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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결사[2024년 1월] '부처님의, 그리고 실상사의 불교관과 수행론'

지리산 만일결사 1400일입재식

부처님의, 그리고 실상사의

불교관과 수행론

 

안녕하세요? 겨울 날씨답지 않게 상당히 따뜻한 날씨네요.

양력으로 보면 한 해가 마무리되고 새로운 한 해가 이미 시작된 시기이죠. 그런데 모두가 느끼고 있듯이 세상 전체도 걱정이고, 우리나라도 걱정입니다. 여기 시골은 더 걱정인 현실입니다. 이럴 때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에 대한 답을 한 마디로 하면 경전에선 ‘반야바라밀의 갑옷으로 무장을 하고 살면 된다’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1. 지리산 만일결사의 지향, 본래부처로 사는 것!


우리가 미혹의 문명을 넘어 깨달음의 문명을 열어보자고 만일결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넘어서야 될 미혹문명의 삶이란 어떤 것일까? 또 우리가 열어가야 할 ‘깨달음의 문명’으로 표현되어지는 삶은 어떤 삶일까? 하고 이야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명료하게 와 닿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이야기들을 정리하는데 도움 되는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크게 세 가지로 정리를 했습니다. 하나는 ‘미혹의 문명을 넘어 깨달음의 문명으로’라는 주제로 ‘만일결사’를 함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공부했던 내용들과 만일결사를 좀 더 연결해서 짚어보려고 합니다. 자료집에 보면 제목이 ‘문명전환 만일결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미혹의 문명을 넘어 깨달음의 문명으로’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내용이 조금 더 확실해질 수 있도록 하기위해 첫 번째 주제로 내걸었습니다.‘미혹문명’이라는 말을 더 일반적 언어로 바꾸면 ‘미혹의 삶’이 되겠죠. 그러므로 ‘미혹의 삶을 버리고 깨달음의 삶, 또는 붓다행자로서의 삶을 살자’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우리가 ‘붓다행자’라는 말을 쓰고 있는데 그 말뜻은 ‘지금 당장 깨달음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우리가 더 익숙한 이야기와 연결시켜보겠습니다. ‘미혹의 삶’을 다른 말로 하면 ‘죄 많은 업보중생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업보중생의 삶을 버리고 본래 붓다, 혹은 동체대비행자로 살자’는 이야기입니다.

부처님은 어떤 사람일까요? 한마디로 요약하면 ‘본래 붓다 행자’ 또는 ‘동체대비행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표현들이 많이 있지만 부처님이 뜻한 불교관과 실천론을 압축해서 이야기 하면 그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만일결사는 ‘미혹의 삶을 버리고 또는 업보중생의 삶을 버리고 본래 붓다 또는 깨달음으로 삶을 살자’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본래부처로 살자’, ‘중생의 삶을 버리고 붓다로 살자’, 또는 ‘동체대비행자로 살자’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버려야 될 길, 또는 넘어서야 될 길은 ‘미혹의 삶’ 혹은 ‘중생의 삶’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미혹의 삶을 사는 한 또는 업보중생으로 사는 한 늘 고통과 불행이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그러면 그 고통과 불행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깨달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깨달음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동체대비심으로 사는 것입니다.불교의식에서는 이런 내용을 여러 가지 형태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런 사고방식을 특히나 잘 담고 있는 것이 사홍서원이라고 봅니다. 사홍서원은 다들 아시죠? 중생들을 다 구제하리. 온갖 번뇌를 다 끊으리. 법문을 다 배우리. 진리를 다 이루리. 이런 내용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2. 여래가 뜻한 불교관과 수행론

 

