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또다시 동안거를 맞이하게 됐습니다. 간단하게 법문해 달라고 요구하니까 가급적이면 시간 안에 법문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안거 주제는 ‘어울림도 빛나고 다름도 빛나라’입니다. 실상사에서 모색하는 불교가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적 언어로는 어떻게 표현 되고 있는가? ‘빛나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평소 우리가 안 해본 일들이다 보니 쉽지 않습니다. 어렵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제 방식으로 아주 단순화시켜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우리는 이런저런 조건 속에서 생각도 하고 말도 하고 행동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생각을 하거나 어떤 말을 하거나 또는 어떤 행동을 할 때, 스스로에게 매 순간순간마다 자문자답, 스스로 물어 보면 됩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과연 나에게 괜찮은 일인가? 상대에게도? 우리 모두에게도 괜찮은 일인가?’ 스스로의 물음에 ‘그렇지’하고 수긍될 수 있도록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나에게도 너에게도 우리에게도 괜찮게 됩니다. ‘빛나라’를 다른 말로 표현해 보면 ‘괜찮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괜찮다’는 내용을 우리는 ‘빛나라’라는 말로 더 멋있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만 주의 기우려 생각해보면 우리가 하는 불교가 결코 복잡하고 어려운 내용이 아닙니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조금만 주의 기울여서 접근하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스스로에게 묻고 스스로 수긍 되도록 답을 할 수 있으면 됩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나에게 너에게 우리에게 괜찮은 것인가?’ 이 물음에 긍정적인 답이 되도록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그것 자체가 수행이고 그것 자체가 깨달음 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 말고 다른 특별한 수행이 있고 그것 말고 다른 특별한 깨달음의 내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우리가 평소 스스로에게 그렇게 한다는 이야기는 정신 바짝 차리고 산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묻고 답이 되도록 한다는 이야기는 ‘늘 정신 차리고 산다’ 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정신 차리고 단단히 마음먹고 ‘그래, 이렇게 생각해야지. 이렇게 말해야지. 이렇게 행동해야지. 그래야 나도 너도 우리 모두에게도 괜찮게 되지’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매우 단순하지만 이 내용 안에 불교공부와 수행이 모두 들어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빛나라’라고 하는 내용이 우리가 평소 흔하게 사용하는 내용이 아니다 보니 거리감을 느끼고 또는 불편함도 느끼고 어렵게도 느끼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단순화시켜 보면 지금 설명 드렸던 내용 정도로 생각해도 충분히 괜찮다고 봅니다.
자교오종(藉敎悟宗)
오늘은 최근에 제가 중요하게 착안하고 모색하고 있는 것을 공유해볼까 합니다. 불조의 말씀 중에 보면 자교오종(藉敎悟宗)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내용을 뜻으로 풀면 ‘부처님 말씀에 의지해서 부처님이 가르쳐주고자 하는 종지(宗旨)를 깨닫는다’라는 이야기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의지해서 종지를 깨닫는 것이 불교공부고 불교수행이다’라는 말입니다. 불조께서 하신 말씀은 그러한데, 그 내용에 대한 해석과 설명이 뜻하지 않게 왜곡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 이 왜곡된 해석과 설명이 우리를 모순과 혼란에 빠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그 부분에 대해 자기 관점과 입장을 잘 정리해서 접근할 수 있도록 이야기 해볼까 하는 마음입니다.
중도, 관찰사유, 여실지견, 연기‧무아
제가 일생 동안 천착한 것은 ‘부처님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부처님은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셨는가?’, ‘그 삶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났는가?’하는 것입니다. 저는 모든 불교는 부처님 삶에서부터 비롯되기 때문에 부처님 자체를 잘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 나름대로 ‘아, 인간 붓다의 삶이 이런 것이었구나. 그리고 그 내용에 입각해서 설명한 것이 교리구나’하고 이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부처님 삶으로 나타나고 있는 내용을 토대로 ‘부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내용이 뭘까?’하고 요약을 해보면 첫째는 ‘중도’라는 개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관찰사유’입니다. 이것을 반야심경에서는 조견(照見)이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조견(照見)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고 할 때의 ‘조견’입니다. ‘관찰사유’는 잘 관찰 사유하면 ‘여실지견(如實知見)’, 실상이 잘 드러나게 되고 실상을 잘 알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여실지견’은 있는 사실을 잘 관찰하면 그 사실이 사실대로 잘 드러나게 되고, 있는 사실을 사실대로 잘 이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관찰사유해 보니까 여실지견하게 되고, 여실지견한 것을 교리적으로 표현한 것이 연기, 무아라는 개념입니다.부처님이 많은 말씀을 하고 있지만 그 뜻을 잘 짚어서 압축해 보면 이런 개념으로 요약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아야 할 내용 또는 깨달아야 할 내용, 우리가 삶으로 살아야 할 내용은 중도, 관찰사유, 여실지견, 연기‧무아입니다.
