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무시한 더위가 가고 나니까 그래도 좀 살만하죠? 큰 판으로 보나 작은 판으로 보나 걱정거리는 여전하지만 서늘한 가을로 넘어오니까 제법 좋은 것 같습니다.
늘 그 자리에 찔레꽃이 핀다
어제 ‘늘 그 자리에 찔레꽃이 핀다’라는 제목으로 마을주민들이 실상사 약사여래 부처님에 대한 마당극을 했습니다. 어떠셨습니까? 전 눈물이 좀 났습니다. 눈물이 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중에서 저와 관계된 내용 한 가지만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이런저런 시시비비들이 무수하게 얽히면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내용과 결과가 우리가 뜻한 바에 일치되도록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상당히 감동적이었습니다. 오늘 합송한 ‘21세기 약사경’ 내용을 보면 ‘절집도 빛나고 마을도 빛나라’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가 실상사를 중심으로 해서 많은 불사를 하고 있습니다. 많은 불사 중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불사가 마을도 빛나고 절집도 빛나는 불사이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어제 마당극을 보며 우리가 해온 일이 마을도 빛나고 절도 빛나는 쪽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마당극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감격스럽고 눈물이 났던 이유는, ‘아, 우리가 꾸고 있는 꿈이 허황된 꿈이 아니구나. 오늘 내 삶이 되고 우리의 삶이 되고 우리 마을이 되고 우리의 절이 되는 그런 꿈이구나. 그렇게 꿈꿔왔던 것이 헛된 꿈이 아니고 현실로 실현되어지는 내용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분에 대한 경험적 자기 확신을 갖는 계기가 되어서 저에게는 매우 의미가 있었습니다.
내가 본 부처
그리고 최근에 실상사에서는 ‘백일탁마광장’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불교관과 수행론, 실천론을 잘 정리해보자는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 공부의 일환으로 나한테도 주제 하나를 발표했으면 좋겠다는 주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계기로 제가 늘 화두처럼 붙잡고 살아온 부처님의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이야기해왔던 것이긴 하지만 지금까지는 이런저런 눈치를 보면서 명백하게 또는 단호하고 확실하게 이야기하지 못한 부분이 많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기존의 불교 관점과 다른 부분들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내가 생각해 왔던 부처님은 이런 사람이야’하는 내용을 확실하게 이야기 해봤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공부 자리에서 발표를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짧아서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고 큰 맥락만 공유했습니다. 그때는 주로 실상사 사부대중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이야기되어지고 있는 우리 식구들 위주로 함께 했고, 신도님들과는 같이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신도님들과 함께하는 법회 자리이므로 그 내용을 공유해볼까 합니다. 이미 들은 분들은 복습한다는 차원에서 들으시면 좋을 것 같고, 우리 신도님들은 ‘실상사 식구들이 그렇게 하고 있구나’하고 내용을 공유하고 함께할 수 있도록 하는 차원에서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그동안 부처님의 일생을 다루면서 포착하지 못했던 부분을 이번에 하나 포착을 했습니다. 경전 기록들을 참고해보면 부처님이 깨닫기 전에는 ‘부처님도 사람이구나. 나와 같은 사람이구나. 나와 같은 사람인데 대단히 똑똑한 사람이구나. 대단히 탁월한 사람이구나. 대단히 천재적인 사람이구나’하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런데 경전을 통해서 볼 때, 깨달음 이후의 부처님은 나와 같은 사람이 아니고 특별한 사람, 신적 존재로 묘사됩니다. 사람이라기보다 신적인 존재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내용이 많습니다.우리가 하는 불교의 혼란스러움이 깨달음 이후의 부처님에 대한 이야기에서 비롯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용을 주의 기우려 살펴보면 깨달음 이전의 부처님이 천재적인 한 ’인간’의 모습이었듯이 깨달음 이후도 대단히 훌륭한 ’인간’이었습니다. 따라서 부처님을 인간 붓다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부처님 삶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그동안 정확하게 포착하지 못했던 것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포착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됐습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번에 정리한 것을 몇 차례 나눠서 이야기를 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큰 윤곽만 공유하고 나의 불교 수행론에 대한 결론을 말씀을 드리는 것으로 대신할까 합니다. 늘 말씀드렸듯이 ‘나의 진리, 나의 가르침은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로 이해, 실현, 경험, 증명된다는 사유 방식의 관점에서 붓다의 삶을 정리한다.’
‘바로 이해된다.’ 부처님이 보여주는 삶의 내용도 그렇고 부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내용도 그렇듯이 불교는 그렇게 복잡하고 어렵지 않습니다. 적어도 말을 알아듣는 사람이라면 바로 이해할 수 있고 실현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이 말 그대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부처님 삶에 대한 해석과 설명을 해보자는 이야기입니다.그래서 이번에 정리하면서는 제목 자체를 우리의 인간상, 우리가 본받고 배우고 따라가야 할 부처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참사람 인간, 붓다의 삶’이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여기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라는 말에 주목했으면 좋겠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라는 한 인간 붓다의 삶을 종합적으로 잘 녹여내어서 압축적으로 표현한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지은 제목입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참사람, 인간 붓다의 삶, 또는 붓다의 일생이라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그런 방향과 기조에 맞추어서 부처님 일생을 몇 가지로 정리 해봤습니다. 1. 태어나서 성장 과정에서 만들어진 문제의식들. 오늘은 큰 윤곽만 공유하겠습니다. 이후에 몇 차례에 걸쳐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문제의식들’ 몇 가지 중요한 대목만 메모를 했습니다.
2. 출가할 수밖에 없었던 문제의식들. 그 과정에서 싯다르타가 어떤 문제의식들을 갖고 어떻게 답을 찾아가고 있고 어떻게 성장하고 변화해 가고 있는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 부분을 경전 말씀 그대로 바로 이해 될 수 있도록 설명해보고자 합니다.
3. 출가를 결행, 결심할 때의 문제의식들. 세속에서 답을 찾기 위해 이런저런 모색을 하지만 결국은 거기서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고는 이제 어떻게 해야 되나 고민할 때 출가 수행자를 만납니다. 출가 수행자가 싯다르타에게 해준 이야기를 이렇게 썼습니다. “세속에는 그대가 찾는 그 길이 없다. 그 길은 세속을 완전히 버리고 가야 하는 길이다. 국가도, 민족도, 부모도, 형제도, 아내도, 자식도, 명예도, 권력도, 사랑도 모두 버리고 저 건너편으로 나아가야 한다. 오로지 나와 너 그리고 우리 모두의 평화와 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좋은 마음과 자비의 마음을 붙잡고.” 수행자가 해준 이야기를 제가 이렇게 간추려 보았습니다.여기서 우리가 주목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 하나를 꼽으라면 ‘오로지 나와 너 그리고 우리 모두의 평화와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 어떻습니까? 나에게도 괜찮고 너에게도 괜찮고 우리 모두에게도 괜찮은 길, 인생의 답. 그런 길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런 길을 갈 수 있다면 국가와 민족보다 그 길이 더 중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데, 동의가 되시나요? 국가보다 민족보다 부모형제보다 그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에 동의가 되시나요? 나에게도 좋고 너에게도 좋고 우리 모두에게도 좋은 길이라면 충분히 합리적으로 동의가 될 수 있는 내용입니다.
