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마야합창단의 노래를 함께 들었습니다. 대중들에게 메시지를 잘 전달해야겠다는 간절한 뜻으로 가사를 만들다 보니, 불교학자나 전문가들의 이야기보다 불교사유 방식이 일상의 언어로 훨씬 잘 표현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리적인 언어가 직접적으로 표현되고 있지는 않지만 팔정도 사유방식이 잘 살아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팔정도 사유방식이 대단히 중요한 이유는, 팔정도 사유방식에 맞추어서 생각을 해보면 부처님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나와 다르지 아니한 사람이구나. 나와 같은 사람이구나. 나와 같은 사람인데 대단히 괜찮은 사람이구나.’ 부처님을 이렇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만약 ‘부처님이 나와 다르지 아니한 사람이구나. 다만 대단히 괜찮은 ’사람‘이구나’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부처님이 어떻게 느껴지겠습니까? 이웃사람, 이웃삼촌 같기도 하고 좋은 친구 같기도 하고 스스럼없이 편안하게 말을 걸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손 내밀고 악수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어떻습니까? 여러분들 머릿속에 그려져 있는 부처님하고 지금 팔정도 사유방식으로 생각해 본 부처님 중 여러분들은 어느 쪽을 선택하고 싶습니까? 아마 팔정도 사유방식에 초점을 맞춰보면 부처님도 우리가 편안한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친구처럼, 또는 삼촌처럼 함께하는 데 어려움이 없겠죠. 동시에 불교도 그렇게 해석되고 설명된다고 봅니다. 즉 보통의 상식을 가진 사람이 조금만 주의 기울여서 관찰사유하고 사유음미하면 ‘불교’, 또는 ‘수행’이라고 하는 것도 잘 이해·공감되리라고 봅니다.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하니까 삶이 정말 괜찮아지는 구나’하는 것을 바로바로 경험할 수 있게 된다고 봅니다.그런데 안타깝게도 현재 불교를 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불교공부와 수행은 보통의 상식으로는 접근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또 너무 복잡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해도 해도 잘 모르겠다고 이야기합니다. 또 해도 해도 소용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고 하소연하기도 합니다.
고통, 단지 개인의 문제인가
오늘은 이런 질문을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신체적으로, 경제적으로는 좀 고단하더라도 심리적인 불안과 공포와 고통이 없다면 어떠할 것 같습니까? 말로만 들으면 그것이 별것 아닐 것 같지만 실제 내용을 잘 생각해 보세요. 심리적 불안과 공포와 고통이 없는 그 삶이야말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삶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거룩한 붓다의 일상을 보십시오. 저절로 고개가 끄덕끄덕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심리적인 불안과 공포와 고통에 시달리면서 살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불교 수행을 강조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 이유를 개인의 문제로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개개인들이 전생의 죄업이 많아서, 혹은 개개인들이 욕심을 부리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그런 측면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이야기해야할 부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측면에서만 이야기되는 것이 괜찮을까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의심을 가져야 된다고 봅니다. 제가 여기 메모를 보니 이렇게 써 놓았네요.
누군가는 20세기 100년을 기적의 역사라고 한다.
누군가는 20세기 100년을 죽임의 역사라고 한다.
그리고는 서로 ‘내가 옳고 너는 틀렸어’라고 하며 싸운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것을 요약하면 ‘나는 옳고 너는 틀렸어’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고방식이 크게 충돌한 것이 한국전쟁이고 또 남북분단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남쪽은 이승만 대통령이고 북쪽은 김일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이 문제를 단순화시키면 좌익, 우익 문제로 이야기 합니다. 좌익을 대표했던 인물이 김일성이고 우익을 대표했던 인물이 이승만입니다. 이 두 고래의 싸움으로 인해서 새우등이 터지는 한국전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이 잘못 생각하거나 개인 전생의 업이 많아서 생긴 문제와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고통스럽고 불행하게 되는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다루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문제가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도록 답을 찾고 만들어가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답을 찾고 만들어가는 것이 가능하도록 부처님이 제시한 것이 중도의 팔정도 개념입니다.
부처님의 사유방식, 중도의 팔정도
만약 부처님한테 누군가가 ‘좌익인 김일성이 옳습니까? 아니면 우익인 이승만이 옳습니까?’하고 물으면 무엇이라고 답하실 것 같습니까? 부처님은 당연히 ‘좌익이 옳다고 하는 것도 단견이고 우익이 옳다고 하는 것도 단견이야. 이 양극단을 버리고 중도적으로 해야 돼.’
부처님의 삶을 보면 중도의 팔정도 사유방식이 매사에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도적으로 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실에 직면해서 내용을 검토해 보면 어느 한쪽이 전적으로 옳고 다른 한쪽이 전적으로 틀린 경우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믿고 주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주장의 충돌이 싸움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실을 주의 기울려 관찰 사유해 보면 좌익의 말 속에 우익의 내용이 들어있기도 하고 우익의 말속에도 좌익의 내용이 들어있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를 우리는 ‘연기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자택일 방식으로 문제를 다룰 수 없습니다. 그렇게 문제를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우리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양자택일 방식을 취합니다. 그 결과 끝없는 창과 방패 싸움입니다.
실상이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승만 대통령이 ‘우익이 옳은 길이야. 우익만이 우리의 희망이야’라고 주장을 할 때 그가 내세우는 명분은 무엇일까요? ‘한반도 우리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 우리는 우익의 길을 가야 된다.’ 이런 내용 아니겠습니까? ‘내가 권력 잡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 돼’라고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그가 내세운 명분, 혹은 대의는 ‘한반도 우리 민족의 밝은 미래’입니다. 그것은 좌익의 길을 주장했던 김일성도 마찬가지입니다.실제 내용이 그렇다면 우익을 주장하든 좌익을 주장하든 내용적으로는 함께 할 수 있는 공통점이 반듯이 있습니다. 그 공통점은 ‘한반도 우리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라고 하는 대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대의에 초점을 맞춘다면 그다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좌익의 주장 속에 들어있는 내용이라 하더라도 한반도 우리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 바람직한 것이라면 당연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접근했는데도 과연 좌우대립 동족상잔의 전쟁과 남북분단이 일어났겠습니까?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살육을 당하고 모든 것이 파괴되었겠습니까? 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당연히 그런 비극적 상황으로 가지 않고 답을 찾아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너도 빛나고, 나도 빛나는 길’, 해볼 만하지 않을까?
우리가 만일결사 기간 동안 100일마다 법회를 하고 있습니다. 백일 회향과 백일 입재를 함께 하면서 만일결사가 잘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 만일결사 동참자 개개인의 삶 역시 더 나아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앞서 말씀드렸던 내용과 ‘21세기 약사경’ 내용을 연결시켜서 이야기를 이어가볼까 합니다.약사경 내용 일부를 읽어보겠습니다.
자기만을 내세우고 상대방을 내려보는 미혹문명 내려놓고
상대도 빛나고 자기도 빛나는 깨달음의 밝은 문명 피어나게 하옵소서.
