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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거법문[2024년 5월] 중도의 팔정도 생활화


2024년 하안거결제법회


중도의 팔정도 생활화

-오직 중도의 지혜로 알 뿐 다른 길 있지 않네-

 

안녕하세요? 우리가 또다시 하안거에 들어가는 날을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요즘 제가 가끔 투정처럼, 농담, 혹은 진담처럼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법문하는 것이 힘들다는 투정입니다. 오늘도 역시 마찬가지 마음입니다.


이번에도 하안거결제를 맞아서 무슨 이야기를 할까 이런저런 궁리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동안 제가 어떤 입장에서 불교를 해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늘 해왔던 말이기도 하고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다시 한 번 상기하는 차원에서, 또 같이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불교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고 또 광범위하게 다양한 곳에서 불교가 전해져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 불교가 맞는지, 저 불교가 맞는지 종잡을 수 없는 상황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불교’라는 이름으로 무엇을 한다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핵심적인 내용은 있어야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시대의 불교든 저 시대의 불교든 또는 이 지역의 불교든 저 지역의 불교든, 그 이름이 초기불교, 대승불교, 선불교, 교학불교 그 무엇이든 ‘기본적으로 이런 내용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가 다 하나의 불교라고 이야기할 수 있어’하는 내용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불교를 연구하는 많은 분들을 통해 압축되어진 여래의 진실한 뜻에 부합되도록 불교임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개념이 ‘중도‧연기’입니다. 초기불교든 대승불교든 선불교든 교학불교든 또는 이 시대 불교든 저 시대 불교든 이 지역 불교든 저 지역 불교든 그 내용이 중도‧연기의 내용에 기반하고 있다면 그것은 모두 여래가 뜻한 하나의 불교라고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합니다. 제 경험으로 봐도 연구하는 분들이 핵심을 잘 짚어서 정리해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해온 것을 상기하는 차원에서 단순화시켜서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제가 절집에 와서 60년 가까운 세월동안 이런 형태, 저런 형태로 불교를 보고 듣고 배우고 익히면서 살아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가 받은 느낌은, 우리가 하는 불교가 두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에서 다뤄질 수 있는 내용이 아니고 저 하늘 높이 구름 위에 둥둥 떠다니는 내용으로 읽혔습니다. 대부분이 그랬습니다. 불교는 내용 자체가 대단히 많습니다. 멋있는 이야기, 놀라운 표현들도 넘쳐납니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내 손으로 직접 만져볼 수 있고 또는 내 수준의 상식으로 충분히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다룰 수 있는 불교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는 저 자신을 위해서, 다음으로는 함께 하는 도반들을 위해서 불교를 구름 위에 둥둥 떠다니게 놔두지 말고 내가 두 발을 딛고 있는 현장으로 갖고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직접 손으로 만지면서 또 우리가 갖고 있는 상식수준에서 조금만 노력하면 ‘아, 그런 것이구나’하고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직접 ‘해보니까 그거 틀림없네.’ ‘참 좋네.’ 이렇게 공감할 수 있는 불교가 되어야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으로 제 나름대로 여기까지 온 셈입니다.그러다 보니까 체계 있게 공부를 하지는 못했지만 이런 저런 이야기판이 있으면 가서 귀동냥을 합니다. 훌륭한 분들이 모인 자리도 인연이 되면 가서 귀동냥하고 또 나보다 후배들이 모여서 이야기하더라도 가서 귀동냥했습니다. 어디든지 기회만 주어지면 전 가서 귀동냥을 합니다. 그렇게 한 것이 저에겐 대단히 유익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실력은 없지만 한글은 읽을 수 있기 때문에 한글로 된 책들을 뒤적거려보기도 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제 눈에 번쩍번쩍 뜨인 것들이 책에서 더러 나타나기도 하고 귀동냥하는 과정에서 포착되기도 했습니다. 그중에서 소위 초기불교라고 이야기하는 니까야에서 번쩍 눈에 띄었던 것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에 오늘은 일단 한두 가지만 말씀드려보겠습니다.

