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지난번엔 ‘잠을 잘 못 잤다’, 또는 ‘잠을 좀 잘 잤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요즘의 일상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이기도 합니다만, 비록 그렇긴 하지만 저는 오늘 기분 좋게 이 자리에 왔습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아직 정리는 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직간접적으로 이야기해왔던 것 중에 나를 위해서, 너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해서 꼭 필요한 내용이 ‘나의 불교수행론’이라는 이야기를 해 왔습니다. 그 내용을 우리 사부대중 공동체에 적용시키면 ‘사부대중 공동체의 불교수행론’, 종단에 적용시키면 ‘조계종단의 불교수행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행에 관심이 있는 전체 대중들을 상대로 하면 ‘모든 사람들의 불교수행론’, 더 나아가서는 ‘21세기 인류사회의 불교수행론’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염원대로 여래의 본의에 부합하는 불교 수행론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렇게도 생각해보고 저렇게도 생각해 보고 이렇게도 이야기해보고 저렇게도 이야기해보고 있습니다. 또 이런 자리에서 저런 자리에서 그런 이야기들을 계속 해오고 있습니다. ‘나의 불교수행론’이 ‘아, 이런 것이 진짜로 부처님이 뜻한 불교 수행론이야’라고 생각되는 내용으로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나에게, 너에게, 한국사회, 전 인류에게 다 적용해도 희망의 길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 역사 속에서 태어난 불교수행론
우리는 사부대중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함께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가지고 있는 것,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존재의 참모습, 자신의 참모습을 형상화한 생명평화무늬입니다. 나에게, 너에게, 대한민국 사람들, 인류사회 구성원들 모두에게 ‘그래, 그것이 우리가 갈 길이야. 그 길을 가야 해. 그 길을 가기만 하면 틀림없이 희망이 꽃이 피게 돼 있어’하고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생명평화무늬라고 생각합니다.
생명평화무늬의 의미는 진지하게 귀 기울이고 대화를 나눈다면 누구나 다 공감하고 수긍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생명평화무늬에 담겨 있는 내용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자기 등불로 삼고 가야 될 내용입니다. 그렇게 가기만 하면 분명 스스로 찾고 싶은 답을 찾기도 하고 만들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 다 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지금 말씀드렸던 내용들이 더 설득력을 가지려면 경전적 근거, 또는 부처와 옛 조사 스님들이 하신 말씀과도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그렇게 연결했을 때도 ‘아, 그렇구나.’ 하고 수긍이 될 수 있도록 해 보려하고 있습니다. 한반도 우리 역사 속에서 태어나고 살아간 인물, 또는 그 인물에 의해서 만들어진 내용을 가지고 나의 불교수행론, 우리 불교수행론, 인류의 수행론이 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자원은 없는가? 저는 당연히 많이 있다고 봅니다. 나아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우선 대중화를 위해서는 단순화시키고 압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렇게 보았을 때 어떤 내용들이 있을까 하고 천착해보았습니다. 하나는 원효스님의 ‘귀일심원 요익유정(歸一心源 饒益有情)’이 있습니다. 또 ‘일심동체’, ‘동체대비’와 같은 말은 화엄경 쪽에서 많이 사용됩니다. 표현은 약간씩 다르지만 뜻하는 바 내용은 다르지 않습니다.두 번째는 의상스님에 의해서 제시되어진 내용으로 깨달음의 노래 ‘법성게’, 세 번째는 고려시대에 나옹선사의 발원문으로 전해져 오고 있는 행선축원입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청매조사가 있습니다. 실상사를 포함해서 ‘칠암자길’이라 불리는 길이 있습니다. 칠암자길의 제일 마지막 사찰이 도솔암입니다. 그곳이 청매조사가 계셨던 곳이라고 합니다. 청매조사에 의해서 만들어진 ‘십무익송(十無益頌)’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원효스님의 저술은 양이 방대합니다. 그중에서 핵심적인 것, 대표적인 내용만 뽑으면 ‘귀일심원 요익유정’ 또는 ‘일심동체’, ‘동체대비’를 뽑을 수 있습니다. 시로 만들어진 의상스님의 ‘법성게’는 화엄경 내용을 압축적으로 아주 잘 요약해 놓았습니다. 그 내용을 제대로 알면 화엄경을 다 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네 가지를 잘 풀고 잘 해석하고 잘 설명해내면, ‘그래, 이런 세계관, 이런 정신, 이런 관점, 이런 입장에서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그것이 불교수행의 전부이지. 또 그렇게 하면 본인이 찾고 싶은 답이 이루어지지’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고 판단을 했습니다.
불교는 인도에서 시작되어서 중국을 거쳐 한반도까지 흘러들어왔습니다. 주로 경전을 통한 불조의 말씀들로 전해져 왔습니다. 경전에서는 이런 내용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잘 찾아보면 압축적으로 표현된 내용이 없지 않습니다. 또 문장이 길더라도 ‘압축하면 이런 내용이 될 수 있겠다’고 판단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부처님의 ‘탄생게’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一切皆苦 我當安之)’ 사실 이 한마디에 팔만사천 불교가 다 들어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또 다른 예로 법성게가 있습니다. 법성게는 화엄경을 압축한 내용이기 때문에 화엄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 담고 있습니다. 다 담아서 압축시켜 놓았기 때문에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중도적으로 읽으면 충분히 바로 이해·〮실현 가능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제가 앞서 오늘 기분 좋게 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아침까지 나름대로 법성게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묻고 이렇게 설명하면 법성게가 저 하늘에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보고 듣고 또는 밥 먹고 잠자고 똥 누는 일상 속의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구나’하는 윤곽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로서는 매우 기분이 좋았습니다. 상당히 긴 세월을 붙잡고 천착해 왔지만 윤곽이 잘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새벽에 ‘이 정도면 윤곽이 잡히겠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어서, 또 이런 이야기를 함께하는 대중들과 나눌 수 있게 되어서 기분 좋게 이 자리에 왔습니다. 똑같은 관점에서 계속 작업하고 있는 것이 또 하나 있는데 바로 인간 붓다의 삶을 그려보는 것입니다. 신이 된 부처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서의 부처. 또 마음만 먹으면 ‘아, 부처란 그런 사람이구나. 그렇다면 나도 부처일 수 있겠네. 나도 부처이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도록 부처의 삶을 해석하고 싶었습니다. 깨달음의 삶을 살았던 붓다의 삶을 그렇게 해석하고 설명했으면 좋겠다 싶어서 그 작업도 하고 있습니다.원래는 같이 공부하는 차원에서 ‘인간 붓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오늘 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법성게가 윤곽이 잡혔기 때문에 오늘은 법성게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제 나름대로 다섯 개의 질문을 가지고 법성게를 풀고 해석을 해 보았습니다. 그렇게 접근을 해보니, 깨달음의 삶을 살았던 부처님의 일생을 대승불교적으로 묘사한 경전이 화엄경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깨달음으로 일생을 살았던 부처님의 삶을 대승불교적으로 설명해낸 것이 화엄경이구나’하고 정리가 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화엄경을 30개 구절로 압축해 낸 것이 의상스님의 법성게이기도 합니다. 붓다의 삶과 화엄경이 이렇게 연결되는 것을 보면서 저 스스로도 상당히 놀랐습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법성게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중도로 본 의상의 깨달음 노래, 법성게
법성게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의상스님을 상대로 자문자답하는 형식으로 몇 가지 제목도 붙이고 질문도 해 보았습니다. 그 질문에 따라서 해석하는 형태입니다. 제목을 뭐라고 붙였는가? ‘중도로 본 의상의 깨달음 노래, 법성게.’ 법성게는 ‘깨달음의 노래’라는 이야기입니다. 불교는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될 내용이 법성게로 표현되어 있다고 보면 됩니다. 우리가 깨달아야할 내용이 화엄경으로 설명되어있고 그것을 압축한 것이 법성게입니다. 그래서 법성게를 잘 아는 것이 ‘깨달음’이고, 그 내용을 온전하게 삶으로 살면 그것이 곧 붓다의 삶입니다. 제대로 알고 온전하게 삶으로 살기만 하면 그것이 붓다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다음은 보통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인간적인 물음에 대한 답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이 법성게라면 그 의문에 답이 되도록 하기 위해 물음을 제기하는 방식입니다.
총론: 중도적으로 사는 것이 답
법성게는 평범한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다른 사람 이야기가 아니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본인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해 답을 하고 있습니다. 법성게가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도록 ‘지금 여기 한 사람 그대가 있네.’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대’는 여러분들 각자 자기 자신입니다. 이것을 나한테 적용하면 나 자신에 해당됩니다.지금 여기 한 사람 그대가 있네. 여기에 무슨 물음을 던졌는가? 부처님 생애도 그렇고 제가 살아봐도 그렇고 사람들하고 이야기해 봐도 그렇고 살다보면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어떤 질문에 부닥치게 됩니다. 온갖 질문에 부닥칩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정치 사회적으로 굉장히 불안한데 이럴 때도 질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온갖 질문들을 압축하고 단순화시키면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이 됩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도대체가 인생은 어떻게 생겨먹은 존재야?’, ‘인생이 뭐길래 윤석열은 그 모양이야?’, ‘인생이 뭔데 이재명은 그 모양이야?’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삶을 경험 해가는 과정 속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온갖 물음들이 있습니다. 이런 물음들을 압축하고 압축해서 요약하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질문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법성게는 바로 그 물음에 대한 답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법성게가 천년도 넘는 옛날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단순한 옛날 물건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생생한 오늘의 내용입니다. 법성게는 시간을 가로지른 질문들에 총론으로 압축해서 답을 합니다.