연기, 무아는 ‘실상’을 개념화한 것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관찰해서 파악된 내용이 실상입니다. 그 실상을 개념적으로 표현한 것이 ‘연기’, ‘무아’ 입니다. 이 내용을 당시 인도 사유방식과 연결시켜보면 ‘브라만 신’이라고 하는 세계관의 사유방식에 대한 처방으로 연기라는 개념의 약을 썼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트만’이라고 하는 인간관의 사유방식에 대한 처방으로 무아라는 개념이 쓰였다고 봅니다.따라서 중도, 관찰사유, 여실지견, 연기, 무아 이런 개념들로 정리하면, 당시 인도 사회를 지배했던 신념 체계들에 대한 처방이 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삼종반야
중국을 거쳐서 들어온 불교 중에 세 가지 반야, 즉 ‘3종 반야’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문자반야, 관조반야, 실상반야라는 개념으로 쓰고 있습니다. 자교오종, ‘부처님 말씀에 의지해서 종지를 깨닫다’라고 하는 관점과 그런 사유에 잘 맞는 내용이 이 삼종반야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문자반야’라는 것은 ‘지혜로운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문자반야라는 말로 표현되는 내용을 더 풀면, ‘지혜로운 부처님 말씀’, 또는 ‘지혜로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풀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관조반야와 실상반야에 대해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언어로 표현된 부처님의 가르침을 문자반야라고 한다면 그 문자반야를 현실에 직접 적용해서 관조반야, ‘실제는 뭐야?’ 하고 관찰사유해보면 그 실상이 잘 드러나게 됩니다. 잘 드러나기 때문에 여실지견, 사실을 사실대로 잘 알게 됩니다. 잘 관찰사유하면 여실지견, 사실을 사실대로 잘 이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문자반야를 실제에 연결시켜 관찰사유하는 것은 관조반야라고 하고 관찰사유에 의해 잘 드러난 내용을 실상반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니까 브라만이 아니고 연기더라.’라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또 다른 이야기와 연결시켜서 삼종반야 사고방식을 더 구체화시켜보려 합니다. 저는 초기불교 안에서도 얼마든지 같은 내용으로 해석될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해석을 열어놓고 하면 가능하다고 봅니다. 문자만 붙잡고 한다면 불가능한 일이지만, 문자 속에 들어있는 뜻으로 보면 초기불교나 대승불교나 선불교나 다를 것이 없다고 봅니다.대승불교의 인간상으로 우리가 대승보살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대승보살의 삶을 나타낸 개념이 많이 있습니다. 많은 개념들 중에서 일상생활 속에서 직접 경험한 대표적인 개념이 ‘처염상정(處染常淨)’이 아닐까 싶습니다. 연못은 더럽지 않습니까? 가장 낮은 곳에 있는 것이 연못입니다. 그러다보니 연못에는 온갖 똥오줌, 피고름 등 더러운 것들이 모여듭니다. 그래서 연못은 더럽고 혼탁한 곳입니다. 그런데 연꽃은 그 더러운 곳에 뿌리내리고도 더러움에 오염되지 않고 아름답게 피어나지 않습니까? 더러운 곳에 뿌리 내리고 있지만 그 더러움에 오염되지 않고 청정하고 아름다운 꽃, 향기로운 꽃으로 활짝 피어나는 것이 연꽃입니다. 더러운 곳에 있지만 그 더러움에 오염되지 않고 향기롭고 아름답게 피어나는 연꽃처럼 삶을 사는 사람을 보살이라고 합니다. ‘처염상정’이라는 말 자체는 앞에 설명한 내용 중 ‘문자반야’에 해당합니다. 보살은 어떤 삶을 사는가? 더러운 곳에 있지만 더러움에 오염되지 않고 아름다움을 활짝 피워내는 삶을 산다는 말입니다. 깨끗한 곳에서 아름답게 피어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중국 쪽에선 이상적인 인간상을 난초나 매화에 많이 비유합니다. 그런데 불교는 그런 종류의 꽃으로 비유하지 않습니다. 더러운 곳에 있지만 더러움에 오염되지 않고 깨끗하게 피어나는 연꽃에 비유합니다. 두 사유방식은 많이 다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불교 스스로가 불교의 특징을 잘 나타냈던 ‘처염상정’의 사유방식보다 난초, 매화의 사유방식으로 경도되는 경향이 많이 뒤섞여 있습니다. 우리가 불교사유 방식을 제대로 해석해내고 현실 속에 제대로 응용 될 수 있도록 하지 못한 폐단이 그렇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염상정’이라고 표현되어진 문자반야를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현실로 가지고 와서 생각해 보고자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우리는 ‘관찰사유’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현실에서 이 말이 진짜 맞는지 직접 대면해서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문자반야를 현실로 가지고 와서 직접 경험 가능하도록 검토해보자’는 것이 ‘관조반야’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지금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곳 중에서 연못과 연꽃이라는 개념에 해당되는 현장이 있다면 어디일까요? 실상사 천왕문 앞에 가면 연밭이 있습니다. 우리가 ‘처염상정’이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는 문자반야를 실제 상황에 연결시켜서 관찰사유할 수 있는 현장이 바로 그 연밭입니다.연밭을 보면 어떻습니까? 거기에는 온갖 것들이 몰려듭니다. 실상사는 좋은 환경 속에 있다 보니 연못이 심하게 더럽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더러울 수밖에 없는 조건에 놓여 있는 연못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연꽃이 그 더러움에 오염되지 않고 맑고 향기롭게 활짝 피어나기 때문에 우리가 연꽃의 아름다움을 만끽 할 수 있습니다.
