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여러 가지 걱정거리는 많지만 그래도 잘 지내시죠. 최근 실상사에선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혹시 아세요? 무슨 일인지. 실상사에 큰일이 있었는데 여러분들 가정엔 괜찮으신가요? 아마 오늘 처음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이 계실 텐데, 실상사 식구들하고 실상사 신도님들 말고는 좀 낯선 얘기입니다
실상사 식구들도 그렇고 우리 신도님들도 그렇고. 뭔 소리여? 뭐 별일 없는데. 하는 생각이 들겠지만 들어보면 아 그 얘기여? 하고 고개가 끄덕끄덕 할 겁니다.
오랫동안 모색해 왔던 일인데 그동안 우리 역량이 부족해서 진행시키지 못했던 일입니다. 한 번 정리하는 차원에서 다 아는 얘기라 하더라도 좀 설명을 할까 싶습니다.
실상사와 인드라망 생명공동체
1990년도에 ‘선우도량’이라고 하는 스님들의 결사운동 단체가 만들어지고 그 주체들이 실상사에 터를 잡아서 한국불교의 바람직한 방향과 길을 열고 만들어 가자는 결사 운동을 시작 했습니다. 지금은 세월과 함께 스님들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선우도량 활동 자체는 이루어지고 있지 않지만, ‘인드라망 생명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사부대중이 함께 더 나아가 일반 대중도 함께하는 대중 운동으로 지금까지 쭉 진행해 오고 있습니다.
비록 선우도량의 문제의식을 특별하게 내세우지는 않지만 활동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선우도량이 갖고 있었던 문제의식을 인드라망 생명공동체 활동 안에 잘 녹아들도록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실상사 중심으로 ‘불교적 대안으로 사부대중 공동체를 완성도 있게 한번 잘 만들어내고 운영해 보자.’ 하는 것이 있고 다른 하나는 ‘마을 공동체를 잘 구성해서 사회적 대안이 될 수 있도록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활동을 해왔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이제 실상사는 나름대로 누구한테 ‘와서 봐봐. 보면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어.’하고 얘기할 수 있는 만큼 되었습니다. 반면 마을 공동체는 얘기만 하고 있지, 산내면이라고 하는 마을 공동체 전체에 대한 종합적인 구상과 기획은 하지 못한 체 우리가 할 수 있는 어떤 부분 부분의 일들만 하고 있습니다.
이웃사촌과 품앗이 정신으로 바람직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산내 마을 공동체에 대한 종합적인 그림을 만들고 면민을 주체로 해서 추진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가 그렇게까지는 못 갔습니다. 부분적으로 연결시켜 아등바등 애쓰고 있지만 종합적인 그림으로 풀어내야 할 일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백장선원의 통합 운영 결정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우리 실상산중에 백장선원이라고 하는 비구 스님들의 선원이 있습니다. 사실은 실상산중 전체를 통합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체계를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선 수행을 중심으로 대중 활동을 중심으로 경전을 중심으로 공부도 하고 역할도 하도록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백장 선원도 별도의 살림을 하지 않고 통합된 한살림으로 운영하면서, 내용은 전통과 현대에 맞도록 다양하게 만들어 가려고 했었는데 사실은 진척을 못 시켰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냥 늘 했던 대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한 10년 전에 결심을 했습니다. 그 무렵에 행선 스님을 중심으로 몇 분들이 실상사가 갖고 있는 문제의식에 공감을 하고 ‘함께 해보겠다.’라고 해서 시작을 했는데 막상 해보니까 그게 잘 안 돼요. 애초에 갖고 있었던 문제의식을 담아내지 못했어요.
결국 더 이상 늦춰선 안 되겠다. 더 이상 미뤄선 안 되겠다. 우리 상황이 어렵고 버겁긴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제는 본래 취지를 구체화시키는 쪽으로 마음을 내고, 뜻을 모아서 한 걸음이라도 나가도록 하는 게 좋겠다하고 결심을 해서 이번에 한 살림으로 통합 운영하도록 정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별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우리 입장에선 큰일이죠. 적은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갖고 합리적으로 대화하고 소통하면서 서로 공감하고 합의하고 진행해 왔기 때문에 사실은 별 탈 없이 별 문제없이 변화가 잘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만약에 대한민국의 여야가 우리처럼 문제를 다뤘다면 지금 어떻게 됐을까요? 물어볼 것도 없이 온 백성들이 이렇게 전전긍긍해야 될 이유가 생길 턱이 없었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백장선원 문제를 이쪽저쪽이 함께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갖고 합리적으로 대화하고 소통하고 공감하고 합의하는 방식으로 사이좋게 큰 변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여기서 가능한데 다른 데라고 해서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작은 현장에서 가능한 것은 큰 현장에서도 가능한 법입니다. 겉으로만 보면 실상사 산중에서 최근에 일어난 변화는 하찮은 일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굉장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어쩌면 좁히면 남원 지역사회가 대상이 될도 수 있고 좀 더 넓히면 전라북도가 대상이 될 수도 있고 좀 더 크게 넓히면 대한민국이 대상이 될 수도 있죠.
우리가 백장선원 문제를 잘 풀어내고 잘 만들어내듯이 크고 작은 현장에서도 그렇게 적용하여 잘 소화시켜 낸다면 불교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큰 의미를 갖게 된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과 확신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다음은 이제 한 살림으로 가면서 뭘 하려고 하는 것인가? 따로 살 때 하고 비슷하게 갈 것이면 굳이 한 살림 체계로 갈 이유가 없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제 그 부분을 조금 얘기를 할까 합니다.
한국 불교의 정체성과 수행론
누군가가 한국불교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하면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불교관과 실천론으로는 한국 불교만이 갖는 정체성을 설득력있게 내놓을 수가 없습니다. 현대 한 100년 역사를 놓고 보면 ‘한국 불교는 일본 불교의 아류다.’ 100년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 불교는 중국 불교의 아류일 뿐이다.’ 라고 평가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한국불교 1700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있지만 내용을 냉철하게 들여다보면 기존한 불교관과 실천론을 답습하는 형태로 계속 간다고 할 경우 일본 불교의 아류 또는 중국 불교의 아류 더 나아가면 인도 불교 아류라는 조롱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죠.
비록 이 문제를 공론화시켜서 다루지는 못했지만 어떤 형태로든 한국불교다운 불교관과 실천론을 우리가 만들어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문제의식을 대중적으로 규모 있게 다루지는 못했지만 선우도량 만들 때, 그다음에 인드라망 생명공동체를 만들 때 그 문제의식들을 나름대로 계속 천착해왔습니다. 어쩌면 어설프기도 하고 또는 우연하게 그렇게 됐다고 할 수 있는 지점들도 있고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나름대로 답이 되도록 하고자하는 마음으로 만들어진 것이 중도로 본 본래붓다와 동체대비론입니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나는 외국은 잘 모릅니다. 하지만 귀동냥으로 들은 내용들을 참고해서 생각해보면 한국 불교만큼 본래 부처를 강조하는 나라는 없다고 봅니다. 제 나름대로는 한국 불교의 본래 부처론이야말로 여래께서 뜻한 정법의 정신이 잘 계승되고 잘 담겨졌으며 또는 한국 불교의 탁월성도 잘 드러나고 있기 때문에 어디다 내놔도 대단히 매력적인 불교라는 사실에 대해 굉장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간화선의 평가와 새로운 수행방향
한국 불교를 보통 ‘조사선 정신을 계승한 간화선 수행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요즘 간화선은 안타깝게도 평가를 못 받고 있습니다.제가 경험한 60년 세월 동안, 몸소 선방에 들어가서 십수년 살아보기도 하고 또 간화선에 일생을 바쳤던 분들과 교류해 보기도 하고 등등 해보면 우리가 주장하고 자랑하는 것처럼 좋은 내용과 좋은 결과가 만들어지지 않고 있어요. 그래서 현대에 와서 지금 많은 비판을 받게 되기도 하고 우리도 모르게 위축되기도 하고 간화선의 위상이 현격하게 낮아지기도 하고 심각하게는 간화선 갖고는 안 된다는 패배감들이 크게 작동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을 못 찾고 있습니다. 여전히 선방 쪽에서는 간화선 전통을 강조하고 있지만 종단은 ‘선 명상’이라고 하는 새로운 내용으로 활로를 열어보겠다고 움직이고 있는데 뭔가 희망적이기 보다는 혼란스러운 상황입니다.
