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 소를 마음껏 부리며(自利利他) 멋지게 사는 사람이 부처입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날씨가 확실히 봄이 오는 날씨 같죠?제가 요즘 많이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아인슈타인의 이야기입니다. 과학이 없는 종교는 위험하다, 종교가 없는 과학도 위험하다. 따라서 종교와 과학은 같이 가야 된다. 한국 사회의 요즘 현상을 보면, 사실 한국 사회만 그런 건 아니죠. 아마 세계 도처에서 비슷한 양상들이 나타나는 것 같은데 어딘가는 종교 없이 과학이 판을 치고, 또 어딘가는 과학과 관계없이 종교가 판을 치는.
깨닫기 이전에도, 깨달은 이후에도, 부처님은 인간.제가 줄기차게 붙잡고 천착해온 내용이 부처님 삶 자체였습니다. 깨달음으로 살아간 자, 부처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2600~700년이 지난 오늘도 우리는 부처가 훌륭하다고들 얘기하고, 부처를 기려야 된다고 얘기하고, 부처님 뜻에 맞지 않으면 그건 틀렸다고 얘기하고. 지금도 그러고 있지 않습니까? 도대체 이 인물이 살았던 삶의 내용이 과연 무엇인지. 적어도 내 상식으로 이해하고 수긍이 되도록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다른 사람한테 설명도 잘 할 수 있고 권하기도 하고 하는 게 가능하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으로 부처님 삶에 대해서 늘 천착해왔습니다. 대부분은 뭐 그렇게 어렵지 않은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도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게 정리해서 보면, 깨달음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깨달음 이전은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 분명합니다. 인간인데 대단히 잘난 인간, 대단히 괜찮은 인간입니다. 그런데 깨달음 이후 이야기는 이 사람이 인간인가 신인가 하고 온갖 의심과 혼란에 빠지게 만드는 내용들로 꽉 차 있습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경전 내용을 주의 기우려 사유해 보면, 저는 전반부가 온전히 인간이듯이 후반부도 마찬가지로 온전히 인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따라서 깨달음 이후의 붓다의 삶도 잘 살펴보면 누구나 이해되고 공감됩니다. 아, 저런 내용이구나, 나도 하면 좋겠네, 나도 할 수 있겠네, 나도 조금만 노력하면 되겠네, 나도 해야지 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다고 봅니다. 괜히 사람들이 엉뚱한 생각들을 자꾸 덧씌워서 그렇지 실제 내용으로 보면 부처님은 철두철미하게 대단히 매력적인 인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부처님.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이후에 처음 설법하는 내용을 기록한 경전을 초전법륜경이라고 합니다. 그 첫 설법의 내용을 보면 하나는 첫 설법의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첫 설법의 내용인데요. 부처님이 깨달은 다음에 처음 한 일이 무엇인지 아세요? 대화가 될 상대를 찾는 일이었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다음에 ‘이게 대단히 좋은 것이고, 이것이 인생의 답인데. 이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고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구일까. 과연 그런 사람이 있기는 있는 걸까’라고 고민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지도했던 스승들을 생각하죠. 그런데 그분들은 이미 돌아가시고 안계셨어요. 함께 수행을 하다가 고행을 포기하는 싯다르타 자신을 타락했다, 변절했다고 비난하며 떠났던 다섯 친구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래, 이 친구들이라면 그래도 뭔가 얘기가 되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가지고 찾아갑니다. 다섯 비구들이 저기에서 오는 누군가가 바로 싯다르타임을 알게 됩니다. “저 변절자, 타락자가 오고 있는데 우리는 모른 척하세, 무시해 버리세. 오는 거야 뭐 본인이 알아 할 몫이고.” 그렇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끝내 싯다르타는 다가왔고, 결국은 불편하고 못마땅하고 어색하긴 하지만 사람이 왔는데... 그렇잖아요? 끝내 함부로 할 수가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결국 맞이를 하죠. 그리고 싯다르타는 대화를 시도하지만 변절자, 타락자라고 하는 선입견이 있기 때문에 거부를 당합니다. 부처님은 어떻게 했을까요? 사정사정합니다. “내 얘기 좀 들어봐, 내 얘기 좀 들어봐 봐.” 우리 머릿속에 들어있는 부처님 이미지하고 연결이 됩니까? 거듭거듭 사정해요. “내 얘기 좀 들어봐. 옛날의 싯다르타가 아니야. 지금은 확실히 달라졌어.” 하며 다가옵니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대화가 시작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 첫 설법의 장면입니다. 이 장면에서 부처님이 인간이 아니고 신적인 모습이 보입니까? 그렇지 않죠. 오히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면모죠. 거기에 어떤 신비함도 어떤 기적적임도 없어요. 너무나 인간적인 면모가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대화를 대단히 치열하게 하죠. 진지하고 치열하게. 어떤 신비한 것도 불가사의한 것도 어떤 특별한 것도 없습니다. 너무나 인간적인 면모입니다.
고행주의도 향락주의도 길이 아니다. 중도가 길이다.그럼 무엇을 얘기했을까? 그 내용을 보면, 고행주의도 길이 아니더라, 잘못된 길이더라. 향락주의도 길이 아니더라, 잘못된 길이더라. 당시의 대표적인 길을 압축하면 고행주의와 향락주의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당시 상황에서 고행주의도 향락주의도 사람이 가서는 안 될 길이더라, 그 길로 가서는 답이 없다, 그 길로 가서는 이 모순과 혼란과 악순환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그 양극단의 길을 버렸다라고 얘기하죠. 고행주의도, 향락주의도 다 버렸다. 이 고행주의와 향락주의라는 말을 요즘 언어로 묶어서 한마디로 요약하면 기성 종교의 길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출가 이전에는 세속의 길에서 답을 찾으려고 했다면 출가 이후는 종교의 길에서 답을 찾으려고 했던 거죠. 이때, 불교는 없었습니다. 불교가 생기기 전입니다. 붓다가 세속의 길로 제시된 것을 다 해봤는데 답이 안 나와서 출가를 했고, 출가한 다음에 기성 종교의 길로 제시된 수행을 다 해봤지만 답이 안 나와서 그것도 버렸습니다. 그것을 양극단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 다음은 길이 없는 거죠. 길이라는 길은 다 가봤지만 답이 안 나왔기 때문에, 그래서 결국은 자기 방식의 길을 가게 됩니다. 거기에서 답을 찾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답을 찾고 보니 이 길이야말로 진짜 삶을 자유롭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평화롭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길이구나, 세상에 진짜 필요한 길은 바로 이 길이구나라고 하는 그런 자각과 확신이 생겼던 거죠.
