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6. 19_ 6월 보현법회
<삼귀의와 반야심경>강의 (3강)
참모습을 알고 참모습대로 살면 그 삶이 괜찮아진다네
도법스님 (실상사 회주)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잘 지내시죠? (네!)
걱정 안 해도 되는 거죠? 진짜 그러세요? (하하하)
우리가 만나면 이렇게 가볍고 따뜻한 인사를 안 할 수가 없죠. 하지만 실제 삶을 보면 결코 가볍지도 않고 따뜻하지도 않은 상황들이 일상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 같습니다.
살아보면 어떻습니까? 계획한 대로 잘 되던가요? (아니오.)
잘 안 되죠? 그것이 인생살이인 것 같습니다.
부처님이 당신의 가르침을 통해서 하고자 했던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예전에는 잘 안 보였는데 이런저런 경험을 미루어보니 부처님이 삶의 모범과 가르침을 통해 하고자 한 것은 삶을 억압하는 금기를 깨는 일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삶을 불안과 공포에 떨게 만들고 서로 차별하게 만드는 벽을 허물려고 했던 것입니다. 금기를 깨뜨림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삶이 좀 더 편안하고 자유로울 수 있도록, 홀가분할 수 있도록 하고자 했습니다.
우리가 올해 공부하자고 한 것이 반야심경인데 반야심경도 처음부터 끝까지 그런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예를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남자는 귀하고 여자는 천해.’ 이런 사고방식이 지배했었죠. 지금은 어떻습니까? 다 없어졌습니까? 많이 변하긴 했지만 아직도 남아 있죠. ‘남자는 귀하고 여자는 천하다.’라든가, ‘남자는 우월하고 여자는 열등하다.’라면서 차별하면 남녀사이가 좋아질 수 있겠습니까? 좋아질 수가 없죠. 그리고 그렇게 차별한다고 해서 누구에게 좋을까요? 남자한테 좋을까요? 실제로는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랜 세월 남녀불평등이 마치 진리인 것처럼 여기고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관습이 되기도 하고 풍습이 되기도 해서,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남아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오셔서 “야, 그런 것 없어. 세상이치를, 삶의 실상을 잘 몰라서 그렇지, 실제는 그렇지 않아”라고 알려준 겁니다.
잘못된 신념은 우리 삶을 왜곡시키기도 하고 억압하기도 하고 무겁고 부자유스럽게 만드는 짐과 멍에가 됩니다. 삶이 무겁고 힘든 것은 인간의 미혹과 무지 때문에 만들어진 짐과 멍에 때문인 거죠. 그러면 이걸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절을 하면 해결될까요? 참선을 하면 해결 될까요? 염불을 하면 해결될까요? 권력을 잡으면, 서울대학을 나오면, 돈을 벌면 해결될까요?
잘 모르겠습니까? 우리는 아는 것이 별로 없어요. 그렇죠? (일동웃음) 다들 공부도 잘 하고, 대학도 나오고, 박사학위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실제 삶을 이야기해보면 별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나 같은 경우 공식적인 학력이 초등학교 졸업인데, 그런데 박사들이 나보다도 더 모르는 것 같아요.
자,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다른 길이 없습니다. 길은 딱 하나입니다. 세상이치, 인생의 실상, 삶의 실상을 알아야만 해결됩니다. ‘아, 남녀는 평등한 것이구나.’ 이 사실을 알면 바로 그 순간 즉각 문제가 해결됩니다. 여자도 알고, 남자도 알고, 남녀는 평등한 것이구나, 이렇게 알면 남녀 사이가 좋아지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되는 거죠. 그래서 남자도 괜찮은 인간이 되는 것이고, 여자도 괜찮은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삶을 억압하고 무겁고 힘들게 만드는 남녀불평등 문제는 삶의 실제를 잘 파악하고 이해하고 앎으로써 해결되는 것이지 그 밖의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점을 늘 놓치고 삽니다.
반야심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삶의, 인생의 실제를 잘 봐라. 잘 보면 알 수 있다. 알고 보면 우리는 괜한 짐을 짊어지고 있기도 하고 괜한 멍에게 걸려있기도 하고, 괜한 철조망에 갇혀 있기도 하다. 실제는 없는 것인데, 잘못 알고 잘못 생각해서 만들어진 짐이고 울타리고 멍에이기 때문에 잘 살펴보고 잘 관찰하면 제대로 알 수 있다.’라고.
인생의 실상에 대한 무지와 착각 때문에 삶을 왜곡시키는 사례는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예를 들어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도 있죠? 이 말은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안 맞습니다.) 안 맞아요? 그것을 어떻게 알지요? 그렇죠. 실제 경험을 해보니까 사실이 아닌 거잖아요.
부처님의 가르침은 ‘해보면 안다’는 것입니다. 실제가 아닌 것은 아무리 말로 그럴듯하게 꾸며도 실제에 적용해보면 금방 엉터리임을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하는데 실제 겪어보니 전혀 그렇지 않은 거죠.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하는 것은 실상을 잘 모르고 쓸데없는 생각으로 만들어낸 새빨간 거짓말인 겁니다. 이야기를 좀 더 진전시켜 보죠. 암탉이 ‘꼬꼬댁~’ 하고 울어서 가보니까 알을 낳았어요. 이건 뭐예요? 돈이죠. 그러니 망한 게 아니라 오히려 부자가 되었네요.(일동웃음)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인생의 실상에 대한 무지의 망상으로 만들어낸 쓸데없는 금기 때문에 고생하지 않아도 될 헛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 중생의 삶입니다. 어리석음으로 만들어낸 쓸데없는 짐만 벗어던져도 아마 우리가 짊어진 인생의 짐이 50근은 줄어들 겁니다.
100근을 짊어지고 가다가 50근을 짊어지고 가면 어떨까요? 날아갈 것처럼 가볍겠죠? 아마 그 정도 되면 “살만해” 그럴 겁니다. 인생의 실상을 알고 보면 부처님도 50근은 짊어지고 가야 합니다. 50근은 부처님도 어쩔 수 없습니다. 50근은 사람이면 누구나 다 짊어져야 하는 짐입니다. 실제 50근 정도만 짊어지면 인생이 살만한데, 100근, 150근, 200근이 되니 죽을 지경인 것입니다.
실제는 50근만 짊어지고 살면 될 일인데 왜 100근, 150근, 200근이 만들어질까요? 인생의 실상을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대부분 잘못 알아서 만들어진 짐들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남녀는 불평등해.’, ‘누구는 상놈이고 누구는 양반이야.’,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해.’ ‘남자는 절대 부엌에 들어가면 안 돼.’ 하는 등의 것이 맞는 말인가요?
전혀 안 맞죠. 그런데도 여전히 중요하게 작동하죠? 잘 안 깨지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경우가 여전히 곳곳에 꿈틀대고 있습니다.