‘처염상정’은 ‘문자반야’라는 하나의 개념입니다. 이 문자반야의 구체적 현장은 연못의 연꽃입니다. 더러움이 모여 있는 연못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나 그 더러움에 오염되지 않고 맑고 향기롭게 활짝 피어있는 연못과 연꽃이 ‘처염상정’이라는 말에 해당되는 현장입니다. 더러운 곳에 있지만 더러움에 오염되지 않고 맑게 향기롭게 피어난다는 것이 말장난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매우 구체적으로 우리가 직접 경험 가능한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잡하고 어려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제대로 다루기만 하면 즉각 경험되고 즉각 확인되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을 우리 현실로 가지고 오면 어떨까? 매 순간순간 ‘이렇게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이 과연 나에게도 너에게도 우리 모두에게도 괜찮은 것일까?’라고 묻고, 그리고 거기에 답이 되도록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제가 볼 때는 ‘처염상정’이라는 개념으로 표현된 내용을 생활화하는 길이라고 봅니다.백장암은 스님들 중심으로 모여 사는 곳입니다. 거기에 살고 있는 스님들이 간화선을 하든 위빠사나를 하든 대승불교를 하든 초기불교를 하든 관계없이 매 상황마다, 매 순간마다 생각 하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에 대해 성찰해보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스스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말하는 것이, 행동하는 것이 과연 나에게도 너에게도 우리에게도 괜찮은 것인가?’하고 자문자답하면 됩니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화합하지 말라고 해도 화합하게 된다고 봅니다. 화합하는 대중을 수행대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경전에서는 ‘화합하지 않는 대중은 수행대중이 아니다’라고까지 이야기합니다.자교오종,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해서 종지를 깨닫다’라는 말을 3종 반야, 즉 문자반야, 관조반야, 실상반야의 사고방식이 실제 삶이 될 수 있도록 지금 설명하는 것처럼 정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교오종과 3종반야가 삶이 되려면
이야기는 단순해 보이지만 그런 삶이 생활화되도록 하려면 우선 늘 바짝 정신 차려야 됩니다. 넋 놓고 있으면 다 어긋나게 됩니다. 두 번째는 그렇게 살기 위해서 단단히 마음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본인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나에게, 너에게, 우리 모두에게 괜찮겠다 싶은 것을 실제 실천하도록 애써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는가? 바로 직접 경험 가능한 결과가 나타납니다. 누구한테 물어볼 것도 없고, 책 뒤적거려 볼 것도 없고,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지식 가지고 ‘맞나? 틀렸나?’ 할 것도 없습니다. 나에게도 괜찮고 너에게도 괜찮고 우리 모두에게 괜찮은 결과로 나타나는 것을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해서 도움 되도록 표현한 또 다른 내용이 있다면 무엇일까? 제가 생각하건데 ‘인간은 행위 하는 대로 되는 존재’가 아닐까 합니다. 나에게 괜찮게, 너에게도 괜찮게, 우리 모두에게도 괜찮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어떻게 될까요? 나에게도 괜찮은 내용, 너에게도 괜찮은 내용, 우리 모두에게도 괜찮은 내용이 바로 이루어집니다. 직접 이루어지니까 바로 경험되는 것입니다. 복잡하게 물어보고 따져보고 자료 찾아서 검토하지 않아도 바로바로 알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중도, 관찰사유, 여실지견의 사유방식을 생활화하는 곳이 절입니다. 그렇게 살겠다고 마음먹고 절에 와 사는 사람들이 출가 붓다행자, 재가 붓다행자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 이웃인 마을사람들도, 또 우리와 인연이 있는 모든 사람들도 함께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이런 사유 방식이 기본이 되면, 그다음에는 각자 수행방법은 자기가 좋아하는 걸 선택해서 하면 됩니다. 간화선을 하든 위빠사나를 하든 대승불교를 하든 선불교를 하든 교학불교를 하든 상관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사유방식을 기본으로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 사유방식을 기본으로 한 후에 자기가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선택해서 수행하면 됩니다. 수행방법은 각각 다 다르다 하더라도 함께 공부하고 수행하는 데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비록 수행 형식은 다르더라도 스스로 ‘이렇게 하는 것이 나에게 괜찮은가, 너에게 괜찮은가, 우리에게 괜찮은가’하는 물음에 답이 되도록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면 얼마든지 화합해서 함께 사는 것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오히려 그렇게 해야 우리가 바람직한 불교수행을 한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부처님 삶, 평범 속 신비