하나는 ‘부처님이 왜 거룩한 것일까?’ 우리는 부처님이 거룩하다고 그러는데 왜 거룩하다고 할까? 왜 그럴까요? 이 내용도 부처님이 제자들하고 직접 대화하는 형태로 경전에서 다뤄지고 있습니다. 경전에 내용을 보면, 사람들이 이야기하길 ‘부처님은 복덕이 원만 구족하기 때문에 거룩해’ 이렇게 말합니다. 또는 ‘크게 깨달았기 때문에 거룩해’, ‘신통력이 출중하기 때문에 거룩해’ 또는 전생을 보고 ‘신비한 삼매의 경지에 들어가기 때문에 거룩한 분이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모두 아니라고 합니다. ‘그것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내가 거룩한 사람인 것이 아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거룩한가? 혹시 잡히는 것이 있습니까? 도대체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거룩한 것일까?’ 당신이 하시는 말씀을 보면, ‘팔정도를 생활화하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팔정도를 생활화하기 때문에 거룩하다는 말이 눈에 번쩍 띄었습니다. 바로 이어서 ‘내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의식이 충분히 타당성이 있구나, 설득력이 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또 한 가지는 마을사람들이 부처님한테 와서 묻습니다. ‘우리 동네에는 아주 대단한 깨달은 도인들이 참 많이 왔다 갔다 합니다. 유명한 사람도 있고 위력이 대단한 사람도 있고 미친 사람 바보천치 같은 이들도 옵니다. 하여튼 별별 사람들이 다 다녀가는데 모두가 자기가 진짜 도인이라 하고 자기가 최고라고 합니다. 내가 최고야, 내가 진짜야. 다들 그렇게 주장을 하는데 도저히 누가 진짜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누가 진짜입니까?’부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런 것 저런 것 다 구애받지 말고 주의 깊게 잘 살펴봐. 그가 누구이든 팔정도를 생활화하고 있다면 그 사람이 진짜야’ 라고 이야기합니다. 전 불교인이라면 이 부분을 주목해야 된다고 확신합니다. ‘팔정도의 생활화’ 불교수행의 기본이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온갖 수행을 다 할 수 있습니다. 간화선도 염불선도 초기 불교도 대승불교도 선불교도 교학불교도 또는 온갖 명상 또는 위빠사나등 온갖 수행들을 다양하게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불교수행이라고 할려면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팔정도의 생활화가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불교 전체를 압축하면 ‘중도‧연기’라는 말로 표현되어지고, 중도‧연기의 사유방식을 생활화할 수 있도록 구체화한 것을 우리는 ‘중도의 팔정도’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팔정도의 사유방식이 기본이 된 사람이 진짜 도인이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가 불교도라고 한다고 마땅히 그러해야 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는 최근에 제가 어떤 인연으로 인해 금강경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금강경은 워낙 많이 접하는 경전이기 때문에 제가 따로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대강의 내용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금강경 이야기 하는 것을 기회로 삼아 보니까 꼼꼼하게 살펴보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눈에 번쩍 뜨인 것이 금강경의 ‘법회 인유분’이라고 하는 첫 장면입니다.

잘 알고 있듯이 금강경 첫 장은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법회가 열린 이유)’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대승 경전들은 첫 장면으로 평범한 부처님의 일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대승경전들이 첫 머리에 부처님의 일상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유가 뭘까? 그전에는 ‘부처님이 그렇게 살았으니까 그렇게 했겠지’ 하는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꼼꼼하게 천착을 하면서 대부분의 대승경전들이 부처님의 일상을 첫머리에 소개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혹시 모르시는 분이 있으실 수 있으니까 금강경 첫머리 내용을 잠깐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부처님은 밥을 먹어야 될 때가 되면 밥을 얻으러 갈 준비를 합니다. 가사 옷을 챙겨 입고 발우를 챙겨 들고 밥을 얻기 위해 마을로 내려갑니다. 그리곤 집집마다 찾아 가서 밥을 얻습니다. 밥을 얻은 후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서 밥을 먹고 발우를 정돈하고 준비된 자리에 가서 앉으셨습니다.” 이것이 금강경 첫 부분 내용입니다.대승경전들의 첫 머리에는 표현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거의 공통적으로 이러한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왜 그럴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앞서 말씀드렸던 내용, ‘부처님이 거룩한 이유는 바로 팔정도를 생활하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것과 연결되었다고 보았습니다. ‘팔정도가 생활화되어진 일상의 삶의 내용은 어떤 것인가?’