정리하면, 하나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룬 다음에 깨달은 내용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대화가 가능한 사람을 찾아 대화를 하는 하나의 장면을 우리가 봤고, 그다음에 그 대화가 이루어졌을 때 어떤 내용으로 얘기했는가. 향락주의도 길이 아니더라, 고행주의도 길이 아니더라, 이미 있는 길은 다 길이 아니더라, 그건 답이 안 되더라. 그거 다 버려야 된다. 그리고 본인 방식으로, 어쩌면 자문자답하는,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는 방식으로 공부를 했는데 거기에서 답이 나왔다. 내가 찾아낸 답이야말로 진짜 인류 구원의 메시지다, 인류 희망의 메시지다, 이런 얘기가 되는 거죠.그런데 제가 볼 때, 고행주의라는 말로 표현된 내용과 향락주의라는 말로 표현된 내용에 대해 경전상에서 또는 연구해서 설명한 내용들이 시원하지가 않아요. 대부분 애매모호해요. 막연하기도 하고 합리적으로 명료하게 이해가 잘 안 돼요. 여전히 저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명료하게 해석하고 설명할 수 없을까 하는 물음을 가지고 궁리하고 또 궁리하고 있습니다.
만일결사의 중요한 내용으로 부처님의 삶을 현대적 언어로 해석하고 설명하고자 노력함
최근에 우리가 붓다로 살자 불교를 해보자고 지금 얘기를 하고 있는데, 이 붓다로 살자 불교를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부처님을 어떻게 해석하고, 설명하고, 알고, 본받을 것인가 이런 물음에 답을 찾기 위한 궁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작업을 해서 구체화시켜 봤으면 좋겠다 하는 뜻에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들을 단편적으로 하고 있는데요. 그런 과정에서 미혹 문명이라는 말과 깨달음의 문명이라는 말을 우리가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깨달음의 문명이라고 하는 건 부처님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에요. 부처님이 깨달으면서 비로소 깨달음의 문명이라는 것이 시작된 거죠. 그 이전을 미혹 또는 암흑 문명이라고 한다면, 이 미혹 문명을 넘어 깨달음 또는 밝음 문명으로 나아가자는 뜻에서 우리가 만일 결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삶에서 비롯되고 있는 미혹 문명과 깨달음의 문명을 현대적 언어로 얘기 할 필요가 있겠다 싶어 오늘은 그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향락주의와 고행주의, 세속의 길과 종교의 길, 물질의 길과 정신의 길, 신체의 길과 마음의 길향락주의와 고행주의라는 말을 현대적 언어로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했을 때, 향락주의라는 말은 세속의 길이라고 정리하고 고행주의라는 말은 종교의 길이라고 정리하는 게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다른 표현으로는 물질의 길, 정신의 길 또는 신체의 길, 마음의 길 이런 표현들이 가능하겠죠.그러니까 “세상은 두 개의 환상이 지배하고 있다.” 라고 석가모니 부처님은 경험적으로 깨달았던 것입니다. 경험을 해보니 세상은 두 개의 환상이 지배하고 있었다.사람들은 그 환상에 속기도 하고 지배받기도 하고 끌려 다니기도 하고 결과적으로는 본인의 바램과는 정반대로 고통스럽고 불행한 삶을 되풀이하게 되는 어리석은 짓을 골몰해 왔구나하고 깨달은 것입니다.
기존 세속의 길에도 기존 종교의 길에도 맹목적으로 따라서는 안 되는 환상들이 너무 많이 있다.
세속의 길이라고 하는 건 뭘까요? 주로 출세한다, 부귀공명, 오욕락을 마음껏 누린다, 부자 된다, 1등 한다, 승리한다, 독점한다, 지배 한다 등등의 것이지 않습니까? 그 세속의 길에서는 아무리 개혁하고 또 개혁해봐야 인간적인 답이 나올 수 없게 돼 있다는 거죠. 반면에 종교의 길에 답이 있을 거라고 해서 출가를 하고 구체적으로 실천한 수행을 선정 수행과 고행수행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죠. 그러니까 싯다르타는 모든 기성 종교의 길을 다가봤지만 답이 안 나왔기 때문에 그걸 다 버리고는 자문자답 방식으로 답을 찾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세속적 환상에 속기도 하지만, 세속적 환상은 뭐 그렇게 어렵지 않게 알 수가 있잖아요. 끝없는 소유욕 또는 독점욕, 지배욕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을 충족시키는 삶인 거죠. 그런데 종교적 환상은 뭘까. 우린 종교적 언어는 너무나 거룩한 것이기 때문에 거기다가 환상이라는 속된 말을 붙이는 것을 용납해선 안 된다고 믿고 있죠. 어떻게 감히. 한번 봅시다. 종교적으로 좋다고 강조되는 개념들이 어떤 게 있습니까? 불교에서는 극락세계, 기독교에서는 하느님 나라, 불교 2600년 역사 동안에 극락세계가 실현된 적이 있나요? 기독교 2천년 역사 속에서 하느님 나라가 실현된 적이 있나요? 우리를 현혹시키는 환상일 뿐입니다. 사람들이 그냥 희망할 뿐, 꿈을 꿀 뿐이죠. 현실적으로 볼 때 그냥 꿈으로만 있는 거죠.
