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8. 21 _ 8월 보현법회
<삼귀의와 반야심경>강의 (5강)
몸과 마음,
조건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인연화합의 다섯 무더기
도법스님 (실상사 회주)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더우니까 만사가 귀찮죠? 더위가 한 풀 꺾였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만만치 않습니다. 혹심한 더위를 겪으면서 무슨 생각들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저는 세상이 멸망으로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후변화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어보셨죠? 때 아닌 폭설, 폭우, 태풍, 그리고 요즈음과 같은 불볕더위 때문에도 언론에서 심심찮게 다루고 있잖아요. 그런데 세상이 이렇게 망해가고 있는 것이라면 정치적으로 보수다 진보다, 여당이다 야당이다, 또는 누구에게 유리하냐 불리하냐, 누가 이기냐 지냐,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다 부질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옛 시가 떠올랐습니다.
人生似鳥同林宿 (인생사조동림숙)
大限來時各者飛 (대한래시각자비)
인생이란 한 숲에 머물고 있는 새들과 같아서
큰 일이 벌어지면 각자 자기 갈 곳으로 날아간다.
(죽을 때가 되면 각자 자기 갈 곳으로 가는 것이다.)
- 昔時賢文 에서
이 시에 비추어보면 우리는 한반도라는 큰 숲에 머물고 있는 새들과 같죠. 만약 한반도를 뒤흔드는, 또는 세상이 망하는 큰 일이 벌어지면 대한민국 국민들은 어떻게 할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저는 좋은 방향으로 상상이 되지 않고, 오히려 끔찍한 방향으로 상상이 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가 평소에 마음 쓰는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우리 사회에 서로에 대한 관심과 배려, 존중과 협력과 양보의 마음이 점점 더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실제 크고 어려운 일이 벌어졌을 때 우리 사회는 아수라장이 되고 말거예요. 그야말로 우리 모두가 비참해질 수밖에 없겠죠.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사람이 사람답게 마음 쓰고 살아가는 실력을 꾸준하게 길러야 하는데, 모두들 편 갈라서 상대를 이기는 데만 마음을 쓰고 있는 게 현실인 것 같습니다.
법회에 들어오기 전에 잠깐 마루에 앉아서 지붕너머로 하늘을 바라보니, 색이 푸르른 게 전형적인 한국의 가을 하늘이었습니다. 어제는 일찍 잠이 들어서 오늘 새벽 2시쯤 깼는데, 밖에 나오니 달도 뜨고 별도 뜨고 공기도 서늘해서 좋았습니다. 잔잔한 달빛이 경내에 가득 차있는 고요한 산사의 새벽을 느끼면서 혼자 절 구석구석을 돌았습니다.
그런 시간을 갖게 되니까 마음이 차분해지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마음이 더 선하게 작동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선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더 절실하게 하게 되더군요. 그러면서 우리가 여러 가지로 복잡하고 바쁘고 어렵긴 하지만 일부러라도 그런 시간, 즉 그런 선한 마음들을 기억해내고 키워낼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이 우리 일상에서 꼭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별하게 마음을 내서라도 꼭 그렇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 * * * *
자, 이제 반야심경으로 들어가 볼까요? 항상 처음 오신 분들이 많으셔서 진도를 제대로 못나가고 있는데, 하나하나 읽어가며 또 해보겠습니다.
참 지혜의 실천을 가르치는 경
지금 여기 자유자재로 관찰사유하는 참사람 있네.
그는 참 지혜로 실천할 때
인연화합의 다섯 무더기가 모두 있지만
실제 비어있음을 잘 이해하여
일체 고통에서 벗어났네.
참사람의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 사리자여,
그대 몸 그대로 실제 비어 있음과 다르지 않고
비어있음 그대로 그대 몸과 다르지 않으며
그대 몸 그대로 비어있음이며 비어 있음 그대로 그대 몸이니
느낌도 생각도 의지도 분별도 그러하네.
여기까지 읽지요. 쉽게 해보자고 번역을 했는데 번역본을 봐도 잘 모르겠어요. 그렇죠?(웃음)
경전 말씀은 양도 많고 내용도 다양합니다. 그래서 팔만사천법문이라고 하지요. 쉬운 것 같다가도 곰곰이 따져보면 매우 복잡하기도 하고 어렵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팔만 사천이나 되는 경전이지만 실제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딱 두 가지입니다.
그 두 가지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던져진 질문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또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누구에게나 던져진 질문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싶은 내용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살아야 될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질문을 잊거나 밀쳐두고 삽니다. 사춘기 때는 잠깐 고민을 하기도 하죠. 그런데 사회생활에 바쁘고, 애 낳고 키우는데 바쁘고, 여러 가지로 바쁘게 살면서 잊히기도 하고 밀쳐지기도 하고 때로는 거치적거리는 느낌 때문에 피하기도 하는, 그런 질문이지요.
그렇지만 일생을 인간답게 살아가는 데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질문이죠. 살아가면서 문득문득 이런 생각 안 하세요? ‘인생이 뭐야?’, ‘왜 살아야 해?’, ‘왜 죽는 거야?’,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야?’, ‘어떻게 살아야 해?’ 바로 이런 질문입니다.
크게 보면 결국 두 가지의 물음, 즉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입니다. 팔만대장경이 모두 이 두 가지 물음에 대한 설명이예요. 아무리 길고 어려운 경전이라고 해도 이 두 가지 물음에 대한 설명에서 벗어나지 않아요.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이 물음을 가질 수밖에 없고 이 물음을 잘 알고 살아야 괜찮게 살 수 있기 때문이죠.
반야심경 역시 그 두 가지 물음에 대한 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경전내용을 보겠습니다.
지금 여기 자유자재로 관찰사유하는 참사람 있네.
‘참사람’은 관자재보살, 즉 관세음보살을 풀어쓴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풀어 쓴 것이기도 하지만, 실제 경전의 뜻으로 보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각자 자기 자신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누구든지 삶을 잘 관찰사유해서 삶을 잘 알고 살아가면 참사람이고, 그렇게 살면 다 관자재보살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는 참 지혜로 실천할 때
여기부터는 관세음보살의 경험사례를 설명한 것입니다. 자, 이제부터 관세음보살의 경험사례를 잘 알고 따라서 하면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이 관자재보살이 되는 겁니다. 아시겠죠?(웃음)
인연화합의 다섯 무더기 모두 있지만
인간의 몸과 마음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 이것은 나는 누구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이죠? 나는 곧 몸과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 몸과 마음은 본래부터 있었던 것도 아니고 본래부터 없었던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생겨나서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요? 경전에서는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조건이 만들어지면 있는 것이고, 조건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없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지금 여기에 살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의 몸과 마음이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죠. 그리고 세월이 흐르거나 또 다른 상황이 만들어져서 이 세상을 끝내야 할 조건이 만들어지면 우리는 죽음을 맞이하게 돼요. 우리의 몸과 마음의 삶이 변화하게 되는 것이죠.
