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1. 20 _ 11월 보현법회
<삼귀의와 반야심경>강의 (6강)
삶과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
도법스님 (실상사 회주)
(신도들 : 요즘 돌아가는 정국 이야기 좀 해주세요.)
정국이야기를 하라고 하는데 그 이야기는 다 알고 있잖아요.
사실 반야심경에 해답이 다 있기도 하고, 우리가 공부했던 법성게에도 해답이 다 있습니다. 해답이 없어서 안 가거나 못 가는 것이 아니죠. 다만 해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길을 가지 않는 것이죠. 길은 언제나 환하게 열려 있습니다.
그런데 왜 문제가 풀리지 않는가. 하나는 그 길을 잘 몰라서 안 가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그 길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이해관계에 따라 계산 하느라고 못 가는 경우입니다. 길이 없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은 대통령대로, 국민은 국민대로, 여당은 여당대로, 야당은 야당대로 다 계산이 다른 거죠. 문제는 거기에 있습니다.
반야심경에서는 그 길을 뭐라고 표현하고 있는가. 한 마디로 공(空)의 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공의 길을 가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고 말합니다. 그 길을 원효는 ‘일심동체의 길’로, 의상은 ‘원융의 길’로 표현했습니다. 불교에서 해답으로 제시하고 있는 개념이 여러 가지가 있어요. 본래부처라는 개념도 그렇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도 그렇습니다. 그 말 속에 다 해답이 있습니다.
길은 이렇게 이미 환하게 열려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길을 가야할 사람들이 무지하거나 아니면 계산이 각각 다른 거죠. 계산이 각각 다르다 보니까 함께 가야하는 길인데 함께 안 가게 되는 거죠.
조금 전에 같이 세월호 기도를 했습니다. 우리 사회가 세월호 문제를 제대로 다루었다면 정국이 오늘과 같이 심각해졌을까요? 세월호 문제를 제대로 다루었다면 오늘의 이 정국은 발생하지 않았으리라고 봅니다. 또는 이전부터 이런 정국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미리 제동이 걸리거나, 또는 이런 상황까지 안 가도록 대책이 만들어졌겠죠.
그런데 세월호 문제 역시 공의 정신으로, 또는 법성원융의 정신으로, 또는 본래부처의 정신으로,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정신으로 다루지 못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누구 때문이든 결국 그것이 제대로 안 다루어지니까 오늘의 이런 상황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오늘의 상황이 또 제대로 안 다루어지면 앞으로도 결국 이런 문제는 계속 되거나 더 악화될 거라 생각됩니다.
지금 가만히 보십시오. 현 정국에서 온 국민이 ‘하야’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야’라는 말로 우리의 뜻을,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자기의 뜻을 표현했습니다. 여기까지가 국민이 할 수 있는 일이죠. 앞으로 더 해도 그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거예요. 그 다음은 정부와 정치권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야라는 말을 놓고도 해석들을 달리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대통령은 대통령대로 해석을 다르게 하고 있고 정부와 여당은 그들대로, 야당은 야당대로, 또 이 당은 이 당대로, 저 당은 저 당대로 ‘하야’라는 말에 대한 해석을 다르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국민들이 말하는 ‘하야’라는 말 속에 담겨있는 내용이 뭐겠습니까? 하야라는 말, 그것이 전부이겠습니까? 그 말 속에 담겨있는 알맹이를 곰곰이 짚어서 정리해 보면 한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좋은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번 기회에 좋은 나라가 되도록 하자. 두 번째는 밝은 미래가 보였으면 좋겠다. 아, 이제야 괜찮아지겠구나. 이렇게 가면 앞으로 우리 아이들이 살만하겠구나. 밝은 미래가 보이길 바란 것입니다. 그 다음 세 번째는 뭐겠어요? 좋은 나라를 만들고, 밝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보일 수 있도록 하려면 뭘 해야 하겠습니까? 좋은 정부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그렇다면 좋은 정부를 어떻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야당이 집권하면 좋은 정부가 될 것 같습니까? 아니면 대통령이나 여당이 끌고 가면 좋은 정부가 될 것 같습니까? 그 누구도 정말로 국민들이 원하는 정부를 만들어 낼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좋은 정부를 만들어 내려면 할 수 있는 일이 뭐겠어요? 최선책은 사회적 합의를 통해서 함께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쪽저쪽이 모두 함께 하는 국민의 뜻을 모아서 함께 만들어 내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현재는 그런 움직임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차선책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야권과 시민사회가 좋은 정부를 탄생시키기 위해서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으는 것입니다. 누가, 어느 당이 집권하느냐가 아니라 정말로 야권과 시민사회가 합의과정을 통해 좋은 정부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오늘 야권 후보들이 모여서 논의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던데 거기서 뭘 만들어 낼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현재 우리 사회가 할 것은 다 했다고 봅니다. 문제제기도 할 만큼 했고, 분노도 표현할 만큼 다 표현했고, 비난도 할 만큼 했고, 매도도 그만큼 했으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앞으로 더 한다 하더라도 이 이상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검찰이 다 밝혀낸다 한들 지금 이야기 되는 것 이상을 넘어설 수 있겠습니까? 저는 넘어설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명료하지 않은 것들을 명확하게 확인하는 수준인 거죠. 지금 나온 이야기들, 그 이상 나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과제는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것입니다. 이미 다 드러난 것들을 어떻게 전화위복이 될 수 있도록, 그래서 국민들의 바람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내는 것입니다. 만약 대통령과 정부가 못한다면 당연히 야권과 시민사회가 해야겠죠. 오늘 기대를 해 봐야죠. 그러니까 제가 볼 때는 길이 없어서 못 가거나 해답이 없어서 못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휴휴당에 삽니다. 논 한 가운데 지어진 집이죠. 그러다 보니 농사짓는 밭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한 쪽은 호박밭이고 한 쪽은 배추밭인데 호박도 싱싱하게 잘 자라고 있고 배추도 잘 자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된서리가 내렸어요. 서리가 내린 밭은 똑같은 공간, 똑같은 시간, 서리가 내렸다고 하는 똑같은 조건입니다. 그런데 하늘과 땅처럼 다른 것이 있어요. 뭐가 다를 것 같습니까? 농사짓는 분들은 잘 알 것 같은데요.
된서리가 내렸는데, 배추는 더 싱싱하게 자라고 있고 호박은 풀썩 주저앉았습니다. 그러니까 호박의 살림살이는 끝난 거예요. 어쩌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직면하고 있는 정국도 그런 상황이라는 거죠. 그런데 누구한테는 괜찮고 누구한테는 안 괜찮은 거예요. 그것은 왜 그럴까요? 똑같은 조건인데. 똑같은 시간, 똑같은 장소에 서리가 내렸는데 왜 그럴까요?
그것은 상황에 서있는 주체들의 실력과 역량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배추는 된서리가 내리는 상황을 잘 소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이고, 호박은 그러한 능력이 없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이 상황을 올바로 해석해내고, 얽힌 타래들을 풀어내고, 어떻게 더 좋은 방향과 길을 찾고 만들어 낼 것인가 하는 것들 역시 우리들의 실력과 능력, 그리고 노력에 달린 거겠죠.
물론 대통령이 해내면 제일 좋겠죠. 대통령과 정부와 여당이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길이 안 보이는 게 현실입니다. 길이 될 만한 몇 가지를 던지기도 했지만, 그것이 길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내는 실력까지는 안 되는 거죠. 야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야가 다 안 되는 거죠. 책임총리, 거국내각 이야기까지 나왔습니다. 대통령도 국회에서 합의해서 총리를 추천하면 임명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런 것들은 사실 다 해볼 만한 일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제안들이 성사될 수 없는 것은 왜 그럴까요? 대통령도 여당도 야당도 공(空)이라는 입장에서 이 해법을 제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각축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한 손에 무기를 감추고 화해하자고 손을 내밀면 누가 그 손을 잡겠습니까.
게다가 국민들의 현재 정서는 대통령과 정부, 여당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해 있습니다. 야당에 대해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상태입니다. 그러니 “그 정도 가지고는 안 돼. 무릎 꿇어. 손들고 나와.” 이런 거잖아요. 저는 그런 대중정서에 대해 충분히 공감합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무릎 꿇고 두 손 들고 나오면 문제는 다 풀리는 것일까요? 어떨 것 같습니까? 그것만이 만사형통일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길이 열릴 수도 있지만 상황이 더 나빠질 수도 있다고 봅니다. 무릎 꿇고 나왔을 때 어떻게 할지에 대한 그림이 아직 잘 안 보이는 거예요.