부처님의 경험적 깨달음을 통한 자기 방식의 답 : 중도
잘 보십시오. 환상으로부터 깨어난 부처님은 “밥상에서 서로 사이좋게 밥을 나누어 먹으면 그것이 바로 극락세계이고 서로 으르렁대며 밥을 먹으면 그것이 바로 지옥이다.”라고 설파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해보니까 그것이 아니다하고 종교적 환상을 깬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나요? 부처님을 스승으로 모시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또다시 환상에 속기도 하고 환상을 만들기도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신통, 불가사의, 신비, 기적, 삼매, 해탈, 열반, 깨달음, 극락, 천국 등의 언어들이 대부분 종교적 환상을 갖도록 만드는 개념들인 거죠. 그런데 부처님은 내가 해보니까, 그것은 모두 우리를 현혹해서 잘못되게 만드는 환상이더라, 이걸 경험적으로 깨닫고는 단호하게 버리고 떠납니다. 바로 자기 방식의 답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답을 찾고 난 다음에 뭐라고 얘기했는가? 세속적인 환상의 길도 하나의 극단의 길이고, 종교적인 환상의 길도 또 다른 극단의 길이다. 나는 두 극단의 길을 버리고 중도의 길을 발견했다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두 극단의 길을 버리고 중도의 길을 가야 답이 나온다는 말이고 중도의 길에서 파악된 내용이 바로 연기법이라는 의미입니다. 덧붙여 설명한다면 중도의 길을 갔을 때 세속적 환상도 타파되고 종교적 환상도 타파되며 그렇게 될 때 해탈의 삶도 열반의 삶도 가능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중도는 여전히 유효하다
오늘날의 한국 사회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될 것인가 하고 짚어보면, 결국은 중도적으로 했을 때 바람직한 답이 나올 수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다만 현실적인 답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많은 실력과 노력이 필요한데 우리의 실력과 노력이 많이 부족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 게 우리 현실입니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미혹의 길인 양극단의 길을 버리고 깨달음의 길인 중도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미혹의 문명과 깨달음의 문명에 연결해서 잠깐 얘기하고 끝낼까 합니다.
아까 아인슈타인의 이야기를 했었죠. 과학이 없는 종교 또는 종교가 없는 과학, 둘 다 위험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종교와 과학이 함께 가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부분은 아마 조금 생각을 깊이 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공감을 하는 것 같습니다. 과학이 없는 종교, 종교가 없는 과학, 다 위험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냐 반듯이 과학과 종교가 함께 가야 된다 는 이야기이죠.
누구나 소를 타고 있다.
그러면 우리가 사용하는 얘기들 중에 미혹문명이라는 말에 해당되는 내용은 어떤 것들이고 깨달음의 문명이라는 말에 해당 되는 내용은 어떤 것들일까요? 중도, 사실을 사실대로 확인해보면 누구나 다 소를 타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는 소를 탄 줄 알아서 마음껏 소를 부리며 삽니다. 소위 말하면 깨달음의 문명을 삶으로 살고 있음을 뜻하죠. 누구는 소 탄 줄을 모르기 때문에 소를 찾아 천지사방으로 헤매고 다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소위 말하여 구태의연하게 여전히 미혹의 문명을 삶으로 살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누구나 타고 있는 그 소는 뭘까요. 그건 개념화시키면, 각자 본인이 갖고 있는 몸과 마음입니다. 몸과 마음을 상징하는 언어가 소인 겁니다. 몸과 마음을 안 갖고 있는 이는 아무도 없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누구나 다 소를 타고 있는 거예요. 누구나 다 소를 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누구도 예외 없고 또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진실이죠. 누구는 소를 탄 줄 알아서 소를 마음껏 부리면서 삶을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전히 소를 탄 줄 모르고 소를 찾아서 헤매는 삶을 사는 사람이 있는 거지요. 소를 탄 줄 모르고 소를 찾아 헤매는 삶을 사는 사람을 우리는 뭐라고 하는가, 미혹 문명의 삶을 살고 있다. 박지범부(博地凡夫)의 삶을 살고 있고, 죄 많은 업보 중생의 삶을 살고 있다라고 얘기 합니다.
반면 소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아서, 소를 잘 부리며 멋지게 사는 사람이 바로 부처입니다.우리는 소 탄 줄 알고 소를 마음껏 부리며 사는 사람을 깨달음의 문명을 삶으로 사는 부처라고 합니다. 그 대표 주자는 누구인가 바로 우리가 스승으로 모시는 석가모니 부처님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우리하고 똑같습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이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여전히 구태의연하게 소 찾아 헤매는 삶을. 죽어라고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반면 부처님은 소를 탄 줄을 알고 소를 마음껏 부리면서 멋있는 삶을 창조하고 멋있는 삶을 누리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해탈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고 열반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죠. 깨달음의 문명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기도 하고요. 정리해 보면, 우리가 미혹 문명을 넘어 깨달음의 문명의 길을 가보자고 하는 일이 그렇게 거창한 일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 삶의 주체인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고 자기 자신의 삶을 제대로 잘 가꾸도록 하자, 그러면 그 삶은 괜찮은 삶이 된다, 지금 그 얘기를 하고 있거든요. 많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자기 자신을 제대로 가꾸어서 괜찮은 삶을 살게 되면 그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그 미래는 어떤 미래인가, 당연히 우리가 희망했던 바람직한 삶이기도 하고 바람직한 미래이기도 하고 희망찬 미래이기도 하죠. 여기서 핵심은 뭐겠어요? 소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살 것인가 모른 채 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나의 일상이 신비이고 기적이다.