할 수 없이 우리라도 작지만, 백장선원을 무대로 해서 간화선에 대해 제대로 정리 해보면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입니다. 많은 대화와 토론을 통해 평가하고 정리를 해 보니 ‘이제야말로 진짜 간화선이 빛을 발할 시대 조건이다. 간화선을 세계화시키기 위해 발 벗고 나서자.’ 이렇게 결론이 날 수도 있고 반면, ‘간화선은 안 되겠다. 이제 접는 것이 좋겠다.’라는 결론이 날 수도 있겠죠. 어떤 결론이 나든 진지하게 대안을 찾는 노력은 해야 옳다는 생각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입니다.
작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수준에서 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수준에서 정직하게 치열하게 제대로 정리하는 작업을 해야 된다는 마음으로 백장선원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자칫하면 오해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여기저기에서 계속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코 행선 스님이 뭘 잘못하거나 나빠서 정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선 스님은 참 좋은 스님이기도 하고 잘 살기도 하고 열심히 살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우도량 때부터 고민해온 문제의식에 대한 고민이 너무 약한 거예요. 그래서 본인도 그 한계를 알고 스스로 정리를 하는 형태로 마무리가 된 겁니다.
어떻게 될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잘 될지 하다 실패할지 그건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절실한 문제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해 봐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그런 마음이죠. 여러분들도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함께 해주셨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다른 하나는 앞에서 말씀드렸던 대로 인도 불교, 중국 불교, 일본 불교의 아류가 아니라 ‘이게 한국 불교야’하고 자랑스럽게 자신감 있게 당당하게 내세울 수 있는 불교관과 수행론이 확립되도록 하는 그런 작업, 그런 활동을 이제는 내 살림처럼 생각을 하고 백장 선원에서 진행 해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중도로 본 나·실상산중·한국불교의 불교수행론
일단은 기억나는 분도 계실 거예요.
제가 한번 메모돼 있는 것을 그냥 쭉 읽어볼게요.
<중도로 본 한국 불교 수행론>
바로 이해되고 실현되고 경험되도록 하는 수행론을 만들어낸다.
또 한 가지는
한반도의 역사와 인물에 의해 만들어진 내용(원효, 의상, 나옹, 청매)으로 한국 불교 수행론을 확립하고자 한다.
이런 얘기는 더러 들은 기억이 있죠? 그다음에 다른 건 생략하고 그러면 첫 번째 뭘 할 것인가? 두 가지가 핵심적으로 우선적으로 떠오릅니다.
하나는 아까 간화선 문제 말씀을 드렸고 다른 하나는 한국 불교인들은 부처님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알고 있는가? 한국 불교인들의 붓다관. 아마 우리 머릿속에 있는 부처님의 이미지라고 할까? 부처님의 상은 어떤 부분은 사람 같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신 같기도 하고 이런 것들이 혼재돼 있죠.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보통 사람과는 너무나 다른 면모들. 어떤 부분은 사람이라고 하는 게 명확하고 어떤 부분은 신이라고 얘기될 수밖에 없는 그런 내용들이 혼재되어 있는 붓다관입니다. 전 이런 것을 계속 가져가는 한 젊은 세대들, 새로운 세대들에게 불교가 매력을 줄 수 없다고 봐요. 이런 걸 붙잡고 고집 부리는 한은.
그래서 저는 어쨌든 석가모니라고 하는 이 부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이었다. 인간인데 대단히 매력적인 인간, 대단히 탁월한 인간, 대단히 고맙고 소중한 인간. 따라서 기왕 인간으로 태어나 살 바에는 나도 부처님처럼 살 거야. 하고 마음 내게 되는 그런 붓다관을 저는 우리가 정리해 내야 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 붓다관을 조금 더 설명을 드리면 부처님 생애를 다룬 경전들이 몇 개 있습니다. 그중에서 자료를 두루두루 잘 모아서 만들어진 경전이 『불본행집경』입니다. 그 경전에서 부처님 생애를 얘기하고 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고 있는 정신이 뭘까요? 처음부터 끝까지 태어나서 돌아가실 때까지 관통하는 것을 보면 석가모니 부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뭘 한다는 내용은 아예 없습니다. 오로지 중생을 위해 태어나고 죽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태어나기 전에 부처님은 도솔천에 계셨습니다. 도솔천은 우리가 목숨을 걸고라도 가서 태어나고 싶은 좋은 나라입니다. 도솔천이라고 하는 너무나 좋은 세상을 버리고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는 이유가 뭐일까요? 극락정토인 도솔천에서 고통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사바세계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는데 왜 내려왔을 것 같습니까?
경전에는 ‘뭇 생명들을 위하여 나는 사바세계로 간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렇게 시작을 합니다.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뭇생명들을 위해서. 그들을 고통으로부터 해탈할 수 있도록 당당하고 평화롭고 자유로운 삶을 실현하고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지금 도솔천의 그 좋은 나라를 버리고 고통이 부글거리는 사바세계로 내려간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은 어떻게 할까요? 오로지 중생을 위해서 나는 출가한다. 이렇게 얘기 돼 있어요. 자신을 위해서 출가한다는 말은 없어요. 중생을 위해서 출가한다. 중생을 위해서 깨닫는다. 중생을 위해서 설법한다. 중생을 위해서 마지막은 뭐예요? 열반한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죽는 것마저도 중생을 위해서 이렇게 돼 있어요.
이런 내용을 우리가 평소에 법문하면서 많이 사용하는 언어가 있는데 그게 뭘까요? ‘대비원력’ 이런 말들입니다. 또는 ‘동체대비’ 라는 말로 표현되어지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대비원력’으로 관통하고 있는 거예요. 시작부터 끝까지. 이런 표현들은 주로 대승불교 쪽에서 굉장히 많이 발전하게 됩니다. ‘대비원력의 삶을 살겠다.’라고 하는 게 부처님의 일관된 관점이고 입장이었다는 얘기입니다.
이 얘기는 또다시 무슨 얘기인가. 적어도 석가모니 부처님을 스승으로 하는 제자라고 한다면 이런 얘기가 될 수 있는 거죠. ‘나도 부처님처럼 대비 원력으로 삶을 살 거야.’라고 발심하고 서원하고. 이런 내용을 요즘 세계적인 현대의 스승으로 평가되는 달라이라마 존자의 말씀하고 연결을 시켜 보면 이런 관점과 입장을 달라이라마 존자는 뭐라고 표현하고 있는가? ‘공성의 지혜와 자비심’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공성의 지혜가 바탕 할 때 그 마음은 어떻게 작동할까? 동체대비, 대비원력으로 작동하게 돼 있습니다. 만약에 공성에 대해서 뭘 많이 안다고 하면서도 그 삶이 동체대비심으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면 그건 공성이 뭔지를 잘 모르거나 잘못 다루고 있는 거예요. 달라이라마 존자는 그런 부분에 대한 정확한 관점을 갖고 계신 거예요.
부처님의 생애 자체로 보면 부처님은 너무나 인간적으로 살아간 인물인데 내용을 보면 뭐로 관통하고 있는가? 달라이라마 존자의 말씀처럼 공성의 지혜와 자비심의 정신으로 관통하고 있다. 제 방식으로 표현하면 일심동체 동체대비의 정신으로 관통하고 있다. 너무나 인간적인 인물인데 그렇다는 거죠. 이런 붓다관을 한국 불교인들이라면 누구나 자기 붓다관으로 삼을 수 있도록 이런 것들이 잘 만들어져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쯤에서 말씀드렸던 것들을 상기시켜 보겠습니다.
<중도로 본 나의 붓다관>
이건 제가 개인적으로 한 작업인데 이걸 대중이 함께 공감하고 동의하면 대중이 함께하는 작업이 되겠죠.
참사람 인간 붓다의 삶을 그린다.
우리의 인간상,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참사람 인간 붓다
이거 기억나죠? 여러분이 들었던 얘기 복습한다고 생각하세요.
그런 붓다의 삶을 한번 정리를 하려고 하는데 거기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 뭘 해놨냐면, 늘 하는 얘기를 상기시키는 겁니다.