(1)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

그다음 두 번째는, 천수경의 내용 중에 ‘원해여래진실의((願解如來眞實義)’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경전을 펼쳐서 독송하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하는 ‘개경게(開經偈)’라는 게송의 일부입니다. 개경게의 전체 내용은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 백천만검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 아금문견득수지(我今見聞得受持) 원해여래진실의(願解如來眞實義)’이고, 앞서 말씀드린 내용은 게송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여래진실의’는 ‘여래의 진실한 뜻’, 다시 말하면 ‘부처님 마음에 맞는’ 이런 의미입니다. 부처님 마음에 드는 불교, 부처님이 ‘이것이 내가 하는 불교야’했던 것, ‘이것이 여러분들에게 권하고 싶은 불교야’했던 것, 부처님의 그 진실한 뜻을 잘 알아서 그 뜻에 부합하도록, 그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하는 것이 ‘원해여래진실의’의 의미입니다. 앞서에서는 만일결사라는 주제에 맞춰서 정리를 해 봤고, 지금은 여래가 뜻한 불교관과 수행론이라는 이름으로 짚어보고자 합니다.

여래가 뜻한 불교관과 수행론을 압축해서 표현한 것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 우리가 제일 흔하게 접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으로 부처님의 탄생게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8만 4천 법문을 다 압축해서 한마디로 요약하면,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타는 집속 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괜찮게 살 수 있을까 했을 때, 앞에서는 반야바라밀의 갑옷, 본래붓다의 갑옷, 또는 지혜와 자비의 갑옷을 단단히 입고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의 갑옷으로 무장을 하고 살면 그 삶이 괜찮아진다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삶이 이루어지는 사회라면 대단히 괜찮은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알아야 될 내용, 우리가 깨달아야 될 내용, 우리가 파악해야 될 내용을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 늘 강조해왔던 내용과 연결시키면, 우리 모두는 한 몸이고 한 마음이고 한 생명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 모두는 더불어 함께 살아야 할 한 식구, 한 형제라는 의미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의 내용은 내가 그대로 우주고 우주가 그대로 나이다, 그러므로 너와 나는 남남이 아니다, 너와 나는 한 몸이고 한 마음이고 한 생명이다 이런 뜻입니다. 이런 표현들이 의미하듯 우리 모두가 한 식구, 한 형제, 한 몸, 한 마음, 한 생명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너나없이 모두 두루두루 잘 어울려서 함께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한마디로 ‘동체대비’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루두루 잘 어울려 더불어 함께 살자, 그것을 ‘동체대비’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고, 탄생게에서는 ‘삼계개고 아당안지’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와 한 몸이고 한 마음이고 한 생명인 식구들, 친구들, 이웃들이 지금 고통과 불행 속에서 시달리고 있다. 그것을 내가 어떻게 모른 척할 수 있겠나. 한 몸이고 한 마음이고 한 생명이니 기꺼이 고통에서 벗어나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 이것이 ‘삼계개고 아당안지’ 부처님 탄생게의 내용입니다.저는 여래가 뜻한 불교관과 수행론을 압축하면 이 탄생게로 요약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 ‘일심동체’, ‘동체대비’입니다. ‘일심동체’라는 말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과 연결되어지고 ‘삼계개고 아당안지’는 대비원력으로, 큰 자비심으로, 자비심의 원력으로 산다는 말입니다.

 

(2) 반야바라밀행

이런 내용을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 대표적인 개념 하나는 ‘보리심’ 혹은 ‘발보리심’이라는 표현입니다. [하루를 여는 법석]에 있는 법문과 참회발원 내용을 보면, ‘아무리 우리가 좋은 일을 많이 해도 보리심을 내지 아니하면 밭만 갈고 씨를 뿌리지 않는 격이 되고 만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만큼 보리심 이야기가 중요하게 많이 강조되고 있습니다.그래서 보리심을 발해야 된다, 또는 발심을 해야 된다는 말을 많이 듣게 됩니다. 보리심을 발해야 된다는 내용을 줄인 말이 ‘발심’입니다. 보리심을 발해야 된다, 발보리심, 발심은 모두 같은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실천하는 것을 우리는 ‘보살행’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또는 ‘반야바라밀행’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부처님이 뜻한 불교관과 수행론이 압축되어서 여러 형태로 표현되고 있는데 앞서는 탄생게를 말씀을 드렸고 또 다른 하나는 반야바라밀행이라는 말로도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반야바라밀이라는 말을 풀면 ‘지혜’와 ‘자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혜’는 알아야 될 걸 잘 안다는 것이고 ‘자비’는 알아낸 내용을 온전히 삶으로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반야바라밀행’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발보리심행’, ‘반야바라밀행’ 이 한마디에 여래가 뜻한 불교관과 실천론이 다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본래부처’와 ‘동체대비’