여기서 ‘인연화합의 다섯 무더기’는 몸, 느낌, 생각, 의지, 분별을 말합니다. 첫 번째가 몸이라면 뒤의 네 가지(느낌, 생각, 의지, 분별)는 마음에 해당합니다. 불교에서는 몸도 네 가지로 이야기 합니다. 인간의 몸도 실제 내용을 분석해보면 지수화풍(地水火風). 즉 흙의 기운, 물의 기운, 불의 기운, 바람의 기운으로 이루어졌다는 거예요. 이것은 인도에서 불교가 시작되었으니까 인도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세계관에서 비롯된 표현이죠. 과학적으로 구성요소를 더 세밀하게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이 네 가지 요소와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연화합의 다섯 무더기’라는 말은 ‘몸은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져 있고, 마음은 느낌, 생각, 의지, 분별로 이루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조건에 따라 만들어지고, 조건이 유지되면 유지되고, 조건이 바뀌면 다른 내용으로 변화해간다는 거죠.
실제 비어있음을 잘 이해하여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진 다섯 무더기가 지금 여기에 있지만 실제로는 비어있다는 말이죠. ‘있긴 있지만 사실은 있지 않다.’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세요? 나는 어려운데 (웃음) 사실 이것을 설명하기가 제일 어렵기도 하고, 이 경전이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또한 이것만 제대로 이해하면 나머지는 저절로 이해가 되는 핵심적인 귀절이기도 합니다.
‘있기는 있지만 사실은 있지 않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그것은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연이 화합하면 있는 것이고, 인연이 변화하면 있지 않은 것이니, 결국 ‘인연화합’에 답이 있어요.
예를 들어봅시다. 제가 지금 손뼉을 쳤습니다. 손뼉을 치는 순간 손뼉소리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하고 있는 지금, 손뼉소리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손뼉소리가 있는 것이라면 손뼉을 치지 않는 지금도 있어야 하잖아요. 왜 없는 거죠? (손뼉을 치지 않으니까요.) 그렇죠.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손뼉소리가 생길 조건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인 거죠. 조건이 만들어지면 소리가 있고 조건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소리가 없지요. 그러면 손뼉소리는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해요.)
그렇습니다. 조건이 생겨나면 따라서 생겨나고, 조건이 없어지면 따라서 없어지지요. 이런 것을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 것이고, 이런 상태를 설명하려고 하니까 ‘모두 있지만 실제는 비어있다.’ 이런 식으로 표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없어진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사라진다.’는 말이 아니고 ‘변화한다.’는 뜻이예요.
그런데 손뼉소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들, 그것이 사건이든지 사물이든지 다 마찬가지로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실제로 비어 있죠. 분리독립되고 고정불변한 실체가 없는 거죠. 이러한 사실을 잘 이해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잘 이해하는 것을 지혜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깨달음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인연화합의 다섯 무더기 모두 있지만 실제 비어있음을 잘 이해하여)
일체 고통에서 벗어났네.
여기까지가 반야심경의 핵심입니다. 앞에서 ‘인연화합의 다섯 무더기 모두 있지만 실제 비어있음을 잘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잘 파악하고 이해한다.’는 말과 같은 것이라고 했죠? 그러니까 이 부분을 해석해보면, ‘우리 몸과 마음이 어떻게 생겨나고 유지되고 변화해 가는지 잘 이해하면’ ‘일체 고통에서 벗어난다.’, ‘우리가 겪는 고통과 불행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삶이 괜찮아진다.’는 것입니다.
실제 비어있음을 잘 이해하여 고통에서 벗어났네.
누가 그랬다는 거죠? 관세음보살이 자기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내가 인생을 살아보니 몸과 마음이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져있어. 마치 아지랑이처럼. 그걸 잘 파악하고 이해하고 나니까 삶이 자유롭고 평화로워졌어. 구속과 다툼에서 벗어났어. 그래서 자유로워지고 평화로워졌어.”
중요한 것은 인생의 참모습, 나의 참모습을 제대로 알고 살아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야 삶이 괜찮아지고, 편안해지고. 멋있어진다는 거죠. 진짜 행복해지고 싶다면 인생의 참모습, 나의 참모습을 제대로 알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참 사람의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 사리자여,
‘사리자’는 듣는 사람, 우리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경전의 구조로 보면, 부처님께서 관세음보살의 경험사례를 설명하고 나서, 그렇게 되는 이유를 알려주려고 사리자를 부르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처럼 살려고 하는 사람, 사리자여!’ 이런 말이죠.
그대 몸 그대로 실제 비어 있음과 다르지 않고
비어있음 그대로 그대 몸과 다르지 않으며
그대 몸 그대로 비어있음이며 비어 있음 그대로 그대 몸이니
느낌도 생각도 의지도 분별도 그러하네.
이 구절은 한문으로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에 해당하는 구절입니다. 몸이 그러하듯이 우리 마음도 그러하다는 의미죠.
많은 사람들이 ‘육체는 허무하게 사라지지만 정신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렇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예를 들어 아름다운 꽃을 보면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죠? ‘야, 저 꽃 아름답네.’ 하면서 기쁜 마음이 되죠? 아름다운 꽃과 내 눈이 만나는 조건에 의해서 내 마음이 기쁜 마음으로 변화하는 거죠. 그런데 평소에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을 보면 그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나요? ‘에이, 저 사람은 왜 나타났어. 하면서 기분이 나빠지지요. 미운 마음이 생겨나는 거예요. 똑같은 마음인데, 어떤 때는 좋은 마음, 어떤 때는 미운 마음으로 변화합니다. 마음은 불변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 마음 역시 몸과 마찬가지로 조건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겁니다.
이렇게 변화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무상하다고 표현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상하다’는 말을 ‘허무하다’는 말로 받아들이고 불교를 ‘허무의 종교’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불교는 변화를 잘 이해하고 파악하라는 종교예요. 몸과 마음은 조건에 따라 변화하는 것임을 잘 이해하고 파악하여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라는 종교가 불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마음이나 정신이 영원불멸한 것이라면, 어떻게 부처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조건에 따라 변화될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에 나쁜 사람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고, 반대로 잘못하면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이 될 수 있는 거죠. 세상에 영원불멸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이 사실만이 영원합니다.
불교의 사고방식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공간적으로, 세상 모든 것은 그물의 그물코처럼 서로 연결되어 이루어져 있으며,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이것을 교리적 개념으로는 연기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표현합니다.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도 다 같은 말이죠. 우리 몸이든 마음이든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온 우주의 시간과 공간, 내면과 외면, 정신과 물질, 자연과 인간 등등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유형무형의 모든 것들이 다 서로 의지해 있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시간적으로, 세상 모든 것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우리는 태어나면 시작이고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시작도 끝도 없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시작도 끝도 없다는 말은, 달리 이야기하면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영원히 존재할까요? 끝없이 변화하면서 존재하는 거죠. 마치 바다의 파도처럼 말이죠. 파도가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까? 파도는 조건에 따라 물결이 계속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시작되었다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변화하는 것입니다. 공간적으로는 미묘한 관계로 이루어져 있고 시간적으로는 끊임없이변화하면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죠.