4. 출가 이후의 문제의식들. 세속을 버리고 출가해서 6년 고행했던 과정에 대해서 짚은 것입니다.
5. 고행을 포기한 다음의 문제의식들. 6년 고행을 했는데 답을 못 찾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기 방식의 답 찾기를 하게 됩니다. 출가 이후에는 그 시대, 그 사회에서 제시할 수 있는 내용은 다 시도해본 것입니다. 다 해봤는데 답이 안 나오니까 고행을 포기합니다. 세상에 있는 길은 다 가봤는데 답이 안 나왔던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버리고 떠나는 것을 우리는 ‘고행의 포기’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6. 자기 방식의 답을 찾아가는 문제의식들. 세상에 있는 길은 다 가봤는데 답이 안 되니까 그 다음에 할 수 있는 일은 자기 방식으로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스승이 없는 겁니다. 묻고 배울 데가 없습니다. 묻고 배워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던 것입니다.
7. 지금까지의 내용은 ‘인생이 뭐야?’라고 하는 물음에 대한 답 찾기의 과정이라고 본다면, 이제는 ‘왜 고통스럽고 불행한 거야?’에 대한 답 찾기입니다. 우리 다 고통스럽고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고통과 불행으로부터 벗어나 보겠다고 온갖 것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요즘에는 특히 ‘행복’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태어났어.”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고통과 불행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문제의식들. 이런 형태로 부처님 삶을 정리 해보았습니다.
8. 삼사화합인 촉 이후의 문제의식들. 이 부분은 교리적인 이야기로 연결됩니다. 우리가 불교 기본 교리 공부하다 보면 12연기에 대해 배우게 됩니다. 12연기를 현실 경험 가능하도록 해석하고 할 때, 무명에서부터 시작하면 설명 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12연기를 보면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입(六入)-촉(觸). ‘촉’은 직접 경험하는 것입니다. 촉에서부터 이야기가 되어야 바로 이해되고 경험되는 불교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이런 점을 한번 짚어봤습니다.
물론 요즘 초기불교에 대한 관심과 연구들이 많아지면서 무명에 대한 해석이 옛날과는 달라진 부분이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무명’하면 아득히 먼 과거를 이야기했습니다. 전생의 전생, 그 전생의 또 전생, 그 시작이 언젠지 알 수 없는 아득한 태초. 주로 ‘무명’ 개념이 그렇게 사용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초기불교에 관심이 많아지고 또 공부를 많이 하면서 ‘사성제에 대해서 모르는 것을 무명이라고 한다’는 해석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접근하면 바로 이해되고 경험되는 해석과 설명도 가능해집니다. 그때는 ‘무명’이 ‘지금 여기에서 사성제에 대해 무지한 것’이라고 접근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전생으로 갈 필요가 없게 됩니다.전생으로 가게 되면 알 수 없는 이야기가 됩니다. 전생으로 이야기하면, 이렇게 해석하든 저렇게 해석하든 바로 이해되거나 현실적으로 경험 가능하지 않게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그런 부분을 현실 경험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명’을 ‘사성제에 대한 무지’로 해석하거나, 또 12연기에서 ‘촉’에서부터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9. 감각적 느낌에 지배당할 때의 문제의식들. 촉(觸), 수(受)가 감각적인 것을 말합니다. 접촉하는 순간의 느낌. 좋은 느낌, 나쁜 느낌, 기타 느낌들을 말합니다. 우리들의 문제는 거의 감각을 쫓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감각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내 인생을 주체적으로, 내 의도대로 살아가야 되는데 그러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감각에 따라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감각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화 낼 때 어떻습니까? 몇날 며칠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화를 내십니까? 아니면 버럭하고 성질을 내십니까? 화내는 것은 저절로 되죠? 이것이 감각의 지배를 받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래서 계속 정신 차려라, 정신 차려라, 정신 차려라. 깨어 있어라, 깨어 있어라, 깨어 있어라.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각의 노예가 되지 마라. 감각의 지배를 받지 마라. 감각에 굴복하지 마라. 감각의 주인 노릇을 해라. 감각을 네 마음대로 써라.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야 네 삶이 자유로워진다. 그래야 네 삶이 완성도가 높아질 수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문제의식을 이야기 한 부분입니다.
10. 자신의 참모습에 대한 무지가 고(苦)의 근본 원인임을 안 뒤의 문제의식들. 자기 자신의 참모습에 대한 무지를 우리는 무명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고(苦)의 원인이다. 즉 미혹이 고의 원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무지가 고의 원인이다. 너 때문이거나 나 때문이라는 차원이 아닙니다. ‘사성제에 대한 무지’와 ‘자신의 참모습에 대한 무지’는 말은 약간 다르지만 같은 관점에서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무지가 모든 고통과 불행의 원인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무지와 무명 또는 미혹으로부터 깨어나야 된다. 이것을 우리는 깨달음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무지했던 것을 잘 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혹에 빠져 헤매던 것을 지혜롭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모르면서 하던 것을 잘 알고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 수행의 종교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불교라는 종교의 특징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깨달음의 종교, 수행의 종교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정확하게 불교적 입장을 견지한다면 깨달음의 종교라고 표현되어지는 것이 가장 합당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11. 깨달음을 얻은 직후의 문제의식들. 부처님이 깨달은 직후에 무엇을 하셨는지 아십니까?경전에는 깨달음을 음미하는 시간을 가졌다. 또 깨달음의 내용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 내용은 사실로 받아들여도 괜찮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어차피 인생은 관계 속에서 삶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깨달음 이전도 마찬가지고 깨달음 이후도 마찬가지입니다. 너와 나의 관계, 또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 온통 관계 속에서 삶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관계’라는 것은 누구를 상대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깨달음을 이룬 다음에 어떻게 할 것인가?’하고 생각해보니 첫 번째 필요한 것이 누구일까요? 대화가 될 만한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 말은 무슨 의미인가? 깨달은 사람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귀 기울이고 들을 만한 사람, 진지하게 대화했을 때 이해할 만한 사람, 소통과 공감이 이루어질 만한 사람을 찾게 됩니다. 그것이 부처님께서 깨닫고 난 다음에 처음으로 한 일입니다.