그러면 소를 타고 소를 찾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는 내용은 뭘까요? 우린 특별하고 신비한 걸 좋아합니다. 왜? 나에겐 신비한 게 없으니까. 불가사의한 것을 좋아하죠. 왜? 나에게 특별한 것이 없으니까. 황홀한 것을 좋아하죠. 왜? 나에겐 없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에겐 없어.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금 여기엔 없어.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딘가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아, 다른 누군가가 갖고 있는 것 같아 하며 우린 거기에 끌려 다니고 있는 거죠. 그런데 소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사는 사람은 진짜 내가 좋아하는 것이 바로! 지금! 이거야! 라고 알고 산다는 얘기죠.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신비함, 불가사의함, 기적적임, 신통 자제함, 하느님 나라, 극락세계, 온갖 황홀한 언어들, 황홀한 개념들로 표현되어 있죠. 그런데 그것은 저 하늘나라에 있다든가 아니면 먼 훗날 어딘가 있다든가 아니면 아주 특별한 신적인 존재가 따로 있다든가 주로 이렇게 생각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소를 타고 소를 탄 줄 아는 사람은 지금 여기 나에게 신비도, 기적도, 불가사의도, 해탈도, 열반도 다 있어 하고 그것을 마음껏 누리며 살고 있는 거예요. 거기에 기적도, 신비도, 불가사의도, 극락도, 천당도, 해탈도, 열반도 다 들어 있는 삶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가르침으로 보면 팔정도를 생활화하는 그곳에 신비도 있고 기적도 있고 불가사의도 있고 신통도 있고 온갖 거룩함이 다 있다고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팔정도를 생활화하느냐 안 하느냐에 정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팔정도, 거기에 우리를 현혹시키는 황홀한 신비가 있습니까? 그런 기적이 있습니까? 불가사의가 있습니까? 팔정도 그 어느 내용에도 우리를 현혹시키는 황홀하고 신비한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배고플 때는 밥 먹고, 똥 마려우면 똥 누는 게 신통이고 기적이야
너무나 인간적인, 어쩌면 너무나 평범한 것들을 선사들은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을까? 선사들이 신통에 대해 대화를 나눈 문답이 있습니다. 신통이라는 말에는 우리가 갈망해 마지않는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거기에 기적, 신비, 불가사의, 황홀함, 천당, 극락, 삼매, 해탈, 열반이 다 들어있는 말인 거죠. 어느 수행자가, 어쩌면 그 친구도 나처럼 길 찾아 헤매고 다니는 사람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물었겠죠? 조실 스님을 찾아가서 사람들이 신통, 신통 하는데 무엇이 신통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여러분, 그런 거 물어본 적 있으세요? 없으세요? 좀 물어보세요. 왜 안 물어 보십니까?“신통, 신통, 신통, 그렇게들 말하는데, 도대체 신통이 뭡니까?” 하고 물으니까 선사 왈,“배고플 때는 밥 먹고, 똥 마려우면 똥 누는 게 신통이야.” 하고 답하셨습니다. 어떻습니까? 너무나 평범하지 않습니까? 너무나 인간적이지 않습니까? 누구나 다 하고 있는 일 아닌가요? 그 어디에 우리를 유혹하는 신비, 기적, 불가사의, 황홀함이 있습니까?
똥 눠야 될 때 똥을 잘 눌 수 있으면 그것이 최고의 신통이고 기적이지.
변비 얘기를 잠깐하고 가겠습니다. 최근에 제가 ‘변비’라는 말만 듣다가, 실제 변비가 와서 홍역을 치른 적이 있습니다. 정말 어찌해볼 수 없는, 어쩌면 살고 죽는 문제가 걸려 있는 극단적인 상황에 부딪힌 거예요. 똥 못 누는 일이야말로 정말 지옥이더라고요. 그 이상의 지옥은 없어. 내가 볼 적에 똥을 눌 수 없다는 사실이 그냥 지옥이고 죽는 길이여. 천하에 뭘 갖다 줘봐야 그건 나한테 관심사가 될 수가 없어. 해탈, 열반, 삼매를 갖다 주든, 신비를 갖다 주든, 기적을 갖다 주든, 불가사의를 갖다 주든, 신통을 갖다 주든, 아무 관심사가 될 수가 없어요. 오로지 어떻게 똥을 눌 것인가에만 관심이 집중 될 수밖에 없어요.
어찌저찌해서 해결했어요. 해결하고 그다음부터는 똥이 쑥쑥 잘 눠지는 상황이 됐어요. 똥이 잘 눠지니까, 그것이 바로 극락이여. 이게 신비고 기적이고 불가사의여. 이보다 더한 신통, 나한텐 필요 없어. 똥 눠야 될 때 똥을 잘 눌 수 있으면 그것이 최고의 신통이고 기적이지. 그 이상? 그거 다 환상이야. 요새 말로 하면 가짜 뉴스야.
‘소’라는 단어로 상징하는 내 몸과 마음을 잘 알고 잘 쓰면 삶은 매우 희망차다.팔정도를 생활화 한다는 말로 표현했는데, 또 다른 하나로 우리가 얘기해 볼 수 있는 것은 여러분들이 대부분 알고 있는 내용이죠. 금강경의 첫 장면, 법회인유분입니다. 그 내용이 뭐예요? 때가 되었을 때, 가사를 수하고, 발우를 챙겨 들고, 마을로 내려가서 일곱 집을 차례차례 들러서 밥을 얻고, 제자리로 돌아와서 밥을 먹고, 발우를 정리 정돈하고, 그리고 준비된 자리에 앉아서 대화를 나눴다. 거기에 무슨 기적이 있습니까? 거기에 무슨 황홀함이 있습니까? 그런데 소위 신비, 불가사의, 해탈, 열반, 삼매, 신통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을 우리는 뭐라고 표현합니까? 그걸 부처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 모두가 다 같은 부처의 일상인 거예요. 그 평범한 일상 속에 기적도 있고, 신비도 있고, 불가사의도 있고, 해탈도 있고, 열반도 다 있는 거예요. 그거 말고 어디엔가 따로 있을 것이라고 찾는다면, 그건 무엇과 같은가? 소 타고 소 찾는 꼴과 같다는 거에요. 그 소는 어디 있어요? 다른 데 없어요. 본인이 타고 있어요. 본인한테 물어보면 알아요. 내가 타고 있는 소가 어디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말로 표현하면 내 몸과 마음이라고 할 수 있죠. 내 몸과 마음을 상징하는 언어가 소인 것이에요. 소라는 단어로 상징하는 내 몸과 마음을 잘 알고 잘 쓰면 확실하게 인생의 답이 된다. 그렇게 하기만 하면 삶은 매우 희망차다. 그렇게 살기만 하면 날마다 좋은 날이 된다.
우리가 미혹문명을 너머 깨달음의 문명 길을 가보자고 만일결사를 하고 있는데 막연하게 생각하는 경향들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이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인데요. 어제도 얘기 나눠보니까 혼란스러움들이 있어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조금 더 명료하게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싶어서 오늘은 선사들의 이야기와 부처님 삶에서 나타났던 내용들을 연결시켜서 설명을 드렸습니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면, 아, 부처님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대단히 괜찮은 분이구나 그리고 그런 내용이라면 나도 얼마든지 할 수 있겠네, 해야 되겠네, 하기만 하면 틀림없다는데 당연히 해야지. 이런 생각들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설명을 드렸습니다.
1800일 입재법회 2025.02.17.
