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수행의 시작이요 끝,
‘중중무진연기법과 동체대비행’
도법스님 (실상사 회주)
지난 해부터 지금까지 한 달에 한 번씩 화엄경의 서론이기도 하고 총론이기도 한 <세주묘엄품>을 공부했고, 오늘이 마지막 시간입니다. 세주묘엄품은 연극의 시나리오처럼 화엄경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을 등장시켜 그들이 누구이고 어떻게 사는 인물들인지, 또는 그들이 본 부처님과 그분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통해 중중무진 연기의 세계와 동체대비의 실천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실상사라는 절이 어떤 절인가를 알고자 할 때, 실상사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면 실상사를 알 수 있는 이치와 같은 거죠.
오늘은 마지막 십주와 십신의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내용을 보면 늘 지혜롭게 했다, 자비롭게 했다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특별한 장면이 있으므로 그것을 설명하겠습니다. 마지막 장면인데, 그동안에는 없었던 장면입니다.
‘여래의 사자좌에서 나온 보살들이 부처님의 법을 찬탄하다.’
사자좌는 방석이지요. 그런데 그 방석에서 보살들이 나와서 부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십니까?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세주묘엄품을 처음 시작할 때 ‘대지는 금강으로 이뤄져 있다’는 구절을 기억하시죠? (네) 그때 이 말은 땅의 존재가치를 표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실상사로 말하면 땅이 있음으로 해서 스님들도 재가자도 불상도 탑도 법당도 있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부처님도 예수님도 땅이 없으면 존재하지 못하지요. 그러므로 땅이 갖는 가치는 대단한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이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황금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여래의 사자좌에서 나온 보살들이 부처님의 법을 찬탄한다’는 이 구절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 구절 역시 세상은 그물의 그물코들처럼 전부 연결되어 있다는 인드라망 원리로 해석하지 않으면 허황된 이야기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그 사자좌에서 나온 보살님들이 무엇을 하는가. 먼저 열 분의 보살님들을 위시로 티끌 수만큼 많은 보살들이 일제히 출현하여 부처님께 갖가지 공양을 올립니다. 그리고 나서 한 분 한 분이 각각 부처님의 덕을 게송으로 찬탄합니다. 한두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여래가 지난 옛적 오랫동안 세간에서 부지런히 수행하사,
갖가지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하여 그들로 하여금 모든 불법을 받아 행하게 하네’
부처님이 하시는 일이 이 구절에 다 나타나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법의 길로 가게 하는 것입니다.
불교를 수행의 종교, 깨달음의 종교라고들 합니다. 왜 그렇게 말할까요? 수행은 말 자체로만 보면 실천한다, 노력한다, 애쓴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건 꼭 불교만 그런 건 아니죠. 다른 종교에서도 하고 종교가 없는 사람들도 하지요. 그런데 만약 수행이라는 게 그렇게 똑같다면 굳이 불교수행을 특별하게 강조할 필요가 없잖아요. 뭔가 다른 이유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불교수행은 무엇이 다를까요? 불교수행이 뭐냐고 하면 대부분 염불하는 것, 참선하는 것, 다라니를 외우는 것, 절을 하는 것 등을 떠올리게 되죠. 한 번 더 따져 보십시오. 사실은 기독교인들도 그들 나름대로 금식기도도 하고 명상도 합니다. 비록 언어와 형식은 다르지만 다른 종교에도 기도나 염불이나 참선과 비슷한 수행법이 있어요. 따라서 그렇게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갖고는 불교수행이 다른 종교의 수행과 다르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저 역시도 이 부분을 자신 있게 설명하기가 어려웠는데, 나름대로 이 부분에 대해 늘 천착하고 짚어보고 정리한 것은 깨달음을 실천하는 것, 또는 깨달음의 정신으로 실천하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표현으로는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바꿔 말하면 깨달음의 정신에 토대하지 않는 실천은 불교수행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거죠. 우리가 참선을 하든, 절을 하든 염불을 하든 다라니를 하든 기도를 하든, 깨달음의 정신으로 실천되어야 그게 진짜 수행입니다. 깨달음은 먼 훗날 이루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실천해야 할 내용입니다. 지금까지 세주묘엄품에서 ‘깨닫고 보니 세상이 이렇더라’ 하면서 존재가치에 대한 이해를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것이 깨달음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세상 이치를 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업의 이치를 아는 것이지요.