불교는 돈을 벌게 하거나 출세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불교적 사유방식을 잘 배우고 삶에 잘 적용하면 쓸데없는 멍에, 쓸데없는 짐, 쓸데없는 울타리, 쓸데없는 철조망을 벗어던지게 됩니다. 동시에 쓸데없는 것들을 만드는 바보짓을 안 하면서 살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런 내용을 불교적으로는 깨달음의 삶이라고 합니다. 깨달음의 삶을 살았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 해탈, 열반이라고 합니다. 해탈, 열반이라는 말을 쉽게 풀면 그 삶이 편안하다, 홀가분하다,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인생살이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불교를 복잡하고 어렵게 하게 될까요? 그렇게 되는 이유는 ‘경전의 말씀은 다 진짜야, 그러니 경전에 있는 대로만 해야 돼.’ 하고 전통으로 형성된 권위에 길들여진 믿음 때문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실제적인 사실도 있지만 많은 부분이 의미 있게 꾸민 이야기들입니다. 우리도 옛날이야기를 많이 듣고 살았죠? ‘전설 따라 삼천 리’, ‘전설의 고향’ 같이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게 만들어진 이야기가 경전에는 수두룩합니다. 아마 양으로 따지자면 실제로 있었던 내용은 20~30% 정도이고 70~80%는 의미 있는 이야기일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경전에 있기 때문에 모두가 진짜라고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경전을 읽을 때도 “아, 이것은 실제 있었던 사건이구나.”라고 생각할 것이 있고, “이것은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의미 있는 이야기야”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 * * * *
이제 우리가 공부하는 반야심경으로 가볼까요? 지난 시간에 어디까지 했습니까? 제목까지 했죠?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참지혜로 실천하는 가르침의 경
한글로 풀어놓은 이 제목은 계속 수정하는 중이기 때문에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반야심경을 ‘참 지혜로 실천하는 가르침의 경’이라고 풀었습니다. 이것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니까 나쁘지는 않은데 굳이 이렇게까지 안 해도 괜찮겠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참 지혜로 실천하는 경’, 이렇게만 하는 것이 더 좋겠다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그렇게 해도 괜찮을 것 같죠? ‘참 지혜로 실천하는 경.’
무엇이 참 지혜인가. 여기 보면 일원상이 있고 삼보륜이 있고 화엄 인드라망 무늬가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이 그림과 연결시켜 따져보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는 했지만 구체적인 설명은 하지 않았죠? 오늘은 그 이야기를 먼저 하고 시간이 되면 다른 이야기를 더 해보겠습니다.
‘일원상’은 주로 부처님이 가르치고자 했던 진리, 세상의 참된 진리를 또는 자신의 진면목, 인생의 실상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천수백 년 전 선사스님들이 만들었습니다. 천수백 년 전부터 사용되어오던 그림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원불교의 전유물처럼 되어 있죠. 이 현상을 보면서 우리는 알게 됩니다. ‘세상에 임자가 따로 있는가?’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임자입니까? 쓰는 사람이 임자인 거죠. 그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일원상은 천수백 년 전부터 선사스님이 만들어 썼지만 그 후계자들이 잘 안 써요. ‘그런 것이 있는가보다.’하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런데 원불교에서 이것을 소중하게 사용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원불교의 전유물처럼 되었죠. 물론 지금 다른 사람이 쓴다고 해도 상관은 없는 일입니다.
‘삼보륜’은 일원상으로 표현된 사상과 정신을 구체적인 삶으로 살아간 사람이 있고, 그 삶을 살 수 있도록 가르쳐준 내용이 있고, 또 그 내용대로 실현하겠다고 작심한 집단이 있습니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불.법.승 삼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삼보륜은 조계종단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일원상에 담겨있는 사상과 정신을 잘 알고 살아서 그 삶이 괜찮게 된 부처님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면 인생이 괜찮다고 잘 가르쳐 준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죠. 그런 삶을 살겠다, 그런 세상을 만들겠다, 그런 삶을 살고 그런 세상을 만들이 귀해 인생을 바치겠다고 한 이들의 공동체가 승보입니다. 이 세 가지가 불법승 삼보입니다.
세 번째로는 ‘화엄 인드라망 무늬’라고 이름이 붙어있는 그림이 있습니다. 앞에 이야기한 두 가지 내용들을 누구나, 불교가 하든, 기독교가 하든, 무종교인이 하든, 남녀노소에 관계없이 우주의 진리, 인생의 실상, 자신의 참모습, 본래부처에 대해 이해하기 쉽도록 만든 그림입니다. 인생을 제대로 알고 살아가야 그 삶이 괜찮아지기 때문에 누구나 할 것 없이 자기 인생을 제대로 알고 살아가는데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게 만들어진 것이 화엄인드라망무늬입니다.
이 세 가지 내용을 놓고 보았을 때 참 지혜란 뭘까? 이 세 가지를 사실대로 잘 아는 것이 참 지혜입니다. 그리고 이 지혜가 참되어지려면 반드시 실천이 뒤따라야 합니다. 생각만으로는 안 됩니다. 실제적인 실천이 있어야 그 지혜가 그 삶이 참되어집니다.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지금 여기 자유자재로 관찰사유하는 참사람 있네
이 그림들을 반야심경의 본문과 연결시켜 살펴봅시다. 반야심경 본문 첫 부분에 ‘지금 여기, 자유자재로 관찰사유하는 참사람 있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그림들은 그중의 참사람을 나타낸 것입니다. 일원상도, 삼보륜도, 화엄인드라망 무늬도 참사람, 나의 본래 면목, 자신의 본래 부처, 자신의 진면목을 그림으로 그린 것입니다.
나의 참사람, 나의 참모습을 잘 아는 것, 참모습을 잘 알아서 참모습대로, 참모습답게 삶을 사는 것을 참지혜로 실천한다고 표현합니다. 또 다른 말로 표현하면 깨달음을 실천한다, 깨달음의 삶을 산다는 말입니다. 참지혜는 깨달음이라는 말로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니 참지혜로 실천한다는 말은 깨달음을 실천한다는 말로 바꾸어서 해석하고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지난 달 우리는 제목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일원상, 삼보륜, 인드라망 무늬와 연결시켜서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은 교재의 구체적인 그림을 보면서 설명을 좀 더 드렸습니다. 또 오늘 처음 오시고, 한 번만 오시는 손님들도 계셔서 약간 겹치지만 설명을 더 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볼 때 ‘관자재보살’을 ‘지금 여기 자유자재로 관찰‧사유하는 참사람’이라는 말로 풀었음을 잘 살펴야 합니다. 관자재보살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우리의 선배, 인생의 선배라고 할 수 있죠. ‘인생을 제대로 알고, 인생의 진면목, 나의 진면목, 또는 나의 참모습을 제대로 알고 살아보니까 그 삶이 괜찮더라.’ 하고 모범을 보여준 선배, 모범을 보여준 선구자, 스승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또는 참사람의 삶을 살고 싶어하는 자기 자신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는 선배, 스승을 말합니다. ‘지금 여기 자유자재로 관찰․사유하는 한 사람 있네.’ 관자재보살을 이렇게 풀었습니다.
행심반야바라밀다시 行深般若波羅密多時
깊은 지혜로 실천할 때
깊은 지혜가 뭐예요? 진면목을 잘 알고 실천할 때, 이런 이야기죠. 나의 진면목을 잘 알고 내가 본래 부처임을 잘 알고 부처행을 할 때, 그런 이야기죠. 그렇게 알고 실천하는 것을 ‘깊은 지혜로 실천할 때’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인연화합의 다섯 무더기 모두 있지만
실제 비어있음을 잘 이해하여 일체 고통에서 벗어났네
그럼 그가 알고 있는 내용이 뭐죠? 알고 있는 내용이 ‘오온개공’입니다. 오온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말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진 다섯 무더기인데, 본래는 없었지만 조건이 만들어져서 생긴 것이라는 의미죠.
우리가 먹는 밥이 본래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었습니다.)
그러면 없던 것이 어떻게 만들어졌습니까. 여러 가지 인연화합으로 만들어졌죠.