스스로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 소를 마음껏 부리며(自利利他) 멋지게 사는 사람이 부처입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날씨가 확실히 봄이 오는 날씨 같죠?제가 요즘 많이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아인슈타인의 이야기입니다. 과학이 없는 종교는 위험하다, 종교가 없는 과학도 위험하다. 따라서 종교와 과학은 같이 가야 된다. 한국 사회의 요즘 현상을 보면, 사실 한국 사회만 그런 건 아니죠. 아마 세계 도처에서 비슷한 양상들이 나타나는 것 같은데 어딘가는 종교 없이 과학이 판을 치고, 또 어딘가는 과학과 관계없이 종교가 판을 치는.
깨닫기 이전에도, 깨달은 이후에도, 부처님은 인간.제가 줄기차게 붙잡고 천착해온 내용이 부처님 삶 자체였습니다. 깨달음으로 살아간 자, 부처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2600~700년이 지난 오늘도 우리는 부처가 훌륭하다고들 얘기하고, 부처를 기려야 된다고 얘기하고, 부처님 뜻에 맞지 않으면 그건 틀렸다고 얘기하고. 지금도 그러고 있지 않습니까? 도대체 이 인물이 살았던 삶의 내용이 과연 무엇인지. 적어도 내 상식으로 이해하고 수긍이 되도록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다른 사람한테 설명도 잘 할 수 있고 권하기도 하고 하는 게 가능하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으로 부처님 삶에 대해서 늘 천착해왔습니다. 대부분은 뭐 그렇게 어렵지 않은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도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게 정리해서 보면, 깨달음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깨달음 이전은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 분명합니다. 인간인데 대단히 잘난 인간, 대단히 괜찮은 인간입니다. 그런데 깨달음 이후 이야기는 이 사람이 인간인가 신인가 하고 온갖 의심과 혼란에 빠지게 만드는 내용들로 꽉 차 있습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경전 내용을 주의 기우려 사유해 보면, 저는 전반부가 온전히 인간이듯이 후반부도 마찬가지로 온전히 인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따라서 깨달음 이후의 붓다의 삶도 잘 살펴보면 누구나 이해되고 공감됩니다. 아, 저런 내용이구나, 나도 하면 좋겠네, 나도 할 수 있겠네, 나도 조금만 노력하면 되겠네, 나도 해야지 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다고 봅니다. 괜히 사람들이 엉뚱한 생각들을 자꾸 덧씌워서 그렇지 실제 내용으로 보면 부처님은 철두철미하게 대단히 매력적인 인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부처님.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이후에 처음 설법하는 내용을 기록한 경전을 초전법륜경이라고 합니다. 그 첫 설법의 내용을 보면 하나는 첫 설법의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첫 설법의 내용인데요. 부처님이 깨달은 다음에 처음 한 일이 무엇인지 아세요? 대화가 될 상대를 찾는 일이었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다음에 ‘이게 대단히 좋은 것이고, 이것이 인생의 답인데. 이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고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구일까. 과연 그런 사람이 있기는 있는 걸까’라고 고민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지도했던 스승들을 생각하죠. 그런데 그분들은 이미 돌아가시고 안계셨어요. 함께 수행을 하다가 고행을 포기하는 싯다르타 자신을 타락했다, 변절했다고 비난하며 떠났던 다섯 친구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래, 이 친구들이라면 그래도 뭔가 얘기가 되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가지고 찾아갑니다. 다섯 비구들이 저기에서 오는 누군가가 바로 싯다르타임을 알게 됩니다. “저 변절자, 타락자가 오고 있는데 우리는 모른 척하세, 무시해 버리세. 오는 거야 뭐 본인이 알아 할 몫이고.” 그렇게 했는데도 불구하고 끝내 싯다르타는 다가왔고, 결국은 불편하고 못마땅하고 어색하긴 하지만 사람이 왔는데... 그렇잖아요? 끝내 함부로 할 수가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결국 맞이를 하죠. 그리고 싯다르타는 대화를 시도하지만 변절자, 타락자라고 하는 선입견이 있기 때문에 거부를 당합니다. 부처님은 어떻게 했을까요? 사정사정합니다. “내 얘기 좀 들어봐, 내 얘기 좀 들어봐 봐.” 우리 머릿속에 들어있는 부처님 이미지하고 연결이 됩니까? 거듭거듭 사정해요. “내 얘기 좀 들어봐. 옛날의 싯다르타가 아니야. 지금은 확실히 달라졌어.” 하며 다가옵니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대화가 시작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 첫 설법의 장면입니다. 이 장면에서 부처님이 인간이 아니고 신적인 모습이 보입니까? 그렇지 않죠. 오히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면모죠. 거기에 어떤 신비함도 어떤 기적적임도 없어요. 너무나 인간적인 면모가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대화를 대단히 치열하게 하죠. 진지하고 치열하게. 어떤 신비한 것도 불가사의한 것도 어떤 특별한 것도 없습니다. 너무나 인간적인 면모입니다.
고행주의도 향락주의도 길이 아니다. 중도가 길이다.그럼 무엇을 얘기했을까? 그 내용을 보면, 고행주의도 길이 아니더라, 잘못된 길이더라. 향락주의도 길이 아니더라, 잘못된 길이더라. 당시의 대표적인 길을 압축하면 고행주의와 향락주의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당시 상황에서 고행주의도 향락주의도 사람이 가서는 안 될 길이더라, 그 길로 가서는 답이 없다, 그 길로 가서는 이 모순과 혼란과 악순환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그 양극단의 길을 버렸다라고 얘기하죠. 고행주의도, 향락주의도 다 버렸다. 이 고행주의와 향락주의라는 말을 요즘 언어로 묶어서 한마디로 요약하면 기성 종교의 길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출가 이전에는 세속의 길에서 답을 찾으려고 했다면 출가 이후는 종교의 길에서 답을 찾으려고 했던 거죠. 이때, 불교는 없었습니다. 불교가 생기기 전입니다. 붓다가 세속의 길로 제시된 것을 다 해봤는데 답이 안 나와서 출가를 했고, 출가한 다음에 기성 종교의 길로 제시된 수행을 다 해봤지만 답이 안 나와서 그것도 버렸습니다. 그것을 양극단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 다음은 길이 없는 거죠. 길이라는 길은 다 가봤지만 답이 안 나왔기 때문에, 그래서 결국은 자기 방식의 길을 가게 됩니다. 거기에서 답을 찾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답을 찾고 보니 이 길이야말로 진짜 삶을 자유롭게 하고, 아름답게 하고, 평화롭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길이구나, 세상에 진짜 필요한 길은 바로 이 길이구나라고 하는 그런 자각과 확신이 생겼던 거죠.