‘인생이 뭐야?’ 그 다음은 당연히 ‘어떻게 살아야 돼?’하는 질문이 따라옵니다. 이 질문들에 대해서 법성게에서는 총론적으로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법성원융무이상 제법부동본래적 무명무상절일체 증지소지비어경(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無名無相絶一切 證智所知非餘境)’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네 구절입니다. 이것은 화엄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네 구절로 압축한 것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한지’와 같이. 이것을 우리 말로 풀면 ‘그의 본래 참모습’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 각자가 나의 진짜 참 모습이 어떤 존재인지 아십니까? 우리는 거의 나의 참모습은 모르고 가짜 모습만 알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머릿속에 있는 지식은 거의 다 그렇습니다. 진짜 모습을 모르고 가짜 모습만 알고 있습니다. 법성게에서는 그의 본래 참 모습에 대해 뭐라고 답하고 있을까요? 한문으로 된 것을 풀어보겠습니다.
온 우주 두루 어울려 한 모습이네.
세월이 흘러도 언제나 그 모습이네.
본래 정해진 이름도 분리된 모습도 따로 없네.
여기까지가 우리의 참모습에 대한 묘사입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또는 나는 누구인가? 어떤 존재인가? 이런 물음에 대한 답입니다. 나의 참모습은 ‘온 우주 두루 어울려 한 모습이네.’ 우리가 평소에 ‘내가 곧 우주고 우주가 곧 나다’ 이런 표현을 하곤 했습니다. 생명평화무늬를 설명할 때마다 이야기했습니다. 이런 것과 연결되는 내용입니다.과거에도 이런 모습이었고 현재에도 이런 모습이었고 미래에도 그런 모습이다. 그래서 이 내용을 법성게에서는 ‘그의 본래 참모습은 온 우주 두루 어울려 한 모습이네. 세월이 흘러도 언제나 그 모습이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세월이 흐르면 그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린 가짜의 나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온 우주 두루 어울려 한 모습이네. 세월이 흘러도 언제나 그 모습이네. 본래 정해진 이름도 분리된 모습도 따로 없네.’
‘본래 정해진 이름도 있고 분리된 내 모습도 따로 있어’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면 그것은 가짜 뉴스입니다. ‘그건 가짜 뉴스지, 사실은 그렇지 않아’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본래 정해진 이름도 분리된 모습도 따로 없네. 그런데 진짜 모습은 이 가짜 뉴스의 사고방식으로는 절대 알 수가 없습니다. 천하를 좌우하는 지식이라 하더라도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천재도 이 가짜 뉴스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하는 한 참모습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관념적이다’, ‘분별이다’, ‘전도몽상이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그러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을 마지막 구절이 답해주고 있습니다. 오직 중도의 지혜로 알 뿐, 다른 길 있지 않네. 이것이 네 구절 중 마지막 구절입니다. 중도, 법성게에선 ‘증지소지비어경(證智所知非餘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증’자는 여러 가지로 해석이 됩니다. 주로 많이 강조되는 것이 궁극적 깨달음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많이 강조됩니다. 증명할 ‘증(證)’자는 ‘직접 증명되는 지혜로만 알 수 있지. 분별심으로는 알 수가 없어.’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직접 경험하는 지혜로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절대 알 수가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더 쉽게 풀면, ‘겪어보면 알아’ 하는 이야기입니다. ‘증’자에 들어 있는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저는 이 내용을 불교 교리적 언어로 연결시킬 필요가 있다고 해서 제 나름대로 천착을 해 보았습니다. ‘중도의 지혜로 알 뿐 다른 길 있지 않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훨씬 더 타당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법성게의 처음 ‘인생이 뭐야?’, ‘어떻게 살아야 해?’ 하는 두 물음에 대한 답으로써 제시되고 있는 겁니다. 첫 번째 물음 ‘인생은 뭐야?’라고 했을 때 ‘그의 본래 참 모습은 온 우주 두루 어울려 한 모습이네. 세월이 흘러도 언제나 그 모습이네. 본래 정해진 이름도 분리된 모습도 따로 없네.’ 여기까지가 ‘인생은 뭐야? 나는 누구야? 어떤 존재야?’라고 하는 물음에 대한 답입니다.
그다음 ‘오직 중도의 지혜로 알 뿐 다른 길이 있지 않네’는 ‘어떻게 살아야 돼?’에 대한 답입니다. ‘온 우주 두루 어울려 한 모습이네. 세월이 흘러도 언제나 언제나 그 모습이네. 본래 정해진 이름도 분리된 모습도 따로 없네.’ ‘그래, 나라고 하는 존재가 그런 존재라면 그다음에 어떻게 살아야 돼?’하는 질문에 ‘오직 중도의 지혜로 알 뿐 다른 길이 있지 않네.’ 오직 중도적으로 다뤄야 되지, 중도적으로 살아야 되지, 다른 길에서는 답이 나오지 않아. 이렇게 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도가 답이다. 어떻게 살아야 돼? 중도적으로 살아야 돼. 이런 이야기입니다. 여기까지가 총론에 해당이 됩니다.
내가 곧 우주고 우주가 곧 나다
그다음은 각론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내용을 더 좀 세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같은 내용인데 세세하게 풀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각론에서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그의 본래 참모습은 지극히 심오하고 미묘하고 아름답네.
항상 자신을 고집함 없이 인연 따라 온갖 모습 이루네.
참 모습은 한 그물코에 일체, 일체의 그물코에 하나가 깃들었네.
한 그물코 그대로 일체, 일체 그물코 그대로 하나이네.
한 티끌 그물코가 온 우주의 그물코를 품어 안네.
온갖 먼지 그물코들도 어느 하나 빠짐없이 그러하네.
여기까지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세세한 설명인 셈입니다. 그것을 한마디로 압축해서 우리가 늘 사용하는 언어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내가 곧 우주고 우주가 곧 나다.’ 또 다른 예로는 언제 어디에서나 끊임없이 인연 화합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인연 화합으로 활동하고 있다. 분리 독립돼서 존재하지 않고 고정불변하게 존재하지 않고 온통 인연 화합으로만 이루어지고 있다. 인연 화합으로 활동하고 있다.
순간이 곧 영원이고 영원이 곧 순간
그다음엔 시간적 의미로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참모습 그 자리는 영원의 시간 그대로 지금 한순간이네.
한순간 그대로 끝없는 영원이네.
과거 현재 미래의 9세와 현재 일념의 10세도 그대로 함께 있네.
하지만 언제나 혼란 없이 각각의 시간이 질서 정연하네.
앞에는 공간적인 입장에서 존재가 뭐야?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이라면 지금은 시간적 입장에서 답을 한 것입니다. ‘그 존재는 시간적으로는 어떤 존재인데?’하는 물음에 대한 답입니다. 영원의 시간 그대로 지금 한 순간이네. 한 순간 그대로 끝없는 영원이네. 3세의 9세와 10세의 현재도 그대로 함께 있네. 하지만 언제나 혼란 없이 각각의 시간이 질서정연하네.영원이 그대로 순간이요. 순간이 그대로 영원이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매우 혼란스러워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막연하게 생각하면 혼란스러워 보입니다. 그렇지만 내용을 제대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내용을 제대로 본다’는 것은 ‘중도적으로 본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교리적으로 표현해서 ‘중도적으로 보면’, 내용을 사실적으로 확인해 보면 ‘질서정연하고 혼란스럽지 않다’는 말입니다. 혼란스러운 건 잘 모르고 생각하는 것이고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하나를 조목조목 확인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생사도 열반도 이치도 현상도 하나
앞에는 총론적으로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하는 물음에 대한 답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뒷부분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각론적 설명을 했습니다.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해? 어떻게 살면 되는 거야?’하는 물음에 대한 경전 설명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공간적 설명, 시간적 설명이 있은 다음,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돼?’라는 물음을 묻고 있습니다. ‘그래, 그런 존재라면, 한 그물코에 전체 그물코가 들어 있고 전체 그물코에 한 그물코가 들어 있는 존재, 순간이 영원이고 영원이 순간인 그런 존재라면, 그런 부처는 어떻게 살아야 해?’라는 질문입니다.이 질문에 의상스님이 답합니다. ‘그 내용은 다 경전에서 말하고 있어 잘 들어봐.’ 그러면서 설명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한문으로는 초발심시변정각 생사열반상공화 이사명연무분별 십불보연대인경(初發心時便正覺 生死涅槃常共和 理事冥然無分別 十佛普賢大人境)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이렇게 풀었습니다.
깨달음으로 살겠다고 하는 첫 마음 그대로 정각이네(初發心時便正覺).
깨닫기 이전에는 생사가 따로 있고 열반이 따로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조금 더 강조점을 두면 ‘제대로 알고 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막연하게 짐작하고 책에 있는 지식을 머리에 담아놓고 그것에 맞춰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사실대로 관찰하고 사실을 사실대로 확인한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알고 보니까 초발심시변정각 생사열반상공화. 제대로 알고 보니까 참 모습 그 자리에는 늘상 생사도 열반도 함께 있네. 따로따로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린 생사는 버리려 하고 열반은 얻으려고 합니다. 왜냐? 생사는 나쁜 거라고 생각하고 열반은 좋은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잘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대로 알고 보면 생사와 열반은 한 덩어리입니다. 한 손의 손바닥과 손등처럼. 하나는 생사고 하나는 열반이라고 하면 뭘 버리고 뭘 선택하실래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제대로 알고 보면 우리가 기존에 알던 것과 너무 많이 다릅니다. 참 모습 그 자리엔 늘상 생사도 열반도 함께 있네.
이어서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숨은 이치와 드러난 현상도 한몸 되어 구별할 수 없네. 궁극적 진리라고 하는 것하고 드러난 허망한 세상이라고 하는 것. 어쩌면 열반은 궁극적인 가치고 세상은 허망한 가치죠. 궁극적 가치는 좋은 것이고 허망한 가치는 보잘것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뒤의 내용도 같은 내용입니다. 숨은 바탕의 이치도 드러난 현상도 한 몸 되어 구별할 수 없네. 궁극적 가치라고 할 수 있는 진리도, 허망하다고 이야기하는 현상도 모두 한 덩어리다. 분리될 수 없다. 구분되지 않는다.
