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많이 덥습니다. 우리는 늘 새로운 것을 찾아서, 또는 더 좋은 것을 찾아서 어딘가로 부지런히 갑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늘 지금 여기 이 순간 나에게는 뭔가 새로운 것, 좋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기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새로운 것, 더 좋은 것을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한때는 내면적으로 뭔가를 찾아 돌아다니기도 하고, 또 한 때는 바깥으로 온 우주를 찾아 돌아다니기도 합니다. 우리들의 보통 삶이 대부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깨달음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릅니다. 요약하면 문제의 원인은 무명, 미혹이고 문제에 대한 답은 깨달음, 지혜입니다. 깨달음의 안목으로 또는 지혜의 안목으로 삶을 잘 파악하고 이해해서 가르쳐준 부처님을 위시로 한 불교 역사의 고승대덕들의 말씀은 한결같습니다. 지금 여기 이 순간 존재 그대의 참모습, 존재 자체가 늘 최고이고 새로운 것이다. 그 밖의 그 어디, 그 무엇도 진정한 의미의 최고이고 새로운 것은 말로만 있고 실제는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없는 거북이 털, 토끼 뿔 같은 새로운 것, 좋은 것을 찾아 이리저리 쫓아다니는 어리석은 미혹의 짓을 바로 내려놔라고 합니다. 이 점을 잘 정리하는 순간 날마다 좋은 날의 삶이 된다고 합니다. 한결같이 이구동성으로 이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평소에도 쉽지 않았지만 나이가 들고 늙음을 온몸으로 실감하는 요즈음은 법문하는 일, 이야기하는 하는 일 자체가 더 힘듭니다. 체력적으로도 그렇고, 내용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제 무너져가는 내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자고 이승 삶이 끝나가는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이자’라고 정리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인연에 의해 스님들하고 신심명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신심명 공부를 하면서 보니까 ‘아! 그동안 왜 신심명을 주목하지 않았지?’ 라고 하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내 역량은 부족하지만 그동안 나름대로 정리한 불교의 관점으로 신심명을 잘 풀고 해석해서 책을 만들어야 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신심명 강의]라고 하는 책이 태어났습니다.
간화선에 대한 입장
오늘은 제 얘기를 좀 할까 싶습니다. 제가 출가하고 끊임없이 제 나름대로 묻고 찾고 만들어 온 물음의 초점, 찾고 싶은 초점, 이루고 싶은 초점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 개경계의 마지막 구절 ‘여래의 진실한 뜻을 참되게 알아지이다’입니다. 저는 여기에 초점을 맞춰서 끊임없이 묻기도 하고 찾기도 하고 만들기도 하면서 오늘까지 왔습니다. 신심명 강의도 그 결과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제 얘기를 좀 하려고 마음먹게 된 것은 신심명 강의를 낸 후 듣게 되는 질문과 관련이 있습니다. 한겨레 종교담당 조현기자라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이 불교를 제일 잘 아는 기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질문을 꼼꼼이 만들어서 이야기를 해보자는 요청이 있어서 얘기를 했습니다.
저는 끊임없이 한국불교를 성찰적으로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다루고 대안을 찾아야 된다는 입장을 가져왔습니다. 이것은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여기저기를 향해서 성찰적인 비판을 많이 했습니다. 선원에 대해서도 많은 비판도 하고 문제제기도 하고 이런저런 주문도 했습니다. 구체적이고 조직적으로 무엇을 하기 위한 활동을 해보려고 노력도 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 한 가지 예가 선원의 교육체계, 기본선원 제도입니다.
그러다 보니 내가 했던 이야기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소문이 되어 떠돌아다녔습니다. 그 중에서 제가 선원에 대해 비판하고 문제제기 하고 제안했던 것이 마치 한국불교 중심 전통인 간화선을 부정하는 것처럼 해석되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간화선을 부정하는 것으로 사람들한테 각인된 것입니다.
