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보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닐텐데, 우리가 삶의 실상을 사실적으로 잘 파악하고 실상에 토대해서 삶을 살아가는 그런 실력이나 문화들이 많이 미약하다보니까 코로나 상황이 아주 특별한 상황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특별한 상황인 부분도 있긴 있지만, 사실 일상적으로 늘 겪는 상황인 거죠.
그런 상황을 우리가 경전 언어 속에서 찾아보면 ‘삼계화택’. 그러니까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장이 늘 불타는 집속 같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요즘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상황이 불 난 집 속보다 더 안 좋거나 어렵습니까? 아니면 그보다는 좀 낫습니까? 어떠세요? 그보다는 낫지요? 불 나는 집속 같다는 말속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편안함도 있지 않고 안전함도 있지 않고 또 영원히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어떤 것도 있지 않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부처님 말씀을 귀가 따갑도록 듣기도 하고 하기도 하고 살면서도 실제 현장삶의 실상에 연결시켜서 이런 것들을 이런 것들을 깊이 음미하지 못하다 보니까 우리는 아주 특별한 상황을 겪고 있다는 생각에 너무 경도되어서 어쩌면 너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문제를 너무 크게 걱정하게 되는 상황도 생기게 되고 너무 벌벌 떨지 않아도 될 상황도 크게 벌벌 떨게 되기도 하고 이런 문제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까 저도 부처님 생각을 더 하게 되요. 어쩌면 부처님이 살았던 시대, 그 당시 지역상황은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열악하고 험악하고 끔찍한 상황이었지요. 그런 상황에서 부처님은 과연 어떻게 사셨을까? 어떻게 하였을까? 이런 생각을 더 꼼꼼히 하게 됩니다.
근황이야기 하라고 하는데 근황은 뻔해요. 마당에 풀이나 뽑고 마당이나 쓸고 살고 있어요. 그런데 근황 중에 하나인데요. 어쨌든 건성건성 지나쳤던 부분을 코로나 덕택에 꼼꼼히 옛스님들의 법문을 읽는 기회들이 많아졌어요. 오늘은 그 얘기 잠깐 하는 걸로.
실상사를 처음 지은 홍척선사도 중국에 유학가서 선종불교사상을 배워왔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선종불교는 실상사에서부터 꽃피기 시작하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실상사야말로 한국 선종불교의 종가집이라고 할 수 있어요.
중국에서 선종불교 법을 잘 전수받아서 처음 들여오신 분이 조계종단의 종조로 되어 있는 도의선사입니다. 선종불교의 가르침을 처음 갖고 들어오신 분은 도의선사입니다. 도의스님은 선종불교의 가르침을 다시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서 펼치려고 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마설’이라고 배척당해서 활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설악산으로 은둔하셨지요.
그런데 중국에서 같은 스승(서당지장스님) 밑에서 법을 전수받았던 홍척스님이 두 번째 들어와서 국가 공인 하에 실상사에 도량을 만들고 선종불교 활동을 공식적으로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실상사에서부터 번져나가기 시작해서 전국으로 확대되고 오늘날까지 전통이 되어 내려옵니다. 그러니까 한국 선종불교의 종가집이 실상사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했을 때, 실상사가, 그리고 실상사 스님들과 신도님들이 선종불교에 대해선 특별한 관심과 책임감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도 오늘은 달마스님 어록 얘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일단 <달마어록>을 잠깐 읽어봅시다.
눈이 색을 볼 때에 색에 물들지 않고
귀가 소리를 들을 때 소리에 물들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해탈이고 열반이다.
눈이 색에 집착하지 아니하면
눈이 선문이 되고
귀가 소리에 집착하지 아니하면
귀가 선문이 된다.
우리에게는 6가지 기관이 있죠. 눈, 귀, 코, 혀, 피부, 마음. 눈으로는 색을 보고, 귀로는 소리를 듣고 코로는 냄새를 맡고 혀로는 냄새를 맛을 보고 피부로는 느끼고 마음으로는 생각하고 기억하기도 합니다. 이 여섯 가지가 사실 인간이 갖고 있는 삶의 조건입니다.
그런데 달마스님은 “눈으로 색을 볼 때 색에 오염되지 않고, 귀로 소리를 들을 때 소리에 오염되지 아니하면, 그 자체가 해탈이고 열반이다.”라고 합니다. 승찬스님의 <신심명>에서는 “그 자체가 무상정각이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상정각을 이루고자 불교수행을 합니다. 우리는 해탈열반을 누리고 싶어서 불교수행을 합니다. 신심명에서는 그 자체가 무상정각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삶이 가장 좋은 삶이고 행복한 삶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는 그동안 무상정각, 해탈열반을 이루려면 대단히 복잡하게 힘들게 수행을 해야 되는 것으로 배웠습니다.
