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2.19 보현법회
<삼귀의와 반야심경> 강의 (9강)
반야심경, 본래부처, 본래부처로 사는 수행
도법스님(실상사 회주)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오늘 금선암 주지스님과 대중들이 실상사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모쪼록 올 한 해도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사는 게 많이 어렵죠? 저도 어려워요.(웃음) 하루 이틀만 어려운 게 아니라 살아온 70년이 다 어렵더라구요. 어쩌면 세상사는 게 만만치가 않은 거죠. 좋기만 한 인생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그렇게 좋기만 한 세상은 없어요. 그게 다 망상입니다. 헛생각이라는 거죠. 그런 것을 반야심경에서는 전도몽상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일반적인 대중언어로 하면 자승자박이라고 할 수 있죠. 전도몽상과 자승자박은 같은 말입니다.
우리가 이 법회에서 반야심경을 공부하고 있는데, 오늘은 우리 도량을 찾아주신 금선사 신도님들을 배려해서 그동안 우리가 해오던 진도와는 관계없이 종합적으로 공부를 할까 합니다. 먼저 반야심경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참 자유로 나아가는 참 지혜의 길
지금 여기, 자유자재로 관찰사유하는 참 사람 있네.
그는 참 지혜로 실천할 때
인연의 어울림으로 이루어진 다섯 무더기 모두 있지만
실제 비어있음을 잘 이해하여 대자유의 삶으로 나아갔네.
참 지혜의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 사리자여,
그대 몸 그대로 실제 비어있음과 다르지 않고
비어 있음 그대로 그대 몸과 다르지 않으며
그대 몸 그대로 비어있음이며 비어있음 그대로 그대 몸이니
느낌도 생각도 의지도 분별도 그러하네.
사리자여, 모든 사람의 비어있는 참모습엔
(그대가 생각하는)
태어남도 소멸함도 더러움도 깨끗함도 늘어남도 줄어듦도 본래 없네.
마찬가지로 몸도, 느낌도, 생각도, 의지도, 분별도,
눈도, 귀도, 코도, 혀도, 살갗도, 뜻도 없네.
물질도, 소리도, 맛도, 향기도, 촉감도, 기억도,
눈의 경계로부터 귀와 코와 혀와 촉감과 기억의 경계도 없네.
알지 못함도, 알지 못함이 사라짐도,
늙고 죽음도, 늙고 죽음이 사라짐도,
괴로움도, 괴로움의 원인도, 소멸도, 소멸의 길도,
지혜도, 얻음도 없네.
얻을 것이 없으므로 보살행자는
참 지혜로 실천하는 이 길에 의지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음으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항상 해탈 열반의 삶을 살며
모든 붓다들도 이 길에 의지하여 깨달음의 삶을 완성하네.
그런 까닭에 알 수 있네.
이 길은 가장 신비하고 밝고 높은 진언이니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네.
그러므로 이제 그 진언을 말하여라.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한문으로 할 때는 한 마디도 무슨 말인가 모르겠고, 이렇게 번역을 해놨어도 잘 모르겠죠?(모두 웃음) 한문으로 한 것과 번역한 것과의 차이를 대중들에게 물으면, 한문으로 할 때는 한 마디도 무슨 말인가 모르겠고, 번역해놓으면 몇 마디 알아들을 게 있더라, 이 정도 차이인 것 같아요.
보통 팔만사천법문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이 말은 “이것만은 불교야.”하는 불교는 없다는 말도 됩니다. 팔만사천은 인도사람들의 사유방식인데, 실제 팔만사천이 아니라 무지무지하게 많다,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많다는 것입니다. 불교라는 게 그렇게 많다는 말로 이해해도 됩니다.
왜 그렇게 많을까요? 사람들의 삶을 고통스럽고 불행하게 만드는 번뇌가 그만큼 많기 때문이죠. 병이 많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처방이 많아지고 약이 많아지는 것이죠. 병의 숫자, 번뇌망상의 숫자만큼 법문이 많아진 것입니다.
지금 같으면 인구가 70억이죠. 그러면 그 70억 인구의 번뇌, 병이 몇 가지이겠습니까. 70억 가지인 거예요. 그러면 법문이 몇 개 있어야 합니까. 적어도 70억 개 이상이죠. 이런 것을 다 모아놓은 것이 경전이거든요. 지금 식으로 말한다면, 팔만사천이 아니라 70억 법문이라고 하겠죠?(웃음)
그런데 이 모든 법문에 가장 핵심적인 공통된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이 부처님의 탄생게에 잘 나타나있습니다. 부처님의 삶을 설명한 <불본행집경>이라는 경전이 있는데, 그 경전에 부처님 태어날 때 선언한 탄생게가 있습니다. 바로 ‘천상천하유아독존 삼계개고아당안지(天上天下唯我獨尊 三界皆苦我當安之)’라는 선언이죠. 만약 팔만사천법문의 내용을 뼈대만 모아서 묶어 표현한다면 이 두 구절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 대승불교 경전에서는 ‘본래부처와 동체대비’, 선불교라는 한국불교의 전통에서는 ‘본래면목과 자유자재의 삶’이라고 표현합니다. 세 가지 다 많이 들어보신 말들이죠?
① 천상천하유아독존 삼계개고아당안지
② 본래부처와 동체대비
③ 본래면목과 대자유의 삶
어떻습니까? 말은 달라도 뜻은 다 비슷하게 보이죠?
그리고 이런 말의 끝은 항상 ‘자비롭게 마음 쓰고 살아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자비롭게 마음 쓰고 살아야 우리가 살고 싶은 평화로운 삶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초기경전을 봐도 그렇고, 금강경이나 화엄경, 그리고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반야심경을 봐도 그렇습니다. 내용을 요약해보라고 하면 다 이렇게 정리가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세상에 오신지 2700년이 다 되어 갑니다. 돌아가신 날로 보면 2600년이죠. 석가모니 부처님이 세상에 태어남으로 해서 그 이전 역사와 그 이후 역사가 달라졌습니다.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것은, 부처님이 태어나기 전에는 사람에 대해 ‘죄 많은 업보중생’으로 규정했습니다. ‘업보중생이기 때문에 당연히 삶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천하가 다 그렇게 알고 믿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싯다르타란 이름으로 수행을 할 때 당연히 그렇게 알고 믿고 수행을 했죠. 그것을 6년 고행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고행의 방법으로는 해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싯다르타는 사람들이 다 길이라고 알고 믿고 가고 있는 그 길을 과감히 버립니다. 사람들이 이리 가면 이게 있고, 저리 가면 저게 있다고 이야기해줘서 그 길을 다 가봤는데 아니었던 거예요.
자, 이제 싯다르타는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는 길이 없는 곳에 서있는 거지요. 마치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허허벌판 같은 사막 한 가운데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요. 또는 아무것도 없는 망망대해에 일엽편주를 타고 있는 꼴인 거죠. 이제 어찌해야 할까, 어디로 가야 할까, 알 수가 없는 상황에 처해버린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럴 때 우리라면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아무 길도 보이지 않고, 어디로 가야하는지도 알 수 없고, 그런데 길을 가야하고, 해답은 찾아야 하고…. 모르시겠어요? (…)
그럼 부처님이 어떻게 하셨는지를 봅시다.
부처님은 그 상황에서 가장 가깝게 있는 것을 관찰합니다. 다른 데를 막 쫓아다니지 않고, 자신과 가장 가깝게 있는 것을 관찰하는 거예요. 여러분에게 가장 가깝게 있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나요!) 그렇습니다. 가장 첫 번째는 자기 자신이에요. 그 다음이 너고.