숨은 바탕과 드러난 모습도 한몸 되어 구별할 수 없네.
그 상태는 깨달음 행자인 붓다와 보현보살의 몫이네.
우리의 분별하는 사고방식으로 또는 머리에 들어 있는 가짜 뉴스의 사고방식으로는 실상를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중도적으로 봐야(중도적으로 다뤄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상태는 깨달음 행자인, 즉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붓다행자인 붓다와 보현보살의 몫이네‘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즉 ’이렇게 알고 이렇게 살아야 돼‘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인생이 뭐야? 어떻게 살아야 돼?’하는 것에 대해 총론과 각론으로 나누어 설명을 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 경전에서는 ‘이렇게 알고 이렇게 살면 돼’라고 설명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했습니다. 그것이 ‘십불보연 대인경.’ 그것을 ‘그렇게 살아간 사람’ 즉 ‘중도적으로 살아간 사람’ 이렇게 풀었습니다. 본래의 참 모습 그 상태는 ‘생사와 열반도 한 덩어리요. 보이지 않는 이치와 현상도 한 덩어리다’라고 합니다. 그 상태는 지식으로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분별로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중도적으로 해야만 알 수 있습니다. 깨달음의 눈으로 봐야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상태는 깨달음 행자인, 깨달음으로 살고 있는 붓다와 보현보살의 몫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다음 세 번째는 그렇게 살아간 사람에 대한 내용입니다. 초발심시 변정각 생사열반 상공화 이사명연 무분별 십불보연 대인경. ‘이렇게 살면 돼. 열반도 생사도 한 덩어리다. 이치와 현상도 한 덩어리다. 이 사실을 사실대로 알고 거기에 맞게 생각도 하고 말도 하고 행동도 하면 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진정으로 편안해지고 자유로워져.’하나는 좋고 하나는 나쁘다고 하면 우리는 좋은 데도 걸리고 나쁜 데도 걸립니다. 좋은 것에 대해서는 욕심 부리게 되고 나쁜 것에 대해서는 싫어하고 미워하고 화내게 됩니다. 그런데 그 것이 다 한 덩어리라는 사실을 알고 보면 그래야 될 이유가 없어져 버립니다.
이런 것을 ‘붓다로 살자 발원문’에서는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소를 타고 소를 찾고 있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소를 탔으면 소를 탄 줄 알고 잘 부리고 살면 될 텐데 소를 탄 줄 모르니까 소를 부리기는커녕 소를 찾는 일만 하게 됩니다. 소를 찾기 위해서 온 천하를 헤매고 다닙니다. 바깥으로도 헤매고 안으로도 헤매고. 자기가 타고 있는 소가 안으로 들어간다고 나오겠어요, 바깥으로 찾아 헤맨다고 나오겠어요. 그건 안으로 들어가도 나올 수 없고 바깥으로 쫓아다녀도 나올 수가 없어요.그럼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중도, 여실지견. 타고 있다는 사실을 사실대로 아는 것이 답입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부처님은 ‘주의 깊게 관찰 사유해 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또 한 가지는 ‘스승에게 물어봐’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살아간 사람, 보현보살의 몫이네. 이것은 ‘인생이 뭐야? 어떻게 살아야 돼?’하는 물음에 대한 각론적 설명입니다.
일상이 그대로 신비요, 기적이요, 불가사의
그다음에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세 번째는 그렇게 살아간 사람, 생사열반상공화 이사명연무분별(生死涅槃常共和 理事冥然無分別). 이 사실을 제대로 알고 이 내용을 곧이곧대로 잘 살아간 사람이 있나? 그런 사람이 구체적으로 사례가 있는가? 하고 묻는 형태입니다. 그렇게 살아간 사람의 역사적 사례가 있는가? 물으니 의상스님이 ‘그렇지, 있지’하고 답합니다. 능인해인삼매중 번출여의부사의 우보익생만허공 중생수기득이익(能印海印三昧中 繁出如意不思議 雨寶益生滿虛空 衆生隨器得利益)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능인해인삼매중’은 ‘참 모습대로 사는 사람 능인’이라는 뜻입니다.
‘능인(能仁)’은 부처님이 다른 이름입니다. ‘능입(能入)’으로 되어 있는 데도 있고 능인(能仁)으로 되어 있는 데도 있습니다. 능입으로 접근을 하게 되면 교리적으로 복잡한 설명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능인으로 접근을 하게 되면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살았던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훨씬 더 쉽고 명료하게 설명도 가능하고 이해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능인으로 봤습니다.
‘참 모습대로 사는 사람 능인’, 이것을 역사적 인물로 연결시켜서 일반적으로는 어떻게 말하는가? ‘참모습대로 사는 사람 석가모니불’과 같은 말입니다. 참 모습대로 사는 사람 석가모니 불은 한결같이 그 자리에 있네. 그 자리가 어디인가? 해인삼매입니다. 우리 모두는 해인삼매 상태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건 너무나 어려운 이야기이고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이 질문 한번 해보고 갈까 싶네요. 여러분들은 신비와 기적을 좋아하십니까? 안 좋아하십니까? 대체적으로 우리는 신비를 좋아하고 기적을 좋아하고 불가사의를 좋아합니다. 기적이 이루어졌다고 하면 우르르 찾아가서 보기도 하고 안 그렇습니까?
불교도 사실 그런 이야기를합니다. 신비, 기적, 불가사의는 그것이 개인 체험일 수도 있고 누군가가 보여주는 어떤 현상일 수도 있습니다. 또 어디선가 나타난 현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런 건 다 가짜야’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반야심경 언어로 말하면 무지와 착각의 사고방식으로 만들어낸 전도몽상이다. 관념으로 조작해낸 것일 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다 부질없는 거야’, ‘다 허망한 거야’라고 이야기합니다.그렇다면 신비, 기적, 불가사의는 없는 것인가? 부처님과 불조들께서는 어떻게 말씀하고 계십니까? ‘그렇지 않아. 그건 늘 있어.’ 어디에? ‘지금 여기에.’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너라고 하는 존재의 참모습은 그 자체가 기적이고 신비이고 불가사의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보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듣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숨 쉬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걸어 다니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밥 먹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필요에 따라서 잠도 자고 똥도 누고 오줌도 누는 그 자체가 신비고 기적이고 불가사의고 거룩한 일이지 그거 말고 다른 무엇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다 망상이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어떤 것이 좋습니까? 제대로 알기만 하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이 신비고 기적이고 불가사의인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일상적으로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 자체가 신비요, 기적이라면 기적 찾아서 또는 불가사의를 찾아서, 신비를 찾아서 쫓아다닐 필요가 없지않겠습니까? 또 기적을 일으켰네. 기적을 체험했네 하는 사람들 앞에서 기 죽을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얼마나 당당하겠습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무한한 자신감과 자부심을 갖고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대단히 매력적이죠.
참 모습대로 사는 사람 능인은 한결같이 그 자리에 있네.
언제나 그곳에서 신비한 솜씨를 마음껏 발휘하네.
그 솜씨로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보배를 허공 가득 비처럼 내리네.
뭇생명들이 각자 준비한 그릇 만큼 온갖 이익을 얻어가네.
깨달음으로 사는 부처님의 삶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고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돼. 그렇게 살면 만사형통이야’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삶에서는 이것이 주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대표적으로 법문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병에 따른 처방으로서 어마어마한 법문을 합니다. 번뇌병에 시달리고 있는 중생들이 그 번뇌병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어마어마한 양의 법문을 죽는 순간까지 합니다. 그런 내용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고, 그 법문들을 가지고 사람들마다 자기 필요에 따라서 도움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깨달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이렇게 사는 거야. 이렇게 살고 있어. 그렇게 사는 것이 제대로 된 삶이야. 가장 멋있고 아름다운 삶이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해탈, 열반의 길: 부지깽이 삶
그다음에 네 번째, ‘그렇다면 누구나 붓다처럼 살면 되는 건가?’ 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의상스님이 ‘물론.’ 이렇게 답합니다. 물론 법성게에는 이런 말이 없습니다. 법성게가 오늘 우리의 이야기가 되도록 만들기 위해서 이렇게 말을 엮어가고 있는 것입니다.누구나 붓다처럼 살기만 하면 되는 건가? 우리는 의심합니다. 나도 그렇게 살 수 있을까? ‘나 같은 박지범부가’, ‘나처럼 하찮은 인간이’ 우리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 것을 반야심경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전도몽상의 망상을 부리고 있어.’, ‘망상에 빠져 있어.’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누구나 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내용이니까 부처님 가르침이 희망의 메시지라는 이야기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해도 해도 안 돼. 그건 아무나 할 수 없어. 부처만 가능해. 특별한 사람만 가능해. 그런 것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희망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시고행자환본제 파식망상필부득(是故行者還本際 叵息妄想必不得)
무연선교착여의 귀가수분득자량(無緣善巧捉如意 歸家隨分得資糧)
이 내용을 우리 말로 풀면 ‘붓다행하는 그 사람은 언제나 본래의 자리에 돌아가 있네(是故行者還本際).’ 늘 중도의 자리에 서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중도의 자리가 어디겠어요? 늘 지금 여기입니다. 늘 지금 여기에 서 있다. 늘 현장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현장을 떠나지 않는다. 왜? 그 자체가 해인삼매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모르고 살 뿐이다. 알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답이 나온다는 이야기입니다. ‘붓다행하는 한 그 사람은 언제나 본래의 자리에 돌아가 있네.’ 그는 생사도 따로 없고 열반도 따로 없습니다. 너도 따로 없고 나도 따로 없습니다. 온통 다 한 몸이고 한 마음이고 한 생명입니다. 이렇게 실상은 원만구족한 존재입니다. 실상을 분리시켜서 보면 다 허망하고 불완전한 존재고 형편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내가 곧 우주고 우주가 곧 나라고 하는, 이렇게 연결되어져 있는 실상을 제대로 알고 보면 다 원만구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알고 살면 굳이 망상을 쉬려고 할 필요도 없고 특별한 것을 얻으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망상을 버리기 위해서 아둥바둥 애쓰고 특별한 걸 얻기 위해서 아둥바둥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필요 없습니다. 왜? 제대로 알고 보면 원만구족하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알기만 하면 원만구족하기 때문에 달리 구할 것이 없습니다.
