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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법회[2025년 1월] 수행의 핵심

2025년 1월 보현법회

수행의 핵심

안녕하세요? 신도회장님께서 오늘이 새해 들어서 첫 법회라고 안내하셨습니다. 우리는 양력, 음력을 다 사용하니까 헷갈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음력으로는 묵은해의 마지막 법회고, 양력으로는 새해 첫 법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로 정리하면 헷갈리지 않고 좋지 않을까요?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하나로 정리하지 못하고 계속 혼란스럽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불교도 그런 것 같습니다. 불교도 이런 식이니까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긴 세월 동안 좋다고 생각하는 건 다 갖다 모아놓으니까 가닥이 잘 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새해 첫 법회 벽두부터 아쉬운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불교수행론


제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과정에서 한국 역사에서 배출된 인물들에 의해서 이야기된 불교 내용으로 한국 불교수행론이 만들어질 필요가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불교 이야기는 대부분 인도, 또는 중국 이야기입니다. 불교가 인도에서 시작해서 중국을 거쳐 들어왔기 때문에 인도나 중국 이야기를 하지 않기는 어렵습니다.한국불교가 1600년, 1700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가 자부하고 자랑하고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적어도 한반도, 우리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불교수행론을 기본으로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을 기본으로 하고, 더불어 인도 이야기나 중국 이야기를 하는 것이 맞는 일이 아니겠는가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작업을 소홀히 하면 ‘한국불교라고 이야기할만한 내용은 없어. 중국불교 혹은 인도불교와 같아’라고 여겨질 위험성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정체성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중국불교의 아류, 인도불교의 아류, 티벳불교의 아류, 남방불교의 아류가 되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저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해서 정리하고 만들어야 하는데 지금은 그럴 형편이 안 되어 저 혼자 해오고 있습니다. ‘나의 불교수행론’이라는 이름으로 작업을 하는 중입니다. 원효스님 이야기, 의상스님 이야기, 나옹스님 이야기, 또 청매조사 이야기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분들이 남겨놓은 것 중, 내용은 대단히 괜찮은데 양은 아주 짧은 것들입니다. 이 내용을 중심으로 ‘나의 불교수행론’을 정리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내용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부처님 생애에 대한 이야기가 잘 정리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부처님은 나와 똑같은 사람이면서, ‘인생이란 뭐야?’, ‘나는 누구야?’하는 물음에 답을 찾은 분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괜찮은 사람이 되는 거야?’하는 물음에 답을 찾아서 우리에게 가르쳐준 인물입니다.그런데 그동안 우리가 자료를 통해서 접한 부처님은 나와 같은 사람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특별한 신적인 존재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실제는 어땠을까? 실제로는 부처님은 분명 사람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모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하고 똑같이 밥을 먹었습니다. 밥 먹으면 또 무엇을 해야 합니까? 똥 누어야 합니다. 우리와 똑같이 숨을 들이쉬었습니다. 들이쉰 후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쉬어야 합니다. 이것이 안 되면 못 삽니다. 신이라면 이런 것이 필요치 않습니다. 사실을 하나하나 확인해 보면 부처님 역시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굉장히 괜찮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지만, 대단히 괜찮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우리는 부처님이 우리와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대단히 괜찮게 살아간 사람일뿐입니다. ‘나도 부처님과 똑같은 사람이니까 마음먹고 괜찮게 살아봐야지.’ 이런 식으로 부처님이 이해되고 공감되면 우리가 덜 혼란스럽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삶을 다시 천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생애에 대한 내용을 잘 정리하는 것이 한국 불교수행론을 만들어 가는데 효과적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보현법회 때 그 이야기를 계속하겠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저런 사정으로 미뤄지기도 하고 건너뛰기도 하면서 오늘까지 왔습니다. 오늘은 그 맥락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볼까 합니다.

 

지혜의 눈, 깨달음의 눈을 열려면


참사람 인간 붓다의 삶을 그린다.


‘참사람 인간 붓다의 삶을 그린다.’ 이것은 제목인 셈입니다. 그리고 부연해서 ‘우리의 인간상’ 이라는 말은 ‘나의 인간상’이라는 말입니다. ‘야, 부처님 참 멋있다. 나도 한번 그렇게 살아야지.’ 이런 차원에서 이야기될 수 있는 사람이 부처님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간상: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참사람 인간 붓다 나의 진리, 나의 가르침은 진지하게 대화를 할 경우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로 이해, 실현, 경험된다는 사유방식의 관점에서 붓다의 삶을 정리한다.