개인만 앞세우고 공동체를 뒤로 하는 미혹문명 내려놓고
공동체도 빛나고 개인도 빛나는 깨달음의 밝은 문명 피어나게 하옵소서.
여기서 이야기되고 있는 자기만을 내세우고 상대방을 내려보는 사고방식, 개인만 내세우고 공동체를 배제하는 사고방식을 소위 미혹문명의 사고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내용을 압축해서 한마디로 요약하면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사고방식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거의 모든 문제가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라고 하는 사고방식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그런 사고방식을 가직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충돌하니까 서로에 대한 불신·분노·불안·공포가 생기고 그것으로 인해 고통 받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미혹문명을 넘어서 상대도 빛나고 자신도 빛나는, 또는 개인도 빛나고 공동체도 빛나는 삶을 살아보자고 제안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도 빛나고 나도 빛나고, 개인도 빛나고 공동체도 빛나는 삶이 실제 삶이 되도록 하는 것은 어렵겠습니까, 어려울 것이 없겠습니까? (대답: 어려워요) 만약 이것이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려운 일이라면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미 미혹문명의 사고방식으로 인해서 너무나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것을 벗어나자고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해결방법 또한 복잡하고 어렵다면 굳이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달리 이야기하면 ‘부처님이 굳이 깨달을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이야기도 됩니다. 부처님이 깨달아서 ‘이렇게 하면 해볼 만해’하고 가르쳐 준 것을 우리가 ‘깨달음의 문명’이라는 말로 실천해 보고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어렵다고 한다면, 너무 복잡해서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을 할 필요가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만일결사도 괜한 짓을 하는 것이고, 약사경도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이 깨달음의 문명. 소위 말해서 ‘너도 빛나고 나도 빛나고 개인도 빛나고 공동체도 빛나라’는 사고방식을 우리가 경험했던 한반도 역사 상황과 연결시켜보겠습니다. 그러면 ‘좌익도 빛나고 우익도 빛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물로 좁혀서 예를 들면 ‘이승만도 빛나고 김일성도 빛나라’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우리 민족의 희망찬 미래를 위해서 이승만은 우익의 길을 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김일성은 좌익의 길을 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서로 충돌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부처님의 팔정도 사유방식으로 이 문제를 다뤘다고 한다면, 즉 중도의 방식으로 이 문제를 다뤘으면 어땠을까요?
우리 민족의 희망찬 미래를 위해서 좌익의 내용 중에 좋은 것이 있으면 갖다 쓰고 우익의 내용 중에서도 좋은 것이 있으면 갖다 쓰면 됩니다. 이렇게 더불어함께 우리의 미래를 희망차게 만들어냈다고 한다면 어떠했겠습니까? 그런 것을 ‘좌익도 빛난다. 우익도 빛난다. 이승만도 빛난다. 김일성도 빛난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말이 되는 것 같습니까, 안 되는 것 같습니까? 말이 되죠. 어떻게 보면 너무나 평범하고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매우 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조금만 주의 기울이면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방식으로 좌익과 우익이 충돌해서 동족상잔의 비극과 분단의 비극이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길은 절대 쉬운 길이 아닙니다. 쉬운 길이 아닐 뿐만 아니라 답이 되는 길이 아닙니다. 정말로 어렵게 가더라도 그 길이 답이 된다고 한다면 한번 가볼 만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해 보니 답이 안 되지 않습니까? 답이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린 구태의연하게 그 방식을 지금까지 답습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진보진영은 진보진영대로 보수진영은 보수진영대로, 여당은 여당대로 야당은 야당대로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관찰한 바로는 만약 부처님이 가르쳐준 대로 중도·연기 사유방식으로 이 문제를 다루면, 다루는 과정이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울 필요가 없습니다. 또는 한쪽 혹은 서로가 고통 받는 부작용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너도 빛나고 나도 빛나고 이쪽도 빛나고 저쪽도 빛나고 개인도 빛나고 공동체도 빛나는 답이 나오게 됩니다. 답이 된다면 좀 어렵더라도 가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난 이런 확신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싸워서 이기는 방식, 싸워서 승부를 내는 방식에 바치는 노력의 반만 들여도 중도적 사유방식으로 문제를 풀 수 있다고 봅니다. 너도 빛나고 나도 빛나게 하는 중도적 사유방식으로 이 문제를 다루어 나가면 싸워서 이기는 방식으로 문제를 다루는데 바치는 노력의 50%만 해도 된다고 봅니다. 실제 제가 해보면 그렇습니다. 싸우는데 쓰는 노력의 50%만 해도 충분히 가능합니다.그런데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문제를 다루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해보지도 않고 괜히 지레 겁먹고 시도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건 너무 이상적이야, 비현실적이야, 복잡해, 어려워 등의 이유를 대며 제대로 해보지도 않고 있습니다. 제 경험은 그렇습니다.
바람직한 불교, 답이 되는 불교
앞서 이야기한 내용은 ‘바람직한 불교를 해보자’라고 하는 말로도 요약할 수 있을 겁니다. 또 한 가지는 ‘새로운 길을 여는 새로운 방식의 불교를 해보자’는 것입니다. 너무 어렵고 복잡한 불교 말고, 보통의 상식을 가진 사람이 조금만 진지하게 관심 갖고 접근하면 알 수 있는 바람직한 불교를 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함께할 수 있는 새로운 불교, 답이 되는 불교가 되도록 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만든 몇 개의 자료가 있습니다. 첫 번째가 ‘중도로 본 본래부처와 동체대비’라는 제목으로 만들어진 ‘붓다로 살자 발원문’입니다. 두 번째가 ‘21세기 약사경’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대표적인 것이 ‘생명평화백대서원 절명상’입니다.오늘은 ‘나도 빛나고 너도 빛나고, 개인도 빛나고 공동체도 빛나고, 좌익도 빛나고 우익도 빛나라’라는 것이 실현되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함께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고귀한 인간의 탄생
‘붓다로 살자 발원문’ 내용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붓다로 살자 발원문’대로 살면 삶이 바로 그렇게 됩니다. 이것을 전통적인 교리 언어로 좁혀서 이야기하면, ‘팔정도 사유방식으로 하면 바로 삶이 그렇게 된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또는 대승불교적으로 확대하면 보현십대행원방식으로 하면 그렇게 된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또는 육바라밀, 혹은 십바라밀 사유방식으로 살면 너도 빛나고 나도 빛나고 우리 모두 함께 빛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그런 깨달음의 문명이 실현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붓다로 살자 발원문’ 이야기를 잠깐 해보겠습니다.
본래붓다인 나는 자연과 사람을
고귀하게 맞이하여 말하고 행동하겠습니다.
이 구절 가지고 한번 생각해보죠.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것을 발원문에서는 ‘자연과 사람’이라는 말로 요약했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관계를 떠나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관계를 떠나서는 태어나는 것도 불가능하고 살아가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나 홀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나 홀로 행복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럴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을 제대로 봐야 합니다. 이 구절을 가지고 이야기를 조금 더 진전시켜보겠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상대하는데 고귀하게 맞이하여 말하고 행동하면 어떻게 됩니까? 누군가를 고귀하게 맞이하고 고귀하게 말하고 고귀하게 행동하는 순간 어떻게 되나요?