조현기자가 제게 와서 물었습니다. 스님은 늘 간화선을 비판하고 부정해왔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간화선이 굉장히 좋은 수행론이라고 하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여래의 진실한 뜻에 맞는 불교, 여래의 진실한 뜻에 부응하는 불교수행, 이라는 관점에서 핵심적으로 짚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여래의 진실한 뜻에 일치하는 불교는 ‘나의 가르침, 나의 진리는 바로 이해할 수 있다. 바로 실현되어 진다. 바로 경험되어 진리, 바로 증명되어 진다. 이게 나의 진리고 나의 가르침이다.’ 라는 말씀이라고 정리했습니다. 그 내용이야말로 여래가 우리에게 불교 공부와 수행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웅변적으로 가르쳐준 핵심이라고 봤습니다.
따라서 그것이 경전 언어든 선어록의 언어든 불교 어떤 종류의 언어든, 지금 여기에서 바로 이해될 수 있도록 실현될 수 있도록 경험될 수 있도록 증명될 수 있도록 해석되고 응용되어야 우리가 여래의 뜻에 맞는 불교를 제대로 하는 것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나름대로 그렇게 판단을 하고 내용에 맞춰서 답을 찾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신심명 강의]이기도 합니다.
또 한 가지, 한국불교에서 가장 많이 강조되어지기도 하고 대단히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 되는 개념이 바로 ‘본래부처’입니다. 요즘엔 ‘본래부처’를 얘기하는 경우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한 60여 년 전에 출가를 하고 지금까지 오는 과정에서 제일 많이 들은 것이 본래 부처론 입니다. 특히 성철스님같이 큰 스님들께서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볼 때, 여래의 뜻을 제대로 표현한 중요한 개념을 하나 든다면 ‘본래 부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초기불교에서부터 선종불교까지 관통되어질 수 있는 대표적인 하나의 개념을 찾는다면 ‘본래부처’가 아닐까합니다. 어쩌면 이 본래 부처론 이야말로 한국불교가 갖고 있는 가장 탁월함이고 가장 위대함이라고 믿어도 좋다고 봅니다.
본래 부처론을 강조하는 큰 스님들, 학자분들의 얘기를 접해보면 거의 다 본래 부처를 강조는 합니다. 그런데 본래 부처론으로 모든 불교의 시작, 과정, 결과를 관통하는 본래부처론이 안 되는 겁니다. 시작은 본래부처론으로 하고 있는데 과정도 본래 부처론과는 다른 내용이고 또 결과도 본래 부처론과는 다른 내용인 겁니다. 저는 여기에 대해서 끊임없이 문제의식이 있었고 많이 천착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정리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끝내는 사람들하고 얘기해서 정리가 잘 안 되니까 제 방식으로 정리를 했습니다. 제 방식으로 정리해서 만든 책이 [망설일 것 없네, 당장 부처로 살게나]입니다. 화엄경 보현행원품을 가지고 이야기한 것인데, 이것이 본래 부처론을 중도 연기의 관점에서 바로 이해 실현, 증명 되도록 해석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냈던 [붓다 중도로 살다]도 역시 본래부처론 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한 것입니다. ‘바로 이해 된다 바로 실현 된다 바로 경험 된다 바로 증명 된다’라고 하는 관점에서 제 나름대로 부처님 생애를 해석하고, 대승불교 선불교 초기불교 모두를 통합해서 요약한 것이 [붓다 중도로 살다]입니다. 그다음 우연한 인연에 의해서 [신심명 강의]도 역시 마찬가지로 ‘본래 부처론’을 중도 연기의 관점으로 해석하고 설명한 것입니다.