 

지난번에 이야기했던 것은 부처님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중도로 본 붓다의 깨달음 삶’이라고 정리했습니다. 부처님 삶에 대한 이야기인데 제목만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태어나서 성장 과정에서 만들어진 문제의식들. 출가할 수밖에 없었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문제의식들,

출가할 때의 문제의식들,

출가 이후의 문제의식들.

 

여기까지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만들어지는 대로 이야기하겠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앞서 이야기한 내용을 상기하는 정도만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과 다른 이야기를 연결시켜서 최근에 제가 경험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방금 ‘보현행원’ 노래를 함께 불렀습니다. 가사 중에 ‘두 눈 어둔 이 내 몸 굽어 살피사 위 없는 대법문을 널리 여소서’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두 눈 어둔 이 내 몸’ 이 내용에 동의하십니까?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봉사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말은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요? ‘두 어둔 이 내 몸,’ ‘두 눈이 어둡다.’ 눈이 나빠서 제대로 못 본다는 이야기는 아니지 않겠습니까?‘알아야 할 것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두 눈 어둡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두우면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무엇에 대해서 어두운 것이고, 또 알아야 할 건 무엇일까요?

그다음 내용은 ‘위 없는 대법문 널리 여소서’입니다. 어두운 눈을 뜬 눈이 되도록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이 가사에 의하면 불교공부를 많이 해야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법문을 청한다는 이야기는 ‘불교를 잘 가르쳐 주시오’라는 이야기입니다. 결과적으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많이 공부해야 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그래서 앞서 이야기한 내용은 ‘지혜의 눈을 떠야 된다’, 또는 ‘깨달음의 눈을 열어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깨달음의 눈이 열리는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지혜의 눈이 열리는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이야기 해보고자 합니다.


먹는 것도 빛나고 똥 누는 것도 빛나라


부처님 가르침과 사유방식을 압축해서 아주 중요한 것만 간추려 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중도, 관찰사유, 여실지견, 연기, 무아. 이 내용을 가지고 콩이야 팥이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여기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저기서는 저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다보니 양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어마어마하게 많은 내용에 담겨 있는 내용을 압축해서 간추려보면 지금 말씀드린 ‘중도, 관찰사유, 여실지견, 연기, 무아’입니다. 8만 4천 법문이라고 하더라도 모두 이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내용을 전하는데 왜 8만 4천 가지 이야기를 하게 되었냐? 왜 그럴 것 같습니까? 병에 따라서 약을 쓰다 보니 그렇습니다. 이것은 약의 원료인 것입니다. 약의 원료를 이 병에는 이렇게 쓰고 저 병에는 저렇게 쓰다 보니 양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진 것입니다. 현재는 지구상의 인구가 7-80억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지금은 70-80억 법문이 필요한 것입니다.왜? 다 두 눈 어둔 환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의 눈이 없는 환자들이기 때문에, 지혜의 눈이 없는 환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눈 뜨게 하려면 70억도 넘는 법문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핵심은 그렇게 복잡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그런데 저도 이 내용을 계속 설명하고 강조하면서도 아주 강렬하게 경험적으로 ‘아, 그렇구나’하고 느낀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주로 이론적으로 이해하고 이론적으로만 설명해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번에 처음으로 변비라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나는 변비라는 말은 들어보았어도 한 번도 겪어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변비를 겪으면서 천당과 지옥을 오락가락했습니다. 지옥이 따로 없었습다. 똥을 눌 수 없으니까 그것 자체가 지옥이었습니다. 그런데 똥이 편하게 누어지니까 그것이 천국이었습니다. 거기에 신비도 있고 기적도 있고 불가사의도 있고 온갖 것이 거기에 다 들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지금까지 살면서 변비 이야기를 한두 번 들은 것이 아닙니다. 변비를 관념적으로 또는 지식으로 이야기하는 것하고 실제 겪는 것하고는 하늘과 땅만큼 다릅니다. ‘중도적으로 한다’는 말은 ‘직접 경험해 보면 안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앞서 예를 든 변비 사건으로 이야기하자면 ‘변비를 직접 겪어보니까 이렇더라’하는 것입니다. 변비를 겪어보니까, ‘너 내 말 들으면 똥을 시원하게 누게 해줄게.’라고 하면 바로 엎드려 빌 것 같았습니다. 똥 누는 일이 얼마나 큰 일인지, 생사를 좌우하는 일이 똥 누는 일이었습니다.우리가 ‘생사대사(生死大事)’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생사가 좌우되는 일이 바로 똥을 편안하게 잘 누냐 못 누냐 하는 데 걸려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생사대사라는 말을 하는데 그것이 무슨 특별한 이야기, 멀리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일상적으로 늘 겪는 이야기입니다. 두 눈 어둡다는 말은 바로 이런 것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을 여실지견하려고 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실지견’이라는 말은 이런 것을 사실대로 잘 보고 안다는 것입니다.이런 것을 잘 보고 알면 ‘두 눈 떴단’ 말이 가능해집니다. 이것을 잘 보고 알지 못하면 ‘두 눈이 어둡다’는 말로 표현됩니다. 이 내용을 교리적인 말로 표현하면 ‘지혜의 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혜의 눈’은 잘 보고 아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눈’은 잘 보지 못하고 모르는 것입니다.