밥 한 그릇을 놓고 봅시다. 여기 밥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온 우주의 시간과 공간, 인간과 자연의 모든 것들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햇빛도 연결되어 있고, 달빛도 연결되어 있고, 바람도 연결되어 있고, 봄, 여름, 가을, 겨울도 연결되어 있고, 흙도, 물도, 굼벵이도, 지렁이도, 고라니도, 곰도, 사람도… 온갖 것이 다 함께 해서 밥 한 그릇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밥처럼 우리 몸과 마음도 인연 따라 조건에 의해 만들어지는 거죠. 본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졌다는 말은 그런 의미입니다.
오온(五蘊), 즉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진 다섯 무더기’라고 했는데, 다섯 무더기가 뭐죠?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죠. 이것을 크게 나누면 몸과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다 본래 있는 것이 아니고 조건 따라 만들어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일찍이 부처님은 이 세상에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 말고 그 어디 그 무엇도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의 사고방식과 일반 사람들의 사고방식의 근본적인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태초부터 있는 것이 하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런 것은 없다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본래는 없었는데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결혼해서 아들, 딸을 낳았죠? 아들딸이 본래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본래는 없었는데, 지금은 왜 있죠?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진 거예요. 얼른 생각하면 엄마, 아빠에 의해서 아들, 딸이 생겼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그럴까요? 태양이 없어도 엄마, 아빠만 있으면 아들딸이 태어날 수 있을까요? 물이 없어도, 바람이 없어도, 가능할까요? 절대 불가능합니다. 엄마, 아빠도 아들딸을 낳게 하는 여러 조건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실제는 생각이나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무수한 조건들, 불가사의하고 신비하고 시오하고 미묘한 조건들이 있는 거죠.
그래서 반야심경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나는 누구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나의 참모습은, 나의 본래부처는 어떻게 생겼는가?’, ‘나의 본래 면목은 어떻게 이루어진 존재인가?’, 그 다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괜찮은가?’ 하는 물음에 대한 설명인 것입니다.
사람이 꼭 알아야 할 것은 이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이 두 가지를 알면 다른 것은 잘 몰라도 별로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모르면 온 세상 것을 다 알아도 헛일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두 가지는 모르면서 다른 것은 몽땅 다 알잖아요. 그렇게 되면 쓸데없는 멍에를 만들고, 쓸데없는 짐을 만들고, 쓸데없는 벽을 만들게 됩니다. 온갖 멍에를 만들고, 짐을 만들고, 벽을 만든 결과는 뭐예요? 서로에 대한 불신과 갈등과 대립입니다. 그것이 우리 삶을 고통스럽게 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런데 박사하고 이야기해도 그렇고, 전문가라는 사람들하고 이야기해도 그렇고, 다른 것은 굉장히 많이 알아요. 그런데 나는 누구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이러한 물음을 인생화두라고 하는데, 인생화두의 문제는 보통 이야기하는 유식, 무식하고 별 관계가 없습니다. 보통 이야기하는 박사, 전문가하고도 별 관계가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정말 제대로 가르치고 배우고 익혀야 할 것, 즉 인생화두가 있는데 인생화두는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엉뚱한 것만 가르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돈도 들이고 시간도 들여서 고생고생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더 복잡하게, 더 혼란스럽게, 더 고통스럽게, 더 위험하게 되고 있습니다. 인생화두는 내팽개쳐둔 채 지엽적인 것만 태산처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들이 대부분 자승자박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못살겠다는 아우성이 줄어들지 않고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확대되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왜 이렇게 되는 거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하고 묻게 됩니다. 그리고 내팽개쳤던 화두에 대해 착안하게 됩니다. 그게 잃어버린 나의 참모습은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이루어진 존재인가, 나는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해답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첫 번째는 일원상(이것은 조금 어렵죠. 너무 단순하니까.), 여기서 조금 더 발전한 것이 삼보륜, 더 구체화시킨 것이 인드라망 무늬입니다.
‘아, 나의 진짜 모습은 이렇게 생겼어.’ 이렇게 알면 제대로 아는 거예요. 이것을 제대로 알면 참다운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제대로 파악하고 알아낸 내용대로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삶이 괜찮아져.’, ‘참모습대로 알고 살면 그 삶이 괜찮아져.’, 하고 설명한 것이 반야심경의 첫 부분인데, 바로 ‘지금 여기 자유자재로 관찰사유하는 참사람 있네. 그는 깊은 지혜로 실천할 때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진 다섯 무더기, 오온이 실제 비어있음을 잘 관찰하고 이해함으로써 일체고통에서 벗어났네.(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 인생이란 그런 것이구나, 그렇게 살면 되는구나, 인생을 그렇게 알고 그렇게 살아보니 그 삶이 괜찮구나.’, 하는 내용을 문장으로 표현한 것이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입니다.
여기까지가 반야심경에 말하고자 하는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은 그 내용에 대한 세세한 설명입니다.
이 정도에서 ‘그래, 나는 다 알았어’라는 생각이 들면 뒷이야기는 공부 안 해도 됩니다. 지금 바로 나가셔도 괜찮습니다. ‘나는 반야심경 공부 다 했어. 나는 인생을 다 알고 내가 안대로 살 거야.’ 그래도 괜찮습니다. 이 정도를 바로 알아들으면 좀 똑똑하다고 할 법 하죠? 안 그런가요? (하하) 그런데 그 정도로 완전히 이해가 안 되면 그 다음에 좀 더 이야기를 해 봐야죠. 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다음 달에 또 와야겠죠. 안 오면 오늘 배운 것이 헛것이 되어 버리잖아요.
우리가 인생화두를 핵심적으로 참모습, 본래면목이라고 했는데, 어떤 것이 참모습일까요?
자, 저 화엄 인드라망 무늬를 한 번 봅시다. 동그라미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거예요. 나타난 현상만 보면 따로따로 떼어져 있지만 실제는 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 마치 그물의 그물코처럼.’ ‘인드라망’이라는 말 자체가 화엄경에 나오는 그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물에는 그물코가 있는 거잖아요. 여기 제일 아래가 사람, 오른쪽이 네 발 달린 짐승, 왼쪽이 새와 물고기, 사람 머리에 붙어있는 것이 나무, 숲, 식물입니다. 그리고 해와 달. 우주 삼라만상을 단순화시켜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을 보통 무엇으로 표현합니까?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고 표현하죠? 그러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의지해서 우리가 봐야할 것은 뭐죠? 달입니다. 이 그림은 우리가 봐야할 달을 그린 겁니다. 나의 참모습, 인생의 참모습, 나의 본래면목, 인생의 본래면목, 나의 진면목, 인생의 진면목 - 그것을 화엄경에서는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고, 줄여서 본래부처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또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도 합니다.
인드라망무늬는 나의 참모습, 본래면목, 본래부처를 그림으로 그린 것입니다. 설명을 들어보니 다 알만하죠? 그런데 좀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핵심적인 두 가지를 놓치고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이것이 사람이야, 이것이 나야, 라고 할 때 제일 아래의 사람만을 떼어내어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실제는 전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만이 사람이니 나니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만 떼어내서 사람이고 나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습니다. 떼어낼 수 없는 것을 떼어내서 진짜라고 믿으면 제대로 알고 믿는 거예요, 모르고 믿는 거예요? 모르고 믿는 거잖아요. 거짓된 것을 진짜라고 믿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다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을 반야심경에서는 전도몽상이라고 합니다.
한 번 실물을 놓고 따져봅시다. 실제는 어떨까요? 그물의 그물코라면 하나만 따로 떼어내서 이것만 나라고 할 수 없잖아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전체가 곧 나이고 내가 곧 전체, 내가 곧 우주이고 우주가 곧 나’라고 해야죠. 그렇게 알고 실천하면 그것을 참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고 하나만 떼어내서 나라고 하면 그것은 거짓을 진짜라고 믿는 어리석음이죠.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중도적으로 표현하면 ‘내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나야.’, ‘내가 그대로 우주이고 우주가 그대로 나야.’라고 해야 옳습니다.