현재 대통령은 시원스럽게 정리하지 못하고 뭔가를 조금씩 내놓습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대통령이 자신의 잘못에 대해 어떻게든 면책을 해보려는 꼼수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국민들이 얻어낸 성과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내놓은 것 중에 정말 자신이 있고 실력이 있다면 해볼 만한 꺼리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야당도 시민사회도 그것을 확 낚아채서 풀어갈 만한 실력이 없다보니까 해볼 만한 것을 해보는 쪽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대통령과 정부 측에서는 또 다른 궁리를 하고 있고, 그러면서 상황은 더 어려워지고… 현재는 이런 상황인 거죠.
야권도 실력과 능력이 있다면, 자신감을 갖고 국민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국민여러분, 저희도 책임이 큽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우리가 알아서 잘 하겠습니다. 촛불시위 더 안 해도 충분히 의사표시 되었습니다. 국민의 뜻이 분명하게 확인됐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잘 마무리하겠습니다.”라고. 그런데 전부 촛불만 계속 타오르길 바라고 있어요. 십만에서 오십만으로, 오십만에서 백만으로… 야권에서는 촛불이 계속 타오르길 바라고 촛불 눈치만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지금 이 정국을 보기엔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뭘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다만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많은 길이 있을 수 있는데, 우리가 그 길을 잘 닦아가는 실력과 역량이 부족한 것이 현실인 것 같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무엇인가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통령과 정부도, 여당도 야당도, 어느 누구도 다 실력이 부족한 것은 맞지만, 우리가 그것을 탓하고만 있는 것도 길은 아니잖아요. 실력도 주체적 역량도 부족한 이 현실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모색해봐야겠죠. 제 생각은 거기까지이고 그 다음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기 때문에 저도 사실 고민입니다. 종교계의 역할이 있을 수 있는데 종교계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고민합니다. 다른 곳은 다 나왔죠. 시민사회도, 민중들도 다 나온 것 같습니다. 그 다음은 정치권인데…
하나는 정치권으로 하여금 뭔가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 종교계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다른 하나는 국민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정치권으로 하여금 제대로 하도록 하는 뭔가가 나올 수 있을까? 아니면 정치권 스스로가 잘 찾아갈까? 이렇게 세 가지 정도를 생각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정치권 스스로가 잘 찾아갔으면 좋겠다고 하는 기대, 다른 하나는 시민사회가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서 정치권으로 하여금 길을 잘 찾아가도록 해 주는 것, 이것이 다 안 되면 종교계가 좀 나서서라도 그런 것을 해볼 수 있도록 하는 것. 이렇게 세 가지 정도를 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번 상황을 보면서 촛불도 하야요구도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기도 하고 함께 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참여하는 이유는 각각이었겠지만 새로운 나라에 대한 바람은 같았다고 봅니다. 그래서 함께 길을 찾아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런 과정에서 우리 마음속에 내편에 대한 애정만 있고 상대편을 포함한 사람에 대한 애정이 다 깨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 이유가 있는 것이기에 분노하는 사람을 향해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안타까움은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어떤 사람을 향해서 분노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증오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 분노의 바탕에, 또는 증오의 바탕에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애정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분노하거나 증오하는 이유가 정당하다고 해서 나의 마음 바탕에 그 사람에 대한 애정마저 같이 무너지면, 결과적으로 자신을 파괴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저는 그것이 가장 마음에 걸리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세월호 문제와 지금의 정국문제는 거의 비슷한 내용이라고 봅니다. 누구를 탓할 수는 있지만, 누구를 탓하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누구를 탓하는 것을 넘어서야 길이 열립니다. 우리 삶이 대부분 그러한 것 같습니다. 누구를 탓하는 것까지는 잘 하는데 그 너머까지는 못가는 거죠. 그래서 중생의 삶이라고 하는 거겠죠.
제가 서울에 자주 왔다갔다 하고 화쟁위원장을 맡고 있다 보니 사람들이 논쟁하는 자리에 종종 가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주장과 비판이 탁월합니다. 굉장히 멋있게 주장하기도 하고, 대단히 탁월하게 비판하기도 합니다. 아주 놀라울 정도입니다. 그래서 배울 점도 많고 깨닫는 것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주장과 비판 이후 어떻게 할 것인가로 넘어가면 더 이상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결론은 대부분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야이든 사회적 합의 없이는 앞으로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회적 합의 없이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고 하면서도 사회적 합의를 하는 쪽으로 접근해가는 능력은 매우 약합니다. 또는 말은 사회적 합의를 외치지만 실제로는 사회적 합의의 방향으로 접근하고 있지 않음도 많이 보게 됩니다. 대부분이 나와 내 편이 유리한 쪽으로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회적 합의란 말은 나와 내 편만이 아니고 반대편 사람들과 같이 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반야심경의 논리로 보면 공(空)의 길, 달리 말하면 사심을 버리고 대의명분 또는 공심(公心)의 길을 가야 된다는 뜻입니다. 공의 길이 해답이야, 하고 말로는 배우고 또 배웠지만, 실제 삶에서는 그 연습이 안 되어있는 거죠. 실제 삶에서는 어쨌는가. 대립과 경쟁, 승리와 일등을 향해 달려온 것이 그간의 삶이었죠. 이쪽은 이쪽대로 저쪽은 저쪽대로 나와 우리 편이라고 하는 틀을 딱 붙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정교한 명분과 논리로 주장하고 비판합니다. 그런데 “그래서 그 다음엔 어떻게 할 건데?”라고 물으면 대답을 못하죠. 그리고는 또 ‘사회적 합의 없이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끝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여러분은 정말 중요한 공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의 사유방식은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법성게에서 말하고 있는 법성원융의 정신과 사유방식, 반야심경에서 말하고 있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정신과 사유방식이 바로 그 길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더 안타까운 것은 이것을 아침저녁으로, 또는 법회 때마다 염송하고 공부하는 불교인들마저 이러한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수행의 삶, 보살의 삶, 자비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대립과 갈등의 상황은 자신을 성장시키는 수행의 장입니다. 그런데 그런 대립과 갈등의 상황이 오면 불교인이라고 해서 별로 다르지 않더라구요.(웃음) 물론 쉬운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불교인이라면 그렇게 해봐야겠다는 자세가 기본적으로는 되어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이 좀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정국과 관련된 이야기를 했을까요, 반야심경 공부를 했을까요? 둘 다죠? 바로 그런 것입니다. 반야심경을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과 현실이 따라오고, 삶과 현실에서는 자연스럽게 반야심경의 내용이 따라오게 되는 것이 공부가 무르익는 것이고 평화로 가는 길인 것입니다.
자, 지금부터라도 그렇게 마음에 새기고 반야심경 공부를 해보겠습니다.
지금까지 반야심경의 제목을 <참 지혜로 실천하는 가르침의 경>이라고 하자고 했지요? 그런데 요즘은 조금 다르게 풀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울에서도 <불한당모임>에서 반야심경 공부를 하는데, 거기서 이런저런 것들을 다루다 보니, 반야심경의 본뜻을 더 잘 드러나게 하려면, 제목을 <참자유로 나아가는 참지혜의 길>이라고 푸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째 이유는 반야심경은 우리 삶이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경전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참자유로 나아가는 참지혜의 길>이라고 했을 때,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마음을 내게 하는데 훨씬 더 좋을 것 같아서입니다.
그래서 이미 배워온 내용에서도 그런 뜻에 맞게 몇 가지 표현을 바꾼 것이 있습니다.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읽어보겠습니다.
‘관자재보살’은 ‘지금 여기 자유자재로 관찰 사유하는 참사람 있네.’로 풀었습니다.
‘그는 깊은 지혜로 실천할 때’라고 했었는데 ‘깊은 지혜’는 ‘참지혜’로, ‘일체고통에서 벗어났네’는 ‘참자유의 삶으로 나아가네’로 풀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지금 여기 자유자재로 관찰 사유하는 참사람 있네.
그는 참지혜로 실천할 때
인연의 어울림으로 이루어진 다섯 무더기 모두 있지만
실제 비어있음을 잘 이해하여
참자유의 삶으로 나아가네.
참지혜의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 사라지여’
그 다음은 그대로입니다. ‘그대 몸이 실제 비어있음과 다르지 않고 비어있음 그대로 그대 몸과 다르지 않으며’ 이것은 색불이공 공불이색을 푼 것이죠. ‘그대 몸 그대로 비어있음이며 비어있음 그대로 그대 몸이니’ 이것은 색즉시공 공즉시색입니다. ‘느낌도 생각도 의지도 분별도 그러하네.’
