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지금 괜찮으세요? 날씨가 좀 썰렁하죠. 그늘진 곳도 괜찮은가요? 나중에 원망이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준비된 자료를 갖고 얘기를 할까 싶습니다.
제가 요즘에 뭐 하며 사느냐고 물으면 그냥 뒷방 노인으로 산다. 보통 그렇게 얘기를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뒷방 노인으로 살면서 또 아무것도 안 하면 그것도 그렇잖아요. 뒷방 노인은 뒷방 노인의 역할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 이 자료는 뒷방 노인이 만든 내용입니다. 제 입장에서는 우리 속담에 소가 뒷걸음질하다가 쥐를 밟는다. 또는 쥐를 잡는다. 그런 얘기를 하잖습니까. 그러니까 소가 뒷걸음질하다 쥐를 밟은 격으로 저에게 이 내용은 기적 같은 내용입니다.
제 나름대로는 불교를 제대로 해보자. 또 머리 깎고 중이 됐으니까 폼 나게 중노릇 해보자 그러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라고 하는 문제의식으로 그 답 찾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답 찾기를 해보면 불교라고 하는 게 사실은 너무 혼란스러워요. 이유는 역사도 너무 오래됐고 또 병에 따라서 약 처방하듯이 이 사람 저 사람 또는 이 시대 저 시대 이 지역 저 지역에서 만들어지다 보니까 양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요. 그래서 어지간해서는 엄두를 내기 어려운 게 우리 현실입니다.
그렇지만 전체 불교 역사를 통틀어서 크게 나누어 보면 첫째는 부처님의 뜻에 의해 만들어진 불교가 있고 둘째는 보살들에 의해 만들어진 불교가 있고 그 다음은 중국에 건너와서 선사들에 의해 만들어진 불교가 있습니다. 통틀어서 크게 묶어서 보면 세 가지로 얘기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불교를 우리는 보통 초기불교라고 얘기하고 보살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불교를 대승불교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중국으로 들어와서 선사들에 의해 만들어진 불교를 선불교라고 합니다.
공통적으로 끝에 붙는 불교란 말을 놓고 보면 하나의 불교처럼 보이는데 내용을 보면 이게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어떤 것이 진짜인지 사실은 헷갈릴 수 있는 요소들이 너무 많습니다. 맨날 헷갈려 하는 사람을 뽑으라고 하면 대표로 저 자신이 그렇게 헷갈려하면서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한 육십 년 세월을 머리 깎고 절에서 불교를 하며 살아왔는데 지금 차분하게 살펴보니 대부분 헷갈리면서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헷갈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당연히 헷갈리지 않는 뭔가를 찾을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여기도 기웃 저기도 기웃 때에 따라서는 갈팡질팡 우왕좌왕 하면서 여기까지 온 셈인데요. 그런 과정에서 제 자신이 납득될 수 있는 그래 이런 것이구나 이렇게 하면 되겠네 하고 좀 속 시원하게 되는 내용의 불교를 만들어 내야 된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는데 드디어 이제 탄생 한 셈입니다.
이 내용은 매우 단순하지만 부처님 불교인 초기불교와 보살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대승불교 또 선사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선불교 등이 하나의 불교로 관통되고 있음을 조금만 주의 기울여서 보면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도록 해보자 해서 만들어진 내용입니다. 물론 아직은 미완성품입니다. 계속 다듬고 다듬어서 완성도를 높여야 됩니다. 하지만 기본적인 방향과 입장이 잡혔다고 볼 수가 있죠. 그러니까 길을 헤매다가 확실한 길을 찾았고 이제 그 길을 잘 가면 되는 그런 상태의 내용이라고 말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준비된 내용을 읽으면서 같이 공부 해 보죠.
『중도로 본 나의 붓다관과 붓다 수행론』 이건 제 방식으로 그동안 보고 들었던 내용들을 해석하고 정리한 거예요. 제 방식을 다른 분들이 동의 할지 동의 안할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부연 설명으로 「소 찾는 눈으로 본 붓다의 일생 삶」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이 소 찾는다는 사고방식은 선불교의 사고방식이에요. 그러니까 선불교의 사고방식으로 부처님의 일생 삶을 관찰해 본 겁니다.
1. 나의 붓다관과 붓다 수행론
1) 세상에 있는 두 부류의 사람
사람은 그 누구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본인 삶을 본인 마음껏 창조해 낼 주체인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소를 타고 있다.
이거 설명 안 해도 뭔 말인지 아시겠죠? 이제 쭉쭉 가겠습니다.