첫 번째, 자기 자신이 고귀한 인간이 됩니다. 사람은 행위 하는 대로 만들어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우리에게 준 최고의 선물입니다. 행위 하기만 하면 틀림없이 그런 존재가 됩니다. 그것은 장좌불와를 하고 안 하고 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만일결사를 하는지 여부와도 관계없습니다. 용맹정진 하는 것과도 관계없습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고귀하게 맞이하고 고귀하게 말하고 행동하기만 하면 즉각 그 사람은 고귀한 사람이 됩니다.그것은 빛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누가 빛나는 일입니까? 내가 빛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해도 해도 안 된다고 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고정관념 때문이고, 그 관념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그런 결론을 내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기만 하면 틀림없습니다.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했는데도 안 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거짓말하면 즉각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거짓말을 했는데 그 사람은 전생에 복이 많아서 거짓말해도 거짓말쟁이 안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아무리 복이 많은 사람도 거짓말하면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너무나 단순 명료한 내용인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조금만 주의 기울여서 정리하면 불교는 정말로 명쾌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각 이루어지고, 즉각 효과 있는 가르침입니다. 전생을 이야기할 필요도 없고 내생을 이야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야기를 조금 더 진전시켜 보겠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고귀하게 맞이하고 말하고 행동을 했습니다. 그러면 나는 즉각 고귀한 사람이 되고, 내가 빛나게 됩니다. 그런데 누군가로부터 고귀하게 맞이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대접을 받은 사람은 어떨까요? 그런 행위를 받은 사람도 좋지 않겠습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고귀한 대접을 받은 것이지 않습니까? 고귀한 대접을 받으니까 당연히 받는 사람도 좋을 겁니다. 스스로 뿌듯하지 않겠습니까? 누군가가 나를 고귀한 인간으로 대해주면 스스로 뿌듯하고 기쁘죠.
거기에 무슨 시간이 간격이 있습니까? 10년이 걸리겠습니까, 100년이 걸리겠습니까? 즉각 이루어집니다. 지금 고귀하게 행위 했는데 10년 뒤에 고귀한 사람이 될까요? 아니지 않습니까. 고귀한 대접을 받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고귀한 대접을 받으면 찡그리고 있던 사람도 바로 얼굴이 활짝 펴지지 않겠습니까?우리는 이 정도 효과를 보면 만족해야 합니다. 이것을 넘어서서 더 구하고 찾는 건 다 부질없는 망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부질없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것을 붙잡고 안 된다고 아우성치고 있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부처님이 이야기하는 깨달음의 첫 번째 내용입니다. 쓸데없는 망상에 붙잡혀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처라는 망상, 깨달음이라는 망상, 삼매라는 망상, 신통이라는 망상, 전생이라는 망상, 내생이라는 망상. 우리는 온갖 망상들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실제로는 다 이루어지고 있는데 망상으로 인해서 우리가 실패한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착각의 내용을 확신합니다. 이 착각에 대한 확신을 붙잡고 안 된다고 아우성 치고 있는 것입니다, ‘해도 해도 안 돼.’ 이런 바보 같은 짓을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발원문에서는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한심하고 한심하도다.
언제나 분주하고 고달프게 소를 타고 소를 찾고 있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만 이야기하고 있는가?
안타깝고 안타깝도다.어리석음과 착각에 빠져 붓다인 사람이 중생 노릇하고 있네
.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자기가 잘난 척 한 것인데 결과는 그렇게 된 것입니다. 자기가 잘난 척해서 한 건데 그런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부처님의 수행법
부처님 생애를 보면, 세속을 버리고 출가한 다음 세 가지 수행을 합니다. 첫 번째는 선정수행을 합니다. 그리고는 곧 스승이 이야기 한 선정의 경지에 도달합니다. 그런 경지에 도달했지만 자기가 찾고 싶은 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은 깊은 선정에 도달했기 때문에 신통력도 생기고, 황홀한 기쁨을 체험하는 신비 체험도 할 수 있게 됩니다. 초인적인 능력이 생기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초인적인 능력, 신통력, 황홀한 기쁨은 싯다르타가 찾고 싶은 답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길을 버립니다.
그리고는 두 번째 스승을 만나서 지도를 받습니다. 이때는 첫 번째 스승한테 배운 것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올라갑니다. 부처님이 도달한 경지는, 선정의 경지로서는 최고 수준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비상비비상처 선정이라고 합니다. 그 경지에서는 더 초월적인 능력이 생깁니다. 전생도 보고 내생도 볼 수 있습니다. 하늘을 날아다니기도 하고 물 위를 걸어 다니기도 하고 예언도 할 수 있습니다. 온갖 것을 다 할 수 있으므로 사람들이 깜짝깜짝 놀랍니다. 그리고 황홀한 기쁨도 경험합니다, 싯다르타는 신비한 체험, 불가사의한 능력, 황홀한 기쁨은 누리지만 찾고 싶은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다음은 고행수행을 합니다. 고행수행도 최고의 수준으로 합니다. 죽게 될지도 모르는 극단적인 고행수행을 했지만 거듭거듭 고통스러울 뿐 찾고 싶은 답이 나오지 않음으로 고행수행도 버리고 떠납니다.
이제 더 이상의 길은 없습니다. 죽으나 사나 스스로 묻고 답을 찾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다음에는 부처님이 스스로 생각한 방식으로 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방식으로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모릅니다. 경전에 기록되어 있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는 있지만 그 부분이 사실 시원하지가 않습니다. 부처님 생애를 다룬 많은 책들을 봐도 마찬가지고 여러 경전을 살펴봐도 그런 혼란스러움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세계적인 석학들이 쓴 부처님 생애를 보아도 그런 내용이 정리가 안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혼란이 답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오늘날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하는 우리들에게도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당신 방식으로 수행을 해서 깨달았는데 정확하게 그것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해석되고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깨달음 이후, 당신이 깨달은 내용을 사람들에게 전법 할 때 본인의 수행방법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오비구를 만나서 처음으로 전법을 할 때 당신이 했던 수행 방식을 무엇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가?
‘향락주의는 문제가 있다. 그 길은 가면 안 되는 길이다. 성자들도 좋아하지 않는 길이다. 그리고 고행주의의 길도 가선 안 되는 길이다. 잘못된 길이다. 우리의 스승들인 성자와 현자들도 그 길은 좋아하지 않는다. 이 두 길은 버려야 한다. 그래서 나는 그 두 개의 극단적인 길을 버렸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 두 개의 극단을 버리고 나는 중도의 길을 통해서 연기법이라고 하는 진리를 깨달았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향락주의’ 바로 보기
부처님은 본인이 버린 두 극단의 길을 ‘향락주의’와 ‘고행주의’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때 대부분의 불교인들이 향락주의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오욕락(五欲樂)을 추구하고 마음껏 누리는 것을 향락주의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오욕락(五欲樂)이 무엇입니까? 재색식명수(財色食名睡). 재산(財), 사랑(色), 이성을 말합니다. 식(食)은 맛있는 것을 실컷 먹는 것입니다. 명(名)은 명예. 수(壽)는 무병장수. 이 5가지가 인간이 추구하고 실현하고 싶은 대표적인 욕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욕망을 추구하고 욕망을 충족하면서 사는 것을 향락주의라는 말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향락주의라는 말을 그렇게 해석합니다.