그 다음에 ‘사리자여, 모든 존재의 비어있는 참모습엔 그대가 생각하는 태어남도 소멸함도 더러움도 깨끗함도 늘어남도 줄어듦도 본래 없네.’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을 그렇게 푼 것입니다. 공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뭐야? 그러니까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이야, 이렇게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이라는 말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뭐냐 했을 때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이라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할 대목이 이 부분입니다.
다시 전체를 한 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참자유로 나아가는 참지혜의 길.
지금 여기 자유자재로 관찰 사유하는 참사람 있네.
그는 참지혜로 실천할 때
인연의 어울림으로 이루어진 다섯 무더기 모두 있지만
실제 비어있음을 잘 이해하여
참자유의 삶으로 나아가네.
참지혜의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 사라지여’
그대 몸 그대로 실제 비어있음과 다르지 않고
비어있음 그대로 그대 몸과 다르지 않으며
그대 몸 그대로 비어있음이며 비어있음 그대로 그대 몸이니
느낌도 생각도 분별도 의지도 그러하네.’
통틀어 인연의 어울림으로 이루어진 다섯 무더기, 즉 오온(색수상행식)이 그러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사리자여, 모든 존재의 비어있는 참모습엔
그대가 생각하는 태어남도 소멸함도 더러움도 깨끗함도
늘어남도 줄어듦도 본래 없네.
이것이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이 대목입니다. 어쩌면 반야심경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은 이 내용이 전부입니다. ‘오온’, 지금 여기 나는, 지금 여기, 자기 자신은, 지금 여기 내 몸과 마음은, 이런 이야기입니다. 내 몸과 마음을 오온이라고 표현하는 것이죠. 지금 여기 내 몸과 마음은 그 실상이 어떠한가. 그 참모습이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면 그 삶은 자유로워진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이 사실을 잘 이해하고 살면 우리가 겪고 있는 고난과 액난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고난과 액난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 사실을 잘 이해하고 살면 불편한 현실이지만 편안할 수 있고 또 속박당하는 현실이지만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오늘의 우리 문제에 적용하면, 즉 이 이치대로 하게 된다면 오늘의 정국이 가지고 있는 불안으로부터 편안할 수 있는 길,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또는 그 길을 찾아낼 수 있다, 그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경전 내용을 실제 부닥치고 있는 현실 문제와 연결시켜보면 사실 대단히 활달한 길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경전의 언어를 실제 삶의 문제에 바로 적용시켜 해석하거나 다루지 못하다 보니 늘 삶의 문제와 관계없이 다른 것을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오늘은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에 대해 공부해보죠.
먼저, 불생불멸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생(生)과 멸(滅)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생(生)과 사(死)입니다. 지금 나의 생사(生死), 지금 너의 생사, 우리의 생사를 말하죠.
그러면, 한 번 생각해봅시다.
생(生)은 좋은 건가요, 나쁜 건가요? 다들 살고 싶어 하죠? 생(生)은 좋은 거라고 해서 태어나면 축하하고 그런 거잖아요. 그러면, 죽음은 나에게 좋은 거예요, 나쁜 거예요? 죽으면 우리가 뭐하죠? 곡(哭) 합니다. 태어나면 축하하고 죽으면 괴로워하고 슬퍼합니다. 왜 그렇게 하겠어요? 생은 좋고 죽음은 나쁜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거잖아요. 그런데 반야심경에서는 ‘그런 거 없어.’라고 하는 겁니다. ‘네가 좋아하는 생? 그런 것은 없어. 네가 싫어하는 죽음? 그런 것도 없어’라고 합니다.
만약 내가 생이 정말 좋은 것으로 알고 거기에 지극한 애착을 갖고 있는데, 누군가가 그것을 잘 몰라서 그렇지 실제는 집착할 만큼 좋아할 만한 생이란 본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래도 애착할까요? 그럴 리가 없죠. 생이 좋은 것이라고 알고 믿기 때문에 생에 대한 애착을 갖게 되는 거죠. 애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죽는다고 하면 당연히 두렵고 괴롭겠죠. 그런데 그러한 앎과 믿음이 잘못된 것이다, 실제로는 좋다고 생각할만한 그런 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생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죠.
반대로 죽음의 문제는 어떨까요? 마찬가지죠. 만약 내가 죽음은 괴롭고 나쁜 것으로 알고 그에 대해 무서워 벌벌 떨고 있는데, 누군가가 그것은 잘 몰라서 그렇지, 실제는 벌벌 떨며 싫어해야 할 죽음이란 본래 없다고 한다면 그래도 죽음을 미워하고 싫어할까요? 그렇지 않죠. 죽음은 나쁜 것이라고 알고 믿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는 거죠. 그런데 그런 앎과 믿음이 잘못된 것이다, 실제로는 싫어할만한 그런 죽음이 본래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죠. 죽음의 참모습은 있는 그대로 잘 알고 받아들이면 굳이 죽음을 싫어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되죠.
그렇기 때문에 실제 지금 여기 나의 참모습, 참 내용이 ‘불생불멸’임을 잘 이해하면 그때부터 우리는 생에 대한 애착으로부터도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됩니다. 어째서 그렇게 될까요? 생(生)도 공(空)이요, 멸(滅)도 공(空)이기 때문입니다.
공(空)이라는 말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알고 믿는 것처럼 실제로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생은 정말 좋은 것’이라고 그렇게 알고 믿고 있기 때문에 애착을 갖고 있는데, ‘실제로는 그런 것은 없어. 애착을 가져야 할 생,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아. 잘못 알고 잘못 믿어서 애착하고 있을 뿐’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있는 사실은 내가 알고 믿는 것처럼 있지 않다는 것을 공이라고 표현합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은, 공(空)이라는 말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내용을 설명한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만 잘 이해하게 되면 반야심경은 다 공부한 것입니다. 뒤의 것은 그 부연설명입니다. 모든 것이 공(空)하다는 사실을 정말 제대로 잘 이해하고 삶에 적용시키면 우리는 생에 대한 애착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있고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것을 법성게에서는 뭐라고 했습니까.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相共和)라고 했죠. 기억하십니까? 생사와 열반이 늘 함께 있다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생사(生死)는 버려야하는 것이고, 열반은 우리가 취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생사는 고통을 상징하는 말이고, 열반은 평화와 행복을 상징하는 말이니까요. 일반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법성게에서는 버려야 할 생사가 따로 있고 취해야 할 열반이 따로 있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기불교의 사유방식에도 이와 같은 사고방식이 있긴 한데 그것이 잘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승불교로 오면서 붓다가 뜻하신 사유방식이 훨씬 더 깊어지고 풍부해진 겁니다. 실제를 더 잘 표현한 말이 생사와 열반이 늘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바다와 파도처럼 또는 손의 손등과 손바닥처럼 말이죠. 생과 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과 사도 한 손의 손등과 손바닥처럼 서로 연결되고 서로 의지해 있습니다.
자, 우리 손을 놓고 생각해봅시다. ‘나는 손바닥은 죽어도 싫어. 손등만 좋아.’라거나 ‘나는 손등이 좋아. 손바닥은 죽어도 싫어.’ 하는 것이 맞겠습니까, 안 맞겠습니까? 안맞죠. 정상입니까, 비정상입니까? 비정상입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으로 손의 문제를 다루면 제대로 다루어지겠습니까?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겠죠? 우리의 손은 손바닥과 손등이라고 말로는 구분할 수 있지만, 실제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취하고 어느 하나를 버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만약에 생사와 열반, 또는 생과 사의 관계도 마치 손등과 손바닥처럼 함께 있는 것이고, 그래서 어느 하나를 버리고 어느 하나를 취할 수 없는 관계라면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단순히 좋다거나 싫다거나 하는 관점으로 바라보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렇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상황에 맞게 잘 쓰고 잘 활용해야 하는 것이죠.
손을 사용한다고 하는 것도 손바닥으로 써야 할 때는 손바닥으로 쓰고 손등으로 써야 할 때는 손등으로 써야 합니다. 주먹으로 써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손을 통해서 해내는 일들이 좋겠습니까, 안 좋겠습니까? 나한테도 좋고 너한테도 좋고 우리한테도 좋을 수 있죠. 그런데 손바닥으로 써야 할 때에 “싫어. 나는 손등이 좋아.”라면서 손등으로 쓴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일이 엉망이 되겠죠. 너한테도 안 좋고 나한테도 안 좋고 우리 모두에게도 안 좋을 거예요.
