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만다행으로 날씨가 좀 따뜻해졌습니다. 날씨가 을씨년스러워서 많이 걱정됐는데 현각스님이 오셔서 축사를 해서 그런지 갑자기 햇빛이 쨍쨍 나네요.(웃음)
실상사는 마당이 참 넓어서 사람이 많이 모여도 늘 빈 것 같아 보이는데, 오늘 <문명전환을 위한 지리산 만일결사>를 다짐하는 자리를 격려하기 위해 많은 분들이 와주셨습니다. 먼저 현각 스님과 원주 성불원 식구들, 생명평화결사 지리산순례단에 감사드립니다. 그 외에도 더 계신 것 같은데, 제가 잘 몰라서 박수 한 번 쳐서 감사를 드리면 어떨까 싶네요. (박수)
실상사 사부대중이 미혹의 문명을 넘어 깨달음의 문명의 길을 열어보자는 취지에서 <문명전환 지리산 만일결사>를 하자고 마음을 냈고 오늘은 약사여래 천일기도 회향을 하는 자리이자 두 번째 천일정진을 시작하는 자리이니 그 내용을 다시 한 번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 왜 굳이 미혹의 문명, 깨달음의 문명이라는 말을 쓸까요?
실상사공동체 식구들이나 신도님들 외에 여기 계신 분들 중에는 미혹의 문명, 깨달음의 문명이라는 말을 처음 듣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좀 생뚱맞게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또는 2600년 긴 역사 속에서 형성된 많은 경전들, 논서들, 어록들이 있고, 그 안에는 대단히 의미심장하고 멋있고 아름다운 표현들이 풍부한데, 왜 굳이 새삼스럽게 이런 말을 만들어서 쓰는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부처님이 사셨던 80평생을 미혹문명과 깨달음의 문명이라는 말로 짚어보면, 그 중 깨달음을 얻기 전 35세까지는 미혹문명의 사고방식으로 살았습니다. 세상의 부조리한 삶을 목도하고 세상과 인생에 대한 의문과 두려움을 해결하려고 노력했으나 미혹문명의 사고방식으로 살고 있는 세속의 현실에서는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길을 버리고 출가를 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세속의 길을 버리고 종교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답을 찾기 위해 소위 ‘육년고행’이라고 하는 종교적 수행을 합니다. 처음에는 전 존재를 바쳐서 크게는 선정주의와 고행주의 또는 향락주의와 고행주의라는 말로 표현되는, 그야말로 뼈를 깎는 수행을 했지만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세속에서 답이 없으니 세속을 버렸고, 종교의 길을 선택했지만 거기서도 답을 못 찾으니 그것도 버립니다. 필요한 지도는 다 써버렸습니다. 이제는 지도도 없는 판이 된 거죠.
어쩔 수 없이 자기 방식의 길을 찾고 만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겁니다. 그래서 당신이 탐구한 방식으로 수행을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답을 찾았습니다.
답을 찾은 후 사람들에게 그걸 알리기 위해 전법활동을 시작했는데, 첫 설법 때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초전법륜경>에 잘 나와 있습니다. 부처님은 당신의 수행방법을 “중도적으로 했다”고 표현합니다. “중도적으로 했다. 그 중도의 길을 잘 밟아서 가보니까 거기에서 연기의 진리[연기법]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다른 말로 하면, “중도연기의 진리를 깨달았다.” 또는 “중도연기의 진리를 깨달아서 부처가 되었다”고도 합니다.
부처님의 출가 후 6년 수행 중에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수행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길어 봐야 49일 정도라고 합니다. 6년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중도적으로 수행한 49일을 뺀 나머지 시간은 당시 기성종교계에서 가르치고 있는 수행을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답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49일 정도 당신 방식으로 수행을 해서 답을 찾았고, 깨달은 사람, 부처님이 된 것입니다.
붓다의 삶을 오늘 우리가 하고 있는 일과 연결시켜보면 미혹의 문명을 벗어나서 깨달음의 문명 길이 열린 거죠.
부처님의 전 생애로 보면 80년 중에서 35년은 미혹문명 속에서 살았고, 45년은 깨달음 문명의 사고방식으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후 많은 분들이 부처님 가르침에 공감을 하고 그 길을 가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렇게 해서 불교 역사가 2,600여 년 동안 도도하게 펼쳐지고 흘러왔습니다.
그러니까 미혹문명과 깨달음 문명이라는 말은 현대적 언어로 표현한 것일 뿐 실제로는 뜬금없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 여래(부처님)의 진실한 뜻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많이 독송하고 있는 <천수경>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개경게 開經偈 경전을 펴는 게송
무상심심미묘법 無上甚深微妙法 세상에서 가장깊고 미묘한법
백천만겁난조우 百千萬劫難遭遇 백천만겁 지나도록 만나뵙기 어려워라
아금문견득수지 我今聞見得受持 내가이제 보고듣고 받아지녀 외우오니
원해여래진실의 願解如來眞實意 부처님의 진실한 뜻 알아지길 원합니다.