앞서 이제까지 간화선을 비판하고 부정해왔는데 이제 와서 간화선을 얘기 하냐는 그 얘기에 대한 제 입장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배운 게 간화선 밖에 없습니다. 절에 들어와서 이것저것 배우긴 했지만 내가 찾고 싶고, 내가 풀고 싶은 문제를 풀어내고 찾고 싶은 답을 찾으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될까 했을 때 간화선만이 최고의 길, 확실한 길, 절대적이고 유일한 길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선방에 들어가 제 나름대로 십수년간 몸부림을 쳤지만 답을 못 찾아서 좌절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주변을 돌아보니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내 선배들, 동료들, 후배들도 얘기를 나눠보면 거의 비슷했습니다. 나만 그런 거라면 내가 전생에 죄업이 많아서, 근기가 약해서, 자질이 떨어져서, 노력이 부족해서 안 되는 것이구나, 이렇게 정리했을 겁니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옆에 있는 선배들도 동료들도 후배들도 대체적으로 비슷했습니다. 다만 그런 얘기들을 잘 안 하고 있을 뿐이죠. 결과적으로 개인적 좌절에 실망이 더보태져서 선방을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선방에 들어가 살지는 않았습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그 뒤로 초기불교, 위빠사나, 사마타, 명상등 온갖 수행들이 지금 태풍처럼 유행이 번지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 각각에 대해 깊이 천착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좋다고 얘기하는 분들을 만나서 계속 물어봅니다. 사마타하는 분들, 위빠사나 하는 분들, 초기불교 하는 분들, 남방불교하는 사람, 티벳 불교하는 사람, 명상하는 사람들이 실상사에 많이 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눠보면 그 분들이 하는 것과 간화선이 별로 다르다는 느낌을 못 받았습니다. 또는 더 나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비록 선방에서 벗어나 내 방식의 길 찾기를 했지만 한 번도 간화선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간화선을 부정한 적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오년 순례를 했는데 순례하면서 뭘 했겠습니까? 걸으면서 내내 제 나름대로 할 수 있는 한 화두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간화선도 내 방식으로 다시 정리를 했습니다. 그게 신신명 강의에 실린 내용입니다. 바로 이해될 수 있다. 바로 실현된다. 바로 경험된다. 바로 증명 된다라고 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저는 중도행이라고 봅니다. ‘중도적으로 하게 되면 바로 이해된다 바로 실현된다 바로 경험된다 바로 증명된다 이게 불교다.’ 저는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본래 부처라는 관점과 바로 이해된다 바로 실현된다는 부처님의 말씀 이 두 가지 관점에서 간화선을 해석하고 설명한 것이 제가 정리한 간화선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간화선이라고 말은 하고 있지만 기존에 간화선을 해석하고 설명한 것하고는 내용적으로 다릅니다.
제 입장에서는 선방이 갖고 있는 모순과 폐단에 대해서 늘 비판했고 늘 대안을 찾아야 된다 라고 제안하고 요구해왔지만 한 번도 간화선 자체를 부정하거나 버려본 적은 없습니다. 배운 게 그거밖에 없으니까. 다른 것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봐도 제가 볼 적에는 별로 다를 것도 없고 나을 것도 없어 보였습니다. 오히려 간화선이 더 효과적이고 장점이 많고 훨씬 탁월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런 질문 때문에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제가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분이 성철 스님인데, 스님께서 지금 살아 계시다면 정말 진지하게 이야기 좀 하고 싶다는 글을 썼습니다. 기자가 그걸 물었습니다. 지금 여기 당신 앞에 성철스님이 계시면 어떤 얘기를 하고 싶냐? 저는 여러 가지 이야기할 게 많지만 그중에서 이렇게 하면 앞으로 좋아질 거야, 저렇게 하면 다음엔 대단히 정말 훌륭해져 하는 다음에 말고 지금 바로 이해되는 불교, 바로 실현되어지는 불교, 바로 경험되어지는 불교, 바로 증명되어지는 불교가 뭐냐. 장좌불와를 하든 오매일여를 하든 확철대오를 하든 신비한 삼매 체험을 했든 안했든 이런 거 다 떠나서 지금 여기에서 바로 당신도 동의할 수 있고 나도 동의할 수 있도록 부처님 말씀대로 바로 이해되고 바로 실현되고 바로 경험되고 증명될 수 있는 불교수행이 도대체 뭐냐. 난 이런 얘기를 좀 허심탄회하게 해서 다듬고, 다듬어서 정리하고 싶다,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시간이 짧기 때문에 정리를 하겠습니다. 최근에 제가 [신신명 강의]란 책을 냈고 거기에 제 생각을 다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이런저런 질문들이 있어서 공유하는 것도 도움 되겠다 싶어 말씀을 드립니다. 끝으로는 신신명 구절 중에 아주 놀랍게 보고 있고 놀랍게 생각하고 있는 구절이 있어 잠깐 언급을 할까 싶습니다.