이렇게 접근해 보니까 부처님이라는 인물은 너무나 인간적인 인물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은 이런 부분이 혼란스러웠습니다. 부처님 생애와 관련된 자료를 보면 깨달음 이전에는 분명 매우 천재적이지만 매우 인간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깨달음 이후를 보면 ‘이 사람이 인간인가, 신인가? 나하고 같은 사람인가, 아닌가?’하는 것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 많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은 주로 초인적이고 초월적인 내용들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용을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경전의 표현을 우리가 잘못 이해하고 잘못 해석해서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대로 이해하고 제대로 해석해 보면 부처님은 결코 나와 다른 신적인 존재거나 초월적인 능력을 갖고 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팔정도 사유방식으로 좁혀서 보면,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을 수 있도록 말을 하는 분입니다. 말 한마디로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존재라면 굳이 신통력을 빌리지 않아도 사람들을 얼마든지 감화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신비하고 불가사의하고 다른 사람들은 감히 할 수 없고 오로지 부처님만 가능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인간적인 분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부처님은 깨달음 이후에도 너무나 인간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이웃집 아저씨, 좋은 친구, 좋은 스승 같은 분이었습니다. 얼마든지 인간적으로 다가가 대화 나누고 관계 맺을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나도 부처님처럼 성장하게 되는 그런 인물입니다. 부처님이 접근하기 어렵거나 우리와는 완전히 내용적으로 격이 다른 인물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 여러분들이 다 알고 있는 금강경의 첫 장면입니다.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이라고 이야기하죠. ‘때가 되자 가사를 챙겨 입고 마을로 걸어가서 밥을 얻어 돌아왔다. 밥 먹고 바로 정리 정돈했다. 준비된 자리에 앉아서 대중들과 법담을 나누었다.’ 바로 이 장면입니다. 이 장면에 경전에서 이야기하는 신비, 기적, 불가사의, 심오함, 오묘함, 거룩함, 위대함, 완성됨과 같은 모든 것이 다 들어있습니다. 부처님이 35살에 깨달은 이후 80세에 돌아가실 때까지 일상적으로 그런 생활을 하셨습니다. 그 이상의 신비도, 기적도 없습니다. 너무나 평범한, 너무나 인간적인 일상의 삶 속에 신비도 있고 기적도 있고 불가사의도 있습니다. 또 부처님은 대단히 거룩하신 분, 대단히 심오하신 분, 위대하신 분, 오묘하신 분이라고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내용이 평범한 일상 속에 다 담겨 있습니다. 이런 것을 간단히 요약하면 ‘평범함 속에 비범함이 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범함을 버리고 떠나서 비범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평범함 그 자체에 비범함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것을 알고, 그렇게 살아야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평범함, 그 속에 신비가 있다, 불가사의가 있다, 기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평범함을 떠나 신비가 있고 불가사의가 있고 기적이 있고 그런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불교는 평범 그 자체에 비범함이 있음을 잘 알고 살면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본인의 삶을 걸고 인생의 답을 찾은 후 우리에게 알려준 내용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상 속, 혹은 평범함 속에 깃들어 있는 비범함을 잘 알고 살면 그것으로 삶은 충분히 풍부해질 수 있습니다. 그 삶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습니다. 넘치는 만족감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을 너무나 명백한 이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 부처님의 삶이고 그분의 말씀이라고 정리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번 겨울 안거 때는 백장암과 실상사 식구들, 또 신도님과 마을 분들도 앞서 제가 말씀드렸던 대로 마음을 먹고 살아 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나에게 괜찮을까, 상대에게 괜찮을까, 또 우리 모두에게도 괜찮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묻고, 스스로 괜찮다고 답이 되도록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한철 살림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부처님이 가장 좋아하는 한 철 살림을 살았다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 한철이 되도록 함께 잘 지내기를 바라면서 제 이야기를 정리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동안거결제법문
나에게, 너에게, 모두에게 괜찮은 삶이면 충분하다
‘빛나라’ 수행