살펴본 내용중에 우리가 특히 많이 사용하는 용어가 있습니다. ‘동체대비’, ‘대비원력’, ‘보리심’ 등입니다. ‘보리심’이라는 말은 ‘깨달음의 마음’ 또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마음’ 혹은 ‘깨달음을 실현하는 마음’이라고 풀기도 합니다. 여러 가지 방식으로 풀고 있는데 저는 보리심을 ‘깨달음을 추구하는 마음’이나 ‘깨달음을 실현하는 마음’보다는 ‘깨달음을 실천하는 마음’이라고 풀고 있습니다. 그래서 ‘발보리심’은 ‘깨달음으로 삶을 온전하게 살려는 발심’이라고 뜻풀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자주하는 표현으로는 ‘중도로 본 본래부처와 동체대비’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이 표현은 초기불교 경전 언어도 가져오고 대승불교 경전 언어도 가져오고 또 초기불교와 대승불교가 갖고 있는 공통점도 가져와서 한마디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한데 합치고 요약한 것이 ‘중도로 본 본래부처와 동체대비’라는 말입니다.‘보리심’이라는 말 속에는 ‘본래부처’와 ‘동체대비’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본래부처’라는 사실은 우리가 가장 먼저 잘 알아야 될 내용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깨닫는다’는 말로 이해해도 되고 또는 ‘지혜’라는 말로 이해해도 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많지만 그 중에서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 가장 중요하게 알아야 할 것은 자기 자신의 참 모습입니다. 자기 자신의 참모습을 제대로 잘 아는 것을 ‘깨달음’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본래부처’라는 사실을 잘 알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것인가는 저절로 명확해집니다. 나의 참모습을 ‘본래부처’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본래부처인 나의 참 모습을 제대로 알고 보면 그 다음에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그것을 단순하게 정리해 보면 ‘동체대비’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혹는 ‘대자대비’라는 말로 요약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하고 또는 무언가하고 늘 관계하고 살고 있습니다. 늘 관계하고 사는데 어떻게 관계할 것인가? 자비롭게 마음먹고 자비롭게 생각하고 자비롭게 말하고 자비롭게 행동하겠다는 관점과 입장으로 살겠다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삶입니다. 이런 내용을 종합해서 표현한 것이 ‘중도로 본 본래부처’와 ‘동체대비’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두 번째, 여래가 뜻한 불교관과 수행론은 ‘중도로 본 본래부처’와 ‘동체대비행’라는 말로 정리될 수 있겠습니다.

 

3. 실상사의 불교관과 수행론

 