셋째, 사람은 행위하는 대로 되는 존재다.
본인이 어떻게 마음 쓰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그 삶이 만들어집니다.
내가 화를 내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됩니까? 나는 ‘화내는 사람’이 됩니다. 욕하면 어떤 사람이 됩니까? 즉각 ‘욕하는 사람’이 됩니다. 도둑질하면? ‘도둑놈’이 되죠. 이렇게 사람은 행위하는 대로 바로바로 그 존재가 됩니다.
이 불교의 사고방식 세 가지는 바로바로 증명되기 때문에 복잡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바로 여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 시간적으로 우리는 한 살, 두 살, 열 살, 삼십 살… 계속 변화했어요. 까만 머리는 백발이 되었죠. 공간적으로는 어떠했을까요? 나 혼자 따로 살았나요? 가족, 학교친구들, 이웃들, 친지들, 회사동료들… 수많은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왔어요. 그리고 먹을 거리를 먹어야 삶이 가능했고, 잠을 잘 수 있어야 삶이 가능하지요. 어떤 식으로 살았던 이렇게 관계를 맺고 살아온 거예요. 어떻게 살았든 그들 없이 나 혼자 지금까지 살아오는 것이 가능했을까요? 절대로 못 살지요. 이런 것이 바로 관계로 존재한다는 거예요. 우리는 시간적으로는 끝없이 변화해왔고, 공간적으로는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관계와 그 관계의 변화를 잘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잘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을 잘 알면 그에 따라 이어지는 행위들이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쓸데 없는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어요. 쓸데없는 집착, 애착도 내려놓게 되어 있어요. 못 잊어서 전전긍긍하는 것에서도 자유로워질 가능성이 높아져요.
관계와 변화를 반야심경에서는 공(空)이라고 표현합니다. 불교경전에는 공(空), 무(無), 비(非), 불(不)이라는 표현이 많은데, 이 표현의 대부분이 관계와 변화를 설명하기 위한 것들입니다. 바로 영원불멸의 것은 없다, 그러니 그것이 사람이든, 돈이든, 명예든, 사물이든 그 무엇이든 그것에 대한 부질없는 욕심과 집착을 내려놓으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극단적인 상황으로 가면 “모든 것을 버리고 나 혼자 살겠어”라고 하지만 그것은 말로만 가능할 뿐 실제로 혼자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요. 관계의 측면에서 보면 우리는 동전의 양면처럼, 한 손의 손바닥과 손등처럼 서로 의지해서 살고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도 그렇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상대를 대하는 태도가 어떻겠습니까? 자기중심적이고 배타적으로 살까요? 만약 주위에서 “저 사람은 너무 치사해”라고 평가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잘 보세요. 대부분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일 겁니다. 사는 게 힘드니까 저 혼자 살 길을 찾겠다고 그러는 건데, 실제로는 편안하고 평화롭고 행복해질 수가 없어요. 자기중심적이고 배타적인 삶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살면 오히려 삶이 쩨쩨하고 옹졸해지고 궁색해져요. 부끄러운 일이죠. ‘치사(恥事)하다’라는 말을 풀어보면 ‘부끄러운 일’이라는 뜻입니다.
삶이 편안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되려면 이치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치에 맞게 살라고 누누이 말씀하셨고, 그 가르침이 무아, 연기, 무상입니다. 그리고 이런 뜻을 다 담은 개념이 공(空)입니다. 공(空)은 쓰임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되므로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공은 ‘관계로 존재한다, 변화로 존재한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이러할 때 공을 ‘없다’로 해석하면 뜻이 이상해져버리겠죠. 두 번째로 공이 ‘없다’는 뜻으로 쓰일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영원불멸한 것은 없다, 분리 독립된 것은 없다는 것을 공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다시 말하면 무아, 연기, 무상, 공 - 이것들이 모두 존재의 참모습, 인생의 참모습을 말해주는 표현인 것입니다.
자, 지금까지 우리는 인생의 근본화두 첫 번째인 나는 누구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의 몸과 마음은 온통 관계로 이루어져 있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두 번째 화두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알아볼까요?
사실 이에 대한 답도 이미 나왔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았으면, 이제 그에 걸맞게, 이치에 맞게 잘 살아가면 되는 거죠. 자기중심적인 삶, 이기적인 삶을 벗어나 더불어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흔히 ‘사랑은 영원히’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서로 그렇게 약속하기도 하죠. 그런데 실제로는 사랑하는 관계도 깨지는 것을 많이 보죠? 설령 그 관계를 잘 유지하면서 산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그 관계가 여러 가지로 변화하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랑의 관계를 잘 유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그러한 변화를 잘 관찰하고 잘 파악해서 잘 활용하며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이와 같이 관계와 변화를 잘 관찰하고 파악해서 잘 활용하고 살면 사람관계도 훨씬 편안해지고 자유로워집니다.
세상은 온통 관계로 이루어져 있고 변화하면서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천년만년 살 것처럼 욕심을 부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집착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또는 사람을 만날 때 어제의 경험을 가지고 오늘도 똑같이 대해서야 되겠습니까? 이미 어제 보았던 그 사람이 오늘은 변화해서 달라져있을 수 있어요. 어제 원수가 오늘 나에게 은인이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마음을 어떻게 써야 할까요? 어제의 조건이 변화해서 오늘이 되었으면 오늘은 어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마음을 내야 합니다. 과거에 보았던 것, 느꼈던 것, 생각했던 것에서 벗어나 지금의 실제 내용을 있는 그대로 살펴보고 그에 맞도록 새로운 마음을 내야 합니다. 그래야 삶이 자유롭고 평화로워집니다. 그래야 삶이 구차하지 않고 멋있어집니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편안하고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죽음의 문제입니다.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이것은 아마 나이든 분들이나 중대한 질병에 걸린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젊은이들은 실감이 잘 안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이 온통 관계로 존재하고 변화한다는 진리는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태어난 모든 것은 어차피 죽어갑니다. 그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하지만 생명의 참모습을 잘 관찰해보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시작하는 의미의 태어남, 끝남을 의미하는 죽음은 관념일 뿐 실재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있는 것은 끝없는 관계의 변화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라는 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세상이치를 잘 알고 살아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죽음이 관념일 뿐 실재하지 않는다면,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서 자유롭고 편안해질 수 있다면 인생을 보다 홀가분하게 살 수 있지 않겠어요? 이에 더하여 미지의 세계를 향해 여행하는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그래서 세상이치에 대한 공부가 필요한 것이죠.
반야심경은 이런 이치를 아주 투철하게 다루고 있는 경전입니다.
지금 여기 자유자재로 관찰사유하는 참사람 있네.
그는 참 지혜로 실천할 때
인연화합의 다섯 무더기가 모두 있지만 실제 비어있음을 잘 이해하여
일체 고통에서 벗어났네.