정리하면, 하나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룬 다음에 깨달은 내용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대화가 가능한 사람을 찾아 대화를 하는 하나의 장면을 우리가 봤고, 그다음에 그 대화가 이루어졌을 때 어떤 내용으로 얘기했는가. 향락주의도 길이 아니더라, 고행주의도 길이 아니더라, 이미 있는 길은 다 길이 아니더라, 그건 답이 안 되더라. 그거 다 버려야 된다. 그리고 본인 방식으로, 어쩌면 자문자답하는,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는 방식으로 공부를 했는데 거기에서 답이 나왔다. 내가 찾아낸 답이야말로 진짜 인류 구원의 메시지다, 인류 희망의 메시지다, 이런 얘기가 되는 거죠.그런데 제가 볼 때, 고행주의라는 말로 표현된 내용과 향락주의라는 말로 표현된 내용에 대해 경전상에서 또는 연구해서 설명한 내용들이 시원하지가 않아요. 대부분 애매모호해요. 막연하기도 하고 합리적으로 명료하게 이해가 잘 안 돼요. 여전히 저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명료하게 해석하고 설명할 수 없을까 하는 물음을 가지고 궁리하고 또 궁리하고 있습니다.
만일결사의 중요한 내용으로 부처님의 삶을 현대적 언어로 해석하고 설명하고자 노력함
최근에 우리가 붓다로 살자 불교를 해보자고 지금 얘기를 하고 있는데, 이 붓다로 살자 불교를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부처님을 어떻게 해석하고, 설명하고, 알고, 본받을 것인가 이런 물음에 답을 찾기 위한 궁리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작업을 해서 구체화시켜 봤으면 좋겠다 하는 뜻에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들을 단편적으로 하고 있는데요. 그런 과정에서 미혹 문명이라는 말과 깨달음의 문명이라는 말을 우리가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깨달음의 문명이라고 하는 건 부처님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에요. 부처님이 깨달으면서 비로소 깨달음의 문명이라는 것이 시작된 거죠. 그 이전을 미혹 또는 암흑 문명이라고 한다면, 이 미혹 문명을 넘어 깨달음 또는 밝음 문명으로 나아가자는 뜻에서 우리가 만일 결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 삶에서 비롯되고 있는 미혹 문명과 깨달음의 문명을 현대적 언어로 얘기 할 필요가 있겠다 싶어 오늘은 그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향락주의와 고행주의, 세속의 길과 종교의 길, 물질의 길과 정신의 길, 신체의 길과 마음의 길향락주의와 고행주의라는 말을 현대적 언어로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했을 때, 향락주의라는 말은 세속의 길이라고 정리하고 고행주의라는 말은 종교의 길이라고 정리하는 게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다른 표현으로는 물질의 길, 정신의 길 또는 신체의 길, 마음의 길 이런 표현들이 가능하겠죠.그러니까 “세상은 두 개의 환상이 지배하고 있다.” 라고 석가모니 부처님은 경험적으로 깨달았던 것입니다. 경험을 해보니 세상은 두 개의 환상이 지배하고 있었다.사람들은 그 환상에 속기도 하고 지배받기도 하고 끌려 다니기도 하고 결과적으로는 본인의 바램과는 정반대로 고통스럽고 불행한 삶을 되풀이하게 되는 어리석은 짓을 골몰해 왔구나하고 깨달은 것입니다.
기존 세속의 길에도 기존 종교의 길에도 맹목적으로 따라서는 안 되는 환상들이 너무 많이 있다.
세속의 길이라고 하는 건 뭘까요? 주로 출세한다, 부귀공명, 오욕락을 마음껏 누린다, 부자 된다, 1등 한다, 승리한다, 독점한다, 지배 한다 등등의 것이지 않습니까? 그 세속의 길에서는 아무리 개혁하고 또 개혁해봐야 인간적인 답이 나올 수 없게 돼 있다는 거죠. 반면에 종교의 길에 답이 있을 거라고 해서 출가를 하고 구체적으로 실천한 수행을 선정 수행과 고행수행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죠. 그러니까 싯다르타는 모든 기성 종교의 길을 다가봤지만 답이 안 나왔기 때문에 그걸 다 버리고는 자문자답 방식으로 답을 찾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세속적 환상에 속기도 하지만, 세속적 환상은 뭐 그렇게 어렵지 않게 알 수가 있잖아요. 끝없는 소유욕 또는 독점욕, 지배욕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을 충족시키는 삶인 거죠. 그런데 종교적 환상은 뭘까. 우린 종교적 언어는 너무나 거룩한 것이기 때문에 거기다가 환상이라는 속된 말을 붙이는 것을 용납해선 안 된다고 믿고 있죠. 어떻게 감히. 한번 봅시다. 종교적으로 좋다고 강조되는 개념들이 어떤 게 있습니까? 불교에서는 극락세계, 기독교에서는 하느님 나라, 불교 2600년 역사 동안에 극락세계가 실현된 적이 있나요? 기독교 2천년 역사 속에서 하느님 나라가 실현된 적이 있나요? 우리를 현혹시키는 환상일 뿐입니다. 사람들이 그냥 희망할 뿐, 꿈을 꿀 뿐이죠. 현실적으로 볼 때 그냥 꿈으로만 있는 거죠.