부처님은 자기 자신을 관찰합니다. 도대체 나라고 하는 존재가 어떤 존재이기에 사는 게 이렇게도 팍팍하고 힘이 들까. 왜 이렇게 고통스럽고 불행할까…. 그렇게 자기 자신의 문제를 제대로 관찰해서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물건을 잃어버렸다면 제일 첫 번째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잃어버린 곳을 알아야 하죠. 잃어버린 곳을 알고 그곳에서 찾아야 물건을 찾을 수 있잖아요. 잃어버린 곳을 모르고 다른 곳에서 찾는 한 특검이 와도 안 돼요.(모두 웃음) 부처님을 동원해도 안 되고 하느님을 동원해도 안 돼요.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해답이 있다고 알고 믿었던 길로 열심히 가봤는데, 해결이 안 되었어요. 왜 해답이 안나놨을까요? 왜 해답을 못 찾았을까요? 물건을 잃은 그 곳에서 찾아야 하는데, 엉뚱한 곳에서 찾으니 아무리 해도 찾아지지 않는 거죠. 당연한 결과죠.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잃어버린 그곳에서 찾아야 되죠. 그렇기 때문에 다시 문제를 잘 관찰해보게 됩니다. 그 결과 자신이 자신의 참모습을 잘 몰랐고, 세상 사람들도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문제의 해답을 찾기 위해 엉뚱한 곳을 떠돌아다니다가 다시 처음 길을 잃은 그곳인 자신에게로 돌아와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잘 관찰해보니 자신의 참모습을 제대로 알지 못한 데서부터 길이 어긋나버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치 귀중한 물건을 잃어버렸는데, 잃어버린 현장과 관계없이 전혀 엉뚱한 곳에서 죽을 고생을 하며 돌아다니다 처음 잃어버렸던 그 자리로 돌아온 셈이죠.
그렇게 해서 알게 된 것이 존재의 실상, 존재의 참모습, 나의 참모습, 인간의 참모습입니다. 불교에서 흔히 하는 말로 하면 ‘유아독존’, ‘본래붓다’, ‘본래면목’을 알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업보중생이 아니고, 본래부처”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어떻습니까. 업보중생의 신세에서 부처의 신세로 바뀌었으니 천지가 개벽한 거 아닌가요? 부처라는 말은 최고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그보다 더 좋은 것, 더 훌륭한 존재는 없다는 말입니다. 제 이야기가 좀 이해가 되십니까?(네)
정말 천지개벽할 이야기지요. 바로 그 순간에 지옥에 떨어질 팔자에서 극락세계로 갈 팔자로 바뀐 거잖아요. 이 세상 그 어디에 이보다 더한 천지개벽이 있겠어요? 석가모니부처님이 역사에 등장해서 그 이전 역사와 그 이후 역사가 확연하게 달라진 것은 바로 이 지점, 즉 ‘사람이 업보중생이 아니고 본래부처’라는 진실을 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를 하는 사람들은 다른 건 다 모르더라도 한 가지는 반드시 알아야 됩니다. “나는, 인간은 업보중생이 아니라 본래부처”라는 진실을. 불교를 제대로 하고 있는가, 아닌가의 기준이자 핵심은 자신이 본래부처라는 진실을 제대로 이해하고 확신하고 사는가, 아닌가에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오늘 이 사실을 잘 파악하고 이해하고 확신한다면, 팔만대장경을 다 공부해 마쳤다고 해도 됩니다. 어떻습니까? 그럴 듯하게 여겨집니까? (웃음)
우리 불자들이 너무 오랫동안 ‘죄 많은 업보중생’이라는 말을 들어왔고, 그 사고방식에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이 ‘본래부처’라는 진실을 곧바로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겠습니다.
사람이 왜 본래부처인가
‘사람이 본래부처’라고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지금 그 이유를 다 말할 수는 없고, 우선 두 가지만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첫째,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게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생명을 갖고 있는 자기 자신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지요. 천하를 다 준다고 자기 목숨을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에게 내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생명은 천하보다도 더 귀하다는 말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만고의 진리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네)
우리가 아무리 돈과 권력을 좋아한다고 해도 본인의 목숨과 바꿀 수 있겠습니까? 제 정신을 갖고 있는 한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천하의 제일이 생명을 갖고 살고 있는 여기 내 존재 자체라는 거죠. 그것을 부처님은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말로 표현하셨고, 대승불교에 오면 ‘본래부처’라고 선불교 전통에서는 본래면목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본인이 직면하고 있는 자신의 참모습을 잘 따져보지 않고 현상적으로, 습관적으로만 생각하면 인생이 하찮아 보이지만, 하나하나 잘 따져서 확인해보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이 내 생명, 그대 생명, 우리 생명입니다.
두 번째, 인간이란 주체적으로 마음먹고 행동하기만 하면 행동하는 즉시 본인이 뜻하는 것이 바로 이루어지는 위대한 창조주, 위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마음먹고 행동하기만 하면 소원성취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불자들이 소원성취, 소원성취하는 말을 많이 하는데, 무엇을 이루고 싶은가요? 제가 즉각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물론 이루고 싶은 것이 이것저것 많이 있겠죠. ‘돈이 있었으면 좋겠다.’, ‘출세했으면 좋겠다.’, ‘사업이 잘되었으면 좋겠다.’, ‘농사가 잘 되었으면 좋겠다.’, ‘삼재팔난을 안 만났으면 좋겠다.’ 등등. 그런데 왜? 무엇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이 이루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합니까? (마음이 평화롭고 행복하고 싶어서요.) 그렇죠. 행복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여기에 나는 평화롭고 행복하지 않아도 돼, 돈만 있으면 돼. 권력만 있으면 돼 하는 분 계십니까?(모두 웃음). 그런 분 안계세요?(웃음)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뭐라고 말합니까? ‘저 사람은 비정상이야’라고 말하겠죠? 그러니 결론적으로 우리가 이루고 싶은 소원은 뭐예요? 평화롭고 행복한 삶이잖아요.
돈이든 권력이든 출세든 사업번창이든… 이 모든 것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렇게 되면 평화롭고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그러는 것이죠.
그런데 정말 돈이 있고 권력이 있으면 인간적으로 평화롭고 행복해질까요?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이루는 근본조건, 충분조건은 아니지요. 그렇기 때문에 돈, 명예, 권력 따위가 평화와 행복을 이루는 조건이라는 생각은 다 망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죠. 실제로 확인해보면 대부분 생각의 장난이고 말의 장난일 뿐입니다.
하나 예를 들어 생각해봅시다. 사람들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하는데, 그 통일은 왜 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유가 뭘까요? 두말 할 것 없이 평화롭고 행복하려고 하는 거죠. 만일 통일을 했는데, 평화롭고 행복하지 않다면 어떨까요? 그래도 우리의 소원은 통일일까요? 그렇지 않죠. 실제 내용을 구체적으로 따져보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라 ‘평화와 행복’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야말로 ‘평화와 행복’만이 우리 모두의 궁극적인 소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평화롭고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바라는 평화는 어디에도 따로 있지도 않고 그 누가 주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소원인 행복도, 우리의 소원인 희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아무리 평화와 행복을 찾아 천하를 돌아다니고 그 누구를 향해 빌어봐야 평화와 행복을 찾을 수도 얻을 수도 없습니다. 인도에도, 히말라야에도, 그 어디를 가봐도 평화와 행복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부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고요. 현실적으로 겪어봐도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평화와 행복을 소원하는 것 자체가 다 헛짓일까? 그렇지 않습니다. 평화와 행복은 어디에도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하여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조건 따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손뼉소리처럼 평화와 행복의 조건을 만들면 있고, 안 만들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디에서 누가 만드는가? 지금 여기에서 본인이 만드는 거죠. 평화와 행복은 부처님이 주는 것도 아니고 하느님이 주는 것도 아니고, 대통령이 주는 것도 아닙니다. 돈이 주지도 않고 권력이 주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본인이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원하는 평화와 행복은 본인이 조건을 만들면 평화와 행복이 현실이 되는 것이고, 조건을 만들지 않으면 평화와 행복은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마치 손뼉소리와 같지요.
손뼉소리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손뼉소리는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만들면 있고, 안 만들면 없는 것입니다.
손뼉소리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 어려운 이야기입니까? 지금 손뼉소리가 없지요? (네) 왜 없습니까? (손뼉을 안쳤으니까요.) 그렇습니다. 조건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없는 것입니다. 자 지금 두 손바닥을 부딪쳐 손뼉소리를 냈습니다. 그 순간 손뼉소리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왜 있습니까? (손뼉을 쳤으니까요.) 그렇습니다. 두 손바닥을 부딪쳐 소리가 나도록 조건을 만들기 때문이지요. 어떻습니까? 이렇게 실제를 확인해 보면 손뼉소리는 있다고도 없기도 하다고 할 수 있죠, 없다고도 할 수 없고 또는 있기도 하고.
이와 같이 세상 모든 일은 조건을 만들면 있고, 조건을 만들지 않으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원하는 평화니, 행복이니, 꿈이니, 희망이니 하는 것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자신이 조건을 만들면 있고, 안 만들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본인이 희망하는 평화와 행복을 창조할 위대한 능력이 본래 갖춰져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대단하지 않습니까?