하는 생각을 더 진전시켜서 천착해보니, 금강경의 첫 장면과 연결되었던 것입니다. 때가 되니까 옷을 입고 발우를 챙겨들고 마을로 걸어가서 칠가식(七家食), 일곱 집을 차례차례 가서 밥을 얻습니다. 그리고 제자리로 돌아와서 밥을 먹고 발우를 정돈하고 준비된 자리에 앉습니다. 이것은 인간이면 누구나가 살고 있는 너무나 평범한 일생 의식주 생활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불교교리와 연결시켜서 보면 ‘아, 팔정도가 생활화되어진 한 장면이 바로 법회인유분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자연스럽게, 고인들께서 오랜 기간 동안 온갖 곳에서 펼쳐졌던 다양한 불교들이 부처님이 뜻한 불교를 잘 계승하고 유지해서 미래세대까지 바르게 전해질 수 있도록 하기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이 있었는가를 새삼스럽게 또는 뼈저리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불교전통을 잘 계승하는 곳으로 미얀마, 스리랑카, 태국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앞서 이야기한 맥락에서 볼 때, 오히려 여래의 진실한 뜻에 부합하도록 가르침을 잘 계승하고 있는 불교가 대승불교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부처님 당대에는 충분하게 설명하지 못한 부분까지도 잘 담아 풍부하게 살려낸 것이 대승불교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동안 ‘대승 비불설’ 등 이런저런 혼란들이 있어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금강경을 보면서 그런 부분들이 제 나름대로는 정리가 되었습니다. 부처님이 뜻한 불교의 세계관과 정신 또는 이상과 가치를 잘 계승한 내용이 대승불교 전통에 오히려 더 깊고 풍부하게 담겨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러한 정신을 제대로 계승한 불교가 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사실 걱정이 많습니다. 너무 부족하기도 하고 또는 혼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현실이 이러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여래의 진실한 뜻, 여래가 뜻한 불교가 무엇인지를 더 치열하게 묻고 탁마해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 사상과 정신이 구체적인 삶이 되도록 만들기 위한 노력들을 훨씬 더 정성을 들여서 투철하게 해야 되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그런 차원에서 한국불교 수행론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도불교 수행론이나 중국불교 수행론 말고 한국불교 수행론. 다시 말하면 한반도 우리 역사에서 만들어진, 우리 역사 속에서 태어난 인물들에 의해서 저술되어지기도 하고 설파되어지기도 한 불교수행론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국불교가 인도에서 출발하여 중국을 거쳐 들어왔기 때문에 아무리 한국불교 수행론이라 하더라도 인도 이야기와 중국 이야기를 안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중심은 한국불교, 한반도 우리 역사에서 배출된 인물들에 의해서 다루어진 내용을 가지고 체계 있는 수행론이 완성되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누가 그 일을 해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움직임이 안 보이니까 나라도 해보자는 생각으로 굳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내용으로 할 것인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스님으로는 원효스님을 꼽을 수 있습니다. 원효스님이 많은 저술을 남겼지만 그중에서도 더 특별하게 평가되는 것이 기신론소와 같은 내용입니다. 기신론소에서 파악되는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귀일심원(歸一心源) 요익유정(饒益有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심의 근원에 돌아가서 뭇생명들을 이익케 하고 안락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 내용을 우리가 하는 불교언어로 연결시키면 ‘일심동체’, ‘대비원력’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더 대중화된 언어로 표현하면 ‘우리 모두는 한 몸, 한 마음, 한 생명이기 때문에 두루두루 잘 어울려서 함께 잘 살아가는 길을 가야 돼’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인물로는 의상스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의상스님의 저술은 많지 않습니다만 대표적인 것으로 법성게가 있습니다. 앞의 내용에 법성게를 연결시키는 것으로 오늘 이야기를 정리할까 싶습니다.법성게는 다 아시죠? 법성원융무이상 제법부동본래적(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무명무상절일체 증지소지비여경(無名無相絶一切 證知所知非餘境) 입니다. 구절구절을 다 설명하려면 시간이 부족하니까 마지막 구절만 살펴보겠습니다. 증지소지비여경(證知所知非餘境). ‘이 말에 담겨 있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 하고 따져보겠습니다. 