가장 확실한 것은 직접 경험하도록 해야 합니다. 직접 경험해 보면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명확해집니다. 보통 우리는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것만 보고 삽니다. 입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생각해 본 적 있으세요? 알고 보면 입이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한 번도 그것에 대해 관심 있게 보거나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이런 것들이 다 미혹입니다.

항문은 또 어떻습니까? 내 경우에는 항문이 나한테 있는지 없는지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항문이 필요한가, 필요 없는가, 중요한 물건인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고는 잘난 척하고 산 겁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너무나 무관심하고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부처님은 미혹이라는 말로, 또는 어리석음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제대로 해야 돼. 사실적으로 해야 돼. 경험 가능하도록 해야 돼’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중도적으로 한다’는 의미입니다. 변비 사건을 겪고 보니까 ‘21세기 약사경’이 너무나 잘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습니다. 약사경에 나오는 표현으로하면 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입도 빛나고 항문도 빛나라.’ ‘먹는 것도 빛나고 똥 누는 것도 빛나라.’ 기본적으로 이것이 안 되면 어떤 삶도 안 되는 것입니다. 성인의 삶이든지 망나니의 삶이든지 이것이 제대로 안 되면 어떤 삶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내 몸을 365일 늘 사용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항상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내 몸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내 몸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맛있는 것만 찾습니다. 우린 계속 맛있는 것만 찾고 있습니다.그런데 변비 사건을 경험해 보니까 세상에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아니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안에 있든 바깥에 있든, 여기 있든 저기 있든, 어느 하나, 어느 한 순간도 정말로 정신 바짝 차리고 잘 살펴야 합니다. ‘잘 살핀다’는 말을 ‘관찰사유’라는 말로 표현한 것입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실제 상황에 직접 대면해서.’ 이것이 ‘중도’입니다. 실제 상황에 직접 대면해서 잘 관찰사유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입이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동시에 ‘입이 정말 중요하구나’, ‘입이 정말 빛나야 되는 물건이네’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만 알면 어떻게 될까요?그것만 알고 ‘이것이 전부야’하면 그것은 ‘단견’이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실제로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관찰사유해 보니까 ‘항문도 대단히 중요한 것이네. 항문도 빛나야 되는 것이네. 그래서 항문도 빛나는 것이고 입도 빛나는 것이구나.’ 이것을 제대로 알아야 여실지견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입만 빛나고 항문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항문도 빛나는 것이고 입도 빛나는 것이구나. 이것을 사실대로 알아야 여실지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실제 상황에 직접 대면해서 잘 관찰사유해 보니까 ‘입도 빛나는 것이고 항문도 빛나는 것이구나’라고 알게 되면 여실지견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중도’고 ‘관찰사유’이며 ‘여실지견’한 것입니다. 그 다음은 무엇이었습니까?