여기서는 관계가 중요하다는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대화, 말로 표현하는 것, 또는 말로 주고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다 건너뛰고 부처님을 공부해 왔습니다. 이런 내용은 다 건너뛰고 건성건성 공부해 온 것입니다. 대화의 중요성 같은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런 내용을 깨달음 이후의 문제의식들 이라는 제목으로 정리를 했습니다.
12. 설법을 결심한 이후의 문제의식들. 깨달으신 다음에 설법을 안 하는 쪽으로 생각을 정리해 가다가 어떤 계기에 의해서 설법을 해야겠다고 결심을 하게 됩니다.
13. 깨달음을 실천하는 일상생활의 문제의식들. 우린 깨달음은 지금 여기에서 실제 생활에 쓸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신비하고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삼아승지겁 후, 무지무지한 용맹정진을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또 해서 아득한 먼 훗날 깨달음을 이루어지는 것으로 돼 있습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이라는 것은 지금 여기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내용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깨달음을 찾아가느라고 현재의 삶을 제대로 살 수가 없게 돼버리는 상황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깨달음은 지금 여기 삶이 되어야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으로 살아보니 매우 좋다고 해야 깨달음이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경전을 잘 읽어보면 깨달음이 일상적 삶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보통은 깨달음은 먼 훗날에야 도달할 수 있는 내용으로만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경전 내용, 부처님 생애를 잘 살펴보면 깨달음은 지금 여기에서 생활화되어야 될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깨달음이 생활화되면 그것이 곧 해탈 열반의 삶이다. 또는 무애 대자유의 삶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단적으로 가장 잘 보여준 내용이 금강경 첫 구절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때가 되면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 밥을 얻으러 갑니다. 밥을 얻고 돌아와서 밥 먹고 정리하고 자리 잡고 앉아서 대중들과 법회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금강경 첫 구절에 나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35살에 깨달았습니다. 깨닫고 나서 80세가 될 때까지 매일같이 그와 같은 삶을 살았던 겁니다. 이것이 깨달음이 생활화된 한 장면입니다. 그 모습은 너무나 평범한 우리들의 일상이기도 합니다. 보통의 대중들과 고락을 함께하는 일상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깨달은 자, 완성된 자의 일상적 삶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담겨 있는 의미를 우리가 잘 파악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기에 담겨 있는 의미를 잘 파악하면 ‘아, 부처님이 인간이었구나. 인간인데 대단히 괜찮은 인간이었구나. 충분히 나도 가능한 내용이구나. 나도 부처님과 같은 모습으로 괜찮은 인간으로 살아야겠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14. 깨달음 이후에 보여주는 부처님의 일상이야말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붓다의 면모들이다. 저는 결론적으로 그렇게 정리했습니다. 깨달음 이후의 삶을 조목조목 잘 짚어서 실제 생활과 연결되어질 수 있는 차원에서 정리해보았습니다. 그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이 곧 붓다였다. 그리고 그런 삶이라면 나도 바로 살 수 있는 삶이기도 하고 나도 할 수 있는 삶이고 괜찮은 삶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살아야 되겠다고 마음먹게 된다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시민붓다의 불교수행론
오늘은 대략적인 윤곽만 공유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의 불교수행론’ 또는 ‘시민들의 불교수행론’, 보통 사람들의 불교수행론을 정리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하는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이 내용은 정리된 것을 읽으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시민붓다의 불교수행론.
뭇 생명들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8만 4천 번뇌병에 8만 4천 약 처방한 것을 붓다의 가르침, 불교라고 합니다.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 번뇌병에 대한 약으로 설명된 내용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천 가지, 만 가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병의 숫자만큼 부처님 가르침이 있는 것입니다. 병에 따른 약 처방으로 설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우리가 놓치면 불교를 잘못 해석하거나 잘못 설명하는 오류에 빠질 위험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모든 불교는 병을 치유하기 위한 약 처방이므로 정해진 하나의 불교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역에 따라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중생 문제의 수만큼 천의 얼굴, 천의 몸짓, 천의 말씀으로 나타난 것이 2700여 년의 세계불교다.
우리는 하나의 불교로 귀결시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대단히 의미 있는 내용이긴 하지만 잘못 해석되거나 잘못 쓰일 위험성도 또한 동시에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부분을 우리가 잘 관찰 사유하면서 불교를 해야 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석가모니 붓다로부터 시작되어 천의 얼굴, 만의 얼굴로 나타나고 있는 세계의 모든 불교를 나름 종합적으로 참고하여 지금 여기 오늘의 우리 불교로 만들어낸 것이 바로 ‘붓다로 살자 발원문’이다.
‘붓다로 살자 발원문’은 실상사에서 지금 하고 있는 대표적인 발원문 중 하나입니다. 지금은 인구가 70억이지 않습니까? 응병여약의 논리로 보면 부처님 가르침이 적어도 70억 개는 되어야 합니다. 그동안은 8만 4천 법문이라고 했는데 이것만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70억 명이기 때문에 70억 법문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게다가 또 사람마다 번뇌의 내용이 무수하게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니 70억 법문으로도 안 됩니다. 병에 따라서 처방해야 하니까 어마어마한 양의 법문이 필요합니다.이런 부분은 자칫 잘못하면 대단히 크게 왜곡되어서 심각한 모순과 혼란에 빠질 위험성이 많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우리가 지금 개방성, 다양성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습니까?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불교야말로 병에 따른 처방으로서 불교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다양성도 다 품어 안을 수 있습니다.온갖 다양성을 다 품어 안을 수 있는 내용이 응병여약의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응병여약의 사고방식에 맞춰서 이야기되고 있는 부처님 가르침은 21세기 시대정신으로 요구되어지는 모든 것들을 다 안을 수 있는 사고방식이다. 불교가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나의 불교관과 수행룐
나의 불교관과 수행론.
제 개인적인 입장으로 좁혀서 말하면 ‘붓다로 살자 발원문’ 자체가 나의 불교관이요, 수행론인 것이다.
불교 수행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불교 지식이 많은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용을 잘 간추려서 생활화하냐, 하지 않냐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생활화가 되냐, 안 되냐가 핵심이기 때문에 저는 불교수행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붓다로 살자 발원문’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지금 여기 내 사고가 되게 하고 말이 되게 하고 행동이 되게 하고 생활이 되게 만든다고 하면 그것으로 충분히 우리는 멋진 삶을 살아내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나에게도 좋고 너 에게도 좋고 우리 모두에게도 좋은 정말 괜찮은 삶이 완성되어질 수 있습니다.지식이 많은 것이 능사는 아닙니다. 다만 ‘붓다로 살자 발원문’으로 압축되어 있는 내용을 좀 더 잘 파악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이런 것 저런 것들을 탐구하는 것은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실제 중요한 것은 삶이 되도록 하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붓다 중도로 살다’라는 책 제목도 그런 의미에서 지은 것입니다.