관자재보살이 그렇게 알고 살아봤는데, 실제로 일체 고난과 액난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삶이 괜찮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불교의 핵심이 다 들어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불교의 세 가지 사유방식을 올바로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 즉 온통 관계로 이루어진 우리 삶에서 내 몸과 마음도 관계로 이루어져 있고, 내 몸과 마음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잘 관찰하고 이해하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이것을 잘 관찰하고 이해한 것을 잘 사유음미해서 내 사고, 행위, 언어가 되게 하는 것이 법대로, 이치대로 사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간 사람이 부처님입니다.
불교의 세 가지 사유방식, 즉 세상이치는 아주 단순명료합니다. 이것만 잘 파악하고 이해해서 적용하면 우리 삶이 자유롭고 편안해집니다. 어때요, 만병통치약이죠? 예를 들어 우리는 쌀이라는 재료를 갖고 빵도 만들고 밥도 만들고 죽도 만들고 떡도 만들고…… 온갖 필요한 것을 다 만듭니다. 그것은 쌀이라는 재료의 성질을 잘 알아서 그때그때 필요에 맞게 적용하고 활용하는 것이잖아요.
그렇듯이 불교의 세 가지 사유방식, 즉 세상이치를 잘 파악하고 이해해서 우리 삶에 적용하고 활용하면 무슨 일을 만나더라도 자유롭고 편안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인간은 태어나면 만남과 이별이 있고, 성공과 실패가 있고, 병들기도 하고 결국은 죽게 되어 있지요. 늙지만 늙음으로부터 자유롭고 편안하며, 아프지만 아픔으로부터 자유롭고 편안하며, 헤어지더라도 헤어짐으로부터 자유롭고 편안하며, 죽지만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고 편안합니다. 누가 내게 원수질 일을 해도 그로부터도 자유롭고 편안해집니다. 우리 몸과 마음은 자유로운 존재, 평화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자, 그 세상이치를 잘 알고 제대로 적용해서 사는 것은 누구 맘대로 해요? (자기맘대로요!) 그렇지요. 자기 맘 대로입니다. 이것은 부처님도, 하느님도 대신해줄 수 없어요. 내 삶을 누가 대신 살아줄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해요? 숨 쉬듯이.
요즘 하도 더우니까 “숨쉬는 것도 귀찮다.”는 말도 꽤 많이 듣게 되는데요, 그렇다고 숨을 안 쉴 수는 없잖아요. 평소에는 자신이 숨을 쉬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고 살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그런 순간에도 숨은 쉬었어요. 그리고 요즘같이 더워지면 숨 쉬는 것조차 힘들죠? 그래서 귀찮다고 짜증을 내지만 그래도 숨은 쉽니다. 살아야 하니까. 우리가 세상이치를 잘 알고 적용하고 활용해서 사는 것도 그렇게 해야죠. 숨 쉬듯이. 끊임없이. 그게 불자의 삶이죠.
사람은 누구나 첫 번째 화살을 맞습니다. 부처님도 다르지 않습니다. 부처님도 병이 나기도 하고 나이 들고 늙으면 죽습니다. 부처님도 상한 음식 먹으면 식중독 걸립니다. 이것은 누구나 똑같습니다. 누구나 짊어져야 할 짐이죠. 그런데 참 신기한 게 있어요. 여기에 50근짜리 짐이 있다고 칩시다. 이 짐을 기꺼이 짊어지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이 짐의 무게가 더 적게 느껴집니다. 반면 마지못해서 억지로 짊어지면 50근보다 훨씬 더 무겁게 느껴집니다. 이런 거 일상에서도 많이 경험하시죠? 그런데 기꺼이 할지 말지는 누구 마음대로 해요? (웃음) (내 마음대로요!)
올해 날이 무척 더웠습니다. 그런데 더위를 대하는 태도가 사람마다 다르지요. 처음에 ‘덥다’라고 느끼는 것은 누구나 같아요. 이게 첫 번째 화살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어떤 사람은 ‘더워. 그러나 좋아, 기꺼이 더위와 더불어 살 거야.’하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더워 미치겠네. 뭔가 대책을 세워야겠어.’라고 짜증을 벌컥벌컥 냅니다. 이 중에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은 사람은 누구겠어요? (앞 사람이요!)
그렇지요. 짜증을 내면서 대책을 찾고 있는 사람이 두 번째 화살을 맞은 사람이지요. 우선 짜증이 났고, 다음에는 더위에 대한 특별한 대책을 세우려고 안간힘을 쓰겠죠. 에어컨도 놔야 하고, 해운대도 가야 하고, 아니면 시원한 해외에라도 가야 하고…… 특별한 대책을 세우려고 하는 순간 삶이 무척 피곤하고 고단해지는 거예요. 우리가 이해득실을 따지면서 살아가는 것이 다 두 번째 화살을 맞는 것입니다. 그러면 애초 50근만 짊어져도 괜찮을 짐이 더 무거워지기도 하고 쓸데없는 짐을 더 만들게 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제2의 화살을 맞는 것입니다. 세상이치를 잘 파악해서 이치에 맞는 것은 기꺼이 받아들이고,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기꺼이 고쳐가는 것, 이것을 경전에서는 제2의 화살을 맞지 않는다고 하는 겁니다.
이제 정리하겠습니다. 불교의 사유방식 세 가지, 뭐라고 했죠? ‘첫째, 변화로 존재한다. 둘째,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셋째, 행위 하는 대로 되는 존재다.’ 따라서 나에게 주어져 있는 현실, 시간과 공간, 이 몸과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인생이 바뀝니다. 만남이 고통과 불행일 수도 있고 자유와 평화일 수도 있습니다. 농사짓는 일이 고통과 불행일 수도 있고, 자유와 평화일 수도 있습니다. 부부생활, 가정생활, 이웃과의 관계가 고통과 불행일 수도 있고, 자유와 평화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자유자재로 삶을 결정하는 도깨비방망이는 누가 갖고 있습니까? 바로 자기 자신이 갖고 있습니다. 이 도깨비방망이를 자유와 평화가 되도록 쓸 것인가, 고통과 불행이 되도록 쓸 것인가를 누구 마음대로 결정해요? (자기 마음대로요!)
그렇습니다. 자기 마음대로입니다. 그리고 이 도깨비방망이를 자유와 평화가 되도록 쓸 수 있느냐 아니냐의 핵심은 공(空)에 대해서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첫째, 변화로 존재한다. 둘째, 관계로 존재한다. 셋째, 행위 하는 대로 된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여기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부처님도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모두가 평등합니다. 여러분 각각이 모두 천상천하유아독존입니다. 그러니 함께 그 길로 갑시다. - 이것이 반야심경의 내용입니다.
무더위를 만나도 자유롭고 평화로울 수 있고, 나를 해치는 사람을 만나도 자유롭고 평화로울 수 있고, 늙고 병들고 죽음을 만나도 자유롭고 평화로울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계발하도록 정진합시다.