법의 길인 세상의 이치도 업의 이치도 온통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 역시 ‘그대 없이는 나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고방식은 이치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고방식으로 삶을 바라보고 다루면 결코 삶이 평화로울 수가 없습니다. 평화롭지 않은데 행복할 턱도 없겠지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으로 마음 쓰고 문제를 다루게 되면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이 다 독이 됩니다. 탐진치(貪嗔痴) 삼독(三毒)이 되는 거예요.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이를 미워하는 순간, 나는 미워하는 존재가 됩니다. 미워하게 되면 욕을 하게 되고, 욕을 하는 순간 나는 욕하는 존재가 됩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면 어떻게 되죠? 두들겨 패기도 하겠죠. 그러는 순간 나는 두들겨 패는 존재가 돼요. 어떻습니까? 편안한 삶, 따뜻한 삶, 평화로운 삶이 불가능하지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으로 삶을 바라보고 다루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앎이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깨달음이 없다는 이야기예요. 요즘 현대인의 가장 큰 문제는 오로지 이기적 욕심만 있지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이기적인 욕심을 쫓아다니는 일이 자기 인생을 위하는 일인 줄 착각하고 살아요. 그게 바로 전도몽상인 것입니다.
반대로 ‘나는 상대방에 의지해서만 존재한다. 상대방은 내게 대단히 귀하고 고마운 존재이다’라고 알고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고 고마워하고, 이렇게 마음을 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절로 평화롭고 행복하겠죠? ‘저 사람이 나를 여기에 존재하게 하는 거룩한 부처님이야’ 이렇게 생각하면 바로 그 순간 나는 거룩한 생각을 하는 존재가 됩니다. ‘저 사람은 정말로 부처님과 똑같은 존재야’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거룩한 말을 하는 존재인 것이고, 그 친구를 거룩한 존재로 대하는 순간, 나는 거룩한 행위를 하는 존재인 것이지요.
자연스럽게 내 삶이 밝고 따뜻하고 아름다워지지요. 진심으로 상대방에 대해 존경하고 감사하면 그로 인해 내 안에 있는 모든 혼탁함도 정화되고 내 안에 있는 아픔도 치유되고 내 안에 있는 모든 얽힌 것도 풀어지게 됨으로 내 삶이 자유롭게 됩니다. 더 나아가 그렇게 거룩한 존재로 인정받고 대접받는 사람의 삶도 마찬가지로 밝아지고 자유롭게 됩니다. 상대방을 거룩한 존재로 대하는 실천이 그대로 자기도 이롭고 상대로 이롭게 하는 깨달음의 실천, 즉 참다운 수행입니다. 정말 간단명료한 이치 아닙니까?
불교는 어려운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 수행의 종교라고 하는 이유는 지금 여기에서 바로 깨달음을 실천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빠지면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의 의미가 제대로 살아날 수 없습니다.
사자좌에서 보살들이 나오고 보살들이 부처님을 찬탄한다는 이야기를 불교적으로 설명하면 법, 즉 다르마의 정신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나타나고 있는가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인드라망의 사고방식으로 인생을 바라보고 살게 되면 피차의 삶이 밝아지고 평화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죠. 우리가 1년 동안 세주묘엄품을 갖고 이야기를 해왔는데, 세주묘엄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러한 법의 길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주묘엄품만이 아니라 화엄경의 전체 내용도 끝까지 일관되게 법의 길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화엄사상을 한마디로 중중무진연기법과 동체대비행이라고 하는 겁니다.
재작년에 했던 <보현행원품>과 작년에 했던 <세주묘엄품>은 거의 같은 내용인데 강조점에 차이가 있습니다. <보현행원품>이 우리의 삶을 중심에 놓고 깨달음의 실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세주묘엄품>은 그런 삶을 가능하게 하는 세계, 즉 무대를 중심에 놓고 깨달음의 실천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세주묘엄품> 첫 시간에 ‘대지가 금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표현으로 세계, 즉 현장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중요하게 짚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렇게 이야기하든 저렇게 이야기하든 결론은 중중무진연기법과 동체대비행, 다른 말로 하면 법의 길과 법의 길을 실천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불교인들이 그런 차원에서 참된 수행의 길을 걸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어쨌든 지난 1년 동안 제가 여러분 덕택에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참 좋은 시간이었는데 여러분들은 어떠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여러분들에게도 좋은 시간이었기를 바랄 뿐입니다.
고맙습니다.