부처님의 경험적 깨달음을 통한 자기 방식의 답 : 중도
잘 보십시오. 환상으로부터 깨어난 부처님은 “밥상에서 서로 사이좋게 밥을 나누어 먹으면 그것이 바로 극락세계이고 서로 으르렁대며 밥을 먹으면 그것이 바로 지옥이다.”라고 설파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해보니까 그것이 아니다하고 종교적 환상을 깬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나요? 부처님을 스승으로 모시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또다시 환상에 속기도 하고 환상을 만들기도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신통, 불가사의, 신비, 기적, 삼매, 해탈, 열반, 깨달음, 극락, 천국 등의 언어들이 대부분 종교적 환상을 갖도록 만드는 개념들인 거죠. 그런데 부처님은 내가 해보니까, 그것은 모두 우리를 현혹해서 잘못되게 만드는 환상이더라, 이걸 경험적으로 깨닫고는 단호하게 버리고 떠납니다. 바로 자기 방식의 답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답을 찾고 난 다음에 뭐라고 얘기했는가? 세속적인 환상의 길도 하나의 극단의 길이고, 종교적인 환상의 길도 또 다른 극단의 길이다. 나는 두 극단의 길을 버리고 중도의 길을 발견했다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두 극단의 길을 버리고 중도의 길을 가야 답이 나온다는 말이고 중도의 길에서 파악된 내용이 바로 연기법이라는 의미입니다. 덧붙여 설명한다면 중도의 길을 갔을 때 세속적 환상도 타파되고 종교적 환상도 타파되며 그렇게 될 때 해탈의 삶도 열반의 삶도 가능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중도는 여전히 유효하다
오늘날의 한국 사회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될 것인가 하고 짚어보면, 결국은 중도적으로 했을 때 바람직한 답이 나올 수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다만 현실적인 답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대단히 많은 실력과 노력이 필요한데 우리의 실력과 노력이 많이 부족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 게 우리 현실입니다. 부처님은 우리에게 미혹의 길인 양극단의 길을 버리고 깨달음의 길인 중도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 미혹의 문명과 깨달음의 문명에 연결해서 잠깐 얘기하고 끝낼까 합니다.
아까 아인슈타인의 이야기를 했었죠. 과학이 없는 종교 또는 종교가 없는 과학, 둘 다 위험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종교와 과학이 함께 가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부분은 아마 조금 생각을 깊이 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공감을 하는 것 같습니다. 과학이 없는 종교, 종교가 없는 과학, 다 위험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냐 반듯이 과학과 종교가 함께 가야 된다 는 이야기이죠.
누구나 소를 타고 있다.
그러면 우리가 사용하는 얘기들 중에 미혹문명이라는 말에 해당되는 내용은 어떤 것들이고 깨달음의 문명이라는 말에 해당 되는 내용은 어떤 것들일까요? 중도, 사실을 사실대로 확인해보면 누구나 다 소를 타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는 소를 탄 줄 알아서 마음껏 소를 부리며 삽니다. 소위 말하면 깨달음의 문명을 삶으로 살고 있음을 뜻하죠. 누구는 소 탄 줄을 모르기 때문에 소를 찾아 천지사방으로 헤매고 다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소위 말하여 구태의연하게 여전히 미혹의 문명을 삶으로 살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누구나 타고 있는 그 소는 뭘까요. 그건 개념화시키면, 각자 본인이 갖고 있는 몸과 마음입니다. 몸과 마음을 상징하는 언어가 소인 겁니다. 몸과 마음을 안 갖고 있는 이는 아무도 없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누구나 다 소를 타고 있는 거예요. 누구나 다 소를 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누구도 예외 없고 또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진실이죠. 누구는 소를 탄 줄 알아서 소를 마음껏 부리면서 삶을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전히 소를 탄 줄 모르고 소를 찾아서 헤매는 삶을 사는 사람이 있는 거지요. 소를 탄 줄 모르고 소를 찾아 헤매는 삶을 사는 사람을 우리는 뭐라고 하는가, 미혹 문명의 삶을 살고 있다. 박지범부(博地凡夫)의 삶을 살고 있고, 죄 많은 업보 중생의 삶을 살고 있다라고 얘기 합니다.
반면 소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아서, 소를 잘 부리며 멋지게 사는 사람이 바로 부처입니다.우리는 소 탄 줄 알고 소를 마음껏 부리며 사는 사람을 깨달음의 문명을 삶으로 사는 부처라고 합니다. 그 대표 주자는 누구인가 바로 우리가 스승으로 모시는 석가모니 부처님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우리하고 똑같습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이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여전히 구태의연하게 소 찾아 헤매는 삶을. 죽어라고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반면 부처님은 소를 탄 줄을 알고 소를 마음껏 부리면서 멋있는 삶을 창조하고 멋있는 삶을 누리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해탈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고 열반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하죠. 깨달음의 문명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기도 하고요. 정리해 보면, 우리가 미혹 문명을 넘어 깨달음의 문명의 길을 가보자고 하는 일이 그렇게 거창한 일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 삶의 주체인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고 자기 자신의 삶을 제대로 잘 가꾸도록 하자, 그러면 그 삶은 괜찮은 삶이 된다, 지금 그 얘기를 하고 있거든요. 많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잘 알고 자기 자신을 제대로 가꾸어서 괜찮은 삶을 살게 되면 그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그 미래는 어떤 미래인가, 당연히 우리가 희망했던 바람직한 삶이기도 하고 바람직한 미래이기도 하고 희망찬 미래이기도 하죠. 여기서 핵심은 뭐겠어요? 소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살 것인가 모른 채 살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나의 일상이 신비이고 기적이다.