‘원해여래진실의’, 즉 여래[부처님]의 가르침을 여래가 뜻한 바대로 잘 파악하고 잘 이해하고, 그래서 그 뜻에 어긋나지 않게 우리 불교공부와 수행이 잘 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래의 진실한 뜻은 무엇일까요? 여래의 진실한 뜻은 ‘깨달음으로 삶을 살아야 된다’, 즉 깨달음으로 삶을 살아야만 그 삶이 괜찮은 삶이 되고, 부처와 같은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지금 ‘깨달음의 문명’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래의 진실한 뜻인 것입니다.
그런데 깨달음의 문제가 너무 복잡하고 어렵게 되어 있다 보니 보통사람들은 할 수 없는 것처럼 취급되어지고 있는 게 우리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것 때문에 개인적으로도 집단적으로도 많은 혼란을 겪고 있기도 하고요.
미혹의 사고방식이 무엇인지, 깨달음의 사고방식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려주고자 했던 게 경전의 말씀들이고 불교역사입니다.
그 많은 팔만사천법문, 경전내용을 압축해서 보면 딱 이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우리를 고통과 불행의 늪에 빠지게 하는 미혹문명의 사고방식은 무엇인가. 둘째, 고통과 불행으로부터 벗어나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깨달음의 사고방식은 무엇인가입니다. 그 물음에 답을 알려주는 것이 경전내용들이고 불교역사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이 일생을 바쳐서 삶으로 살아가신 내용입니다. 나아가 제자들에게 원했던 것도 같은 내용입니다. 그런 내용의 삶이 이루어지는 세상이 되도록 애써 정진하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래[부처님]의 진실한 뜻입니다.
그리고 오래 전 경전의 언어들이 현대인들에게 낯설 수도 있기 때문에 부처님이 뜻한 바가 조금이라도 더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전달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현대적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말은 다르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뜻은 같은 뜻이라는 것, 지역에 따라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한 것이라는 것을 함께 설명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 어떤 것이 미혹의 사고방식이고
어떤 것이 깨달음의 사고방식일까요?
그러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미혹의 사고방식과 깨달음의 사고방식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것도 여러 형태로 표현되고 있는데요. 그중에서 한 가지만 제가 말씀을 드려볼까 합니다.
대표적으로 화엄경에서는 그 미혹의 사고방식과 깨달음의 사고방식을 “인생을 잘 몰랐을 때엔 사람이 죄 많은 업보 중생이었는데, 인생을 제대로 알고 보니 사람이 그대로 오롯한 본래부처이네” 라고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생각할 때에 죄 많은 업보중생과 부처는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잖아요. 중생은 아무리 날고 뛰어도 고통과 불행의 감옥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그 고통과 불행의 감옥 속에도 순간순간 즐거울 때가 있을 수 있지요. 그렇지만 본질적으로는 우리가 감각적으로 좋다고 생각하는 것, 즐겁다고 생각하는 것의 거의 대부분이 고통과 불행의 조건들인 겁니다. 대부분이 다 그러한데 우리는 거기에 속고 있는 것이지요. 소위 말해서 자승자박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은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고통의 조건이 될 수밖에 없는 이런 삶은 끝내야 된다고 판단을 하고 그 답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섰던 것입니다.
그리고 목숨을 걸고 했던 6년 고행을 버리고 당신 방식의 길인 중도 수행을 통해서 “사람이 죄 많은 업보중생이 아니고 본래 거룩한 부처”임을 깨달으셨습니다. 그것을 훗날 ‘사람이 부처다’라고 표현해 왔습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문명전환을 이야기하는 것이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싶습니다. 부처님 때부터 시작해서 불교 역사 2600년 내내 “미혹의 감옥에서 벗어나 깨달음이라는 대자유의 광장으로 나가자. 깨달음을 개개인의 삶으로 생활화하고 대중화하여 생명평화사회가 되도록 해보자”고 해 왔습니다. 여래의 진실한 뜻인 깨달음의 문명을 꽃 피우는 일이야말로 불교가, 절이, 스님이, 불자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이고, 우리 모두의 희망이기도 합니다.
어떻습니까. “나는 죄 많은 중생”이라는 관점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것과 “나는 본래부처”라는 관점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것, 그 살림살이가 같겠습니까, 다르겠습니까? 하늘과 땅처럼 다릅니다. 그냥 말만 들을 때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하늘과 땅만큼 다릅니다.
임제선사는 같은 내용을 더 압축해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깨달음의 사고방식, 본래부처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면 그 삶이 어떻게 되는가.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즉 어디서든 기꺼이 주체적으로 살면, 삶이 자유로운 삶, 당당한 삶, 참된 삶이 된다”라고 했습니다.