육진불오 환동정각
육진은 색성향미촉법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거 귀로 듣는 거 코로 냄새 맡는 것 피부로 느끼는 것들입니다. 내용을 풀어보면 ‘육진을 싫어하지 아니하면’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이런 것들을 싫어하지 않는다. 싫어하지 않는다는 말로 표현되어 있지만 내용을 천착해 보면 싫어하는 것이나 좋아하는 것이나 다 같은 내용입니다. 말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다 보니까 ‘싫어하지 않는 것’이라고 표현되어 있는데요. 반대로 좋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린 주로 싫어하는 것, 좋아하는 것 가지고 취사선택하고 삽니다. 내 마음에 들어 안 들어 이런 것이 다 쓸데없이 스스로 조작해낸 분별 망상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육진을 싫어하지 아니하면 그것이 바로 무상정각이다.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전 이 한마디가 너무 놀라웠습니다. 모든 불교가 이 한 마디에 다 압축되어 있는 겁니다. 어떤 수행론, 어떤 실천론이 이렇게 즉각적으로 정각과 연결되어지는 수행론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건 즉각 한마디로 정각과 연결되어 지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꼼꼼히 따져보면 괜한 허풍이 아니고 승찬스님의 놀라운 안목이고 놀라운 표현인 것입니다.
우리가 여름안거를 마치고 지금 해제를 하고 있는데 안거 때는 본인 방식의 수행에 집중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것을 가지고 기웃거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마침 오늘부터는 해제일이니까 ‘육진불오 환동정각’이라고 하는 내용을 가지고 부처님 말씀처럼 바로 이해되고 실현되고 경험되고 증명될 수 있도록 탐구해서 잘 풀어내어 자기 확신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해제 철을 잘 보낸다면 정말로 멋있는 해제 철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그런 제안을 하면서 얘기를 오늘 정리할까 싶습니다.
끝으로 이 산중과 인연해서 큰 탈 없이 큰 문제없이 한 철을 잘 지낼 수 있도록 해주신 우리 백장암과 실상사에 있는 대중스님들 그리고 스님들이 안거를 잘 할 수 있도록 몸과 마음으로 정성을 모아서 뒷받침해주신 재가대중 한 분 한 분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를 드리면서 제 얘기를 정리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신심명 강의]를 내게 된 계기
날씨가 많이 덥습니다. 우리는 늘 새로운 것을 찾아서, 또는 더 좋은 것을 찾아서 어딘가로 부지런히 갑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늘 지금 여기 이 순간 나에게는 뭔가 새로운 것, 좋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기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 새로운 것, 더 좋은 것을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한때는 내면적으로 뭔가를 찾아 돌아다니기도 하고, 또 한 때는 바깥으로 온 우주를 찾아 돌아다니기도 합니다. 우리들의 보통 삶이 대부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깨달음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릅니다. 요약하면 문제의 원인은 무명, 미혹이고 문제에 대한 답은 깨달음, 지혜입니다. 깨달음의 안목으로 또는 지혜의 안목으로 삶을 잘 파악하고 이해해서 가르쳐준 부처님을 위시로 한 불교 역사의 고승대덕들의 말씀은 한결같습니다. 지금 여기 이 순간 존재 그대의 참모습, 존재 자체가 늘 최고이고 새로운 것이다. 그 밖의 그 어디, 그 무엇도 진정한 의미의 최고이고 새로운 것은 말로만 있고 실제는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없는 거북이 털, 토끼 뿔 같은 새로운 것, 좋은 것을 찾아 이리저리 쫓아다니는 어리석은 미혹의 짓을 바로 내려놔라고 합니다. 이 점을 잘 정리하는 순간 날마다 좋은 날의 삶이 된다고 합니다. 한결같이 이구동성으로 이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평소에도 쉽지 않았지만 나이가 들고 늙음을 온몸으로 실감하는 요즈음은 법문하는 일, 이야기하는 하는 일 자체가 더 힘듭니다. 체력적으로도 그렇고, 내용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제 무너져가는 내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자고 이승 삶이 끝나가는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이자’라고 정리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인연에 의해 스님들하고 신심명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신심명 공부를 하면서 보니까 ‘아! 그동안 왜 신심명을 주목하지 않았지?’ 라고 하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내 역량은 부족하지만 그동안 나름대로 정리한 불교의 관점으로 신심명을 잘 풀고 해석해서 책을 만들어야 되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신심명 강의]라고 하는 책이 태어났습니다.