표정을 보니, 별로 공감이 잘 안되나 보네요.(웃음)
제가 보기에 우리 문제가 뭐냐하면, 본인에게 주어진 위대한 창조능력을 여기는 거예요. 내가 마음먹고 행동하기만 하면 지금 바로 소원을 이룰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이 있다는데, 어디 가서 누구에게 빌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먼 훗날 또는 죽은 다음에 되는것도 아니고, 지금 당장 여기에서 실현할 수 있다는데, 그래 안 믿어진다는 표정들이네요.(모두 웃음)
자, 그러면 만약 지금여기에서 직접 사실 확인이 되면 어쩌시겠습니까? 믿으시겠습니까?(웃음) “인간은 행위 하는 대로 즉각 이루어지는 존재다.” 이 말을 갖고 실제로 확인해봅시다.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를 한 번 들어봅시다. 여러분은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었던 적 있으신가요? (네.) 그럼 잘 알아들으시겠네요. 자, 여기 어떤 사람이 목이 말라 죽을 지경입니다. 그 상황에서 시원한 물을 한그릇 마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목마름이 십년 뒤에 해결될까요 즉각 해결될까요? (즉각 해결됩니다.) 그렇습니다. 즉각 해결되요.
예를 더 들어보지요.
어떤 사람이 ‘나는 진실한 인간으로 살고 싶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누군가를 상대할 때 진실하게 대하고 진실하게 생각하고, 진실하게 말하고, 진실하게 행동했습니다,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즉각 진실한 사람이 되는 거죠. 전생에 죄가 많은 것 때문에 지금 진실하게 말하고 행동했는데 진실한 사람이 안 될까요? 아니죠? 전생의 죄와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내가 진실하게 행위하면 지금 즉각 진실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만약 어떤 사람이 전생에 선행도 많이 하고 복도 많이 지었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사람이 금생에 와서 거짓되게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어떨까요? 그러면 전생의 선행과 복 때문에 그 행동과 관계없이 진실한 사람이 될까요? 그렇지 않죠? 전생의 복과 하등의 관계없이 지금 행위한데로 지금 즉각 거짓된 사람이 됩니다.
따라서 전생에 죄가 있네, 사주팔자가 안좋네, 타고난 복이 있네, 없네 하는 이야기들은 다 부질없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죄많은 업보’이라는 데 꿰어맞춘 논리들입니다. 지금 내가 여기에서 마음먹고 진실되게 말하고 행동하기만 하면, 전생에 죄가 많든 복이 많든, 금생에 사주팔자가 좋은 나쁘든 즉각 진실한 사람이 됩니까? 어떤 이론도 있을수 없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능력입니까.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요? 스스로의 운명은 마음껏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소유자자 바로 우리들의 본래 참모습인 것입니다.
내가 평화로운 사람이 되고 싶으면, 바로 평화롭게 행동하십시요 즉각 평화로워집니다. 내가 진실된 사람이 되고 싶으면, 바로 진실되게 행동하십시요 즉각 진실해집니다. 내가 너그러운 사람이 되고 싶으면, 바로너그럽게 행동하십시요 즉각 너그러운 사람이 됩니다. 나아가 내가 복 많은 사람이 되고 싶으면, 복을 지으십시오 그러면 바로 복 많은 사람이 됩니다.
‘촛불’에서 본 본래부처의 삶
최근 우리 사회에 붓다의 가르침이 현실에 바로 실현되는 모습을 우리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천만평화의 촛불광장, 평화의 촛불행동입니다. 그동안 ‘광장’하면 무엇이 떠올랐습니까? 주로 투쟁의 광장을 떠올립니다. 강력투쟁, 강경진압-이게 기본이었죠. 그래서 ‘과격투쟁’이다, ‘과잉진압’이다를 둘러싸고 늘 싸워왔습니다. 그래서 항상 창과 방패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래서 광장하면, 늘 투쟁의 광장이라고 연상이 되죠.
그런데 이번에는 어땠습니까? 평화로운 광장이 된 거예요. 아주 놀라운 일이 벌어진 거죠. 그런데 그 평화의 광장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부처님이? 하느님이? 전생의 복이? 아니면 대통령이 정치인들의 장관, 종교인들이 아니죠 그럼 누구일까요 창조주시민 한사람 한사람들의 창조해낸 결과이죠 (모두 박수)
그렇습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거죠. 이 평화의 광장은 정부도, 재벌도, 언론도, 국회의원도, 권력자도, 장관도, 대통령도, 잘났다는 사람들도 아니고, 바로 우리 국민들이 이루어낸 것입니다. 평화를 희망하는 국민들이 평화를 염원하는 보통사람들이 만들어낸 평화로운 광장이었던 거죠.
평화의 광장을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평화롭게 생각하고 말하고 여러분이 행동해서! 전 세계가 놀라고 감동하는 평화의 촛불광장은 국민들이 평화롭게 행동해서 만든 것입니다. 대통령과 장관과 국회의원들이 전세계에 나라망신을 시켰는데, 평화를 희망하는 우리 국민들이 세계를 감동시키는 평화의 광장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너무 자랑스럽고 위대하게!
이제 대통령 탄핵이냐 아니냐로 또 시시비비하고 있는데, 저는 이미 끝났다고 봅니다. 탄핵이 되는가 안 되는가에 관계없이 이미 국민은 승리했고, 국민들이 원하는 평화를 실현해냈습니다. 앞으로도 약간의 부침들은 있겠지만 아무도 되돌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세계를 놀라게 한 천만평화촛불 광장이 이 사건이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본래부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죠? 굳이 불교적 언어로 표현하면 ‘업보중생’의 삶에서 ‘본래부처’의 삶으로 크게 전환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평소 업보중생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부처님이 해주겠지’, ‘하느님이 해주겠지’, ‘어떤 신비한 존재가 해주겠지’, ‘나라나 대통령이 해주겠지’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삶은 창조하는 주인공으로 당당하게 행동하지 못합니다.
반면 ‘내가 본래부처’ 라고 자각하고 확신하는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어떻게 행위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운명을 창조하는 주인으로 당당하게 행동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이번에 우리 국민이 나라의 주인답게 주인노릇을 당당하게 잘 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겠어’, ‘대통령이 해주겠지’, ‘정부가 해주겠지’, ‘국회의원들이 해주겠지’라는 잘못된 생각을 떨쳐내고, ‘내가 세상의 주인’, ‘내가 나라의 주인’,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며, ‘따라서 이 광장을 우리가 원하는 광장이 되도록 하겠다.’라고 마음먹고 그렇게 행동한 것이죠. 그리고 그렇게 마음먹고 하니까 어떻게 되었어요? 평화로운 광장이 만들어졌습니다 그야말로. 이런 게 바로 기적이 일어난거죠.
우리 모두는 본인이 마음먹으면 천당도 지옥도 창조해내는 대단한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기죽어 살아야 됩니까? 새해, 입춘이 돌아오니 여기저기서 ‘삼재’니, ‘팔난’이니 하는 말을 많이 듣기도 할텐데, 그런 말에 기죽지 마세요. 그런 말에 기죽는 것은 불교를 제대로 하고 있지 않은 겁니다. ‘사람은 본래부처’, ‘내가 내 운명의 주인’이라는 생각이 불자들이 견지해야 할 올바른 사유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통해서 깨달아야 할 내용입니다.
우리 다 함께 잘 새겨봅시다.
“사람은 본래부처다. 나는 본래부처다. 내가 행위 하는 대로 내 인생은 실현된다.” 이게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고, 전부입니다.
본래부처로 사는 두 가지 생활
그러면,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본래부처니까 부처로 살아야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부처로 사는 것인가. 부처로 사는 방법은 두 가지예요.
첫째, 노는 입에 염불하는 수행생활입니다. (모두 웃음)
쉽게 가르쳐주니까 시시하게 생각하는 것 같네.(웃음) 쉽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노는 입에 염불하지 않아서 최순실 사태와 같은 상황, 박대통령이 탄핵으로 가는 상황이 만들어진 겁니다. 노는 입에 염불을 제대로 했다면 절대 이런 일이 안 벌어지죠. 노는 입에 염불하는 것이 쉬울 것 같죠?
자, 함께 생각해봅시다.
마음노는 입에 염불 안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다음은 습관적으로 쓸데없는 일을 벌리게 됩니다. 지는 거예요. 쓸데 없는 생각을 하는 거예요.