부처님 생애의 맥락에서 보면 출가하기 전에 향락주의의 삶을 살았습니다. 오욕락을 마음껏 누리며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싯다르타가 찾고자 하는 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향락주의를 버리고 출가합니다. 어디에도 오욕락 탐하는 것을 수행론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출가하기 전에 이미 향락주의에는 답이 없다고 버렸습니다. 따라서 오욕락을 추구하고, 누리는 것을 불교수행론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출가 이후에 석가모니가 경험한 수행은 세 가지입니다. 선정수행 두 가지와 고행수행. 그런데 여기서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당신 방식으로 수행을 합니다. 그것을 훗날 ‘중도수행’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중도수행’은 당신 방식으로 수행을 해서 답을 찾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출가 전에는 주로 물질적으로, 육체적으로 뭔가를 추구했다고 한다면 출가 이후에는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것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신적인 또는 심리적인 신비한 체험, 초월적 능력, 불가사의하고 황홀한 기쁨을 ‘향락주의’로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볼 때 향락주의라는 말은 출가 이전에 오욕락을 추구하고 오욕락을 누리는 삶을 설명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나는 그런 점에 대해서 문제 제기를 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문명을 여는 단순하고 평범한 길
우리가 붓다의 뜻에 일치하도록 하고자 하는 뜻에서 중도의 사유방식으로 붓다로 살자 발원문을 만들었습니다. 나름대로는 모든 불교를 참고해서 현대인들에게 도움 되도록 현대적 언어로 내용을 단순화해서 만든 발원문입니다. ‘붓다로 살자 발원문’대로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을 하면, 너도 빛나고 나도 빛나고 이쪽도 빛나고 저쪽도 빛나고 개인도 빛나고 공동체도 빛나는 등 소위 ‘깨달음의 문명’으로 표현되는 삶이 실현되고 생활화됩니다. 이렇게 접근하면 너도 빛나고 나도 빛나는 깨달음의 문명이 삶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결코 어려운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정도는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누군가를 상대할 때 ‘기왕이면 좋은 마음으로 상대할 거야. 평화롭게 말할 거야’하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따뜻하게 할 거야. 너그럽게 할 거야. 겸손하게 할 거야. 좀 더 의젓하게 할 거야.’ 이런 마음을 먹는 것이 불가능한 일입니까? 나는 조금만 노력하면 이 정도는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깨달음의 문명’이라고 하면 거창한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꼼꼼히 따져보면 매우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길입니다. 또는 평범하고 단순 명료한 길이라고 이야기해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지금 깨달음의 문명을 현실화시키고자 하는 마음으로 만일결사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지난 100일기도를 회향하고 새로운 100일기도를 입재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조금 더 진지하게 해보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은 ‘붓다로 살자 발원문’과 ‘21세기 약사경’을 연결시켜서 깨달음의 문명이 삶이 되도록 만드는 구체적인 내용과 방식에 대해 말씀드려보았습니다. 그 방법은 다른 데 특별하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늘상 독송하는 발원문 그 자체가 깨달음의 문명이 삶이 되도록 만드는 구체적인 내용이고 방식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렇게 정리하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붓다로 살자 발원문과 21세기 약사경을 연결시켜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화쟁(和爭)의 관점으로 고래싸움 생기지 않게
끝으로는 여전히 우리가 현실을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인가에 따라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달라진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그동안은 주로 옳고 좋다는 쪽의 편을 들어서 문제를 바라보고 다루어 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보니까 거의 다 공통적으로 ‘나는 옳고 너는 틀렸어’라는 사고방식으로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귀결이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서로 충돌하고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편들고 싸는 방식으로는 비명소리가 나오는 악순환이 계속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답이 되는 길을 만들어 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부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실을 정확하게 관찰하고, 현실에 입각해서 우리가 정확한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바람직한 길을 모색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봤을 때 우리의 현실은 고래 싸움에 새우들이 등터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지는 것이 문제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이쪽 고래 편을 들면 되겠습니까? 저쪽 고래 편을 들면 되겠습니까? 이쪽 고래 편을 들면 어떻게 됩니까? 이쪽 고래 덩치가 더 커지겠죠. 저쪽 고래 편을 들면 저쪽 고래 덩치가 더 커집니다. 덩치가 커지면 더 큰 싸움이 되고 더 많은 새우들의 등이 터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결론적으로는 너도 빛나고 나도 빛나는 길, 이쪽도 빛나고 저쪽도 빛나게 하는 길이 답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제를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고 접근해야 할 것인가? 저는 ‘고래 싸움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일이 뭘까?’, 또는 ‘고래 싸움이 생겼더라도 싸움을 해결하는 방법은 뭘까?’, ‘어떻게 하면 고래 싸움을 잘 해결할 수 있을까?’하는 관점에서 접근을 해야 된다고 봅니다.
그런 관점으로 접근하고, ‘이렇게 하면 답이 된다’라고 제시한 것이 원효스님의 ‘화쟁사상’입니다. 원효스님의 화쟁사상은 현실을 보는 관점이 다릅니다. 그러니까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관점에 서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관점은 네 생각이고 네 주장일 뿐이야. 실제는 그렇지 않아’라고 하는 것이 중도적 반응입니다. 또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대로, 한반도 우리 민족의 희망찬 미래를 위한다는 대의를 놓고 중도적 관점에서 접근해 본다면 어느 편인 것과 상관없이 필요한 부분을 가져다 쓰면 됩니다. 이쪽 것이 대의가 실현되는 데 도움 된다면 그것을 갖다 쓰고 저쪽 것이 도움 된다면 저쪽 것을 갖다 쓰면 됩니다. 그렇게 해서 대의가 실현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화쟁적 사고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귀결점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손에 손잡고 만일결사!
이런 내용들 생각해보면 어떻습니까? 미혹문명을 넘어 깨달음의 문명 길을 가보자고 하는 만일결사의 길을 한번 가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끼리만 해서 되겠습니까? 이것이 현실이 되려면 힘이 있어야 합니다. 힘이 없으면 현실이 되지 않습니다. 좋은 이야기로만 끝납니다. 현실에 이르도록 하려면 같은 문제의식을 가진 도반들, 인연들과 손에 손을 잡는 노력도 함께 해야 합니다. 그래야 만일결사를 제대로 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아무쪼록 오늘 이 자리가 그런 마음을 더 크게 내는 자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또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할 수 있도록 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자는 말씀을 드리면서 제 이야기를 정리하겠습니다.