안녕하세요? 또다시 동안거를 맞이하게 됐습니다. 간단하게 법문해 달라고 요구하니까 가급적이면 시간 안에 법문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안거 주제는 ‘어울림도 빛나고 다름도 빛나라’입니다. 실상사에서 모색하는 불교가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적 언어로는 어떻게 표현 되고 있는가? ‘빛나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평소 우리가 안 해본 일들이다 보니 쉽지 않습니다. 어렵게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제 방식으로 아주 단순화시켜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우리는 이런저런 조건 속에서 생각도 하고 말도 하고 행동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생각을 하거나 어떤 말을 하거나 또는 어떤 행동을 할 때, 스스로에게 매 순간순간마다 자문자답, 스스로 물어 보면 됩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과연 나에게 괜찮은 일인가? 상대에게도? 우리 모두에게도 괜찮은 일인가?’ 스스로의 물음에 ‘그렇지’하고 수긍될 수 있도록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나에게도 너에게도 우리에게도 괜찮게 됩니다. ‘빛나라’를 다른 말로 표현해 보면 ‘괜찮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괜찮다’는 내용을 우리는 ‘빛나라’라는 말로 더 멋있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만 주의 기우려 생각해보면 우리가 하는 불교가 결코 복잡하고 어려운 내용이 아닙니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조금만 주의 기울여서 접근하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스스로에게 묻고 스스로 수긍 되도록 답을 할 수 있으면 됩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나에게 너에게 우리에게 괜찮은 것인가?’ 이 물음에 긍정적인 답이 되도록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그것 자체가 수행이고 그것 자체가 깨달음 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 말고 다른 특별한 수행이 있고 그것 말고 다른 특별한 깨달음의 내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우리가 평소 스스로에게 그렇게 한다는 이야기는 정신 바짝 차리고 산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묻고 답이 되도록 한다는 이야기는 ‘늘 정신 차리고 산다’ 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정신 차리고 단단히 마음먹고 ‘그래, 이렇게 생각해야지. 이렇게 말해야지. 이렇게 행동해야지. 그래야 나도 너도 우리 모두에게도 괜찮게 되지’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매우 단순하지만 이 내용 안에 불교공부와 수행이 모두 들어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빛나라’라고 하는 내용이 우리가 평소 흔하게 사용하는 내용이 아니다 보니 거리감을 느끼고 또는 불편함도 느끼고 어렵게도 느끼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단순화시켜 보면 지금 설명 드렸던 내용 정도로 생각해도 충분히 괜찮다고 봅니다.
자교오종(藉敎悟宗)
오늘은 최근에 제가 중요하게 착안하고 모색하고 있는 것을 공유해볼까 합니다. 불조의 말씀 중에 보면 자교오종(藉敎悟宗)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내용을 뜻으로 풀면 ‘부처님 말씀에 의지해서 부처님이 가르쳐주고자 하는 종지(宗旨)를 깨닫는다’라는 이야기입니다. ‘부처님 말씀에 의지해서 종지를 깨닫는 것이 불교공부고 불교수행이다’라는 말입니다. 불조께서 하신 말씀은 그러한데, 그 내용에 대한 해석과 설명이 뜻하지 않게 왜곡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 이 왜곡된 해석과 설명이 우리를 모순과 혼란에 빠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그 부분에 대해 자기 관점과 입장을 잘 정리해서 접근할 수 있도록 이야기 해볼까 하는 마음입니다.
중도, 관찰사유, 여실지견, 연기‧무아
제가 일생 동안 천착한 것은 ‘부처님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부처님은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셨는가?’, ‘그 삶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났는가?’하는 것입니다. 저는 모든 불교는 부처님 삶에서부터 비롯되기 때문에 부처님 자체를 잘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 나름대로 ‘아, 인간 붓다의 삶이 이런 것이었구나. 그리고 그 내용에 입각해서 설명한 것이 교리구나’하고 이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부처님 삶으로 나타나고 있는 내용을 토대로 ‘부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내용이 뭘까?’하고 요약을 해보면 첫째는 ‘중도’라는 개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관찰사유’입니다. 이것을 반야심경에서는 조견(照見)이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조견(照見)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고 할 때의 ‘조견’입니다. ‘관찰사유’는 잘 관찰 사유하면 ‘여실지견(如實知見)’, 실상이 잘 드러나게 되고 실상을 잘 알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여실지견’은 있는 사실을 잘 관찰하면 그 사실이 사실대로 잘 드러나게 되고, 있는 사실을 사실대로 잘 이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관찰사유해 보니까 여실지견하게 되고, 여실지견한 것을 교리적으로 표현한 것이 연기, 무아라는 개념입니다.부처님이 많은 말씀을 하고 있지만 그 뜻을 잘 짚어서 압축해 보면 이런 개념으로 요약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아야 할 내용 또는 깨달아야 할 내용, 우리가 삶으로 살아야 할 내용은 중도, 관찰사유, 여실지견, 연기‧무아입니다.