(1) 실상사의 불교관: 중도로 본 본래부처

그다음에 세 번째는 지금 현재 실상사에서 우리가 강조하고 있는 불교관과 수행론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실상사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불교관과 수행론은 어떤 입장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지금 말씀 드릴 내용은 초기경전에도 나오고, 표현은 다르지만 대승경전에도 여기저기서 나옵니다. 그것이 무슨 내용인가? ‘나의 가르침, 나의 진리는 함께 이야기를 나눌 경우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내용을 바로 이해할 수 있어. 현실에 적용하면 바로 실현이 돼. 본인에게 적용해보면 바로 경험이 돼. 진짜 이해, 실현, 경험 되는지 바로 증명할 수 있어.’ 하는 내용이 부처님이 하신 말씀으로 경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이 한 번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군데 나옵니다. 정형구처럼 여러 곳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말한 것과 똑같이 표현되진 않았지만 뜻한 바는 같습니다. 하나는 함께 대화를 나누면 바로 이해가 될 수 있도록, 현실에 적용해 보면 바로 실현되고 경험 될 수 있도록 불교를 이야기해보자 하는 입장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의 참모습을 잘 알고 보니까 내가 죄 많은 업보중생이 아니라 본래부처네. 라고 표현되는 입장입니다. ‘본래부처’라는 말 속에도 여러 가지 의미가 들어있습니다.그중에 대표적인 것 하나를 오늘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본래부처라는 말 속에 들어있는 여러 가지 내용 중에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내용은, 인간은 하느님의 뜻이 있든지 말든지 관계없이 사주팔자가 있든지 말든지 관계없이 전생에 죄가 많고 적고에 관계없이 지금 여기에서 본인이 마음먹고 행위 하기만 하면 행위 하는 대로 본인이 뜻한 삶이 만들어지는 존재다. 내가 마음먹고 행위 하는 대로 내 삶이 창조되어지는 존재라는 이야기입니다. 이해에 도움이 되도록 예를 들어보면, 지금 제가 이 순간에 좋은 마음으로 법문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 바로 마음을 바꿔서 나쁜 마음으로 거짓말을 하게 되면 나는 즉각 나쁜 마음으로 거짓말하는 인간이 됩니다. 내가 지금 욕을 하면 그 순간 바로 욕하는 인간이 됩니다. 행위 하는 대로 즉각즉각 만들어지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평화롭게 하면 평화로운 사람이, 자비롭게 하면 자비로운 사람이, 겸손하게 하면 겸손한 사람이, 오만하게 하면 오만한 사람이 즉각 창조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신의 뜻과 관계없이 정해진 팔자하고도 관계없이 전생 죄의 유무와도 관계없이 즉각 행위 하는 대로 자신이 만들어집니다. 이런 것이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 할 내용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로 이해, 실현, 경험되는 불교를 해보자 하는 차원에서 실상사에서는 ‘중도로 본 본래부처’와 ‘동체대비행’으로 표현되어지는 그런 불교를 해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되는 이유는, 하나는 부처님 가르침을 잘 짚어보면 그렇게 하는 것이 진리에 합당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바람직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가르침, 여래가 뜻한 불교가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그렇게 해야만 지금 여기 나의 삶을 투철하게 사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반야바라밀행의 삶이 먼 훗날 좋아지고 먼 훗날 잘 되고 이런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바로 실현되는 삶이 가능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안 그러면 우리는 신의 뜻을 눈치 보느라고 현재 삶을 온전히 살 수가 없고 또 이미 정해졌다는 그 고약한 사주팔자 때문에 현재의 삶을 주체적으로 온전하게 살 수 없게 되고 또는 전생의 죄의식 때문에 현재를 온전히 살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사고방식들은 지금 여기 현재의 삶을 온전하게 살 수 없게 만듭니다. 역동적이고 활발발하게 또는 창조적으로 살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또는 나에게도 좋고 너에게도 좋고 우리 모두에게도 좋은, 괜찮은 삶을 온전하게 살아가는 데 장애 요인으로 작동합니다.