그런데 선종불교의 초조인 달마스님은 이렇게 간단히 얘기하고 있어요. 색에 오염되지 않는 것, 즉 눈으로 꽃을 볼 때 거기에 오염되지 않는 것이 무상정각이고 해탈열반이라고요. 지금 법당에서 목탁소리가 들려오는데, 그 소리에 오염되지 아니하면 그것이 곧 무상정각이고 해탈열반이라고요.
그러면 오염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을 초기불교에는 “제2의 화살을 맞지 않게 한다.”, 간화선에서는 “즉각 화두를 들어라”, 염불자들은 “즉각 염불을 하라”, 진언자들은 “즉각 진언을 하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염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설명을 보태볼까요?
요즘 꽃이 한창입니다. 매화꽃은 지고 있고 극락전 앞에 산수유가 활짝 피었습니다. 우리는 꽃을 보면 예쁘다고 하지요. 그냥 예쁘다고 보면 괜찮은데, 그 다음 어떤 생각이 들어요? ‘갖고 싶다.’ 내 방으로, 내집으로 가져가려고 하죠. 이게 오염인다. 이게 청정하지 못한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욕심이지요. 탐진치입니다.
꽃을 봤을 때 “야~ 꽃 예쁘다.”하고 그냥 예쁨을 누리면 되는데, 욕심을 내는 순간,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이면 그것도 괴롭고, 만약 나와 똑같이 그것을 욕심내는 사람이 있다면 다툼이 생길 수도 있겠지요. 오염되는 방식으로 문제를 다루게 되면 오염은 더욱 늘어나게 됩니다. 오염이 늘어나는 것은 욕심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욕심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삶은 너도 고통스럽고 나도 고통스러운 것으로 귀결되게 되어있어요. 늘 겪어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달마스님은 아주 단순명료하게 말씀해주시고 계신 겁니다.
자, 욕심이 생기고, 좋고 싫은 마음이 생기는 쪽으로 발전하지 않아야 하는데, 그쪽으로 빠져 들어가는 순간 그게 오염이고 타락인 겁니다. 청정하지 못함, 부정함인 거예요.
그때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퍼뜩! 정신 차려야 되는 거지요. 아차! 이러면 안 되지, 내가 오염의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면 안되지, 하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요. 그런데 잠깐만 방심해도 즉각 또 끌려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게 바로 습관이예요.
그래서 그렇게 바로바로 끌려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한 장치가 필요한 거죠. 그게 방편입니다. 참선하는 분은 화두를, 염불하는 분은 염불을, 진언하는 분들은 진언을, 위빠사나수행을 하는 분들은 정신차리고 호흡관찰을 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오염에 빠져들어가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입이 닳도록 얘기하는 게 있어요. 우리는 그동안 어떤 불교수행론을 이야기해왔습니까. 바로 “노는 입에 염불한다.”입니다.
노는 입에, 염불한다는 것은,
노는 입에, 노는 마음에 염불한다.
노는 입에, 노는 마음에 화두 든다.
노는 입에, 노는 마음에 진언 외운다.
노는 입에, 노는 마음에 위빠사나 수행을 한다.
이렇게 다 적용될 수 있는 것이죠.
노는 입에 염불하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반복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이 생기거든요.
오늘 달마어록을 언급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실상사가 한국 선종불교의 종갓집이라는 것도 잘 알아두면 좋겠고, 그 때문에 선종불교에 대해서도 더 특별한 관심과 원력을 갖는 게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번에 <달마어록>을 읽어보니 그동안 우리가 불교수행에 대해 고민해왔던 것과 잘 연결이 되고 있어서 그 말씀도 드리고 싶었습니다.
저는 평소에 불교수행을 “노는 입에 염불하는 수행, 부지깽이 노릇하는 수행”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불교수행을 너무 어렵게만 생각하는 분위기를 새롭게 하고, 쉽고 효과적으로 불교수행에 접근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나온 것입니다. 이번에 <달마어록>을 읽으면서 그동안 해왔던 이야기들이 불조의 가르침을 나름대로는 정확하게 계승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어떻게 보면 새삼스러운 일도 아닐텐데, 우리가 삶의 실상을 사실적으로 잘 파악하고 실상에 토대해서 삶을 살아가는 그런 실력이나 문화들이 많이 미약하다보니까 코로나 상황이 아주 특별한 상황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특별한 상황인 부분도 있긴 있지만, 사실 일상적으로 늘 겪는 상황인 거죠.