망상을 버리기 위해서 아등바등할 것도 없고, 열반을 얻기 위해서 아등바등할 필요도 없다면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 그것에 대한 설명입니다. 파식망상필부득(叵息妄想必不得), 굳이 망상을 쉬려고 할 것도 없고 특별한 것을 얻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다만 주체적으로 아무 조건 없는 좋은 방편을 마음껏 쓸 뿐이네.
동시에 자기 집 안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충분하게 얻어가네.
망상이 끓거나 말거나 저쪽에 열반이 있거나 말거나 그런 것에 구애받지 말고 오로지 우리 모두가 한 몸, 한 마음, 한 생명의 존재니까 나도 너도 우리 모두도 괜찮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동체대비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체대비행으로 삶을 창조해 가면’을 ‘다만 주체적으로 아무 조건 없는 좋은 방편을 마음껏 쓸 뿐이네’라는 말로 풀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는가? ‘동시에 자기 집안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충분하게 얻어 가게 된다.’ 이 말은 제가 수행을 설명할 때 비유로 사용했던 내용이 있습니다. ‘부지깽이 노릇하는 삶을 살아야 된다.’ 기억나십니까? 부지깽이 노릇이라는 건 무엇입니까? 나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부지깽이 노릇인가요? 너를 위해서 무엇을 하는 것이 부지깽이 노릇인가요? 부지깽이는 자기가 타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나무를 태우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다른 나무를 태우기 위해서 열심히 작업을 하면 어떻게 될까요? 다른 나무가 잘 타는 만큼 부지깽이도 타서 사라지게 됩니다. 결과적으로는 너한테도 좋고 나한테도 좋게 됩니다. 진실로 우리가 한 마음 한 몸 한 생명이라고 하는 이 세계관에 토대해서 이것이 내 사고가 되고 말이 되고 행동이 되도록 살기만 하면, 나에게도 좋고 너에게도 좋고 우리 모두에게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자기 집안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충분하게 얻어가네’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귀가수분득자량(無緣善巧捉如意). 동체대비심에 맞추어 애써서 우리가 자비롭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려고 투철하게 노력하게되면 그런 과정에서 망상의 문제나 열반은 다 해결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우리가 하는 이야기 중에 이런 의문에 답이 될 수 있는 대표적인 내용이 ‘인간은 행위하는 대로 만들어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망상에 맞춰서 행위하면 나는 망상의 노예일 뿐입니다. 지금 여기 존재 자체가 특별함을 모르고 ‘특별한 건 어디 다른 데 있을 거야’하고 생각해서 특별함을 찾아 헤매고 다니면 찾아 헤매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런 것은 놓아두고 지금 여기에서 ‘나는 원만구족한 존재야’. ‘원만구족한 존재를 나는 창조적으로 마음껏 발현시킬 거야.’ 이것을 우리는 동체대비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쓰면 번뇌망상으로부터도 구애 받지 않게 되고 특별한 것을 찾으려고 헐떡거릴 이유도 없게 됩니다. 번뇌 망상에도 구애받지 않고 특별한 것을 찾기 위해서 헐떡거리지도 않는 것을 달리 이야기하면 무엇이겠습니까? 편안하다, 자유롭다는 말입니다. 편안하다, 자유롭다를 다른 말로하면 해탈이다, 열반이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내 문제는 내가 꼭 해결해야만 돼.’ 우린 이런 사고 방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연기적으로 우리 모두가 한 몸이고 한 마음이고 한 생명이기 때문에 내 문제만 따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따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죠? 절대 해결할 수 없습니다. 행위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존재이기 때문에 잘 행위하는 것이 답이지, 내 문제에 초점 맞춘다고 답이 되어지고, 너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고 답이 되지 않습니다. 나도 괜찮고 너도 괜찮고 우리도 괜찮게 했을 때 답이 되어집니다. 그것을 우리는 동체대비라는 말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개인의 문제도 다 해결되어집니다. 그것을 ‘동시에 자기 집안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충분하게 얻어가네.’라는 말로 풀었습니다. 여기까지가 ‘나는 누구야? 인생이란 뭐야?’ 하는 물음에 대한 답, ‘어떻게 살아야 돼?’라는 물음에 대한 답입니다.
바쁨이 아니라 여유만만한 부지런함으로
이것으로도 충분하지만 그래도 법성게 내용으로 봐서는 이야기해야 할 것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래, 지금까지 설명한 것으로도 충분한데 그거 말고 더 할 건 없어?’ 이렇게 질문합니다. 이 밖에 더 해야 될 것은 없는 것인가? 의상스님이 말씀하시길, ‘더 안 해도 돼. 없어. 그래, 없지. 그것으로 충분해’
그러면 ‘그 다음은 뭐야?’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거기에 대한 답을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 자리엔 한량 없는 공덕 보배들이 끝도 없고 한도 없네. ‘그 자리’는 중도 실상의 그 자리, 해인삼매의 그 자리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앞서 설명한 내용 중에도 있습니다. 신비, 기적, 불가사의 이야기할 때, 그 신비의 존재, 신비의 판이 어디에 있는 무엇이던가요? 지금 여기 존재 자체입니다. 지금 여기 현장 자체가 신비고 기적이고 불가사의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 그 자리엔 한량 없는 공덕보배들이 끝도 없고 한도 없네.’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물 하나하나가 다 보배들이라는 말입니다. 다 기적적인 존재고 신비한 존재고 불가사의한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잘 몰라서 ‘이건 좋은 것이고 저건 나쁜 것이다’라고 분별하고 있지, 적재적소에 맞추어보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한량없는 공덕보배들이 끝도 없고 한도 없네.
이다라니무진보 장엄법계실보전(以陀羅尼無盡寶 莊嚴法界實寶殿)
그 보배들로 참다운 우리 세상 법계를 아름답게 꾸미네.
‘더 하고 싶으면 일을 그냥 그렇게 하면 돼’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부지런히 하면 돼’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내용적으로는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실상사라고 하는 현장을 놓고 보겠습니다. 실상사를 아름답게 꾸민다고 했을 때 실상사가 있기 전에는 뭐가 있었죠? 실상사가 있기 전에는 자연상태가 있었을 뿐입니다. 그 자연상태 안에 실상사라고 하는 것을 지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쩌면 자연상태 그 자체가 신비이고 기적이고 불가사의입니다. ‘이다라니 무진보. ‘온갖 공덕이 다 갖추어진 무궁무진한 보배들이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대단해 보이지만 만약에 자연상태가 없는 상황에서 실상사를 지었다고 생각해봅시다. 아름다울까요? 멋있을까요? 어떻습니까? 반대로 실상사가 없는 자연상태는 어떨까요? 좋을까요? 멋있을까요? 아름다울까요? 만약에 실상사를 잘못 꾸미면 없을 때만 못 할 수 있습니다. 잘 꾸미면 있을 때가 더 나을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잘 어울리게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법당 크게 짓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불상만 멋있게 크게 모신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뭘 좀 제대로 알고 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는 한량 없는 공덕 보배들이 끝도 없고 한도 없네’라는 말은 자연상태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 보배들로 참다운 우리 세상 법계를 아름답게 꾸미네.’ 이것은 자연에 잘 어울리게 법당도 짓고 탑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길인 중도 평상 위에 의연히 앉아 있네. 누가? 깨달음 행자, 붓다 행자가. 한결같은 그 자리, 그 사람, 그 모습이 바로 거룩한 붓다이네. 부처님은 열심히, 애써 부지런히 하지만 늘 여유만만하다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대로 알고 부지런히 하면 늘 여유만만한 삶이 된다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제대로 모르고 아등바등 바쁘게 사니까 여유만만한 삶이 안 되는 것입니다. 바쁘게 사는 것하고 부지런히 사는 것은 다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부지런히 사는 쪽으로 살지 못하고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세상 이치가 다 부지런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다 부지런히 노력한 덕택에 이 현실, 이 삶이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쁘게 살아서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의 다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바쁨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물리적으로 불가피한 지점도 있을 수 있겠지만, 제대로 알고 보면 문제를 다룰 때 바쁜 사고 방식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한다는 사고 방식으로 다룰 수 있습니다. 바쁨에 빠져 있는 이런 사고 방식으로 다루지 않고 부지런히 하는 사고 방식으로 문제를 다루게 되면 비록 물리적으로 여러 가지 불가피한 부분이 있다손 치더라도 여유만만한 삶이 가능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삶을 보여준 것이 깨달음으로 살아가는 붓다의 삶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여유만만한 모습을 ‘한결같은 그 자리 그 사람 그 모습이 바로 거룩한 붓다이네’라고 풀었습니다. 이렇게 법성게가 끝납니다.