지리산 만일결사 1700일 입재법회 / 2024. 11. 10
바람직한 불교, 답이 되는 불교
이웃삼촌 부처님, 보통상식 불교
방금마야합창단의 노래를 함께 들었습니다. 대중들에게 메시지를 잘 전달해야겠다는 간절한 뜻으로 가사를 만들다 보니, 불교학자나 전문가들의 이야기보다 불교사유 방식이 일상의 언어로 훨씬 잘 표현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리적인 언어가 직접적으로 표현되고 있지는 않지만 팔정도 사유방식이 잘 살아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팔정도 사유방식이 대단히 중요한 이유는, 팔정도 사유방식에 맞추어서 생각을 해보면 부처님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나와 다르지 아니한 사람이구나. 나와 같은 사람이구나. 나와 같은 사람인데 대단히 괜찮은 사람이구나.’ 부처님을 이렇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만약 ‘부처님이 나와 다르지 아니한 사람이구나. 다만 대단히 괜찮은 ’사람‘이구나’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부처님이 어떻게 느껴지겠습니까? 이웃사람, 이웃삼촌 같기도 하고 좋은 친구 같기도 하고 스스럼없이 편안하게 말을 걸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손 내밀고 악수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어떻습니까? 여러분들 머릿속에 그려져 있는 부처님하고 지금 팔정도 사유방식으로 생각해 본 부처님 중 여러분들은 어느 쪽을 선택하고 싶습니까? 아마 팔정도 사유방식에 초점을 맞춰보면 부처님도 우리가 편안한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친구처럼, 또는 삼촌처럼 함께하는 데 어려움이 없겠죠. 동시에 불교도 그렇게 해석되고 설명된다고 봅니다. 즉 보통의 상식을 가진 사람이 조금만 주의 기울여서 관찰사유하고 사유음미하면 ‘불교’, 또는 ‘수행’이라고 하는 것도 잘 이해·공감되리라고 봅니다.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하니까 삶이 정말 괜찮아지는 구나’하는 것을 바로바로 경험할 수 있게 된다고 봅니다.그런데 안타깝게도 현재 불교를 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불교공부와 수행은 보통의 상식으로는 접근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또 너무 복잡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해도 해도 잘 모르겠다고 이야기합니다. 또 해도 해도 소용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고 하소연하기도 합니다.
고통, 단지 개인의 문제인가
오늘은 이런 질문을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신체적으로, 경제적으로는 좀 고단하더라도 심리적인 불안과 공포와 고통이 없다면 어떠할 것 같습니까? 말로만 들으면 그것이 별것 아닐 것 같지만 실제 내용을 잘 생각해 보세요. 심리적 불안과 공포와 고통이 없는 그 삶이야말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삶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거룩한 붓다의 일상을 보십시오. 저절로 고개가 끄덕끄덕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심리적인 불안과 공포와 고통에 시달리면서 살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불교 수행을 강조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 이유를 개인의 문제로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개개인들이 전생의 죄업이 많아서, 혹은 개개인들이 욕심을 부리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물론 그런 측면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이야기해야할 부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측면에서만 이야기되는 것이 괜찮을까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의심을 가져야 된다고 봅니다. 제가 여기 메모를 보니 이렇게 써 놓았네요.
누군가는 20세기 100년을 기적의 역사라고 한다.
누군가는 20세기 100년을 죽임의 역사라고 한다.
그리고는 서로 ‘내가 옳고 너는 틀렸어’라고 하며 싸운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것을 요약하면 ‘나는 옳고 너는 틀렸어’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고방식이 크게 충돌한 것이 한국전쟁이고 또 남북분단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남쪽은 이승만 대통령이고 북쪽은 김일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이 문제를 단순화시키면 좌익, 우익 문제로 이야기 합니다. 좌익을 대표했던 인물이 김일성이고 우익을 대표했던 인물이 이승만입니다. 이 두 고래의 싸움으로 인해서 새우등이 터지는 한국전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이 잘못 생각하거나 개인 전생의 업이 많아서 생긴 문제와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고통스럽고 불행하게 되는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명료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다루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문제가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도록 답을 찾고 만들어가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답을 찾고 만들어가는 것이 가능하도록 부처님이 제시한 것이 중도의 팔정도 개념입니다.
부처님의 사유방식, 중도의 팔정도
만약 부처님한테 누군가가 ‘좌익인 김일성이 옳습니까? 아니면 우익인 이승만이 옳습니까?’하고 물으면 무엇이라고 답하실 것 같습니까? 부처님은 당연히 ‘좌익이 옳다고 하는 것도 단견이고 우익이 옳다고 하는 것도 단견이야. 이 양극단을 버리고 중도적으로 해야 돼.’
부처님의 삶을 보면 중도의 팔정도 사유방식이 매사에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도적으로 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실에 직면해서 내용을 검토해 보면 어느 한쪽이 전적으로 옳고 다른 한쪽이 전적으로 틀린 경우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믿고 주장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주장의 충돌이 싸움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실을 주의 기울려 관찰 사유해 보면 좌익의 말 속에 우익의 내용이 들어있기도 하고 우익의 말속에도 좌익의 내용이 들어있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를 우리는 ‘연기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자택일 방식으로 문제를 다룰 수 없습니다. 그렇게 문제를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대부분의 우리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양자택일 방식을 취합니다. 그 결과 끝없는 창과 방패 싸움입니다.
실상이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승만 대통령이 ‘우익이 옳은 길이야. 우익만이 우리의 희망이야’라고 주장을 할 때 그가 내세우는 명분은 무엇일까요? ‘한반도 우리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 우리는 우익의 길을 가야 된다.’ 이런 내용 아니겠습니까? ‘내가 권력 잡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 돼’라고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그가 내세운 명분, 혹은 대의는 ‘한반도 우리 민족의 밝은 미래’입니다. 그것은 좌익의 길을 주장했던 김일성도 마찬가지입니다.실제 내용이 그렇다면 우익을 주장하든 좌익을 주장하든 내용적으로는 함께 할 수 있는 공통점이 반듯이 있습니다. 그 공통점은 ‘한반도 우리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라고 하는 대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대의에 초점을 맞춘다면 그다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좌익의 주장 속에 들어있는 내용이라 하더라도 한반도 우리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 바람직한 것이라면 당연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접근했는데도 과연 좌우대립 동족상잔의 전쟁과 남북분단이 일어났겠습니까?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살육을 당하고 모든 것이 파괴되었겠습니까? 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당연히 그런 비극적 상황으로 가지 않고 답을 찾아내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너도 빛나고, 나도 빛나는 길’, 해볼 만하지 않을까?
우리가 만일결사 기간 동안 100일마다 법회를 하고 있습니다. 백일 회향과 백일 입재를 함께 하면서 만일결사가 잘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또 만일결사 동참자 개개인의 삶 역시 더 나아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앞서 말씀드렸던 내용과 ‘21세기 약사경’ 내용을 연결시켜서 이야기를 이어가볼까 합니다.약사경 내용 일부를 읽어보겠습니다.
자기만을 내세우고 상대방을 내려보는 미혹문명 내려놓고
상대도 빛나고 자기도 빛나는 깨달음의 밝은 문명 피어나게 하옵소서.