2016. 8. 21 _ 8월 보현법회
<삼귀의와 반야심경>강의 (5강)
몸과 마음,
조건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인연화합의 다섯 무더기
도법스님 (실상사 회주)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더우니까 만사가 귀찮죠? 더위가 한 풀 꺾였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만만치 않습니다. 혹심한 더위를 겪으면서 무슨 생각들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저는 세상이 멸망으로 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후변화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어보셨죠? 때 아닌 폭설, 폭우, 태풍, 그리고 요즈음과 같은 불볕더위 때문에도 언론에서 심심찮게 다루고 있잖아요. 그런데 세상이 이렇게 망해가고 있는 것이라면 정치적으로 보수다 진보다, 여당이다 야당이다, 또는 누구에게 유리하냐 불리하냐, 누가 이기냐 지냐,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다 부질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옛 시가 떠올랐습니다.
人生似鳥同林宿 (인생사조동림숙)
大限來時各者飛 (대한래시각자비)
인생이란 한 숲에 머물고 있는 새들과 같아서
큰 일이 벌어지면 각자 자기 갈 곳으로 날아간다.
(죽을 때가 되면 각자 자기 갈 곳으로 가는 것이다.)
- 昔時賢文 에서
이 시에 비추어보면 우리는 한반도라는 큰 숲에 머물고 있는 새들과 같죠. 만약 한반도를 뒤흔드는, 또는 세상이 망하는 큰 일이 벌어지면 대한민국 국민들은 어떻게 할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저는 좋은 방향으로 상상이 되지 않고, 오히려 끔찍한 방향으로 상상이 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가 평소에 마음 쓰는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우리 사회에 서로에 대한 관심과 배려, 존중과 협력과 양보의 마음이 점점 더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실제 크고 어려운 일이 벌어졌을 때 우리 사회는 아수라장이 되고 말거예요. 그야말로 우리 모두가 비참해질 수밖에 없겠죠.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사람이 사람답게 마음 쓰고 살아가는 실력을 꾸준하게 길러야 하는데, 모두들 편 갈라서 상대를 이기는 데만 마음을 쓰고 있는 게 현실인 것 같습니다.
법회에 들어오기 전에 잠깐 마루에 앉아서 지붕너머로 하늘을 바라보니, 색이 푸르른 게 전형적인 한국의 가을 하늘이었습니다. 어제는 일찍 잠이 들어서 오늘 새벽 2시쯤 깼는데, 밖에 나오니 달도 뜨고 별도 뜨고 공기도 서늘해서 좋았습니다. 잔잔한 달빛이 경내에 가득 차있는 고요한 산사의 새벽을 느끼면서 혼자 절 구석구석을 돌았습니다.
그런 시간을 갖게 되니까 마음이 차분해지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마음이 더 선하게 작동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선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더 절실하게 하게 되더군요. 그러면서 우리가 여러 가지로 복잡하고 바쁘고 어렵긴 하지만 일부러라도 그런 시간, 즉 그런 선한 마음들을 기억해내고 키워낼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이 우리 일상에서 꼭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별하게 마음을 내서라도 꼭 그렇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 * * * *
자, 이제 반야심경으로 들어가 볼까요? 항상 처음 오신 분들이 많으셔서 진도를 제대로 못나가고 있는데, 하나하나 읽어가며 또 해보겠습니다.
참 지혜의 실천을 가르치는 경
지금 여기 자유자재로 관찰사유하는 참사람 있네.
그는 참 지혜로 실천할 때
인연화합의 다섯 무더기가 모두 있지만
실제 비어있음을 잘 이해하여
일체 고통에서 벗어났네.
참사람의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 사리자여,
그대 몸 그대로 실제 비어 있음과 다르지 않고
비어있음 그대로 그대 몸과 다르지 않으며
그대 몸 그대로 비어있음이며 비어 있음 그대로 그대 몸이니
느낌도 생각도 의지도 분별도 그러하네.
여기까지 읽지요. 쉽게 해보자고 번역을 했는데 번역본을 봐도 잘 모르겠어요. 그렇죠?(웃음)
경전 말씀은 양도 많고 내용도 다양합니다. 그래서 팔만사천법문이라고 하지요. 쉬운 것 같다가도 곰곰이 따져보면 매우 복잡하기도 하고 어렵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팔만 사천이나 되는 경전이지만 실제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딱 두 가지입니다.
그 두 가지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던져진 질문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또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누구에게나 던져진 질문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싶은 내용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살아야 될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질문을 잊거나 밀쳐두고 삽니다. 사춘기 때는 잠깐 고민을 하기도 하죠. 그런데 사회생활에 바쁘고, 애 낳고 키우는데 바쁘고, 여러 가지로 바쁘게 살면서 잊히기도 하고 밀쳐지기도 하고 때로는 거치적거리는 느낌 때문에 피하기도 하는, 그런 질문이지요.
그렇지만 일생을 인간답게 살아가는 데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질문이죠. 살아가면서 문득문득 이런 생각 안 하세요? ‘인생이 뭐야?’, ‘왜 살아야 해?’, ‘왜 죽는 거야?’,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야?’, ‘어떻게 살아야 해?’ 바로 이런 질문입니다.
크게 보면 결국 두 가지의 물음, 즉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입니다. 팔만대장경이 모두 이 두 가지 물음에 대한 설명이예요. 아무리 길고 어려운 경전이라고 해도 이 두 가지 물음에 대한 설명에서 벗어나지 않아요.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이 물음을 가질 수밖에 없고 이 물음을 잘 알고 살아야 괜찮게 살 수 있기 때문이죠.
반야심경 역시 그 두 가지 물음에 대한 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경전내용을 보겠습니다.
지금 여기 자유자재로 관찰사유하는 참사람 있네.
‘참사람’은 관자재보살, 즉 관세음보살을 풀어쓴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풀어 쓴 것이기도 하지만, 실제 경전의 뜻으로 보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각자 자기 자신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누구든지 삶을 잘 관찰사유해서 삶을 잘 알고 살아가면 참사람이고, 그렇게 살면 다 관자재보살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는 참 지혜로 실천할 때
여기부터는 관세음보살의 경험사례를 설명한 것입니다. 자, 이제부터 관세음보살의 경험사례를 잘 알고 따라서 하면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이 관자재보살이 되는 겁니다. 아시겠죠?(웃음)
인연화합의 다섯 무더기 모두 있지만
인간의 몸과 마음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 이것은 나는 누구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이죠? 나는 곧 몸과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 몸과 마음은 본래부터 있었던 것도 아니고 본래부터 없었던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생겨나서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요? 경전에서는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조건이 만들어지면 있는 것이고, 조건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없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지금 여기에 살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의 몸과 마음이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죠. 그리고 세월이 흐르거나 또 다른 상황이 만들어져서 이 세상을 끝내야 할 조건이 만들어지면 우리는 죽음을 맞이하게 돼요. 우리의 몸과 마음의 삶이 변화하게 되는 것이죠.