그런 상황을 우리가 경전 언어 속에서 찾아보면 ‘삼계화택’. 그러니까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장이 늘 불타는 집속 같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요즘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상황이 불 난 집 속보다 더 안 좋거나 어렵습니까? 아니면 그보다는 좀 낫습니까? 어떠세요? 그보다는 낫지요? 불 나는 집속 같다는 말속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편안함도 있지 않고 안전함도 있지 않고 또 영원히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는 어떤 것도 있지 않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부처님 말씀을 귀가 따갑도록 듣기도 하고 하기도 하고 살면서도 실제 현장삶의 실상에 연결시켜서 이런 것들을 이런 것들을 깊이 음미하지 못하다 보니까 우리는 아주 특별한 상황을 겪고 있다는 생각에 너무 경도되어서 어쩌면 너무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문제를 너무 크게 걱정하게 되는 상황도 생기게 되고 너무 벌벌 떨지 않아도 될 상황도 크게 벌벌 떨게 되기도 하고 이런 문제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까 저도 부처님 생각을 더 하게 되요. 어쩌면 부처님이 살았던 시대, 그 당시 지역상황은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열악하고 험악하고 끔찍한 상황이었지요. 그런 상황에서 부처님은 과연 어떻게 사셨을까? 어떻게 하였을까? 이런 생각을 더 꼼꼼히 하게 됩니다.
근황이야기 하라고 하는데 근황은 뻔해요. 마당에 풀이나 뽑고 마당이나 쓸고 살고 있어요. 그런데 근황 중에 하나인데요. 어쨌든 건성건성 지나쳤던 부분을 코로나 덕택에 꼼꼼히 옛스님들의 법문을 읽는 기회들이 많아졌어요. 오늘은 그 얘기 잠깐 하는 걸로.
이것은 달마스님의 어록인데요. 달마스님은 선종불교의 초조라고 합니다. 1조가 달마스님, 2조가 혜가스님, 3조가 승찬스님, 4조가 도신스님, 5조가 홍인스님, 6조가 혜능스님. 이렇게 이어집니다.
실상사를 처음 지은 홍척선사도 중국에 유학가서 선종불교사상을 배워왔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선종불교는 실상사에서부터 꽃피기 시작하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실상사야말로 한국 선종불교의 종가집이라고 할 수 있어요.
중국에서 선종불교 법을 잘 전수받아서 처음 들여오신 분이 조계종단의 종조로 되어 있는 도의선사입니다. 선종불교의 가르침을 처음 갖고 들어오신 분은 도의선사입니다. 도의스님은 선종불교의 가르침을 다시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서 펼치려고 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마설’이라고 배척당해서 활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설악산으로 은둔하셨지요.
그런데 중국에서 같은 스승(서당지장스님) 밑에서 법을 전수받았던 홍척스님이 두 번째 들어와서 국가 공인 하에 실상사에 도량을 만들고 선종불교 활동을 공식적으로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실상사에서부터 번져나가기 시작해서 전국으로 확대되고 오늘날까지 전통이 되어 내려옵니다. 그러니까 한국 선종불교의 종가집이 실상사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했을 때, 실상사가, 그리고 실상사 스님들과 신도님들이 선종불교에 대해선 특별한 관심과 책임감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도 오늘은 달마스님 어록 얘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일단 <달마어록>을 잠깐 읽어봅시다.
눈이 색을 볼 때에 색에 물들지 않고
귀가 소리를 들을 때 소리에 물들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해탈이고 열반이다.
눈이 색에 집착하지 아니하면
눈이 선문이 되고
귀가 소리에 집착하지 아니하면
귀가 선문이 된다.
우리에게는 6가지 기관이 있죠. 눈, 귀, 코, 혀, 피부, 마음. 눈으로는 색을 보고, 귀로는 소리를 듣고 코로는 냄새를 맡고 혀로는 냄새를 맛을 보고 피부로는 느끼고 마음으로는 생각하고 기억하기도 합니다. 이 여섯 가지가 사실 인간이 갖고 있는 삶의 조건입니다.