연기, 무아는 ‘실상’을 개념화한 것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관찰해서 파악된 내용이 실상입니다. 그 실상을 개념적으로 표현한 것이 ‘연기’, ‘무아’ 입니다. 이 내용을 당시 인도 사유방식과 연결시켜보면 ‘브라만 신’이라고 하는 세계관의 사유방식에 대한 처방으로 연기라는 개념의 약을 썼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트만’이라고 하는 인간관의 사유방식에 대한 처방으로 무아라는 개념이 쓰였다고 봅니다.따라서 중도, 관찰사유, 여실지견, 연기, 무아 이런 개념들로 정리하면, 당시 인도 사회를 지배했던 신념 체계들에 대한 처방이 가능하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삼종반야
중국을 거쳐서 들어온 불교 중에 세 가지 반야, 즉 ‘3종 반야’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문자반야, 관조반야, 실상반야라는 개념으로 쓰고 있습니다. 자교오종, ‘부처님 말씀에 의지해서 종지를 깨닫다’라고 하는 관점과 그런 사유에 잘 맞는 내용이 이 삼종반야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문자반야’라는 것은 ‘지혜로운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문자반야라는 말로 표현되는 내용을 더 풀면, ‘지혜로운 부처님 말씀’, 또는 ‘지혜로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풀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관조반야와 실상반야에 대해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언어로 표현된 부처님의 가르침을 문자반야라고 한다면 그 문자반야를 현실에 직접 적용해서 관조반야, ‘실제는 뭐야?’ 하고 관찰사유해보면 그 실상이 잘 드러나게 됩니다. 잘 드러나기 때문에 여실지견, 사실을 사실대로 잘 알게 됩니다. 잘 관찰사유하면 여실지견, 사실을 사실대로 잘 이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문자반야를 실제에 연결시켜 관찰사유하는 것은 관조반야라고 하고 관찰사유에 의해 잘 드러난 내용을 실상반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니까 브라만이 아니고 연기더라.’라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또 다른 이야기와 연결시켜서 삼종반야 사고방식을 더 구체화시켜보려 합니다. 저는 초기불교 안에서도 얼마든지 같은 내용으로 해석될 수 있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해석을 열어놓고 하면 가능하다고 봅니다. 문자만 붙잡고 한다면 불가능한 일이지만, 문자 속에 들어있는 뜻으로 보면 초기불교나 대승불교나 선불교나 다를 것이 없다고 봅니다.대승불교의 인간상으로 우리가 대승보살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대승보살의 삶을 나타낸 개념이 많이 있습니다. 많은 개념들 중에서 일상생활 속에서 직접 경험한 대표적인 개념이 ‘처염상정(處染常淨)’이 아닐까 싶습니다. 연못은 더럽지 않습니까? 가장 낮은 곳에 있는 것이 연못입니다. 그러다보니 연못에는 온갖 똥오줌, 피고름 등 더러운 것들이 모여듭니다. 그래서 연못은 더럽고 혼탁한 곳입니다. 그런데 연꽃은 그 더러운 곳에 뿌리내리고도 더러움에 오염되지 않고 아름답게 피어나지 않습니까? 더러운 곳에 뿌리 내리고 있지만 그 더러움에 오염되지 않고 청정하고 아름다운 꽃, 향기로운 꽃으로 활짝 피어나는 것이 연꽃입니다. 더러운 곳에 있지만 그 더러움에 오염되지 않고 향기롭고 아름답게 피어나는 연꽃처럼 삶을 사는 사람을 보살이라고 합니다. ‘처염상정’이라는 말 자체는 앞에 설명한 내용 중 ‘문자반야’에 해당합니다. 보살은 어떤 삶을 사는가? 더러운 곳에 있지만 더러움에 오염되지 않고 아름다움을 활짝 피워내는 삶을 산다는 말입니다. 깨끗한 곳에서 아름답게 피어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중국 쪽에선 이상적인 인간상을 난초나 매화에 많이 비유합니다. 그런데 불교는 그런 종류의 꽃으로 비유하지 않습니다. 더러운 곳에 있지만 더러움에 오염되지 않고 깨끗하게 피어나는 연꽃에 비유합니다. 두 사유방식은 많이 다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불교 스스로가 불교의 특징을 잘 나타냈던 ‘처염상정’의 사유방식보다 난초, 매화의 사유방식으로 경도되는 경향이 많이 뒤섞여 있습니다. 우리가 불교사유 방식을 제대로 해석해내고 현실 속에 제대로 응용 될 수 있도록 하지 못한 폐단이 그렇게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염상정’이라고 표현되어진 문자반야를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현실로 가지고 와서 생각해 보고자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을 우리는 ‘관찰사유’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현실에서 이 말이 진짜 맞는지 직접 대면해서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문자반야를 현실로 가지고 와서 직접 경험 가능하도록 검토해보자’는 것이 ‘관조반야’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지금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곳 중에서 연못과 연꽃이라는 개념에 해당되는 현장이 있다면 어디일까요? 실상사 천왕문 앞에 가면 연밭이 있습니다. 우리가 ‘처염상정’이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는 문자반야를 실제 상황에 연결시켜서 관찰사유할 수 있는 현장이 바로 그 연밭입니다.연밭을 보면 어떻습니까? 거기에는 온갖 것들이 몰려듭니다. 실상사는 좋은 환경 속에 있다 보니 연못이 심하게 더럽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더러울 수밖에 없는 조건에 놓여 있는 연못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연꽃이 그 더러움에 오염되지 않고 맑고 향기롭게 활짝 피어나기 때문에 우리가 연꽃의 아름다움을 만끽 할 수 있습니다.