간화선에 대한 입장
오늘은 제 얘기를 좀 할까 싶습니다. 제가 출가하고 끊임없이 제 나름대로 묻고 찾고 만들어 온 물음의 초점, 찾고 싶은 초점, 이루고 싶은 초점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 개경계의 마지막 구절 ‘여래의 진실한 뜻을 참되게 알아지이다’입니다. 저는 여기에 초점을 맞춰서 끊임없이 묻기도 하고 찾기도 하고 만들기도 하면서 오늘까지 왔습니다. 신심명 강의도 그 결과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제 얘기를 좀 하려고 마음먹게 된 것은 신심명 강의를 낸 후 듣게 되는 질문과 관련이 있습니다. 한겨레 종교담당 조현기자라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이 불교를 제일 잘 아는 기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질문을 꼼꼼이 만들어서 이야기를 해보자는 요청이 있어서 얘기를 했습니다.
저는 끊임없이 한국불교를 성찰적으로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다루고 대안을 찾아야 된다는 입장을 가져왔습니다. 이것은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여기저기를 향해서 성찰적인 비판을 많이 했습니다. 선원에 대해서도 많은 비판도 하고 문제제기도 하고 이런저런 주문도 했습니다. 구체적이고 조직적으로 무엇을 하기 위한 활동을 해보려고 노력도 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 한 가지 예가 선원의 교육체계, 기본선원 제도입니다.
그러다 보니 내가 했던 이야기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소문이 되어 떠돌아다녔습니다. 그 중에서 제가 선원에 대해 비판하고 문제제기 하고 제안했던 것이 마치 한국불교 중심 전통인 간화선을 부정하는 것처럼 해석되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간화선을 부정하는 것으로 사람들한테 각인된 것입니다.
조현기자가 제게 와서 물었습니다. 스님은 늘 간화선을 비판하고 부정해왔는데 이제 와서 갑자기 간화선이 굉장히 좋은 수행론이라고 하는 이유가 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여래의 진실한 뜻에 맞는 불교, 여래의 진실한 뜻에 부응하는 불교수행, 이라는 관점에서 핵심적으로 짚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여래의 진실한 뜻에 일치하는 불교는 ‘나의 가르침, 나의 진리는 바로 이해할 수 있다. 바로 실현되어 진다. 바로 경험되어 진리, 바로 증명되어 진다. 이게 나의 진리고 나의 가르침이다.’ 라는 말씀이라고 정리했습니다. 그 내용이야말로 여래가 우리에게 불교 공부와 수행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웅변적으로 가르쳐준 핵심이라고 봤습니다.
따라서 그것이 경전 언어든 선어록의 언어든 불교 어떤 종류의 언어든, 지금 여기에서 바로 이해될 수 있도록 실현될 수 있도록 경험될 수 있도록 증명될 수 있도록 해석되고 응용되어야 우리가 여래의 뜻에 맞는 불교를 제대로 하는 것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나름대로 그렇게 판단을 하고 내용에 맞춰서 답을 찾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신심명 강의]이기도 합니다.
또 한 가지, 한국불교에서 가장 많이 강조되어지기도 하고 대단히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 되는 개념이 바로 ‘본래부처’입니다. 요즘엔 ‘본래부처’를 얘기하는 경우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한 60여 년 전에 출가를 하고 지금까지 오는 과정에서 제일 많이 들은 것이 본래 부처론 입니다. 특히 성철스님같이 큰 스님들께서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볼 때, 여래의 뜻을 제대로 표현한 중요한 개념을 하나 든다면 ‘본래 부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초기불교에서부터 선종불교까지 관통되어질 수 있는 대표적인 하나의 개념을 찾는다면 ‘본래부처’가 아닐까합니다. 어쩌면 이 본래 부처론 이야말로 한국불교가 갖고 있는 가장 탁월함이고 가장 위대함이라고 믿어도 좋다고 봅니다.