붓다가 그렇게 알고 그렇게 살았듯이 나도 그렇게 알고 그렇게 살려고 애쓰고 있다. 알아야 될 내용이 ‘붓다로 살자 발원문’이고 삶으로 살아야 할 내용도 그 내용이다. 다만 한 가지, 나는 발원문을 기본 바탕으로 하지만 어릴 때부터 배우고 익혀온 화두를 챙기기 위해 시시때때로 노는 입에 염불하듯이 최선을 다해 거듭거듭 노력하고 산다.
‘붓다로 살자 발원문’과 신해행증(信解行證)
초기불교는 불교공부와 수행론의 체계를 기본적으로 사성제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대승불교, 특히 화엄불교로 오게 되면 불교수행과 수행론의 신행체계를 ‘신해행증’ 이 네 가지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것과 연결시켜서 정리를 했습니다.
이쯤에서 ‘붓다로 살자 발원문’을 화엄의 신행체계인 신해행증에 맞추어 정리해 본다. 첫 번째 신(信).
신(信)은 ‘믿을 신’자입니다. 경전에 보면 믿을 신(信)에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대승경전을 보면 압도적으로 많이 나옵니다. 그중에서도 화엄경을 보면 불교가 온통 믿음이라는 말로 설명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때의 ‘믿음’은 무조건적인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용을 잘 파악하고 이해하고 공감하고 수긍이 되면 어떻게 됩니까? 확신이 생깁니다. 믿을 신(信)은 ‘확신’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글자가 똑같다보니,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믿음과 불교에서 강조하는 믿음이 같은 것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잘 검토해보면 분명히 다릅니다. 기독교는 알 수 없으니까 믿어야 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알 수 있으면 굳이 믿음을 강조할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잘 알고 믿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르고 믿는 것은 맹신에 지나지 않는다. 맹신은 대단히 위험하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내용을 잘 이해하고 잘 파악하고 공감했을 때 믿음으로 받아들여야하지, 파악도 안 되고 이해도 안 되고 공감도 안 되는데, 부처님말씀이기 때문에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그렇게 하는 것은 잘못하는 것이고 어리석게 하는 것이라고 문제 삼고 있습니다. 맹신적인 믿음은 절대 안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을 신(信)자에 담겨 있는 내용에 대한 이해와 공감 그리고 수긍을 기본으로 한 확신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신해행증;의 두 번째 글자는 알 해(解)자입니다. 이 단어 때문에 혼돈을 겪고 있습니다. 앞에서 ’믿음‘은 자신의 참모습에 대해서 잘 파악하고 이해하고 믿어야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두 번째 알 해(解)자의 의미는 자신의 참 모습이 본래부처라고 하는데 본래부처가 실제 삶이 되도록 하는 수단과 방법에 대한 내용입니다. 다시 말하면 본래부처의 삶이 생활화 되도록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떤 방식과 수단으로 해야 되는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알아야 된다는 것을 알 해(解)자를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을 신(信)자를 이야기 할 때와 대상이 다른 것입니다.
발원문의 내용이 생활화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심혈을 기울여 발원문을 잘 읽고 깊이 음미하고 실생활에 잘 적용하는 것이 좋은 방법임.
발원문을 잘 읽고 깊이 음미하고 생활에 잘 적용하도록 하는 것, 그것이 소위 신해행증의 수행을 잘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해(解)는 이해하고 알아야 할 내용을 바로 생활화하는데 매우 효과적이고 뛰어난 방법과 수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방법과 수단을 잘 알아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방법과 수단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붓다로 살자 발원문’을 잘 읽고 그 뜻을 거듭 사유 음미해서 잘 이해하고 실제 삶에 적용해서 생활화되도록 만드는 방식이 가장 좋은 수단이다. 그러므로 그 수단과 방법을 잘 이해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인지에 대한 확신이 생기고, 이제 어떻게 해야 될지 하는 수단과 방법에 대한 이해가 생긴 다음엔 뭘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다음엔 실행해야 합니다. 확신이 생기고, 어떻게 실천해야 될지에 대한 수단과 방법이 잘 파악되고 이해되면, 그다음엔 실행을 해야 합니다.신해행증의 세 번째 내용인 행(行), 실행하는 것입니다. 여실지견의 확신이 있고, 또 어떻게 실천해야 될지 하는 수단과 방법에 대한 바람직한 이해가 있으면 그것을 바로 실행하면 됩니다. 확신하고 이해한대로 직접 실행에 옮기기 위해 마음 쓰고 노력하는 것이 행(行)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가 증명(證), 경험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확신하고 이해한 대로 직접 실행에 옮기면 옮긴 만큼 틀림없이 바로 즉각 즉각 실현, 경험, 증명되고 있음을 알 수 있도록 주의 기울여 관찰 사유해야 된다.
진리는 실행한 만큼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건성건성 보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주의 깊게 관찰해보면 ‘아, 실행한 만큼 틀림없이 실현되고 있구나’하는 것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붓다로 살자 발원문’이 생활화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됨. 발원문을 생활화하면 그 사람이 바로 본래붓다의 삶을 삶으로 사는 부처임.
그래서 대승불교의 불교공부와 수행론으로서의 체계인 ‘신해행증(信解行證)’을 ‘붓다로 살자 발원문’과 연결시켜서 생각을 해보면 좋겠다 싶어서 같이 설명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하는 백대서원절명상도 좋은 방법입니다. 백대서원절명상이 생활화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바로 본래부처를 자기 삶으로 사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생활화되어지면 분명 그 삶은 멋진 삶인 겁니다. 나에게도 좋고 너에게도 좋고 우리 모두에게도 좋은 삶입니다. 그러므로 백대원절명상을 생활화하는 것도 좋은 수단과 방법입니다.또 오늘 우리가 합송했던 21세기 약사경을 끊임없이 읽고 사유음미하고 그 내용이 내 사고가 되고 말이 되고 생활화 되도록 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우리가 존경하고 스승으로 받아들인 부처님처럼 내 삶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21세기 약사경이 생활화되어 진다면 그것이 곧 부처의 삶이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 말고 부처가 따로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은 큰 윤곽만 공유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으로 ‘붓다로 살자 발원문이 시민붓다 불교의 불교관이고 수행론이다’라고 요약을 해도 충분하다. 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다만 윤곽만 이야기한 것이기 때문에 법회 시간에 몇 차례 나누어서 더 세밀하게 우리가 공유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할까 싶습니다.오늘은 여기까지 이야기하겠습니다.