그동안 보고 듣고 배운 내용으로 보면 불교는 저 구름 위에 둥둥 떠다니는 불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그동안 이 문장에 대해 해석한 내용들을 보고 듣고 배운 바를 설명해 보겠습니다. ‘증득’이라고 하는 것은 주로 ‘궁극적인 깨달음의 상태’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증지소지비여경(證知所知非餘境)을 보통 ‘궁극적인 깨달음의 지혜로만 알 수 있는 것이지 다른 길은 없어’ 이렇게 설명합니다. 법성(法性)이 왜 원용무애(圓融無礙)한지 제법(諸法)이 왜 본래적(本來寂)인지. 이 내용은 ‘나의 참모습이 어떻게 생겼는가?’ 또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에 대한 답입니다. 이 답을 우리가 사용하는 일반적인 언어로 풀어 놓은 것이 ‘붓다로 살자 발원문’인 셈입니다. ‘자기 자신의 참모습을 잘 알고 살아야 그 삶이 괜찮아진다’고 하는 것이 부처님이 우리한테 가르쳐주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그것을 ‘소 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살아야 된다’ 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 탄 줄 알고 살면 그 삶이 괜찮아지고 소 타고 있으면서도 소 탄 줄을 모르고 살면 결국은 소를 찾으러 다니느라고 아무것도 못한다. 헤매고 다닐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동안은 ‘내용을 상식적으로 해석하고 설명하고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듯이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야만 제대로 알 수 있는 것이다.’라고 강조해왔습니다. 그럼 확철대오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전통적으로는 선방에서 화두참선을 해서 정중일여(靜中一如) 동중일여(動中一如) 몽중일여(夢中一如) 오매일여(寤寐一如)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해야만 그것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거룩하고 심오한 ‘깨달음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지금 여기의 삶은 돌아보지 말고 온통 깨달음의 목적지를 향해서 줄기차게 달려가야 돼.’ 라는 결론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필연적으로 ‘지금 여기의 일상적 삶, 매 순간순간의 일상적 삶을 온전하게 살기위한 노력은 건너뛰거나 소홀히 하거나 또는 외면하게 되거나 건성 건성하게 됩니다. 왜 그럴까? 저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면 불교공부와 수행이 실제의 삶과 잘 연결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소 타고 있으면서도 소 타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체 소를 찾아 동분서주하는 불교를 하게 되는 것이 오늘날 불교계의 현실입니다. 어찌됐든 이제는 소 타고 찾는 바보 같은 헛된 불교를 끝내야 된다는 문제의식으로 그 문제들을 현실로 가지고 왔습니다. 현실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는 보통의 상식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할 것 없이 바로 이해, 실현, 경험되는 불교가 되도록 해석하고 설명하려고 고민해왔습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궁극적인 깨달음의 지혜로만 알 수 있는 것이지, 다른 길은 없다. 그러므로 궁극적인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 죽기살기로 전력투구해야 된다.’ 라고 강조해 왔는데 저는 그렇게 하는 한 매 순간순간의 삶과 불교수행을 연결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봤습니다. 따라서 순간순간의 삶과 불교가 연결되도록 하려면 ‘종지’를 다르게 봐야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쯤에서 제 방식으로 풀어보겠습니다.저는 ‘증지소지비여경(證知所知非餘境)’을 ‘오직 중도의 지혜로 알 뿐 다른 길 있지 않네’로 풀었습니다. 저는 ‘중도’를 ‘있는 그대로의 길’ 또는 현장의 있는 사실에 직접 대면하는 태도와 방식을 뜻한다고 봅니다. 그렇게 보고 있기 때문에 ‘증지’가 지금 여기 현장의 사실에 직면해서 누구나 바로 이해하고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면 나만 알고 너는 모르는 지혜, 부처님만 알고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지혜, 도인만 알고 보통사람은 알 수 없는 지혜가 아니고 도인이 알듯이 누구나 알 수 있는, 부처님이 알듯이 누구나 알 수 있는, 내가 알듯이 너도 알 수 있는 지혜의 불교가 된다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증지’, 증득할 증(證)자 지혜 지(智)를 보통은 ‘궁극적인 깨달음의 지혜’라고 해석하는데 저는 ‘중도의 지혜’라는 말로 풀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지혜, 혹은 깨달음을 매 순간순간의 삶으로 연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쉽게 풀면 경험 가능한 지혜, 검증 가능한 지혜,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지혜가 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풀면 실제 생활과 또 매 순간순간의 실제 삶과 연결해서 불교를 생활화하는데 더 바람직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천착해왔던 것 중에 금강경 이야기를 하면서 좀 더 진전되고 더 구체화되어진 내용이 있어서 안거하는 날인 오늘 공유하면 좋겠다 싶어서 설명을 드려보았습니다. 