한번 따져봅시다 ‘관세음보살’ 하고 염불할 때 ‘에이, 어디 가서 술이나 먹어야지’ 하는 마음이 일어납니까? (모두 웃음 안 일어나요) 그렇죠 ‘관세음보살’ 하고 염불하지 않고 본인의 마음과 입을 내버려두면 ‘에잇, 어디 가서 술이나 먹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죠 안그런가요? 비가 오면 비가 오니까 한잔하자. 날씨 좋으면 날씨 좋으니까 한잔하자… 대부분 이렇게 되잖아요.
생각이나 말로는 ‘노는입에 염불한다’ 는 말이 쉬어보이지만 실제로는 노는 입에 염불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사실은 정신 바짝 차려서 됩니다. 엎디어서 하든 누워서 하든 화장실에서 하든, 그런 것은 관계없어요. 꼭 무릎꿇고 합창하고 법당에서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은 언제 어디서든 관계없이 그냥 정신 바짝 차려서 하면 됩니다.
좀더 실제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부르는 순간, 나는 누구입니까?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부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부르는 사람이 괜찮은 사람이겠습니까, ‘에잇, 어디 가서 술이나 먹자’하는 사람이 괜찮은 사람이겠습니까? (모두웃음) (관세음보살 부르는 사람이요.) 또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사람이 괜찮은 사람이겠습니까, 누구 험담이나 하는 사람이 괜찮은 사람이겠습니까? 이제 물어보나마나죠?(웃음) 그러면 누가 부처 같은 사람이겠습니까? 당연히 관세음보살 부르는 사람이 부처 같은 사람이죠.
자, 그러면 혼자 있을 때는 어떻게 한다? (웃음) (노는 입에 염불이요.) 그렇죠 하지만 그것만 갖고는 안됩니다.
“노는 입에 염불한다. 그리고 정신 차려 죽기살기로 한다.”입니다.
정신 바짝 차려서 공 들이고 공 들여서 해야 합니다.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한 번 하고 정신 놓으면 바로 마음과 입이 전혀 엉뚱하게 어딘가로 제멋대로 가버립니다. 그래야 효과를 봅니다.
두 번째 방법은 부지깽이 노릇 하는 수행생활입니다.
부지깽이는 무엇이죠? 다른 나무가 잘 타도록 도와주는 나무입니다.
불교용어에 ‘아상덩어리’라는 말이 있어요. 아상(我相)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보셨죠? “상을 내면 안 된다”, “아상이 많다.” 이런 말 많이 하잖아요. 아상을 다른 말로 하면, 자기중심의 이기적인 욕심덩어리라는 것입니다. 부지깽이(나무)를 사람에 비유하자면, ‘아상덩어리’, ‘이기적인 욕심덩어리’입니다.
우리 모두 아상이 있고 욕심이 있습니다.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아상덩어리, 욕심덩어리로 똘똘 뭉쳐있어요. 그리고 부지깽이 나무는 그냥 놔두면 절대 닳아 없어지지 않습니다. 욕심덩어리도 그냥 놔두면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상덩어리 욕심덩어리인 그 나무를 부지깽이로 잘 쓰면 잘 쓰는 만큼 줄어들고 마침내 없어집니다. 이 인상덩어리, 욕심덩어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써야 잘 없어질까요?
부지깽이 나무가 하는 역할이 무엇이죠? 다른 나무를 잘 타도록 돕는 것입니다. 다른 나무가 잘 타도록 열심히 노력하면 아궁이 나무가 잘 타는 만큼 부지깽이도 점점 타서 적어지고 적어지고, 줄어들고 줄어들고, 마지막에는 잘 타고 있는 불구덩이에 던져 사라지게 됩니다. 욕심덩어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이 잘 되도록 열심히 노력하면 자기 욕심덩어리가 적어지고 적어지고, 줄어들고 줄어들어서 끝내는 다 사라지게 됩니다. 모든 문제의 원인으로 작동하고 있는 자기중심의 이기적 욕심덩어리의 뿌리가 뽑히게 됩니다.
절집에서 늘 듣는 말이 “마음을 비워라”, “욕심을 비워라”, “아상을 버려라”, “내려놓아라” 등등. 입만 열면 하는 말을 합니다. 그건데 아무리 말로 해도 아상이 버려지거나 욕심이 비워지지 않습니다. 내 욕심은 너를 존중하고 잘 받들어 모실때 비워집니다. 다른 나무가 잘 타도록 하는 과정에서 부지깽이 자신도 타고 사라지는 이치와 같은 거죠
다른 나무는 누구입니까? 상대방이에요. 그 상대방이 우리가 모셔야 할 본래부처입니다. 엄마부처님도 있고 아빠부처님도 있고 아내부처님도 있고 남편부처님도 있고 아이부처님도 있고 아들부처님 딸부처님 이웃부처님… 내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본래부처님입니다.
우리는 부처님께 어떻게 대하죠? 진심으로 존중하고 고마워합니다. 본래부처인 상대방을 본래부처로 잘 대접하면 나는 어떻게 됩니까? 현재 내 삶이 본래부처의 삶이 됩니다. 누군가를 상대해서 평화롭게 말하고 행동하는 삶이 부처의 삶이고, 늘상 그렇게 사는 사람이 부처님입니다. 그렇게 살면 나는 본래부처로 잘 사는 것이고, 그러면 삶이 편안해지고 아름다워집니다.
또 내가 평화롭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상대방은 어떻겠습니까. 먼저 기분이 좋겠고, 혹 미움이나 적대감이 있었다면 그것이 조금씩 줄어들 것이, 나아가서는 본인도 평화롭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방향으로 노력하게 되죠. 결과적으로 나도 좋고 너도 좋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는 것을 불교적으로는 무엇이라고 하지요? (자리이타요) 그렇습니다. 그것을 자리이타(自利利他)라고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하게 되면 나에게는 좋은데 너에게는 안 좋다거나 너에게는 좋은데 나에게는 안 좋다거나 하는 일은 안 생깁니다. 너한테 좋으면 나한테도 좋고 나한테 좋으면 너한테도 좋은 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불교를 제대로 하고 있는가 아닌가를 알려면, 나한테 좋은 것이 너한테도 좋은가, 너한테 좋은 것이 나한테도 좋은가를 확인해보면 됩니다. 나한테 좋은 것이 너한테도 좋고, 너한테 좋은 것이 나한테도 좋으면 불교를 제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의 살림살이죠. 반대로 나에게는 좋은데 너에게는 좋지 않고, 너에게는 좋은데 나에게는 좋지 않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것이죠.
이렇게 삶의 문제를 이렇게 다루어가는 것이 본래 부처의 삶입니다. 이것을 부지깽이 노릇을 잘 하는 수행의 삶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달리 말하면 자비롭게 마음쓰고 자비롭게 말하고 자비롭게 행동하는 삶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부처로 사는 두 가지 생활, 즉 노는 입에 염불하는 수행생활, 부지깽이 노릇하는 수행생활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까? 죽기살기로 해야 한다, 애써서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삼천 배 하듯이, 십만 배 하듯이. 용맹정진 하듯이 어디에서? 지금 여기 내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법당이나 선방에서 하는 것은 다 연습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두 발을 딛고 살아가고 있는 현장이 본게임입니다. 연습은 무엇을 위해서 합니까? 본게임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연습을 아무리 잘해도 본게임을 시원찮게 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연습은 본 게임을 위한것이지 때문에 결론적으로는 본게임장인 현장에서 일상적으로 본래부처로 살아보면 확실하게 잘하는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오늘 공부한 것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사람은 천상천하유아독존, 본래부처다. 본래부처로 사는 두 가지 생활은 첫째, 노는 입에 염불하는 수행, 둘째, 부지깽이 노릇하는 수행이다. 이 두 가지가 본래부처의 삶을 현재 내 삶으로 만들어가는 최고의 길이다.”
새해, 입춘을 맞이하여 오늘 함께 하신 모든 분들이 본래부처로 사는 삶을 거듭거듭 잘 사유하고 음미해서 그것이 내 피가 되고 살이 될 수 있도록,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즉 노는 입에 염불하고 부지깽이 노릇하는 수행을 잘 하십시요. 그러니까 삼재가 아니라 삼재할애비가 오셔도 저절로 도망가게 되었습니다. 아무 걱정마시고 본래부처라는 확신으로 당당하게 잘 사십시요. 저절로 복이 만들어집니다. 아무쪼록 일거수 일투족이 복된 삶이 될 수 있도록 잘 살아봅시다.