불교에서는 자신의 참모습을 본래부처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말은 인간은 신의 뜻하고도 관계없이 정해진 운명하고도 관계없이 전생의 죄하고도 관계없이 현재 행위 하는 대로 창조되어지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여기 현재의 삶을 온전하게 또는 투철하게 살기위해 전력투구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실상사는 그런 불교관과 수행론을 해보려 하고 있습니다. 실상사에서 하고자 하는 불교관을 다시 한 번 정리해보면, ‘인간은 죄 많은 업보중생이 아니고 본래부처야’라고 하는 것이 실상사의 불교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죄라고 하는 감옥에 갇혀있지 말고 거기서 바로 뛰쳐나와 본래부처로 살아야 돼’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실상사가 모색하는 불교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2) 실상사의 수행론: 동체대비행

실상사가 모색하는 수행론은 무엇일까요? ‘본래붓다’이니까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온전하게 매 순간순간 본래붓다로 삶을 살자고하는 것이 실상사의 불교수행론입니다. 본래붓다로 살면 어떻게 됩니까? 바로 본래붓다의 삶이 이루어집니다. 왜 그렇게 될까요? 행위 하는 대로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본래붓다임을 잘 아는 것이 불교관이라고 이야기한다면, 그 알아낸 내용을 온전하게 삶으로 사는 것이 불교 수행론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접근해야만 불교공부와 불교수행과 일상적 삶이 통일된 공부와 수행이 가능해집니다. 안 그러면 삶과 공부가 일치되지 않고 늘 괴리됩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바람직한 불교수행자의 모습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됩니다. ‘저런 내용으로 저런 삶을 사는 걸로 봐서 저 사람이야말로 정말 바람직한 불교 수행자이겠다’하는 사람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내가 살고 있는 21세기 현재라고 하는 역사 현장에서 반야바라밀행자로 삶을 온전하게 잘 사는 사람, 본래부처로 삶을 온전하게 잘 사는 사람 또는 동체대비행자로 삶을 온전하게 잘 사는 사람, 이런 불교인 이런 불교 수행자가 있다면 어떤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바람직한 불교관과 수행론으로 바람직하게 잘 살아가는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하는 물음에 답을 찾으려고 하면 주로 옛날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뒤적거려 보곤 합니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직접 대면하거나 가서 직접 만나 물어볼 수 있는 살아있는 사람은 잘 떠올리지 않습니다.

대부분 어록에 어떤 내용이 있어. 또는 설화에 어떤 내용이 있어. 주로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인간 대 인간으로 현실에서 직접 만날 수 있는 사람, 직접 물어보기도 하고 따져보기도 할 수 있는 살아있는 반야바라밀행자, 바람직한 붓다행자 또는 바람직한 대승보살을 찾지 않습니다.

 

지금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적당한 인물이 있다면 어떤 사람일까? 혹시 떠오르는 분 계세요? 이 사람이야말로 진짜 부처님 같은 사람이잖아. 부처님처럼 살고 있잖아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있으세요? 저도 잘은 모릅니다. 그런데 최근에 누가 보내줘서 [달라이라마의 정치철학]이라는 책을 절반 정도 봤습니다. 그 책을 보니까 앞서했던 물음에 현재 살아있는 인물로 누군가를 꼽는다면 달라이라마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은 달라이라마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책을 보면서 그분이야말로 지금 살아있는 반야바라밀행자라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그분의 삶도 부처님이 그러셨듯이 비밀이 없습니다. 난 비밀이 있는 걸 별로 안 좋아합니다. 나한테도 비밀이 많이 있긴 한데, 그것은 비밀이 없게 살 수 있는 실력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비밀이 없을 수 있으면 그것이 가장 좋다고 봅니다. 그런데 달라이라마는 20살 무렵에 망명을 갑니다. 그러니까 비밀리에 무언가를 할 수도 없습니다. 내가 볼 때에 비밀이 없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상당히 중요하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삶이 참 눈물겨웠습니다. 달라이라마가 처해 있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바람직한 불교수행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정말 눈물겨운 일이었습니다. 너무나 비장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정말로 목숨을 걸고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슬프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습니다.