불교수행의 시작이요 끝,
‘중중무진연기법과 동체대비행’
도법스님 (실상사 회주)
지난 해부터 지금까지 한 달에 한 번씩 화엄경의 서론이기도 하고 총론이기도 한 <세주묘엄품>을 공부했고, 오늘이 마지막 시간입니다. 세주묘엄품은 연극의 시나리오처럼 화엄경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을 등장시켜 그들이 누구이고 어떻게 사는 인물들인지, 또는 그들이 본 부처님과 그분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통해 중중무진 연기의 세계와 동체대비의 실천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실상사라는 절이 어떤 절인가를 알고자 할 때, 실상사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면 실상사를 알 수 있는 이치와 같은 거죠.
오늘은 마지막 십주와 십신의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내용을 보면 늘 지혜롭게 했다, 자비롭게 했다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특별한 장면이 있으므로 그것을 설명하겠습니다. 마지막 장면인데, 그동안에는 없었던 장면입니다.
‘여래의 사자좌에서 나온 보살들이 부처님의 법을 찬탄하다.’
사자좌는 방석이지요. 그런데 그 방석에서 보살들이 나와서 부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십니까?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세주묘엄품을 처음 시작할 때 ‘대지는 금강으로 이뤄져 있다’는 구절을 기억하시죠? (네) 그때 이 말은 땅의 존재가치를 표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실상사로 말하면 땅이 있음으로 해서 스님들도 재가자도 불상도 탑도 법당도 있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부처님도 예수님도 땅이 없으면 존재하지 못하지요. 그러므로 땅이 갖는 가치는 대단한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인간들이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황금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여래의 사자좌에서 나온 보살들이 부처님의 법을 찬탄한다’는 이 구절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 구절 역시 세상은 그물의 그물코들처럼 전부 연결되어 있다는 인드라망 원리로 해석하지 않으면 허황된 이야기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그 사자좌에서 나온 보살님들이 무엇을 하는가. 먼저 열 분의 보살님들을 위시로 티끌 수만큼 많은 보살들이 일제히 출현하여 부처님께 갖가지 공양을 올립니다. 그리고 나서 한 분 한 분이 각각 부처님의 덕을 게송으로 찬탄합니다. 한두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여래가 지난 옛적 오랫동안 세간에서 부지런히 수행하사,
갖가지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하여 그들로 하여금 모든 불법을 받아 행하게 하네’
부처님이 하시는 일이 이 구절에 다 나타나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법의 길로 가게 하는 것입니다.
불교를 수행의 종교, 깨달음의 종교라고들 합니다. 왜 그렇게 말할까요? 수행은 말 자체로만 보면 실천한다, 노력한다, 애쓴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건 꼭 불교만 그런 건 아니죠. 다른 종교에서도 하고 종교가 없는 사람들도 하지요. 그런데 만약 수행이라는 게 그렇게 똑같다면 굳이 불교수행을 특별하게 강조할 필요가 없잖아요. 뭔가 다른 이유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불교수행은 무엇이 다를까요? 불교수행이 뭐냐고 하면 대부분 염불하는 것, 참선하는 것, 다라니를 외우는 것, 절을 하는 것 등을 떠올리게 되죠. 한 번 더 따져 보십시오. 사실은 기독교인들도 그들 나름대로 금식기도도 하고 명상도 합니다. 비록 언어와 형식은 다르지만 다른 종교에도 기도나 염불이나 참선과 비슷한 수행법이 있어요. 따라서 그렇게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갖고는 불교수행이 다른 종교의 수행과 다르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저 역시도 이 부분을 자신 있게 설명하기가 어려웠는데, 나름대로 이 부분에 대해 늘 천착하고 짚어보고 정리한 것은 깨달음을 실천하는 것, 또는 깨달음의 정신으로 실천하는 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표현으로는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바꿔 말하면 깨달음의 정신에 토대하지 않는 실천은 불교수행이라고 할 수가 없다는 거죠. 우리가 참선을 하든, 절을 하든 염불을 하든 다라니를 하든 기도를 하든, 깨달음의 정신으로 실천되어야 그게 진짜 수행입니다. 깨달음은 먼 훗날 이루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실천해야 할 내용입니다. 지금까지 세주묘엄품에서 ‘깨닫고 보니 세상이 이렇더라’ 하면서 존재가치에 대한 이해를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것이 깨달음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세상 이치를 아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업의 이치를 아는 것이지요.