여기서 ‘인연화합의 다섯 무더기’는 몸, 느낌, 생각, 의지, 분별을 말합니다. 첫 번째가 몸이라면 뒤의 네 가지(느낌, 생각, 의지, 분별)는 마음에 해당합니다. 불교에서는 몸도 네 가지로 이야기 합니다. 인간의 몸도 실제 내용을 분석해보면 지수화풍(地水火風). 즉 흙의 기운, 물의 기운, 불의 기운, 바람의 기운으로 이루어졌다는 거예요. 이것은 인도에서 불교가 시작되었으니까 인도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세계관에서 비롯된 표현이죠. 과학적으로 구성요소를 더 세밀하게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이 네 가지 요소와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연화합의 다섯 무더기’라는 말은 ‘몸은 지수화풍으로 이루어져 있고, 마음은 느낌, 생각, 의지, 분별로 이루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조건에 따라 만들어지고, 조건이 유지되면 유지되고, 조건이 바뀌면 다른 내용으로 변화해간다는 거죠.
실제 비어있음을 잘 이해하여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진 다섯 무더기가 지금 여기에 있지만 실제로는 비어있다는 말이죠. ‘있긴 있지만 사실은 있지 않다.’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세요? 나는 어려운데 (웃음) 사실 이것을 설명하기가 제일 어렵기도 하고, 이 경전이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또한 이것만 제대로 이해하면 나머지는 저절로 이해가 되는 핵심적인 귀절이기도 합니다.
‘있기는 있지만 사실은 있지 않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그것은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연이 화합하면 있는 것이고, 인연이 변화하면 있지 않은 것이니, 결국 ‘인연화합’에 답이 있어요.
예를 들어봅시다. 제가 지금 손뼉을 쳤습니다. 손뼉을 치는 순간 손뼉소리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하고 있는 지금, 손뼉소리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손뼉소리가 있는 것이라면 손뼉을 치지 않는 지금도 있어야 하잖아요. 왜 없는 거죠? (손뼉을 치지 않으니까요.) 그렇죠.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손뼉소리가 생길 조건이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인 거죠. 조건이 만들어지면 소리가 있고 조건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소리가 없지요. 그러면 손뼉소리는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해요.)
그렇습니다. 조건이 생겨나면 따라서 생겨나고, 조건이 없어지면 따라서 없어지지요. 이런 것을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 것이고, 이런 상태를 설명하려고 하니까 ‘모두 있지만 실제는 비어있다.’ 이런 식으로 표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없어진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사라진다.’는 말이 아니고 ‘변화한다.’는 뜻이예요.
그런데 손뼉소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들, 그것이 사건이든지 사물이든지 다 마찬가지로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실제로 비어 있죠. 분리독립되고 고정불변한 실체가 없는 거죠. 이러한 사실을 잘 이해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잘 이해하는 것을 지혜라고 표현하기도 하고 깨달음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인연화합의 다섯 무더기 모두 있지만 실제 비어있음을 잘 이해하여)
일체 고통에서 벗어났네.
여기까지가 반야심경의 핵심입니다. 앞에서 ‘인연화합의 다섯 무더기 모두 있지만 실제 비어있음을 잘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잘 파악하고 이해한다.’는 말과 같은 것이라고 했죠? 그러니까 이 부분을 해석해보면, ‘우리 몸과 마음이 어떻게 생겨나고 유지되고 변화해 가는지 잘 이해하면’ ‘일체 고통에서 벗어난다.’, ‘우리가 겪는 고통과 불행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삶이 괜찮아진다.’는 것입니다.
실제 비어있음을 잘 이해하여 고통에서 벗어났네.
누가 그랬다는 거죠? 관세음보살이 자기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죠.
“내가 인생을 살아보니 몸과 마음이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져있어. 마치 아지랑이처럼. 그걸 잘 파악하고 이해하고 나니까 삶이 자유롭고 평화로워졌어. 구속과 다툼에서 벗어났어. 그래서 자유로워지고 평화로워졌어.”
중요한 것은 인생의 참모습, 나의 참모습을 제대로 알고 살아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야 삶이 괜찮아지고, 편안해지고. 멋있어진다는 거죠. 진짜 행복해지고 싶다면 인생의 참모습, 나의 참모습을 제대로 알고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참 사람의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 사리자여,
‘사리자’는 듣는 사람, 우리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경전의 구조로 보면, 부처님께서 관세음보살의 경험사례를 설명하고 나서, 그렇게 되는 이유를 알려주려고 사리자를 부르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처럼 살려고 하는 사람, 사리자여!’ 이런 말이죠.
그대 몸 그대로 실제 비어 있음과 다르지 않고
비어있음 그대로 그대 몸과 다르지 않으며
그대 몸 그대로 비어있음이며 비어 있음 그대로 그대 몸이니
느낌도 생각도 의지도 분별도 그러하네.
이 구절은 한문으로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에 해당하는 구절입니다. 몸이 그러하듯이 우리 마음도 그러하다는 의미죠.
많은 사람들이 ‘육체는 허무하게 사라지지만 정신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렇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예를 들어 아름다운 꽃을 보면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죠? ‘야, 저 꽃 아름답네.’ 하면서 기쁜 마음이 되죠? 아름다운 꽃과 내 눈이 만나는 조건에 의해서 내 마음이 기쁜 마음으로 변화하는 거죠. 그런데 평소에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을 보면 그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나요? ‘에이, 저 사람은 왜 나타났어. 하면서 기분이 나빠지지요. 미운 마음이 생겨나는 거예요. 똑같은 마음인데, 어떤 때는 좋은 마음, 어떤 때는 미운 마음으로 변화합니다. 마음은 불변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 마음 역시 몸과 마찬가지로 조건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겁니다.
이렇게 변화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무상하다고 표현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상하다’는 말을 ‘허무하다’는 말로 받아들이고 불교를 ‘허무의 종교’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불교는 변화를 잘 이해하고 파악하라는 종교예요. 몸과 마음은 조건에 따라 변화하는 것임을 잘 이해하고 파악하여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라는 종교가 불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마음이나 정신이 영원불멸한 것이라면, 어떻게 부처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조건에 따라 변화될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에 나쁜 사람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고, 반대로 잘못하면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이 될 수 있는 거죠. 세상에 영원불멸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이 사실만이 영원합니다.
불교의 사고방식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공간적으로, 세상 모든 것은 그물의 그물코처럼 서로 연결되어 이루어져 있으며,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이것을 교리적 개념으로는 연기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표현합니다.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도 다 같은 말이죠. 우리 몸이든 마음이든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온 우주의 시간과 공간, 내면과 외면, 정신과 물질, 자연과 인간 등등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유형무형의 모든 것들이 다 서로 의지해 있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시간적으로, 세상 모든 것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우리는 태어나면 시작이고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시작도 끝도 없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시작도 끝도 없다는 말은, 달리 이야기하면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영원히 존재할까요? 끝없이 변화하면서 존재하는 거죠. 마치 바다의 파도처럼 말이죠. 파도가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까? 파도는 조건에 따라 물결이 계속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시작되었다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변화하는 것입니다. 공간적으로는 미묘한 관계로 이루어져 있고 시간적으로는 끊임없이변화하면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죠.
