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5 1월 보현법회
<삼귀의와 반야심경>강의 (8강)
불구부정(不垢不淨), 더러움도 깨끗함도 없네
안녕하세요. 새해 첫 법회네요. 요즘은 양력설도 쇠어야 되고, 음력설도 쇠어야 해서 새해맞이가 오히려 엉거주춤한 것 같아요. 그렇지 않은가요?
반야심경으로 본 한국사회
아직도 탄핵정국은 계속되고 촛불민심도 타오르고 있습니다. 거기다 탄핵 이후 대선문제까지 겹쳐서 대선정국으로 서서히 옮겨가는 모양새죠.
사실은 우리가 서로 화합해서 잘 살아보자고 하는 것이 곧 정치죠. 특히 사회가 다변화되어 가면 갈수록 정치를 떠나서는 삶이 가능하지 않죠. 그렇지만 정치를 잘못 하다 보니 정치라는 말 자체가 왜곡되고 오염되어버렸어요. 이제 ‘정치’ 하면 대부분 권력을 생각하게 됩니다. 정권교체라는 말도 그런 관점에서 나오는 말이고요. 많은 정치인들이 ‘민생’을 외치지만 그조차도 권력을 잡기 위한 수단인 경우가 많고요.
그래서 정치라는 말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정치를 이야기할 때, 우리 사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일, 진정으로 민생을 위한 일을 중심에 두고 사고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그런데 올바른 방향과 중심이 없이 현실정치판에 관련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즉각 기존 정치판으로 끌려들어가고 말지요. 어쨌든 복잡해진 사회구조에서 나라나 조직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대통령도 있어야 하고, 국회의원도 있어야 하고, 종단에는 총무원장도 있어야 하지만, 권력을 중심에 놓고 누가 권력을 잡느냐의 문제로 접근하는 정치로는 희망이 없다고 봅니다.
알고 보면 이런 현실을 진리의 정신으로 잘 파악하고 그 정신으로 생활정치를 잘 실천하신 분이 붓다입니다. 예를 들어 부은 살아계실 때도 그랬지만 돌아가실 때도 후계자를 정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부처님께서 권력중심의 교단운영이 법에 맞다고 생각했다면, 그는 교단운영의 책임자로 당연히 후계자를 정하셨겠죠. 그런데 붓다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열반을 앞두고 제자들이 ‘스승의 은밀한 교지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음을 아시고, “나는 안과 밖이 다르지 않은 가르침을 설했다. 그 어떤 비밀도 없다.”고 말씀하시죠. 그리고 ‘비구의 집단인 교단을 내가 지도하고 있다.’든가 ‘비구의 모임은 나의 지시를 따르고 있다.’고 생각한 일도 결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법을 등불로 삼고 자신을 등불로 삼으라. 법을 의지처로 삼고 자신을 의지처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붓다와는 조금 다르지만, 성군으로 일컬어지는 세종대왕이 그런 정치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종은 백성에 대한 사랑이 최고의 정책이라고 했습니다. 백성에 대한 사랑만이 지상과제, 절대과제, 절대진리라고 생각하고 임금이라면 당연히 그 길을 가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민생정치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것을 우리 실상사로 좁혀보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실상사 주지스님이 실상사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 그것을 절대 과제로 끌어안고 가야 한다는 것이 되겠죠.
오늘의 정국상황은 두 가지가 비어있는 데서 오는 파탄이고 혼란이라고 봅니다.
첫째는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는 대의명분, 공심이 오간 데가 없어요. 민생은 나와 내편이 권력을 잡기 위해 폼으로 갖고 있는 명분이 되어버렸습니다.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것 같습니다. 권력을 중심에 놓고 문제를 바라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도 역시 그 한계를 못 넘어서고 있죠. 개개인의 삶도 들여다보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나라의 주인이 국민이라면, 국민을 위해 일하는 정부나 국회의원들은 국민들과 충분히 소통을 해야 마땅하죠. 그게 기본이죠. 평소에 그게 생활화되어야 하는데 선거 등 본인이 아쉬운 국면에서만 국민과 소통하는 정부, 국민과 소통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외칠 뿐, 일상적으로는 그런 소통을 위한 노력이 별로 안 보입니다.
지금 탄핵정국에서 정국의 관심사로 떠오른 세월호 문제만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정부도 정치권도 국민들의 마음을 제대로 읽을 생각을 안했습니다. 대의명분을 잃고 있는 거죠. 지금까지 드러난 것을 보면 권력을 중심에 놓고 있는 사람들은 나라의 주인인 국민과 소통하지 않아도 된다는 착각에 빠져 자기 편하고 유리한 대로 하고 있는 거죠. 어쩌면 우리 사회가 세월호 문제를 제대로 잘 다루었다면 지금과 같은 촛불정국까지는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진실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많은 혼란은 있었겠지만, 지금과 같은 혼란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비록 사회의 양극화로 세상살이가 대단히 어려워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기본과 원칙에 충실, 공심으로 일을 했다면 현재처럼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을 겁니다. 결국 공심, 대의명분 없이 일을 한 결과가 오늘과 같은 한심한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공심이 없이 눈에 보이는 이해득실, 눈에 보이는 효율성에 매어 일을 하니까 방향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의명분의 실종, 소통의 부재는 문제를 풀어내는 쪽으로 나아가기는커녕 오히려 문제를 더 왜곡시키고 더 혼란스럽게 합니다. 온갖 좋은 말로 환상을 심어주는 행사나 축제로 국민을 현혹시킬 뿐으로 그 결과는 문제의 확대재생산입니다. 요즘 정국을 봐도 그렇습니다.
문제를 덮어서 밀쳐놓으면 잊히고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적절한 비유일지는 모르겠는데 예를 들어 호수에 쓰레기를 버렸다고 합시다. 세월이 가면 물속으로 가라앉아서 눈에는 안 보이겠죠. 시간과 함께 기억에서도 사라지겠죠. 그렇다고 그 쓰레기 문제가 사라졌을까요? 시간이 흐르면 썩어 문드러져서 다 괜찮아지는 것일까요?
우리 눈에 남아있지 않고 우리 기억에 남아있지 않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더 심각하게 우리 삶을 오염시키고 병들게 하고 삶을 위태롭게 만들고 고통스럽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으로 작동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하면 문제를 드러내어 풀어내는 게 중요합니다. 덮어놓는다고 해서, 잊혀진다고 해서, 내 눈앞에 없다고 해서, 실제로 없어진 것은 아니고 어떤 형태로든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것을 놓치지 않고 챙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이 현실을 보는 반야심경의 사고방식입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직접적으로 주체적으로 삶의 문제를 바라보고 다루는 것이 문제를 바람직하게 다루는 것이기도 하고, 올바른 삶이기도 하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반야심경 읽어보겠습니다.
참자유로 나아가는 참지혜의 길
지금 여기, 자유자재로 관찰사유하는 참 사람 있네.
그는 참 지혜로 실천할 때
인연의 어울림으로 이루어진 다섯 무더기 모두 있지만
실제 비어있음을 잘 이해하여 대자유의 삶으로 나아갔네.