저간의 소식을 화엄경에서는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가운데 전체가 들어있고 전체 속에 하나가 들어있다. 하나가 곧 그대로 전체요, 전체가 곧 하나라는 이야기입니다. 인드라망 무늬는 그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고 법성게의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은 그 내용을 언어로 표현한 것이죠.
전체가 곧 나이고 내가 곧 전체라고 있는 사실 대로 알고 실천하는 것을 참 지혜 또는 깨달음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체가 곧 나이고 내가 곧 전체라고 한다면 결국은 한 몸이겠네요. 한 몸 한 생명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렇게 볼 때 우리 몸의 중심이 어디이겠습니까? 보통 우리는 몸의 중심이라고 하면 심장, 뇌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 아주 중요한 기관이죠. 그런데 실제로 검토해보면 평소 몸의 중심은 그때그때 가장 아픈 곳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논리적으로는 심장이다, 뇌다,라고 할 수 있지만 실제 상황에 적용해 살펴보면 그때그때 가장 아픈 곳이 중심일 수밖에 없습니다. 삶을 이렇게 관찰하고 다루어야 한다고 가르쳐주는 것이 불교입니다. 매우 실제적이고 직접적이죠.
우주가 곧 나이고, 내가 곧 우주라고 한다면 우주 전체가 곧 한 몸이잖아요. 그러면 우주의 가장 중심은 어디입니까? 지금 가장 아픈 곳입니다. 내 몸의 가장 아픈 곳에 모든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고 동시에 아픔을 해결하기 위해 진력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 조건이 붙습니까, 안 붙습니까? “나 그거 돈 줘야 할 거야.”, “높은 자리 줘야 할 거야.”, “나중에 특별한 혜택을 줘야 할 거야.”, 그렇게 합니까? 아니면 무조건 합니까? 무조건 하겠죠. 조건이 없어요.
왜 조건이 안 붙습니까? 그것을 하려면 땀을 뻘뻘 흘리고 지극정성으로 공을 들여야 하고 시간도 내야하고 온갖 것을 해야 하는데 왜 조건이 안 붙을까요? 본인의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남의 일이면 당연히 조건이 붙죠. 본인 일이기 때문에 조건 없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주가 곧 내 몸이야, 내가 곧 우주고 우주가 곧 나야. 온 우주가 한 몸, 한 생명이야.’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합시다. 그런데 어디엔가 아픈 곳이 있어요. 그것이 세월호 문제일 수도 있고, 다른 문제일 수도 있겠죠. 요즘은 여러 일이 많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런 아픔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때 어떻습니까? 저것은 내 일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당연히 조건이 붙죠. 그런데 내 일이라고 생각하면 당연히 조건이 붙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아픔도 나의 참 모습으로 보면, 인생의 진면목으로 보면 내 아픔 아닌 것이 없는 거예요. 어떤 문제도 내 문제 아닌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온 세상일을 다 할 수는 없잖습니까. 현실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 가깝게 손닿는 일을 하는 거죠. 어떻게 하는가? 내 손의 종기를 낫기 위해 지극정성으로 아무 조건 없이 하듯이 이 세상의 어떤 아픔, 어떤 문제도 내 아픔, 내 문제처럼 지극정성을 다해 해결하고 치유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지혜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제대로 알고 제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생을 제대로 알고 제대로 산 사람을 우리는 부처라고 합니다. 반야심경에서는 누구라고 했지요? 관자재보살이라고 합니다. 지금 여기 누군가가 그렇게 알고 그렇게 살면 그 사람이 곧 부처이고 그 사람이 곧 보살입니다.
그렇게 살면 그 삶이 어떨까요? 자유롭고 평화롭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해탈, 열반이라고 합니다. 언제 그렇게 됩니까? 즉각 그렇게 됩니다. 내생이 아니고, 다음이 아니고, 죽어서가 아니고, 바로바로 됩니다.
어떻습니까? 다음에 되는 것이 좋은가요? 바로바로 되는 것이 좋은가요? 내생에 되는 것이 좋은가요? 즉각즉각 되는 것이 좋은가요? 물어볼 것도 없죠.
진짜 그렇게 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당연히 “야, 불교가 참 훌륭하고 좋다, 참 영험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해.’라는 오랜 금기가 있었는데, 금기를 무시하고 실제 확인해보니 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집안에 대단히 중요한 재산, 즉 달걀이 생겨있듯이 참모습에 대한 무지로 만들어진 금기에 구애받지 않고 참모습대로 하면 이렇게 효과를 보는 것이 불교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진짜 영험이 있다고 할 수 있고, 이렇게 되어야 대단히 좋다고 할 수 있고, 그래야 불교가 희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현실은 실제로 어떻습니까? 해도해도 잘 모르겠고, 열심히 뭔가를 하는데 해도해도 안 되고 그러잖아요. 사실 나도 그래요. 그대로 하면 할수록 그게 맞다, 틀림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체가 곧 나다, 내가 곧 전체다 실제로 이렇게 알고 거기에 맞게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우리는 참지혜로 실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가르치는 것이 반야심경의 전체내용입니다. 이것을 교리적으로 이야기하면 깨달음의 실천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사실 앞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는데, 그 내용은 거의 대부분 오늘 했던 내용을 다시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하고, 또 이것을 사례로 들어서 이야기하고, 저것을 사례로 들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는가.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지혜롭지 못해서, 또는 예습복습을 충실히 안해서 그렇습니다. 만일 예습과 복습을 많이 안 하면 일 년 내내 해도 시원찮게 되고 내년에 또 반야심경을 공부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함께 정진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불교 공부를 하면 할수록 우리를 구속하고,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쓸데없는 금기들이 깨지고 걷혀졌으면 좋겠습니다. 안개가 잔뜩 끼어서 저기 가긴 가야 하는데, 뭔가 알아보긴 알아보아야 하는데, 이렇게 가야할 것 같기도 하고 저렇게 가야할 것 같기도 하면 삶이 갑갑하잖아요. 길이 좀 환하게 보이도록 내 인생의 길이 시원하게, 환하게 보이도록 같이 공부하고 정진하자는 말씀을 드리면서 오늘 이야기를 정리하겠습니다.
[ 질문 ] 우주가 곧 나고 내가 곧 우주라고 말씀하셨는데, 온 우주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되어도 스스로를 병들게 하지 않고 행복하고 평화로울 수 있는 건지 궁금합니다.
물론입니다. 그렇게 마음 쓰고 실천하면 본인의 몸도 마음도 훨씬 건강해지고 편안해집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타인의 아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을 할 때, 아픈 상대에 대해 분노합니까? 증오합니까? 아니죠? 타인의 아픔에 대한 따뜻한 관심은 정말 인간이 일으킬 수 있는 가장 고귀한 마음입니다. 누군가의 아픔에 대해 진실 되게 내 아픔처럼 관심을 가지고, 애정을 가지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고귀한 마음, 거룩한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을 내면 어떻습니까? 자신이 그런 마음을 내고 그런 마음으로 뭔가를 하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당연히 분노와 증오가 아니라 자비로운 마음과 자비로운 몸으로 작동합니다. 그렇게 작동하면 삶은 건강해지고 편안해지고 자유롭게 됩니다.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직접 해보면 알 수 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2016. 6. 19_ 6월 보현법회
<삼귀의와 반야심경>강의 (3강)
참모습을 알고 참모습대로 살면 그 삶이 괜찮아진다네
도법스님 (실상사 회주)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잘 지내시죠? (네!)