2024년 10월 보현법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참사람, 인간 붓다의 삶
무시무시한 더위가 가고 나니까 그래도 좀 살만하죠? 큰 판으로 보나 작은 판으로 보나 걱정거리는 여전하지만 서늘한 가을로 넘어오니까 제법 좋은 것 같습니다.
늘 그 자리에 찔레꽃이 핀다
어제 ‘늘 그 자리에 찔레꽃이 핀다’라는 제목으로 마을주민들이 실상사 약사여래 부처님에 대한 마당극을 했습니다. 어떠셨습니까? 전 눈물이 좀 났습니다. 눈물이 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중에서 저와 관계된 내용 한 가지만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이런저런 시시비비들이 무수하게 얽히면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내용과 결과가 우리가 뜻한 바에 일치되도록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상당히 감동적이었습니다. 오늘 합송한 ‘21세기 약사경’ 내용을 보면 ‘절집도 빛나고 마을도 빛나라’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가 실상사를 중심으로 해서 많은 불사를 하고 있습니다. 많은 불사 중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불사가 마을도 빛나고 절집도 빛나는 불사이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어제 마당극을 보며 우리가 해온 일이 마을도 빛나고 절도 빛나는 쪽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마당극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감격스럽고 눈물이 났던 이유는, ‘아, 우리가 꾸고 있는 꿈이 허황된 꿈이 아니구나. 오늘 내 삶이 되고 우리의 삶이 되고 우리 마을이 되고 우리의 절이 되는 그런 꿈이구나. 그렇게 꿈꿔왔던 것이 헛된 꿈이 아니고 현실로 실현되어지는 내용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분에 대한 경험적 자기 확신을 갖는 계기가 되어서 저에게는 매우 의미가 있었습니다.
내가 본 부처
그리고 최근에 실상사에서는 ‘백일탁마광장’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불교관과 수행론, 실천론을 잘 정리해보자는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 공부의 일환으로 나한테도 주제 하나를 발표했으면 좋겠다는 주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계기로 제가 늘 화두처럼 붙잡고 살아온 부처님의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이야기해왔던 것이긴 하지만 지금까지는 이런저런 눈치를 보면서 명백하게 또는 단호하고 확실하게 이야기하지 못한 부분이 많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기존의 불교 관점과 다른 부분들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내가 생각해 왔던 부처님은 이런 사람이야’하는 내용을 확실하게 이야기 해봤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공부 자리에서 발표를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짧아서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고 큰 맥락만 공유했습니다. 그때는 주로 실상사 사부대중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이야기되어지고 있는 우리 식구들 위주로 함께 했고, 신도님들과는 같이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신도님들과 함께하는 법회 자리이므로 그 내용을 공유해볼까 합니다. 이미 들은 분들은 복습한다는 차원에서 들으시면 좋을 것 같고, 우리 신도님들은 ‘실상사 식구들이 그렇게 하고 있구나’하고 내용을 공유하고 함께할 수 있도록 하는 차원에서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그동안 부처님의 일생을 다루면서 포착하지 못했던 부분을 이번에 하나 포착을 했습니다. 경전 기록들을 참고해보면 부처님이 깨닫기 전에는 ‘부처님도 사람이구나. 나와 같은 사람이구나. 나와 같은 사람인데 대단히 똑똑한 사람이구나. 대단히 탁월한 사람이구나. 대단히 천재적인 사람이구나’하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런데 경전을 통해서 볼 때, 깨달음 이후의 부처님은 나와 같은 사람이 아니고 특별한 사람, 신적 존재로 묘사됩니다. 사람이라기보다 신적인 존재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내용이 많습니다.우리가 하는 불교의 혼란스러움이 깨달음 이후의 부처님에 대한 이야기에서 비롯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용을 주의 기우려 살펴보면 깨달음 이전의 부처님이 천재적인 한 ’인간’의 모습이었듯이 깨달음 이후도 대단히 훌륭한 ’인간’이었습니다. 따라서 부처님을 인간 붓다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부처님 삶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그동안 정확하게 포착하지 못했던 것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포착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됐습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번에 정리한 것을 몇 차례 나눠서 이야기를 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큰 윤곽만 공유하고 나의 불교 수행론에 대한 결론을 말씀을 드리는 것으로 대신할까 합니다. 늘 말씀드렸듯이 ‘나의 진리, 나의 가르침은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로 이해, 실현, 경험, 증명된다는 사유 방식의 관점에서 붓다의 삶을 정리한다.’
‘바로 이해된다.’ 부처님이 보여주는 삶의 내용도 그렇고 부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내용도 그렇듯이 불교는 그렇게 복잡하고 어렵지 않습니다. 적어도 말을 알아듣는 사람이라면 바로 이해할 수 있고 실현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이 말 그대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부처님 삶에 대한 해석과 설명을 해보자는 이야기입니다.그래서 이번에 정리하면서는 제목 자체를 우리의 인간상, 우리가 본받고 배우고 따라가야 할 부처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참사람 인간, 붓다의 삶’이라고 제목을 붙였습니다. 여기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라는 말에 주목했으면 좋겠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라는 한 인간 붓다의 삶을 종합적으로 잘 녹여내어서 압축적으로 표현한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지은 제목입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참사람, 인간 붓다의 삶, 또는 붓다의 일생이라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그런 방향과 기조에 맞추어서 부처님 일생을 몇 가지로 정리 해봤습니다. 1. 태어나서 성장 과정에서 만들어진 문제의식들. 오늘은 큰 윤곽만 공유하겠습니다. 이후에 몇 차례에 걸쳐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문제의식들’ 몇 가지 중요한 대목만 메모를 했습니다.
2. 출가할 수밖에 없었던 문제의식들. 그 과정에서 싯다르타가 어떤 문제의식들을 갖고 어떻게 답을 찾아가고 있고 어떻게 성장하고 변화해 가고 있는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 부분을 경전 말씀 그대로 바로 이해 될 수 있도록 설명해보고자 합니다.
3. 출가를 결행, 결심할 때의 문제의식들. 세속에서 답을 찾기 위해 이런저런 모색을 하지만 결국은 거기서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고는 이제 어떻게 해야 되나 고민할 때 출가 수행자를 만납니다. 출가 수행자가 싯다르타에게 해준 이야기를 이렇게 썼습니다. “세속에는 그대가 찾는 그 길이 없다. 그 길은 세속을 완전히 버리고 가야 하는 길이다. 국가도, 민족도, 부모도, 형제도, 아내도, 자식도, 명예도, 권력도, 사랑도 모두 버리고 저 건너편으로 나아가야 한다. 오로지 나와 너 그리고 우리 모두의 평화와 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좋은 마음과 자비의 마음을 붙잡고.” 수행자가 해준 이야기를 제가 이렇게 간추려 보았습니다.여기서 우리가 주목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 하나를 꼽으라면 ‘오로지 나와 너 그리고 우리 모두의 평화와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 어떻습니까? 나에게도 괜찮고 너에게도 괜찮고 우리 모두에게도 괜찮은 길, 인생의 답. 그런 길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런 길을 갈 수 있다면 국가와 민족보다 그 길이 더 중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데, 동의가 되시나요? 국가보다 민족보다 부모형제보다 그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에 동의가 되시나요? 나에게도 좋고 너에게도 좋고 우리 모두에게도 좋은 길이라면 충분히 합리적으로 동의가 될 수 있는 내용입니다.