참 지혜의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 사리자여,
그대 몸 그대로 실제 비어있음과 다르지 않고
비어 있음 그대로 그대 몸과 다르지 않으며
그대 몸 그대로 비어있음이며 비어있음 그대로 그대 몸이니
느낌도 생각도 의지도 분별도 그러하네.
사리자여, 모든 사람의 비어있는 참모습엔
(그대가 생각하는)
태어남도 소멸함도 더러움도 깨끗함도 늘어남도 줄어듦도 본래 없네.
마찬가지로 몸도, 느낌도, 생각도, 의지도, 분별도,
눈도, 귀도, 코도, 혀도, 몸도, 뜻도 없네.
물질도, 소리도, 맛도, 향기도, 촉감도, 기억도,
눈의 경계로부터 귀와 코와 혀와 촉감과 기억의 경계도 없네.
알지 못함도, 알지 못함이 사라짐도,
늙고 죽음도, 늙고 죽음이 사라짐도,
괴로움도, 괴로움의 원인도, 소멸도, 소멸의 길도,
지혜도, 얻음도 없네.
얻을 것이 없으므로 보살행자는
참 지혜로 실천하는 이 길에 의지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음으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항상 해탈 열반의 삶을 살며
모든 붓다들도 이 길에 의지하여 깨달음의 삶을 완성하네.
그런 까닭에 알 수 있네.
이 길은 가장 신비하고 밝고 높은 진언이니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네.
그러므로 이제 그 진언을 말하여라.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제목에서 ‘마하’를 크다는 말로 많이 번역을 하고 있는데, 클 대(大)자를 쓰다 보니 그것을 크다거나 많다거나 하는 뜻으로 오해할 소지가 많은 것 같습니다. 언어라는 게 본래부터 한계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한계나 부작용을 조금이라도 넘어서보려고 하다 보니 ‘대(大)’를 ‘참’으로 하는 게 더 좋겠다고 해서 이렇게 풀어봤습니다. ‘자유’라는 말을 붙인 것은 반야심경의 정신이 삶을 자유롭고 평화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반야심경의 핵심메시지가 자유죠. 자유야말로 사람들이 가장 갈망하는 가치이기도 하고요.
‘본래부처’, 그리고 ‘본래부처로 온전히 사는 실천’
오늘은 제가 평소에 누누이 이야기했던 내용과 반야심경을 한 번 연결시켜보겠습니다. 제가 무엇을 강조해 이야기했는지 생각이 나십니까? 먼저 본래부처에 대한 이해와 확신, 그리고 본래부처답게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하는 실천으로 두 가지, 즉 노는 입에 염불하는 집중수행과 부지깽이 노릇하는 자비수행을 이야기했습니다. 여기서 ‘노는 입에 염불하는 집중수행’은 홀로 있을 때 주로 그렇게 하라는 것이었고, ‘부지깽이 노릇하는 자비수행’은 사람과 관계할 때 다른 나무들이 잘 타도록 하는 부지깽이 역할, 자비롭게 살아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부지깽이 역할을 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자비심으로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자비심은 자기중심을 넘어 상대의 존재가치를 인정하고 그 존재가치가 잘 빛날 수 있도록 마음 쓰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야심경에서 이야기하는 ‘본래부처’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空)입니다.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즉 오온이 다 공이다, 오온이 본래 공임을 제대로 알면 삶이 자유로워진다, 고난으로부터도, 불안으로부터도, 어리석은 탐욕과 집착으로부터, 어리석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표현은 달라도 내용으로는 본래부처론하고도 같습니다. 본래부처는 실천주체인 인격적 표현인 것이고, 공(空)은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표현일 뿐입니다.
그러면 ‘노는 입에 염불하는 집중수행’은 무엇일까요? 반야심경에서는 무엇을 하라고 합니까?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라는 진언을 지극한 마음으로 외우라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몸이건 마음이건 주체적으로 정신 바짝 차려 잘 쓰지 않으면 거의 대부분 습관대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삶의 주인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습관의 노예로 살게 되는 거죠. 사실 우리들이 갖고 있는 습관이라고 하는 것은 좋은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렇죠?(웃음) 따지고 보면 나를 주체적인 의도로 해치고 너를 해치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그 습관은 즉각즉각 나타납니다. 시기질투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거의 본능적으로 자신도 어찌할 수 없이 일어납니다. 욕심도, 분노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휘발유에 확 불이 붓듯이 통제불능으로 나타납니다. 습관이란 그런 것이고 그것을 불교에서는 ‘업력’이라고 합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십시오.
우리는 혼자 있어보면 걷잡을 수 없이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그 생각들을 잘 살펴보면 시기질투, 욕심, 분노, 열등감, 피해의식, 오만, 허영심 등의 마음으로 각정 걱정거리들이 대부분이죠. 그렇지 않은가요? 그럴 때 노는 입에 염불하는 수행을 하면 생각이 습관대로 끌려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를 계속 생각하고 외우면, 시기질투의 마음이 일어나겠습니까. 탐욕, 분노, 증오, 오만, 자만의 마음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렇지 않죠? 참으로 반야심경의 진언을 지극하게 외우고 생각하면 습관에 끌려가지 않게 됩니다. 습관이 작동하다가도 정신차려 노는 입에 염불, 즉 진언을 외우고 생각하면 바로 습관의 감옥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염불하는 수행자의 삶이 바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노는 입에 염불하는 수행은 우리 마음이 습관대로 흘러가는 것을 바로 잡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제가 “화두참선한다”라고 하면 사람들이 “선방에 살지도 않으면서 무슨 참선한다고 그러냐”고 비웃습니다.(웃음) 그런데 저는 홀로일 때엔 언제나 제 나름대로 노는 입에 염불하는 수행, 화두참선을 죽기살기로 합니다. 가면서도 하고, 그냥 있을 때도 하고, 앉아서도 하고, 누워서도 하고, 화장실에서도 하고… 늘 합니다. 그래야 삶이 편안해지고 자유로워집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동요하지 않고 평정을 유지하는 힘이 생깁니다.
참선이나 염불을 꼭 선방이나 법당에 가서 해야 한다고 하면 일상생활에서는 가능하지 않지요. 실제 일상의 삶과 수행이 괴리되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고, 우리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일상생활 아닌가요? 그러므로 일상의 삶과 수행이 일치되고 통일되도록 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노는 입에 염불하는 집중수행’은 언제나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시간을 내지 않아도, 특별히 돈을 들이지 않아도, 특별히 폼을 안 잡아도, 특별히 어디를 찾아가지 않아도 됩니다. 늘 내가 있는 그곳에서 노는 입에 염불하듯이 수행을 하기 때문에 저절로 삶과 수행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말은 ‘노는 입에 염불’이라고 하니까 쉬워보여도 실제로는 정신 바짝 차려서 심혈을 기울여 노력해야 합니다.