걱정 안 해도 되는 거죠? 진짜 그러세요? (하하하)
우리가 만나면 이렇게 가볍고 따뜻한 인사를 안 할 수가 없죠. 하지만 실제 삶을 보면 결코 가볍지도 않고 따뜻하지도 않은 상황들이 일상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 같습니다.
살아보면 어떻습니까? 계획한 대로 잘 되던가요? (아니오.)
잘 안 되죠? 그것이 인생살이인 것 같습니다.
부처님이 당신의 가르침을 통해서 하고자 했던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예전에는 잘 안 보였는데 이런저런 경험을 미루어보니 부처님이 삶의 모범과 가르침을 통해 하고자 한 것은 삶을 억압하는 금기를 깨는 일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삶을 불안과 공포에 떨게 만들고 서로 차별하게 만드는 벽을 허물려고 했던 것입니다. 금기를 깨뜨림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삶이 좀 더 편안하고 자유로울 수 있도록, 홀가분할 수 있도록 하고자 했습니다.
우리가 올해 공부하자고 한 것이 반야심경인데 반야심경도 처음부터 끝까지 그런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예를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남자는 귀하고 여자는 천해.’ 이런 사고방식이 지배했었죠. 지금은 어떻습니까? 다 없어졌습니까? 많이 변하긴 했지만 아직도 남아 있죠. ‘남자는 귀하고 여자는 천하다.’라든가, ‘남자는 우월하고 여자는 열등하다.’라면서 차별하면 남녀사이가 좋아질 수 있겠습니까? 좋아질 수가 없죠. 그리고 그렇게 차별한다고 해서 누구에게 좋을까요? 남자한테 좋을까요? 실제로는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랜 세월 남녀불평등이 마치 진리인 것처럼 여기고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관습이 되기도 하고 풍습이 되기도 해서,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남아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오셔서 “야, 그런 것 없어. 세상이치를, 삶의 실상을 잘 몰라서 그렇지, 실제는 그렇지 않아”라고 알려준 겁니다.
잘못된 신념은 우리 삶을 왜곡시키기도 하고 억압하기도 하고 무겁고 부자유스럽게 만드는 짐과 멍에가 됩니다. 삶이 무겁고 힘든 것은 인간의 미혹과 무지 때문에 만들어진 짐과 멍에 때문인 거죠. 그러면 이걸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절을 하면 해결될까요? 참선을 하면 해결 될까요? 염불을 하면 해결될까요? 권력을 잡으면, 서울대학을 나오면, 돈을 벌면 해결될까요?
잘 모르겠습니까? 우리는 아는 것이 별로 없어요. 그렇죠? (일동웃음) 다들 공부도 잘 하고, 대학도 나오고, 박사학위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실제 삶을 이야기해보면 별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나 같은 경우 공식적인 학력이 초등학교 졸업인데, 그런데 박사들이 나보다도 더 모르는 것 같아요.
자,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다른 길이 없습니다. 길은 딱 하나입니다. 세상이치, 인생의 실상, 삶의 실상을 알아야만 해결됩니다. ‘아, 남녀는 평등한 것이구나.’ 이 사실을 알면 바로 그 순간 즉각 문제가 해결됩니다. 여자도 알고, 남자도 알고, 남녀는 평등한 것이구나, 이렇게 알면 남녀 사이가 좋아지는 길이 활짝 열리게 되는 거죠. 그래서 남자도 괜찮은 인간이 되는 것이고, 여자도 괜찮은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삶을 억압하고 무겁고 힘들게 만드는 남녀불평등 문제는 삶의 실제를 잘 파악하고 이해하고 앎으로써 해결되는 것이지 그 밖의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점을 늘 놓치고 삽니다.
반야심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삶의, 인생의 실제를 잘 봐라. 잘 보면 알 수 있다. 알고 보면 우리는 괜한 짐을 짊어지고 있기도 하고 괜한 멍에게 걸려있기도 하고, 괜한 철조망에 갇혀 있기도 하다. 실제는 없는 것인데, 잘못 알고 잘못 생각해서 만들어진 짐이고 울타리고 멍에이기 때문에 잘 살펴보고 잘 관찰하면 제대로 알 수 있다.’라고.
인생의 실상에 대한 무지와 착각 때문에 삶을 왜곡시키는 사례는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예를 들어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도 있죠? 이 말은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안 맞습니다.) 안 맞아요? 그것을 어떻게 알지요? 그렇죠. 실제 경험을 해보니까 사실이 아닌 거잖아요.
부처님의 가르침은 ‘해보면 안다’는 것입니다. 실제가 아닌 것은 아무리 말로 그럴듯하게 꾸며도 실제에 적용해보면 금방 엉터리임을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하는데 실제 겪어보니 전혀 그렇지 않은 거죠.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하는 것은 실상을 잘 모르고 쓸데없는 생각으로 만들어낸 새빨간 거짓말인 겁니다. 이야기를 좀 더 진전시켜 보죠. 암탉이 ‘꼬꼬댁~’ 하고 울어서 가보니까 알을 낳았어요. 이건 뭐예요? 돈이죠. 그러니 망한 게 아니라 오히려 부자가 되었네요.(일동웃음)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인생의 실상에 대한 무지의 망상으로 만들어낸 쓸데없는 금기 때문에 고생하지 않아도 될 헛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 중생의 삶입니다. 어리석음으로 만들어낸 쓸데없는 짐만 벗어던져도 아마 우리가 짊어진 인생의 짐이 50근은 줄어들 겁니다.
100근을 짊어지고 가다가 50근을 짊어지고 가면 어떨까요? 날아갈 것처럼 가볍겠죠? 아마 그 정도 되면 “살만해” 그럴 겁니다. 인생의 실상을 알고 보면 부처님도 50근은 짊어지고 가야 합니다. 50근은 부처님도 어쩔 수 없습니다. 50근은 사람이면 누구나 다 짊어져야 하는 짐입니다. 실제 50근 정도만 짊어지면 인생이 살만한데, 100근, 150근, 200근이 되니 죽을 지경인 것입니다.
실제는 50근만 짊어지고 살면 될 일인데 왜 100근, 150근, 200근이 만들어질까요? 인생의 실상을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대부분 잘못 알아서 만들어진 짐들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남녀는 불평등해.’, ‘누구는 상놈이고 누구는 양반이야.’,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해.’ ‘남자는 절대 부엌에 들어가면 안 돼.’ 하는 등의 것이 맞는 말인가요?
전혀 안 맞죠. 그런데도 여전히 중요하게 작동하죠? 잘 안 깨지는 것 같습니다. 이런 경우가 여전히 곳곳에 꿈틀대고 있습니다.