4. 출가 이후의 문제의식들. 세속을 버리고 출가해서 6년 고행했던 과정에 대해서 짚은 것입니다.
5. 고행을 포기한 다음의 문제의식들. 6년 고행을 했는데 답을 못 찾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기 방식의 답 찾기를 하게 됩니다. 출가 이후에는 그 시대, 그 사회에서 제시할 수 있는 내용은 다 시도해본 것입니다. 다 해봤는데 답이 안 나오니까 고행을 포기합니다. 세상에 있는 길은 다 가봤는데 답이 안 나왔던 겁니다. 그래서 그것을 버리고 떠나는 것을 우리는 ‘고행의 포기’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6. 자기 방식의 답을 찾아가는 문제의식들. 세상에 있는 길은 다 가봤는데 답이 안 되니까 그 다음에 할 수 있는 일은 자기 방식으로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스승이 없는 겁니다. 묻고 배울 데가 없습니다. 묻고 배워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던 것입니다.
7. 지금까지의 내용은 ‘인생이 뭐야?’라고 하는 물음에 대한 답 찾기의 과정이라고 본다면, 이제는 ‘왜 고통스럽고 불행한 거야?’에 대한 답 찾기입니다. 우리 다 고통스럽고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고통과 불행으로부터 벗어나 보겠다고 온갖 것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요즘에는 특히 ‘행복’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태어났어.”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고통과 불행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문제의식들. 이런 형태로 부처님 삶을 정리 해보았습니다.
8. 삼사화합인 촉 이후의 문제의식들. 이 부분은 교리적인 이야기로 연결됩니다. 우리가 불교 기본 교리 공부하다 보면 12연기에 대해 배우게 됩니다. 12연기를 현실 경험 가능하도록 해석하고 할 때, 무명에서부터 시작하면 설명 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12연기를 보면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입(六入)-촉(觸). ‘촉’은 직접 경험하는 것입니다. 촉에서부터 이야기가 되어야 바로 이해되고 경험되는 불교로 설명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이런 점을 한번 짚어봤습니다.
물론 요즘 초기불교에 대한 관심과 연구들이 많아지면서 무명에 대한 해석이 옛날과는 달라진 부분이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무명’하면 아득히 먼 과거를 이야기했습니다. 전생의 전생, 그 전생의 또 전생, 그 시작이 언젠지 알 수 없는 아득한 태초. 주로 ‘무명’ 개념이 그렇게 사용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초기불교에 관심이 많아지고 또 공부를 많이 하면서 ‘사성제에 대해서 모르는 것을 무명이라고 한다’는 해석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접근하면 바로 이해되고 경험되는 해석과 설명도 가능해집니다. 그때는 ‘무명’이 ‘지금 여기에서 사성제에 대해 무지한 것’이라고 접근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전생으로 갈 필요가 없게 됩니다.전생으로 가게 되면 알 수 없는 이야기가 됩니다. 전생으로 이야기하면, 이렇게 해석하든 저렇게 해석하든 바로 이해되거나 현실적으로 경험 가능하지 않게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그런 부분을 현실 경험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명’을 ‘사성제에 대한 무지’로 해석하거나, 또 12연기에서 ‘촉’에서부터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9. 감각적 느낌에 지배당할 때의 문제의식들. 촉(觸), 수(受)가 감각적인 것을 말합니다. 접촉하는 순간의 느낌. 좋은 느낌, 나쁜 느낌, 기타 느낌들을 말합니다. 우리들의 문제는 거의 감각을 쫓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감각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내 인생을 주체적으로, 내 의도대로 살아가야 되는데 그러지 못하고 나도 모르게 감각에 따라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감각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화 낼 때 어떻습니까? 몇날 며칠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화를 내십니까? 아니면 버럭하고 성질을 내십니까? 화내는 것은 저절로 되죠? 이것이 감각의 지배를 받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래서 계속 정신 차려라, 정신 차려라, 정신 차려라. 깨어 있어라, 깨어 있어라, 깨어 있어라.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각의 노예가 되지 마라. 감각의 지배를 받지 마라. 감각에 굴복하지 마라. 감각의 주인 노릇을 해라. 감각을 네 마음대로 써라.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야 네 삶이 자유로워진다. 그래야 네 삶이 완성도가 높아질 수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문제의식을 이야기 한 부분입니다.
10. 자신의 참모습에 대한 무지가 고(苦)의 근본 원인임을 안 뒤의 문제의식들. 자기 자신의 참모습에 대한 무지를 우리는 무명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고(苦)의 원인이다. 즉 미혹이 고의 원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무지가 고의 원인이다. 너 때문이거나 나 때문이라는 차원이 아닙니다. ‘사성제에 대한 무지’와 ‘자신의 참모습에 대한 무지’는 말은 약간 다르지만 같은 관점에서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무지가 모든 고통과 불행의 원인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무지와 무명 또는 미혹으로부터 깨어나야 된다. 이것을 우리는 깨달음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무지했던 것을 잘 안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혹에 빠져 헤매던 것을 지혜롭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모르면서 하던 것을 잘 알고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 수행의 종교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불교라는 종교의 특징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깨달음의 종교, 수행의 종교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정확하게 불교적 입장을 견지한다면 깨달음의 종교라고 표현되어지는 것이 가장 합당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11. 깨달음을 얻은 직후의 문제의식들. 부처님이 깨달은 직후에 무엇을 하셨는지 아십니까?경전에는 깨달음을 음미하는 시간을 가졌다. 또 깨달음의 내용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그 내용은 사실로 받아들여도 괜찮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어차피 인생은 관계 속에서 삶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깨달음 이전도 마찬가지고 깨달음 이후도 마찬가지입니다. 너와 나의 관계, 또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 온통 관계 속에서 삶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관계’라는 것은 누구를 상대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깨달음을 이룬 다음에 어떻게 할 것인가?’하고 생각해보니 첫 번째 필요한 것이 누구일까요? 대화가 될 만한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 말은 무슨 의미인가? 깨달은 사람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귀 기울이고 들을 만한 사람, 진지하게 대화했을 때 이해할 만한 사람, 소통과 공감이 이루어질 만한 사람을 찾게 됩니다. 그것이 부처님께서 깨닫고 난 다음에 처음으로 한 일입니다.