그러면 소를 타고 소를 찾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는 내용은 뭘까요? 우린 특별하고 신비한 걸 좋아합니다. 왜? 나에겐 신비한 게 없으니까. 불가사의한 것을 좋아하죠. 왜? 나에게 특별한 것이 없으니까. 황홀한 것을 좋아하죠. 왜? 나에겐 없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에겐 없어.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금 여기엔 없어.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딘가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아, 다른 누군가가 갖고 있는 것 같아 하며 우린 거기에 끌려 다니고 있는 거죠. 그런데 소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사는 사람은 진짜 내가 좋아하는 것이 바로! 지금! 이거야! 라고 알고 산다는 얘기죠.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신비함, 불가사의함, 기적적임, 신통 자제함, 하느님 나라, 극락세계, 온갖 황홀한 언어들, 황홀한 개념들로 표현되어 있죠. 그런데 그것은 저 하늘나라에 있다든가 아니면 먼 훗날 어딘가 있다든가 아니면 아주 특별한 신적인 존재가 따로 있다든가 주로 이렇게 생각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소를 타고 소를 탄 줄 아는 사람은 지금 여기 나에게 신비도, 기적도, 불가사의도, 해탈도, 열반도 다 있어 하고 그것을 마음껏 누리며 살고 있는 거예요. 거기에 기적도, 신비도, 불가사의도, 극락도, 천당도, 해탈도, 열반도 다 들어 있는 삶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가르침으로 보면 팔정도를 생활화하는 그곳에 신비도 있고 기적도 있고 불가사의도 있고 신통도 있고 온갖 거룩함이 다 있다고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팔정도를 생활화하느냐 안 하느냐에 정답이 있다는 것입니다. 팔정도, 거기에 우리를 현혹시키는 황홀한 신비가 있습니까? 그런 기적이 있습니까? 불가사의가 있습니까? 팔정도 그 어느 내용에도 우리를 현혹시키는 황홀하고 신비한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배고플 때는 밥 먹고, 똥 마려우면 똥 누는 게 신통이고 기적이야
너무나 인간적인, 어쩌면 너무나 평범한 것들을 선사들은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을까? 선사들이 신통에 대해 대화를 나눈 문답이 있습니다. 신통이라는 말에는 우리가 갈망해 마지않는 모든 것이 다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거기에 기적, 신비, 불가사의, 황홀함, 천당, 극락, 삼매, 해탈, 열반이 다 들어있는 말인 거죠. 어느 수행자가, 어쩌면 그 친구도 나처럼 길 찾아 헤매고 다니는 사람이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물었겠죠? 조실 스님을 찾아가서 사람들이 신통, 신통 하는데 무엇이 신통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여러분, 그런 거 물어본 적 있으세요? 없으세요? 좀 물어보세요. 왜 안 물어 보십니까?“신통, 신통, 신통, 그렇게들 말하는데, 도대체 신통이 뭡니까?” 하고 물으니까 선사 왈,“배고플 때는 밥 먹고, 똥 마려우면 똥 누는 게 신통이야.” 하고 답하셨습니다. 어떻습니까? 너무나 평범하지 않습니까? 너무나 인간적이지 않습니까? 누구나 다 하고 있는 일 아닌가요? 그 어디에 우리를 유혹하는 신비, 기적, 불가사의, 황홀함이 있습니까?
똥 눠야 될 때 똥을 잘 눌 수 있으면 그것이 최고의 신통이고 기적이지.
변비 얘기를 잠깐하고 가겠습니다. 최근에 제가 ‘변비’라는 말만 듣다가, 실제 변비가 와서 홍역을 치른 적이 있습니다. 정말 어찌해볼 수 없는, 어쩌면 살고 죽는 문제가 걸려 있는 극단적인 상황에 부딪힌 거예요. 똥 못 누는 일이야말로 정말 지옥이더라고요. 그 이상의 지옥은 없어. 내가 볼 적에 똥을 눌 수 없다는 사실이 그냥 지옥이고 죽는 길이여. 천하에 뭘 갖다 줘봐야 그건 나한테 관심사가 될 수가 없어. 해탈, 열반, 삼매를 갖다 주든, 신비를 갖다 주든, 기적을 갖다 주든, 불가사의를 갖다 주든, 신통을 갖다 주든, 아무 관심사가 될 수가 없어요. 오로지 어떻게 똥을 눌 것인가에만 관심이 집중 될 수밖에 없어요.
어찌저찌해서 해결했어요. 해결하고 그다음부터는 똥이 쑥쑥 잘 눠지는 상황이 됐어요. 똥이 잘 눠지니까, 그것이 바로 극락이여. 이게 신비고 기적이고 불가사의여. 이보다 더한 신통, 나한텐 필요 없어. 똥 눠야 될 때 똥을 잘 눌 수 있으면 그것이 최고의 신통이고 기적이지. 그 이상? 그거 다 환상이야. 요새 말로 하면 가짜 뉴스야.
‘소’라는 단어로 상징하는 내 몸과 마음을 잘 알고 잘 쓰면 삶은 매우 희망차다.팔정도를 생활화 한다는 말로 표현했는데, 또 다른 하나로 우리가 얘기해 볼 수 있는 것은 여러분들이 대부분 알고 있는 내용이죠. 금강경의 첫 장면, 법회인유분입니다. 그 내용이 뭐예요? 때가 되었을 때, 가사를 수하고, 발우를 챙겨 들고, 마을로 내려가서 일곱 집을 차례차례 들러서 밥을 얻고, 제자리로 돌아와서 밥을 먹고, 발우를 정리 정돈하고, 그리고 준비된 자리에 앉아서 대화를 나눴다. 거기에 무슨 기적이 있습니까? 거기에 무슨 황홀함이 있습니까? 그런데 소위 신비, 불가사의, 해탈, 열반, 삼매, 신통 모든 것을 다 갖춘 사람을 우리는 뭐라고 표현합니까? 그걸 부처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 모두가 다 같은 부처의 일상인 거예요. 그 평범한 일상 속에 기적도 있고, 신비도 있고, 불가사의도 있고, 해탈도 있고, 열반도 다 있는 거예요. 그거 말고 어디엔가 따로 있을 것이라고 찾는다면, 그건 무엇과 같은가? 소 타고 소 찾는 꼴과 같다는 거에요. 그 소는 어디 있어요? 다른 데 없어요. 본인이 타고 있어요. 본인한테 물어보면 알아요. 내가 타고 있는 소가 어디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말로 표현하면 내 몸과 마음이라고 할 수 있죠. 내 몸과 마음을 상징하는 언어가 소인 것이에요. 소라는 단어로 상징하는 내 몸과 마음을 잘 알고 잘 쓰면 확실하게 인생의 답이 된다. 그렇게 하기만 하면 삶은 매우 희망차다. 그렇게 살기만 하면 날마다 좋은 날이 된다.
우리가 미혹문명을 너머 깨달음의 문명 길을 가보자고 만일결사를 하고 있는데 막연하게 생각하는 경향들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이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인데요. 어제도 얘기 나눠보니까 혼란스러움들이 있어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조금 더 명료하게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싶어서 오늘은 선사들의 이야기와 부처님 삶에서 나타났던 내용들을 연결시켜서 설명을 드렸습니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면, 아, 부처님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대단히 괜찮은 분이구나 그리고 그런 내용이라면 나도 얼마든지 할 수 있겠네, 해야 되겠네, 하기만 하면 틀림없다는데 당연히 해야지. 이런 생각들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설명을 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