그런데 달마스님은 “눈으로 색을 볼 때 색에 오염되지 않고, 귀로 소리를 들을 때 소리에 오염되지 아니하면, 그 자체가 해탈이고 열반이다.”라고 합니다. 승찬스님의 <신심명>에서는 “그 자체가 무상정각이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상정각을 이루고자 불교수행을 합니다. 우리는 해탈열반을 누리고 싶어서 불교수행을 합니다. 신심명에서는 그 자체가 무상정각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삶이 가장 좋은 삶이고 행복한 삶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는 그동안 무상정각, 해탈열반을 이루려면 대단히 복잡하게 힘들게 수행을 해야 되는 것으로 배웠습니다.
그런데 선종불교의 초조인 달마스님은 이렇게 간단히 얘기하고 있어요. 색에 오염되지 않는 것, 즉 눈으로 꽃을 볼 때 거기에 오염되지 않는 것이 무상정각이고 해탈열반이라고요. 지금 법당에서 목탁소리가 들려오는데, 그 소리에 오염되지 아니하면 그것이 곧 무상정각이고 해탈열반이라고요.
그러면 오염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을 초기불교에는 “제2의 화살을 맞지 않게 한다.”, 간화선에서는 “즉각 화두를 들어라”, 염불자들은 “즉각 염불을 하라”, 진언자들은 “즉각 진언을 하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염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설명을 보태볼까요?
요즘 꽃이 한창입니다. 매화꽃은 지고 있고 극락전 앞에 산수유가 활짝 피었습니다. 우리는 꽃을 보면 예쁘다고 하지요. 그냥 예쁘다고 보면 괜찮은데, 그 다음 어떤 생각이 들어요? ‘갖고 싶다.’ 내 방으로, 내집으로 가져가려고 하죠. 이게 오염인다. 이게 청정하지 못한 겁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욕심이지요. 탐진치입니다.
꽃을 봤을 때 “야~ 꽃 예쁘다.”하고 그냥 예쁨을 누리면 되는데, 욕심을 내는 순간,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이면 그것도 괴롭고, 만약 나와 똑같이 그것을 욕심내는 사람이 있다면 다툼이 생길 수도 있겠지요. 오염되는 방식으로 문제를 다루게 되면 오염은 더욱 늘어나게 됩니다. 오염이 늘어나는 것은 욕심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욕심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삶은 너도 고통스럽고 나도 고통스러운 것으로 귀결되게 되어있어요. 늘 겪어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달마스님은 아주 단순명료하게 말씀해주시고 계신 겁니다.
자, 욕심이 생기고, 좋고 싫은 마음이 생기는 쪽으로 발전하지 않아야 하는데, 그쪽으로 빠져 들어가는 순간 그게 오염이고 타락인 겁니다. 청정하지 못함, 부정함인 거예요.
그때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퍼뜩! 정신 차려야 되는 거지요. 아차! 이러면 안 되지, 내가 오염의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면 안되지, 하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요. 그런데 잠깐만 방심해도 즉각 또 끌려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게 바로 습관이예요.
그래서 그렇게 바로바로 끌려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한 장치가 필요한 거죠. 그게 방편입니다. 참선하는 분은 화두를, 염불하는 분은 염불을, 진언하는 분들은 진언을, 위빠사나수행을 하는 분들은 정신차리고 호흡관찰을 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오염에 빠져들어가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입이 닳도록 얘기하는 게 있어요. 우리는 그동안 어떤 불교수행론을 이야기해왔습니까. 바로 “노는 입에 염불한다.”입니다.
노는 입에, 염불한다는 것은,
노는 입에, 노는 마음에 염불한다.
노는 입에, 노는 마음에 화두 든다.
노는 입에, 노는 마음에 진언 외운다.
노는 입에, 노는 마음에 위빠사나 수행을 한다.
이렇게 다 적용될 수 있는 것이죠.
노는 입에 염불하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반복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이 생기거든요.
오늘 달마어록을 언급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실상사가 한국 선종불교의 종갓집이라는 것도 잘 알아두면 좋겠고, 그 때문에 선종불교에 대해서도 더 특별한 관심과 원력을 갖는 게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번에 <달마어록>을 읽어보니 그동안 우리가 불교수행에 대해 고민해왔던 것과 잘 연결이 되고 있어서 그 말씀도 드리고 싶었습니다.
저는 평소에 불교수행을 “노는 입에 염불하는 수행, 부지깽이 노릇하는 수행”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불교수행을 너무 어렵게만 생각하는 분위기를 새롭게 하고, 쉽고 효과적으로 불교수행에 접근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나온 것입니다. 이번에 <달마어록>을 읽으면서 그동안 해왔던 이야기들이 불조의 가르침을 나름대로는 정확하게 계승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제 얘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