‘연기’, ‘무아’입니다. 연기, 무아라는 말을 우리가 지금 ‘빛난다’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상 속에서 직접 경험하는 것을 잘 관찰해서 그 실상을 알고 보면 정말로 어느 하나, 어느 한 순간도 소중하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위대하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거룩하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기적 아닌 것이 없습니다. 신비 아닌 것이 없습니다. 불가사의 아닌 것이 없습니다. 신통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기적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신비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신통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삼매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건 몽땅 다 갖고 살고 있습니다.지금 돈이 있고 없고에 관계없이, 명예가 있고 없고에 관계없이, 지식이 있고 없고에 관계없이, 남자냐 여자냐에 관계없이, 유식하냐 무식하냐에 관계없이, 제대로 알기만 알면 모든 것들이 다 충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는 것을 우리는 ‘여실지견’, ‘사실을 사실대로 보고 안다’고 표현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깨달음으로 삶을 산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지혜롭게 알고 산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그래서 지혜라는 것은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지혜라고 하는 것이지, 지식을 쌓아 모아놓은 걸 지혜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식을 쌓는 것이 마치 공부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앞서 제가 변비 사건을 하나의 예로 말씀드렸듯이, 직접 경험해서 ‘아, 그렇구나’하고 알게 되는 것을 ‘깨달음’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고 ‘지혜’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겪어보니까 ‘아, 그렇구나’하는 것이 경험적 앎, 지혜입니다. ‘저 불은 뜨거워’ 이렇게 말로 또는 지식으로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경험적 앎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뜨거운 것에 손을 대보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이렇게 경험적으로 ‘아, 그렇구나’하는 것을 우리는 ‘지혜’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의 지식을 갖고 살고 있지 지혜롭게 살고 있지는 못합니다.부처님의 삶을 보면 중도, 관찰사유, 여실지견, 연기, 무아, 즉 경험적 지혜를 바탕으로 삶을 사셨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부처의 삶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본인이 살아보니 그 삶이 정말 괜찮아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내용을 잘 안내하기 위해 일생을 바친 것입니다.

그것을 잘 알려주고 잘 안내해 주는 삶을 대자대비의 삶이라고 합니다. 왜 그러겠습니까? 모르면 모순과 혼란과 고통과 불행이라는 삶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알고 살면 내가 희망하는 대로, 우리가 원하는 대로 평화롭게 아름답게 의미있게 유익하게 모두 함께 행복하게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평화롭고 행복할 수 있는 길로 가도록 해주는 것이 법문의 내용입니다. 법문하는 일이 뭇생명들로 하여금 고통과 불행으로부터 벗어나서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안내해 주는 일이니까 이것을 자비 행위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 말고 무슨 다른 자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린 ‘자비’하면 그냥 배고픈 사람은 밥 주고 헐벗은 사람 옷 주는 것을 생각합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깨달음의 눈, 지혜의 눈을 뜨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무도 대신해 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도 길을 안내해 줄 뿐이지 그 길을 가는 것은 본인이 스스로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지혜의 눈을 여는 길, 법문


이렇게 경험적인 깨달음의 눈, 지혜의 눈이 열리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우리가 불교수행이라는 이름으로 참선도 하고 염불도 하고 진언도 외우고 절도 하고 다라니 등을 합니다. 지혜의 눈, 또는 깨달음의 눈을 열기 위해서 불교공부도 하고 수행도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날고 뛰어 봐도 천상엘 가고 지옥을 가고 전생을 보고 하늘을 날고 원하는 대로 모든 것들이 다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희망하는 평화롭고 행복한 삶이 완성되지는 않습니다. 어떤 부분이 잠깐 좋아졌다가 사라져 버리고 또 조금 되는 것 같은데 다시 없어져 버리는 악순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괜찮아 보이지만 해보면 또 아닌 것이고 이렇게 되어버립니다. 그러므로 참선을 하든 염불을 하든 진언을 외우든 또는 다라니를 외우든, 무슨 수행을 하든 핵심은 이 깨달음의 눈이 열리고 지혜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눈이 열리는 것이 기본이 되지 아니하면 제대로 된 불교공부와 수행을 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온갖 신비한 현상들이 넘쳐난다 하더라도 깨달음의 눈과 지혜의 눈이 열리는 쪽으로 그것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대단히 위험할 수 있고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에 현혹되고 지배받고 휘둘리면 스스로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이런 내용을 참고해서 생각해보면 참선하는 것보다, 진언을 외우는 것보다, 기도하는 것보다, 다라니를 외우는 것보다, 절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지금 설명한 내용을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그것은 법문하는 것입니다. 법문하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묻고 답하는 것’이 법문의 핵심입니다. 묻고 답하는 것을 통해서 경험적 지혜로까지 발전해 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깨달음의 눈이 열리고 또는 지혜의 눈이 열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지혜의 눈이 열리고 깨달음의 눈이 열리도록 열리는 것이 불교공부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하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현장이 법문의 현장입니다. 기도만 하는 것, 진언만 외우는 것, 다라니만 외우는 것, 또 참선만 하는 것으로 깨달음의 눈과 지혜의 눈이 열리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사실 많은 논란거리가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셔는 굉장히 많은 것들이 좀 정리되어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왜곡 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법문한다는 이 사실 자체가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가 염두에 두면 좋겠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것으로 오늘 이야기는 정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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