여기서는 관계가 중요하다는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대화, 말로 표현하는 것, 또는 말로 주고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다 건너뛰고 부처님을 공부해 왔습니다. 이런 내용은 다 건너뛰고 건성건성 공부해 온 것입니다. 대화의 중요성 같은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런 내용을 깨달음 이후의 문제의식들 이라는 제목으로 정리를 했습니다.
12. 설법을 결심한 이후의 문제의식들. 깨달으신 다음에 설법을 안 하는 쪽으로 생각을 정리해 가다가 어떤 계기에 의해서 설법을 해야겠다고 결심을 하게 됩니다.
13. 깨달음을 실천하는 일상생활의 문제의식들. 우린 깨달음은 지금 여기에서 실제 생활에 쓸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신비하고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삼아승지겁 후, 무지무지한 용맹정진을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또 해서 아득한 먼 훗날 깨달음을 이루어지는 것으로 돼 있습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이라는 것은 지금 여기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내용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깨달음을 찾아가느라고 현재의 삶을 제대로 살 수가 없게 돼버리는 상황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깨달음은 지금 여기 삶이 되어야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으로 살아보니 매우 좋다고 해야 깨달음이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경전을 잘 읽어보면 깨달음이 일상적 삶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보통은 깨달음은 먼 훗날에야 도달할 수 있는 내용으로만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경전 내용, 부처님 생애를 잘 살펴보면 깨달음은 지금 여기에서 생활화되어야 될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깨달음이 생활화되면 그것이 곧 해탈 열반의 삶이다. 또는 무애 대자유의 삶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단적으로 가장 잘 보여준 내용이 금강경 첫 구절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때가 되면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 밥을 얻으러 갑니다. 밥을 얻고 돌아와서 밥 먹고 정리하고 자리 잡고 앉아서 대중들과 법회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금강경 첫 구절에 나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35살에 깨달았습니다. 깨닫고 나서 80세가 될 때까지 매일같이 그와 같은 삶을 살았던 겁니다. 이것이 깨달음이 생활화된 한 장면입니다. 그 모습은 너무나 평범한 우리들의 일상이기도 합니다. 보통의 대중들과 고락을 함께하는 일상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깨달은 자, 완성된 자의 일상적 삶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담겨 있는 의미를 우리가 잘 파악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기에 담겨 있는 의미를 잘 파악하면 ‘아, 부처님이 인간이었구나. 인간인데 대단히 괜찮은 인간이었구나. 충분히 나도 가능한 내용이구나. 나도 부처님과 같은 모습으로 괜찮은 인간으로 살아야겠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14. 깨달음 이후에 보여주는 부처님의 일상이야말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붓다의 면모들이다. 저는 결론적으로 그렇게 정리했습니다. 깨달음 이후의 삶을 조목조목 잘 짚어서 실제 생활과 연결되어질 수 있는 차원에서 정리해보았습니다. 그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이 곧 붓다였다. 그리고 그런 삶이라면 나도 바로 살 수 있는 삶이기도 하고 나도 할 수 있는 삶이고 괜찮은 삶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살아야 되겠다고 마음먹게 된다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시민붓다의 불교수행론
오늘은 대략적인 윤곽만 공유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의 불교수행론’ 또는 ‘시민들의 불교수행론’, 보통 사람들의 불교수행론을 정리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하는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이 내용은 정리된 것을 읽으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시민붓다의 불교수행론.
뭇 생명들의 이익과 안락을 위해 8만 4천 번뇌병에 8만 4천 약 처방한 것을 붓다의 가르침, 불교라고 합니다.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 번뇌병에 대한 약으로 설명된 내용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천 가지, 만 가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병의 숫자만큼 부처님 가르침이 있는 것입니다. 병에 따른 약 처방으로 설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우리가 놓치면 불교를 잘못 해석하거나 잘못 설명하는 오류에 빠질 위험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모든 불교는 병을 치유하기 위한 약 처방이므로 정해진 하나의 불교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역에 따라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중생 문제의 수만큼 천의 얼굴, 천의 몸짓, 천의 말씀으로 나타난 것이 2700여 년의 세계불교다.
우리는 하나의 불교로 귀결시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대단히 의미 있는 내용이긴 하지만 잘못 해석되거나 잘못 쓰일 위험성도 또한 동시에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부분을 우리가 잘 관찰 사유하면서 불교를 해야 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석가모니 붓다로부터 시작되어 천의 얼굴, 만의 얼굴로 나타나고 있는 세계의 모든 불교를 나름 종합적으로 참고하여 지금 여기 오늘의 우리 불교로 만들어낸 것이 바로 ‘붓다로 살자 발원문’이다.
‘붓다로 살자 발원문’은 실상사에서 지금 하고 있는 대표적인 발원문 중 하나입니다. 지금은 인구가 70억이지 않습니까? 응병여약의 논리로 보면 부처님 가르침이 적어도 70억 개는 되어야 합니다. 그동안은 8만 4천 법문이라고 했는데 이것만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70억 명이기 때문에 70억 법문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게다가 또 사람마다 번뇌의 내용이 무수하게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니 70억 법문으로도 안 됩니다. 병에 따라서 처방해야 하니까 어마어마한 양의 법문이 필요합니다.이런 부분은 자칫 잘못하면 대단히 크게 왜곡되어서 심각한 모순과 혼란에 빠질 위험성이 많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우리가 지금 개방성, 다양성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습니까?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불교야말로 병에 따른 처방으로서 불교를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다양성도 다 품어 안을 수 있습니다.온갖 다양성을 다 품어 안을 수 있는 내용이 응병여약의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응병여약의 사고방식에 맞춰서 이야기되고 있는 부처님 가르침은 21세기 시대정신으로 요구되어지는 모든 것들을 다 안을 수 있는 사고방식이다. 불교가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나의 불교관과 수행룐
나의 불교관과 수행론.
제 개인적인 입장으로 좁혀서 말하면 ‘붓다로 살자 발원문’ 자체가 나의 불교관이요, 수행론인 것이다.
불교 수행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불교 지식이 많은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용을 잘 간추려서 생활화하냐, 하지 않냐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생활화가 되냐, 안 되냐가 핵심이기 때문에 저는 불교수행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붓다로 살자 발원문’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지금 여기 내 사고가 되게 하고 말이 되게 하고 행동이 되게 하고 생활이 되게 만든다고 하면 그것으로 충분히 우리는 멋진 삶을 살아내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나에게도 좋고 너 에게도 좋고 우리 모두에게도 좋은 정말 괜찮은 삶이 완성되어질 수 있습니다.지식이 많은 것이 능사는 아닙니다. 다만 ‘붓다로 살자 발원문’으로 압축되어 있는 내용을 좀 더 잘 파악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이런 것 저런 것들을 탐구하는 것은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실제 중요한 것은 삶이 되도록 하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붓다 중도로 살다’라는 책 제목도 그런 의미에서 지은 것입니다.