개인만 앞세우고 공동체를 뒤로 하는 미혹문명 내려놓고
공동체도 빛나고 개인도 빛나는 깨달음의 밝은 문명 피어나게 하옵소서.
여기서 이야기되고 있는 자기만을 내세우고 상대방을 내려보는 사고방식, 개인만 내세우고 공동체를 배제하는 사고방식을 소위 미혹문명의 사고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내용을 압축해서 한마디로 요약하면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사고방식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거의 모든 문제가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라고 하는 사고방식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그런 사고방식을 가직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충돌하니까 서로에 대한 불신·분노·불안·공포가 생기고 그것으로 인해 고통 받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미혹문명을 넘어서 상대도 빛나고 자신도 빛나는, 또는 개인도 빛나고 공동체도 빛나는 삶을 살아보자고 제안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도 빛나고 나도 빛나고, 개인도 빛나고 공동체도 빛나는 삶이 실제 삶이 되도록 하는 것은 어렵겠습니까, 어려울 것이 없겠습니까? (대답: 어려워요) 만약 이것이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려운 일이라면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미 미혹문명의 사고방식으로 인해서 너무나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것을 벗어나자고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해결방법 또한 복잡하고 어렵다면 굳이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달리 이야기하면 ‘부처님이 굳이 깨달을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이야기도 됩니다. 부처님이 깨달아서 ‘이렇게 하면 해볼 만해’하고 가르쳐 준 것을 우리가 ‘깨달음의 문명’이라는 말로 실천해 보고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어렵다고 한다면, 너무 복잡해서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을 할 필요가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만일결사도 괜한 짓을 하는 것이고, 약사경도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이 깨달음의 문명. 소위 말해서 ‘너도 빛나고 나도 빛나고 개인도 빛나고 공동체도 빛나라’는 사고방식을 우리가 경험했던 한반도 역사 상황과 연결시켜보겠습니다. 그러면 ‘좌익도 빛나고 우익도 빛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물로 좁혀서 예를 들면 ‘이승만도 빛나고 김일성도 빛나라’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우리 민족의 희망찬 미래를 위해서 이승만은 우익의 길을 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김일성은 좌익의 길을 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서로 충돌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부처님의 팔정도 사유방식으로 이 문제를 다뤘다고 한다면, 즉 중도의 방식으로 이 문제를 다뤘으면 어땠을까요?
우리 민족의 희망찬 미래를 위해서 좌익의 내용 중에 좋은 것이 있으면 갖다 쓰고 우익의 내용 중에서도 좋은 것이 있으면 갖다 쓰면 됩니다. 이렇게 더불어함께 우리의 미래를 희망차게 만들어냈다고 한다면 어떠했겠습니까? 그런 것을 ‘좌익도 빛난다. 우익도 빛난다. 이승만도 빛난다. 김일성도 빛난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말이 되는 것 같습니까, 안 되는 것 같습니까? 말이 되죠. 어떻게 보면 너무나 평범하고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매우 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조금만 주의 기울이면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방식으로 좌익과 우익이 충돌해서 동족상잔의 비극과 분단의 비극이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길은 절대 쉬운 길이 아닙니다. 쉬운 길이 아닐 뿐만 아니라 답이 되는 길이 아닙니다. 정말로 어렵게 가더라도 그 길이 답이 된다고 한다면 한번 가볼 만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해 보니 답이 안 되지 않습니까? 답이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린 구태의연하게 그 방식을 지금까지 답습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진보진영은 진보진영대로 보수진영은 보수진영대로, 여당은 여당대로 야당은 야당대로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관찰한 바로는 만약 부처님이 가르쳐준 대로 중도·연기 사유방식으로 이 문제를 다루면, 다루는 과정이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울 필요가 없습니다. 또는 한쪽 혹은 서로가 고통 받는 부작용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너도 빛나고 나도 빛나고 이쪽도 빛나고 저쪽도 빛나고 개인도 빛나고 공동체도 빛나는 답이 나오게 됩니다. 답이 된다면 좀 어렵더라도 가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난 이런 확신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싸워서 이기는 방식, 싸워서 승부를 내는 방식에 바치는 노력의 반만 들여도 중도적 사유방식으로 문제를 풀 수 있다고 봅니다. 너도 빛나고 나도 빛나게 하는 중도적 사유방식으로 이 문제를 다루어 나가면 싸워서 이기는 방식으로 문제를 다루는데 바치는 노력의 50%만 해도 된다고 봅니다. 실제 제가 해보면 그렇습니다. 싸우는데 쓰는 노력의 50%만 해도 충분히 가능합니다.그런데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문제를 다루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해보지도 않고 괜히 지레 겁먹고 시도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건 너무 이상적이야, 비현실적이야, 복잡해, 어려워 등의 이유를 대며 제대로 해보지도 않고 있습니다. 제 경험은 그렇습니다.
바람직한 불교, 답이 되는 불교
앞서 이야기한 내용은 ‘바람직한 불교를 해보자’라고 하는 말로도 요약할 수 있을 겁니다. 또 한 가지는 ‘새로운 길을 여는 새로운 방식의 불교를 해보자’는 것입니다. 너무 어렵고 복잡한 불교 말고, 보통의 상식을 가진 사람이 조금만 진지하게 관심 갖고 접근하면 알 수 있는 바람직한 불교를 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함께할 수 있는 새로운 불교, 답이 되는 불교가 되도록 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만든 몇 개의 자료가 있습니다. 첫 번째가 ‘중도로 본 본래부처와 동체대비’라는 제목으로 만들어진 ‘붓다로 살자 발원문’입니다. 두 번째가 ‘21세기 약사경’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대표적인 것이 ‘생명평화백대서원 절명상’입니다.오늘은 ‘나도 빛나고 너도 빛나고, 개인도 빛나고 공동체도 빛나고, 좌익도 빛나고 우익도 빛나라’라는 것이 실현되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함께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고귀한 인간의 탄생
‘붓다로 살자 발원문’ 내용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붓다로 살자 발원문’대로 살면 삶이 바로 그렇게 됩니다. 이것을 전통적인 교리 언어로 좁혀서 이야기하면, ‘팔정도 사유방식으로 하면 바로 삶이 그렇게 된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또는 대승불교적으로 확대하면 보현십대행원방식으로 하면 그렇게 된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또는 육바라밀, 혹은 십바라밀 사유방식으로 살면 너도 빛나고 나도 빛나고 우리 모두 함께 빛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그런 깨달음의 문명이 실현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붓다로 살자 발원문’ 이야기를 잠깐 해보겠습니다.
본래붓다인 나는 자연과 사람을
고귀하게 맞이하여 말하고 행동하겠습니다.
이 구절 가지고 한번 생각해보죠.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것을 발원문에서는 ‘자연과 사람’이라는 말로 요약했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관계를 떠나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관계를 떠나서는 태어나는 것도 불가능하고 살아가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나 홀로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나 홀로 행복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럴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을 제대로 봐야 합니다. 이 구절을 가지고 이야기를 조금 더 진전시켜보겠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상대하는데 고귀하게 맞이하여 말하고 행동하면 어떻게 됩니까? 누군가를 고귀하게 맞이하고 고귀하게 말하고 고귀하게 행동하는 순간 어떻게 되나요?