"나의 진리 나의 가르침은 진지하게 대화를 할 경우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로 이해, 실현, 경험(증명) 된다."는 사유방식의 관점에서 붓다의 삶을 정리함.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어렵지 않게 너무 복잡하지 않게 누구나 조금만 관심을 갖고 접근하면 누구나 가능하도록 만든다는 그런 얘기입니다.
그래서 이제 부처님 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인간 붓다의 면모가 명료해지도록, 이 책 한 권을 읽으면 ‘아 부처님이 그런 생각으로 그렇게 살아간 사람이구나.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가야 되겠네. 그러면 보나마나 정말로 삶이 멋있겠네.’또는 ‘우리 집안 식구들이 그렇게 살면 우리 집안도 화목하고 참 좋은 집안이 되겠네.’, 우리 절도 또는 남원도, 전라북도는 규모도 작고 인구 숫자도 적고 무슨 자원도 없고 뭣도 없고 뭣도 없고 해서 기죽어 있는데 적어도 전라북도 도민들이 부처님을 원력으로 자신의 인간상으로 삼고 그렇게 발심하고 그런 마음으로 산다면 세계의 자랑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어떻습니까? 이거 한번 해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작업을 하려고 이 자료 저 자료를 틈틈이 뒤적거리다 보니까 몇 가지 새롭게 포착된 게 있어요. 그중에 하나가 칠불통계(七佛通戒)입니다. 기억나십니까?
칠불통계(七佛通戒)라고 하는 것을 우리말로 풀면 일곱 부처님들의 공통적인 가르침 이라는 말입니다. 아니 부처님은 석가모니 부처님 한 사람인데 무슨 일곱 부처님이야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죠. 경전에 보면 과거 칠불(七佛) 이론이 있어요. 그러니까 석가모니 이전, 부처님도 과거 칠불에 속해요. 석가모니 부처님을 포함해서 일곱 부처님의 공통적인 가르침을 칠불통계(七佛通戒)라고 합니다.
이 말은 무슨 얘기냐 하면, 동서고금 누구에게나 적용되어질 수 있는 보편적인 진리다. 이런 얘기인 거죠. 칠불통계라는 말은 모든 부처님들의 공통적인 가르침, 더 확대하면 모든 성인들의 공통적인 가르침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매우 평범한 내용이지만 매우 보편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 내용이다. 그런 얘기가 되는 거죠. 그럼 구체적인 내용은 뭘까? 제가 풀어봤습니다.
1) 중도로 읽은 七佛通偈(칠불통게)
諸惡莫作 (제악막작) 衆善奉行 (중선봉행)
自淨其意 (자정기의) 是諸佛敎 (시제불교)
이제 기억이 살아나죠.
이걸 우리말로 풀면 ‘죽을힘을 다해 나쁜 짓 하지 말고 죽을힘을 다해 좋은 짓 하라.’
‘나쁜 짓 하지 않는 것도, 좋은 짓 하는 것도 털끝만큼의 그 어떤 조건도 없이’ 이것이 모든 붓다의 가르침이다.
조건 없이 해야 그게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또는 완성적으로 하는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여기서 직접적으로 풀어보면 自淨其意 (자정기의) 나쁜 짓 하지 마라. 좋은 짓해라. 그리고 그 마음을 청정케 해라. 이것이 모든 붓다들의 공통적인 가르침이다 이렇게 됩니다.
여기서 핵심은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주로 우리가 마음을 청정케 하려면 어떻게 합니까? 인적이 끊긴 깊은 산으로 들어가야죠. 조용한 곳으로. 그렇죠? 청정한 땅을 찾아서 닭소리 개소리 안 들리는 곳으로. 그러려면 저 히말라야를 가야 돼. 아니면 인도를 가야 돼. 티베트에 가야 돼. 우린 그러고들 있습니다. 청정을 위해, 완성을 위해. 그다음에는 뭘 할까요? 열심히 절해야 돼. 염불 기도해야 돼. 참선해야 돼. 이렇게들 얘기하며 동분서주하죠.
물론 그런 형식이 필요할 수도 있고 타당할 수도 있고 효과적일 수도 있다고 봐요. 그러나 오로지 그렇게만 해야 되는가 하면 그건 아니라고 봐요. 그것도 여러 가지 형식 또는 여러 가지 방식의 하나인 거죠. 그런데 우리는 거의 무조건 그래야 된다고 절대화시키고 있죠. 마치 히말라야 가면 뭐가 있을 것처럼. 온갖 신비 온갖 환상들을 갖게 만들고 있죠.
그런데 여기서 自淨其意 (자정기의)라는 말은 어떤 조건도 없이. 이런 걸 금강경에서는 뭐라고 할까요? 금강경에서는 ‘무주상(無住相)’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또 들은 이야기를 연결시켜보면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이 말을 제일 많이 들었을 겁니다. 그렇죠. ‘무주상보시’ 이 말을 어떤 조건도 없이 라고 풀면 됩니다.
그런데 처음엔 조건 없이 했는데 나중에 가서 막무가내로 억울하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대부분 우리 어머니들이 그렇게 하죠. 내 목숨보다도 더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내 아이를 위해서 조건 없이 하잖아요. 그렇죠. 그때는 뭣 모르고 조건 없이 했어요. 근데 나중에 보니까 내 말을 잘 듣지도 않고 내 마음에 들지도 않고 하는 짓거리가 엉뚱하고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내가 너를 위해서 어떻게 했는데, 그 모양이야. 이렇게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처음 할 때는 별 생각 없이 했어. 나중에 가보니까 내 생각하고 달라.
그러니까 뭔가 나도 모르게 억울한 마음이 부글부글 불타오르는 거죠. 그걸 우리는 업력이라고 얘기합니다. 업력이라고 얘기하기도 하고 습관성이라는 말로 얘기할 수도 있고 그렇죠? 나도 모르게 이 억울한 마음이 작동하는 거예요. 억울한 마음이 작동하기 시작하면 인간의 삶이 참 남루해집니다. 정말로. 삶이 서글프고 초라해져요. 근데 뭐 당사자만 그러겠어요? 관계된 사람들도 함께 또 얽히죠. 이게 다 조건부 구하는 마음 때문에 그런 겁니다.
우리가 왜 칠불통계를 완전하게 또는 청정하게 생활화해야 하는가 하면 첫 번째는 어떤 조건도 없이 무조건 나쁜 짓 하지 않는 것이 이치에 맞으니까.
두 번째는 나쁜 짓 하지 않은 것이 본인에게 유익하니까.
세 번째는 나쁜 짓 하지 않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도 좋으니까.
어떻습니까? 이만하면 어떤 조건도 붙이지 않고 기꺼이 할 만하지 않습니까? 똑같습니다. 좋은 짓은 왜 하는가? 이치에 맞고 나에게 유익하고 우리 모두에게도 유익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어떤 조건도 없이 최선을 다해서 나쁜 짓 하지 않는다. 최선을 다해서 좋은 짓 한다. 이렇게 조건 없이 하게 되면 나쁜 짓 하지 않는 짓거리와 또는 좋은 짓 하는 짓거리가 청정하게 실현이 되는 거예요. 비로소 완성된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이겁니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너무 평범하지 않습니까?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내용들이죠? 교과서에서 듣기도 하고 성경에서 보기도 하고 할머니한테 듣기도 하고 동네 아저씨한테 듣기도 하고 어디서나 보고 들을 수 있는 내용인데 얼마만큼 청정하게 실천하느냐, 얼마만큼 완성도 높게 실천하느냐에 따라서 질적으로 완전히 달라지는 거예요. 만약에 어떤 조건도 없이 이런 삶이 생활화되어진다면 이 삶을 우리는 뭐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요?
그게 완성자 부처의 삶인 겁니다.
진실로 그렇게 마음 쓰고 삶을 살아낼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이상의 부처 삶은 존재하지 않아요. 그리고 이 정도의 삶이면 충분히 괜찮지 않습니까? 대단히 멋있죠. 사람들이 감동을 안 받을 수가 없어요. 실제 적용해 보면. 그리고 이 칠불 통계를 보니까 석가모니라는 부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나와 다름없는 진짜 인간이네 하고 얘기하기에 굉장히 좋은 내용인 거예요. 이것은 제가 최근에 발굴을 한 겁니다. 아니 발굴했다 해야 되나 굴러다니는 것 중에 하나 주은 거죠. 여기저기 널려 있는 건데.