붓다가 그렇게 알고 그렇게 살았듯이 나도 그렇게 알고 그렇게 살려고 애쓰고 있다. 알아야 될 내용이 ‘붓다로 살자 발원문’이고 삶으로 살아야 할 내용도 그 내용이다. 다만 한 가지, 나는 발원문을 기본 바탕으로 하지만 어릴 때부터 배우고 익혀온 화두를 챙기기 위해 시시때때로 노는 입에 염불하듯이 최선을 다해 거듭거듭 노력하고 산다.
‘붓다로 살자 발원문’과 신해행증(信解行證)
초기불교는 불교공부와 수행론의 체계를 기본적으로 사성제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대승불교, 특히 화엄불교로 오게 되면 불교수행과 수행론의 신행체계를 ‘신해행증’ 이 네 가지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것과 연결시켜서 정리를 했습니다.
이쯤에서 ‘붓다로 살자 발원문’을 화엄의 신행체계인 신해행증에 맞추어 정리해 본다. 첫 번째 신(信).
신(信)은 ‘믿을 신’자입니다. 경전에 보면 믿을 신(信)에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대승경전을 보면 압도적으로 많이 나옵니다. 그중에서도 화엄경을 보면 불교가 온통 믿음이라는 말로 설명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때의 ‘믿음’은 무조건적인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용을 잘 파악하고 이해하고 공감하고 수긍이 되면 어떻게 됩니까? 확신이 생깁니다. 믿을 신(信)은 ‘확신’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글자가 똑같다보니,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믿음과 불교에서 강조하는 믿음이 같은 것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잘 검토해보면 분명히 다릅니다. 기독교는 알 수 없으니까 믿어야 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알 수 있으면 굳이 믿음을 강조할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잘 알고 믿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르고 믿는 것은 맹신에 지나지 않는다. 맹신은 대단히 위험하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내용을 잘 이해하고 잘 파악하고 공감했을 때 믿음으로 받아들여야하지, 파악도 안 되고 이해도 안 되고 공감도 안 되는데, 부처님말씀이기 때문에 무조건 믿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그렇게 하는 것은 잘못하는 것이고 어리석게 하는 것이라고 문제 삼고 있습니다. 맹신적인 믿음은 절대 안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을 신(信)자에 담겨 있는 내용에 대한 이해와 공감 그리고 수긍을 기본으로 한 확신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신해행증;의 두 번째 글자는 알 해(解)자입니다. 이 단어 때문에 혼돈을 겪고 있습니다. 앞에서 ’믿음‘은 자신의 참모습에 대해서 잘 파악하고 이해하고 믿어야 된다는 의미였습니다.
두 번째 알 해(解)자의 의미는 자신의 참 모습이 본래부처라고 하는데 본래부처가 실제 삶이 되도록 하는 수단과 방법에 대한 내용입니다. 다시 말하면 본래부처의 삶이 생활화 되도록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떤 방식과 수단으로 해야 되는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잘 이해하고 알아야 된다는 것을 알 해(解)자를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을 신(信)자를 이야기 할 때와 대상이 다른 것입니다.
발원문의 내용이 생활화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심혈을 기울여 발원문을 잘 읽고 깊이 음미하고 실생활에 잘 적용하는 것이 좋은 방법임.
발원문을 잘 읽고 깊이 음미하고 생활에 잘 적용하도록 하는 것, 그것이 소위 신해행증의 수행을 잘 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해(解)는 이해하고 알아야 할 내용을 바로 생활화하는데 매우 효과적이고 뛰어난 방법과 수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방법과 수단을 잘 알아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방법과 수단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붓다로 살자 발원문’을 잘 읽고 그 뜻을 거듭 사유 음미해서 잘 이해하고 실제 삶에 적용해서 생활화되도록 만드는 방식이 가장 좋은 수단이다. 그러므로 그 수단과 방법을 잘 이해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인지에 대한 확신이 생기고, 이제 어떻게 해야 될지 하는 수단과 방법에 대한 이해가 생긴 다음엔 뭘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다음엔 실행해야 합니다. 확신이 생기고, 어떻게 실천해야 될지에 대한 수단과 방법이 잘 파악되고 이해되면, 그다음엔 실행을 해야 합니다.신해행증의 세 번째 내용인 행(行), 실행하는 것입니다. 여실지견의 확신이 있고, 또 어떻게 실천해야 될지 하는 수단과 방법에 대한 바람직한 이해가 있으면 그것을 바로 실행하면 됩니다. 확신하고 이해한대로 직접 실행에 옮기기 위해 마음 쓰고 노력하는 것이 행(行)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가 증명(證), 경험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확신하고 이해한 대로 직접 실행에 옮기면 옮긴 만큼 틀림없이 바로 즉각 즉각 실현, 경험, 증명되고 있음을 알 수 있도록 주의 기울여 관찰 사유해야 된다.
진리는 실행한 만큼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건성건성 보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주의 깊게 관찰해보면 ‘아, 실행한 만큼 틀림없이 실현되고 있구나’하는 것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붓다로 살자 발원문’이 생활화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됨. 발원문을 생활화하면 그 사람이 바로 본래붓다의 삶을 삶으로 사는 부처임.
그래서 대승불교의 불교공부와 수행론으로서의 체계인 ‘신해행증(信解行證)’을 ‘붓다로 살자 발원문’과 연결시켜서 생각을 해보면 좋겠다 싶어서 같이 설명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하는 백대서원절명상도 좋은 방법입니다. 백대서원절명상이 생활화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바로 본래부처를 자기 삶으로 사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생활화되어지면 분명 그 삶은 멋진 삶인 겁니다. 나에게도 좋고 너에게도 좋고 우리 모두에게도 좋은 삶입니다. 그러므로 백대원절명상을 생활화하는 것도 좋은 수단과 방법입니다.또 오늘 우리가 합송했던 21세기 약사경을 끊임없이 읽고 사유음미하고 그 내용이 내 사고가 되고 말이 되고 생활화 되도록 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우리가 존경하고 스승으로 받아들인 부처님처럼 내 삶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21세기 약사경이 생활화되어 진다면 그것이 곧 부처의 삶이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 말고 부처가 따로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은 큰 윤곽만 공유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으로 ‘붓다로 살자 발원문이 시민붓다 불교의 불교관이고 수행론이다’라고 요약을 해도 충분하다. 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다만 윤곽만 이야기한 것이기 때문에 법회 시간에 몇 차례 나누어서 더 세밀하게 우리가 공유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할까 싶습니다.오늘은 여기까지 이야기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