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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법회[2023년 8월] - 단 한 번뿐인 인생, 어떻게 살 것인가?


단 한 번뿐인 인생, 어떻게 살 것인가?

 

 

안녕하세요.

 

날씨가 많이 덥습니다. 어떻게 지내세요?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실상사농장 식구들이 올해 농사를 빵빵하게 잘 지어서 인연 있는 식구들을 잘 먹여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농사를 많이 확대하고 애써서 일도 많이 했는데 기후 때문에 잘 안 됐다고 합니다. 감자 농사도 그렇고 양파 농사도 그렇고 고추 농사도 그렇다고 하는데, 마을은 어떠신가요? 이제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기후가 우리 예상을 훨씬 넘어서 큰 변화가 일어나니까 거기에 적응해 가는 과정이 보통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사람과 사람 관계라도 좋아야 하는데 우리 사회를 보면 기후 못지않게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보통이 아닌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래저래 사는 게 만만치 않다고 하는 걸 실감할 수밖에 없는 게 요즘이 아닌가 싶네요.

 

근황1. 단순소박한 삶의 길 모색

저는 최근에 전전긍긍하고 있는 일이 몇 가지가 있는데요. 오늘은 제 근황으로서 그 이야기를 두 가지 정도 소개해볼까 싶네요. 우리 어릴 적에 경전 공부를 해보면, 우리에게 주어진 시주 물건을 정말로 소중하게 써야 된다고 강조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주어진 시주 물건들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 잘 관리하고 잘 써야 된다. 경전에 보면 시주물을 어떻게 대하고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버려진 헝겁을 주워 모아서 옷을 만들어 입는 것이 출가 비구의 의복 생활의 기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회수준도 더높아지고 불교신자들도 많이 늘어나면서 스님들한테 좋은 옷감을 공양 올리는 경우들이 많아집니다. 필요한 옷을 만들어 입도록 좋은 옷감을 올리는데, 그 과정에서 이 옷감을 실제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화가 부처님과 제자 사이에 오고 갑니다.

옷감을 받으면 처음엔 옷을 만들어 입는데 옷도 계속 입으면 낡잖아요. 그래서 옷으로 입을 수 없을 만큼 낡으면 그때는 어떻게 합니까? 하고 제자가 묻습니다. 거기에 대한 답이, 옷으로 입을 수 없을 정도로 낡으면 그 낡은 옷을 걸레로 사용해야한다. 걸레로도 쓸 수 없을 정도로 낡으면 어떻게 합니까? 마지막 답이, 걸레로도 쓸 수 없을 정도로 낡으면 진흙에 뭉쳐서 벽을 바르는 데 사용하면 된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공양 올린 시주 물건을 얼마나 소중하게 다루고 살았는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적어도 출가수행자라면 마땅히 그래야 된다고 배우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의복생활만 그러겠습니까? 음식도 마찬가지고 주거생활도 마찬가지로 다 그런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고 되어있습니다.

왜 이 문제를 최근에 제가 겪고 있는 전전긍긍하는 삶의 한 사례로 말씀을 드리냐면, 요즘에는 아끼려고 해도 아낄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염치가 있으니까 함부로 버릴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어지간히 쓸 만큼 쓰고 버리려고 하는데 요즘엔 물건들이 하도 좋으니까 쉽게 잘 떨어지지도 않습니다. 또 낡은 것을 사용하면 주변에서 뭐라고 합니다. 청승맞게 그런 것을 쓰고 있다고. 신도님들도 그러고 우리 식구들도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전전긍긍이라고 하죠.

물건이 부족할 때는 아주 귀하게, 또는 근검절약해서 쓰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미덕으로 강조도 하고 권장도 했죠. 그런 것이 기록되어서 경전에도 나오고. 그런데 지금은 물건이 너무 넘쳐납니다. 그뿐 아니라 오히려 소비하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는 사회가 돼버렸습니다. 옛날에는 절약해야만 그 사회가 유지 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절약을 권장하는 게 아니라 소비를 권장할 수밖에 없는 사회가 된 겁니다.

이럴 때도 경전에 있다고 해서 계속 근검절약을 강조하는 것이 과연 경우에 맞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 고민이 있습니다. 우리는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하는 사람들로서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야 될까 하는 부분에 대한 정답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것에 대한 바람직한 답을 우리가 찾아내고 만들어내는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 전전긍긍하는 제 생활의 한 예로서 말씀을 드려봤습니다.