임제선사와 관련해서 유명한 이야기가 또 있는데,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말도 임제선사가 하신 말씀입니다. 끔직한 말이죠? 부처님 몸에 피를 내면 그것은 오역죄(五逆罪)에 해당된다는 말이 있지요. 오역죄는 인간이 저지르는 악행 중에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다섯 가지 최고의 악행을 말합니다.
그런데 임제선사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했습니다. 전통불교라는 체계안에서 보면 용납될 수 없는 표현이죠. 어떤 종교인들 교주를 만나면 죽이라고 말을 하면 가만 두겠습니까.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죠.
그런데 불교역사에서는 임제선사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임제선사야말로 여래의 진실한 뜻을 가장 투철하게 파악한 분, 여래의 진실한 뜻에 가장 충실한 삶을 산 대표적인 분이라고 평가를 합니다.
보통의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인데, 조금만 더 깊이 탐구해보면 정말 놀라운 이야기라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깨달음의 사고방식이라고 하는 게 이렇게 멋진 것이구나’ 하고 확 눈이 뜨이게 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이야기를 깊게 하기엔 적절하지 않은 듯합니다. 다만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주체적으로 삶을 살면, 그 삶이 참 괜찮다, 멋지다, 진정 자유롭고 행복한 삶이 된다”라는 것을 잘 새겨두면 좋겠습니다.
‘주체적인가, 아닌가’가 ‘미혹문명의 사고방식으로 살고 있는가, 깨달음 문명의 사고방식으로 살고 있는가’를 가름하는 척도인 것입니다. 주체적이라는 말은 사람이 본래부처라는 말과 사실은 같은 맥락의 내용입니다.
진짜 주체적으로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내가 주인이라면 나한테는 부족한 게 없죠. 그러니 누군가와 비교해서 열등감에 빠질 이유도 없고, 우월감으로 으스댈 이유도 없습니다. 상대비교를 하지 않으니 열등감, 패배감, 피해의식에 빠질 이유도 없고 잘났다고 큰 소리할 것도 없고, 누구를 무시할 일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나 당당할 수 있습니다.
선사들께선 주체적인 삶을 본래면목의 삶, 본래부처의 삶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설명을 더 보태면 “네 삶의 진짜 주인은 너다. 돈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명예가 있든 없든 관계없이 여자든 남자든 관계없이 기독교인이든 불교인이든 관계없이 아이든 어른이든 관계없이 누구나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으로 표현될 수 있는 그런 존귀한 존재들이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우리는 깨달음의 사고방식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깨달음의 사고방식으로 살지 않고서는 지금 우리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고통과 불행을 벗어날 길이 없다, 또는 우리가 희망이라고 생각하는 평화롭고 자유로운 삶이 가능하지 않다는 게 문명전환 지리산 만일결사를 하는 기본관점입니다.
♠ “행위 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이보다 희망적인 말이 또 있을까요?
“알고 보니 사람이 그대로 부처다”
이 말이 진짜 맞는지 안 맞는지만 확인하고 오늘 이야기를 끝내겠습니다.
사람은 반드시 본인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대로 그 삶이 바로바로 만들어지는 존재입니다. 내가 행위하는 대로 된다면 부처라고 할 만 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사고방식 하나만 가져도 충분하다고 봅니다. 행위를 해도해도 무엇인가 안 된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행위를 하기만 하면 틀림없이 행위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데 무엇이 걱정이겠습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검증을 한 번 해볼까요?
성불원 신도님들이 새벽밥 자시고 원주에서 여기까지 오셨는데, 오시기 전에 주지스님께서 실상사 가면 도법스님이라는 훌륭한 스님이 있다고 얘기했다고 합시다. 또 온 세상 사람들이 “도법스님은 참 훌륭한 스님이야. 부처님보다도 더 훌륭해”라고 믿고 공감하고 확신하고 다 지지한다고 해봅시다. 더 나아가 칠십억 인류가 그렇게 믿고 있다고 해봅시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제가 거짓말을 한다면 저는 뭐가 되겠습니까. 즉각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칠십억이 나를 훌륭하다고 믿거나 말거나에 관계없어요. 스님이거나 아니거나에 관계없어요. 부자거나 가난하거나에 관계없어요. 잘났는가 못났는가에도 관계없어요. 그냥 행위하는 대로 즉각 이루어지는 겁니다.
사실대로 보면 실제 매우 간단한 문제 아닙니까? 딱 마음 먹고 행위만 하시면 되는 거예요. 지금 이순간 “아유, 나 저 얘기 듣기 싫어. 나는 갈 거야”하는 생각이 들면 가면 됩니다. 가면 즉각 뭐가 되지요? 즉각 ‘가는 사람’이 되죠. 절대 다른 것 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그래도 여기 왔으니까 도법스님 말씀은 잘 듣고 가야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죠? 그래서 잘 들었어요. 그러면 즉각 뭐가 돼요? 즉각 잘 듣는 사람이 돼요.