그 다음엔 관계의 측면에서 ‘부지깽이 노릇하는 자비수행’, 즉 자비롭게 마음 쓰고 사는 수행입니다. 반야심경에는 자비수행에 대한 표현이 직접적으로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공(空)의 정신을 잘 이해하고 그 정신에 따라 마음 쓰고 살면 그 자체가 자비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인연의 어울림으로 이루어진 다섯 무더기 모두 있지만
실제 비어있음을 잘 이해하여 대자유의 삶으로 나아갔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인쉬타인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천재다. 만약 나무에 오르는 능력을 기준으로 물고기의 재능을 평가하면 물고기는 빠르게 헤엄칠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은 채 자포자기의 인생을 이어갈 것이다.’
‘모든 사람은 천재다’라는 말은 우리가 늘 말하는 ‘모든 사람은 본래부처다’라는 말과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나무에 오르는 능력을 기준으로 물고기의 재능을 묻는다’는 것은 본래 있는 기준이 아니고 사회가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사회가 만들어놓은 기준은 사실 필요 없는 것이죠. 어쩌면 물고기의 천재성을 가로막거나 죽이는 대단히 위험한 것이죠.
자, 생각해보십시오. 헤엄치는 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물고기는 천재이고, 나무에 오르는 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물고기는 바보입니다. 엄연한 이 사실을 놓고 보면 우리는 너나없이 바보이거나 천재입니다.
차분하게 따져 보십시오. 물고기에게 원숭이처럼 나무에 오르라고 요구하면 물고기는 열등할 수밖에 없고, 불행하게 마련이죠. 삶의 문제를 이렇게 다룰 경우 이 세상 모든 인간은 열등하고 바보같은 존재로 불행할 수밖에 없죠. 참으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연히 그 기준이 필요없는 것이기도 하고 잘못된 것이기도 하죠. 그동안 우리 교육이 그래왔습니다. 아이들마다 각각 자기 길이 있고 그 길을 잘 만들어갈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입시를 위한 시험기계를 만들고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상위권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시험기계인간을 길러내고, 경쟁사회에 잘 적응하기 위해 싸우는 능력을 가르치고,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되는 사회라고 돈 잘 버는 능력을 가르치고, 삼성 같은 대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취직시험 잘보는 능력의 인간을 길러냈습니다.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교육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지금까지 말한 것 중에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교육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 결과가 지금 우리 사회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우리 세상이 아수라장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실로 두렵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사람마다 다 자기 길이 있습니다. 그것을 아인쉬타인은 ‘천재’라는 말로 표현했고, 우리는 ‘본래부처’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대학입시다, 경쟁이다, 돈이다, 삼성이다, 하는 식으로 가치판단을 기준으로 세워놓는 순간, 모두 자기 길을 잃어버립니다. 사람마다 갖고 있는 천재성이 부정당하고 바보로 전락해버립니다. 천재는 바보가 되어버리고, 부처는 중생이 되는 꼴이니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반야심경에서는 사람들이 존재의 참모습에 대한 무지와 착각으로 구성된 관념을 해체합니다. 사람들은 무지와 착각의 관념으로 온갖 잘못된 기준을 만들어놓고 스스로 그 기준에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본인이 스스로 만들고 스스로 그 함정에 빠져드는 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자승자박(自繩自縛)이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 대부분 자승자박의 삶을 살면서 스스로 불행하다고 아우성치고 있습니다.
나무에 올라가는 것을 절대기준으로 삼는 한, 물고기는 스스로는 열등감에 바지고 사람들로부터는 바보라고 무시당하고 살 것입니다. 헤엄을 잘 치는 물고기의 천재성은 전혀 알 수가 없게 되죠. 그런데 나무에 올라간다는 기준이라는 게 본래부터 있는 것입니까? 그게 어떤 존재의 가치를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있나요? 아니지요?
자, 이제 어떤 것도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 기준을 없애버리고 본래 자리로 돌아오면 무엇이 보이겠습니까? 물고기는 물에서 헤엄을 잘 치는 천재라는 사실이 보이죠. 우리가 그동안 옳다고 생각해왔던 것이 와르르 무너지고 새로운 가치가 발견되죠. 이러한 사유방식이 바로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입니다.
만약 우리가 존재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누군가의 가치를 자기만의 기준을 갖고 자기 멋대로 판단하여 바보천치라고 규정하고, 어떤 물건에 대해 쓸모없는 물건이라고 규정하고, 그래서 무시하고 함부로 취급하고 더 나아가 제거시키려고 한다면, 고난과 액난이 생기겠습니까, 안 생기겠습니까? 당연히 생기겠죠.
그런데 그 기준이 잘못된 것이고 본래 없는 것임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그런 판단과 규정을 안 하고 무시하거나 제거하는 행위도 안 하게 되죠. 한 걸음 더 나아가 존재가치를 제대로 파악하여 진정으로 존중, 배려하면 갈등과 대립, 분노와 증오 등의 고난과 액난이 생기겠습니까. 물어볼 것도 없죠. 결과적으로 자연스럽게 고난과 액난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반야심경에서는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라고 합니다.
지혜로 공의 진리를 잘 파악하고 이해하여 그 진리에 맞게 자비로운 마음을 내어 실천하는 것이므로 공의 진리 안에서 지혜와 자비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지혜는 곧 자비로 이어집니다. 지난 시간에 ‘나’라는 것이 성립하지 않으며(공하고), ‘나’라고 하는 것의 정체성의 근거는 바로 ‘너’라는 이야기를 했었죠. 당연히 ‘너’를 위해 ‘부지깽이 노릇하는 자비수행’을 하게 됩니다. 언제나 공의 정신으로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지혜의 삶이고 자비의 삶입니다.
따라서 공(空)의 사고방식을 잘 이해하면 삶의 문제를 풀어내는 길이 열립니다. 모든 존재들의 가치가 온전히 드러나면, 삶은 의미 있고 보람차게 됩니다. 모든 존재들과의 관계도 두루두루 원만해집니다.
어떻든, 우리가 평소 잘 할 수 있는 것이 ‘노는 입에 염불하는 수행’이니 열심히 하면 좋겠습니다. 할 때는 죽기살기로 해야 합니다. 건성건성 대충대충 하면 힘이 생기지 않습니다. 무엇이든지 하고 또 해야 힘이 생깁니다. 그렇게 주체적인 힘이 생겨나는 것을 수행력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수행력이 길러지면 가족이나 이웃과의 관계가 평화로워지고 행복해집니다. 우리 스스로 관용하고 평화로울 수 있는 수행이 기본바탕이 되어야, 그 바탕에서 우리가 원하는 가족과 이웃의 화합과 평화도 가능하고, 우리가 원하는 대통령도 만들어내고 우리가 원하는 총무원장도 만들어내게 됩니다.
불구부정(不垢不淨) ; 더러움도 깨끗함도 없네
그래도 진도는 나가야겠죠? (웃음) 오늘은 불구부정(不垢不淨), 더러움도 깨끗함도 없네)에 대해 공부할 차례입니다.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여, 모든 사람의 비어있는 참모습엔
(그대가 생각하는)
태어남도 소멸함도 더러움도 깨끗함도 늘어남도 줄어듦도 본래 없네.