불교는 돈을 벌게 하거나 출세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불교적 사유방식을 잘 배우고 삶에 잘 적용하면 쓸데없는 멍에, 쓸데없는 짐, 쓸데없는 울타리, 쓸데없는 철조망을 벗어던지게 됩니다. 동시에 쓸데없는 것들을 만드는 바보짓을 안 하면서 살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런 내용을 불교적으로는 깨달음의 삶이라고 합니다. 깨달음의 삶을 살았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 해탈, 열반이라고 합니다. 해탈, 열반이라는 말을 쉽게 풀면 그 삶이 편안하다, 홀가분하다,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인생살이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불교를 복잡하고 어렵게 하게 될까요? 그렇게 되는 이유는 ‘경전의 말씀은 다 진짜야, 그러니 경전에 있는 대로만 해야 돼.’ 하고 전통으로 형성된 권위에 길들여진 믿음 때문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실제적인 사실도 있지만 많은 부분이 의미 있게 꾸민 이야기들입니다. 우리도 옛날이야기를 많이 듣고 살았죠? ‘전설 따라 삼천 리’, ‘전설의 고향’ 같이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게 만들어진 이야기가 경전에는 수두룩합니다. 아마 양으로 따지자면 실제로 있었던 내용은 20~30% 정도이고 70~80%는 의미 있는 이야기일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경전에 있기 때문에 모두가 진짜라고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경전을 읽을 때도 “아, 이것은 실제 있었던 사건이구나.”라고 생각할 것이 있고, “이것은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의미 있는 이야기야”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 * * * *
이제 우리가 공부하는 반야심경으로 가볼까요? 지난 시간에 어디까지 했습니까? 제목까지 했죠?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참지혜로 실천하는 가르침의 경
한글로 풀어놓은 이 제목은 계속 수정하는 중이기 때문에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반야심경을 ‘참 지혜로 실천하는 가르침의 경’이라고 풀었습니다. 이것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니까 나쁘지는 않은데 굳이 이렇게까지 안 해도 괜찮겠다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참 지혜로 실천하는 경’, 이렇게만 하는 것이 더 좋겠다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그렇게 해도 괜찮을 것 같죠? ‘참 지혜로 실천하는 경.’
무엇이 참 지혜인가. 여기 보면 일원상이 있고 삼보륜이 있고 화엄 인드라망 무늬가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이 그림과 연결시켜 따져보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는 했지만 구체적인 설명은 하지 않았죠? 오늘은 그 이야기를 먼저 하고 시간이 되면 다른 이야기를 더 해보겠습니다.
‘일원상’은 주로 부처님이 가르치고자 했던 진리, 세상의 참된 진리를 또는 자신의 진면목, 인생의 실상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천수백 년 전 선사스님들이 만들었습니다. 천수백 년 전부터 사용되어오던 그림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원불교의 전유물처럼 되어 있죠. 이 현상을 보면서 우리는 알게 됩니다. ‘세상에 임자가 따로 있는가?’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임자입니까? 쓰는 사람이 임자인 거죠. 그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일원상은 천수백 년 전부터 선사스님이 만들어 썼지만 그 후계자들이 잘 안 써요. ‘그런 것이 있는가보다.’하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런데 원불교에서 이것을 소중하게 사용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원불교의 전유물처럼 되었죠. 물론 지금 다른 사람이 쓴다고 해도 상관은 없는 일입니다.
‘삼보륜’은 일원상으로 표현된 사상과 정신을 구체적인 삶으로 살아간 사람이 있고, 그 삶을 살 수 있도록 가르쳐준 내용이 있고, 또 그 내용대로 실현하겠다고 작심한 집단이 있습니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불.법.승 삼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삼보륜은 조계종단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일원상에 담겨있는 사상과 정신을 잘 알고 살아서 그 삶이 괜찮게 된 부처님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면 인생이 괜찮다고 잘 가르쳐 준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죠. 그런 삶을 살겠다, 그런 세상을 만들겠다, 그런 삶을 살고 그런 세상을 만들이 귀해 인생을 바치겠다고 한 이들의 공동체가 승보입니다. 이 세 가지가 불법승 삼보입니다.
세 번째로는 ‘화엄 인드라망 무늬’라고 이름이 붙어있는 그림이 있습니다. 앞에 이야기한 두 가지 내용들을 누구나, 불교가 하든, 기독교가 하든, 무종교인이 하든, 남녀노소에 관계없이 우주의 진리, 인생의 실상, 자신의 참모습, 본래부처에 대해 이해하기 쉽도록 만든 그림입니다. 인생을 제대로 알고 살아가야 그 삶이 괜찮아지기 때문에 누구나 할 것 없이 자기 인생을 제대로 알고 살아가는데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게 만들어진 것이 화엄인드라망무늬입니다.
이 세 가지 내용을 놓고 보았을 때 참 지혜란 뭘까? 이 세 가지를 사실대로 잘 아는 것이 참 지혜입니다. 그리고 이 지혜가 참되어지려면 반드시 실천이 뒤따라야 합니다. 생각만으로는 안 됩니다. 실제적인 실천이 있어야 그 지혜가 그 삶이 참되어집니다.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지금 여기 자유자재로 관찰사유하는 참사람 있네
이 그림들을 반야심경의 본문과 연결시켜 살펴봅시다. 반야심경 본문 첫 부분에 ‘지금 여기, 자유자재로 관찰사유하는 참사람 있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그림들은 그중의 참사람을 나타낸 것입니다. 일원상도, 삼보륜도, 화엄인드라망 무늬도 참사람, 나의 본래 면목, 자신의 본래 부처, 자신의 진면목을 그림으로 그린 것입니다.
나의 참사람, 나의 참모습을 잘 아는 것, 참모습을 잘 알아서 참모습대로, 참모습답게 삶을 사는 것을 참지혜로 실천한다고 표현합니다. 또 다른 말로 표현하면 깨달음을 실천한다, 깨달음의 삶을 산다는 말입니다. 참지혜는 깨달음이라는 말로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니 참지혜로 실천한다는 말은 깨달음을 실천한다는 말로 바꾸어서 해석하고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지난 달 우리는 제목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일원상, 삼보륜, 인드라망 무늬와 연결시켜서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은 교재의 구체적인 그림을 보면서 설명을 좀 더 드렸습니다. 또 오늘 처음 오시고, 한 번만 오시는 손님들도 계셔서 약간 겹치지만 설명을 더 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볼 때 ‘관자재보살’을 ‘지금 여기 자유자재로 관찰‧사유하는 참사람’이라는 말로 풀었음을 잘 살펴야 합니다. 관자재보살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우리의 선배, 인생의 선배라고 할 수 있죠. ‘인생을 제대로 알고, 인생의 진면목, 나의 진면목, 또는 나의 참모습을 제대로 알고 살아보니까 그 삶이 괜찮더라.’ 하고 모범을 보여준 선배, 모범을 보여준 선구자, 스승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또는 참사람의 삶을 살고 싶어하는 자기 자신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차적으로는 선배, 스승을 말합니다. ‘지금 여기 자유자재로 관찰․사유하는 한 사람 있네.’ 관자재보살을 이렇게 풀었습니다.
행심반야바라밀다시 行深般若波羅密多時
깊은 지혜로 실천할 때
깊은 지혜가 뭐예요? 진면목을 잘 알고 실천할 때, 이런 이야기죠. 나의 진면목을 잘 알고 내가 본래 부처임을 잘 알고 부처행을 할 때, 그런 이야기죠. 그렇게 알고 실천하는 것을 ‘깊은 지혜로 실천할 때’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인연화합의 다섯 무더기 모두 있지만
실제 비어있음을 잘 이해하여 일체 고통에서 벗어났네
그럼 그가 알고 있는 내용이 뭐죠? 알고 있는 내용이 ‘오온개공’입니다. 오온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말합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진 다섯 무더기인데, 본래는 없었지만 조건이 만들어져서 생긴 것이라는 의미죠.
우리가 먹는 밥이 본래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없었습니다.)
그러면 없던 것이 어떻게 만들어졌습니까. 여러 가지 인연화합으로 만들어졌죠.