2017.2.19 보현법회
<삼귀의와 반야심경> 강의 (9강)
반야심경, 본래부처, 본래부처로 사는 수행
도법스님(실상사 회주)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오늘 금선암 주지스님과 대중들이 실상사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모쪼록 올 한 해도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사는 게 많이 어렵죠? 저도 어려워요.(웃음) 하루 이틀만 어려운 게 아니라 살아온 70년이 다 어렵더라구요. 어쩌면 세상사는 게 만만치가 않은 거죠. 좋기만 한 인생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그렇게 좋기만 한 세상은 없어요. 그게 다 망상입니다. 헛생각이라는 거죠. 그런 것을 반야심경에서는 전도몽상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일반적인 대중언어로 하면 자승자박이라고 할 수 있죠. 전도몽상과 자승자박은 같은 말입니다.
우리가 이 법회에서 반야심경을 공부하고 있는데, 오늘은 우리 도량을 찾아주신 금선사 신도님들을 배려해서 그동안 우리가 해오던 진도와는 관계없이 종합적으로 공부를 할까 합니다. 먼저 반야심경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참 자유로 나아가는 참 지혜의 길
지금 여기, 자유자재로 관찰사유하는 참 사람 있네.
그는 참 지혜로 실천할 때
인연의 어울림으로 이루어진 다섯 무더기 모두 있지만
실제 비어있음을 잘 이해하여 대자유의 삶으로 나아갔네.
참 지혜의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 사리자여,
그대 몸 그대로 실제 비어있음과 다르지 않고
비어 있음 그대로 그대 몸과 다르지 않으며
그대 몸 그대로 비어있음이며 비어있음 그대로 그대 몸이니
느낌도 생각도 의지도 분별도 그러하네.
사리자여, 모든 사람의 비어있는 참모습엔
(그대가 생각하는)
태어남도 소멸함도 더러움도 깨끗함도 늘어남도 줄어듦도 본래 없네.
마찬가지로 몸도, 느낌도, 생각도, 의지도, 분별도,
눈도, 귀도, 코도, 혀도, 살갗도, 뜻도 없네.
물질도, 소리도, 맛도, 향기도, 촉감도, 기억도,
눈의 경계로부터 귀와 코와 혀와 촉감과 기억의 경계도 없네.
알지 못함도, 알지 못함이 사라짐도,
늙고 죽음도, 늙고 죽음이 사라짐도,
괴로움도, 괴로움의 원인도, 소멸도, 소멸의 길도,
지혜도, 얻음도 없네.
얻을 것이 없으므로 보살행자는
참 지혜로 실천하는 이 길에 의지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음으로 두려움이 없어서
뒤바뀐 헛된 생각을 멀리 떠나 항상 해탈 열반의 삶을 살며
모든 붓다들도 이 길에 의지하여 깨달음의 삶을 완성하네.
그런 까닭에 알 수 있네.
이 길은 가장 신비하고 밝고 높은 진언이니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네.
그러므로 이제 그 진언을 말하여라.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한문으로 할 때는 한 마디도 무슨 말인가 모르겠고, 이렇게 번역을 해놨어도 잘 모르겠죠?(모두 웃음) 한문으로 한 것과 번역한 것과의 차이를 대중들에게 물으면, 한문으로 할 때는 한 마디도 무슨 말인가 모르겠고, 번역해놓으면 몇 마디 알아들을 게 있더라, 이 정도 차이인 것 같아요.
보통 팔만사천법문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이 말은 “이것만은 불교야.”하는 불교는 없다는 말도 됩니다. 팔만사천은 인도사람들의 사유방식인데, 실제 팔만사천이 아니라 무지무지하게 많다,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많다는 것입니다. 불교라는 게 그렇게 많다는 말로 이해해도 됩니다.
왜 그렇게 많을까요? 사람들의 삶을 고통스럽고 불행하게 만드는 번뇌가 그만큼 많기 때문이죠. 병이 많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처방이 많아지고 약이 많아지는 것이죠. 병의 숫자, 번뇌망상의 숫자만큼 법문이 많아진 것입니다.
지금 같으면 인구가 70억이죠. 그러면 그 70억 인구의 번뇌, 병이 몇 가지이겠습니까. 70억 가지인 거예요. 그러면 법문이 몇 개 있어야 합니까. 적어도 70억 개 이상이죠. 이런 것을 다 모아놓은 것이 경전이거든요. 지금 식으로 말한다면, 팔만사천이 아니라 70억 법문이라고 하겠죠?(웃음)
그런데 이 모든 법문에 가장 핵심적인 공통된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이 부처님의 탄생게에 잘 나타나있습니다. 부처님의 삶을 설명한 <불본행집경>이라는 경전이 있는데, 그 경전에 부처님 태어날 때 선언한 탄생게가 있습니다. 바로 ‘천상천하유아독존 삼계개고아당안지(天上天下唯我獨尊 三界皆苦我當安之)’라는 선언이죠. 만약 팔만사천법문의 내용을 뼈대만 모아서 묶어 표현한다면 이 두 구절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 대승불교 경전에서는 ‘본래부처와 동체대비’, 선불교라는 한국불교의 전통에서는 ‘본래면목과 자유자재의 삶’이라고 표현합니다. 세 가지 다 많이 들어보신 말들이죠?
① 천상천하유아독존 삼계개고아당안지
② 본래부처와 동체대비
③ 본래면목과 대자유의 삶
어떻습니까? 말은 달라도 뜻은 다 비슷하게 보이죠?
그리고 이런 말의 끝은 항상 ‘자비롭게 마음 쓰고 살아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됩니다. 자비롭게 마음 쓰고 살아야 우리가 살고 싶은 평화로운 삶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초기경전을 봐도 그렇고, 금강경이나 화엄경, 그리고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반야심경을 봐도 그렇습니다. 내용을 요약해보라고 하면 다 이렇게 정리가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세상에 오신지 2700년이 다 되어 갑니다. 돌아가신 날로 보면 2600년이죠. 석가모니 부처님이 세상에 태어남으로 해서 그 이전 역사와 그 이후 역사가 달라졌습니다.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것은, 부처님이 태어나기 전에는 사람에 대해 ‘죄 많은 업보중생’으로 규정했습니다. ‘업보중생이기 때문에 당연히 삶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천하가 다 그렇게 알고 믿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싯다르타란 이름으로 수행을 할 때 당연히 그렇게 알고 믿고 수행을 했죠. 그것을 6년 고행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고행의 방법으로는 해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싯다르타는 사람들이 다 길이라고 알고 믿고 가고 있는 그 길을 과감히 버립니다. 사람들이 이리 가면 이게 있고, 저리 가면 저게 있다고 이야기해줘서 그 길을 다 가봤는데 아니었던 거예요.
자, 이제 싯다르타는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는 길이 없는 곳에 서있는 거지요. 마치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허허벌판 같은 사막 한 가운데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요. 또는 아무것도 없는 망망대해에 일엽편주를 타고 있는 꼴인 거죠. 이제 어찌해야 할까, 어디로 가야 할까, 알 수가 없는 상황에 처해버린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럴 때 우리라면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아무 길도 보이지 않고, 어디로 가야하는지도 알 수 없고, 그런데 길을 가야하고, 해답은 찾아야 하고…. 모르시겠어요? (…)
그럼 부처님이 어떻게 하셨는지를 봅시다.
부처님은 그 상황에서 가장 가깝게 있는 것을 관찰합니다. 다른 데를 막 쫓아다니지 않고, 자신과 가장 가깝게 있는 것을 관찰하는 거예요. 여러분에게 가장 가깝게 있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나요!) 그렇습니다. 가장 첫 번째는 자기 자신이에요. 그 다음이 너고.
부처님은 자기 자신을 관찰합니다. 도대체 나라고 하는 존재가 어떤 존재이기에 사는 게 이렇게도 팍팍하고 힘이 들까. 왜 이렇게 고통스럽고 불행할까…. 그렇게 자기 자신의 문제를 제대로 관찰해서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물건을 잃어버렸다면 제일 첫 번째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잃어버린 곳을 알아야 하죠. 잃어버린 곳을 알고 그곳에서 찾아야 물건을 찾을 수 있잖아요. 잃어버린 곳을 모르고 다른 곳에서 찾는 한 특검이 와도 안 돼요.(모두 웃음) 부처님을 동원해도 안 되고 하느님을 동원해도 안 돼요.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해답이 있다고 알고 믿었던 길로 열심히 가봤는데, 해결이 안 되었어요. 왜 해답이 안나놨을까요? 왜 해답을 못 찾았을까요? 물건을 잃은 그 곳에서 찾아야 하는데, 엉뚱한 곳에서 찾으니 아무리 해도 찾아지지 않는 거죠. 당연한 결과죠.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잃어버린 그곳에서 찾아야 되죠. 그렇기 때문에 다시 문제를 잘 관찰해보게 됩니다. 그 결과 자신이 자신의 참모습을 잘 몰랐고, 세상 사람들도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문제의 해답을 찾기 위해 엉뚱한 곳을 떠돌아다니다가 다시 처음 길을 잃은 그곳인 자신에게로 돌아와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잘 관찰해보니 자신의 참모습을 제대로 알지 못한 데서부터 길이 어긋나버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치 귀중한 물건을 잃어버렸는데, 잃어버린 현장과 관계없이 전혀 엉뚱한 곳에서 죽을 고생을 하며 돌아다니다 처음 잃어버렸던 그 자리로 돌아온 셈이죠.