티벳은 지금 중국으로부터 어마어마한 탄압과 억압을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 과정에서 동족들이 무참하게 짓밟히고 죽임을 당하기도 하는데, 그 상황 속에서도 시종일관 견지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모든 고통을 견디는 한마디가 자비심이라는 말로 요약되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폭력.무참하게 짓밟히고 죽임을 당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자비심으로 이 상황을 바라보고 비폭력적으로 이 상황을 마주합니다. 그 입장을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경론자들이 그것을 용납하겠습니까? 내부적으로 어마어마한 저항이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 뜻에 맞게 모든 상황을 자비심과 자애심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봅니다. 우리가 늘 사용하는 언어로 표현하면 동체대비심으로, 대자대비심으로 그리고 비폭력적으로. 그 관점과 입장을 일관되게 견지하고 일생을 산다고 하는 것은 참 으로 놀라운 일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참 눈물겨운 일이기도 했습니다.

여러 가지로 봤을 때 부처님의 뜻에 맞는 불교관과 실천론을 삶으로 사는 수행자는 이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분이야말로 반야바라밀행자구나, 본래부처행자구나, 동체대비행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티벳불교의 기본 철학을 중관사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중관, 혹은 공사상. 그런 내용과 연결시켜서 이야기해 보면 이런 분이야말로 진짜 중관행자구나 하는 표현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불교 공부하고 수행하면 멋있어져’, ‘삶이 좋아져’ 등등 공부와 수행 효과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강조에 부응할 수 있고 그 강조에 걸맞을 수 있는 실제 인물이 어디에 있는가? 있다면 누구인가? 어떤 사람인가? 이런 물음을 묻고 생각을 해보면 달라이라마야말로 그런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래전부터 절이 만들어지고 절에 모여서 공부도 하고 수행도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미혹의 문명을 넘어 깨달음의 문명으로’라고 하는 큰 길을 열기 위해 만일결사를 하고 있습니다. 만일결사는 왜 하는 것일까요?

답답하니까 하는 것입니다. 왜 답답하겠어요? 삶이 내가 희망하는 대로 안 돼서 그렇습니다. 괜찮게 살고 싶은데 괜찮은 삶이 안 돼. 멋있게 살고 싶은데 멋있는 삶이 안 돼. 결과적으로는 삶을 좀 괜찮게 살아보자. 괜찮은 삶을 살아보자. 이런 바람에 답이 되도록 해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좀 더 인간답게 좀 더 멋있게 좀 더 평안하게 좀 더 너그럽게 좀 더 포용적으로 관용적으로 좀 더 괜찮은 인간으로 살아보고 싶은데 그것이 잘 안 되고 답답하니까 길을 찾게 된 거죠. 우리가 불교언어 종교언어로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어마어마하게 대단한 것처럼 생각하게 되곤 합니다. 그러나 실제 삶으로 내려와서 이 종교언어가 삶의 어떤 내용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가 하고 정리해 보면 스스로 괜찮은 인간이 되기 위한 노력에 다름 아닙니다.

우리는 나름대로 죽어라고 노력해서 살고 있고 누군가로부터는 ‘야, 너 성공했다’ 이런 이야기를 듣기도 합니다. 그런 경우라 하더라도 곰곰이 되돌아보면서 인간적으로, 인격적으로 과연 괜찮았는가, 문제는 없었는가 생각해보면 미안하고 부끄러운 경우가 너무 많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너 참 잘 한다’. ‘멋있다’고 하지만 스스로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는 너무나 비인간적인 경우도 있었을 것이고 당당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을 것이고 음모적인 경우도 있었을 것이고 온갖 것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좀 멋있게 살고 싶은데 괜찮게 살고 싶은데. 결국은 이 이야기를 멋있는 언어로 꾸민 것이 종교언어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일상적 언어로 풀어보면, ‘도대체 인생이 뭐야?’ ‘어떻게 해야 돼?’ 이런 물음들인 것입니다. 이런 물음들에 대해서 종교적 언어로, 대단한 언어로 답이 제시되고 있어 어렵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내용을 현실로 가지고 와서 연결시켜보면 바로 앞서 말한 그런 물음에 대한 답 찾기에 다름 아닙니다.