생사문제도 이와 같습니다. 불생불멸이라는 말을 통해 반야심경에서 알려주고자 했던 내용대로 잘 파악하고 이해하게 되면 나머지 ‘불구부정 부증불감’도 자연히 다 풀리게 되어 있어요. 또 그 뒤의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 안계․이계․비계․설계․신계․ 의계도 쫙 풀리게 되어 있습니다. 육근, 육경, 육식, 이 세 가지잖아요. 이것도 앞의 불생불멸이 풀리면 다 풀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조금 어려운 부분이 나옵니다.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
알지 못함도 알지 못함이 사라짐도,
늙고 죽음도 늙고 죽음이 사라짐도,
괴로움도, 원인도, 소멸도 소멸의 길도, 지혜도 얻음도 없네.
이 부분이 좀 어렵죠. 초기불교 교리들이 전부 나열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네 가지 거룩한 진리’로 알고 있는 ‘고집멸도’도 없고, 무명도 없고, 노사도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늘 지혜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지혜도 없다고 하고, 우리는 늘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얻을 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좀 어렵지요?
또 잊어버리긴 하겠지만(웃음) 그래도 콩나물시루에 물주는 효과를 기대하면서 ‘불생불멸’ 부분부터 다시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실제 이 내용을 가지고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과 여러 차례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그중 한 사람은 가족과 함께 이곳 산내로 귀농한 사람이었는데, 종교는 기독교였습니다. 산내에 살다 보니 실상사에 왔다갔다하면서 불교를 알게 되었어요. 중간에 잠깐 낫는 듯 했는데 암이 다시 재발하여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나이가 사십대 중반 정도였어요. 죽을 날을 받아놓고 있었는데 병문안을 가게 되었어요. 법회에 오기도 하고, 생명평화결사에서 일을 하기도 해서 개인적으로 오가며 얼굴 알고 인사 나누고 그런 정도였지 깊은 왕래는 없었어요. 그런 인연으로 아는 친구들이 문병 가는데 같이 가자고 해서 갔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오늘 하고 있는 이 이야기를 그 사람이 처해있는 실제 상황, 즉 죽음에 직면해있는 문제와 연결시켜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오늘 했던 이야기를 좀 더 편안하게 실제 상황, 죽음에 직면해 있는 죽음의 문제와 연결시켜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는데 실제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그런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무엇이 있을까? 변화만 있을 뿐이다.”라는 거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죽는 것 하고 변화하는 것하고 같은가요, 다른가요? (…)
여러분은 변화한다는 것을 가지고 크게 두려워하나요? 물론 변화에 대한 두려움도 있긴 하겠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하고는 천지차이겠지요. 어때요? 변화하는 것 가지고 크게 두려워하지는 않잖아요.
“변화가 있을 뿐,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며가며 공부한 것도 있을 것이고, 죽음에 직면해서 죽음에 대한 생각도 많이 해봤겠지요. 그 사람은 불교의 이런 부분을 굉장히 잘 받아들였어요. 불교를 신앙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잘 이해하고 잘 받아들였어요. 물론 그렇다고 생물학적 고통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죠.
같이 간 친구들이 ‘너 뭐 먹고 싶냐, 어차피 죽을 거 먹고 싶은 거나 먹고 죽자.’ 그랬더니 먹고 싶은 것을 이야기 했어요. 그래서 병원에서는 못하게 하지만 “내일 모레 죽을 건데 뭘 못 하겠냐” 하면서 포도주 한 병하고 먹고 싶다는 것을 사왔지요. 그래서 병실에서 몰래 생을 멋있게 정리하는 파티를 했어요.
죽음을 앞둔 말기암 환자가 먹고 싶다고 한들 얼마나 먹겠어요. 그래도 어쨌든 먹고 싶은 음식과 마시고 싶은 포도주로 유쾌한 만찬을 한 겁니다. 그때 그 사람이 그랬습니다. “그동안 만나 함께 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고맙다. 덕분에 잘 살았다. 나 이제 가마.” 보내는 사람들도 “그래, 우리 함께 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애썼어. 잘 가.” 이런 시간이었죠. 아주 밝고 유쾌하게 마무리하고 며칠 있다가 죽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삶을 이런 정도로 마무리 할 수 있다면 괜찮지 않은가요? 생물학적으로 아픈 것은 부처님도 어쩔 수 없어요. 물론 그런 아픔을 겪지 않고 생을 마무리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그것은 사람마다 다르니까요. 대단한 진통을 겪으면서 마무리하는 사람도 있고 정말 수월하게 마무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 사람은 아팠고 젊은 나이에 죽었지만, 반야심경이나 법성게에서 이야기하듯이 죽음에 대해 나름대로 잘 이해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갈 수 있었던 거죠.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불안감이 다 없어진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 잘못 이해함으로써 생긴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는 많이 벗어날 수 있었다는 거죠. 벗어난 그 자리에 변화에 대한 생각이 자리하는 거죠. 변화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대단히 설레는 말 아닙니까? 새로운 미래, 또 다른 미래에 대한 이야기잖아요. ‘끝없는 변화가 있을 뿐이지 끝으로서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을 잘 이해하고 나름대로 죽음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니까 심리적으로 많이 안정되어서 몸은 아프지만 마음은 편안하게 삶을 마감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생사를 어떻게 파악하고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삶도, 죽음에 대한 자세도 많이 달라집니다. 죽음에 대해서도 평소에 학습하고 준비하면 좋습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가급적 안 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은 좋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삶을 제대로 산다는 말 속에는 삶과 죽음을 제대로 알고 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삶은 아는데 죽음은 모른다.’ 이것은 말이 안 됩니다. 삶을 제대로 알면 죽음도 알게 되어 있거든요. ‘죽음은 아는데 삶은 잘 모른다.’ 이것도 말이 안 되죠. 죽음을 알면 삶도 제대로 알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삶은 아는데 죽음은 모른다.”고 하면, 이것은 ‘삶을 모른다.’는 이야기와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가 “죽음은 아는데 삶을 모른다.”고 하면, 이것은 “죽음을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기 때문이죠. 손의 손등과 손바닥, 또는 바다의 바닷물과 파도 같은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바다는 모르는데 파도는 알겠어.”라거나 “파도는 모르는데 바다는 알겠어.”라고 한다면, 이것이 제대로 된 앎일까요?
그래서 생사에 대한 문제를 잘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 우리 삶을 정말 자유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삶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삶이 편안해지지 않겠습니까?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삶이 편안해지지 않겠습니까?
생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로부터 편안해진 것을 열반이라고 하고, 자유로워진 것을 해탈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불교를 해탈과 열반의 종교라고 합니다. 편안해졌다는 이야기는 자유로워졌다는 이야기고 자유로워졌다는 이야기는 편안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 불자들이 가장 많이 외우는 반야심경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 반야심경을 외우면서 이 경전이 실제 여러분의 삶에 쓸모 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아니면 이것을 열심히 외우면 복 받는다니까, 부처님의 가피가 크다고 하니까 그냥 열심히 외우십니까? 주로 우리는 그렇게 신앙적으로만 반야심경을 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가피는, 진짜 영험은, 진짜 복은 뭘까요?
“생명의 참 모습은 불생불멸이고, 나의 참모습은 불생불멸이다.”
이것을 잘 이해함으로써 생에 대한 애착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고 편안해지고,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도 편안해지고 자유로워지는 것 - 이것이 진짜 가피입니다. 이것이 진짜 복입니다. 이것이 진짜 공덕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삶의 애착으로부터도 편안해지고 자유로워지고, 죽음에 직면해서 죽음의 공포로부터도 자유로워지고 편안해질 수 있다면, 그 이상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삶이 자유롭고 평화롭다. 죽음도 자유롭고 평화롭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요? 그 이상 더 바랄 게 없지 않겠습니까? 그보다 더한 기적도, 신비도, 가피도, 영험도, 공덕도, 복도 없습니다.
부처님을 가장 신비로운 자, 최고의 불가사의한 자, 최고로 복 받은 자, 최고로 거룩한 자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부처님은 모든 삶으로부터 자유롭고 편안하신 분입니다. 죽음으로부터도 자유롭고 편안하신 분입니다. 고로 부처님은 신비한 존재, 불가사의한 존재, 기적적인 존재, 최고의 공덕을 지닌 존재, 복 받은 존재, 최고로 행복한 존재라고 하는 겁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엉뚱한 것을 찾고 있는 겁니다.
오늘 나누었던 이런 내용을 염두에 두면서 내용을 거듭거듭 읽고 음미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아마 삶에서 부딪히는 여러 문제로부터도 자유롭고 편안해지고,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도 자유롭고 편안해지는 효험을 실제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각자 자신의 삶에서 그런 효험이 나타날 수 있도록 정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016. 11. 20 _ 11월 보현법회
<삼귀의와 반야심경>강의 (6강)
삶과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
도법스님 (실상사 회주)
(신도들 : 요즘 돌아가는 정국 이야기 좀 해주세요.)