그렇게 해서 알게 된 것이 존재의 실상, 존재의 참모습, 나의 참모습, 인간의 참모습입니다. 불교에서 흔히 하는 말로 하면 ‘유아독존’, ‘본래붓다’, ‘본래면목’을 알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업보중생이 아니고, 본래부처”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어떻습니까. 업보중생의 신세에서 부처의 신세로 바뀌었으니 천지가 개벽한 거 아닌가요? 부처라는 말은 최고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그보다 더 좋은 것, 더 훌륭한 존재는 없다는 말입니다. 제 이야기가 좀 이해가 되십니까?(네)
정말 천지개벽할 이야기지요. 바로 그 순간에 지옥에 떨어질 팔자에서 극락세계로 갈 팔자로 바뀐 거잖아요. 이 세상 그 어디에 이보다 더한 천지개벽이 있겠어요? 석가모니부처님이 역사에 등장해서 그 이전 역사와 그 이후 역사가 확연하게 달라진 것은 바로 이 지점, 즉 ‘사람이 업보중생이 아니고 본래부처’라는 진실을 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를 하는 사람들은 다른 건 다 모르더라도 한 가지는 반드시 알아야 됩니다. “나는, 인간은 업보중생이 아니라 본래부처”라는 진실을. 불교를 제대로 하고 있는가, 아닌가의 기준이자 핵심은 자신이 본래부처라는 진실을 제대로 이해하고 확신하고 사는가, 아닌가에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오늘 이 사실을 잘 파악하고 이해하고 확신한다면, 팔만대장경을 다 공부해 마쳤다고 해도 됩니다. 어떻습니까? 그럴 듯하게 여겨집니까? (웃음)
우리 불자들이 너무 오랫동안 ‘죄 많은 업보중생’이라는 말을 들어왔고, 그 사고방식에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이 ‘본래부처’라는 진실을 곧바로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겠습니다.
사람이 왜 본래부처인가
‘사람이 본래부처’라고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지금 그 이유를 다 말할 수는 없고, 우선 두 가지만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첫째,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게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생명을 갖고 있는 자기 자신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렇지요. 천하를 다 준다고 자기 목숨을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나에게 내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생명은 천하보다도 더 귀하다는 말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만고의 진리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네)
우리가 아무리 돈과 권력을 좋아한다고 해도 본인의 목숨과 바꿀 수 있겠습니까? 제 정신을 갖고 있는 한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천하의 제일이 생명을 갖고 살고 있는 여기 내 존재 자체라는 거죠. 그것을 부처님은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말로 표현하셨고, 대승불교에 오면 ‘본래부처’라고 선불교 전통에서는 본래면목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본인이 직면하고 있는 자신의 참모습을 잘 따져보지 않고 현상적으로, 습관적으로만 생각하면 인생이 하찮아 보이지만, 하나하나 잘 따져서 확인해보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이 내 생명, 그대 생명, 우리 생명입니다.
두 번째, 인간이란 주체적으로 마음먹고 행동하기만 하면 행동하는 즉시 본인이 뜻하는 것이 바로 이루어지는 위대한 창조주, 위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마음먹고 행동하기만 하면 소원성취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불자들이 소원성취, 소원성취하는 말을 많이 하는데, 무엇을 이루고 싶은가요? 제가 즉각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물론 이루고 싶은 것이 이것저것 많이 있겠죠. ‘돈이 있었으면 좋겠다.’, ‘출세했으면 좋겠다.’, ‘사업이 잘되었으면 좋겠다.’, ‘농사가 잘 되었으면 좋겠다.’, ‘삼재팔난을 안 만났으면 좋겠다.’ 등등. 그런데 왜? 무엇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이 이루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합니까? (마음이 평화롭고 행복하고 싶어서요.) 그렇죠. 행복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여기에 나는 평화롭고 행복하지 않아도 돼, 돈만 있으면 돼. 권력만 있으면 돼 하는 분 계십니까?(모두 웃음). 그런 분 안계세요?(웃음)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뭐라고 말합니까? ‘저 사람은 비정상이야’라고 말하겠죠? 그러니 결론적으로 우리가 이루고 싶은 소원은 뭐예요? 평화롭고 행복한 삶이잖아요.
돈이든 권력이든 출세든 사업번창이든… 이 모든 것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렇게 되면 평화롭고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그러는 것이죠.
그런데 정말 돈이 있고 권력이 있으면 인간적으로 평화롭고 행복해질까요?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이루는 근본조건, 충분조건은 아니지요. 그렇기 때문에 돈, 명예, 권력 따위가 평화와 행복을 이루는 조건이라는 생각은 다 망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죠. 실제로 확인해보면 대부분 생각의 장난이고 말의 장난일 뿐입니다.
하나 예를 들어 생각해봅시다. 사람들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하는데, 그 통일은 왜 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유가 뭘까요? 두말 할 것 없이 평화롭고 행복하려고 하는 거죠. 만일 통일을 했는데, 평화롭고 행복하지 않다면 어떨까요? 그래도 우리의 소원은 통일일까요? 그렇지 않죠. 실제 내용을 구체적으로 따져보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라 ‘평화와 행복’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야말로 ‘평화와 행복’만이 우리 모두의 궁극적인 소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평화롭고 행복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바라는 평화는 어디에도 따로 있지도 않고 그 누가 주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소원인 행복도, 우리의 소원인 희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아무리 평화와 행복을 찾아 천하를 돌아다니고 그 누구를 향해 빌어봐야 평화와 행복을 찾을 수도 얻을 수도 없습니다. 인도에도, 히말라야에도, 그 어디를 가봐도 평화와 행복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부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고요. 현실적으로 겪어봐도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평화와 행복을 소원하는 것 자체가 다 헛짓일까? 그렇지 않습니다. 평화와 행복은 어디에도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하여 없는 것일까요? 그렇지도 않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조건 따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손뼉소리처럼 평화와 행복의 조건을 만들면 있고, 안 만들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디에서 누가 만드는가? 지금 여기에서 본인이 만드는 거죠. 평화와 행복은 부처님이 주는 것도 아니고 하느님이 주는 것도 아니고, 대통령이 주는 것도 아닙니다. 돈이 주지도 않고 권력이 주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본인이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원하는 평화와 행복은 본인이 조건을 만들면 평화와 행복이 현실이 되는 것이고, 조건을 만들지 않으면 평화와 행복은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마치 손뼉소리와 같지요.
손뼉소리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손뼉소리는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만들면 있고, 안 만들면 없는 것입니다.
손뼉소리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 어려운 이야기입니까? 지금 손뼉소리가 없지요? (네) 왜 없습니까? (손뼉을 안쳤으니까요.) 그렇습니다. 조건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없는 것입니다. 자 지금 두 손바닥을 부딪쳐 손뼉소리를 냈습니다. 그 순간 손뼉소리는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왜 있습니까? (손뼉을 쳤으니까요.) 그렇습니다. 두 손바닥을 부딪쳐 소리가 나도록 조건을 만들기 때문이지요. 어떻습니까? 이렇게 실제를 확인해 보면 손뼉소리는 있다고도 없기도 하다고 할 수 있죠, 없다고도 할 수 없고 또는 있기도 하고.
이와 같이 세상 모든 일은 조건을 만들면 있고, 조건을 만들지 않으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원하는 평화니, 행복이니, 꿈이니, 희망이니 하는 것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자신이 조건을 만들면 있고, 안 만들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본인이 희망하는 평화와 행복을 창조할 위대한 능력이 본래 갖춰져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대단하지 않습니까?