이런 것을 가르쳐주는 게 불교예요. 이런 게 어렵습니까? 서울대학교에 가야만 가능한 일입니까? 미국유학이라도 가야만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설악산 봉정암에 가야 되겠습니까? 인도 기원정사에 가야 되겠습니까?
‘언제 어디에서나 내 인생의 주인은 나다. 고로 내가 마음먹고 내 삶을 잘 만들어 가면 된다’는 것을 잘 아는 것이 깨달음의 내용인 것이고, 이 내용을 생활화하자고 하는 게 불교수행인 것입니다.
♠ 문명전환, 2600년 불교역사이며 불교의 존재 이유
문명전환 지리산 만일결사, 부처님 가신 희망의 길을 따라
지금 세상은 너무 혼란스럽습니다. 그래서 실상사에 사는 식구들이 “우리라도 부처님이 가르쳐준 길을 잘 정리하고 그 길을 잘 가보자. 사람들이 ‘야, 저거 괜찮네. 나도 한 번 해봐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도록 잘 해보자”고 해서 만들어진 자리가 천일기도요, 만일결사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제 미혹문명을 넘어서 깨달음의 문명으로 가자고 하는 것에서 지금까지 주로 깨달음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미혹문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잠깐 짚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미혹문명의 사고방식 가운데 가장 큰 문제는 ‘나는 죄 많은 업보중생’이라는 사고방식입니다. 또 다른 표현으로는 “백겁 천겁동안 쌓이고 쌓여온 탐진치”라고도 합니다.
죄 많은 업보중생이라는 사고방식에 사로잡혀서 그게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결국 전생으로 파고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어디까지 파고들어갈 수 있을까요? 전생의 시작이 언제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전생을 파고 들어갈 경우 그 끝이 어딜까요? 탐진치 이야기도 똑같습니다.
한번 봅시다. 지금 여기 도법이라고 하는 스님이 전생에 탐진치가 정말 많았다고 칩시다. 그래서 하는 일이 아무것도 잘 안된다고 칩시다. 전생의 업보 때문에 참선을 해도 안 되고 기도를 해도 안 되고 독경을 해도 안 되고… 세상에 별의별 것을 다 해봐도 별 수가 없다고 칩시다.
그런데 사실이 그렇다손 치더라도 지금 이 순간 “너는 전생 업보의 노예가 아니고, 네 삶을 네 마음대로 창조해갈 수 있는 네 삶의 주인공이야. 네가 행위하는 대로 네 삶이 만들어져”라는 부처님 말씀을 듣는 순간, 도법스님이 작심하고 일생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지만 평화롭게 말을 했다고 칩시다. 그런데도 도법스님은 전생의 죄업 때문에 평화 파괴자가 될까요 아니면 평화롭게 말하는 사람이 될까요?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어떨 것 같습니까? 전생에 죄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혹은 있다손 치더라도, 인간은 행위하는 대로 만들어지는 존재이기 때문에 마음먹고 평화롭게 말하면 즉각 평화롭게 말하는 사람인 거예요. 착하게 말하면 즉각 착하게 말하는 사람인 것이고, 겸손하게 말하면 즉각 겸손하게 말하는 사람인 겁니다.
그렇다면 점잖은 사람이 되고 싶으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점잖게 행위하면 됩니다. 멋있는 사람이 되고 싶으면, 멋있게 행위하면 되겠지요? 이게 얼마나 명명백백합니까? 털끝만큼도 의심할 건덕지가 없습니다.
미혹문명의 사고방식을 우리는 보통 탐진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깨달음 문명의 사고방식은 뭐라고 할까요? 깨달음행, 오늘 설명한 내용으로는 본래붓다행이라고 합니다.
본래부처니까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마음 먹고 본래부처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되는데? 평화로운 인간이 되고 싶다면, 평화롭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됩니다. 멋있는 인간이 되고 싶다면, 멋있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됩니다. 당당한 삶을 살고 싶다면, 당당하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됩니다. 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고방식과 행동을 생활화하는 것이 소위 깨달음 문명의 길을 가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하고 있는 문명전환 지리산 만일결사는 불교 2600년 역사 속에서 줄기차게 해왔던 일입니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단지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현대적 언어로 표현한 것뿐입니다. 따라서 <문명전환 지리산 만일결사>야말로 불교공부와 수행을 제대로 하는 길이며, 또 모순과 혼란에 빠져 있는 이 세상을 구원하는 가장 바람직한 길이고 희망찬 길이라는 것에 대해 자기정리를 잘 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뜻한 바대로 내 삶도 발전해가고 세상도 우리가 뜻한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큰 힘이 되고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함께 할 것을 마음에 새기고 다짐하면서 오늘 이후의 삶을 잘 가꿔갑시다. 고맙습니다.