정국이야기를 하라고 하는데 그 이야기는 다 알고 있잖아요.
사실 반야심경에 해답이 다 있기도 하고, 우리가 공부했던 법성게에도 해답이 다 있습니다. 해답이 없어서 안 가거나 못 가는 것이 아니죠. 다만 해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길을 가지 않는 것이죠. 길은 언제나 환하게 열려 있습니다.
그런데 왜 문제가 풀리지 않는가. 하나는 그 길을 잘 몰라서 안 가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그 길이 보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이해관계에 따라 계산 하느라고 못 가는 경우입니다. 길이 없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은 대통령대로, 국민은 국민대로, 여당은 여당대로, 야당은 야당대로 다 계산이 다른 거죠. 문제는 거기에 있습니다.
반야심경에서는 그 길을 뭐라고 표현하고 있는가. 한 마디로 공(空)의 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공의 길을 가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고 말합니다. 그 길을 원효는 ‘일심동체의 길’로, 의상은 ‘원융의 길’로 표현했습니다. 불교에서 해답으로 제시하고 있는 개념이 여러 가지가 있어요. 본래부처라는 개념도 그렇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도 그렇습니다. 그 말 속에 다 해답이 있습니다.
길은 이렇게 이미 환하게 열려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길을 가야할 사람들이 무지하거나 아니면 계산이 각각 다른 거죠. 계산이 각각 다르다 보니까 함께 가야하는 길인데 함께 안 가게 되는 거죠.
조금 전에 같이 세월호 기도를 했습니다. 우리 사회가 세월호 문제를 제대로 다루었다면 정국이 오늘과 같이 심각해졌을까요? 세월호 문제를 제대로 다루었다면 오늘의 이 정국은 발생하지 않았으리라고 봅니다. 또는 이전부터 이런 정국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미리 제동이 걸리거나, 또는 이런 상황까지 안 가도록 대책이 만들어졌겠죠.
그런데 세월호 문제 역시 공의 정신으로, 또는 법성원융의 정신으로, 또는 본래부처의 정신으로, 천상천하유아독존의 정신으로 다루지 못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누구 때문이든 결국 그것이 제대로 안 다루어지니까 오늘의 이런 상황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오늘의 상황이 또 제대로 안 다루어지면 앞으로도 결국 이런 문제는 계속 되거나 더 악화될 거라 생각됩니다.
지금 가만히 보십시오. 현 정국에서 온 국민이 ‘하야’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야’라는 말로 우리의 뜻을,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자기의 뜻을 표현했습니다. 여기까지가 국민이 할 수 있는 일이죠. 앞으로 더 해도 그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거예요. 그 다음은 정부와 정치권이 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야라는 말을 놓고도 해석들을 달리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대통령은 대통령대로 해석을 다르게 하고 있고 정부와 여당은 그들대로, 야당은 야당대로, 또 이 당은 이 당대로, 저 당은 저 당대로 ‘하야’라는 말에 대한 해석을 다르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국민들이 말하는 ‘하야’라는 말 속에 담겨있는 내용이 뭐겠습니까? 하야라는 말, 그것이 전부이겠습니까? 그 말 속에 담겨있는 알맹이를 곰곰이 짚어서 정리해 보면 한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좋은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번 기회에 좋은 나라가 되도록 하자. 두 번째는 밝은 미래가 보였으면 좋겠다. 아, 이제야 괜찮아지겠구나. 이렇게 가면 앞으로 우리 아이들이 살만하겠구나. 밝은 미래가 보이길 바란 것입니다. 그 다음 세 번째는 뭐겠어요? 좋은 나라를 만들고, 밝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보일 수 있도록 하려면 뭘 해야 하겠습니까? 좋은 정부를 만들어 내야 합니다.
그렇다면 좋은 정부를 어떻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야당이 집권하면 좋은 정부가 될 것 같습니까? 아니면 대통령이나 여당이 끌고 가면 좋은 정부가 될 것 같습니까? 그 누구도 정말로 국민들이 원하는 정부를 만들어 낼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좋은 정부를 만들어 내려면 할 수 있는 일이 뭐겠어요? 최선책은 사회적 합의를 통해서 함께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쪽저쪽이 모두 함께 하는 국민의 뜻을 모아서 함께 만들어 내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현재는 그런 움직임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차선책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야권과 시민사회가 좋은 정부를 탄생시키기 위해서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으는 것입니다. 누가, 어느 당이 집권하느냐가 아니라 정말로 야권과 시민사회가 합의과정을 통해 좋은 정부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오늘 야권 후보들이 모여서 논의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던데 거기서 뭘 만들어 낼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현재 우리 사회가 할 것은 다 했다고 봅니다. 문제제기도 할 만큼 했고, 분노도 표현할 만큼 다 표현했고, 비난도 할 만큼 했고, 매도도 그만큼 했으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앞으로 더 한다 하더라도 이 이상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검찰이 다 밝혀낸다 한들 지금 이야기 되는 것 이상을 넘어설 수 있겠습니까? 저는 넘어설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명료하지 않은 것들을 명확하게 확인하는 수준인 거죠. 지금 나온 이야기들, 그 이상 나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과제는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것입니다. 이미 다 드러난 것들을 어떻게 전화위복이 될 수 있도록, 그래서 국민들의 바람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내는 것입니다. 만약 대통령과 정부가 못한다면 당연히 야권과 시민사회가 해야겠죠. 오늘 기대를 해 봐야죠. 그러니까 제가 볼 때는 길이 없어서 못 가거나 해답이 없어서 못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휴휴당에 삽니다. 논 한 가운데 지어진 집이죠. 그러다 보니 농사짓는 밭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한 쪽은 호박밭이고 한 쪽은 배추밭인데 호박도 싱싱하게 잘 자라고 있고 배추도 잘 자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된서리가 내렸어요. 서리가 내린 밭은 똑같은 공간, 똑같은 시간, 서리가 내렸다고 하는 똑같은 조건입니다. 그런데 하늘과 땅처럼 다른 것이 있어요. 뭐가 다를 것 같습니까? 농사짓는 분들은 잘 알 것 같은데요.
된서리가 내렸는데, 배추는 더 싱싱하게 자라고 있고 호박은 풀썩 주저앉았습니다. 그러니까 호박의 살림살이는 끝난 거예요. 어쩌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직면하고 있는 정국도 그런 상황이라는 거죠. 그런데 누구한테는 괜찮고 누구한테는 안 괜찮은 거예요. 그것은 왜 그럴까요? 똑같은 조건인데. 똑같은 시간, 똑같은 장소에 서리가 내렸는데 왜 그럴까요?
그것은 상황에 서있는 주체들의 실력과 역량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배추는 된서리가 내리는 상황을 잘 소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이고, 호박은 그러한 능력이 없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이 상황을 올바로 해석해내고, 얽힌 타래들을 풀어내고, 어떻게 더 좋은 방향과 길을 찾고 만들어 낼 것인가 하는 것들 역시 우리들의 실력과 능력, 그리고 노력에 달린 거겠죠.
물론 대통령이 해내면 제일 좋겠죠. 대통령과 정부와 여당이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길이 안 보이는 게 현실입니다. 길이 될 만한 몇 가지를 던지기도 했지만, 그것이 길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내는 실력까지는 안 되는 거죠. 야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야가 다 안 되는 거죠. 책임총리, 거국내각 이야기까지 나왔습니다. 대통령도 국회에서 합의해서 총리를 추천하면 임명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런 것들은 사실 다 해볼 만한 일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제안들이 성사될 수 없는 것은 왜 그럴까요? 대통령도 여당도 야당도 공(空)이라는 입장에서 이 해법을 제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각축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한 손에 무기를 감추고 화해하자고 손을 내밀면 누가 그 손을 잡겠습니까.
게다가 국민들의 현재 정서는 대통령과 정부, 여당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해 있습니다. 야당에 대해서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상태입니다. 그러니 “그 정도 가지고는 안 돼. 무릎 꿇어. 손들고 나와.” 이런 거잖아요. 저는 그런 대중정서에 대해 충분히 공감합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무릎 꿇고 두 손 들고 나오면 문제는 다 풀리는 것일까요? 어떨 것 같습니까? 그것만이 만사형통일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길이 열릴 수도 있지만 상황이 더 나빠질 수도 있다고 봅니다. 무릎 꿇고 나왔을 때 어떻게 할지에 대한 그림이 아직 잘 안 보이는 거예요.