밥 한 그릇을 놓고 봅시다. 여기 밥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온 우주의 시간과 공간, 인간과 자연의 모든 것들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햇빛도 연결되어 있고, 달빛도 연결되어 있고, 바람도 연결되어 있고, 봄, 여름, 가을, 겨울도 연결되어 있고, 흙도, 물도, 굼벵이도, 지렁이도, 고라니도, 곰도, 사람도… 온갖 것이 다 함께 해서 밥 한 그릇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밥처럼 우리 몸과 마음도 인연 따라 조건에 의해 만들어지는 거죠. 본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졌다는 말은 그런 의미입니다.
오온(五蘊), 즉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진 다섯 무더기’라고 했는데, 다섯 무더기가 뭐죠?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죠. 이것을 크게 나누면 몸과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다 본래 있는 것이 아니고 조건 따라 만들어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일찍이 부처님은 이 세상에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 말고 그 어디 그 무엇도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의 사고방식과 일반 사람들의 사고방식의 근본적인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태초부터 있는 것이 하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런 것은 없다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본래는 없었는데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결혼해서 아들, 딸을 낳았죠? 아들딸이 본래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본래는 없었는데, 지금은 왜 있죠?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진 거예요. 얼른 생각하면 엄마, 아빠에 의해서 아들, 딸이 생겼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그럴까요? 태양이 없어도 엄마, 아빠만 있으면 아들딸이 태어날 수 있을까요? 물이 없어도, 바람이 없어도, 가능할까요? 절대 불가능합니다. 엄마, 아빠도 아들딸을 낳게 하는 여러 조건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실제는 생각이나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무수한 조건들, 불가사의하고 신비하고 시오하고 미묘한 조건들이 있는 거죠.
그래서 반야심경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나는 누구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나의 참모습은, 나의 본래부처는 어떻게 생겼는가?’, ‘나의 본래 면목은 어떻게 이루어진 존재인가?’, 그 다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괜찮은가?’ 하는 물음에 대한 설명인 것입니다.
사람이 꼭 알아야 할 것은 이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이 두 가지를 알면 다른 것은 잘 몰라도 별로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를 모르면 온 세상 것을 다 알아도 헛일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두 가지는 모르면서 다른 것은 몽땅 다 알잖아요. 그렇게 되면 쓸데없는 멍에를 만들고, 쓸데없는 짐을 만들고, 쓸데없는 벽을 만들게 됩니다. 온갖 멍에를 만들고, 짐을 만들고, 벽을 만든 결과는 뭐예요? 서로에 대한 불신과 갈등과 대립입니다. 그것이 우리 삶을 고통스럽게 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겁니다.
그런데 박사하고 이야기해도 그렇고, 전문가라는 사람들하고 이야기해도 그렇고, 다른 것은 굉장히 많이 알아요. 그런데 나는 누구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이러한 물음을 인생화두라고 하는데, 인생화두의 문제는 보통 이야기하는 유식, 무식하고 별 관계가 없습니다. 보통 이야기하는 박사, 전문가하고도 별 관계가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정말 제대로 가르치고 배우고 익혀야 할 것, 즉 인생화두가 있는데 인생화두는 제대로 가르치지 않고 엉뚱한 것만 가르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돈도 들이고 시간도 들여서 고생고생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더 복잡하게, 더 혼란스럽게, 더 고통스럽게, 더 위험하게 되고 있습니다. 인생화두는 내팽개쳐둔 채 지엽적인 것만 태산처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들이 대부분 자승자박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못살겠다는 아우성이 줄어들지 않고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확대되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왜 이렇게 되는 거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하고 묻게 됩니다. 그리고 내팽개쳤던 화두에 대해 착안하게 됩니다. 그게 잃어버린 나의 참모습은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이루어진 존재인가, 나는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해답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첫 번째는 일원상(이것은 조금 어렵죠. 너무 단순하니까.), 여기서 조금 더 발전한 것이 삼보륜, 더 구체화시킨 것이 인드라망 무늬입니다.
‘아, 나의 진짜 모습은 이렇게 생겼어.’ 이렇게 알면 제대로 아는 거예요. 이것을 제대로 알면 참다운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제대로 파악하고 알아낸 내용대로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삶이 괜찮아져.’, ‘참모습대로 알고 살면 그 삶이 괜찮아져.’, 하고 설명한 것이 반야심경의 첫 부분인데, 바로 ‘지금 여기 자유자재로 관찰사유하는 참사람 있네. 그는 깊은 지혜로 실천할 때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진 다섯 무더기, 오온이 실제 비어있음을 잘 관찰하고 이해함으로써 일체고통에서 벗어났네.(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 인생이란 그런 것이구나, 그렇게 살면 되는구나, 인생을 그렇게 알고 그렇게 살아보니 그 삶이 괜찮구나.’, 하는 내용을 문장으로 표현한 것이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입니다.
여기까지가 반야심경에 말하고자 하는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은 그 내용에 대한 세세한 설명입니다.
이 정도에서 ‘그래, 나는 다 알았어’라는 생각이 들면 뒷이야기는 공부 안 해도 됩니다. 지금 바로 나가셔도 괜찮습니다. ‘나는 반야심경 공부 다 했어. 나는 인생을 다 알고 내가 안대로 살 거야.’ 그래도 괜찮습니다. 이 정도를 바로 알아들으면 좀 똑똑하다고 할 법 하죠? 안 그런가요? (하하) 그런데 그 정도로 완전히 이해가 안 되면 그 다음에 좀 더 이야기를 해 봐야죠. 그럼 어떻게 해야 해요? 다음 달에 또 와야겠죠. 안 오면 오늘 배운 것이 헛것이 되어 버리잖아요.
우리가 인생화두를 핵심적으로 참모습, 본래면목이라고 했는데, 어떤 것이 참모습일까요?
자, 저 화엄 인드라망 무늬를 한 번 봅시다. 동그라미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는 거예요. 나타난 현상만 보면 따로따로 떼어져 있지만 실제는 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 마치 그물의 그물코처럼.’ ‘인드라망’이라는 말 자체가 화엄경에 나오는 그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물에는 그물코가 있는 거잖아요. 여기 제일 아래가 사람, 오른쪽이 네 발 달린 짐승, 왼쪽이 새와 물고기, 사람 머리에 붙어있는 것이 나무, 숲, 식물입니다. 그리고 해와 달. 우주 삼라만상을 단순화시켜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가르침을 보통 무엇으로 표현합니까?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고 표현하죠? 그러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의지해서 우리가 봐야할 것은 뭐죠? 달입니다. 이 그림은 우리가 봐야할 달을 그린 겁니다. 나의 참모습, 인생의 참모습, 나의 본래면목, 인생의 본래면목, 나의 진면목, 인생의 진면목 - 그것을 화엄경에서는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고, 줄여서 본래부처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또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도 합니다.
인드라망무늬는 나의 참모습, 본래면목, 본래부처를 그림으로 그린 것입니다. 설명을 들어보니 다 알만하죠? 그런데 좀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핵심적인 두 가지를 놓치고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이것이 사람이야, 이것이 나야, 라고 할 때 제일 아래의 사람만을 떼어내어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실제는 전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만이 사람이니 나니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만 떼어내서 사람이고 나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습니다. 떼어낼 수 없는 것을 떼어내서 진짜라고 믿으면 제대로 알고 믿는 거예요, 모르고 믿는 거예요? 모르고 믿는 거잖아요. 거짓된 것을 진짜라고 믿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다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을 반야심경에서는 전도몽상이라고 합니다.