문명전환,
2600년 불교역사, 불교의 존재 이유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천만다행으로 날씨가 좀 따뜻해졌습니다. 날씨가 을씨년스러워서 많이 걱정됐는데 현각스님이 오셔서 축사를 해서 그런지 갑자기 햇빛이 쨍쨍 나네요.(웃음)
실상사는 마당이 참 넓어서 사람이 많이 모여도 늘 빈 것 같아 보이는데, 오늘 <문명전환을 위한 지리산 만일결사>를 다짐하는 자리를 격려하기 위해 많은 분들이 와주셨습니다. 먼저 현각 스님과 원주 성불원 식구들, 생명평화결사 지리산순례단에 감사드립니다. 그 외에도 더 계신 것 같은데, 제가 잘 몰라서 박수 한 번 쳐서 감사를 드리면 어떨까 싶네요. (박수)
실상사 사부대중이 미혹의 문명을 넘어 깨달음의 문명의 길을 열어보자는 취지에서 <문명전환 지리산 만일결사>를 하자고 마음을 냈고 오늘은 약사여래 천일기도 회향을 하는 자리이자 두 번째 천일정진을 시작하는 자리이니 그 내용을 다시 한 번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 왜 굳이 미혹의 문명, 깨달음의 문명이라는 말을 쓸까요?
실상사공동체 식구들이나 신도님들 외에 여기 계신 분들 중에는 미혹의 문명, 깨달음의 문명이라는 말을 처음 듣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좀 생뚱맞게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또는 2600년 긴 역사 속에서 형성된 많은 경전들, 논서들, 어록들이 있고, 그 안에는 대단히 의미심장하고 멋있고 아름다운 표현들이 풍부한데, 왜 굳이 새삼스럽게 이런 말을 만들어서 쓰는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불교는 석가모니 부처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부처님이 사셨던 80평생을 미혹문명과 깨달음의 문명이라는 말로 짚어보면, 그 중 깨달음을 얻기 전 35세까지는 미혹문명의 사고방식으로 살았습니다. 세상의 부조리한 삶을 목도하고 세상과 인생에 대한 의문과 두려움을 해결하려고 노력했으나 미혹문명의 사고방식으로 살고 있는 세속의 현실에서는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길을 버리고 출가를 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세속의 길을 버리고 종교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답을 찾기 위해 소위 ‘육년고행’이라고 하는 종교적 수행을 합니다. 처음에는 전 존재를 바쳐서 크게는 선정주의와 고행주의 또는 향락주의와 고행주의라는 말로 표현되는, 그야말로 뼈를 깎는 수행을 했지만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세속에서 답이 없으니 세속을 버렸고, 종교의 길을 선택했지만 거기서도 답을 못 찾으니 그것도 버립니다. 필요한 지도는 다 써버렸습니다. 이제는 지도도 없는 판이 된 거죠.
어쩔 수 없이 자기 방식의 길을 찾고 만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겁니다. 그래서 당신이 탐구한 방식으로 수행을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답을 찾았습니다.
답을 찾은 후 사람들에게 그걸 알리기 위해 전법활동을 시작했는데, 첫 설법 때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초전법륜경>에 잘 나와 있습니다. 부처님은 당신의 수행방법을 “중도적으로 했다”고 표현합니다. “중도적으로 했다. 그 중도의 길을 잘 밟아서 가보니까 거기에서 연기의 진리[연기법]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다른 말로 하면, “중도연기의 진리를 깨달았다.” 또는 “중도연기의 진리를 깨달아서 부처가 되었다”고도 합니다.
부처님의 출가 후 6년 수행 중에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수행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길어 봐야 49일 정도라고 합니다. 6년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중도적으로 수행한 49일을 뺀 나머지 시간은 당시 기성종교계에서 가르치고 있는 수행을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답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49일 정도 당신 방식으로 수행을 해서 답을 찾았고, 깨달은 사람, 부처님이 된 것입니다.
붓다의 삶을 오늘 우리가 하고 있는 일과 연결시켜보면 미혹의 문명을 벗어나서 깨달음의 문명 길이 열린 거죠.
부처님의 전 생애로 보면 80년 중에서 35년은 미혹문명 속에서 살았고, 45년은 깨달음 문명의 사고방식으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후 많은 분들이 부처님 가르침에 공감을 하고 그 길을 가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렇게 해서 불교 역사가 2,600여 년 동안 도도하게 펼쳐지고 흘러왔습니다.
그러니까 미혹문명과 깨달음 문명이라는 말은 현대적 언어로 표현한 것일 뿐 실제로는 뜬금없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 여래(부처님)의 진실한 뜻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많이 독송하고 있는 <천수경>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개경게 開經偈 경전을 펴는 게송
무상심심미묘법 無上甚深微妙法 세상에서 가장깊고 미묘한법
백천만겁난조우 百千萬劫難遭遇 백천만겁 지나도록 만나뵙기 어려워라
아금문견득수지 我今聞見得受持 내가이제 보고듣고 받아지녀 외우오니
원해여래진실의 願解如來眞實意 부처님의 진실한 뜻 알아지길 원합니다.