본래 부처론을 강조하는 큰 스님들, 학자분들의 얘기를 접해보면 거의 다 본래 부처를 강조는 합니다. 그런데 본래 부처론으로 모든 불교의 시작, 과정, 결과를 관통하는 본래부처론이 안 되는 겁니다. 시작은 본래부처론으로 하고 있는데 과정도 본래 부처론과는 다른 내용이고 또 결과도 본래 부처론과는 다른 내용인 겁니다. 저는 여기에 대해서 끊임없이 문제의식이 있었고 많이 천착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정리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끝내는 사람들하고 얘기해서 정리가 잘 안 되니까 제 방식으로 정리를 했습니다. 제 방식으로 정리해서 만든 책이 [망설일 것 없네, 당장 부처로 살게나]입니다. 화엄경 보현행원품을 가지고 이야기한 것인데, 이것이 본래 부처론을 중도 연기의 관점에서 바로 이해 실현, 증명 되도록 해석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냈던 [붓다 중도로 살다]도 역시 본래부처론 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한 것입니다. ‘바로 이해 된다 바로 실현 된다 바로 경험 된다 바로 증명 된다’라고 하는 관점에서 제 나름대로 부처님 생애를 해석하고, 대승불교 선불교 초기불교 모두를 통합해서 요약한 것이 [붓다 중도로 살다]입니다. 그다음 우연한 인연에 의해서 [신심명 강의]도 역시 마찬가지로 ‘본래 부처론’을 중도 연기의 관점으로 해석하고 설명한 것입니다.
앞서 이제까지 간화선을 비판하고 부정해왔는데 이제 와서 간화선을 얘기 하냐는 그 얘기에 대한 제 입장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배운 게 간화선 밖에 없습니다. 절에 들어와서 이것저것 배우긴 했지만 내가 찾고 싶고, 내가 풀고 싶은 문제를 풀어내고 찾고 싶은 답을 찾으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될까 했을 때 간화선만이 최고의 길, 확실한 길, 절대적이고 유일한 길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선방에 들어가 제 나름대로 십수년간 몸부림을 쳤지만 답을 못 찾아서 좌절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주변을 돌아보니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내 선배들, 동료들, 후배들도 얘기를 나눠보면 거의 비슷했습니다. 나만 그런 거라면 내가 전생에 죄업이 많아서, 근기가 약해서, 자질이 떨어져서, 노력이 부족해서 안 되는 것이구나, 이렇게 정리했을 겁니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옆에 있는 선배들도 동료들도 후배들도 대체적으로 비슷했습니다. 다만 그런 얘기들을 잘 안 하고 있을 뿐이죠. 결과적으로 개인적 좌절에 실망이 더보태져서 선방을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 뒤로는 선방에 들어가 살지는 않았습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그 뒤로 초기불교, 위빠사나, 사마타, 명상등 온갖 수행들이 지금 태풍처럼 유행이 번지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그 각각에 대해 깊이 천착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좋다고 얘기하는 분들을 만나서 계속 물어봅니다. 사마타하는 분들, 위빠사나 하는 분들, 초기불교 하는 분들, 남방불교하는 사람, 티벳 불교하는 사람, 명상하는 사람들이 실상사에 많이 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눠보면 그 분들이 하는 것과 간화선이 별로 다르다는 느낌을 못 받았습니다. 또는 더 나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비록 선방에서 벗어나 내 방식의 길 찾기를 했지만 한 번도 간화선을 버린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간화선을 부정한 적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오년 순례를 했는데 순례하면서 뭘 했겠습니까? 걸으면서 내내 제 나름대로 할 수 있는 한 화두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간화선도 내 방식으로 다시 정리를 했습니다. 그게 신신명 강의에 실린 내용입니다. 바로 이해될 수 있다. 바로 실현된다. 바로 경험된다. 바로 증명 된다라고 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저는 중도행이라고 봅니다. ‘중도적으로 하게 되면 바로 이해된다 바로 실현된다 바로 경험된다 바로 증명된다 이게 불교다.’ 저는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본래 부처라는 관점과 바로 이해된다 바로 실현된다는 부처님의 말씀 이 두 가지 관점에서 간화선을 해석하고 설명한 것이 제가 정리한 간화선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간화선이라고 말은 하고 있지만 기존에 간화선을 해석하고 설명한 것하고는 내용적으로 다릅니다.