그 중에 한 부류는 소를 타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필요한 소를 찾기 위해 온 세상 구석구석을 뒤지고 다니느라 일생 바보처럼 좌충우돌 동분서주하다 허망하게 끝나는 경우이다.
나 같은 사람이죠.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비슷해 보입니까? 달라 보입니까? 비슷해 보여요? 팔자가 비슷하네.
또 한 부류는 소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사실대로 알고 그 소를 잘 부려서 일생 너에게도 나에게도 우리 모두에게도 좋고 멋있는 삶을 마음껏 창조하며 살다가는 경우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은 누구일 것 같습니까? 적어도 불교 역사 속에서 짚어본다면 부처님 같은 사람, 보살 같은 사람, 선지식 같은 사람 이런 사람들이죠. 여러분들은 거기에 속합니까? 안 속합니까? 아직은 아닌 것 같아요? 그 다음에
2) 지금 여기 소 타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모르고 세속의 길에서 계속 소를 찾는 사람 범부 싯다르타
이 내용은 부처되기 이전 싯다르타의 삶을 얘기하는 겁니다. 우린 부처님은 태어날 때부터 부처님인 것처럼 뒤죽박죽 혼동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어요. 오늘 이야기 하는 내용은 부처님의 일생을 선의 사고방식으로 해석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재수 좋은 거예요. 일생 8만 4천 법문을 다 들어도 불교를 제대로 하기 어려운데 그 모든 불교를 여기 있는 한쪽으로 다 해결되도록 만들어 놨으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처음엔 세속에서 소타고 소 찾는 길을 치열하게 갔지만 끝내 찾아야 할 소를 못 찾았다.
누가? 싯다르타가 그랬다는 얘깁니다.
그 과정에서 얻은 답은 세속엔 답이 없다는 사실과 출세간의 길, 종교의 길에 답이 있다고 알게 되었다.
이때는 불교가 없을 때입니다. 불교 말고 다른 종교들이 판치고 있을 때인 거죠.
출가, 답이 없는 세속의 길을 버리고 답이 있다고 하는 종교의 길을 선택했다.
출가했다는 얘기는 종교의 길을 선택했다. 이 말입니다.
3) 지금 여기 소 타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모르고 종교의 길에서 소를 찾으려고 하는 범부 싯다르타
출가했어도 아직은 부처님이 아닙니다.
처음엔 스승에게 배운 선정수행을 통해 온갖 황홀하고 신비한 체험을 하는 ‘무소유처’ 선정에 도달했지만 찾아야 할 소를 못 찾았다.
대부분의 우리들은 신비 체험, 종교 체험이라는 말에 다들 약합니다. 그렇죠? 기적에 약하고 신비에 약하고 신통에 약하고 대부분 그렇죠. 그런데 여기서는 황홀한 신비 체험, 신통 체험, 불가사의 체험 그런 거 다 별거 아니다. 지금 그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럼 뭐가 별건가?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느냐 모르느냐가 별거다 이런 얘기입니다.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깨달음) 이상의 신비는 없다. 기적은 없다. 불가사의는 없다. 황홀함은 없다. 지금 그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일(깨달음)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이 부분은 정말 놀라운 부분이에요. 여기에서 소 타고 있다는 사실을 사실대로 알고 그 소를 잘 부리면서 멋있게 산다는 이야기를 불교집안 언어로 바꾸어 보겠습니다.
출가의 길을 선택한 싯다르타 가 무상정각을 이루어서 부처가 된 다음 언제 어디에서나 매순간순간 깨달음을 일상의 삶으로 살아서 그 삶이 나도, 너도, 우리 모두가 날마다 좋은 날의 삶을 살게 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어떻습니까. 불교 공부와 수행이 이처럼 단순명료 하다면 대단히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다음엔 또 다른 스승에게 배운 선정수행을 통해 더 신비하고 황홀한 체험을 하는 ‘비상비비상처’ 선정에 도달했지만, 이번에도 찾아야 할 소를 못 찾았다.
결국 소를 찾지 못하는 선정 수행을 버리고 고행 수행을 했다.
부처님 생애의 이야기입니다.
온갖 고행 수행들을 두루두루 실험 검토한 끝에 대표 고행 수행인 단식 고행 수행과 숨 멈춤 고행 수행을 최정점에 도달할 때까지 진력했다.
하지만 그 어느 길에서도 끝내 소를 찾지 못했다.