그런데 제 느낌으로는 오늘의 설명이 잘 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나름대로는 잘 하려고 했지만 아쉽습니다. 부처님의 일생 삶을 봐도 그렇고 초기 선종어록 내용을 봐도 그렇고 제가 경험적으로 봐도 그렇고 불교수행이라는 관점에서 보아도 함께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허심탄회한 대화를 잘 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소재로 해서 우리가 많은 대화를 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런 내용을 소재로 자기생활과 연결시켜서 이렇게도 이야기해보고 저렇게도 이야기해보아야 합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우리가 바람직한 내용들을 도출할 수 있기도 하고 드러나지 않았던 것들이 바람직하게 드러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안목도 달라지고 또 생활을 어떻게 해야 될 것인지에 대한 지혜로운 접근 방식도 생기게 되어 함께 성장하는 안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백장암도 그런 취지를 가지고 해나가고 계시니까 그런 것들을 조금 더 발전시키고 심화시키고 활발하게 전개될 수 있도록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 실상사에서도 역시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씀을 드려봤습니다.끝으로는 부처님의 일상도, 교리적인 말로 표현하면, 팔정도가 생활화되어진 삶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탁발하고 공양하고 발우 거두고 자리 잡고 앉는 것, 이것이 부처님이 깨달은 이후, 35살 때부터 80살까지의 기본적인 일상생활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팔정도가 생활화되어진 삶의 내용과 모습이 잘 드러난 것이 금강경의 ‘법회인유분’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우리가 정말로 교리와 연결시켜서 많은 생각을 해보고 대화를 해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 탁발하는 동안은 침묵을 합니다. 이것을 팔정도에 적용 시키면 정어(正語)에 해당이 됩니다. 말을 해야 될 곳에서는 말을 해야 되겠지만 말을 하지 않아야 할 곳에서는 침묵하는 것이 정어입니다. 탁발하는 동안은 침묵하는 것이 하나의 규칙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탁발할 때 출발해서 돌아올 때까지 침묵을 했습니다. 옷 챙겨 입고 발우 들고 마을로 걸어가 밥을 얻고 돌아와서 밥 먹고 발우 정리하고 제자리에 갖다 놓고 준비된 자리에 앉는 이것은 무엇입니까? 탁발규칙에 따라 팔정도로 연결시키면 옷 입을 것, 발우 챙기는 것, 걸어가는 것, 밥 얻는 것, 밥 먹는 것, 정리하는 것, 자리에 앉는 것들이 모두 팔정도의 생활화에 해당됩니다. 하나하나를 사실적으로 짚어보면 늘 정신 차린 상태, 침착한 상태가 유지되고 있습니다. 깨어 있는 상태, 침착한 상태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정념(正念) 정정(正定)에 해당됩니다. 직면한 그 순간순간을 잘 보고 잘 사유하면서 일상이 이루어지면 그것은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에 해당됩니다. 규칙 따라 침묵하고 옷 입고 걸어가고 밥 얻는 등은 정어, 정업, 정명에 해당합니다.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고 시종일관 그것이 잘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는 것은 정정진(正精進)에 해당이 되죠. 짚어본 바와 같이 위대한 붓다의 삶은 정확하게 팔정도의 생활화로 나타나고 있습니다.우리가 붓다의 뜻에 따라 바로 이해, 실현, 경험되도록 불교수행을 정리해야 여래가 뜻한 불교수행의 생활화가 가능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같은 내용을 금강경 논리로 보면 무주상(無住相)의 사유방식이 생활화라고 봐도 된다고 봅니다. 금강경에서 강조하는 것이 ‘무주상’이지 않습니까. 무주상의 사유 방식이 온전하게 생활화되어진 한 모습이 바로 부처님의 평범한 일상인 ‘법회인유분’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봅니다.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의 실제 삶, 또는 부처님이 가신 길, 그리고 우리들의 실제 삶, 경전의 내용을 연결시켜서 천착도 하고 대화와 토론을 많이 해 보면 좋겠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하고 공감하고 안목이 열리는 안거가 된다면 모두에게 유익한 안가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끝으로 늘 하는 이야기입니다만 여름안거에 함께하는 우리 대중들 모두가 안거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서로서로 마음을 내고 뜻을 모아 화목하게 한철을 잘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살아주기를 부탁드리면서 오늘 이야기를 정리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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