사실 ‘비어있는 참모습’에 대해서만 제대로 알면 반야심경 공부는 다 한 것입니다. 붓다께서 깨달으신 것도 ‘비어있는 참모습’이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언제나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대가 생각하는’이라는 대목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삽입한 문구입니다. 우리는 늘 거의 본능적으로 내 생각이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내가 옳다는 생각을 전제로 삶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다음 문제가 발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늘 그렇습니다.
그래서 붓다께서는 “네 생각에 대해 늘 의심하라”, “네가 알고 믿고 있는 것은 네 생각일 뿐 실제는 공(空), 그렇지 않다”고 하십니다. 반야심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표적으로 예를 든 것이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입니다.
먼저 불생불멸(不生不滅)은 앞 시간에 했던 내용이죠? “그렇게 축하해야 마땅한 생(生)은 없다. 그것은 너의 생각일 뿐이다. 슬퍼해야 마땅한 죽음도 없다. 그것도 너의 생각일 뿐이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오늘 할 것은, 두 번째 불구부정(不垢不淨), ‘더러움도 깨끗함도 없다’입니다.
생각해봅시다. 인간은 예쁜 존재인가요, 미운 존재인가요? 더러운 존재인가요, 깨끗한 존재인가요? 우리는 보통 깨끗하고 예쁜 것을 좋아하잖아요. 박근혜 대통령도 청와대 안에서 더 깨끗하고 더 예쁘게 하느라고 골든타임을 다 놓쳤다고 하는 설이 분분하잖아요.
그런데 정말로 우리가 생각하는 깨끗함, 예쁨이 있을까요? 실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그런 예쁨, 깨끗함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그런 미움, 더러움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보면 따로따로 분리독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쁨과 미움, 깨끗함과 더러움이 따라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마치 한 몸의 왼손과 오른손처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것 없이 저것이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깨끗하게 꾸민다고 해도 실제 인간의 몸은,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면 피고름부대이고 똥통입니다. 얼굴과 항문을 분리시킬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분리시킬 수 없기 때문에 깨끗한 것이 따로 있고 더러운 것이 따로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들의 무지와 착각일 뿐이라는 거죠.
사실을 놓고 보면, ‘더러움 없이 깨끗함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깨끗함은 공이다. 깨끗함이 없이 더러움도 없다. 그러므로 더러움도 공이다.’ - 이것이 ‘불구부정’입니다. 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보면 우리는 거의 다 자신이 만든 관념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깨끗한 것이라는 관념, 더러운 것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혀 그 관념에 지배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본인이 생각하는 ‘깨끗한 것이 좋은 것’이라는 관념이 절대화되어 그에 사로잡히면 어떤 현상이 나타날까요? 현실적으로 삶이 불가능해집니다. 현대문명이 바로 그런 문제를 안고 있는 겁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곳이 화장실이죠. 고속도로 화장실을 예로 놓고 이야기를 해볼까요? 요즘 고속도로 화장실을 보면 제 방보다도 훨씬 밝고 깨끗합니다. 더 향기롭고 따뜻하기도 합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렇게 만들었죠. 그런데 그게 가져오는 결과는 무엇일까요? 아무 문제없이 좋기만 한 것일까요?
다른 것은 다 제쳐놓고 똥오줌의 문제만 놓고 봅시다.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납니다. 똥오줌은 거름이 되도록 정상적으로 처리되면 생명의 양식입니다. 반면 쓰레기가 되도록 처리되면 생명을 살리는 양식이 아니라 모든 생명을 죽이는 독이 됩니다. 이에 더하여 그 화장실을 더 밝고 따뜻하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전기, 더 깨끗하고 향기롭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합성세제와 방향제들은 우리들의 생명, 환경을 심각하게 오염시켜 삶을 병들게 합니다.
관념적으로는 괜찮아 보이지만 실제적으로는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현대문명이 갖고 있는 심각한 모순이고 위험입니다. 앞뒤를 다 따져보면 현대문명은 우리 모두를 자기도 모르게 서로의 생명을 파괴하고 죽이는 사람이 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생명을 병들고 죽게 하는 악마의 인간을 만들고 있는 거죠. 내가 의도하지 않았고, 때로는 좋은 뜻으로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되고 있으니 실로 무서운 일입니다.
이런 점들을 놓고 보면, 우리가 실제를 잘 관찰하고 실제 생명의 진리에 맞게 살아가지 않으면 좋은 의도로 열심히 하고 는 것 자체가, 사실은 생명을 병들게 하고 죽게 하는 악마의 인간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이 현대문명의 모순이죠.
반야심경의 정신은, 우리가 보고 직면한 실제를 잘 관찰하고 직면한 생명의 질서를 잘 이해하고 그 생명의 질서에 맞게 살아가야 삶이 괜찮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자유로 나아가는 참지혜의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평소 작은 불편을 기꺼이 감내하고 사는 삶이 지혜로운 삶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작은 불편을 감내하지 않으면 치명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작은 불편을 감내해야만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생명의 세계는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깨끗한 것에 대한 과장된 관념, 더러운 것에 대한 과장된 관념을 내려놓고 작은 불편을 흔연히 감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똥 한 번 밟으면 큰일 나는 줄 아는데, 큰 일 안 납니다. 그렇다고 똥 밟으라는 것은 아니고요. (웃음)
어떻든 우리 삶 속에서 반야심경의 정신을 명심하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작은 불편을 감내하는 삶을 극단적으로 거부하게 되면 생명의 양식인 똥이 생명을 죽이는 독이 되는 것처럼 생명을 해치게 됩니다. 우리는 작은 불편을 피하려고 깨끗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쓸데없는 환상을 만들어내고 환상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의도하지 않았는데, 나아가 좋은 의도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병들게 하고 죽게 하는 악마의 삶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은 직면한 실상,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제대로 살피고 이해해서 그 안에 깃든 정신에 맞도록 삶을 살아가야 그 삶이 바람직하고 희망적으로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끝으로 오늘 공부한 불구부정, 즉 더러움도 깨끗함도 없다는 말씀의 핵심을 정리해봅시다.
‘모든 것은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어느 한쪽만을 좋다, 나쁘다로 왜곡시켜 단정하고 과장시켜 그 관념에 따라 삶을 살면 안 된다. 만약 그렇게 하면 결국 돌이킬 수 없는 함정에 내몰리게 되고, 삶을 불행하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 어리석음에서 깨어나자. 따라서 일상 속에서 작은 불편함이 갖고 있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파악하여 기꺼이 감내하며 사는 것이 삶의 참지혜이다. 그랬을 때 큰 불편을 초래하지 않는다.’
함께 공부한 반야심경의 정신, 오늘 배운 불구부정(不垢不淨)에 담긴 의미를 내 삶에 스며들도록 하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그게 진짜 수행입니다! 그게 진짜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우리 모두 그 길을 가는 도반이 되록 마음내고 정진했으면 좋겠습니다.