‘처염상정’은 ‘문자반야’라는 하나의 개념입니다. 이 문자반야의 구체적 현장은 연못의 연꽃입니다. 더러움이 모여 있는 연못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나 그 더러움에 오염되지 않고 맑고 향기롭게 활짝 피어있는 연못과 연꽃이 ‘처염상정’이라는 말에 해당되는 현장입니다. 더러운 곳에 있지만 더러움에 오염되지 않고 맑게 향기롭게 피어난다는 것이 말장난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매우 구체적으로 우리가 직접 경험 가능한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잡하고 어려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제대로 다루기만 하면 즉각 경험되고 즉각 확인되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을 우리 현실로 가지고 오면 어떨까? 매 순간순간 ‘이렇게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이 과연 나에게도 너에게도 우리 모두에게도 괜찮은 것일까?’라고 묻고, 그리고 거기에 답이 되도록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제가 볼 때는 ‘처염상정’이라는 개념으로 표현된 내용을 생활화하는 길이라고 봅니다.백장암은 스님들 중심으로 모여 사는 곳입니다. 거기에 살고 있는 스님들이 간화선을 하든 위빠사나를 하든 대승불교를 하든 초기불교를 하든 관계없이 매 상황마다, 매 순간마다 생각 하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에 대해 성찰해보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스스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말하는 것이, 행동하는 것이 과연 나에게도 너에게도 우리에게도 괜찮은 것인가?’하고 자문자답하면 됩니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화합하지 말라고 해도 화합하게 된다고 봅니다. 화합하는 대중을 수행대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경전에서는 ‘화합하지 않는 대중은 수행대중이 아니다’라고까지 이야기합니다.자교오종,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해서 종지를 깨닫다’라는 말을 3종 반야, 즉 문자반야, 관조반야, 실상반야의 사고방식이 실제 삶이 될 수 있도록 지금 설명하는 것처럼 정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교오종과 3종반야가 삶이 되려면
이야기는 단순해 보이지만 그런 삶이 생활화되도록 하려면 우선 늘 바짝 정신 차려야 됩니다. 넋 놓고 있으면 다 어긋나게 됩니다. 두 번째는 그렇게 살기 위해서 단단히 마음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본인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나에게, 너에게, 우리 모두에게 괜찮겠다 싶은 것을 실제 실천하도록 애써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는가? 바로 직접 경험 가능한 결과가 나타납니다. 누구한테 물어볼 것도 없고, 책 뒤적거려 볼 것도 없고,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지식 가지고 ‘맞나? 틀렸나?’ 할 것도 없습니다. 나에게도 괜찮고 너에게도 괜찮고 우리 모두에게 괜찮은 결과로 나타나는 것을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해서 도움 되도록 표현한 또 다른 내용이 있다면 무엇일까? 제가 생각하건데 ‘인간은 행위 하는 대로 되는 존재’가 아닐까 합니다. 나에게 괜찮게, 너에게도 괜찮게, 우리 모두에게도 괜찮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어떻게 될까요? 나에게도 괜찮은 내용, 너에게도 괜찮은 내용, 우리 모두에게도 괜찮은 내용이 바로 이루어집니다. 직접 이루어지니까 바로 경험되는 것입니다. 복잡하게 물어보고 따져보고 자료 찾아서 검토하지 않아도 바로바로 알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중도, 관찰사유, 여실지견의 사유방식을 생활화하는 곳이 절입니다. 그렇게 살겠다고 마음먹고 절에 와 사는 사람들이 출가 붓다행자, 재가 붓다행자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 이웃인 마을사람들도, 또 우리와 인연이 있는 모든 사람들도 함께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이런 사유 방식이 기본이 되면, 그다음에는 각자 수행방법은 자기가 좋아하는 걸 선택해서 하면 됩니다. 간화선을 하든 위빠사나를 하든 대승불교를 하든 선불교를 하든 교학불교를 하든 상관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사유방식을 기본으로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 사유방식을 기본으로 한 후에 자기가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선택해서 수행하면 됩니다. 수행방법은 각각 다 다르다 하더라도 함께 공부하고 수행하는 데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비록 수행 형식은 다르더라도 스스로 ‘이렇게 하는 것이 나에게 괜찮은가, 너에게 괜찮은가, 우리에게 괜찮은가’하는 물음에 답이 되도록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면 얼마든지 화합해서 함께 사는 것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오히려 그렇게 해야 우리가 바람직한 불교수행을 한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부처님 삶, 평범 속 신비
