않듯이 부처와 중생도 따로가 아닙니다. ‘중생이니까 어쩔 수 없어’라는, 자신의 생각을 떨쳐버리고 본래부처로 우뚝서십시오.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존재의 법칙과 질서에 따라 끊임없이 그렇게 보고 생각하고 말하고 마음 쓰고 생활합시다. 그렇게 살면 반드시 날마다 본래부처의 삶, 즉 평화롭고 행복한 삶이 이루어집니다.
[2주 보현법회 법문]
화엄경세주묘엄품과...10강 요약문(2012.1.8)
본래부처행이 모든 문제의 치유책
도법스님 (실상사 회주)
그동안 10지, 10회향, 10행을 상징하는 인물들과 그들이 본 부처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지금은 10주를 상징하는 인물들과 그들이 본 부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대부분 같은 내용들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다 같이 천왕봉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라도 5리, 10리, 30리 지점이냐에 따라 표현이 다를 수 있잖아요. 마찬가지로 세주묘엄품에서도 다들 부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인데, 다만 등장인물들이 어느 위치에서 그 이야기를 하는가에 따라 차이가 나는 거죠.
■ 너와 내가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이 모든 병의 근원
오늘은 주약신(主藥神)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겠습니다.
<길상(吉祥)주약신은 일체중생의 마음을 널리 관찰해서 부지런히 거두어들이는 해탈문을 얻었고… 모공현광(毛孔現光)주약신은 큰 자비의 깃대로써 온갖 병의 경계에서 빨리 벗어나는 해탈문을 얻었고… 보발위광(普發威光)주약신은 방편으로 염불하여 일체중생의 병을 소멸하는 해탈문을 얻었다.>
주약신은 일체중생이 온갖 병의 경계에서 빨리 벗어나도록 하고, 또는 병이 소멸하도록 애쓰는 분들이죠. 우리는 ‘병’이라고 하면 주로 몸의 병을 생각하죠. 그런데 실제로는 몸의 병과 마음의 병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 과학이 발달하고 병에 관한 연구가 진전되면서 마음의 병이 낫지 않으면 몸의 병도 낫지 않는다는 게 여러 가지로 증명되고 있어요. 암의 주요인도 스트레스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최근에는 마음을 치료하는 연구가 점점 더 많아지고 심리치유니, 예술치료니 하는 다양한 치유법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의 병이 생기는 핵심적인 원인은 무엇일가요? 그것은 너와 내가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 때문에 존재의 불완전, 불만족, 불충분하다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너는 너, 나는 나로 분리되어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대에 대해 불신하고 의심하고 긴장하고 대립하는 것입니다.
너와 내가 원융무애한 하나라고 인식하면 저절로 완점함, 충분함, 만족함에 대한 확신을 갖데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죄의식, 열등의식, 피해의식, 패배의식, 박탈감, 시기와 질투, 탐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불교의 12연기도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12연기[무명(無明) - 행(行) - 식(識) - 명색(名色) - 육입(六入) - 촉(觸) - 수(受) - 애(愛) - 취(取) - 유(有) - 생(生) - 사(死)]로 보면 ‘명색’에서 분리된 사고가 시작됩니다.
최근에 현대심리학을 전공하신 분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한결같은 말씀이 ‘본래부처론’이 자신들이 연구하는 내용과 유사하고, 심리상담치료에서도 가장 바람직하고 효과적인 치유책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유사한 실험결과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을 키울 때 “너는 문제야, 너는 안돼”라는 지적과 비판을 반복해서 듣고 자라는 아이는 자존감을 상실하게 되고 그로 인하여 열등의식, 패배감에 찌들게 됩니다. 반면에 “괜찮아. 너를 믿어. 잘 할 거야”라는 신뢰와 격려를 받으며 자란 아이는 자존감이 커지고 그로부터 열정과 용기를 갖게 된다고 하죠.
우리 불자들은 어떤가요? ‘중생’하면 보통 ‘업보’니 ‘죄’니 하는 말을 연상하죠? 그래서 무슨 문제가 생길 때마다 ‘원래 업장이 많아서 그래’ 또는 ‘죄 많은 중생이라 어쩔 수 없어’라고 주저앉게 됩니다. 그렇게 살지 말자는 게 불교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본래부처론은 내가 완전한 존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곧 우주이고 우주가 곧 나입니다. 정말 대단한 자존감이죠.
부처님이 사셨던 당시의 인도는 카스트라는 계급제도가 고착되어 있었습니다. 브라만(종교인), 크샤트리아(무사계급, 정치인), 바이샤(농부나 상인 등의 평민), 수드라(노예)라고 하는 네 계급으로 구분했습니다. 그리고 불가촉천민이라고 하여 이 네 계급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짐승처럼 취급받았습니다.