2017.1.15 1월 보현법회
<삼귀의와 반야심경>강의 (8강)
불구부정(不垢不淨), 더러움도 깨끗함도 없네
안녕하세요. 새해 첫 법회네요. 요즘은 양력설도 쇠어야 되고, 음력설도 쇠어야 해서 새해맞이가 오히려 엉거주춤한 것 같아요. 그렇지 않은가요?
반야심경으로 본 한국사회
아직도 탄핵정국은 계속되고 촛불민심도 타오르고 있습니다. 거기다 탄핵 이후 대선문제까지 겹쳐서 대선정국으로 서서히 옮겨가는 모양새죠.
사실은 우리가 서로 화합해서 잘 살아보자고 하는 것이 곧 정치죠. 특히 사회가 다변화되어 가면 갈수록 정치를 떠나서는 삶이 가능하지 않죠. 그렇지만 정치를 잘못 하다 보니 정치라는 말 자체가 왜곡되고 오염되어버렸어요. 이제 ‘정치’ 하면 대부분 권력을 생각하게 됩니다. 정권교체라는 말도 그런 관점에서 나오는 말이고요. 많은 정치인들이 ‘민생’을 외치지만 그조차도 권력을 잡기 위한 수단인 경우가 많고요.
그래서 정치라는 말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정치를 이야기할 때, 우리 사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일, 진정으로 민생을 위한 일을 중심에 두고 사고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그런데 올바른 방향과 중심이 없이 현실정치판에 관련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즉각 기존 정치판으로 끌려들어가고 말지요. 어쨌든 복잡해진 사회구조에서 나라나 조직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대통령도 있어야 하고, 국회의원도 있어야 하고, 종단에는 총무원장도 있어야 하지만, 권력을 중심에 놓고 누가 권력을 잡느냐의 문제로 접근하는 정치로는 희망이 없다고 봅니다.
알고 보면 이런 현실을 진리의 정신으로 잘 파악하고 그 정신으로 생활정치를 잘 실천하신 분이 붓다입니다. 예를 들어 부은 살아계실 때도 그랬지만 돌아가실 때도 후계자를 정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부처님께서 권력중심의 교단운영이 법에 맞다고 생각했다면, 그는 교단운영의 책임자로 당연히 후계자를 정하셨겠죠. 그런데 붓다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열반을 앞두고 제자들이 ‘스승의 은밀한 교지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음을 아시고, “나는 안과 밖이 다르지 않은 가르침을 설했다. 그 어떤 비밀도 없다.”고 말씀하시죠. 그리고 ‘비구의 집단인 교단을 내가 지도하고 있다.’든가 ‘비구의 모임은 나의 지시를 따르고 있다.’고 생각한 일도 결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법을 등불로 삼고 자신을 등불로 삼으라. 법을 의지처로 삼고 자신을 의지처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붓다와는 조금 다르지만, 성군으로 일컬어지는 세종대왕이 그런 정치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세종은 백성에 대한 사랑이 최고의 정책이라고 했습니다. 백성에 대한 사랑만이 지상과제, 절대과제, 절대진리라고 생각하고 임금이라면 당연히 그 길을 가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민생정치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것을 우리 실상사로 좁혀보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실상사 주지스님이 실상사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 그것을 절대 과제로 끌어안고 가야 한다는 것이 되겠죠.
오늘의 정국상황은 두 가지가 비어있는 데서 오는 파탄이고 혼란이라고 봅니다.
첫째는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는 대의명분, 공심이 오간 데가 없어요. 민생은 나와 내편이 권력을 잡기 위해 폼으로 갖고 있는 명분이 되어버렸습니다.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것 같습니다. 권력을 중심에 놓고 문제를 바라보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도 역시 그 한계를 못 넘어서고 있죠. 개개인의 삶도 들여다보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나라의 주인이 국민이라면, 국민을 위해 일하는 정부나 국회의원들은 국민들과 충분히 소통을 해야 마땅하죠. 그게 기본이죠. 평소에 그게 생활화되어야 하는데 선거 등 본인이 아쉬운 국면에서만 국민과 소통하는 정부, 국민과 소통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외칠 뿐, 일상적으로는 그런 소통을 위한 노력이 별로 안 보입니다.
지금 탄핵정국에서 정국의 관심사로 떠오른 세월호 문제만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정부도 정치권도 국민들의 마음을 제대로 읽을 생각을 안했습니다. 대의명분을 잃고 있는 거죠. 지금까지 드러난 것을 보면 권력을 중심에 놓고 있는 사람들은 나라의 주인인 국민과 소통하지 않아도 된다는 착각에 빠져 자기 편하고 유리한 대로 하고 있는 거죠. 어쩌면 우리 사회가 세월호 문제를 제대로 잘 다루었다면 지금과 같은 촛불정국까지는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진실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많은 혼란은 있었겠지만, 지금과 같은 혼란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비록 사회의 양극화로 세상살이가 대단히 어려워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기본과 원칙에 충실, 공심으로 일을 했다면 현재처럼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을 겁니다. 결국 공심, 대의명분 없이 일을 한 결과가 오늘과 같은 한심한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공심이 없이 눈에 보이는 이해득실, 눈에 보이는 효율성에 매어 일을 하니까 방향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의명분의 실종, 소통의 부재는 문제를 풀어내는 쪽으로 나아가기는커녕 오히려 문제를 더 왜곡시키고 더 혼란스럽게 합니다. 온갖 좋은 말로 환상을 심어주는 행사나 축제로 국민을 현혹시킬 뿐으로 그 결과는 문제의 확대재생산입니다. 요즘 정국을 봐도 그렇습니다.
문제를 덮어서 밀쳐놓으면 잊히고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적절한 비유일지는 모르겠는데 예를 들어 호수에 쓰레기를 버렸다고 합시다. 세월이 가면 물속으로 가라앉아서 눈에는 안 보이겠죠. 시간과 함께 기억에서도 사라지겠죠. 그렇다고 그 쓰레기 문제가 사라졌을까요? 시간이 흐르면 썩어 문드러져서 다 괜찮아지는 것일까요?
우리 눈에 남아있지 않고 우리 기억에 남아있지 않더라도 어떤 형태로든 더 심각하게 우리 삶을 오염시키고 병들게 하고 삶을 위태롭게 만들고 고통스럽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으로 작동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하면 문제를 드러내어 풀어내는 게 중요합니다. 덮어놓는다고 해서, 잊혀진다고 해서, 내 눈앞에 없다고 해서, 실제로 없어진 것은 아니고 어떤 형태로든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것을 놓치지 않고 챙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이 현실을 보는 반야심경의 사고방식입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직접적으로 주체적으로 삶의 문제를 바라보고 다루는 것이 문제를 바람직하게 다루는 것이기도 하고, 올바른 삶이기도 하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반야심경 읽어보겠습니다.
참자유로 나아가는 참지혜의 길
지금 여기, 자유자재로 관찰사유하는 참 사람 있네.
그는 참 지혜로 실천할 때
인연의 어울림으로 이루어진 다섯 무더기 모두 있지만
실제 비어있음을 잘 이해하여 대자유의 삶으로 나아갔네.