 

에피소드: 남원불교대학과의 차담

또 하나는 어제 저녁에 남원불교대학 식구들이 와서 차담을 했던 내용입니다. 차담이라고 하는 건 차 마시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 나누는 것이잖아요. 일방적으로 강의하는 자리가 아닌 거죠. 허심탄회하고 편안하고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묻고 답하는 자리입니다. 때에 따라서는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고 뭔가 따져보기도 하는 자리죠. 그러면서 서로 학습도 이루어지고 탁마도 이루어지고 새로운 안목이 열리기도 하는 프로그램을 차담이라고 합니다.

그러려면 차담에 참여하는 식구들이 대화거리를 가지고 와야 하거든요. 그런데 어제 보니까 대화거리가 아무것도 준비 안 돼 있었습니다. 대화거리가 준비가 안 되어 있으니까 어떻게 대화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대화거리가 없이 그냥 이야기 하니까 결과적으로 내가 일방적인 이야기를 계속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비록 상황이 그렇다 하더라도 좋은 마음으로 만났으니까 ‘인생을 살아가는데 유익한 내용이어서 자리를 끝내고 보니까 참 좋은 시간이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야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준비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보니까 제가 일방적으로 그 상황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함께 이야기할만한 거리를 찾아내려고 해도 잘 안 되었습니다. 물어보기도 하고 엉뚱하게 다른 얘기를 꺼내보기도 하느라 2시간을 전전긍긍했습니다. 남원불교대학에서 오신 분들은 그 2시간이 괜찮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 시간을 의미 있고 유익한 시간이 될 수 있도록 해보려고 온갖 아양을 떨고 어리광을 부린 시간이었죠. 나누고 싶은 근황은 그렇습니다.

 

근황2-1.이 시대 우리가 가야할 길: 귀일심원 요익유정

그다음에는 우리가 여기서 늘 하는 이야기를 우리 동네 말고 다른 동네에 가서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우리 동네에선 이야기를 해도 늘 듣던 이야기라 심드렁해 합니다. 관성에 젖고, 타성에 젖어서. 그런데 이것이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타성에 젖는다는 것, 관성에 빠진다는 것이 가장 무서운 일이라서 계속 ‘정신 차려! 정신 차려!’, ‘깨어 있어야 돼! 깨어 있어야 돼!’ 하는 것입니다. 깨어 있으라는 이야기가 특별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정신 차리라’는 말입니다.

늘 같은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젖어드는 관성, 타성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동네에서 같은 이야기를 했을 때 나타난 반응을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우리가 역사적 경험으로 터득한 것도 그렇고 과학적으로 밝혀진 내용도 그렇고 최근에는 코로나 상황을 겪으면서도 그렇고 또 부처님 말씀, 여러 성인들의 가르침들을 다 종합해서 우리 식으로 설명하면 ‘온 우주의 유형무형의 모든 것들은 다 그물의 그물코처럼 이루어져 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온 우주 유형무형의 모든 것들은 공동운명체다’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물의 그물코처럼 연결되었다는 이야기는 공동운명체로 이루어져 있다, 따로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만 사는 길도 있을 수가 없고 우리끼리만 사는 길도 있을 수가 없고 인간끼리만 살 수 있는 길도 없다. 이것이 우리가 늘 했던 이야기를 압축적으로 정리해서 설명한 내용입니다.