저는 이런 물음과 이런 사고방식으로 법성게를 풀고 해석해 보고 실제 경험하고 있는 삶과 연결시켜 보았습니다. 그렇게 해보니 ‘아, 법성게는 천년 묵은 물건이 아니라 제대로 쓰기만 하면 언제나 지금 여기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물건이구나’라고 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부분에 함께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설명을 드렸는데 여러분들은 어떤가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여기까지 하는 것으로 정리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12월 보현법회
중도로 본 의상의 깨달음 노래, 법성게
안녕하세요? 지난번엔 ‘잠을 잘 못 잤다’, 또는 ‘잠을 좀 잘 잤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요즘의 일상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이기도 합니다만, 비록 그렇긴 하지만 저는 오늘 기분 좋게 이 자리에 왔습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아직 정리는 되지 않았지만 그동안 직간접적으로 이야기해왔던 것 중에 나를 위해서, 너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해서 꼭 필요한 내용이 ‘나의 불교수행론’이라는 이야기를 해 왔습니다. 그 내용을 우리 사부대중 공동체에 적용시키면 ‘사부대중 공동체의 불교수행론’, 종단에 적용시키면 ‘조계종단의 불교수행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행에 관심이 있는 전체 대중들을 상대로 하면 ‘모든 사람들의 불교수행론’, 더 나아가서는 ‘21세기 인류사회의 불교수행론’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염원대로 여래의 본의에 부합하는 불교 수행론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렇게도 생각해보고 저렇게도 생각해 보고 이렇게도 이야기해보고 저렇게도 이야기해보고 있습니다. 또 이런 자리에서 저런 자리에서 그런 이야기들을 계속 해오고 있습니다. ‘나의 불교수행론’이 ‘아, 이런 것이 진짜로 부처님이 뜻한 불교 수행론이야’라고 생각되는 내용으로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나에게, 너에게, 한국사회, 전 인류에게 다 적용해도 희망의 길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 역사 속에서 태어난 불교수행론
우리는 사부대중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함께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가지고 있는 것,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존재의 참모습, 자신의 참모습을 형상화한 생명평화무늬입니다. 나에게, 너에게, 대한민국 사람들, 인류사회 구성원들 모두에게 ‘그래, 그것이 우리가 갈 길이야. 그 길을 가야 해. 그 길을 가기만 하면 틀림없이 희망이 꽃이 피게 돼 있어’하고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생명평화무늬라고 생각합니다.
생명평화무늬의 의미는 진지하게 귀 기울이고 대화를 나눈다면 누구나 다 공감하고 수긍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생명평화무늬에 담겨 있는 내용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자기 등불로 삼고 가야 될 내용입니다. 그렇게 가기만 하면 분명 스스로 찾고 싶은 답을 찾기도 하고 만들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 다 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지금 말씀드렸던 내용들이 더 설득력을 가지려면 경전적 근거, 또는 부처와 옛 조사 스님들이 하신 말씀과도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그렇게 연결했을 때도 ‘아, 그렇구나.’ 하고 수긍이 될 수 있도록 해 보려하고 있습니다. 한반도 우리 역사 속에서 태어나고 살아간 인물, 또는 그 인물에 의해서 만들어진 내용을 가지고 나의 불교수행론, 우리 불교수행론, 인류의 수행론이 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자원은 없는가? 저는 당연히 많이 있다고 봅니다. 나아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우선 대중화를 위해서는 단순화시키고 압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렇게 보았을 때 어떤 내용들이 있을까 하고 천착해보았습니다. 하나는 원효스님의 ‘귀일심원 요익유정(歸一心源 饒益有情)’이 있습니다. 또 ‘일심동체’, ‘동체대비’와 같은 말은 화엄경 쪽에서 많이 사용됩니다. 표현은 약간씩 다르지만 뜻하는 바 내용은 다르지 않습니다.두 번째는 의상스님에 의해서 제시되어진 내용으로 깨달음의 노래 ‘법성게’, 세 번째는 고려시대에 나옹선사의 발원문으로 전해져 오고 있는 행선축원입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청매조사가 있습니다. 실상사를 포함해서 ‘칠암자길’이라 불리는 길이 있습니다. 칠암자길의 제일 마지막 사찰이 도솔암입니다. 그곳이 청매조사가 계셨던 곳이라고 합니다. 청매조사에 의해서 만들어진 ‘십무익송(十無益頌)’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원효스님의 저술은 양이 방대합니다. 그중에서 핵심적인 것, 대표적인 내용만 뽑으면 ‘귀일심원 요익유정’ 또는 ‘일심동체’, ‘동체대비’를 뽑을 수 있습니다. 시로 만들어진 의상스님의 ‘법성게’는 화엄경 내용을 압축적으로 아주 잘 요약해 놓았습니다. 그 내용을 제대로 알면 화엄경을 다 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네 가지를 잘 풀고 잘 해석하고 잘 설명해내면, ‘그래, 이런 세계관, 이런 정신, 이런 관점, 이런 입장에서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그것이 불교수행의 전부이지. 또 그렇게 하면 본인이 찾고 싶은 답이 이루어지지’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고 판단을 했습니다.
불교는 인도에서 시작되어서 중국을 거쳐 한반도까지 흘러들어왔습니다. 주로 경전을 통한 불조의 말씀들로 전해져 왔습니다. 경전에서는 이런 내용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잘 찾아보면 압축적으로 표현된 내용이 없지 않습니다. 또 문장이 길더라도 ‘압축하면 이런 내용이 될 수 있겠다’고 판단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부처님의 ‘탄생게’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一切皆苦 我當安之)’ 사실 이 한마디에 팔만사천 불교가 다 들어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또 다른 예로 법성게가 있습니다. 법성게는 화엄경을 압축한 내용이기 때문에 화엄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 담고 있습니다. 다 담아서 압축시켜 놓았기 때문에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중도적으로 읽으면 충분히 바로 이해·〮실현 가능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제가 앞서 오늘 기분 좋게 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아침까지 나름대로 법성게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묻고 이렇게 설명하면 법성게가 저 하늘에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보고 듣고 또는 밥 먹고 잠자고 똥 누는 일상 속의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구나’하는 윤곽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로서는 매우 기분이 좋았습니다. 상당히 긴 세월을 붙잡고 천착해 왔지만 윤곽이 잘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새벽에 ‘이 정도면 윤곽이 잡히겠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어서, 또 이런 이야기를 함께하는 대중들과 나눌 수 있게 되어서 기분 좋게 이 자리에 왔습니다. 똑같은 관점에서 계속 작업하고 있는 것이 또 하나 있는데 바로 인간 붓다의 삶을 그려보는 것입니다. 신이 된 부처가 아니라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서의 부처. 또 마음만 먹으면 ‘아, 부처란 그런 사람이구나. 그렇다면 나도 부처일 수 있겠네. 나도 부처이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도록 부처의 삶을 해석하고 싶었습니다. 깨달음의 삶을 살았던 붓다의 삶을 그렇게 해석하고 설명했으면 좋겠다 싶어서 그 작업도 하고 있습니다.원래는 같이 공부하는 차원에서 ‘인간 붓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오늘 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법성게가 윤곽이 잡혔기 때문에 오늘은 법성게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제 나름대로 다섯 개의 질문을 가지고 법성게를 풀고 해석을 해 보았습니다. 그렇게 접근을 해보니, 깨달음의 삶을 살았던 부처님의 일생을 대승불교적으로 묘사한 경전이 화엄경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깨달음으로 일생을 살았던 부처님의 삶을 대승불교적으로 설명해낸 것이 화엄경이구나’하고 정리가 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화엄경을 30개 구절로 압축해 낸 것이 의상스님의 법성게이기도 합니다. 붓다의 삶과 화엄경이 이렇게 연결되는 것을 보면서 저 스스로도 상당히 놀랐습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법성게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중도로 본 의상의 깨달음 노래, 법성게
법성게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의상스님을 상대로 자문자답하는 형식으로 몇 가지 제목도 붙이고 질문도 해 보았습니다. 그 질문에 따라서 해석하는 형태입니다. 제목을 뭐라고 붙였는가? ‘중도로 본 의상의 깨달음 노래, 법성게.’ 법성게는 ‘깨달음의 노래’라는 이야기입니다. 불교는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될 내용이 법성게로 표현되어 있다고 보면 됩니다. 우리가 깨달아야할 내용이 화엄경으로 설명되어있고 그것을 압축한 것이 법성게입니다. 그래서 법성게를 잘 아는 것이 ‘깨달음’이고, 그 내용을 온전하게 삶으로 살면 그것이 곧 붓다의 삶입니다. 제대로 알고 온전하게 삶으로 살기만 하면 그것이 붓다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다음은 보통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인간적인 물음에 대한 답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이 법성게라면 그 의문에 답이 되도록 하기 위해 물음을 제기하는 방식입니다.
총론: 중도적으로 사는 것이 답
법성게는 평범한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다른 사람 이야기가 아니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본인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해 답을 하고 있습니다. 법성게가 우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도록 ‘지금 여기 한 사람 그대가 있네.’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대’는 여러분들 각자 자기 자신입니다. 이것을 나한테 적용하면 나 자신에 해당됩니다.지금 여기 한 사람 그대가 있네. 여기에 무슨 물음을 던졌는가? 부처님 생애도 그렇고 제가 살아봐도 그렇고 사람들하고 이야기해 봐도 그렇고 살다보면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어떤 질문에 부닥치게 됩니다. 온갖 질문에 부닥칩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정치 사회적으로 굉장히 불안한데 이럴 때도 질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온갖 질문들을 압축하고 단순화시키면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물음이 됩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도대체가 인생은 어떻게 생겨먹은 존재야?’, ‘인생이 뭐길래 윤석열은 그 모양이야?’, ‘인생이 뭔데 이재명은 그 모양이야?’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삶을 경험 해가는 과정 속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온갖 물음들이 있습니다. 이런 물음들을 압축하고 압축해서 요약하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질문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법성게는 바로 그 물음에 대한 답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법성게가 천년도 넘는 옛날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단순한 옛날 물건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생생한 오늘의 내용입니다. 법성게는 시간을 가로지른 질문들에 총론으로 압축해서 답을 합니다.