‘원해여래진실의’, 즉 여래[부처님]의 가르침을 여래가 뜻한 바대로 잘 파악하고 잘 이해하고, 그래서 그 뜻에 어긋나지 않게 우리 불교공부와 수행이 잘 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래의 진실한 뜻은 무엇일까요? 여래의 진실한 뜻은 ‘깨달음으로 삶을 살아야 된다’, 즉 깨달음으로 삶을 살아야만 그 삶이 괜찮은 삶이 되고, 부처와 같은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지금 ‘깨달음의 문명’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래의 진실한 뜻인 것입니다.
그런데 깨달음의 문제가 너무 복잡하고 어렵게 되어 있다 보니 보통사람들은 할 수 없는 것처럼 취급되어지고 있는 게 우리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것 때문에 개인적으로도 집단적으로도 많은 혼란을 겪고 있기도 하고요.
미혹의 사고방식이 무엇인지, 깨달음의 사고방식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려주고자 했던 게 경전의 말씀들이고 불교역사입니다.
그 많은 팔만사천법문, 경전내용을 압축해서 보면 딱 이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우리를 고통과 불행의 늪에 빠지게 하는 미혹문명의 사고방식은 무엇인가. 둘째, 고통과 불행으로부터 벗어나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깨달음의 사고방식은 무엇인가입니다. 그 물음에 답을 알려주는 것이 경전내용들이고 불교역사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이 일생을 바쳐서 삶으로 살아가신 내용입니다. 나아가 제자들에게 원했던 것도 같은 내용입니다. 그런 내용의 삶이 이루어지는 세상이 되도록 애써 정진하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래[부처님]의 진실한 뜻입니다.
그리고 오래 전 경전의 언어들이 현대인들에게 낯설 수도 있기 때문에 부처님이 뜻한 바가 조금이라도 더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전달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현대적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래서 말은 다르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뜻은 같은 뜻이라는 것, 지역에 따라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한 것이라는 것을 함께 설명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 어떤 것이 미혹의 사고방식이고
어떤 것이 깨달음의 사고방식일까요?
그러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미혹의 사고방식과 깨달음의 사고방식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것도 여러 형태로 표현되고 있는데요. 그중에서 한 가지만 제가 말씀을 드려볼까 합니다.
대표적으로 화엄경에서는 그 미혹의 사고방식과 깨달음의 사고방식을 “인생을 잘 몰랐을 때엔 사람이 죄 많은 업보 중생이었는데, 인생을 제대로 알고 보니 사람이 그대로 오롯한 본래부처이네” 라고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생각할 때에 죄 많은 업보중생과 부처는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잖아요. 중생은 아무리 날고 뛰어도 고통과 불행의 감옥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물론 그 고통과 불행의 감옥 속에도 순간순간 즐거울 때가 있을 수 있지요. 그렇지만 본질적으로는 우리가 감각적으로 좋다고 생각하는 것, 즐겁다고 생각하는 것의 거의 대부분이 고통과 불행의 조건들인 겁니다. 대부분이 다 그러한데 우리는 거기에 속고 있는 것이지요. 소위 말해서 자승자박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은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고통의 조건이 될 수밖에 없는 이런 삶은 끝내야 된다고 판단을 하고 그 답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섰던 것입니다.
그리고 목숨을 걸고 했던 6년 고행을 버리고 당신 방식의 길인 중도 수행을 통해서 “사람이 죄 많은 업보중생이 아니고 본래 거룩한 부처”임을 깨달으셨습니다. 그것을 훗날 ‘사람이 부처다’라고 표현해 왔습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문명전환을 이야기하는 것이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싶습니다. 부처님 때부터 시작해서 불교 역사 2600년 내내 “미혹의 감옥에서 벗어나 깨달음이라는 대자유의 광장으로 나가자. 깨달음을 개개인의 삶으로 생활화하고 대중화하여 생명평화사회가 되도록 해보자”고 해 왔습니다. 여래의 진실한 뜻인 깨달음의 문명을 꽃 피우는 일이야말로 불교가, 절이, 스님이, 불자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이고, 우리 모두의 희망이기도 합니다.
어떻습니까. “나는 죄 많은 중생”이라는 관점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것과 “나는 본래부처”라는 관점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것, 그 살림살이가 같겠습니까, 다르겠습니까? 하늘과 땅처럼 다릅니다. 그냥 말만 들을 때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하늘과 땅만큼 다릅니다.
임제선사는 같은 내용을 더 압축해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깨달음의 사고방식, 본래부처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면 그 삶이 어떻게 되는가.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즉 어디서든 기꺼이 주체적으로 살면, 삶이 자유로운 삶, 당당한 삶, 참된 삶이 된다”라고 했습니다.