현재 대통령은 시원스럽게 정리하지 못하고 뭔가를 조금씩 내놓습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대통령이 자신의 잘못에 대해 어떻게든 면책을 해보려는 꼼수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국민들이 얻어낸 성과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내놓은 것 중에 정말 자신이 있고 실력이 있다면 해볼 만한 꺼리가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야당도 시민사회도 그것을 확 낚아채서 풀어갈 만한 실력이 없다보니까 해볼 만한 것을 해보는 쪽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대통령과 정부 측에서는 또 다른 궁리를 하고 있고, 그러면서 상황은 더 어려워지고… 현재는 이런 상황인 거죠.
야권도 실력과 능력이 있다면, 자신감을 갖고 국민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국민여러분, 저희도 책임이 큽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우리가 알아서 잘 하겠습니다. 촛불시위 더 안 해도 충분히 의사표시 되었습니다. 국민의 뜻이 분명하게 확인됐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잘 마무리하겠습니다.”라고. 그런데 전부 촛불만 계속 타오르길 바라고 있어요. 십만에서 오십만으로, 오십만에서 백만으로… 야권에서는 촛불이 계속 타오르길 바라고 촛불 눈치만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지금 이 정국을 보기엔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뭘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다만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많은 길이 있을 수 있는데, 우리가 그 길을 잘 닦아가는 실력과 역량이 부족한 것이 현실인 것 같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무엇인가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통령과 정부도, 여당도 야당도, 어느 누구도 다 실력이 부족한 것은 맞지만, 우리가 그것을 탓하고만 있는 것도 길은 아니잖아요. 실력도 주체적 역량도 부족한 이 현실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모색해봐야겠죠. 제 생각은 거기까지이고 그 다음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기 때문에 저도 사실 고민입니다. 종교계의 역할이 있을 수 있는데 종교계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고민합니다. 다른 곳은 다 나왔죠. 시민사회도, 민중들도 다 나온 것 같습니다. 그 다음은 정치권인데…
하나는 정치권으로 하여금 뭔가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 종교계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다른 하나는 국민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정치권으로 하여금 제대로 하도록 하는 뭔가가 나올 수 있을까? 아니면 정치권 스스로가 잘 찾아갈까? 이렇게 세 가지 정도를 생각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정치권 스스로가 잘 찾아갔으면 좋겠다고 하는 기대, 다른 하나는 시민사회가 새로운 국면을 만들어서 정치권으로 하여금 길을 잘 찾아가도록 해 주는 것, 이것이 다 안 되면 종교계가 좀 나서서라도 그런 것을 해볼 수 있도록 하는 것. 이렇게 세 가지 정도를 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번 상황을 보면서 촛불도 하야요구도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기도 하고 함께 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이 참여하는 이유는 각각이었겠지만 새로운 나라에 대한 바람은 같았다고 봅니다. 그래서 함께 길을 찾아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런 과정에서 우리 마음속에 내편에 대한 애정만 있고 상대편을 포함한 사람에 대한 애정이 다 깨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 이유가 있는 것이기에 분노하는 사람을 향해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안타까움은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어떤 사람을 향해서 분노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증오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 분노의 바탕에, 또는 증오의 바탕에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애정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분노하거나 증오하는 이유가 정당하다고 해서 나의 마음 바탕에 그 사람에 대한 애정마저 같이 무너지면, 결과적으로 자신을 파괴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저는 그것이 가장 마음에 걸리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세월호 문제와 지금의 정국문제는 거의 비슷한 내용이라고 봅니다. 누구를 탓할 수는 있지만, 누구를 탓하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누구를 탓하는 것을 넘어서야 길이 열립니다. 우리 삶이 대부분 그러한 것 같습니다. 누구를 탓하는 것까지는 잘 하는데 그 너머까지는 못가는 거죠. 그래서 중생의 삶이라고 하는 거겠죠.
제가 서울에 자주 왔다갔다 하고 화쟁위원장을 맡고 있다 보니 사람들이 논쟁하는 자리에 종종 가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주장과 비판이 탁월합니다. 굉장히 멋있게 주장하기도 하고, 대단히 탁월하게 비판하기도 합니다. 아주 놀라울 정도입니다. 그래서 배울 점도 많고 깨닫는 것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주장과 비판 이후 어떻게 할 것인가로 넘어가면 더 이상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결론은 대부분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야이든 사회적 합의 없이는 앞으로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회적 합의 없이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 없다고 하면서도 사회적 합의를 하는 쪽으로 접근해가는 능력은 매우 약합니다. 또는 말은 사회적 합의를 외치지만 실제로는 사회적 합의의 방향으로 접근하고 있지 않음도 많이 보게 됩니다. 대부분이 나와 내 편이 유리한 쪽으로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사회적 합의란 말은 나와 내 편만이 아니고 반대편 사람들과 같이 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반야심경의 논리로 보면 공(空)의 길, 달리 말하면 사심을 버리고 대의명분 또는 공심(公心)의 길을 가야 된다는 뜻입니다. 공의 길이 해답이야, 하고 말로는 배우고 또 배웠지만, 실제 삶에서는 그 연습이 안 되어있는 거죠. 실제 삶에서는 어쨌는가. 대립과 경쟁, 승리와 일등을 향해 달려온 것이 그간의 삶이었죠. 이쪽은 이쪽대로 저쪽은 저쪽대로 나와 우리 편이라고 하는 틀을 딱 붙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정교한 명분과 논리로 주장하고 비판합니다. 그런데 “그래서 그 다음엔 어떻게 할 건데?”라고 물으면 대답을 못하죠. 그리고는 또 ‘사회적 합의 없이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끝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여러분은 정말 중요한 공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의 사유방식은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법성게에서 말하고 있는 법성원융의 정신과 사유방식, 반야심경에서 말하고 있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정신과 사유방식이 바로 그 길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더 안타까운 것은 이것을 아침저녁으로, 또는 법회 때마다 염송하고 공부하는 불교인들마저 이러한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수행의 삶, 보살의 삶, 자비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 대립과 갈등의 상황은 자신을 성장시키는 수행의 장입니다. 그런데 그런 대립과 갈등의 상황이 오면 불교인이라고 해서 별로 다르지 않더라구요.(웃음) 물론 쉬운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불교인이라면 그렇게 해봐야겠다는 자세가 기본적으로는 되어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이 좀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정국과 관련된 이야기를 했을까요, 반야심경 공부를 했을까요? 둘 다죠? 바로 그런 것입니다. 반야심경을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과 현실이 따라오고, 삶과 현실에서는 자연스럽게 반야심경의 내용이 따라오게 되는 것이 공부가 무르익는 것이고 평화로 가는 길인 것입니다.
자, 지금부터라도 그렇게 마음에 새기고 반야심경 공부를 해보겠습니다.
지금까지 반야심경의 제목을 <참 지혜로 실천하는 가르침의 경>이라고 하자고 했지요? 그런데 요즘은 조금 다르게 풀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울에서도 <불한당모임>에서 반야심경 공부를 하는데, 거기서 이런저런 것들을 다루다 보니, 반야심경의 본뜻을 더 잘 드러나게 하려면, 제목을 <참자유로 나아가는 참지혜의 길>이라고 푸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째 이유는 반야심경은 우리 삶이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인도하는 경전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참자유로 나아가는 참지혜의 길>이라고 했을 때,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마음을 내게 하는데 훨씬 더 좋을 것 같아서입니다.
그래서 이미 배워온 내용에서도 그런 뜻에 맞게 몇 가지 표현을 바꾼 것이 있습니다.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읽어보겠습니다.
‘관자재보살’은 ‘지금 여기 자유자재로 관찰 사유하는 참사람 있네.’로 풀었습니다.
‘그는 깊은 지혜로 실천할 때’라고 했었는데 ‘깊은 지혜’는 ‘참지혜’로, ‘일체고통에서 벗어났네’는 ‘참자유의 삶으로 나아가네’로 풀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지금 여기 자유자재로 관찰 사유하는 참사람 있네.
그는 참지혜로 실천할 때
인연의 어울림으로 이루어진 다섯 무더기 모두 있지만
실제 비어있음을 잘 이해하여
참자유의 삶으로 나아가네.
참지혜의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 사라지여’
그 다음은 그대로입니다. ‘그대 몸이 실제 비어있음과 다르지 않고 비어있음 그대로 그대 몸과 다르지 않으며’ 이것은 색불이공 공불이색을 푼 것이죠. ‘그대 몸 그대로 비어있음이며 비어있음 그대로 그대 몸이니’ 이것은 색즉시공 공즉시색입니다. ‘느낌도 생각도 의지도 분별도 그러하네.’