‘인생이 뭐야?’ 그 다음은 당연히 ‘어떻게 살아야 돼?’하는 질문이 따라옵니다. 이 질문들에 대해서 법성게에서는 총론적으로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법성원융무이상 제법부동본래적 무명무상절일체 증지소지비어경(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無名無相絶一切 證智所知非餘境)’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네 구절입니다. 이것은 화엄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네 구절로 압축한 것입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한지’와 같이. 이것을 우리 말로 풀면 ‘그의 본래 참모습’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 각자가 나의 진짜 참 모습이 어떤 존재인지 아십니까? 우리는 거의 나의 참모습은 모르고 가짜 모습만 알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머릿속에 있는 지식은 거의 다 그렇습니다. 진짜 모습을 모르고 가짜 모습만 알고 있습니다. 법성게에서는 그의 본래 참 모습에 대해 뭐라고 답하고 있을까요? 한문으로 된 것을 풀어보겠습니다.
온 우주 두루 어울려 한 모습이네.
세월이 흘러도 언제나 그 모습이네.
본래 정해진 이름도 분리된 모습도 따로 없네.
여기까지가 우리의 참모습에 대한 묘사입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또는 나는 누구인가? 어떤 존재인가? 이런 물음에 대한 답입니다. 나의 참모습은 ‘온 우주 두루 어울려 한 모습이네.’ 우리가 평소에 ‘내가 곧 우주고 우주가 곧 나다’ 이런 표현을 하곤 했습니다. 생명평화무늬를 설명할 때마다 이야기했습니다. 이런 것과 연결되는 내용입니다.과거에도 이런 모습이었고 현재에도 이런 모습이었고 미래에도 그런 모습이다. 그래서 이 내용을 법성게에서는 ‘그의 본래 참모습은 온 우주 두루 어울려 한 모습이네. 세월이 흘러도 언제나 그 모습이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세월이 흐르면 그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린 가짜의 나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온 우주 두루 어울려 한 모습이네. 세월이 흘러도 언제나 그 모습이네. 본래 정해진 이름도 분리된 모습도 따로 없네.’
‘본래 정해진 이름도 있고 분리된 내 모습도 따로 있어’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면 그것은 가짜 뉴스입니다. ‘그건 가짜 뉴스지, 사실은 그렇지 않아’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본래 정해진 이름도 분리된 모습도 따로 없네. 그런데 진짜 모습은 이 가짜 뉴스의 사고방식으로는 절대 알 수가 없습니다. 천하를 좌우하는 지식이라 하더라도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천재도 이 가짜 뉴스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하는 한 참모습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관념적이다’, ‘분별이다’, ‘전도몽상이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그러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을 마지막 구절이 답해주고 있습니다. 오직 중도의 지혜로 알 뿐, 다른 길 있지 않네. 이것이 네 구절 중 마지막 구절입니다. 중도, 법성게에선 ‘증지소지비어경(證智所知非餘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증’자는 여러 가지로 해석이 됩니다. 주로 많이 강조되는 것이 궁극적 깨달음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많이 강조됩니다. 증명할 ‘증(證)’자는 ‘직접 증명되는 지혜로만 알 수 있지. 분별심으로는 알 수가 없어.’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직접 경험하는 지혜로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절대 알 수가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더 쉽게 풀면, ‘겪어보면 알아’ 하는 이야기입니다. ‘증’자에 들어 있는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저는 이 내용을 불교 교리적 언어로 연결시킬 필요가 있다고 해서 제 나름대로 천착을 해 보았습니다. ‘중도의 지혜로 알 뿐 다른 길 있지 않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훨씬 더 타당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법성게의 처음 ‘인생이 뭐야?’, ‘어떻게 살아야 해?’ 하는 두 물음에 대한 답으로써 제시되고 있는 겁니다. 첫 번째 물음 ‘인생은 뭐야?’라고 했을 때 ‘그의 본래 참 모습은 온 우주 두루 어울려 한 모습이네. 세월이 흘러도 언제나 그 모습이네. 본래 정해진 이름도 분리된 모습도 따로 없네.’ 여기까지가 ‘인생은 뭐야? 나는 누구야? 어떤 존재야?’라고 하는 물음에 대한 답입니다.
그다음 ‘오직 중도의 지혜로 알 뿐 다른 길이 있지 않네’는 ‘어떻게 살아야 돼?’에 대한 답입니다. ‘온 우주 두루 어울려 한 모습이네. 세월이 흘러도 언제나 언제나 그 모습이네. 본래 정해진 이름도 분리된 모습도 따로 없네.’ ‘그래, 나라고 하는 존재가 그런 존재라면 그다음에 어떻게 살아야 돼?’하는 질문에 ‘오직 중도의 지혜로 알 뿐 다른 길이 있지 않네.’ 오직 중도적으로 다뤄야 되지, 중도적으로 살아야 되지, 다른 길에서는 답이 나오지 않아. 이렇게 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도가 답이다. 어떻게 살아야 돼? 중도적으로 살아야 돼. 이런 이야기입니다. 여기까지가 총론에 해당이 됩니다.
내가 곧 우주고 우주가 곧 나다
그다음은 각론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내용을 더 좀 세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같은 내용인데 세세하게 풀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각론에서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그의 본래 참모습은 지극히 심오하고 미묘하고 아름답네.
항상 자신을 고집함 없이 인연 따라 온갖 모습 이루네.
참 모습은 한 그물코에 일체, 일체의 그물코에 하나가 깃들었네.
한 그물코 그대로 일체, 일체 그물코 그대로 하나이네.
한 티끌 그물코가 온 우주의 그물코를 품어 안네.
온갖 먼지 그물코들도 어느 하나 빠짐없이 그러하네.
여기까지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세세한 설명인 셈입니다. 그것을 한마디로 압축해서 우리가 늘 사용하는 언어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내가 곧 우주고 우주가 곧 나다.’ 또 다른 예로는 언제 어디에서나 끊임없이 인연 화합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인연 화합으로 활동하고 있다. 분리 독립돼서 존재하지 않고 고정불변하게 존재하지 않고 온통 인연 화합으로만 이루어지고 있다. 인연 화합으로 활동하고 있다.
순간이 곧 영원이고 영원이 곧 순간
그다음엔 시간적 의미로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참모습 그 자리는 영원의 시간 그대로 지금 한순간이네.
한순간 그대로 끝없는 영원이네.
과거 현재 미래의 9세와 현재 일념의 10세도 그대로 함께 있네.
하지만 언제나 혼란 없이 각각의 시간이 질서 정연하네.
앞에는 공간적인 입장에서 존재가 뭐야?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이라면 지금은 시간적 입장에서 답을 한 것입니다. ‘그 존재는 시간적으로는 어떤 존재인데?’하는 물음에 대한 답입니다. 영원의 시간 그대로 지금 한 순간이네. 한 순간 그대로 끝없는 영원이네. 3세의 9세와 10세의 현재도 그대로 함께 있네. 하지만 언제나 혼란 없이 각각의 시간이 질서정연하네.영원이 그대로 순간이요. 순간이 그대로 영원이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매우 혼란스러워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막연하게 생각하면 혼란스러워 보입니다. 그렇지만 내용을 제대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내용을 제대로 본다’는 것은 ‘중도적으로 본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교리적으로 표현해서 ‘중도적으로 보면’, 내용을 사실적으로 확인해 보면 ‘질서정연하고 혼란스럽지 않다’는 말입니다. 혼란스러운 건 잘 모르고 생각하는 것이고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하나를 조목조목 확인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생사도 열반도 이치도 현상도 하나
앞에는 총론적으로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하는 물음에 대한 답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뒷부분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각론적 설명을 했습니다.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해? 어떻게 살면 되는 거야?’하는 물음에 대한 경전 설명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공간적 설명, 시간적 설명이 있은 다음,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돼?’라는 물음을 묻고 있습니다. ‘그래, 그런 존재라면, 한 그물코에 전체 그물코가 들어 있고 전체 그물코에 한 그물코가 들어 있는 존재, 순간이 영원이고 영원이 순간인 그런 존재라면, 그런 부처는 어떻게 살아야 해?’라는 질문입니다.이 질문에 의상스님이 답합니다. ‘그 내용은 다 경전에서 말하고 있어 잘 들어봐.’ 그러면서 설명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한문으로는 초발심시변정각 생사열반상공화 이사명연무분별 십불보연대인경(初發心時便正覺 生死涅槃常共和 理事冥然無分別 十佛普賢大人境)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이렇게 풀었습니다.
깨달음으로 살겠다고 하는 첫 마음 그대로 정각이네(初發心時便正覺).
깨닫기 이전에는 생사가 따로 있고 열반이 따로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조금 더 강조점을 두면 ‘제대로 알고 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막연하게 짐작하고 책에 있는 지식을 머리에 담아놓고 그것에 맞춰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사실대로 관찰하고 사실을 사실대로 확인한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알고 보니까 초발심시변정각 생사열반상공화. 제대로 알고 보니까 참 모습 그 자리에는 늘상 생사도 열반도 함께 있네. 따로따로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린 생사는 버리려 하고 열반은 얻으려고 합니다. 왜냐? 생사는 나쁜 거라고 생각하고 열반은 좋은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잘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대로 알고 보면 생사와 열반은 한 덩어리입니다. 한 손의 손바닥과 손등처럼. 하나는 생사고 하나는 열반이라고 하면 뭘 버리고 뭘 선택하실래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제대로 알고 보면 우리가 기존에 알던 것과 너무 많이 다릅니다. 참 모습 그 자리엔 늘상 생사도 열반도 함께 있네.
이어서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숨은 이치와 드러난 현상도 한몸 되어 구별할 수 없네. 궁극적 진리라고 하는 것하고 드러난 허망한 세상이라고 하는 것. 어쩌면 열반은 궁극적인 가치고 세상은 허망한 가치죠. 궁극적 가치는 좋은 것이고 허망한 가치는 보잘것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뒤의 내용도 같은 내용입니다. 숨은 바탕의 이치도 드러난 현상도 한 몸 되어 구별할 수 없네. 궁극적 가치라고 할 수 있는 진리도, 허망하다고 이야기하는 현상도 모두 한 덩어리다. 분리될 수 없다. 구분되지 않는다.