그다음 여래십호에 대해 얘기 했던가요? 여래십호 했어요? 안 했어요? 여래십호는 여래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 세존 인데 어떻습니까? 인간을 지칭하는 이름 같습니까? 아니면 신을 지칭한 이름 같습니까? 사람 이름 같지 않죠?
그래서 여래십호가 인간을 지칭하는 내용이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 풀어봤습니다. 어떻게 풀었는가 하면 응공은 공양을 올리고 싶도록 사는 사람이라고 풀었는데 어떻습니까? 어떤 조건도 없이 나쁜 짓 하지 않고 어떤 조건도 없이 좋은 짓을 하는 사람한테 공양을 올리고 싶겠습니까? 안 올리고 싶겠습니까? 이제 번역한 것을 읽을게요.
2) 중도로 읽은 여래 십호
[여래십호]
① 응공 : 공양 올리고 싶도록 사는 사람
② 정변지 : 진리를 적재적소에 맞게 잘 아는 사람
③ 명행족 : 참되게 알고 그 앎을 온전히 실천하는 사람
④ 선서 : 진리의 길을 잘 걸어가는 사람
⑤ 세간해 : 사회 현실을 이치에 맞게 잘 아는 사람
⑥ 무상사 : 더없이 거룩한 스승 중의 스승인 사람
⑦ 조어장부 : 사람들을 진리의 길로 잘 안내하는 사람
⑧ 천인사 : 특권층과 보통 사람들 모두의 스승인 사람
⑨ 불 : 존재의 실상을 참되게 알고 살아가는 사람
⑩ 세존 : 세상 사람들로부터 두루 존경받는 사람
이렇게 푸니까 어떻습니까? 사람 같죠? 이런 과정을 거쳐 붓다의 삶 자체로 좁혀 갑니다.
3) 중도로 본 붓다의 깨달음 삶, 수행, 깨달음, 전법활동들
(1) 성장과정에서 만들어진 문제의식들
◼ 약소민족의 한과 소망들
◼ 구세주 전륜성왕 싯다르타에 대한 기대들
우리하고 비슷한 부분이 있죠. 우리에게도 약소민족의 한 그런 거 있죠.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약소민족의 한과 소망들. 태어나서 보니까 그런 조건들이었던 거죠. 우리도 비결파들 얘기를 들어보면 구세주가 늘 등장한다고 합니다. 정도령이 등장해서 이 나라를 어떻게 한다는 등. 인간들이 사는 세상 어디나 대동소이합니다. 거기도 똑같아요.
성장 과정에서 만들어진 문제의식들에서 약소민족의 한과 소망들, 구세주 전륜성왕이 되어서 우리를 구제해 줄 것이라고. 싯다르타는 그런 능력을 타고난 사람이니까 우리를 구제해 주는 전륜성왕이 될 거야 이런 예언이 나오고 그러잖아요.
그다음에 두 번째는 그런 과정을 거쳤는데 결과적으로 세상에서는 답이 없기 때문에 출가의 길을 가야 돼 이렇게 얘기하죠. 이때 출가는 당시 종교의 길입니다. 그때 불교는 없을 때예요.
(2) 출가할 수밖에 없었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문제의식들
◼ 묻고 또 물어도 다시 묻게 되는 물음들
• 자신이 누구인지
• 인생이 무엇인지
• 왜 살아야 하는지
• 왜 죽는지
• 죽은 다음은 어떻게 되는지
•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싯다르타도 우리들과 똑같이 이런 물음에 부닥치는 거예요. 그리고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출가하는 겁니다. 출가할 수밖에 없었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문제의식들에서 이렇게 정리를 했습니다.
그다음에
(3) 출가할 때의 문제의식들
◼ 나를 위해, 너를 위해, 우리 모두를 위해 희망이 되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이야말로 인생을 걸고 찾아가야 할 길임에 틀림이 없다.
• 분명 그 길은 있을 터이다
• 아니 반드시 있어야 옳다
• 만일 없다면 기어이 만들어내야 한다.
• 왜? 너를 위해, 나를 위해, 우리 모두를 위해
• 그 길은 어디에 있을까
• 전륜성왕의 길을 버리고 참사람 인간 붓다의 길을 선택하려고 함
전륜성왕의 길을 포기하고 인간 붓다의 길을 선택한 것 자체가 당시 종교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세속의 길이 아니라 종교의 길, 전륜성왕은 세속의 길이잖아요. 싯다르타는 붓다의 길을 선택한 거죠.
◼ 그 때 한 수행자를 만났다.
• 그 수행자에게 들었다.
• 세속엔 그대가 찾는 그 길이 없다
• 그 길은 세속을 온전히 버리고 가야 하는 길이다.
• 국가도, 민족도, 부모도, 형제도, 아내도, 자식도, 명예도, 권력도, 사랑도 모두 버리고 저 건너편으로 나아가야 한다.
• 오로지 나와 너 그리고 우리 모두의 평화와 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좋은 마음・자비의 마음을 붙잡고.
이걸 아까 제가 뭐라고 설명했죠? ‘대비원력의 마음을 붙잡고’ 이런 얘기죠.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우리 모두에게도 좋을 수 있는 대비원력의 마음으로 내 삶을 만들어 가게 되면 그 속에서 또는 그 과정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들, 우리가 해결해야 될 아픔들, 다 그 안에서 풀고 녹이고 승화시키는 게 가능해집니다.
대비 원력의 마음으로 삶을 다뤄 가게 되면 그 안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또는 우리가 어쩌면 풀어내야 될 과제들 등등 아프면 아픈 대로 치유 회복이 가능해지고 또 원은 원대로 실현된다는 얘기죠.
바로 이런 부분을 주목했기 때문에 대승 불교인들은 어떤 원을 세웠는가? 사홍서원을 세운 거예요. 대비원력을 구체화시킨 표현이 사홍서원이에요. 대비원력의 발심과 원력으로 삶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만들어 가면 그 속에서 아픔도 치유되어지고 승화되어지기도 하고 우리의 이상과 꿈들이 실현되어지기도 하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가 간절히 소망하고 있는 부처의 삶이 완성되기도 한다는 얘기죠.
그래서 대비원력으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부처님은 온갖 문제들이 있었지만 그런 게 다 하찮게 취급되어지는 거예요. 우리가 어마어마하게 생각하는 문제들이 다 하찮게.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 삶이 가능해진다는 얘기죠.
오늘은 백장암이 뭔가를 한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뭘 하려고 하는가 했을 때, 이런 것들을 뜻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여러 각도에서 대화하고 토론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부처님이라는 인물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와 똑같은 사람이었구나. 또 그렇다면 누구나 다 부처님처럼 살 수 있겠네. 나도 그렇게 살아야 되지. 이런 마음을 낼 수 있는 그런 붓다관을 확립해 보자 하는 것하고 간화선 문제도 그런 과정을 거쳐서 제대로 정리해 보니까 간화선은 더 이상은 유효하지 않겠다. 이제는 별로 쓸모가 없겠다. 해봐야 그건 괜한 집착이고 욕심이지 뭐 그런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걸 갖고 우리는 종단에 제안해야죠. 간화선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이제 포기하자. 내버리자고.
반면 간화선이야말로 21세기 최고의 길이야. 간화선이야말로 지구촌 시민이 모두가 가야 될 희망의 길이야. 이렇게 정리된다면 우리는 종단에 이걸 강력하게 제시해야죠.
이런 일을 해보고자고 정리해 가고 있는데 어떻습니까? 이런 일을 해보고자 그런 길을 열고 만들어 간다고 한다면 혹 실패한다 하더라도 도전해야 맞지 않겠습니까? 어떻습니까?
우리 한번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 있게 기쁜 마음으로 가봅시다. 오늘 제 얘기는 이렇게 정리하겠습니다.
25년 3월 보현법회 2025.3.16.