첫 번째, 자기 자신이 고귀한 인간이 됩니다. 사람은 행위 하는 대로 만들어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우리에게 준 최고의 선물입니다. 행위 하기만 하면 틀림없이 그런 존재가 됩니다. 그것은 장좌불와를 하고 안 하고 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만일결사를 하는지 여부와도 관계없습니다. 용맹정진 하는 것과도 관계없습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 고귀하게 맞이하고 고귀하게 말하고 행동하기만 하면 즉각 그 사람은 고귀한 사람이 됩니다.그것은 빛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누가 빛나는 일입니까? 내가 빛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해도 해도 안 된다고 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고정관념 때문이고, 그 관념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그런 결론을 내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기만 하면 틀림없습니다.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했는데도 안 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거짓말하면 즉각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거짓말을 했는데 그 사람은 전생에 복이 많아서 거짓말해도 거짓말쟁이 안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아무리 복이 많은 사람도 거짓말하면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너무나 단순 명료한 내용인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조금만 주의 기울여서 정리하면 불교는 정말로 명쾌한 가르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각 이루어지고, 즉각 효과 있는 가르침입니다. 전생을 이야기할 필요도 없고 내생을 이야기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야기를 조금 더 진전시켜 보겠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고귀하게 맞이하고 말하고 행동을 했습니다. 그러면 나는 즉각 고귀한 사람이 되고, 내가 빛나게 됩니다. 그런데 누군가로부터 고귀하게 맞이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대접을 받은 사람은 어떨까요? 그런 행위를 받은 사람도 좋지 않겠습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고귀한 대접을 받은 것이지 않습니까? 고귀한 대접을 받으니까 당연히 받는 사람도 좋을 겁니다. 스스로 뿌듯하지 않겠습니까? 누군가가 나를 고귀한 인간으로 대해주면 스스로 뿌듯하고 기쁘죠.
거기에 무슨 시간이 간격이 있습니까? 10년이 걸리겠습니까, 100년이 걸리겠습니까? 즉각 이루어집니다. 지금 고귀하게 행위 했는데 10년 뒤에 고귀한 사람이 될까요? 아니지 않습니까. 고귀한 대접을 받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고귀한 대접을 받으면 찡그리고 있던 사람도 바로 얼굴이 활짝 펴지지 않겠습니까?우리는 이 정도 효과를 보면 만족해야 합니다. 이것을 넘어서서 더 구하고 찾는 건 다 부질없는 망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부질없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리고는 이것을 붙잡고 안 된다고 아우성치고 있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부처님이 이야기하는 깨달음의 첫 번째 내용입니다. 쓸데없는 망상에 붙잡혀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처라는 망상, 깨달음이라는 망상, 삼매라는 망상, 신통이라는 망상, 전생이라는 망상, 내생이라는 망상. 우리는 온갖 망상들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실제로는 다 이루어지고 있는데 망상으로 인해서 우리가 실패한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착각의 내용을 확신합니다. 이 착각에 대한 확신을 붙잡고 안 된다고 아우성 치고 있는 것입니다, ‘해도 해도 안 돼.’ 이런 바보 같은 짓을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를 발원문에서는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한심하고 한심하도다.
언제나 분주하고 고달프게 소를 타고 소를 찾고 있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만 이야기하고 있는가?
안타깝고 안타깝도다.어리석음과 착각에 빠져 붓다인 사람이 중생 노릇하고 있네
.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자기가 잘난 척 한 것인데 결과는 그렇게 된 것입니다. 자기가 잘난 척해서 한 건데 그런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부처님의 수행법
부처님 생애를 보면, 세속을 버리고 출가한 다음 세 가지 수행을 합니다. 첫 번째는 선정수행을 합니다. 그리고는 곧 스승이 이야기 한 선정의 경지에 도달합니다. 그런 경지에 도달했지만 자기가 찾고 싶은 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은 깊은 선정에 도달했기 때문에 신통력도 생기고, 황홀한 기쁨을 체험하는 신비 체험도 할 수 있게 됩니다. 초인적인 능력이 생기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초인적인 능력, 신통력, 황홀한 기쁨은 싯다르타가 찾고 싶은 답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길을 버립니다.
그리고는 두 번째 스승을 만나서 지도를 받습니다. 이때는 첫 번째 스승한테 배운 것보다 더 높은 경지에 올라갑니다. 부처님이 도달한 경지는, 선정의 경지로서는 최고 수준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비상비비상처 선정이라고 합니다. 그 경지에서는 더 초월적인 능력이 생깁니다. 전생도 보고 내생도 볼 수 있습니다. 하늘을 날아다니기도 하고 물 위를 걸어 다니기도 하고 예언도 할 수 있습니다. 온갖 것을 다 할 수 있으므로 사람들이 깜짝깜짝 놀랍니다. 그리고 황홀한 기쁨도 경험합니다, 싯다르타는 신비한 체험, 불가사의한 능력, 황홀한 기쁨은 누리지만 찾고 싶은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다음은 고행수행을 합니다. 고행수행도 최고의 수준으로 합니다. 죽게 될지도 모르는 극단적인 고행수행을 했지만 거듭거듭 고통스러울 뿐 찾고 싶은 답이 나오지 않음으로 고행수행도 버리고 떠납니다.
이제 더 이상의 길은 없습니다. 죽으나 사나 스스로 묻고 답을 찾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다음에는 부처님이 스스로 생각한 방식으로 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방식으로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모릅니다. 경전에 기록되어 있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설명하고는 있지만 그 부분이 사실 시원하지가 않습니다. 부처님 생애를 다룬 많은 책들을 봐도 마찬가지고 여러 경전을 살펴봐도 그런 혼란스러움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세계적인 석학들이 쓴 부처님 생애를 보아도 그런 내용이 정리가 안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혼란이 답습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오늘날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하는 우리들에게도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당신 방식으로 수행을 해서 깨달았는데 정확하게 그것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해석되고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깨달음 이후, 당신이 깨달은 내용을 사람들에게 전법 할 때 본인의 수행방법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오비구를 만나서 처음으로 전법을 할 때 당신이 했던 수행 방식을 무엇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가?
‘향락주의는 문제가 있다. 그 길은 가면 안 되는 길이다. 성자들도 좋아하지 않는 길이다. 그리고 고행주의의 길도 가선 안 되는 길이다. 잘못된 길이다. 우리의 스승들인 성자와 현자들도 그 길은 좋아하지 않는다. 이 두 길은 버려야 한다. 그래서 나는 그 두 개의 극단적인 길을 버렸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 두 개의 극단을 버리고 나는 중도의 길을 통해서 연기법이라고 하는 진리를 깨달았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향락주의’ 바로 보기
부처님은 본인이 버린 두 극단의 길을 ‘향락주의’와 ‘고행주의’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때 대부분의 불교인들이 향락주의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오욕락(五欲樂)을 추구하고 마음껏 누리는 것을 향락주의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오욕락(五欲樂)이 무엇입니까? 재색식명수(財色食名睡). 재산(財), 사랑(色), 이성을 말합니다. 식(食)은 맛있는 것을 실컷 먹는 것입니다. 명(名)은 명예. 수(壽)는 무병장수. 이 5가지가 인간이 추구하고 실현하고 싶은 대표적인 욕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욕망을 추구하고 욕망을 충족하면서 사는 것을 향락주의라는 말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향락주의라는 말을 그렇게 해석합니다.