숨은 바탕과 드러난 모습도 한몸 되어 구별할 수 없네.
그 상태는 깨달음 행자인 붓다와 보현보살의 몫이네.
우리의 분별하는 사고방식으로 또는 머리에 들어 있는 가짜 뉴스의 사고방식으로는 실상를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중도적으로 봐야(중도적으로 다뤄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상태는 깨달음 행자인, 즉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붓다행자인 붓다와 보현보살의 몫이네‘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즉 ’이렇게 알고 이렇게 살아야 돼‘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인생이 뭐야? 어떻게 살아야 돼?’하는 것에 대해 총론과 각론으로 나누어 설명을 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해 경전에서는 ‘이렇게 알고 이렇게 살면 돼’라고 설명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했습니다. 그것이 ‘십불보연 대인경.’ 그것을 ‘그렇게 살아간 사람’ 즉 ‘중도적으로 살아간 사람’ 이렇게 풀었습니다. 본래의 참 모습 그 상태는 ‘생사와 열반도 한 덩어리요. 보이지 않는 이치와 현상도 한 덩어리다’라고 합니다. 그 상태는 지식으로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분별로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중도적으로 해야만 알 수 있습니다. 깨달음의 눈으로 봐야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상태는 깨달음 행자인, 깨달음으로 살고 있는 붓다와 보현보살의 몫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다음 세 번째는 그렇게 살아간 사람에 대한 내용입니다. 초발심시 변정각 생사열반 상공화 이사명연 무분별 십불보연 대인경. ‘이렇게 살면 돼. 열반도 생사도 한 덩어리다. 이치와 현상도 한 덩어리다. 이 사실을 사실대로 알고 거기에 맞게 생각도 하고 말도 하고 행동도 하면 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진정으로 편안해지고 자유로워져.’하나는 좋고 하나는 나쁘다고 하면 우리는 좋은 데도 걸리고 나쁜 데도 걸립니다. 좋은 것에 대해서는 욕심 부리게 되고 나쁜 것에 대해서는 싫어하고 미워하고 화내게 됩니다. 그런데 그 것이 다 한 덩어리라는 사실을 알고 보면 그래야 될 이유가 없어져 버립니다.
이런 것을 ‘붓다로 살자 발원문’에서는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소를 타고 소를 찾고 있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소를 탔으면 소를 탄 줄 알고 잘 부리고 살면 될 텐데 소를 탄 줄 모르니까 소를 부리기는커녕 소를 찾는 일만 하게 됩니다. 소를 찾기 위해서 온 천하를 헤매고 다닙니다. 바깥으로도 헤매고 안으로도 헤매고. 자기가 타고 있는 소가 안으로 들어간다고 나오겠어요, 바깥으로 찾아 헤맨다고 나오겠어요. 그건 안으로 들어가도 나올 수 없고 바깥으로 쫓아다녀도 나올 수가 없어요.그럼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중도, 여실지견. 타고 있다는 사실을 사실대로 아는 것이 답입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부처님은 ‘주의 깊게 관찰 사유해 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또 한 가지는 ‘스승에게 물어봐’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살아간 사람, 보현보살의 몫이네. 이것은 ‘인생이 뭐야? 어떻게 살아야 돼?’하는 물음에 대한 각론적 설명입니다.
일상이 그대로 신비요, 기적이요, 불가사의
그다음에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세 번째는 그렇게 살아간 사람, 생사열반상공화 이사명연무분별(生死涅槃常共和 理事冥然無分別). 이 사실을 제대로 알고 이 내용을 곧이곧대로 잘 살아간 사람이 있나? 그런 사람이 구체적으로 사례가 있는가? 하고 묻는 형태입니다. 그렇게 살아간 사람의 역사적 사례가 있는가? 물으니 의상스님이 ‘그렇지, 있지’하고 답합니다. 능인해인삼매중 번출여의부사의 우보익생만허공 중생수기득이익(能印海印三昧中 繁出如意不思議 雨寶益生滿虛空 衆生隨器得利益)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능인해인삼매중’은 ‘참 모습대로 사는 사람 능인’이라는 뜻입니다.
‘능인(能仁)’은 부처님이 다른 이름입니다. ‘능입(能入)’으로 되어 있는 데도 있고 능인(能仁)으로 되어 있는 데도 있습니다. 능입으로 접근을 하게 되면 교리적으로 복잡한 설명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능인으로 접근을 하게 되면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살았던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훨씬 더 쉽고 명료하게 설명도 가능하고 이해도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능인으로 봤습니다.
‘참 모습대로 사는 사람 능인’, 이것을 역사적 인물로 연결시켜서 일반적으로는 어떻게 말하는가? ‘참모습대로 사는 사람 석가모니불’과 같은 말입니다. 참 모습대로 사는 사람 석가모니 불은 한결같이 그 자리에 있네. 그 자리가 어디인가? 해인삼매입니다. 우리 모두는 해인삼매 상태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건 너무나 어려운 이야기이고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이 질문 한번 해보고 갈까 싶네요. 여러분들은 신비와 기적을 좋아하십니까? 안 좋아하십니까? 대체적으로 우리는 신비를 좋아하고 기적을 좋아하고 불가사의를 좋아합니다. 기적이 이루어졌다고 하면 우르르 찾아가서 보기도 하고 안 그렇습니까?
불교도 사실 그런 이야기를합니다. 신비, 기적, 불가사의는 그것이 개인 체험일 수도 있고 누군가가 보여주는 어떤 현상일 수도 있습니다. 또 어디선가 나타난 현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런 건 다 가짜야’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반야심경 언어로 말하면 무지와 착각의 사고방식으로 만들어낸 전도몽상이다. 관념으로 조작해낸 것일 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다 부질없는 거야’, ‘다 허망한 거야’라고 이야기합니다.그렇다면 신비, 기적, 불가사의는 없는 것인가? 부처님과 불조들께서는 어떻게 말씀하고 계십니까? ‘그렇지 않아. 그건 늘 있어.’ 어디에? ‘지금 여기에.’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너라고 하는 존재의 참모습은 그 자체가 기적이고 신비이고 불가사의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보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듣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숨 쉬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걸어 다니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밥 먹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필요에 따라서 잠도 자고 똥도 누고 오줌도 누는 그 자체가 신비고 기적이고 불가사의고 거룩한 일이지 그거 말고 다른 무엇이 있다고 한다면 그건 다 망상이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어떤 것이 좋습니까? 제대로 알기만 하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이 신비고 기적이고 불가사의인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일상적으로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것 자체가 신비요, 기적이라면 기적 찾아서 또는 불가사의를 찾아서, 신비를 찾아서 쫓아다닐 필요가 없지않겠습니까? 또 기적을 일으켰네. 기적을 체험했네 하는 사람들 앞에서 기 죽을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얼마나 당당하겠습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무한한 자신감과 자부심을 갖고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대단히 매력적이죠.
참 모습대로 사는 사람 능인은 한결같이 그 자리에 있네.
언제나 그곳에서 신비한 솜씨를 마음껏 발휘하네.
그 솜씨로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보배를 허공 가득 비처럼 내리네.
뭇생명들이 각자 준비한 그릇 만큼 온갖 이익을 얻어가네.
깨달음으로 사는 부처님의 삶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고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돼. 그렇게 살면 만사형통이야’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삶에서는 이것이 주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대표적으로 법문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병에 따른 처방으로서 어마어마한 법문을 합니다. 번뇌병에 시달리고 있는 중생들이 그 번뇌병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어마어마한 양의 법문을 죽는 순간까지 합니다. 그런 내용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고, 그 법문들을 가지고 사람들마다 자기 필요에 따라서 도움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깨달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이렇게 사는 거야. 이렇게 살고 있어. 그렇게 사는 것이 제대로 된 삶이야. 가장 멋있고 아름다운 삶이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해탈, 열반의 길: 부지깽이 삶
그다음에 네 번째, ‘그렇다면 누구나 붓다처럼 살면 되는 건가?’ 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의상스님이 ‘물론.’ 이렇게 답합니다. 물론 법성게에는 이런 말이 없습니다. 법성게가 오늘 우리의 이야기가 되도록 만들기 위해서 이렇게 말을 엮어가고 있는 것입니다.누구나 붓다처럼 살기만 하면 되는 건가? 우리는 의심합니다. 나도 그렇게 살 수 있을까? ‘나 같은 박지범부가’, ‘나처럼 하찮은 인간이’ 우리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 것을 반야심경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전도몽상의 망상을 부리고 있어.’, ‘망상에 빠져 있어.’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누구나 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내용이니까 부처님 가르침이 희망의 메시지라는 이야기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해도 해도 안 돼. 그건 아무나 할 수 없어. 부처만 가능해. 특별한 사람만 가능해. 그런 것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희망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시고행자환본제 파식망상필부득(是故行者還本際 叵息妄想必不得)
무연선교착여의 귀가수분득자량(無緣善巧捉如意 歸家隨分得資糧)
이 내용을 우리 말로 풀면 ‘붓다행하는 그 사람은 언제나 본래의 자리에 돌아가 있네(是故行者還本際).’ 늘 중도의 자리에 서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중도의 자리가 어디겠어요? 늘 지금 여기입니다. 늘 지금 여기에 서 있다. 늘 현장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현장을 떠나지 않는다. 왜? 그 자체가 해인삼매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가 모르고 살 뿐이다. 알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답이 나온다는 이야기입니다. ‘붓다행하는 한 그 사람은 언제나 본래의 자리에 돌아가 있네.’ 그는 생사도 따로 없고 열반도 따로 없습니다. 너도 따로 없고 나도 따로 없습니다. 온통 다 한 몸이고 한 마음이고 한 생명입니다. 이렇게 실상은 원만구족한 존재입니다. 실상을 분리시켜서 보면 다 허망하고 불완전한 존재고 형편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내가 곧 우주고 우주가 곧 나라고 하는, 이렇게 연결되어져 있는 실상을 제대로 알고 보면 다 원만구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알고 살면 굳이 망상을 쉬려고 할 필요도 없고 특별한 것을 얻으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는 망상을 버리기 위해서 아둥바둥 애쓰고 특별한 걸 얻기 위해서 아둥바둥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필요 없습니다. 왜? 제대로 알고 보면 원만구족하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알기만 하면 원만구족하기 때문에 달리 구할 것이 없습니다.