실상사의 변화와 한국 불교의 새로운 방향
안녕하세요.여러 가지 걱정거리는 많지만 그래도 잘 지내시죠. 최근 실상사에선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혹시 아세요? 무슨 일인지. 실상사에 큰일이 있었는데 여러분들 가정엔 괜찮으신가요? 아마 오늘 처음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이 계실 텐데, 실상사 식구들하고 실상사 신도님들 말고는 좀 낯선 얘기입니다
실상사 식구들도 그렇고 우리 신도님들도 그렇고. 뭔 소리여? 뭐 별일 없는데. 하는 생각이 들겠지만 들어보면 아 그 얘기여? 하고 고개가 끄덕끄덕 할 겁니다.
오랫동안 모색해 왔던 일인데 그동안 우리 역량이 부족해서 진행시키지 못했던 일입니다. 한 번 정리하는 차원에서 다 아는 얘기라 하더라도 좀 설명을 할까 싶습니다.
실상사와 인드라망 생명공동체
1990년도에 ‘선우도량’이라고 하는 스님들의 결사운동 단체가 만들어지고 그 주체들이 실상사에 터를 잡아서 한국불교의 바람직한 방향과 길을 열고 만들어 가자는 결사 운동을 시작 했습니다. 지금은 세월과 함께 스님들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선우도량 활동 자체는 이루어지고 있지 않지만, ‘인드라망 생명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사부대중이 함께 더 나아가 일반 대중도 함께하는 대중 운동으로 지금까지 쭉 진행해 오고 있습니다.
비록 선우도량의 문제의식을 특별하게 내세우지는 않지만 활동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선우도량이 갖고 있었던 문제의식을 인드라망 생명공동체 활동 안에 잘 녹아들도록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실상사 중심으로 ‘불교적 대안으로 사부대중 공동체를 완성도 있게 한번 잘 만들어내고 운영해 보자.’ 하는 것이 있고 다른 하나는 ‘마을 공동체를 잘 구성해서 사회적 대안이 될 수 있도록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활동을 해왔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이제 실상사는 나름대로 누구한테 ‘와서 봐봐. 보면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어.’하고 얘기할 수 있는 만큼 되었습니다. 반면 마을 공동체는 얘기만 하고 있지, 산내면이라고 하는 마을 공동체 전체에 대한 종합적인 구상과 기획은 하지 못한 체 우리가 할 수 있는 어떤 부분 부분의 일들만 하고 있습니다.
이웃사촌과 품앗이 정신으로 바람직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산내 마을 공동체에 대한 종합적인 그림을 만들고 면민을 주체로 해서 추진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가 그렇게까지는 못 갔습니다. 부분적으로 연결시켜 아등바등 애쓰고 있지만 종합적인 그림으로 풀어내야 할 일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백장선원의 통합 운영 결정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우리 실상산중에 백장선원이라고 하는 비구 스님들의 선원이 있습니다. 사실은 실상산중 전체를 통합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체계를 만들어내고 그 안에서 선 수행을 중심으로 대중 활동을 중심으로 경전을 중심으로 공부도 하고 역할도 하도록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백장 선원도 별도의 살림을 하지 않고 통합된 한살림으로 운영하면서, 내용은 전통과 현대에 맞도록 다양하게 만들어 가려고 했었는데 사실은 진척을 못 시켰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냥 늘 했던 대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다가 한 10년 전에 결심을 했습니다. 그 무렵에 행선 스님을 중심으로 몇 분들이 실상사가 갖고 있는 문제의식에 공감을 하고 ‘함께 해보겠다.’라고 해서 시작을 했는데 막상 해보니까 그게 잘 안 돼요. 애초에 갖고 있었던 문제의식을 담아내지 못했어요.
결국 더 이상 늦춰선 안 되겠다. 더 이상 미뤄선 안 되겠다. 우리 상황이 어렵고 버겁긴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제는 본래 취지를 구체화시키는 쪽으로 마음을 내고, 뜻을 모아서 한 걸음이라도 나가도록 하는 게 좋겠다하고 결심을 해서 이번에 한 살림으로 통합 운영하도록 정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별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우리 입장에선 큰일이죠. 적은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갖고 합리적으로 대화하고 소통하면서 서로 공감하고 합의하고 진행해 왔기 때문에 사실은 별 탈 없이 별 문제없이 변화가 잘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만약에 대한민국의 여야가 우리처럼 문제를 다뤘다면 지금 어떻게 됐을까요? 물어볼 것도 없이 온 백성들이 이렇게 전전긍긍해야 될 이유가 생길 턱이 없었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백장선원 문제를 이쪽저쪽이 함께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갖고 합리적으로 대화하고 소통하고 공감하고 합의하는 방식으로 사이좋게 큰 변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여기서 가능한데 다른 데라고 해서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작은 현장에서 가능한 것은 큰 현장에서도 가능한 법입니다. 겉으로만 보면 실상사 산중에서 최근에 일어난 변화는 하찮은 일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굉장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어쩌면 좁히면 남원 지역사회가 대상이 될도 수 있고 좀 더 넓히면 전라북도가 대상이 될 수도 있고 좀 더 크게 넓히면 대한민국이 대상이 될 수도 있죠.
우리가 백장선원 문제를 잘 풀어내고 잘 만들어내듯이 크고 작은 현장에서도 그렇게 적용하여 잘 소화시켜 낸다면 불교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큰 의미를 갖게 된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과 확신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다음은 이제 한 살림으로 가면서 뭘 하려고 하는 것인가? 따로 살 때 하고 비슷하게 갈 것이면 굳이 한 살림 체계로 갈 이유가 없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제 그 부분을 조금 얘기를 할까 합니다.
한국 불교의 정체성과 수행론
누군가가 한국불교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하면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요.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불교관과 실천론으로는 한국 불교만이 갖는 정체성을 설득력있게 내놓을 수가 없습니다. 현대 한 100년 역사를 놓고 보면 ‘한국 불교는 일본 불교의 아류다.’ 100년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 불교는 중국 불교의 아류일 뿐이다.’ 라고 평가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한국불교 1700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있지만 내용을 냉철하게 들여다보면 기존한 불교관과 실천론을 답습하는 형태로 계속 간다고 할 경우 일본 불교의 아류 또는 중국 불교의 아류 더 나아가면 인도 불교 아류라는 조롱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이죠.
비록 이 문제를 공론화시켜서 다루지는 못했지만 어떤 형태로든 한국불교다운 불교관과 실천론을 우리가 만들어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문제의식을 대중적으로 규모 있게 다루지는 못했지만 선우도량 만들 때, 그다음에 인드라망 생명공동체를 만들 때 그 문제의식들을 나름대로 계속 천착해왔습니다. 어쩌면 어설프기도 하고 또는 우연하게 그렇게 됐다고 할 수 있는 지점들도 있고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나름대로 답이 되도록 하고자하는 마음으로 만들어진 것이 중도로 본 본래붓다와 동체대비론입니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나는 외국은 잘 모릅니다. 하지만 귀동냥으로 들은 내용들을 참고해서 생각해보면 한국 불교만큼 본래 부처를 강조하는 나라는 없다고 봅니다. 제 나름대로는 한국 불교의 본래 부처론이야말로 여래께서 뜻한 정법의 정신이 잘 계승되고 잘 담겨졌으며 또는 한국 불교의 탁월성도 잘 드러나고 있기 때문에 어디다 내놔도 대단히 매력적인 불교라는 사실에 대해 굉장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간화선의 평가와 새로운 수행방향
한국 불교를 보통 ‘조사선 정신을 계승한 간화선 수행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요즘 간화선은 안타깝게도 평가를 못 받고 있습니다.제가 경험한 60년 세월 동안, 몸소 선방에 들어가서 십수년 살아보기도 하고 또 간화선에 일생을 바쳤던 분들과 교류해 보기도 하고 등등 해보면 우리가 주장하고 자랑하는 것처럼 좋은 내용과 좋은 결과가 만들어지지 않고 있어요. 그래서 현대에 와서 지금 많은 비판을 받게 되기도 하고 우리도 모르게 위축되기도 하고 간화선의 위상이 현격하게 낮아지기도 하고 심각하게는 간화선 갖고는 안 된다는 패배감들이 크게 작동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을 못 찾고 있습니다. 여전히 선방 쪽에서는 간화선 전통을 강조하고 있지만 종단은 ‘선 명상’이라고 하는 새로운 내용으로 활로를 열어보겠다고 움직이고 있는데 뭔가 희망적이기 보다는 혼란스러운 상황입니다.