참 지혜의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 사리자여,
그대 몸 그대로 실제 비어있음과 다르지 않고
비어 있음 그대로 그대 몸과 다르지 않으며
그대 몸 그대로 비어있음이며 비어있음 그대로 그대 몸이니
느낌도 생각도 의지도 분별도 그러하네.
사리자여, 모든 사람의 비어있는 참모습엔
(그대가 생각하는)
태어남도 소멸함도 더러움도 깨끗함도 늘어남도 줄어듦도 본래 없네.
마찬가지로 몸도, 느낌도, 생각도, 의지도, 분별도,
눈도, 귀도, 코도, 혀도, 몸도, 뜻도 없네.
물질도, 소리도, 맛도, 향기도, 촉감도, 기억도,
눈의 경계로부터 귀와 코와 혀와 촉감과 기억의 경계도 없네.
알지 못함도, 알지 못함이 사라짐도,
늙고 죽음도, 늙고 죽음이 사라짐도,
괴로움도, 괴로움의 원인도, 소멸도, 소멸의 길도,
지혜도, 얻음도 없네.
얻을 것이 없으므로 보살행자는
참 지혜로 실천하는 이 길에 의지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음으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항상 해탈 열반의 삶을 살며
모든 붓다들도 이 길에 의지하여 깨달음의 삶을 완성하네.
그런 까닭에 알 수 있네.
이 길은 가장 신비하고 밝고 높은 진언이니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네.
그러므로 이제 그 진언을 말하여라.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제목에서 ‘마하’를 크다는 말로 많이 번역을 하고 있는데, 클 대(大)자를 쓰다 보니 그것을 크다거나 많다거나 하는 뜻으로 오해할 소지가 많은 것 같습니다. 언어라는 게 본래부터 한계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한계나 부작용을 조금이라도 넘어서보려고 하다 보니 ‘대(大)’를 ‘참’으로 하는 게 더 좋겠다고 해서 이렇게 풀어봤습니다. ‘자유’라는 말을 붙인 것은 반야심경의 정신이 삶을 자유롭고 평화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반야심경의 핵심메시지가 자유죠. 자유야말로 사람들이 가장 갈망하는 가치이기도 하고요.
‘본래부처’, 그리고 ‘본래부처로 온전히 사는 실천’
오늘은 제가 평소에 누누이 이야기했던 내용과 반야심경을 한 번 연결시켜보겠습니다. 제가 무엇을 강조해 이야기했는지 생각이 나십니까? 먼저 본래부처에 대한 이해와 확신, 그리고 본래부처답게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하는 실천으로 두 가지, 즉 노는 입에 염불하는 집중수행과 부지깽이 노릇하는 자비수행을 이야기했습니다. 여기서 ‘노는 입에 염불하는 집중수행’은 홀로 있을 때 주로 그렇게 하라는 것이었고, ‘부지깽이 노릇하는 자비수행’은 사람과 관계할 때 다른 나무들이 잘 타도록 하는 부지깽이 역할, 자비롭게 살아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부지깽이 역할을 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자비심으로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자비심은 자기중심을 넘어 상대의 존재가치를 인정하고 그 존재가치가 잘 빛날 수 있도록 마음 쓰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반야심경에서 이야기하는 ‘본래부처’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空)입니다.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즉 오온이 다 공이다, 오온이 본래 공임을 제대로 알면 삶이 자유로워진다, 고난으로부터도, 불안으로부터도, 어리석은 탐욕과 집착으로부터, 어리석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표현은 달라도 내용으로는 본래부처론하고도 같습니다. 본래부처는 실천주체인 인격적 표현인 것이고, 공(空)은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표현일 뿐입니다.
그러면 ‘노는 입에 염불하는 집중수행’은 무엇일까요? 반야심경에서는 무엇을 하라고 합니까?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라는 진언을 지극한 마음으로 외우라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몸이건 마음이건 주체적으로 정신 바짝 차려 잘 쓰지 않으면 거의 대부분 습관대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삶의 주인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습관의 노예로 살게 되는 거죠. 사실 우리들이 갖고 있는 습관이라고 하는 것은 좋은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렇죠?(웃음) 따지고 보면 나를 주체적인 의도로 해치고 너를 해치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그 습관은 즉각즉각 나타납니다. 시기질투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거의 본능적으로 자신도 어찌할 수 없이 일어납니다. 욕심도, 분노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휘발유에 확 불이 붓듯이 통제불능으로 나타납니다. 습관이란 그런 것이고 그것을 불교에서는 ‘업력’이라고 합니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십시오.
우리는 혼자 있어보면 걷잡을 수 없이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그 생각들을 잘 살펴보면 시기질투, 욕심, 분노, 열등감, 피해의식, 오만, 허영심 등의 마음으로 각정 걱정거리들이 대부분이죠. 그렇지 않은가요? 그럴 때 노는 입에 염불하는 수행을 하면 생각이 습관대로 끌려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를 계속 생각하고 외우면, 시기질투의 마음이 일어나겠습니까. 탐욕, 분노, 증오, 오만, 자만의 마음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렇지 않죠? 참으로 반야심경의 진언을 지극하게 외우고 생각하면 습관에 끌려가지 않게 됩니다. 습관이 작동하다가도 정신차려 노는 입에 염불, 즉 진언을 외우고 생각하면 바로 습관의 감옥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염불하는 수행자의 삶이 바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노는 입에 염불하는 수행은 우리 마음이 습관대로 흘러가는 것을 바로 잡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제가 “화두참선한다”라고 하면 사람들이 “선방에 살지도 않으면서 무슨 참선한다고 그러냐”고 비웃습니다.(웃음) 그런데 저는 홀로일 때엔 언제나 제 나름대로 노는 입에 염불하는 수행, 화두참선을 죽기살기로 합니다. 가면서도 하고, 그냥 있을 때도 하고, 앉아서도 하고, 누워서도 하고, 화장실에서도 하고… 늘 합니다. 그래야 삶이 편안해지고 자유로워집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동요하지 않고 평정을 유지하는 힘이 생깁니다.
참선이나 염불을 꼭 선방이나 법당에 가서 해야 한다고 하면 일상생활에서는 가능하지 않지요. 실제 일상의 삶과 수행이 괴리되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고, 우리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일상생활 아닌가요? 그러므로 일상의 삶과 수행이 일치되고 통일되도록 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노는 입에 염불하는 집중수행’은 언제나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시간을 내지 않아도, 특별히 돈을 들이지 않아도, 특별히 폼을 안 잡아도, 특별히 어디를 찾아가지 않아도 됩니다. 늘 내가 있는 그곳에서 노는 입에 염불하듯이 수행을 하기 때문에 저절로 삶과 수행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말은 ‘노는 입에 염불’이라고 하니까 쉬워보여도 실제로는 정신 바짝 차려서 심혈을 기울여 노력해야 합니다.