표정을 보니, 별로 공감이 잘 안되나 보네요.(웃음)
제가 보기에 우리 문제가 뭐냐하면, 본인에게 주어진 위대한 창조능력을 여기는 거예요. 내가 마음먹고 행동하기만 하면 지금 바로 소원을 이룰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이 있다는데, 어디 가서 누구에게 빌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먼 훗날 또는 죽은 다음에 되는것도 아니고, 지금 당장 여기에서 실현할 수 있다는데, 그래 안 믿어진다는 표정들이네요.(모두 웃음)
자, 그러면 만약 지금여기에서 직접 사실 확인이 되면 어쩌시겠습니까? 믿으시겠습니까?(웃음) “인간은 행위 하는 대로 즉각 이루어지는 존재다.” 이 말을 갖고 실제로 확인해봅시다.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를 한 번 들어봅시다. 여러분은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었던 적 있으신가요? (네.) 그럼 잘 알아들으시겠네요. 자, 여기 어떤 사람이 목이 말라 죽을 지경입니다. 그 상황에서 시원한 물을 한그릇 마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목마름이 십년 뒤에 해결될까요 즉각 해결될까요? (즉각 해결됩니다.) 그렇습니다. 즉각 해결되요.
예를 더 들어보지요.
어떤 사람이 ‘나는 진실한 인간으로 살고 싶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누군가를 상대할 때 진실하게 대하고 진실하게 생각하고, 진실하게 말하고, 진실하게 행동했습니다,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즉각 진실한 사람이 되는 거죠. 전생에 죄가 많은 것 때문에 지금 진실하게 말하고 행동했는데 진실한 사람이 안 될까요? 아니죠? 전생의 죄와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내가 진실하게 행위하면 지금 즉각 진실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만약 어떤 사람이 전생에 선행도 많이 하고 복도 많이 지었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사람이 금생에 와서 거짓되게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어떨까요? 그러면 전생의 선행과 복 때문에 그 행동과 관계없이 진실한 사람이 될까요? 그렇지 않죠? 전생의 복과 하등의 관계없이 지금 행위한데로 지금 즉각 거짓된 사람이 됩니다.
따라서 전생에 죄가 있네, 사주팔자가 안좋네, 타고난 복이 있네, 없네 하는 이야기들은 다 부질없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죄많은 업보’이라는 데 꿰어맞춘 논리들입니다. 지금 내가 여기에서 마음먹고 진실되게 말하고 행동하기만 하면, 전생에 죄가 많든 복이 많든, 금생에 사주팔자가 좋은 나쁘든 즉각 진실한 사람이 됩니까? 어떤 이론도 있을수 없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능력입니까.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요? 스스로의 운명은 마음껏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이 소유자자 바로 우리들의 본래 참모습인 것입니다.
내가 평화로운 사람이 되고 싶으면, 바로 평화롭게 행동하십시요 즉각 평화로워집니다. 내가 진실된 사람이 되고 싶으면, 바로 진실되게 행동하십시요 즉각 진실해집니다. 내가 너그러운 사람이 되고 싶으면, 바로너그럽게 행동하십시요 즉각 너그러운 사람이 됩니다. 나아가 내가 복 많은 사람이 되고 싶으면, 복을 지으십시오 그러면 바로 복 많은 사람이 됩니다.
‘촛불’에서 본 본래부처의 삶
최근 우리 사회에 붓다의 가르침이 현실에 바로 실현되는 모습을 우리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천만평화의 촛불광장, 평화의 촛불행동입니다. 그동안 ‘광장’하면 무엇이 떠올랐습니까? 주로 투쟁의 광장을 떠올립니다. 강력투쟁, 강경진압-이게 기본이었죠. 그래서 ‘과격투쟁’이다, ‘과잉진압’이다를 둘러싸고 늘 싸워왔습니다. 그래서 항상 창과 방패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래서 광장하면, 늘 투쟁의 광장이라고 연상이 되죠.
그런데 이번에는 어땠습니까? 평화로운 광장이 된 거예요. 아주 놀라운 일이 벌어진 거죠. 그런데 그 평화의 광장을 누가 만들었습니까. 부처님이? 하느님이? 전생의 복이? 아니면 대통령이 정치인들의 장관, 종교인들이 아니죠 그럼 누구일까요 창조주시민 한사람 한사람들의 창조해낸 결과이죠 (모두 박수)
그렇습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거죠. 이 평화의 광장은 정부도, 재벌도, 언론도, 국회의원도, 권력자도, 장관도, 대통령도, 잘났다는 사람들도 아니고, 바로 우리 국민들이 이루어낸 것입니다. 평화를 희망하는 국민들이 평화를 염원하는 보통사람들이 만들어낸 평화로운 광장이었던 거죠.
평화의 광장을 어떻게 만들었습니까? 평화롭게 생각하고 말하고 여러분이 행동해서! 전 세계가 놀라고 감동하는 평화의 촛불광장은 국민들이 평화롭게 행동해서 만든 것입니다. 대통령과 장관과 국회의원들이 전세계에 나라망신을 시켰는데, 평화를 희망하는 우리 국민들이 세계를 감동시키는 평화의 광장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너무 자랑스럽고 위대하게!
이제 대통령 탄핵이냐 아니냐로 또 시시비비하고 있는데, 저는 이미 끝났다고 봅니다. 탄핵이 되는가 안 되는가에 관계없이 이미 국민은 승리했고, 국민들이 원하는 평화를 실현해냈습니다. 앞으로도 약간의 부침들은 있겠지만 아무도 되돌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세계를 놀라게 한 천만평화촛불 광장이 이 사건이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본래부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죠? 굳이 불교적 언어로 표현하면 ‘업보중생’의 삶에서 ‘본래부처’의 삶으로 크게 전환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평소 업보중생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부처님이 해주겠지’, ‘하느님이 해주겠지’, ‘어떤 신비한 존재가 해주겠지’, ‘나라나 대통령이 해주겠지’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삶은 창조하는 주인공으로 당당하게 행동하지 못합니다.
반면 ‘내가 본래부처’ 라고 자각하고 확신하는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어떻게 행위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운명을 창조하는 주인으로 당당하게 행동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이번에 우리 국민이 나라의 주인답게 주인노릇을 당당하게 잘 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겠어’, ‘대통령이 해주겠지’, ‘정부가 해주겠지’, ‘국회의원들이 해주겠지’라는 잘못된 생각을 떨쳐내고, ‘내가 세상의 주인’, ‘내가 나라의 주인’,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며, ‘따라서 이 광장을 우리가 원하는 광장이 되도록 하겠다.’라고 마음먹고 그렇게 행동한 것이죠. 그리고 그렇게 마음먹고 하니까 어떻게 되었어요? 평화로운 광장이 만들어졌습니다 그야말로. 이런 게 바로 기적이 일어난거죠.
우리 모두는 본인이 마음먹으면 천당도 지옥도 창조해내는 대단한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기죽어 살아야 됩니까? 새해, 입춘이 돌아오니 여기저기서 ‘삼재’니, ‘팔난’이니 하는 말을 많이 듣기도 할텐데, 그런 말에 기죽지 마세요. 그런 말에 기죽는 것은 불교를 제대로 하고 있지 않은 겁니다. ‘사람은 본래부처’, ‘내가 내 운명의 주인’이라는 생각이 불자들이 견지해야 할 올바른 사유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통해서 깨달아야 할 내용입니다.
우리 다 함께 잘 새겨봅시다.
“사람은 본래부처다. 나는 본래부처다. 내가 행위 하는 대로 내 인생은 실현된다.” 이게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고, 전부입니다.
본래부처로 사는 두 가지 생활
그러면,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본래부처니까 부처로 살아야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부처로 사는 것인가. 부처로 사는 방법은 두 가지예요.
첫째, 노는 입에 염불하는 수행생활입니다. (모두 웃음)
쉽게 가르쳐주니까 시시하게 생각하는 것 같네.(웃음) 쉽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노는 입에 염불하지 않아서 최순실 사태와 같은 상황, 박대통령이 탄핵으로 가는 상황이 만들어진 겁니다. 노는 입에 염불을 제대로 했다면 절대 이런 일이 안 벌어지죠. 노는 입에 염불하는 것이 쉬울 것 같죠?
자, 함께 생각해봅시다.
마음노는 입에 염불 안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다음은 습관적으로 쓸데없는 일을 벌리게 됩니다. 지는 거예요. 쓸데 없는 생각을 하는 거예요.