제 입장에서는 선방이 갖고 있는 모순과 폐단에 대해서 늘 비판했고 늘 대안을 찾아야 된다 라고 제안하고 요구해왔지만 한 번도 간화선 자체를 부정하거나 버려본 적은 없습니다. 배운 게 그거밖에 없으니까. 다른 것이 좋다고 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봐도 제가 볼 적에는 별로 다를 것도 없고 나을 것도 없어 보였습니다. 오히려 간화선이 더 효과적이고 장점이 많고 훨씬 탁월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런 질문 때문에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제가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분이 성철 스님인데, 스님께서 지금 살아 계시다면 정말 진지하게 이야기 좀 하고 싶다는 글을 썼습니다. 기자가 그걸 물었습니다. 지금 여기 당신 앞에 성철스님이 계시면 어떤 얘기를 하고 싶냐? 저는 여러 가지 이야기할 게 많지만 그중에서 이렇게 하면 앞으로 좋아질 거야, 저렇게 하면 다음엔 대단히 정말 훌륭해져 하는 다음에 말고 지금 바로 이해되는 불교, 바로 실현되어지는 불교, 바로 경험되어지는 불교, 바로 증명되어지는 불교가 뭐냐. 장좌불와를 하든 오매일여를 하든 확철대오를 하든 신비한 삼매 체험을 했든 안했든 이런 거 다 떠나서 지금 여기에서 바로 당신도 동의할 수 있고 나도 동의할 수 있도록 부처님 말씀대로 바로 이해되고 바로 실현되고 바로 경험되고 증명될 수 있는 불교수행이 도대체 뭐냐. 난 이런 얘기를 좀 허심탄회하게 해서 다듬고, 다듬어서 정리하고 싶다,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시간이 짧기 때문에 정리를 하겠습니다. 최근에 제가 [신신명 강의]란 책을 냈고 거기에 제 생각을 다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이런저런 질문들이 있어서 공유하는 것도 도움 되겠다 싶어 말씀을 드립니다. 끝으로는 신신명 구절 중에 아주 놀랍게 보고 있고 놀랍게 생각하고 있는 구절이 있어 잠깐 언급을 할까 싶습니다.
육진불오 환동정각
육진은 색성향미촉법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거 귀로 듣는 거 코로 냄새 맡는 것 피부로 느끼는 것들입니다. 내용을 풀어보면 ‘육진을 싫어하지 아니하면’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이런 것들을 싫어하지 않는다. 싫어하지 않는다는 말로 표현되어 있지만 내용을 천착해 보면 싫어하는 것이나 좋아하는 것이나 다 같은 내용입니다. 말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다 보니까 ‘싫어하지 않는 것’이라고 표현되어 있는데요. 반대로 좋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린 주로 싫어하는 것, 좋아하는 것 가지고 취사선택하고 삽니다. 내 마음에 들어 안 들어 이런 것이 다 쓸데없이 스스로 조작해낸 분별 망상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육진을 싫어하지 아니하면 그것이 바로 무상정각이다.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전 이 한마디가 너무 놀라웠습니다. 모든 불교가 이 한 마디에 다 압축되어 있는 겁니다. 어떤 수행론, 어떤 실천론이 이렇게 즉각적으로 정각과 연결되어지는 수행론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건 즉각 한마디로 정각과 연결되어 지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꼼꼼히 따져보면 괜한 허풍이 아니고 승찬스님의 놀라운 안목이고 놀라운 표현인 것입니다.
우리가 여름안거를 마치고 지금 해제를 하고 있는데 안거 때는 본인 방식의 수행에 집중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것을 가지고 기웃거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마침 오늘부터는 해제일이니까 ‘육진불오 환동정각’이라고 하는 내용을 가지고 부처님 말씀처럼 바로 이해되고 실현되고 경험되고 증명될 수 있도록 탐구해서 잘 풀어내어 자기 확신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해제 철을 잘 보낸다면 정말로 멋있는 해제 철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그런 제안을 하면서 얘기를 오늘 정리할까 싶습니다.
끝으로 이 산중과 인연해서 큰 탈 없이 큰 문제없이 한 철을 잘 지낼 수 있도록 해주신 우리 백장암과 실상사에 있는 대중스님들 그리고 스님들이 안거를 잘 할 수 있도록 몸과 마음으로 정성을 모아서 뒷받침해주신 재가대중 한 분 한 분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를 드리면서 제 얘기를 정리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