임제선사와 관련해서 유명한 이야기가 또 있는데,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말도 임제선사가 하신 말씀입니다. 끔직한 말이죠? 부처님 몸에 피를 내면 그것은 오역죄(五逆罪)에 해당된다는 말이 있지요. 오역죄는 인간이 저지르는 악행 중에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다섯 가지 최고의 악행을 말합니다.
그런데 임제선사는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했습니다. 전통불교라는 체계안에서 보면 용납될 수 없는 표현이죠. 어떤 종교인들 교주를 만나면 죽이라고 말을 하면 가만 두겠습니까.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죠.
그런데 불교역사에서는 임제선사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임제선사야말로 여래의 진실한 뜻을 가장 투철하게 파악한 분, 여래의 진실한 뜻에 가장 충실한 삶을 산 대표적인 분이라고 평가를 합니다.
보통의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인데, 조금만 더 깊이 탐구해보면 정말 놀라운 이야기라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깨달음의 사고방식이라고 하는 게 이렇게 멋진 것이구나’ 하고 확 눈이 뜨이게 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 이야기를 깊게 하기엔 적절하지 않은 듯합니다. 다만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주체적으로 삶을 살면, 그 삶이 참 괜찮다, 멋지다, 진정 자유롭고 행복한 삶이 된다”라는 것을 잘 새겨두면 좋겠습니다.
‘주체적인가, 아닌가’가 ‘미혹문명의 사고방식으로 살고 있는가, 깨달음 문명의 사고방식으로 살고 있는가’를 가름하는 척도인 것입니다. 주체적이라는 말은 사람이 본래부처라는 말과 사실은 같은 맥락의 내용입니다.
진짜 주체적으로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내가 주인이라면 나한테는 부족한 게 없죠. 그러니 누군가와 비교해서 열등감에 빠질 이유도 없고, 우월감으로 으스댈 이유도 없습니다. 상대비교를 하지 않으니 열등감, 패배감, 피해의식에 빠질 이유도 없고 잘났다고 큰 소리할 것도 없고, 누구를 무시할 일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언제 어디서나 당당할 수 있습니다.
선사들께선 주체적인 삶을 본래면목의 삶, 본래부처의 삶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설명을 더 보태면 “네 삶의 진짜 주인은 너다. 돈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명예가 있든 없든 관계없이 여자든 남자든 관계없이 기독교인이든 불교인이든 관계없이 아이든 어른이든 관계없이 누구나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으로 표현될 수 있는 그런 존귀한 존재들이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우리는 깨달음의 사고방식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깨달음의 사고방식으로 살지 않고서는 지금 우리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고통과 불행을 벗어날 길이 없다, 또는 우리가 희망이라고 생각하는 평화롭고 자유로운 삶이 가능하지 않다는 게 문명전환 지리산 만일결사를 하는 기본관점입니다.
♠ “행위 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이보다 희망적인 말이 또 있을까요?
“알고 보니 사람이 그대로 부처다”
이 말이 진짜 맞는지 안 맞는지만 확인하고 오늘 이야기를 끝내겠습니다.
사람은 반드시 본인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대로 그 삶이 바로바로 만들어지는 존재입니다. 내가 행위하는 대로 된다면 부처라고 할 만 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사고방식 하나만 가져도 충분하다고 봅니다. 행위를 해도해도 무엇인가 안 된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행위를 하기만 하면 틀림없이 행위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데 무엇이 걱정이겠습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검증을 한 번 해볼까요?
성불원 신도님들이 새벽밥 자시고 원주에서 여기까지 오셨는데, 오시기 전에 주지스님께서 실상사 가면 도법스님이라는 훌륭한 스님이 있다고 얘기했다고 합시다. 또 온 세상 사람들이 “도법스님은 참 훌륭한 스님이야. 부처님보다도 더 훌륭해”라고 믿고 공감하고 확신하고 다 지지한다고 해봅시다. 더 나아가 칠십억 인류가 그렇게 믿고 있다고 해봅시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제가 거짓말을 한다면 저는 뭐가 되겠습니까. 즉각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칠십억이 나를 훌륭하다고 믿거나 말거나에 관계없어요. 스님이거나 아니거나에 관계없어요. 부자거나 가난하거나에 관계없어요. 잘났는가 못났는가에도 관계없어요. 그냥 행위하는 대로 즉각 이루어지는 겁니다.
사실대로 보면 실제 매우 간단한 문제 아닙니까? 딱 마음 먹고 행위만 하시면 되는 거예요. 지금 이순간 “아유, 나 저 얘기 듣기 싫어. 나는 갈 거야”하는 생각이 들면 가면 됩니다. 가면 즉각 뭐가 되지요? 즉각 ‘가는 사람’이 되죠. 절대 다른 것 되지 않습니다.
반대로 ‘그래도 여기 왔으니까 도법스님 말씀은 잘 듣고 가야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죠? 그래서 잘 들었어요. 그러면 즉각 뭐가 돼요? 즉각 잘 듣는 사람이 돼요.