그 다음엔 관계의 측면에서 ‘부지깽이 노릇하는 자비수행’, 즉 자비롭게 마음 쓰고 사는 수행입니다. 반야심경에는 자비수행에 대한 표현이 직접적으로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공(空)의 정신을 잘 이해하고 그 정신에 따라 마음 쓰고 살면 그 자체가 자비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인연의 어울림으로 이루어진 다섯 무더기 모두 있지만
실제 비어있음을 잘 이해하여 대자유의 삶으로 나아갔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인쉬타인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천재다. 만약 나무에 오르는 능력을 기준으로 물고기의 재능을 평가하면 물고기는 빠르게 헤엄칠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은 채 자포자기의 인생을 이어갈 것이다.’
‘모든 사람은 천재다’라는 말은 우리가 늘 말하는 ‘모든 사람은 본래부처다’라는 말과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나무에 오르는 능력을 기준으로 물고기의 재능을 묻는다’는 것은 본래 있는 기준이 아니고 사회가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사회가 만들어놓은 기준은 사실 필요 없는 것이죠. 어쩌면 물고기의 천재성을 가로막거나 죽이는 대단히 위험한 것이죠.
자, 생각해보십시오. 헤엄치는 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물고기는 천재이고, 나무에 오르는 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물고기는 바보입니다. 엄연한 이 사실을 놓고 보면 우리는 너나없이 바보이거나 천재입니다.
차분하게 따져 보십시오. 물고기에게 원숭이처럼 나무에 오르라고 요구하면 물고기는 열등할 수밖에 없고, 불행하게 마련이죠. 삶의 문제를 이렇게 다룰 경우 이 세상 모든 인간은 열등하고 바보같은 존재로 불행할 수밖에 없죠. 참으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연히 그 기준이 필요없는 것이기도 하고 잘못된 것이기도 하죠. 그동안 우리 교육이 그래왔습니다. 아이들마다 각각 자기 길이 있고 그 길을 잘 만들어갈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입시를 위한 시험기계를 만들고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상위권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시험기계인간을 길러내고, 경쟁사회에 잘 적응하기 위해 싸우는 능력을 가르치고,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되는 사회라고 돈 잘 버는 능력을 가르치고, 삼성 같은 대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취직시험 잘보는 능력의 인간을 길러냈습니다.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교육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지금까지 말한 것 중에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교육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 결과가 지금 우리 사회입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우리 세상이 아수라장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실로 두렵습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사람마다 다 자기 길이 있습니다. 그것을 아인쉬타인은 ‘천재’라는 말로 표현했고, 우리는 ‘본래부처’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대학입시다, 경쟁이다, 돈이다, 삼성이다, 하는 식으로 가치판단을 기준으로 세워놓는 순간, 모두 자기 길을 잃어버립니다. 사람마다 갖고 있는 천재성이 부정당하고 바보로 전락해버립니다. 천재는 바보가 되어버리고, 부처는 중생이 되는 꼴이니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반야심경에서는 사람들이 존재의 참모습에 대한 무지와 착각으로 구성된 관념을 해체합니다. 사람들은 무지와 착각의 관념으로 온갖 잘못된 기준을 만들어놓고 스스로 그 기준에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본인이 스스로 만들고 스스로 그 함정에 빠져드는 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자승자박(自繩自縛)이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 대부분 자승자박의 삶을 살면서 스스로 불행하다고 아우성치고 있습니다.
나무에 올라가는 것을 절대기준으로 삼는 한, 물고기는 스스로는 열등감에 바지고 사람들로부터는 바보라고 무시당하고 살 것입니다. 헤엄을 잘 치는 물고기의 천재성은 전혀 알 수가 없게 되죠. 그런데 나무에 올라간다는 기준이라는 게 본래부터 있는 것입니까? 그게 어떤 존재의 가치를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있나요? 아니지요?
자, 이제 어떤 것도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 기준을 없애버리고 본래 자리로 돌아오면 무엇이 보이겠습니까? 물고기는 물에서 헤엄을 잘 치는 천재라는 사실이 보이죠. 우리가 그동안 옳다고 생각해왔던 것이 와르르 무너지고 새로운 가치가 발견되죠. 이러한 사유방식이 바로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입니다.
만약 우리가 존재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누군가의 가치를 자기만의 기준을 갖고 자기 멋대로 판단하여 바보천치라고 규정하고, 어떤 물건에 대해 쓸모없는 물건이라고 규정하고, 그래서 무시하고 함부로 취급하고 더 나아가 제거시키려고 한다면, 고난과 액난이 생기겠습니까, 안 생기겠습니까? 당연히 생기겠죠.
그런데 그 기준이 잘못된 것이고 본래 없는 것임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그런 판단과 규정을 안 하고 무시하거나 제거하는 행위도 안 하게 되죠. 한 걸음 더 나아가 존재가치를 제대로 파악하여 진정으로 존중, 배려하면 갈등과 대립, 분노와 증오 등의 고난과 액난이 생기겠습니까. 물어볼 것도 없죠. 결과적으로 자연스럽게 고난과 액난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반야심경에서는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라고 합니다.
지혜로 공의 진리를 잘 파악하고 이해하여 그 진리에 맞게 자비로운 마음을 내어 실천하는 것이므로 공의 진리 안에서 지혜와 자비는 분리되지 않습니다. 지혜는 곧 자비로 이어집니다. 지난 시간에 ‘나’라는 것이 성립하지 않으며(공하고), ‘나’라고 하는 것의 정체성의 근거는 바로 ‘너’라는 이야기를 했었죠. 당연히 ‘너’를 위해 ‘부지깽이 노릇하는 자비수행’을 하게 됩니다. 언제나 공의 정신으로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지혜의 삶이고 자비의 삶입니다.
따라서 공(空)의 사고방식을 잘 이해하면 삶의 문제를 풀어내는 길이 열립니다. 모든 존재들의 가치가 온전히 드러나면, 삶은 의미 있고 보람차게 됩니다. 모든 존재들과의 관계도 두루두루 원만해집니다.
어떻든, 우리가 평소 잘 할 수 있는 것이 ‘노는 입에 염불하는 수행’이니 열심히 하면 좋겠습니다. 할 때는 죽기살기로 해야 합니다. 건성건성 대충대충 하면 힘이 생기지 않습니다. 무엇이든지 하고 또 해야 힘이 생깁니다. 그렇게 주체적인 힘이 생겨나는 것을 수행력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수행력이 길러지면 가족이나 이웃과의 관계가 평화로워지고 행복해집니다. 우리 스스로 관용하고 평화로울 수 있는 수행이 기본바탕이 되어야, 그 바탕에서 우리가 원하는 가족과 이웃의 화합과 평화도 가능하고, 우리가 원하는 대통령도 만들어내고 우리가 원하는 총무원장도 만들어내게 됩니다.
불구부정(不垢不淨) ; 더러움도 깨끗함도 없네
그래도 진도는 나가야겠죠? (웃음) 오늘은 불구부정(不垢不淨), 더러움도 깨끗함도 없네)에 대해 공부할 차례입니다.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여, 모든 사람의 비어있는 참모습엔
(그대가 생각하는)
태어남도 소멸함도 더러움도 깨끗함도 늘어남도 줄어듦도 본래 없네.