할 수 없이 우리라도 작지만, 백장선원을 무대로 해서 간화선에 대해 제대로 정리 해보면 좋지 않을까 하는 마음입니다. 많은 대화와 토론을 통해 평가하고 정리를 해 보니 ‘이제야말로 진짜 간화선이 빛을 발할 시대 조건이다. 간화선을 세계화시키기 위해 발 벗고 나서자.’ 이렇게 결론이 날 수도 있고 반면, ‘간화선은 안 되겠다. 이제 접는 것이 좋겠다.’라는 결론이 날 수도 있겠죠. 어떤 결론이 나든 진지하게 대안을 찾는 노력은 해야 옳다는 생각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입니다.
작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수준에서 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수준에서 정직하게 치열하게 제대로 정리하는 작업을 해야 된다는 마음으로 백장선원을 정리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자칫하면 오해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여기저기에서 계속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코 행선 스님이 뭘 잘못하거나 나빠서 정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선 스님은 참 좋은 스님이기도 하고 잘 살기도 하고 열심히 살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우도량 때부터 고민해온 문제의식에 대한 고민이 너무 약한 거예요. 그래서 본인도 그 한계를 알고 스스로 정리를 하는 형태로 마무리가 된 겁니다.
어떻게 될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잘 될지 하다 실패할지 그건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절실한 문제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해 봐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그런 마음이죠. 여러분들도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함께 해주셨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다른 하나는 앞에서 말씀드렸던 대로 인도 불교, 중국 불교, 일본 불교의 아류가 아니라 ‘이게 한국 불교야’하고 자랑스럽게 자신감 있게 당당하게 내세울 수 있는 불교관과 수행론이 확립되도록 하는 그런 작업, 그런 활동을 이제는 내 살림처럼 생각을 하고 백장 선원에서 진행 해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중도로 본 나·실상산중·한국불교의 불교수행론
일단은 기억나는 분도 계실 거예요.
제가 한번 메모돼 있는 것을 그냥 쭉 읽어볼게요.
<중도로 본 한국 불교 수행론>
바로 이해되고 실현되고 경험되도록 하는 수행론을 만들어낸다.
또 한 가지는
한반도의 역사와 인물에 의해 만들어진 내용(원효, 의상, 나옹, 청매)으로 한국 불교 수행론을 확립하고자 한다.
이런 얘기는 더러 들은 기억이 있죠? 그다음에 다른 건 생략하고 그러면 첫 번째 뭘 할 것인가? 두 가지가 핵심적으로 우선적으로 떠오릅니다.
하나는 아까 간화선 문제 말씀을 드렸고 다른 하나는 한국 불교인들은 부처님을 어떻게 보고 어떻게 알고 있는가? 한국 불교인들의 붓다관. 아마 우리 머릿속에 있는 부처님의 이미지라고 할까? 부처님의 상은 어떤 부분은 사람 같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신 같기도 하고 이런 것들이 혼재돼 있죠.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보통 사람과는 너무나 다른 면모들. 어떤 부분은 사람이라고 하는 게 명확하고 어떤 부분은 신이라고 얘기될 수밖에 없는 그런 내용들이 혼재되어 있는 붓다관입니다. 전 이런 것을 계속 가져가는 한 젊은 세대들, 새로운 세대들에게 불교가 매력을 줄 수 없다고 봐요. 이런 걸 붙잡고 고집 부리는 한은.
그래서 저는 어쨌든 석가모니라고 하는 이 부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이었다. 인간인데 대단히 매력적인 인간, 대단히 탁월한 인간, 대단히 고맙고 소중한 인간. 따라서 기왕 인간으로 태어나 살 바에는 나도 부처님처럼 살 거야. 하고 마음 내게 되는 그런 붓다관을 저는 우리가 정리해 내야 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 붓다관을 조금 더 설명을 드리면 부처님 생애를 다룬 경전들이 몇 개 있습니다. 그중에서 자료를 두루두루 잘 모아서 만들어진 경전이 『불본행집경』입니다. 그 경전에서 부처님 생애를 얘기하고 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고 있는 정신이 뭘까요? 처음부터 끝까지 태어나서 돌아가실 때까지 관통하는 것을 보면 석가모니 부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뭘 한다는 내용은 아예 없습니다. 오로지 중생을 위해 태어나고 죽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태어나기 전에 부처님은 도솔천에 계셨습니다. 도솔천은 우리가 목숨을 걸고라도 가서 태어나고 싶은 좋은 나라입니다. 도솔천이라고 하는 너무나 좋은 세상을 버리고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는 이유가 뭐일까요? 극락정토인 도솔천에서 고통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사바세계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는데 왜 내려왔을 것 같습니까?
경전에는 ‘뭇 생명들을 위하여 나는 사바세계로 간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렇게 시작을 합니다.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뭇생명들을 위해서. 그들을 고통으로부터 해탈할 수 있도록 당당하고 평화롭고 자유로운 삶을 실현하고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지금 도솔천의 그 좋은 나라를 버리고 고통이 부글거리는 사바세계로 내려간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은 어떻게 할까요? 오로지 중생을 위해서 나는 출가한다. 이렇게 얘기 돼 있어요. 자신을 위해서 출가한다는 말은 없어요. 중생을 위해서 출가한다. 중생을 위해서 깨닫는다. 중생을 위해서 설법한다. 중생을 위해서 마지막은 뭐예요? 열반한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죽는 것마저도 중생을 위해서 이렇게 돼 있어요.
이런 내용을 우리가 평소에 법문하면서 많이 사용하는 언어가 있는데 그게 뭘까요? ‘대비원력’ 이런 말들입니다. 또는 ‘동체대비’ 라는 말로 표현되어지기도 하고요. 그러니까 ‘대비원력’으로 관통하고 있는 거예요. 시작부터 끝까지. 이런 표현들은 주로 대승불교 쪽에서 굉장히 많이 발전하게 됩니다. ‘대비원력의 삶을 살겠다.’라고 하는 게 부처님의 일관된 관점이고 입장이었다는 얘기입니다.
이 얘기는 또다시 무슨 얘기인가. 적어도 석가모니 부처님을 스승으로 하는 제자라고 한다면 이런 얘기가 될 수 있는 거죠. ‘나도 부처님처럼 대비 원력으로 삶을 살 거야.’라고 발심하고 서원하고. 이런 내용을 요즘 세계적인 현대의 스승으로 평가되는 달라이라마 존자의 말씀하고 연결을 시켜 보면 이런 관점과 입장을 달라이라마 존자는 뭐라고 표현하고 있는가? ‘공성의 지혜와 자비심’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공성의 지혜가 바탕 할 때 그 마음은 어떻게 작동할까? 동체대비, 대비원력으로 작동하게 돼 있습니다. 만약에 공성에 대해서 뭘 많이 안다고 하면서도 그 삶이 동체대비심으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면 그건 공성이 뭔지를 잘 모르거나 잘못 다루고 있는 거예요. 달라이라마 존자는 그런 부분에 대한 정확한 관점을 갖고 계신 거예요.
부처님의 생애 자체로 보면 부처님은 너무나 인간적으로 살아간 인물인데 내용을 보면 뭐로 관통하고 있는가? 달라이라마 존자의 말씀처럼 공성의 지혜와 자비심의 정신으로 관통하고 있다. 제 방식으로 표현하면 일심동체 동체대비의 정신으로 관통하고 있다. 너무나 인간적인 인물인데 그렇다는 거죠. 이런 붓다관을 한국 불교인들이라면 누구나 자기 붓다관으로 삼을 수 있도록 이런 것들이 잘 만들어져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쯤에서 말씀드렸던 것들을 상기시켜 보겠습니다.
<중도로 본 나의 붓다관>
이건 제가 개인적으로 한 작업인데 이걸 대중이 함께 공감하고 동의하면 대중이 함께하는 작업이 되겠죠.
참사람 인간 붓다의 삶을 그린다.
우리의 인간상,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참사람 인간 붓다
이거 기억나죠? 여러분이 들었던 얘기 복습한다고 생각하세요.