이런 걸 예전엔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경험한 것들을 잘 관찰 해보고, 또 과학적으로 밝혀낸 내용들과 연결시켜서 생각해보고, 성인들 가르침과 연결시켜서 생각해보기도 하고, 최근에 겪었던 경험들(코로나19, 기후위기 등)을 잘 관찰해서 연결시켜보면 그렇게 요약되어집니다. 그런 내용을 우리는 뭐라고 이야기하는가. ‘한 몸, 한마음, 한 생명이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런 것을 원효스님이 기신론 주석에서 많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을 원효스님이 아주 압축해서 한마디로 요약한 표현이 ‘귀일심원(歸一心源) 요익유정(饒益有情)’입니다. 우리말로 풀면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다’가 됩니다. ‘귀일심원’, ‘우리 모두는 한 몸이요 한 마음이요 한 생명이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더 압축한 한마디가 ‘일심(一心)’이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요익유정’ ‘뭇생명들을 평화롭고 행복하게 한다. 그게 불교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알고 그렇게 사는 사람을 우리는 부처라고 얘기합니다. 따라서 불교인들은 그렇게 알고 그렇게 사는 데 전력투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한마음 한 몸 한 생명이기 때문에 분리시켜서 편을 가르거나 차별을 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인 것이죠. 두루두루 잘 어울려서 함께 잘 살아가야 된다. 그 말을 한문으로 ‘귀일심원 요익유정’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서 뭇생명들을 안락하게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뭇생명들로 하여금 평화롭고 행복하게 한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제가 이런 내용을 다일공동체라는 곳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실상사에서 살기 시작한 이후에 지리산을 무대로, 또 지리산과 인연된 많은 분들과 함께 펼쳤던 것이 지리산운동인데 그것이 여러 형태로 시도 되었어요. 여러 형태로 시도되었지만 지리산운동을 통해서 실현하고자 하는 내용을 한 마디로 하면 ‘생명평화’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모든 생명들이 안전하기를, 그들의 삶이 평화롭기를. 모든 생명이 안전하고 그 삶이 평화롭게 되는 그런 삶을 살자. 그런 사회를 만들자. 그런 미래를 열어가자. 그렇게 요약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운동을 불교계 내부로 가져가서 했던 것이 화쟁위원 활동입니다. 종단에서 화쟁위원회를 만들어서, 우리 속담으로 말하면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여서’ 더불어 함께 잘 살아가도록 하자. 그런 길을 열도록 하자. 이것이 화쟁위원의 활동이죠. 그래서 언어는 조금 다르지만 추구하고 실현하고 싶었던 내용은 사실 같은 내용입니다.

그런데 상생사회 실현을 모색하는 그곳에서도 함석헌선생 때부터 함석헌선생의 씨알사상을 토대로 해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노력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잘 안 됐어요. 함석헌 선생을 기리는 활동들을 이어서 쭉 해오는 그곳이 바로 씨알재단이라고 하는 곳입니다. 씨알재단의 연구소장으로 박재순 선생이라고 계십니다. 이분이 제가 화쟁위원장 할 때 어떤 인연으로 해서 몇 번 만나서 대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여서 함께 살도록 해야 된다. 우리가 이 길을 열자는 얘기에 대해서 썩 그렇게 훈연하지가 않았습니다. 그게 뭐지? 하는 의구심도 있고 지금 이 시점에서 그런 것을 해야 되나 하는 이런 문제의식도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대놓고 뭐라고 하지는 않지만 흔연하지가 않은 거죠. 못마땅한 부분도 있고 의심스러운 부분도 있고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얼마 전에 전화가 왔어요. ‘그때는 내가 그 말에 대해 의심을 했었는데 지금 상황을 보니까 우리 사회가 극단적인 심리적 내전상태로 가고 있다. 이렇게 계속 가면 큰일 날 것 같고 두렵고 걱정이 된다. 그래서 화쟁 이야기를 했던 스님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좀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서로 함께 사는 길을 열기 위한 노력들이 비상하게 펼쳐질 필요가 있겠다. 그러니까 스님, 당신이 전문가니까 시골에 있지 말고 서울 올라와서 그 일을 좀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상생 사회를 구현하도록 하자. 서로서로 함께 사는, 서로서로 너도 빛나고 나도 빛나게 되는 그런 사회가 되도록 우리가 활동을 하자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것 저런 거 다 정리하고 시골에서 사는 사람이라 서울에 올라가서 그런 일을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런 마음들을 내서 활동을 한다고 하면 나도 같이 하겠다. 그렇게 해서 앞서 말씀드렸던 밥퍼 운동본부에서 선언의식을 했어요. 그 선언식에서 ‘귀일심원 요익유정’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날 상생사회를 위한 선언식과 대화모임을 가진 후에 내려왔습니다.

그 현장에는 기독교 쪽 분들이 많았습니다. ‘귀일심원 요익유정’은 온 우주 유형유형의 모든 것들은 한 몸이고 한마음이고 한 생명체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더불어 함께 사는 길을 만들어가야 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어디로 가야 될지 또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될지 방향과 길을 못 찾아서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그 내용이 우리가 가야 될 방향과 길로서 굉장한 설득력을 갖는다는 그런 공감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거기에 공동대표로 참여했던 분 중에서 동학농민 통일운동을 하는 분이 계셨어요. 그쪽 분야에선 굉장히 이름이 알려진 분이신데, 그분이 전화를 걸어왔어요. 본인들이 동학농민 통일운동을 하는 사람들인데 그 분야의 이런저런 사람들 한 2~300명 정도가 계속 토론하면서 운동을 하고 있는데 나보고 거기에 같이 참여해달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런데 선언식 현장에서 보았을 때 그분하고 나하고는 전혀 결이 안 맞아요. 그분은 요새 말로 하면 굉장한 정의의 투사 같은 분입니다. 나는 약간 회색분자적인 성격이고. 그런데 그분이 전화가 온 거예요.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안개가 자욱했는데 선언식에서 제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욱한 안개가 쫙 걷히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해 온 본인들의 운동에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겁니다. 나는 그런 활동에 대해 알지 못함으로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기껏해야 선언식 자리에서 나눴던 내용들을 갖고 대화를 나누는 정도인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고 했는데 그 분은 그정도로 충분하니까 함께 하자는 말씀이셨어요. 그분들의 반응을 보면서 하나는 우리가 지금 모색하고 있는 방향과 길이 시대정신에 잘 부합하고 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우리 식구들이 지금 우리가 모색하고 있는 방향과 길에 대해 좀 더 자신감과 자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얘기를 나눠봤습니다.