사실 ‘비어있는 참모습’에 대해서만 제대로 알면 반야심경 공부는 다 한 것입니다. 붓다께서 깨달으신 것도 ‘비어있는 참모습’이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언제나 놓쳐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대가 생각하는’이라는 대목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삽입한 문구입니다. 우리는 늘 거의 본능적으로 내 생각이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내가 옳다는 생각을 전제로 삶의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다음 문제가 발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늘 그렇습니다.
그래서 붓다께서는 “네 생각에 대해 늘 의심하라”, “네가 알고 믿고 있는 것은 네 생각일 뿐 실제는 공(空), 그렇지 않다”고 하십니다. 반야심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표적으로 예를 든 것이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입니다.
먼저 불생불멸(不生不滅)은 앞 시간에 했던 내용이죠? “그렇게 축하해야 마땅한 생(生)은 없다. 그것은 너의 생각일 뿐이다. 슬퍼해야 마땅한 죽음도 없다. 그것도 너의 생각일 뿐이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오늘 할 것은, 두 번째 불구부정(不垢不淨), ‘더러움도 깨끗함도 없다’입니다.
생각해봅시다. 인간은 예쁜 존재인가요, 미운 존재인가요? 더러운 존재인가요, 깨끗한 존재인가요? 우리는 보통 깨끗하고 예쁜 것을 좋아하잖아요. 박근혜 대통령도 청와대 안에서 더 깨끗하고 더 예쁘게 하느라고 골든타임을 다 놓쳤다고 하는 설이 분분하잖아요.
그런데 정말로 우리가 생각하는 깨끗함, 예쁨이 있을까요? 실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그런 예쁨, 깨끗함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그런 미움, 더러움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보면 따로따로 분리독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쁨과 미움, 깨끗함과 더러움이 따라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마치 한 몸의 왼손과 오른손처럼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것 없이 저것이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깨끗하게 꾸민다고 해도 실제 인간의 몸은,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면 피고름부대이고 똥통입니다. 얼굴과 항문을 분리시킬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분리시킬 수 없기 때문에 깨끗한 것이 따로 있고 더러운 것이 따로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들의 무지와 착각일 뿐이라는 거죠.
사실을 놓고 보면, ‘더러움 없이 깨끗함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깨끗함은 공이다. 깨끗함이 없이 더러움도 없다. 그러므로 더러움도 공이다.’ - 이것이 ‘불구부정’입니다. 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고 보면 우리는 거의 다 자신이 만든 관념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깨끗한 것이라는 관념, 더러운 것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혀 그 관념에 지배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본인이 생각하는 ‘깨끗한 것이 좋은 것’이라는 관념이 절대화되어 그에 사로잡히면 어떤 현상이 나타날까요? 현실적으로 삶이 불가능해집니다. 현대문명이 바로 그런 문제를 안고 있는 겁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곳이 화장실이죠. 고속도로 화장실을 예로 놓고 이야기를 해볼까요? 요즘 고속도로 화장실을 보면 제 방보다도 훨씬 밝고 깨끗합니다. 더 향기롭고 따뜻하기도 합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렇게 만들었죠. 그런데 그게 가져오는 결과는 무엇일까요? 아무 문제없이 좋기만 한 것일까요?
다른 것은 다 제쳐놓고 똥오줌의 문제만 놓고 봅시다.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납니다. 똥오줌은 거름이 되도록 정상적으로 처리되면 생명의 양식입니다. 반면 쓰레기가 되도록 처리되면 생명을 살리는 양식이 아니라 모든 생명을 죽이는 독이 됩니다. 이에 더하여 그 화장실을 더 밝고 따뜻하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전기, 더 깨끗하고 향기롭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합성세제와 방향제들은 우리들의 생명, 환경을 심각하게 오염시켜 삶을 병들게 합니다.
관념적으로는 괜찮아 보이지만 실제적으로는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현대문명이 갖고 있는 심각한 모순이고 위험입니다. 앞뒤를 다 따져보면 현대문명은 우리 모두를 자기도 모르게 서로의 생명을 파괴하고 죽이는 사람이 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생명을 병들고 죽게 하는 악마의 인간을 만들고 있는 거죠. 내가 의도하지 않았고, 때로는 좋은 뜻으로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되고 있으니 실로 무서운 일입니다.
이런 점들을 놓고 보면, 우리가 실제를 잘 관찰하고 실제 생명의 진리에 맞게 살아가지 않으면 좋은 의도로 열심히 하고 는 것 자체가, 사실은 생명을 병들게 하고 죽게 하는 악마의 인간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이 현대문명의 모순이죠.
반야심경의 정신은, 우리가 보고 직면한 실제를 잘 관찰하고 직면한 생명의 질서를 잘 이해하고 그 생명의 질서에 맞게 살아가야 삶이 괜찮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자유로 나아가는 참지혜의 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평소 작은 불편을 기꺼이 감내하고 사는 삶이 지혜로운 삶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작은 불편을 감내하지 않으면 치명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작은 불편을 감내해야만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생명의 세계는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깨끗한 것에 대한 과장된 관념, 더러운 것에 대한 과장된 관념을 내려놓고 작은 불편을 흔연히 감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똥 한 번 밟으면 큰일 나는 줄 아는데, 큰 일 안 납니다. 그렇다고 똥 밟으라는 것은 아니고요. (웃음)
어떻든 우리 삶 속에서 반야심경의 정신을 명심하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작은 불편을 감내하는 삶을 극단적으로 거부하게 되면 생명의 양식인 똥이 생명을 죽이는 독이 되는 것처럼 생명을 해치게 됩니다. 우리는 작은 불편을 피하려고 깨끗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쓸데없는 환상을 만들어내고 환상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의도하지 않았는데, 나아가 좋은 의도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병들게 하고 죽게 하는 악마의 삶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은 직면한 실상,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제대로 살피고 이해해서 그 안에 깃든 정신에 맞도록 삶을 살아가야 그 삶이 바람직하고 희망적으로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끝으로 오늘 공부한 불구부정, 즉 더러움도 깨끗함도 없다는 말씀의 핵심을 정리해봅시다.
‘모든 것은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 어느 한쪽만을 좋다, 나쁘다로 왜곡시켜 단정하고 과장시켜 그 관념에 따라 삶을 살면 안 된다. 만약 그렇게 하면 결국 돌이킬 수 없는 함정에 내몰리게 되고, 삶을 불행하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 어리석음에서 깨어나자. 따라서 일상 속에서 작은 불편함이 갖고 있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파악하여 기꺼이 감내하며 사는 것이 삶의 참지혜이다. 그랬을 때 큰 불편을 초래하지 않는다.’
함께 공부한 반야심경의 정신, 오늘 배운 불구부정(不垢不淨)에 담긴 의미를 내 삶에 스며들도록 하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그게 진짜 수행입니다! 그게 진짜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우리 모두 그 길을 가는 도반이 되록 마음내고 정진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