한 번 실물을 놓고 따져봅시다. 실제는 어떨까요? 그물의 그물코라면 하나만 따로 떼어내서 이것만 나라고 할 수 없잖아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전체가 곧 나이고 내가 곧 전체, 내가 곧 우주이고 우주가 곧 나’라고 해야죠. 그렇게 알고 실천하면 그것을 참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고 하나만 떼어내서 나라고 하면 그것은 거짓을 진짜라고 믿는 어리석음이죠.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중도적으로 표현하면 ‘내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나야.’, ‘내가 그대로 우주이고 우주가 그대로 나야.’라고 해야 옳습니다.
저간의 소식을 화엄경에서는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가운데 전체가 들어있고 전체 속에 하나가 들어있다. 하나가 곧 그대로 전체요, 전체가 곧 하나라는 이야기입니다. 인드라망 무늬는 그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고 법성게의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은 그 내용을 언어로 표현한 것이죠.
전체가 곧 나이고 내가 곧 전체라고 있는 사실 대로 알고 실천하는 것을 참 지혜 또는 깨달음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체가 곧 나이고 내가 곧 전체라고 한다면 결국은 한 몸이겠네요. 한 몸 한 생명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렇게 볼 때 우리 몸의 중심이 어디이겠습니까? 보통 우리는 몸의 중심이라고 하면 심장, 뇌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 아주 중요한 기관이죠. 그런데 실제로 검토해보면 평소 몸의 중심은 그때그때 가장 아픈 곳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논리적으로는 심장이다, 뇌다,라고 할 수 있지만 실제 상황에 적용해 살펴보면 그때그때 가장 아픈 곳이 중심일 수밖에 없습니다. 삶을 이렇게 관찰하고 다루어야 한다고 가르쳐주는 것이 불교입니다. 매우 실제적이고 직접적이죠.
우주가 곧 나이고, 내가 곧 우주라고 한다면 우주 전체가 곧 한 몸이잖아요. 그러면 우주의 가장 중심은 어디입니까? 지금 가장 아픈 곳입니다. 내 몸의 가장 아픈 곳에 모든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고 동시에 아픔을 해결하기 위해 진력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 조건이 붙습니까, 안 붙습니까? “나 그거 돈 줘야 할 거야.”, “높은 자리 줘야 할 거야.”, “나중에 특별한 혜택을 줘야 할 거야.”, 그렇게 합니까? 아니면 무조건 합니까? 무조건 하겠죠. 조건이 없어요.
왜 조건이 안 붙습니까? 그것을 하려면 땀을 뻘뻘 흘리고 지극정성으로 공을 들여야 하고 시간도 내야하고 온갖 것을 해야 하는데 왜 조건이 안 붙을까요? 본인의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남의 일이면 당연히 조건이 붙죠. 본인 일이기 때문에 조건 없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주가 곧 내 몸이야, 내가 곧 우주고 우주가 곧 나야. 온 우주가 한 몸, 한 생명이야.’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합시다. 그런데 어디엔가 아픈 곳이 있어요. 그것이 세월호 문제일 수도 있고, 다른 문제일 수도 있겠죠. 요즘은 여러 일이 많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런 아픔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때 어떻습니까? 저것은 내 일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당연히 조건이 붙죠. 그런데 내 일이라고 생각하면 당연히 조건이 붙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아픔도 나의 참 모습으로 보면, 인생의 진면목으로 보면 내 아픔 아닌 것이 없는 거예요. 어떤 문제도 내 문제 아닌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온 세상일을 다 할 수는 없잖습니까. 현실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 가깝게 손닿는 일을 하는 거죠. 어떻게 하는가? 내 손의 종기를 낫기 위해 지극정성으로 아무 조건 없이 하듯이 이 세상의 어떤 아픔, 어떤 문제도 내 아픔, 내 문제처럼 지극정성을 다해 해결하고 치유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지혜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제대로 알고 제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생을 제대로 알고 제대로 산 사람을 우리는 부처라고 합니다. 반야심경에서는 누구라고 했지요? 관자재보살이라고 합니다. 지금 여기 누군가가 그렇게 알고 그렇게 살면 그 사람이 곧 부처이고 그 사람이 곧 보살입니다.
그렇게 살면 그 삶이 어떨까요? 자유롭고 평화롭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해탈, 열반이라고 합니다. 언제 그렇게 됩니까? 즉각 그렇게 됩니다. 내생이 아니고, 다음이 아니고, 죽어서가 아니고, 바로바로 됩니다.
어떻습니까? 다음에 되는 것이 좋은가요? 바로바로 되는 것이 좋은가요? 내생에 되는 것이 좋은가요? 즉각즉각 되는 것이 좋은가요? 물어볼 것도 없죠.
진짜 그렇게 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당연히 “야, 불교가 참 훌륭하고 좋다, 참 영험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해.’라는 오랜 금기가 있었는데, 금기를 무시하고 실제 확인해보니 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집안에 대단히 중요한 재산, 즉 달걀이 생겨있듯이 참모습에 대한 무지로 만들어진 금기에 구애받지 않고 참모습대로 하면 이렇게 효과를 보는 것이 불교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진짜 영험이 있다고 할 수 있고, 이렇게 되어야 대단히 좋다고 할 수 있고, 그래야 불교가 희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현실은 실제로 어떻습니까? 해도해도 잘 모르겠고, 열심히 뭔가를 하는데 해도해도 안 되고 그러잖아요. 사실 나도 그래요. 그대로 하면 할수록 그게 맞다, 틀림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체가 곧 나다, 내가 곧 전체다 실제로 이렇게 알고 거기에 맞게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우리는 참지혜로 실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을 가르치는 것이 반야심경의 전체내용입니다. 이것을 교리적으로 이야기하면 깨달음의 실천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사실 앞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는데, 그 내용은 거의 대부분 오늘 했던 내용을 다시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하고, 또 이것을 사례로 들어서 이야기하고, 저것을 사례로 들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왜 그러는가.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지혜롭지 못해서, 또는 예습복습을 충실히 안해서 그렇습니다. 만일 예습과 복습을 많이 안 하면 일 년 내내 해도 시원찮게 되고 내년에 또 반야심경을 공부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함께 정진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불교 공부를 하면 할수록 우리를 구속하고,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쓸데없는 금기들이 깨지고 걷혀졌으면 좋겠습니다. 안개가 잔뜩 끼어서 저기 가긴 가야 하는데, 뭔가 알아보긴 알아보아야 하는데, 이렇게 가야할 것 같기도 하고 저렇게 가야할 것 같기도 하면 삶이 갑갑하잖아요. 길이 좀 환하게 보이도록 내 인생의 길이 시원하게, 환하게 보이도록 같이 공부하고 정진하자는 말씀을 드리면서 오늘 이야기를 정리하겠습니다.
[ 질문 ] 우주가 곧 나고 내가 곧 우주라고 말씀하셨는데, 온 우주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되어도 스스로를 병들게 하지 않고 행복하고 평화로울 수 있는 건지 궁금합니다.
물론입니다. 그렇게 마음 쓰고 실천하면 본인의 몸도 마음도 훨씬 건강해지고 편안해집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타인의 아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을 할 때, 아픈 상대에 대해 분노합니까? 증오합니까? 아니죠? 타인의 아픔에 대한 따뜻한 관심은 정말 인간이 일으킬 수 있는 가장 고귀한 마음입니다. 누군가의 아픔에 대해 진실 되게 내 아픔처럼 관심을 가지고, 애정을 가지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고귀한 마음, 거룩한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을 내면 어떻습니까? 자신이 그런 마음을 내고 그런 마음으로 뭔가를 하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당연히 분노와 증오가 아니라 자비로운 마음과 자비로운 몸으로 작동합니다. 그렇게 작동하면 삶은 건강해지고 편안해지고 자유롭게 됩니다.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직접 해보면 알 수 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