그런 붓다의 삶을 한번 정리를 하려고 하는데 거기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 뭘 해놨냐면, 늘 하는 얘기를 상기시키는 겁니다.
"나의 진리 나의 가르침은 진지하게 대화를 할 경우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바로 이해, 실현, 경험(증명) 된다."는 사유방식의 관점에서 붓다의 삶을 정리함.
이렇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어렵지 않게 너무 복잡하지 않게 누구나 조금만 관심을 갖고 접근하면 누구나 가능하도록 만든다는 그런 얘기입니다.
그래서 이제 부처님 생애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인간 붓다의 면모가 명료해지도록, 이 책 한 권을 읽으면 ‘아 부처님이 그런 생각으로 그렇게 살아간 사람이구나.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가야 되겠네. 그러면 보나마나 정말로 삶이 멋있겠네.’또는 ‘우리 집안 식구들이 그렇게 살면 우리 집안도 화목하고 참 좋은 집안이 되겠네.’, 우리 절도 또는 남원도, 전라북도는 규모도 작고 인구 숫자도 적고 무슨 자원도 없고 뭣도 없고 뭣도 없고 해서 기죽어 있는데 적어도 전라북도 도민들이 부처님을 원력으로 자신의 인간상으로 삼고 그렇게 발심하고 그런 마음으로 산다면 세계의 자랑거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어떻습니까? 이거 한번 해볼 만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 작업을 하려고 이 자료 저 자료를 틈틈이 뒤적거리다 보니까 몇 가지 새롭게 포착된 게 있어요. 그중에 하나가 칠불통계(七佛通戒)입니다. 기억나십니까?
칠불통계(七佛通戒)라고 하는 것을 우리말로 풀면 일곱 부처님들의 공통적인 가르침 이라는 말입니다. 아니 부처님은 석가모니 부처님 한 사람인데 무슨 일곱 부처님이야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죠. 경전에 보면 과거 칠불(七佛) 이론이 있어요. 그러니까 석가모니 이전, 부처님도 과거 칠불에 속해요. 석가모니 부처님을 포함해서 일곱 부처님의 공통적인 가르침을 칠불통계(七佛通戒)라고 합니다.
이 말은 무슨 얘기냐 하면, 동서고금 누구에게나 적용되어질 수 있는 보편적인 진리다. 이런 얘기인 거죠. 칠불통계라는 말은 모든 부처님들의 공통적인 가르침, 더 확대하면 모든 성인들의 공통적인 가르침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매우 평범한 내용이지만 매우 보편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 내용이다. 그런 얘기가 되는 거죠. 그럼 구체적인 내용은 뭘까? 제가 풀어봤습니다.
1) 중도로 읽은 七佛通偈(칠불통게)
諸惡莫作 (제악막작) 衆善奉行 (중선봉행)
自淨其意 (자정기의) 是諸佛敎 (시제불교)
이제 기억이 살아나죠.
이걸 우리말로 풀면 ‘죽을힘을 다해 나쁜 짓 하지 말고 죽을힘을 다해 좋은 짓 하라.’
‘나쁜 짓 하지 않는 것도, 좋은 짓 하는 것도 털끝만큼의 그 어떤 조건도 없이’ 이것이 모든 붓다의 가르침이다.
조건 없이 해야 그게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또는 완성적으로 하는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여기서 직접적으로 풀어보면 自淨其意 (자정기의) 나쁜 짓 하지 마라. 좋은 짓해라. 그리고 그 마음을 청정케 해라. 이것이 모든 붓다들의 공통적인 가르침이다 이렇게 됩니다.
여기서 핵심은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주로 우리가 마음을 청정케 하려면 어떻게 합니까? 인적이 끊긴 깊은 산으로 들어가야죠. 조용한 곳으로. 그렇죠? 청정한 땅을 찾아서 닭소리 개소리 안 들리는 곳으로. 그러려면 저 히말라야를 가야 돼. 아니면 인도를 가야 돼. 티베트에 가야 돼. 우린 그러고들 있습니다. 청정을 위해, 완성을 위해. 그다음에는 뭘 할까요? 열심히 절해야 돼. 염불 기도해야 돼. 참선해야 돼. 이렇게들 얘기하며 동분서주하죠.
물론 그런 형식이 필요할 수도 있고 타당할 수도 있고 효과적일 수도 있다고 봐요. 그러나 오로지 그렇게만 해야 되는가 하면 그건 아니라고 봐요. 그것도 여러 가지 형식 또는 여러 가지 방식의 하나인 거죠. 그런데 우리는 거의 무조건 그래야 된다고 절대화시키고 있죠. 마치 히말라야 가면 뭐가 있을 것처럼. 온갖 신비 온갖 환상들을 갖게 만들고 있죠.
그런데 여기서 自淨其意 (자정기의)라는 말은 어떤 조건도 없이. 이런 걸 금강경에서는 뭐라고 할까요? 금강경에서는 ‘무주상(無住相)’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또 들은 이야기를 연결시켜보면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이 말을 제일 많이 들었을 겁니다. 그렇죠. ‘무주상보시’ 이 말을 어떤 조건도 없이 라고 풀면 됩니다.
그런데 처음엔 조건 없이 했는데 나중에 가서 막무가내로 억울하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대부분 우리 어머니들이 그렇게 하죠. 내 목숨보다도 더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내 아이를 위해서 조건 없이 하잖아요. 그렇죠. 그때는 뭣 모르고 조건 없이 했어요. 근데 나중에 보니까 내 말을 잘 듣지도 않고 내 마음에 들지도 않고 하는 짓거리가 엉뚱하고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내가 너를 위해서 어떻게 했는데, 그 모양이야. 이렇게 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처음 할 때는 별 생각 없이 했어. 나중에 가보니까 내 생각하고 달라.
그러니까 뭔가 나도 모르게 억울한 마음이 부글부글 불타오르는 거죠. 그걸 우리는 업력이라고 얘기합니다. 업력이라고 얘기하기도 하고 습관성이라는 말로 얘기할 수도 있고 그렇죠? 나도 모르게 이 억울한 마음이 작동하는 거예요. 억울한 마음이 작동하기 시작하면 인간의 삶이 참 남루해집니다. 정말로. 삶이 서글프고 초라해져요. 근데 뭐 당사자만 그러겠어요? 관계된 사람들도 함께 또 얽히죠. 이게 다 조건부 구하는 마음 때문에 그런 겁니다.
우리가 왜 칠불통계를 완전하게 또는 청정하게 생활화해야 하는가 하면 첫 번째는 어떤 조건도 없이 무조건 나쁜 짓 하지 않는 것이 이치에 맞으니까.
두 번째는 나쁜 짓 하지 않은 것이 본인에게 유익하니까.
세 번째는 나쁜 짓 하지 않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도 좋으니까.
어떻습니까? 이만하면 어떤 조건도 붙이지 않고 기꺼이 할 만하지 않습니까? 똑같습니다. 좋은 짓은 왜 하는가? 이치에 맞고 나에게 유익하고 우리 모두에게도 유익하기 때문에. 그러니까 어떤 조건도 없이 최선을 다해서 나쁜 짓 하지 않는다. 최선을 다해서 좋은 짓 한다. 이렇게 조건 없이 하게 되면 나쁜 짓 하지 않는 짓거리와 또는 좋은 짓 하는 짓거리가 청정하게 실현이 되는 거예요. 비로소 완성된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이겁니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너무 평범하지 않습니까?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내용들이죠? 교과서에서 듣기도 하고 성경에서 보기도 하고 할머니한테 듣기도 하고 동네 아저씨한테 듣기도 하고 어디서나 보고 들을 수 있는 내용인데 얼마만큼 청정하게 실천하느냐, 얼마만큼 완성도 높게 실천하느냐에 따라서 질적으로 완전히 달라지는 거예요. 만약에 어떤 조건도 없이 이런 삶이 생활화되어진다면 이 삶을 우리는 뭐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요?
그게 완성자 부처의 삶인 겁니다.