한번 따져봅시다 ‘관세음보살’ 하고 염불할 때 ‘에이, 어디 가서 술이나 먹어야지’ 하는 마음이 일어납니까? (모두 웃음 안 일어나요) 그렇죠 ‘관세음보살’ 하고 염불하지 않고 본인의 마음과 입을 내버려두면 ‘에잇, 어디 가서 술이나 먹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죠 안그런가요? 비가 오면 비가 오니까 한잔하자. 날씨 좋으면 날씨 좋으니까 한잔하자… 대부분 이렇게 되잖아요.
생각이나 말로는 ‘노는입에 염불한다’ 는 말이 쉬어보이지만 실제로는 노는 입에 염불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사실은 정신 바짝 차려서 됩니다. 엎디어서 하든 누워서 하든 화장실에서 하든, 그런 것은 관계없어요. 꼭 무릎꿇고 합창하고 법당에서 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은 언제 어디서든 관계없이 그냥 정신 바짝 차려서 하면 됩니다.
좀더 실제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부르는 순간, 나는 누구입니까?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부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관세음보살을 생각하고 부르는 사람이 괜찮은 사람이겠습니까, ‘에잇, 어디 가서 술이나 먹자’하는 사람이 괜찮은 사람이겠습니까? (모두웃음) (관세음보살 부르는 사람이요.) 또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사람이 괜찮은 사람이겠습니까, 누구 험담이나 하는 사람이 괜찮은 사람이겠습니까? 이제 물어보나마나죠?(웃음) 그러면 누가 부처 같은 사람이겠습니까? 당연히 관세음보살 부르는 사람이 부처 같은 사람이죠.
자, 그러면 혼자 있을 때는 어떻게 한다? (웃음) (노는 입에 염불이요.) 그렇죠 하지만 그것만 갖고는 안됩니다.
“노는 입에 염불한다. 그리고 정신 차려 죽기살기로 한다.”입니다.
정신 바짝 차려서 공 들이고 공 들여서 해야 합니다.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한 번 하고 정신 놓으면 바로 마음과 입이 전혀 엉뚱하게 어딘가로 제멋대로 가버립니다. 그래야 효과를 봅니다.
두 번째 방법은 부지깽이 노릇 하는 수행생활입니다.
부지깽이는 무엇이죠? 다른 나무가 잘 타도록 도와주는 나무입니다.
불교용어에 ‘아상덩어리’라는 말이 있어요. 아상(我相)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보셨죠? “상을 내면 안 된다”, “아상이 많다.” 이런 말 많이 하잖아요. 아상을 다른 말로 하면, 자기중심의 이기적인 욕심덩어리라는 것입니다. 부지깽이(나무)를 사람에 비유하자면, ‘아상덩어리’, ‘이기적인 욕심덩어리’입니다.
우리 모두 아상이 있고 욕심이 있습니다.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아상덩어리, 욕심덩어리로 똘똘 뭉쳐있어요. 그리고 부지깽이 나무는 그냥 놔두면 절대 닳아 없어지지 않습니다. 욕심덩어리도 그냥 놔두면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상덩어리 욕심덩어리인 그 나무를 부지깽이로 잘 쓰면 잘 쓰는 만큼 줄어들고 마침내 없어집니다. 이 인상덩어리, 욕심덩어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써야 잘 없어질까요?
부지깽이 나무가 하는 역할이 무엇이죠? 다른 나무를 잘 타도록 돕는 것입니다. 다른 나무가 잘 타도록 열심히 노력하면 아궁이 나무가 잘 타는 만큼 부지깽이도 점점 타서 적어지고 적어지고, 줄어들고 줄어들고, 마지막에는 잘 타고 있는 불구덩이에 던져 사라지게 됩니다. 욕심덩어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이 잘 되도록 열심히 노력하면 자기 욕심덩어리가 적어지고 적어지고, 줄어들고 줄어들어서 끝내는 다 사라지게 됩니다. 모든 문제의 원인으로 작동하고 있는 자기중심의 이기적 욕심덩어리의 뿌리가 뽑히게 됩니다.
절집에서 늘 듣는 말이 “마음을 비워라”, “욕심을 비워라”, “아상을 버려라”, “내려놓아라” 등등. 입만 열면 하는 말을 합니다. 그건데 아무리 말로 해도 아상이 버려지거나 욕심이 비워지지 않습니다. 내 욕심은 너를 존중하고 잘 받들어 모실때 비워집니다. 다른 나무가 잘 타도록 하는 과정에서 부지깽이 자신도 타고 사라지는 이치와 같은 거죠
다른 나무는 누구입니까? 상대방이에요. 그 상대방이 우리가 모셔야 할 본래부처입니다. 엄마부처님도 있고 아빠부처님도 있고 아내부처님도 있고 남편부처님도 있고 아이부처님도 있고 아들부처님 딸부처님 이웃부처님… 내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본래부처님입니다.
우리는 부처님께 어떻게 대하죠? 진심으로 존중하고 고마워합니다. 본래부처인 상대방을 본래부처로 잘 대접하면 나는 어떻게 됩니까? 현재 내 삶이 본래부처의 삶이 됩니다. 누군가를 상대해서 평화롭게 말하고 행동하는 삶이 부처의 삶이고, 늘상 그렇게 사는 사람이 부처님입니다. 그렇게 살면 나는 본래부처로 잘 사는 것이고, 그러면 삶이 편안해지고 아름다워집니다.
또 내가 평화롭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상대방은 어떻겠습니까. 먼저 기분이 좋겠고, 혹 미움이나 적대감이 있었다면 그것이 조금씩 줄어들 것이, 나아가서는 본인도 평화롭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방향으로 노력하게 되죠. 결과적으로 나도 좋고 너도 좋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는 것을 불교적으로는 무엇이라고 하지요? (자리이타요) 그렇습니다. 그것을 자리이타(自利利他)라고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하게 되면 나에게는 좋은데 너에게는 안 좋다거나 너에게는 좋은데 나에게는 안 좋다거나 하는 일은 안 생깁니다. 너한테 좋으면 나한테도 좋고 나한테 좋으면 너한테도 좋은 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불교를 제대로 하고 있는가 아닌가를 알려면, 나한테 좋은 것이 너한테도 좋은가, 너한테 좋은 것이 나한테도 좋은가를 확인해보면 됩니다. 나한테 좋은 것이 너한테도 좋고, 너한테 좋은 것이 나한테도 좋으면 불교를 제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의 살림살이죠. 반대로 나에게는 좋은데 너에게는 좋지 않고, 너에게는 좋은데 나에게는 좋지 않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문제가 있는 것이죠.
이렇게 삶의 문제를 이렇게 다루어가는 것이 본래 부처의 삶입니다. 이것을 부지깽이 노릇을 잘 하는 수행의 삶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달리 말하면 자비롭게 마음쓰고 자비롭게 말하고 자비롭게 행동하는 삶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부처로 사는 두 가지 생활, 즉 노는 입에 염불하는 수행생활, 부지깽이 노릇하는 수행생활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까? 죽기살기로 해야 한다, 애써서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삼천 배 하듯이, 십만 배 하듯이. 용맹정진 하듯이 어디에서? 지금 여기 내 삶의 현장에서! 우리가 법당이나 선방에서 하는 것은 다 연습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두 발을 딛고 살아가고 있는 현장이 본게임입니다. 연습은 무엇을 위해서 합니까? 본게임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연습을 아무리 잘해도 본게임을 시원찮게 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연습은 본 게임을 위한것이지 때문에 결론적으로는 본게임장인 현장에서 일상적으로 본래부처로 살아보면 확실하게 잘하는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오늘 공부한 것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사람은 천상천하유아독존, 본래부처다. 본래부처로 사는 두 가지 생활은 첫째, 노는 입에 염불하는 수행, 둘째, 부지깽이 노릇하는 수행이다. 이 두 가지가 본래부처의 삶을 현재 내 삶으로 만들어가는 최고의 길이다.”
새해, 입춘을 맞이하여 오늘 함께 하신 모든 분들이 본래부처로 사는 삶을 거듭거듭 잘 사유하고 음미해서 그것이 내 피가 되고 살이 될 수 있도록,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즉 노는 입에 염불하고 부지깽이 노릇하는 수행을 잘 하십시요. 그러니까 삼재가 아니라 삼재할애비가 오셔도 저절로 도망가게 되었습니다. 아무 걱정마시고 본래부처라는 확신으로 당당하게 잘 사십시요. 저절로 복이 만들어집니다. 아무쪼록 일거수 일투족이 복된 삶이 될 수 있도록 잘 살아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