셋째, 사람은 행위하는 대로 되는 존재다.
본인이 어떻게 마음 쓰고 행동하느냐에 따라 그 삶이 만들어집니다.
내가 화를 내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됩니까? 나는 ‘화내는 사람’이 됩니다. 욕하면 어떤 사람이 됩니까? 즉각 ‘욕하는 사람’이 됩니다. 도둑질하면? ‘도둑놈’이 되죠. 이렇게 사람은 행위하는 대로 바로바로 그 존재가 됩니다.
이 불교의 사고방식 세 가지는 바로바로 증명되기 때문에 복잡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바로 여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 시간적으로 우리는 한 살, 두 살, 열 살, 삼십 살… 계속 변화했어요. 까만 머리는 백발이 되었죠. 공간적으로는 어떠했을까요? 나 혼자 따로 살았나요? 가족, 학교친구들, 이웃들, 친지들, 회사동료들… 수많은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왔어요. 그리고 먹을 거리를 먹어야 삶이 가능했고, 잠을 잘 수 있어야 삶이 가능하지요. 어떤 식으로 살았던 이렇게 관계를 맺고 살아온 거예요. 어떻게 살았든 그들 없이 나 혼자 지금까지 살아오는 것이 가능했을까요? 절대로 못 살지요. 이런 것이 바로 관계로 존재한다는 거예요. 우리는 시간적으로는 끝없이 변화해왔고, 공간적으로는 서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관계와 그 관계의 변화를 잘 이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잘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을 잘 알면 그에 따라 이어지는 행위들이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쓸데 없는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어요. 쓸데없는 집착, 애착도 내려놓게 되어 있어요. 못 잊어서 전전긍긍하는 것에서도 자유로워질 가능성이 높아져요.
관계와 변화를 반야심경에서는 공(空)이라고 표현합니다. 불교경전에는 공(空), 무(無), 비(非), 불(不)이라는 표현이 많은데, 이 표현의 대부분이 관계와 변화를 설명하기 위한 것들입니다. 바로 영원불멸의 것은 없다, 그러니 그것이 사람이든, 돈이든, 명예든, 사물이든 그 무엇이든 그것에 대한 부질없는 욕심과 집착을 내려놓으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극단적인 상황으로 가면 “모든 것을 버리고 나 혼자 살겠어”라고 하지만 그것은 말로만 가능할 뿐 실제로 혼자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요. 관계의 측면에서 보면 우리는 동전의 양면처럼, 한 손의 손바닥과 손등처럼 서로 의지해서 살고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도 그렇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상대를 대하는 태도가 어떻겠습니까? 자기중심적이고 배타적으로 살까요? 만약 주위에서 “저 사람은 너무 치사해”라고 평가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잘 보세요. 대부분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일 겁니다. 사는 게 힘드니까 저 혼자 살 길을 찾겠다고 그러는 건데, 실제로는 편안하고 평화롭고 행복해질 수가 없어요. 자기중심적이고 배타적인 삶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살면 오히려 삶이 쩨쩨하고 옹졸해지고 궁색해져요. 부끄러운 일이죠. ‘치사(恥事)하다’라는 말을 풀어보면 ‘부끄러운 일’이라는 뜻입니다.
삶이 편안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되려면 이치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치에 맞게 살라고 누누이 말씀하셨고, 그 가르침이 무아, 연기, 무상입니다. 그리고 이런 뜻을 다 담은 개념이 공(空)입니다. 공(空)은 쓰임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되므로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공은 ‘관계로 존재한다, 변화로 존재한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이러할 때 공을 ‘없다’로 해석하면 뜻이 이상해져버리겠죠. 두 번째로 공이 ‘없다’는 뜻으로 쓰일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영원불멸한 것은 없다, 분리 독립된 것은 없다는 것을 공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다시 말하면 무아, 연기, 무상, 공 - 이것들이 모두 존재의 참모습, 인생의 참모습을 말해주는 표현인 것입니다.
자, 지금까지 우리는 인생의 근본화두 첫 번째인 나는 누구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의 몸과 마음은 온통 관계로 이루어져 있고,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두 번째 화두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알아볼까요?
사실 이에 대한 답도 이미 나왔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았으면, 이제 그에 걸맞게, 이치에 맞게 잘 살아가면 되는 거죠. 자기중심적인 삶, 이기적인 삶을 벗어나 더불어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흔히 ‘사랑은 영원히’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서로 그렇게 약속하기도 하죠. 그런데 실제로는 사랑하는 관계도 깨지는 것을 많이 보죠? 설령 그 관계를 잘 유지하면서 산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그 관계가 여러 가지로 변화하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랑의 관계를 잘 유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그러한 변화를 잘 관찰하고 잘 파악해서 잘 활용하며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이와 같이 관계와 변화를 잘 관찰하고 파악해서 잘 활용하고 살면 사람관계도 훨씬 편안해지고 자유로워집니다.
세상은 온통 관계로 이루어져 있고 변화하면서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천년만년 살 것처럼 욕심을 부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집착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또는 사람을 만날 때 어제의 경험을 가지고 오늘도 똑같이 대해서야 되겠습니까? 이미 어제 보았던 그 사람이 오늘은 변화해서 달라져있을 수 있어요. 어제 원수가 오늘 나에게 은인이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마음을 어떻게 써야 할까요? 어제의 조건이 변화해서 오늘이 되었으면 오늘은 어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마음을 내야 합니다. 과거에 보았던 것, 느꼈던 것, 생각했던 것에서 벗어나 지금의 실제 내용을 있는 그대로 살펴보고 그에 맞도록 새로운 마음을 내야 합니다. 그래야 삶이 자유롭고 평화로워집니다. 그래야 삶이 구차하지 않고 멋있어집니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편안하고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죽음의 문제입니다.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이것은 아마 나이든 분들이나 중대한 질병에 걸린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젊은이들은 실감이 잘 안날 수도 있습니다.
세상이 온통 관계로 존재하고 변화한다는 진리는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태어난 모든 것은 어차피 죽어갑니다. 그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하지만 생명의 참모습을 잘 관찰해보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시작하는 의미의 태어남, 끝남을 의미하는 죽음은 관념일 뿐 실재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있는 것은 끝없는 관계의 변화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라는 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세상이치를 잘 알고 살아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죽음이 관념일 뿐 실재하지 않는다면,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에서 자유롭고 편안해질 수 있다면 인생을 보다 홀가분하게 살 수 있지 않겠어요? 이에 더하여 미지의 세계를 향해 여행하는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그래서 세상이치에 대한 공부가 필요한 것이죠.
반야심경은 이런 이치를 아주 투철하게 다루고 있는 경전입니다.
지금 여기 자유자재로 관찰사유하는 참사람 있네.
그는 참 지혜로 실천할 때
인연화합의 다섯 무더기가 모두 있지만 실제 비어있음을 잘 이해하여
일체 고통에서 벗어났네.