그 다음에 ‘사리자여, 모든 존재의 비어있는 참모습엔 그대가 생각하는 태어남도 소멸함도 더러움도 깨끗함도 늘어남도 줄어듦도 본래 없네.’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을 그렇게 푼 것입니다. 공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뭐야? 그러니까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이야, 이렇게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이라는 말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뭐냐 했을 때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이라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할 대목이 이 부분입니다.
다시 전체를 한 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참자유로 나아가는 참지혜의 길.
지금 여기 자유자재로 관찰 사유하는 참사람 있네.
그는 참지혜로 실천할 때
인연의 어울림으로 이루어진 다섯 무더기 모두 있지만
실제 비어있음을 잘 이해하여
참자유의 삶으로 나아가네.
참지혜의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 사라지여’
그대 몸 그대로 실제 비어있음과 다르지 않고
비어있음 그대로 그대 몸과 다르지 않으며
그대 몸 그대로 비어있음이며 비어있음 그대로 그대 몸이니
느낌도 생각도 분별도 의지도 그러하네.’
통틀어 인연의 어울림으로 이루어진 다섯 무더기, 즉 오온(색수상행식)이 그러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사리자여, 모든 존재의 비어있는 참모습엔
그대가 생각하는 태어남도 소멸함도 더러움도 깨끗함도
늘어남도 줄어듦도 본래 없네.
이것이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이 대목입니다. 어쩌면 반야심경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은 이 내용이 전부입니다. ‘오온’, 지금 여기 나는, 지금 여기, 자기 자신은, 지금 여기 내 몸과 마음은, 이런 이야기입니다. 내 몸과 마음을 오온이라고 표현하는 것이죠. 지금 여기 내 몸과 마음은 그 실상이 어떠한가. 그 참모습이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면 그 삶은 자유로워진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이 사실을 잘 이해하고 살면 우리가 겪고 있는 고난과 액난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고난과 액난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 사실을 잘 이해하고 살면 불편한 현실이지만 편안할 수 있고 또 속박당하는 현실이지만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오늘의 우리 문제에 적용하면, 즉 이 이치대로 하게 된다면 오늘의 정국이 가지고 있는 불안으로부터 편안할 수 있는 길,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또는 그 길을 찾아낼 수 있다, 그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경전 내용을 실제 부닥치고 있는 현실 문제와 연결시켜보면 사실 대단히 활달한 길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경전의 언어를 실제 삶의 문제에 바로 적용시켜 해석하거나 다루지 못하다 보니 늘 삶의 문제와 관계없이 다른 것을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오늘은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에 대해 공부해보죠.
먼저, 불생불멸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생(生)과 멸(滅)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생(生)과 사(死)입니다. 지금 나의 생사(生死), 지금 너의 생사, 우리의 생사를 말하죠.
그러면, 한 번 생각해봅시다.
생(生)은 좋은 건가요, 나쁜 건가요? 다들 살고 싶어 하죠? 생(生)은 좋은 거라고 해서 태어나면 축하하고 그런 거잖아요. 그러면, 죽음은 나에게 좋은 거예요, 나쁜 거예요? 죽으면 우리가 뭐하죠? 곡(哭) 합니다. 태어나면 축하하고 죽으면 괴로워하고 슬퍼합니다. 왜 그렇게 하겠어요? 생은 좋고 죽음은 나쁜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거잖아요. 그런데 반야심경에서는 ‘그런 거 없어.’라고 하는 겁니다. ‘네가 좋아하는 생? 그런 것은 없어. 네가 싫어하는 죽음? 그런 것도 없어’라고 합니다.
만약 내가 생이 정말 좋은 것으로 알고 거기에 지극한 애착을 갖고 있는데, 누군가가 그것을 잘 몰라서 그렇지 실제는 집착할 만큼 좋아할 만한 생이란 본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래도 애착할까요? 그럴 리가 없죠. 생이 좋은 것이라고 알고 믿기 때문에 생에 대한 애착을 갖게 되는 거죠. 애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죽는다고 하면 당연히 두렵고 괴롭겠죠. 그런데 그러한 앎과 믿음이 잘못된 것이다, 실제로는 좋다고 생각할만한 그런 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생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죠.
반대로 죽음의 문제는 어떨까요? 마찬가지죠. 만약 내가 죽음은 괴롭고 나쁜 것으로 알고 그에 대해 무서워 벌벌 떨고 있는데, 누군가가 그것은 잘 몰라서 그렇지, 실제는 벌벌 떨며 싫어해야 할 죽음이란 본래 없다고 한다면 그래도 죽음을 미워하고 싫어할까요? 그렇지 않죠. 죽음은 나쁜 것이라고 알고 믿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는 거죠. 그런데 그런 앎과 믿음이 잘못된 것이다, 실제로는 싫어할만한 그런 죽음이 본래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죠. 죽음의 참모습은 있는 그대로 잘 알고 받아들이면 굳이 죽음을 싫어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되죠.
그렇기 때문에 실제 지금 여기 나의 참모습, 참 내용이 ‘불생불멸’임을 잘 이해하면 그때부터 우리는 생에 대한 애착으로부터도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됩니다. 어째서 그렇게 될까요? 생(生)도 공(空)이요, 멸(滅)도 공(空)이기 때문입니다.
공(空)이라는 말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알고 믿는 것처럼 실제로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생은 정말 좋은 것’이라고 그렇게 알고 믿고 있기 때문에 애착을 갖고 있는데, ‘실제로는 그런 것은 없어. 애착을 가져야 할 생,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아. 잘못 알고 잘못 믿어서 애착하고 있을 뿐’이라는 거죠. 그러니까 있는 사실은 내가 알고 믿는 것처럼 있지 않다는 것을 공이라고 표현합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은, 공(空)이라는 말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내용을 설명한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만 잘 이해하게 되면 반야심경은 다 공부한 것입니다. 뒤의 것은 그 부연설명입니다. 모든 것이 공(空)하다는 사실을 정말 제대로 잘 이해하고 삶에 적용시키면 우리는 생에 대한 애착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있고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것을 법성게에서는 뭐라고 했습니까.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相共和)라고 했죠. 기억하십니까? 생사와 열반이 늘 함께 있다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생사(生死)는 버려야하는 것이고, 열반은 우리가 취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생사는 고통을 상징하는 말이고, 열반은 평화와 행복을 상징하는 말이니까요. 일반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런데 법성게에서는 버려야 할 생사가 따로 있고 취해야 할 열반이 따로 있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기불교의 사유방식에도 이와 같은 사고방식이 있긴 한데 그것이 잘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승불교로 오면서 붓다가 뜻하신 사유방식이 훨씬 더 깊어지고 풍부해진 겁니다. 실제를 더 잘 표현한 말이 생사와 열반이 늘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바다와 파도처럼 또는 손의 손등과 손바닥처럼 말이죠. 생과 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과 사도 한 손의 손등과 손바닥처럼 서로 연결되고 서로 의지해 있습니다.
자, 우리 손을 놓고 생각해봅시다. ‘나는 손바닥은 죽어도 싫어. 손등만 좋아.’라거나 ‘나는 손등이 좋아. 손바닥은 죽어도 싫어.’ 하는 것이 맞겠습니까, 안 맞겠습니까? 안맞죠. 정상입니까, 비정상입니까? 비정상입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으로 손의 문제를 다루면 제대로 다루어지겠습니까?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겠죠? 우리의 손은 손바닥과 손등이라고 말로는 구분할 수 있지만, 실제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취하고 어느 하나를 버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만약에 생사와 열반, 또는 생과 사의 관계도 마치 손등과 손바닥처럼 함께 있는 것이고, 그래서 어느 하나를 버리고 어느 하나를 취할 수 없는 관계라면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단순히 좋다거나 싫다거나 하는 관점으로 바라보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렇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상황에 맞게 잘 쓰고 잘 활용해야 하는 것이죠.
손을 사용한다고 하는 것도 손바닥으로 써야 할 때는 손바닥으로 쓰고 손등으로 써야 할 때는 손등으로 써야 합니다. 주먹으로 써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하면 손을 통해서 해내는 일들이 좋겠습니까, 안 좋겠습니까? 나한테도 좋고 너한테도 좋고 우리한테도 좋을 수 있죠. 그런데 손바닥으로 써야 할 때에 “싫어. 나는 손등이 좋아.”라면서 손등으로 쓴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일이 엉망이 되겠죠. 너한테도 안 좋고 나한테도 안 좋고 우리 모두에게도 안 좋을 거예요.