이런 것을 가르쳐주는 게 불교예요. 이런 게 어렵습니까? 서울대학교에 가야만 가능한 일입니까? 미국유학이라도 가야만 되는 것입니까? 아니면 설악산 봉정암에 가야 되겠습니까? 인도 기원정사에 가야 되겠습니까?
‘언제 어디에서나 내 인생의 주인은 나다. 고로 내가 마음먹고 내 삶을 잘 만들어 가면 된다’는 것을 잘 아는 것이 깨달음의 내용인 것이고, 이 내용을 생활화하자고 하는 게 불교수행인 것입니다.
♠ 문명전환, 2600년 불교역사이며 불교의 존재 이유
문명전환 지리산 만일결사, 부처님 가신 희망의 길을 따라
지금 세상은 너무 혼란스럽습니다. 그래서 실상사에 사는 식구들이 “우리라도 부처님이 가르쳐준 길을 잘 정리하고 그 길을 잘 가보자. 사람들이 ‘야, 저거 괜찮네. 나도 한 번 해봐야겠다.’는 마음이 생기도록 잘 해보자”고 해서 만들어진 자리가 천일기도요, 만일결사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제 미혹문명을 넘어서 깨달음의 문명으로 가자고 하는 것에서 지금까지 주로 깨달음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미혹문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잠깐 짚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미혹문명의 사고방식 가운데 가장 큰 문제는 ‘나는 죄 많은 업보중생’이라는 사고방식입니다. 또 다른 표현으로는 “백겁 천겁동안 쌓이고 쌓여온 탐진치”라고도 합니다.
죄 많은 업보중생이라는 사고방식에 사로잡혀서 그게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결국 전생으로 파고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어디까지 파고들어갈 수 있을까요? 전생의 시작이 언제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전생을 파고 들어갈 경우 그 끝이 어딜까요? 탐진치 이야기도 똑같습니다.
한번 봅시다. 지금 여기 도법이라고 하는 스님이 전생에 탐진치가 정말 많았다고 칩시다. 그래서 하는 일이 아무것도 잘 안된다고 칩시다. 전생의 업보 때문에 참선을 해도 안 되고 기도를 해도 안 되고 독경을 해도 안 되고… 세상에 별의별 것을 다 해봐도 별 수가 없다고 칩시다.
그런데 사실이 그렇다손 치더라도 지금 이 순간 “너는 전생 업보의 노예가 아니고, 네 삶을 네 마음대로 창조해갈 수 있는 네 삶의 주인공이야. 네가 행위하는 대로 네 삶이 만들어져”라는 부처님 말씀을 듣는 순간, 도법스님이 작심하고 일생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지만 평화롭게 말을 했다고 칩시다. 그런데도 도법스님은 전생의 죄업 때문에 평화 파괴자가 될까요 아니면 평화롭게 말하는 사람이 될까요?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어떨 것 같습니까? 전생에 죄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혹은 있다손 치더라도, 인간은 행위하는 대로 만들어지는 존재이기 때문에 마음먹고 평화롭게 말하면 즉각 평화롭게 말하는 사람인 거예요. 착하게 말하면 즉각 착하게 말하는 사람인 것이고, 겸손하게 말하면 즉각 겸손하게 말하는 사람인 겁니다.
그렇다면 점잖은 사람이 되고 싶으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점잖게 행위하면 됩니다. 멋있는 사람이 되고 싶으면, 멋있게 행위하면 되겠지요? 이게 얼마나 명명백백합니까? 털끝만큼도 의심할 건덕지가 없습니다.
미혹문명의 사고방식을 우리는 보통 탐진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깨달음 문명의 사고방식은 뭐라고 할까요? 깨달음행, 오늘 설명한 내용으로는 본래붓다행이라고 합니다.
본래부처니까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마음 먹고 본래부처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되는데? 평화로운 인간이 되고 싶다면, 평화롭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됩니다. 멋있는 인간이 되고 싶다면, 멋있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됩니다. 당당한 삶을 살고 싶다면, 당당하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됩니다. 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고방식과 행동을 생활화하는 것이 소위 깨달음 문명의 길을 가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하고 있는 문명전환 지리산 만일결사는 불교 2600년 역사 속에서 줄기차게 해왔던 일입니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단지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현대적 언어로 표현한 것뿐입니다. 따라서 <문명전환 지리산 만일결사>야말로 불교공부와 수행을 제대로 하는 길이며, 또 모순과 혼란에 빠져 있는 이 세상을 구원하는 가장 바람직한 길이고 희망찬 길이라는 것에 대해 자기정리를 잘 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뜻한 바대로 내 삶도 발전해가고 세상도 우리가 뜻한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큰 힘이 되고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함께 할 것을 마음에 새기고 다짐하면서 오늘 이후의 삶을 잘 가꿔갑시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