정리해 보겠습니다. 실상사의 불교관은 인간은 업보중생이 아니고 본래부처라는 것을 잘 아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실상사의 수행론은 본래붓다이므로 평소 본래붓다행 혹은 동체대비행으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타는 집 속 같은 상황에서 이런 내용을 바탕으로 보리심의 갑옷으로, 반야바라밀의 갑옷으로, 본래붓다의 갑옷으로 무장을 하고 살아가면 됩니다. 그러면 본래붓다의 갑옷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반야바라밀의 갑옷, 본래부처의 갑옷은 무엇일까요? ‘붓다로 살자’ 발원문이 바로 우리의 갑옷입니다. 그것으로 잘 무장을 하고 일상을 살면 그 사람을 본래붓다 행자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붓다로 살자 발원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나옹스님의 발원문도 본래붓다행의 갑옷, 반야바라밀행의 갑옷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옹스님의 발원문은 오늘 설명했던 것과 연결시켜보면, 문수보살처럼 지혜롭고 자비롭게 보현보살처럼 지혜롭고 자비롭게 지장보살처럼 지혜롭고 자유롭게 관세음보살처럼 지혜롭고 자유롭게 산다. 이게 불교다. 나옹선사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이 바탕 위에서 참선도 하고 기도도 하고 경전도 보고 이런 일도 하고 저런 활동도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것들을 다 뭉뚱그린 이야기가 ‘동체대비’, ‘대비원력’과 같은 표현들입니다.

우리가 이것저것 틀을 잘 만들고 적절한 내용들을 잘 연결시켜서 만든 것이 붓다로 살자 발원문입니다. 그러니까 붓다로 살자 발원문 하나를 가지고 이 내용에 맞춰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기만 하면 우리가 원하는 괜찮은 삶이 가능해집니다.

멋있는 삶이 살고 싶은가요? 멋있게 하십시요. 멋있게 됩니다. 지혜로운 삶을 살고 싶은가요? 지혜롭게 하십시요. 지혜로운 삶이 이루어집니다.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우리 모두가 함께 좋은 삶이 가능한가? 그렇게 하기만 하면 그것도 충분히 가능합니다.그리고 붓다로 살자의 갑옷, 반야바라밀의 갑옷, 동체대비의 갑옷, 대비원력의 갑옷을 입고 사는 사람을 역사 속에서, 우리 현실 속에서 찾는다면 누굴까? 내가 지금까지 파악한 내용으로는 달라이라마 존자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4. 천일붓다행자

이런 취지와 내용으로 우리가 만일결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 길을 열기 위해서 여기에 있는 스님들을 포함하여 두루두루 다 같이 애썼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마치 초발심행자처럼 그 길을 열기 위해서 애쓴 사람들을 실상사에서는 천일붓다행자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만일결사 중에 오늘의 1박 2일 프로그램도 그분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운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관점과 내용으로 삶을 살아가는 흐름이 우리 사회에서 큰 흐름으로 전개될 수 있도록 우리가 발심하고 원을 세워서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이 흐름이 우리 사회의 큰 흐름이 된다고 한다면 어쩌면 인류가 역사 속에서 열고자 했던 가장 위대한 흐름으로 평가되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저는 합니다.특히 요즘 고령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래서 인생 후반전 또는 인생 이모작과 같은 말을 많이 듣게 됩니다. 인생 후반전을 붓다행자로 사는 것을 자기 길로 삼고 살아간다면 어쩌면 인간이 선택하고 하고 인간이 만들어갈 수 있는 최고의 길이 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붓다행자의 걸음이 우리 시대, 우리 사회의 큰 흐름이 된다면 한국 사회도, 21세기도 희망찬 사회, 희망찬 21세기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일결사를 함께하는 도반들이 더 크게 발심도 하고 더 크게 원력도 세웠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제 이야기를 정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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