망상을 버리기 위해서 아등바등할 것도 없고, 열반을 얻기 위해서 아등바등할 필요도 없다면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 그것에 대한 설명입니다. 파식망상필부득(叵息妄想必不得), 굳이 망상을 쉬려고 할 것도 없고 특별한 것을 얻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다만 주체적으로 아무 조건 없는 좋은 방편을 마음껏 쓸 뿐이네.
동시에 자기 집 안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충분하게 얻어가네.
망상이 끓거나 말거나 저쪽에 열반이 있거나 말거나 그런 것에 구애받지 말고 오로지 우리 모두가 한 몸, 한 마음, 한 생명의 존재니까 나도 너도 우리 모두도 괜찮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동체대비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체대비행으로 삶을 창조해 가면’을 ‘다만 주체적으로 아무 조건 없는 좋은 방편을 마음껏 쓸 뿐이네’라는 말로 풀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는가? ‘동시에 자기 집안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충분하게 얻어 가게 된다.’ 이 말은 제가 수행을 설명할 때 비유로 사용했던 내용이 있습니다. ‘부지깽이 노릇하는 삶을 살아야 된다.’ 기억나십니까? 부지깽이 노릇이라는 건 무엇입니까? 나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부지깽이 노릇인가요? 너를 위해서 무엇을 하는 것이 부지깽이 노릇인가요? 부지깽이는 자기가 타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나무를 태우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다른 나무를 태우기 위해서 열심히 작업을 하면 어떻게 될까요? 다른 나무가 잘 타는 만큼 부지깽이도 타서 사라지게 됩니다. 결과적으로는 너한테도 좋고 나한테도 좋게 됩니다. 진실로 우리가 한 마음 한 몸 한 생명이라고 하는 이 세계관에 토대해서 이것이 내 사고가 되고 말이 되고 행동이 되도록 살기만 하면, 나에게도 좋고 너에게도 좋고 우리 모두에게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자기 집안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충분하게 얻어가네’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귀가수분득자량(無緣善巧捉如意). 동체대비심에 맞추어 애써서 우리가 자비롭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려고 투철하게 노력하게되면 그런 과정에서 망상의 문제나 열반은 다 해결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우리가 하는 이야기 중에 이런 의문에 답이 될 수 있는 대표적인 내용이 ‘인간은 행위하는 대로 만들어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망상에 맞춰서 행위하면 나는 망상의 노예일 뿐입니다. 지금 여기 존재 자체가 특별함을 모르고 ‘특별한 건 어디 다른 데 있을 거야’하고 생각해서 특별함을 찾아 헤매고 다니면 찾아 헤매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런 것은 놓아두고 지금 여기에서 ‘나는 원만구족한 존재야’. ‘원만구족한 존재를 나는 창조적으로 마음껏 발현시킬 거야.’ 이것을 우리는 동체대비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쓰면 번뇌망상으로부터도 구애 받지 않게 되고 특별한 것을 찾으려고 헐떡거릴 이유도 없게 됩니다. 번뇌 망상에도 구애받지 않고 특별한 것을 찾기 위해서 헐떡거리지도 않는 것을 달리 이야기하면 무엇이겠습니까? 편안하다, 자유롭다는 말입니다. 편안하다, 자유롭다를 다른 말로하면 해탈이다, 열반이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내 문제는 내가 꼭 해결해야만 돼.’ 우린 이런 사고 방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연기적으로 우리 모두가 한 몸이고 한 마음이고 한 생명이기 때문에 내 문제만 따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따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죠? 절대 해결할 수 없습니다. 행위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존재이기 때문에 잘 행위하는 것이 답이지, 내 문제에 초점 맞춘다고 답이 되어지고, 너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고 답이 되지 않습니다. 나도 괜찮고 너도 괜찮고 우리도 괜찮게 했을 때 답이 되어집니다. 그것을 우리는 동체대비라는 말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개인의 문제도 다 해결되어집니다. 그것을 ‘동시에 자기 집안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충분하게 얻어가네.’라는 말로 풀었습니다. 여기까지가 ‘나는 누구야? 인생이란 뭐야?’ 하는 물음에 대한 답, ‘어떻게 살아야 돼?’라는 물음에 대한 답입니다.
바쁨이 아니라 여유만만한 부지런함으로
이것으로도 충분하지만 그래도 법성게 내용으로 봐서는 이야기해야 할 것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래, 지금까지 설명한 것으로도 충분한데 그거 말고 더 할 건 없어?’ 이렇게 질문합니다. 이 밖에 더 해야 될 것은 없는 것인가? 의상스님이 말씀하시길, ‘더 안 해도 돼. 없어. 그래, 없지. 그것으로 충분해’
그러면 ‘그 다음은 뭐야?’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거기에 대한 답을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 자리엔 한량 없는 공덕 보배들이 끝도 없고 한도 없네. ‘그 자리’는 중도 실상의 그 자리, 해인삼매의 그 자리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앞서 설명한 내용 중에도 있습니다. 신비, 기적, 불가사의 이야기할 때, 그 신비의 존재, 신비의 판이 어디에 있는 무엇이던가요? 지금 여기 존재 자체입니다. 지금 여기 현장 자체가 신비고 기적이고 불가사의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 그 자리엔 한량 없는 공덕보배들이 끝도 없고 한도 없네.’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물 하나하나가 다 보배들이라는 말입니다. 다 기적적인 존재고 신비한 존재고 불가사의한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잘 몰라서 ‘이건 좋은 것이고 저건 나쁜 것이다’라고 분별하고 있지, 적재적소에 맞추어보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한량없는 공덕보배들이 끝도 없고 한도 없네.
이다라니무진보 장엄법계실보전(以陀羅尼無盡寶 莊嚴法界實寶殿)
그 보배들로 참다운 우리 세상 법계를 아름답게 꾸미네.
‘더 하고 싶으면 일을 그냥 그렇게 하면 돼’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부지런히 하면 돼’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내용적으로는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실상사라고 하는 현장을 놓고 보겠습니다. 실상사를 아름답게 꾸민다고 했을 때 실상사가 있기 전에는 뭐가 있었죠? 실상사가 있기 전에는 자연상태가 있었을 뿐입니다. 그 자연상태 안에 실상사라고 하는 것을 지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쩌면 자연상태 그 자체가 신비이고 기적이고 불가사의입니다. ‘이다라니 무진보. ‘온갖 공덕이 다 갖추어진 무궁무진한 보배들이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대단해 보이지만 만약에 자연상태가 없는 상황에서 실상사를 지었다고 생각해봅시다. 아름다울까요? 멋있을까요? 어떻습니까? 반대로 실상사가 없는 자연상태는 어떨까요? 좋을까요? 멋있을까요? 아름다울까요? 만약에 실상사를 잘못 꾸미면 없을 때만 못 할 수 있습니다. 잘 꾸미면 있을 때가 더 나을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잘 어울리게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법당 크게 짓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불상만 멋있게 크게 모신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뭘 좀 제대로 알고 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는 한량 없는 공덕 보배들이 끝도 없고 한도 없네’라는 말은 자연상태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 보배들로 참다운 우리 세상 법계를 아름답게 꾸미네.’ 이것은 자연에 잘 어울리게 법당도 짓고 탑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길인 중도 평상 위에 의연히 앉아 있네. 누가? 깨달음 행자, 붓다 행자가. 한결같은 그 자리, 그 사람, 그 모습이 바로 거룩한 붓다이네. 부처님은 열심히, 애써 부지런히 하지만 늘 여유만만하다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대로 알고 부지런히 하면 늘 여유만만한 삶이 된다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제대로 모르고 아등바등 바쁘게 사니까 여유만만한 삶이 안 되는 것입니다. 바쁘게 사는 것하고 부지런히 사는 것은 다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부지런히 사는 쪽으로 살지 못하고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세상 이치가 다 부지런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다 부지런히 노력한 덕택에 이 현실, 이 삶이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쁘게 살아서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의 다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바쁨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물리적으로 불가피한 지점도 있을 수 있겠지만, 제대로 알고 보면 문제를 다룰 때 바쁜 사고 방식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한다는 사고 방식으로 다룰 수 있습니다. 바쁨에 빠져 있는 이런 사고 방식으로 다루지 않고 부지런히 하는 사고 방식으로 문제를 다루게 되면 비록 물리적으로 여러 가지 불가피한 부분이 있다손 치더라도 여유만만한 삶이 가능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삶을 보여준 것이 깨달음으로 살아가는 붓다의 삶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여유만만한 모습을 ‘한결같은 그 자리 그 사람 그 모습이 바로 거룩한 붓다이네’라고 풀었습니다. 이렇게 법성게가 끝납니다.
저는 이런 물음과 이런 사고방식으로 법성게를 풀고 해석해 보고 실제 경험하고 있는 삶과 연결시켜 보았습니다. 그렇게 해보니 ‘아, 법성게는 천년 묵은 물건이 아니라 제대로 쓰기만 하면 언제나 지금 여기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물건이구나’라고 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부분에 함께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설명을 드렸는데 여러분들은 어떤가 모르겠습니다. 다만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여기까지 하는 것으로 정리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