생사문제도 이와 같습니다. 불생불멸이라는 말을 통해 반야심경에서 알려주고자 했던 내용대로 잘 파악하고 이해하게 되면 나머지 ‘불구부정 부증불감’도 자연히 다 풀리게 되어 있어요. 또 그 뒤의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 안계․이계․비계․설계․신계․ 의계도 쫙 풀리게 되어 있습니다. 육근, 육경, 육식, 이 세 가지잖아요. 이것도 앞의 불생불멸이 풀리면 다 풀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조금 어려운 부분이 나옵니다.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 亦無得
알지 못함도 알지 못함이 사라짐도,
늙고 죽음도 늙고 죽음이 사라짐도,
괴로움도, 원인도, 소멸도 소멸의 길도, 지혜도 얻음도 없네.
이 부분이 좀 어렵죠. 초기불교 교리들이 전부 나열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네 가지 거룩한 진리’로 알고 있는 ‘고집멸도’도 없고, 무명도 없고, 노사도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늘 지혜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지혜도 없다고 하고, 우리는 늘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얻을 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좀 어렵지요?
또 잊어버리긴 하겠지만(웃음) 그래도 콩나물시루에 물주는 효과를 기대하면서 ‘불생불멸’ 부분부터 다시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실제 이 내용을 가지고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과 여러 차례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그중 한 사람은 가족과 함께 이곳 산내로 귀농한 사람이었는데, 종교는 기독교였습니다. 산내에 살다 보니 실상사에 왔다갔다하면서 불교를 알게 되었어요. 중간에 잠깐 낫는 듯 했는데 암이 다시 재발하여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나이가 사십대 중반 정도였어요. 죽을 날을 받아놓고 있었는데 병문안을 가게 되었어요. 법회에 오기도 하고, 생명평화결사에서 일을 하기도 해서 개인적으로 오가며 얼굴 알고 인사 나누고 그런 정도였지 깊은 왕래는 없었어요. 그런 인연으로 아는 친구들이 문병 가는데 같이 가자고 해서 갔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오늘 하고 있는 이 이야기를 그 사람이 처해있는 실제 상황, 즉 죽음에 직면해있는 문제와 연결시켜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오늘 했던 이야기를 좀 더 편안하게 실제 상황, 죽음에 직면해 있는 죽음의 문제와 연결시켜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는데 실제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그런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무엇이 있을까? 변화만 있을 뿐이다.”라는 거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죽는 것 하고 변화하는 것하고 같은가요, 다른가요? (…)
여러분은 변화한다는 것을 가지고 크게 두려워하나요? 물론 변화에 대한 두려움도 있긴 하겠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하고는 천지차이겠지요. 어때요? 변화하는 것 가지고 크게 두려워하지는 않잖아요.
“변화가 있을 뿐,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며가며 공부한 것도 있을 것이고, 죽음에 직면해서 죽음에 대한 생각도 많이 해봤겠지요. 그 사람은 불교의 이런 부분을 굉장히 잘 받아들였어요. 불교를 신앙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잘 이해하고 잘 받아들였어요. 물론 그렇다고 생물학적 고통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죠.
같이 간 친구들이 ‘너 뭐 먹고 싶냐, 어차피 죽을 거 먹고 싶은 거나 먹고 죽자.’ 그랬더니 먹고 싶은 것을 이야기 했어요. 그래서 병원에서는 못하게 하지만 “내일 모레 죽을 건데 뭘 못 하겠냐” 하면서 포도주 한 병하고 먹고 싶다는 것을 사왔지요. 그래서 병실에서 몰래 생을 멋있게 정리하는 파티를 했어요.
죽음을 앞둔 말기암 환자가 먹고 싶다고 한들 얼마나 먹겠어요. 그래도 어쨌든 먹고 싶은 음식과 마시고 싶은 포도주로 유쾌한 만찬을 한 겁니다. 그때 그 사람이 그랬습니다. “그동안 만나 함께 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고맙다. 덕분에 잘 살았다. 나 이제 가마.” 보내는 사람들도 “그래, 우리 함께 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애썼어. 잘 가.” 이런 시간이었죠. 아주 밝고 유쾌하게 마무리하고 며칠 있다가 죽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삶을 이런 정도로 마무리 할 수 있다면 괜찮지 않은가요? 생물학적으로 아픈 것은 부처님도 어쩔 수 없어요. 물론 그런 아픔을 겪지 않고 생을 마무리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그것은 사람마다 다르니까요. 대단한 진통을 겪으면서 마무리하는 사람도 있고 정말 수월하게 마무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쨌든 그 사람은 아팠고 젊은 나이에 죽었지만, 반야심경이나 법성게에서 이야기하듯이 죽음에 대해 나름대로 잘 이해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갈 수 있었던 거죠.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불안감이 다 없어진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 잘못 이해함으로써 생긴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는 많이 벗어날 수 있었다는 거죠. 벗어난 그 자리에 변화에 대한 생각이 자리하는 거죠. 변화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대단히 설레는 말 아닙니까? 새로운 미래, 또 다른 미래에 대한 이야기잖아요. ‘끝없는 변화가 있을 뿐이지 끝으로서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을 잘 이해하고 나름대로 죽음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니까 심리적으로 많이 안정되어서 몸은 아프지만 마음은 편안하게 삶을 마감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생사를 어떻게 파악하고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삶도, 죽음에 대한 자세도 많이 달라집니다. 죽음에 대해서도 평소에 학습하고 준비하면 좋습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가급적 안 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은 좋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삶을 제대로 산다는 말 속에는 삶과 죽음을 제대로 알고 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삶은 아는데 죽음은 모른다.’ 이것은 말이 안 됩니다. 삶을 제대로 알면 죽음도 알게 되어 있거든요. ‘죽음은 아는데 삶은 잘 모른다.’ 이것도 말이 안 되죠. 죽음을 알면 삶도 제대로 알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삶은 아는데 죽음은 모른다.”고 하면, 이것은 ‘삶을 모른다.’는 이야기와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가 “죽음은 아는데 삶을 모른다.”고 하면, 이것은 “죽음을 모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기 때문이죠. 손의 손등과 손바닥, 또는 바다의 바닷물과 파도 같은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바다는 모르는데 파도는 알겠어.”라거나 “파도는 모르는데 바다는 알겠어.”라고 한다면, 이것이 제대로 된 앎일까요?
그래서 생사에 대한 문제를 잘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 우리 삶을 정말 자유롭게 한다는 것입니다. 삶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삶이 편안해지지 않겠습니까?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삶이 편안해지지 않겠습니까?
생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로부터 편안해진 것을 열반이라고 하고, 자유로워진 것을 해탈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불교를 해탈과 열반의 종교라고 합니다. 편안해졌다는 이야기는 자유로워졌다는 이야기고 자유로워졌다는 이야기는 편안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 불자들이 가장 많이 외우는 반야심경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 반야심경을 외우면서 이 경전이 실제 여러분의 삶에 쓸모 있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아니면 이것을 열심히 외우면 복 받는다니까, 부처님의 가피가 크다고 하니까 그냥 열심히 외우십니까? 주로 우리는 그렇게 신앙적으로만 반야심경을 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가피는, 진짜 영험은, 진짜 복은 뭘까요?
“생명의 참 모습은 불생불멸이고, 나의 참모습은 불생불멸이다.”
이것을 잘 이해함으로써 생에 대한 애착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고 편안해지고,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도 편안해지고 자유로워지는 것 - 이것이 진짜 가피입니다. 이것이 진짜 복입니다. 이것이 진짜 공덕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삶의 애착으로부터도 편안해지고 자유로워지고, 죽음에 직면해서 죽음의 공포로부터도 자유로워지고 편안해질 수 있다면, 그 이상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삶이 자유롭고 평화롭다. 죽음도 자유롭고 평화롭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요? 그 이상 더 바랄 게 없지 않겠습니까? 그보다 더한 기적도, 신비도, 가피도, 영험도, 공덕도, 복도 없습니다.
부처님을 가장 신비로운 자, 최고의 불가사의한 자, 최고로 복 받은 자, 최고로 거룩한 자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부처님은 모든 삶으로부터 자유롭고 편안하신 분입니다. 죽음으로부터도 자유롭고 편안하신 분입니다. 고로 부처님은 신비한 존재, 불가사의한 존재, 기적적인 존재, 최고의 공덕을 지닌 존재, 복 받은 존재, 최고로 행복한 존재라고 하는 겁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엉뚱한 것을 찾고 있는 겁니다.
오늘 나누었던 이런 내용을 염두에 두면서 내용을 거듭거듭 읽고 음미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아마 삶에서 부딪히는 여러 문제로부터도 자유롭고 편안해지고,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도 자유롭고 편안해지는 효험을 실제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각자 자신의 삶에서 그런 효험이 나타날 수 있도록 정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