 

근황2-2.

그리고 지금까지는 큰 담론이잖아요. 그래서 그런 담론들이 필요한 부분들에게는 도움이 되겠지만 그런 담론에 익숙하지 않고 또 관심이 많지 않은 분들은 ‘도대체 무슨 말이야?’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에게 보탬이 되는 이야기를 한마디하고 끝내야 되지 않겠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어제 나눈 이야기를 꺼내보려 합니다.

불교 이야기를 아주 압축해서 요약해보면 스스로 물을 수밖에 없는 물음이 있어요.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인생이 뭐지? 사는 게 뭐야? 조금 더 나아가면 그런 문제의식들이 여러 형태로 작용을 하죠. 왜 태어난 거야? 왜 살아야 하는 거야? 힘들 때일수록 그런 생각이 나기 마련입니다. 하는 일이 잘 안 되고 길이 안 보이고 힘들고 억울한 생각도 들고 그럴 때 그런 물음이 생기는 거죠. 나는 누구야? 인생은 뭐야? 왜 살아야 하는 거야? 어떻게 살아야 해? 또 왜 죽는 거야?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야? 등등. 그렇지 않습니까? 스스로에게 떠오를 수밖에 없는 인생의 질문, 그것을 우리는 인생 화두라고 합니다.

답답할 때, 힘들 때, 어찌할 바를 알 수 없어서 전전긍긍할 때일수록 스스로에게 떠오르는 질문들, 이것이야말로 진짜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런데 그 질문을 중요하게 생각 하고 끈질기게 탐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 이거 골치 아프네’ 하며 가서 “술이나 한잔 하지 뭐”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다수는 ‘아, 골치 아파’하는 하는 것 같습니다.

주의 기울려 눈여겨 보면 본인 스스로도 자기 삶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이 있기도 하고 또 그 삶이 우리 사회에 도움 되기도 하고 누가 봐도 참 괜찮아 보이기도 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인생 화두에 대한 물음을 꾸준하게 탐구하면서 살았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 경험도 그렇고 제 나름대로 다른 분들을 관찰해봐도 그렇습니다. 대부분 인생화두를 꾸준하게 탐구해가면서 사는 사람은 정치를 해도 괜찮은 정치를 하고요 사업을 해도 괜찮은 사업가가 되고 종교를 해도 괜찮은 종교인으로 살고요. 농부를 해도 괜찮은 농부가 됩니다.

그래서 어제 차담의 마지막 결론은 본인의 인생을 좀 괜찮은 인간으로 살다가 괜찮은 인간으로 살다가 죽을 것인가 아니면 형편없는 인간으로 살다가 죽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실래요? 그래도 괜찮게 살다 가야 되지 않겠어요? 본인을 위해 인연 있는 사람들, 우리 후배들, 그리고 이 세상을 위해 함께하는 사람들에게도 유익하고 본인에게도 괜찮게 살다 가야 되지 않겠어요?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그걸 가르쳐주는 게 불교입니다. 첫 번째는 자기 자신을 잘 아는 게 필요하다. 자기 자신을 알고 보니까 우리 모두는 한 몸이고 한 마음이고 한 생명이더라. 그동안은 나는 나이고 너는 너일 뿐이야. 이렇게 알고 믿었는데 내용을 제대로 알고 보니까 너와 나는 남남이 아니더라. 그런 것을 한 몸 한마음 한생이라는 말로 요약한 거죠. 이걸 우리가 잘 알 필요가 있다. 경전적 언어로는 ‘동체대비’. 동체를 잘 아는 것, 우리 모두가 한 몸이고 한 마음이고 한 생명임을 잘 아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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