진실로 그렇게 마음 쓰고 삶을 살아낼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이상의 부처 삶은 존재하지 않아요. 그리고 이 정도의 삶이면 충분히 괜찮지 않습니까? 대단히 멋있죠. 사람들이 감동을 안 받을 수가 없어요. 실제 적용해 보면. 그리고 이 칠불 통계를 보니까 석가모니라는 부처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나와 다름없는 진짜 인간이네 하고 얘기하기에 굉장히 좋은 내용인 거예요. 이것은 제가 최근에 발굴을 한 겁니다. 아니 발굴했다 해야 되나 굴러다니는 것 중에 하나 주은 거죠. 여기저기 널려 있는 건데.
그다음 여래십호에 대해 얘기 했던가요? 여래십호 했어요? 안 했어요? 여래십호는 여래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 세존 인데 어떻습니까? 인간을 지칭하는 이름 같습니까? 아니면 신을 지칭한 이름 같습니까? 사람 이름 같지 않죠?
그래서 여래십호가 인간을 지칭하는 내용이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 풀어봤습니다. 어떻게 풀었는가 하면 응공은 공양을 올리고 싶도록 사는 사람이라고 풀었는데 어떻습니까? 어떤 조건도 없이 나쁜 짓 하지 않고 어떤 조건도 없이 좋은 짓을 하는 사람한테 공양을 올리고 싶겠습니까? 안 올리고 싶겠습니까? 이제 번역한 것을 읽을게요.
2) 중도로 읽은 여래 십호
[여래십호]
① 응공 : 공양 올리고 싶도록 사는 사람
② 정변지 : 진리를 적재적소에 맞게 잘 아는 사람
③ 명행족 : 참되게 알고 그 앎을 온전히 실천하는 사람
④ 선서 : 진리의 길을 잘 걸어가는 사람
⑤ 세간해 : 사회 현실을 이치에 맞게 잘 아는 사람
⑥ 무상사 : 더없이 거룩한 스승 중의 스승인 사람
⑦ 조어장부 : 사람들을 진리의 길로 잘 안내하는 사람
⑧ 천인사 : 특권층과 보통 사람들 모두의 스승인 사람
⑨ 불 : 존재의 실상을 참되게 알고 살아가는 사람
⑩ 세존 : 세상 사람들로부터 두루 존경받는 사람
이렇게 푸니까 어떻습니까? 사람 같죠? 이런 과정을 거쳐 붓다의 삶 자체로 좁혀 갑니다.
3) 중도로 본 붓다의 깨달음 삶, 수행, 깨달음, 전법활동들
(1) 성장과정에서 만들어진 문제의식들
◼ 약소민족의 한과 소망들
◼ 구세주 전륜성왕 싯다르타에 대한 기대들
우리하고 비슷한 부분이 있죠. 우리에게도 약소민족의 한 그런 거 있죠. 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약소민족의 한과 소망들. 태어나서 보니까 그런 조건들이었던 거죠. 우리도 비결파들 얘기를 들어보면 구세주가 늘 등장한다고 합니다. 정도령이 등장해서 이 나라를 어떻게 한다는 등. 인간들이 사는 세상 어디나 대동소이합니다. 거기도 똑같아요.
성장 과정에서 만들어진 문제의식들에서 약소민족의 한과 소망들, 구세주 전륜성왕이 되어서 우리를 구제해 줄 것이라고. 싯다르타는 그런 능력을 타고난 사람이니까 우리를 구제해 주는 전륜성왕이 될 거야 이런 예언이 나오고 그러잖아요.
그다음에 두 번째는 그런 과정을 거쳤는데 결과적으로 세상에서는 답이 없기 때문에 출가의 길을 가야 돼 이렇게 얘기하죠. 이때 출가는 당시 종교의 길입니다. 그때 불교는 없을 때예요.
(2) 출가할 수밖에 없었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문제의식들
◼ 묻고 또 물어도 다시 묻게 되는 물음들
• 자신이 누구인지
• 인생이 무엇인지
• 왜 살아야 하는지
• 왜 죽는지
• 죽은 다음은 어떻게 되는지
•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싯다르타도 우리들과 똑같이 이런 물음에 부닥치는 거예요. 그리고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출가하는 겁니다. 출가할 수밖에 없었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문제의식들에서 이렇게 정리를 했습니다.
그다음에
(3) 출가할 때의 문제의식들
◼ 나를 위해, 너를 위해, 우리 모두를 위해 희망이 되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이야말로 인생을 걸고 찾아가야 할 길임에 틀림이 없다.
• 분명 그 길은 있을 터이다
• 아니 반드시 있어야 옳다
• 만일 없다면 기어이 만들어내야 한다.
• 왜? 너를 위해, 나를 위해, 우리 모두를 위해
• 그 길은 어디에 있을까
• 전륜성왕의 길을 버리고 참사람 인간 붓다의 길을 선택하려고 함
전륜성왕의 길을 포기하고 인간 붓다의 길을 선택한 것 자체가 당시 종교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세속의 길이 아니라 종교의 길, 전륜성왕은 세속의 길이잖아요. 싯다르타는 붓다의 길을 선택한 거죠.
◼ 그 때 한 수행자를 만났다.
• 그 수행자에게 들었다.
• 세속엔 그대가 찾는 그 길이 없다
• 그 길은 세속을 온전히 버리고 가야 하는 길이다.
• 국가도, 민족도, 부모도, 형제도, 아내도, 자식도, 명예도, 권력도, 사랑도 모두 버리고 저 건너편으로 나아가야 한다.
• 오로지 나와 너 그리고 우리 모두의 평화와 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좋은 마음・자비의 마음을 붙잡고.
이걸 아까 제가 뭐라고 설명했죠? ‘대비원력의 마음을 붙잡고’ 이런 얘기죠.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우리 모두에게도 좋을 수 있는 대비원력의 마음으로 내 삶을 만들어 가게 되면 그 속에서 또는 그 과정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들, 우리가 해결해야 될 아픔들, 다 그 안에서 풀고 녹이고 승화시키는 게 가능해집니다.
대비 원력의 마음으로 삶을 다뤄 가게 되면 그 안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또는 우리가 어쩌면 풀어내야 될 과제들 등등 아프면 아픈 대로 치유 회복이 가능해지고 또 원은 원대로 실현된다는 얘기죠.
바로 이런 부분을 주목했기 때문에 대승 불교인들은 어떤 원을 세웠는가? 사홍서원을 세운 거예요. 대비원력을 구체화시킨 표현이 사홍서원이에요. 대비원력의 발심과 원력으로 삶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만들어 가면 그 속에서 아픔도 치유되어지고 승화되어지기도 하고 우리의 이상과 꿈들이 실현되어지기도 하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가 간절히 소망하고 있는 부처의 삶이 완성되기도 한다는 얘기죠.
그래서 대비원력으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부처님은 온갖 문제들이 있었지만 그런 게 다 하찮게 취급되어지는 거예요. 우리가 어마어마하게 생각하는 문제들이 다 하찮게.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 삶이 가능해진다는 얘기죠.
오늘은 백장암이 뭔가를 한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뭘 하려고 하는가 했을 때, 이런 것들을 뜻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여러 각도에서 대화하고 토론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부처님이라는 인물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와 똑같은 사람이었구나. 또 그렇다면 누구나 다 부처님처럼 살 수 있겠네. 나도 그렇게 살아야 되지. 이런 마음을 낼 수 있는 그런 붓다관을 확립해 보자 하는 것하고 간화선 문제도 그런 과정을 거쳐서 제대로 정리해 보니까 간화선은 더 이상은 유효하지 않겠다. 이제는 별로 쓸모가 없겠다. 해봐야 그건 괜한 집착이고 욕심이지 뭐 그런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죠.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걸 갖고 우리는 종단에 제안해야죠. 간화선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이제 포기하자. 내버리자고.
반면 간화선이야말로 21세기 최고의 길이야. 간화선이야말로 지구촌 시민이 모두가 가야 될 희망의 길이야. 이렇게 정리된다면 우리는 종단에 이걸 강력하게 제시해야죠.
이런 일을 해보고자고 정리해 가고 있는데 어떻습니까? 이런 일을 해보고자 그런 길을 열고 만들어 간다고 한다면 혹 실패한다 하더라도 도전해야 맞지 않겠습니까? 어떻습니까?
우리 한번 두려워하지 말고 용기 있게 기쁜 마음으로 가봅시다. 오늘 제 얘기는 이렇게 정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