법의 길인 세상의 이치도 업의 이치도 온통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 역시 ‘그대 없이는 나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고방식은 이치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고방식으로 삶을 바라보고 다루면 결코 삶이 평화로울 수가 없습니다. 평화롭지 않은데 행복할 턱도 없겠지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으로 마음 쓰고 문제를 다루게 되면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이 다 독이 됩니다. 탐진치(貪嗔痴) 삼독(三毒)이 되는 거예요.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이를 미워하는 순간, 나는 미워하는 존재가 됩니다. 미워하게 되면 욕을 하게 되고, 욕을 하는 순간 나는 욕하는 존재가 됩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면 어떻게 되죠? 두들겨 패기도 하겠죠. 그러는 순간 나는 두들겨 패는 존재가 돼요. 어떻습니까? 편안한 삶, 따뜻한 삶, 평화로운 삶이 불가능하지요.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으로 삶을 바라보고 다루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앎이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깨달음이 없다는 이야기예요. 요즘 현대인의 가장 큰 문제는 오로지 이기적 욕심만 있지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이기적인 욕심을 쫓아다니는 일이 자기 인생을 위하는 일인 줄 착각하고 살아요. 그게 바로 전도몽상인 것입니다.
반대로 ‘나는 상대방에 의지해서만 존재한다. 상대방은 내게 대단히 귀하고 고마운 존재이다’라고 알고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고 고마워하고, 이렇게 마음을 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절로 평화롭고 행복하겠죠? ‘저 사람이 나를 여기에 존재하게 하는 거룩한 부처님이야’ 이렇게 생각하면 바로 그 순간 나는 거룩한 생각을 하는 존재가 됩니다. ‘저 사람은 정말로 부처님과 똑같은 존재야’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거룩한 말을 하는 존재인 것이고, 그 친구를 거룩한 존재로 대하는 순간, 나는 거룩한 행위를 하는 존재인 것이지요.
자연스럽게 내 삶이 밝고 따뜻하고 아름다워지지요. 진심으로 상대방에 대해 존경하고 감사하면 그로 인해 내 안에 있는 모든 혼탁함도 정화되고 내 안에 있는 아픔도 치유되고 내 안에 있는 모든 얽힌 것도 풀어지게 됨으로 내 삶이 자유롭게 됩니다. 더 나아가 그렇게 거룩한 존재로 인정받고 대접받는 사람의 삶도 마찬가지로 밝아지고 자유롭게 됩니다. 상대방을 거룩한 존재로 대하는 실천이 그대로 자기도 이롭고 상대로 이롭게 하는 깨달음의 실천, 즉 참다운 수행입니다. 정말 간단명료한 이치 아닙니까?
불교는 어려운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 수행의 종교라고 하는 이유는 지금 여기에서 바로 깨달음을 실천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빠지면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의 의미가 제대로 살아날 수 없습니다.
사자좌에서 보살들이 나오고 보살들이 부처님을 찬탄한다는 이야기를 불교적으로 설명하면 법, 즉 다르마의 정신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나타나고 있는가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인드라망의 사고방식으로 인생을 바라보고 살게 되면 피차의 삶이 밝아지고 평화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죠. 우리가 1년 동안 세주묘엄품을 갖고 이야기를 해왔는데, 세주묘엄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러한 법의 길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주묘엄품만이 아니라 화엄경의 전체 내용도 끝까지 일관되게 법의 길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화엄사상을 한마디로 중중무진연기법과 동체대비행이라고 하는 겁니다.
재작년에 했던 <보현행원품>과 작년에 했던 <세주묘엄품>은 거의 같은 내용인데 강조점에 차이가 있습니다. <보현행원품>이 우리의 삶을 중심에 놓고 깨달음의 실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세주묘엄품>은 그런 삶을 가능하게 하는 세계, 즉 무대를 중심에 놓고 깨달음의 실천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세주묘엄품> 첫 시간에 ‘대지가 금강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표현으로 세계, 즉 현장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중요하게 짚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렇게 이야기하든 저렇게 이야기하든 결론은 중중무진연기법과 동체대비행, 다른 말로 하면 법의 길과 법의 길을 실천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불교인들이 그런 차원에서 참된 수행의 길을 걸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어쨌든 지난 1년 동안 제가 여러분 덕택에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참 좋은 시간이었는데 여러분들은 어떠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여러분들에게도 좋은 시간이었기를 바랄 뿐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