이렇게 접근해 보니까 부처님이라는 인물은 너무나 인간적인 인물이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은 이런 부분이 혼란스러웠습니다. 부처님 생애와 관련된 자료를 보면 깨달음 이전에는 분명 매우 천재적이지만 매우 인간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깨달음 이후를 보면 ‘이 사람이 인간인가, 신인가? 나하고 같은 사람인가, 아닌가?’하는 것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 많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은 주로 초인적이고 초월적인 내용들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용을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경전의 표현을 우리가 잘못 이해하고 잘못 해석해서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대로 이해하고 제대로 해석해 보면 부처님은 결코 나와 다른 신적인 존재거나 초월적인 능력을 갖고 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팔정도 사유방식으로 좁혀서 보면,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을 수 있도록 말을 하는 분입니다. 말 한마디로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존재라면 굳이 신통력을 빌리지 않아도 사람들을 얼마든지 감화시킬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신비하고 불가사의하고 다른 사람들은 감히 할 수 없고 오로지 부처님만 가능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인간적인 분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부처님은 깨달음 이후에도 너무나 인간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이웃집 아저씨, 좋은 친구, 좋은 스승 같은 분이었습니다. 얼마든지 인간적으로 다가가 대화 나누고 관계 맺을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나도 부처님처럼 성장하게 되는 그런 인물입니다. 부처님이 접근하기 어렵거나 우리와는 완전히 내용적으로 격이 다른 인물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 여러분들이 다 알고 있는 금강경의 첫 장면입니다.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이라고 이야기하죠. ‘때가 되자 가사를 챙겨 입고 마을로 걸어가서 밥을 얻어 돌아왔다. 밥 먹고 바로 정리 정돈했다. 준비된 자리에 앉아서 대중들과 법담을 나누었다.’ 바로 이 장면입니다. 이 장면에 경전에서 이야기하는 신비, 기적, 불가사의, 심오함, 오묘함, 거룩함, 위대함, 완성됨과 같은 모든 것이 다 들어있습니다. 부처님이 35살에 깨달은 이후 80세에 돌아가실 때까지 일상적으로 그런 생활을 하셨습니다. 그 이상의 신비도, 기적도 없습니다. 너무나 평범한, 너무나 인간적인 일상의 삶 속에 신비도 있고 기적도 있고 불가사의도 있습니다. 또 부처님은 대단히 거룩하신 분, 대단히 심오하신 분, 위대하신 분, 오묘하신 분이라고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내용이 평범한 일상 속에 다 담겨 있습니다. 이런 것을 간단히 요약하면 ‘평범함 속에 비범함이 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범함을 버리고 떠나서 비범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평범함 그 자체에 비범함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것을 알고, 그렇게 살아야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평범함, 그 속에 신비가 있다, 불가사의가 있다, 기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평범함을 떠나 신비가 있고 불가사의가 있고 기적이 있고 그런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불교는 평범 그 자체에 비범함이 있음을 잘 알고 살면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본인의 삶을 걸고 인생의 답을 찾은 후 우리에게 알려준 내용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상 속, 혹은 평범함 속에 깃들어 있는 비범함을 잘 알고 살면 그것으로 삶은 충분히 풍부해질 수 있습니다. 그 삶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습니다. 넘치는 만족감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을 너무나 명백한 이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 부처님의 삶이고 그분의 말씀이라고 정리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번 겨울 안거 때는 백장암과 실상사 식구들, 또 신도님과 마을 분들도 앞서 제가 말씀드렸던 대로 마음을 먹고 살아 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나에게 괜찮을까, 상대에게 괜찮을까, 또 우리 모두에게도 괜찮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묻고, 스스로 괜찮다고 답이 되도록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한철 살림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부처님이 가장 좋아하는 한 철 살림을 살았다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 한철이 되도록 함께 잘 지내기를 바라면서 제 이야기를 정리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