본래 종자가 그렇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그 계급으로 태어났다는 사고방식이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을 때, 부처님은 그것을 부정하고 ‘천상천하유아독존’을 설파하셨습니다. ‘모든 존재가 다 거룩하다’, ‘본래 타고나는 종자 따위는 없다’, ‘모든 존재는 행위하는 대로 만들어진다’고 하셨죠. 지금은 누구나 당연하다고 고개를 끄덕거리지만 그 당시로 보면 천지개벽할 말이었어요. 존재의 거룩함을 나타내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사상과 행동은 불교의 원형입니다.
불교경전에서 이야기하는 병은 대부분 무지와 착각의 병을 말합니다. 부처님을 의사 중의 의사, 대의왕(大醫王)이라고 칭송하는 것도 바로 근원적인 병을 치료하는 분이라는 겁니다. 존재의 거룩함에 대한 무지와 착각의 사고방식이 만병의 근원이고, 우리의 평화와 행복을 깨뜨리는 탐욕, 오만, 열등의식 등도 이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천상천하유아독존’, ‘본래부처’라는 존재가치에 대한 이해와 확신이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한 근원적 치유책이 됩니다.
■ 편하고 쉬운 것은 다 독(毒)이 된다
다음은 주산신(主山神)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보봉개화(寶峰開華)주산신은 크고 고요한 선정의 광명에 들어가는 해탈문을 얻었고… 이진보계(離塵寶髻)주산신은 끝없는 겁 동안 부지런히 정진해서 게으르지 않는 해탈문을 얻었고… 금강견고안(金剛堅固眼)주산신은 그지없는 큰 이치의 바다를 나타내는 해탈문을 얻었다.>
여기서 정진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며칠 전에 마을의 귀농자들이 갓난아이를 데리고 절에 와서 차 한 잔을 나누었습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기어보려고 한순간도 쉬지 않고 혼신의 노력을 다하더군요. 거의 2시간 동안을 정말 한 순간도 쉬지 않고요. 그것을 보면서 ‘한 인간이 태어나서 걷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했던가’, ‘저절로 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실상을 알고보면 세상의 이치가 그렇게 항상 애써 노력하며 살아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 이치와 반대로 살려고 노력하니 더 힘들어지는 거죠. 우리 머릿속에서는 편하고 쉬운 것이 좋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생각하는대로 편하고 쉽게 살면 다 독이 됩니다. 그 결과가 비만이고 당뇨병이고, 심리병이고, 암이고…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이치에 어긋나는 삶을 추구하면 자신에게도 독이 되고 상대에게도 독이 됩니다.
부처님의 마지막 유언이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는 것이죠? 왜 그러셨겠습니까. 단지 사회윤리적인 차원에서의 말씀이 아닙니다. 이유는 명백합니다. 생명의 법칙과 질서, 존재의 법칙과 질서, 우주의 법칙과 질서, 즉 세상이치가 그렇기 때문입니다. 법은 게으르지 않습니다. 이 우주는 정말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죠. 그 결과로 세상도 존재하고 나도 존재합니다. 우리는 법에 의해 태어났고 법에 의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법에 다라 부지런히 정진해야 합니다.
■ 본래부처행이 곧 자리이타의 삶
오늘은 제7주를 표한 주지신(主地神)의 찬탄을 담은 게송을 읽고 끝내겠습니다.
<부처님이 지난 옛적 여러 행을 닦으사 / 중생들에게 무거운 업장 소멸하게 하시니 / 보산중보(普散衆寶)주지신이 이 해탈을 보고 기뻐하였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수행하면서 ‘나는 중생들의 무거운 업장을 소멸시키기 위해서 절한다, 기도한다, 염불한다, 봉사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나는 중생이니까 먼저 내 업장을 소멸해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모든 경전에서는 일관되게 ‘부처님은 중생을 위해서 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이 법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언제나 법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면 왜 법대로 살아야만 할까요? 법에 맞게 보고 생각하고 말하고 생활해야 삶이 평화롭고 행복하기 때문이죠.
만약 어떤 농부가 쉬고 싶고 놀고 싶은 유혹을 떨쳐버리고 지극정성을 다해 수박농사를 지었다고 합시다. 당연히 수박농사가 잘되겠죠? 그러면 누구에게 좋겠습니까. 먼저 수박에게 좋겠죠? 동시에 농부에게도 유익하겠죠. 이게 법, 세상이치입니다. 즉 법에 따라 살면 너도 좋고 나도 좋은 자리이타의 삶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본래부처행이란 이와 같이 세계의 법칙과 질서에 맞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법에 따라 살려면 마땅히 중생을 위해서 살아야 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진정 자신을 위해서 잘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저절로 평화와 행복의 삶이라는 불가사의한 기적이 일어납니다.
너와 내가 분리되어 있지 않듯이 부처와 중생도 따로가 아닙니다. ‘중생이니까 어쩔 수 없어’라는, 자신의 생각을 떨쳐버리고 본래부처로 우뚝서십시오.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존재의 법칙과 질서에 따라 끊임없이 그렇게 보고 생각하고 말하고 마음 쓰고 생활합시다. 그렇게 살면 반드시 날마다 본래부처의 삶, 즉 평화롭고 행복한 삶이 이루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