관자재보살이 그렇게 알고 살아봤는데, 실제로 일체 고난과 액난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삶이 괜찮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불교의 핵심이 다 들어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불교의 세 가지 사유방식을 올바로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 즉 온통 관계로 이루어진 우리 삶에서 내 몸과 마음도 관계로 이루어져 있고, 내 몸과 마음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잘 관찰하고 이해하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이것을 잘 관찰하고 이해한 것을 잘 사유음미해서 내 사고, 행위, 언어가 되게 하는 것이 법대로, 이치대로 사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간 사람이 부처님입니다.
불교의 세 가지 사유방식, 즉 세상이치는 아주 단순명료합니다. 이것만 잘 파악하고 이해해서 적용하면 우리 삶이 자유롭고 편안해집니다. 어때요, 만병통치약이죠? 예를 들어 우리는 쌀이라는 재료를 갖고 빵도 만들고 밥도 만들고 죽도 만들고 떡도 만들고…… 온갖 필요한 것을 다 만듭니다. 그것은 쌀이라는 재료의 성질을 잘 알아서 그때그때 필요에 맞게 적용하고 활용하는 것이잖아요.
그렇듯이 불교의 세 가지 사유방식, 즉 세상이치를 잘 파악하고 이해해서 우리 삶에 적용하고 활용하면 무슨 일을 만나더라도 자유롭고 편안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인간은 태어나면 만남과 이별이 있고, 성공과 실패가 있고, 병들기도 하고 결국은 죽게 되어 있지요. 늙지만 늙음으로부터 자유롭고 편안하며, 아프지만 아픔으로부터 자유롭고 편안하며, 헤어지더라도 헤어짐으로부터 자유롭고 편안하며, 죽지만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고 편안합니다. 누가 내게 원수질 일을 해도 그로부터도 자유롭고 편안해집니다. 우리 몸과 마음은 자유로운 존재, 평화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자, 그 세상이치를 잘 알고 제대로 적용해서 사는 것은 누구 맘대로 해요? (자기맘대로요!) 그렇지요. 자기 맘 대로입니다. 이것은 부처님도, 하느님도 대신해줄 수 없어요. 내 삶을 누가 대신 살아줄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해요? 숨 쉬듯이.
요즘 하도 더우니까 “숨쉬는 것도 귀찮다.”는 말도 꽤 많이 듣게 되는데요, 그렇다고 숨을 안 쉴 수는 없잖아요. 평소에는 자신이 숨을 쉬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고 살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그런 순간에도 숨은 쉬었어요. 그리고 요즘같이 더워지면 숨 쉬는 것조차 힘들죠? 그래서 귀찮다고 짜증을 내지만 그래도 숨은 쉽니다. 살아야 하니까. 우리가 세상이치를 잘 알고 적용하고 활용해서 사는 것도 그렇게 해야죠. 숨 쉬듯이. 끊임없이. 그게 불자의 삶이죠.
사람은 누구나 첫 번째 화살을 맞습니다. 부처님도 다르지 않습니다. 부처님도 병이 나기도 하고 나이 들고 늙으면 죽습니다. 부처님도 상한 음식 먹으면 식중독 걸립니다. 이것은 누구나 똑같습니다. 누구나 짊어져야 할 짐이죠. 그런데 참 신기한 게 있어요. 여기에 50근짜리 짐이 있다고 칩시다. 이 짐을 기꺼이 짊어지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이 짐의 무게가 더 적게 느껴집니다. 반면 마지못해서 억지로 짊어지면 50근보다 훨씬 더 무겁게 느껴집니다. 이런 거 일상에서도 많이 경험하시죠? 그런데 기꺼이 할지 말지는 누구 마음대로 해요? (웃음) (내 마음대로요!)
올해 날이 무척 더웠습니다. 그런데 더위를 대하는 태도가 사람마다 다르지요. 처음에 ‘덥다’라고 느끼는 것은 누구나 같아요. 이게 첫 번째 화살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어떤 사람은 ‘더워. 그러나 좋아, 기꺼이 더위와 더불어 살 거야.’하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더워 미치겠네. 뭔가 대책을 세워야겠어.’라고 짜증을 벌컥벌컥 냅니다. 이 중에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은 사람은 누구겠어요? (앞 사람이요!)
그렇지요. 짜증을 내면서 대책을 찾고 있는 사람이 두 번째 화살을 맞은 사람이지요. 우선 짜증이 났고, 다음에는 더위에 대한 특별한 대책을 세우려고 안간힘을 쓰겠죠. 에어컨도 놔야 하고, 해운대도 가야 하고, 아니면 시원한 해외에라도 가야 하고…… 특별한 대책을 세우려고 하는 순간 삶이 무척 피곤하고 고단해지는 거예요. 우리가 이해득실을 따지면서 살아가는 것이 다 두 번째 화살을 맞는 것입니다. 그러면 애초 50근만 짊어져도 괜찮을 짐이 더 무거워지기도 하고 쓸데없는 짐을 더 만들게 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제2의 화살을 맞는 것입니다. 세상이치를 잘 파악해서 이치에 맞는 것은 기꺼이 받아들이고,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기꺼이 고쳐가는 것, 이것을 경전에서는 제2의 화살을 맞지 않는다고 하는 겁니다.
이제 정리하겠습니다. 불교의 사유방식 세 가지, 뭐라고 했죠? ‘첫째, 변화로 존재한다. 둘째,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셋째, 행위 하는 대로 되는 존재다.’ 따라서 나에게 주어져 있는 현실, 시간과 공간, 이 몸과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인생이 바뀝니다. 만남이 고통과 불행일 수도 있고 자유와 평화일 수도 있습니다. 농사짓는 일이 고통과 불행일 수도 있고, 자유와 평화일 수도 있습니다. 부부생활, 가정생활, 이웃과의 관계가 고통과 불행일 수도 있고, 자유와 평화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자유자재로 삶을 결정하는 도깨비방망이는 누가 갖고 있습니까? 바로 자기 자신이 갖고 있습니다. 이 도깨비방망이를 자유와 평화가 되도록 쓸 것인가, 고통과 불행이 되도록 쓸 것인가를 누구 마음대로 결정해요? (자기 마음대로요!)
그렇습니다. 자기 마음대로입니다. 그리고 이 도깨비방망이를 자유와 평화가 되도록 쓸 수 있느냐 아니냐의 핵심은 공(空)에 대해서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첫째, 변화로 존재한다. 둘째, 관계로 존재한다. 셋째, 행위 하는 대로 된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여기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부처님도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모두가 평등합니다. 여러분 각각이 모두 천상천하유아독존입니다. 그러니 함께 그 길로 갑시다. - 이것이 반야심경의 내용입니다.
무더위를 만나도 자유롭고 평화로울 수 있고, 나를 해치는 사람을 만나도 자유롭고 평화로울 수 있고, 늙고 병들고 죽음을 만나도 자유롭고 평화로울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계발하도록 정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