부처님 생애의 맥락에서 보면 출가하기 전에 향락주의의 삶을 살았습니다. 오욕락을 마음껏 누리며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싯다르타가 찾고자 하는 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향락주의를 버리고 출가합니다. 어디에도 오욕락 탐하는 것을 수행론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출가하기 전에 이미 향락주의에는 답이 없다고 버렸습니다. 따라서 오욕락을 추구하고, 누리는 것을 불교수행론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출가 이후에 석가모니가 경험한 수행은 세 가지입니다. 선정수행 두 가지와 고행수행. 그런데 여기서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당신 방식으로 수행을 합니다. 그것을 훗날 ‘중도수행’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중도수행’은 당신 방식으로 수행을 해서 답을 찾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출가 전에는 주로 물질적으로, 육체적으로 뭔가를 추구했다고 한다면 출가 이후에는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것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신적인 또는 심리적인 신비한 체험, 초월적 능력, 불가사의하고 황홀한 기쁨을 ‘향락주의’로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볼 때 향락주의라는 말은 출가 이전에 오욕락을 추구하고 오욕락을 누리는 삶을 설명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나는 그런 점에 대해서 문제 제기를 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문명을 여는 단순하고 평범한 길
우리가 붓다의 뜻에 일치하도록 하고자 하는 뜻에서 중도의 사유방식으로 붓다로 살자 발원문을 만들었습니다. 나름대로는 모든 불교를 참고해서 현대인들에게 도움 되도록 현대적 언어로 내용을 단순화해서 만든 발원문입니다. ‘붓다로 살자 발원문’대로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을 하면, 너도 빛나고 나도 빛나고 이쪽도 빛나고 저쪽도 빛나고 개인도 빛나고 공동체도 빛나는 등 소위 ‘깨달음의 문명’으로 표현되는 삶이 실현되고 생활화됩니다. 이렇게 접근하면 너도 빛나고 나도 빛나는 깨달음의 문명이 삶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결코 어려운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정도는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누군가를 상대할 때 ‘기왕이면 좋은 마음으로 상대할 거야. 평화롭게 말할 거야’하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따뜻하게 할 거야. 너그럽게 할 거야. 겸손하게 할 거야. 좀 더 의젓하게 할 거야.’ 이런 마음을 먹는 것이 불가능한 일입니까? 나는 조금만 노력하면 이 정도는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깨달음의 문명’이라고 하면 거창한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꼼꼼히 따져보면 매우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길입니다. 또는 평범하고 단순 명료한 길이라고 이야기해도 무방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지금 깨달음의 문명을 현실화시키고자 하는 마음으로 만일결사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지난 100일기도를 회향하고 새로운 100일기도를 입재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조금 더 진지하게 해보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은 ‘붓다로 살자 발원문’과 ‘21세기 약사경’을 연결시켜서 깨달음의 문명이 삶이 되도록 만드는 구체적인 내용과 방식에 대해 말씀드려보았습니다. 그 방법은 다른 데 특별하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늘상 독송하는 발원문 그 자체가 깨달음의 문명이 삶이 되도록 만드는 구체적인 내용이고 방식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렇게 정리하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붓다로 살자 발원문과 21세기 약사경을 연결시켜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화쟁(和爭)의 관점으로 고래싸움 생기지 않게
끝으로는 여전히 우리가 현실을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인가에 따라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달라진다는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그동안은 주로 옳고 좋다는 쪽의 편을 들어서 문제를 바라보고 다루어 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보니까 거의 다 공통적으로 ‘나는 옳고 너는 틀렸어’라는 사고방식으로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귀결이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서로 충돌하고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편들고 싸는 방식으로는 비명소리가 나오는 악순환이 계속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답이 되는 길을 만들어 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부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실을 정확하게 관찰하고, 현실에 입각해서 우리가 정확한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바람직한 길을 모색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봤을 때 우리의 현실은 고래 싸움에 새우들이 등터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지는 것이 문제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이쪽 고래 편을 들면 되겠습니까? 저쪽 고래 편을 들면 되겠습니까? 이쪽 고래 편을 들면 어떻게 됩니까? 이쪽 고래 덩치가 더 커지겠죠. 저쪽 고래 편을 들면 저쪽 고래 덩치가 더 커집니다. 덩치가 커지면 더 큰 싸움이 되고 더 많은 새우들의 등이 터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결론적으로는 너도 빛나고 나도 빛나는 길, 이쪽도 빛나고 저쪽도 빛나게 하는 길이 답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제를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고 접근해야 할 것인가? 저는 ‘고래 싸움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일이 뭘까?’, 또는 ‘고래 싸움이 생겼더라도 싸움을 해결하는 방법은 뭘까?’, ‘어떻게 하면 고래 싸움을 잘 해결할 수 있을까?’하는 관점에서 접근을 해야 된다고 봅니다.
그런 관점으로 접근하고, ‘이렇게 하면 답이 된다’라고 제시한 것이 원효스님의 ‘화쟁사상’입니다. 원효스님의 화쟁사상은 현실을 보는 관점이 다릅니다. 그러니까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관점에 서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관점은 네 생각이고 네 주장일 뿐이야. 실제는 그렇지 않아’라고 하는 것이 중도적 반응입니다. 또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대로, 한반도 우리 민족의 희망찬 미래를 위한다는 대의를 놓고 중도적 관점에서 접근해 본다면 어느 편인 것과 상관없이 필요한 부분을 가져다 쓰면 됩니다. 이쪽 것이 대의가 실현되는 데 도움 된다면 그것을 갖다 쓰고 저쪽 것이 도움 된다면 저쪽 것을 갖다 쓰면 됩니다. 그렇게 해서 대의가 실현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화쟁적 사고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귀결점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손에 손잡고 만일결사!
이런 내용들 생각해보면 어떻습니까? 미혹문명을 넘어 깨달음의 문명 길을 가보자고 하는 만일결사의 길을 한번 가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끼리만 해서 되겠습니까? 이것이 현실이 되려면 힘이 있어야 합니다. 힘이 없으면 현실이 되지 않습니다. 좋은 이야기로만 끝납니다. 현실에 이르도록 하려면 같은 문제의식을 가진 도반들, 인연들과 손에 손을 잡는 노력도 함께 해야 합니다. 그래야 만일결사를 제대로 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아무쪼록 오늘 이 자리가 그런 마음을 더 크게 내는 자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또 보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할 수 있도록 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자는 말씀을 드리면서 제 이야기를 정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