고행 수행의 최정점을 실감하게 하는 불상이 있죠. 보신 적 있습니까? 안 보신 분, 못 보신 분들이 많이 계신가 보네요.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 있죠. 그 고행상을 보면 설명이 필요 없어요. 고행의 극치가 어느 정도인가를 너무나 강렬하게 매우 사실적으로 실감하도록 만들어진 불상이죠. 그런데 안 본 사람한테 내가 더 이상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본 사람은 고개를 끄떡끄떡 할 거고 언제든지 기회가 있으면 한번 보시길 바랍니다.
세속의 길이든 종교의 길이든 소타고 소 찾는 기존의 길은 안 가본 길 없이 다 가봤지만 소를 못 찾았다.
끝내 선정 중에 최고로 높은 경지까지 도달해 봤어요. 거기 가면 신통도 나오고 신비 체험도 하고 뭐 황홀한 기쁨도 있고 행복도 있고 평화도 있어요. 그래도 싯다르타 본인이 찾고 싶은 답은 없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죠.
그다음에 고행 수행을 선택 하는데 그것도 최정점까지 간 거예요. 최정점까지 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게 고행상으로 묘사되고 있는 겁니다. 다 해봤지만 답이 안 나오니까
어쩔 수 없이 소타고 소 찾는 선정 수행과 고행 수행이라는 기존 종교의 길, 양극단의 길을 포기 했다.
이제 싯다르타가 지금까지 누구에겐가 묻고 배운 것은 다 해봤어요. 해봤는데 거기서 제시하는 최정점까지 못 가서 포기한 게 아니고, 정점까지 다 가봤지만 자기가 찾는 답이 없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버릴 수밖에 없죠. 그래서 그동안 보고 듣고 배웠던 길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것은 모두 양극단의 길이다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는 겁니다. 양극단의 길이기 때문에 모두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자기 방식의 길을 찾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어요. 다 해봤지만 안 되기 때문에.
4) 주의 기울여 관찰 사유한 끝에 소타고 소 찾는 두 극단의 길을 버리고 중도, 자문자답의 방식을 선택하는 범부 싯다르타
이제 더 이상 누구한테 묻고 배우는 것은 안 하는 거예요. 스스로 묻고 답을 찾아야 되는 상황인거죠. 그런데 여기도 그 자료가 나온 다음에 보니까 더 다듬고 채우는 게 필요하겠다 싶어서 더 채웠습니다. 스스로 묻고 또 물어도 다시 묻게 되는 물음들 인생이 무엇인지 자신이 누구인지 왜 살아야 하는지 왜 죽게 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깜깜한 채 죽기 살기로 악을 쓰고 살고 있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바보들인가? 미쳤는가? 사람들 보면 뭣도 모르면서 죽기 살기로 살잖아요. 그러니까 소타고 소 찾는 삶을 그렇게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싯다르타타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런 문제의식을 갖고 자기 방식으로 답을 찾게 돼요. 훗날 자기 방식으로 한 수행을 뭐라고 표현하는가? 중도라는 말로 표현을 합니다. 어저께도 얘기할 때 보니까 세수하다 코 만지는 것처럼 된다는 얘기를 누가 하더라고요. 그런데 아무렇게나 한다고 해서 세수하다가 코 만지는 것처럼 되느냐? 절대 안 그래요. 제대로 해야만 세수할 때 코 만지듯이 될 수가 있어요. 그러면 부처님은 제대로 하는 걸 뭐라고 표현했는가? 그걸 중도라는 말로 표현한 겁니다.
중도적으로 하면 불교가 어렵지 않습니다. 세수하다 코 만지는 것처럼 되게 돼 있어요. 중도적으로 하면 그렇지만 양극단 방식으로 하면 ‘비상비비상처’ 선정의 경지에 올라가도 안 되고 ‘무소유처’ 선정에 올라가도 안 되고 불가사의, 신비, 기적을 일으켜도 안 돼요. 천지를 다 얻었다 뒤집었다 해도 안 돼요. 전생을 보고 내생을 보고 물위를 걷고 하늘을 날고 별별짓을 다 해도 안 돼요. 지금 그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중도, 삶의 주체인 지금 여기 본인 자신을 직접 대면하여 꼼꼼하게 관찰 사유한 결과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소를 찾는 길에선 세속의 길이든 종교의 길이든 외부의 길이든 내부의 길이든 정신의 길이든 물질의 길이든 그 어떤 길에서도 답이 나올 수 없음을 알게 됐다.
그럼 어떻게 해야 범부 싯다르타가 본인 자신이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사실대로 알 수 있을까
하나는, 선지식 또는 친구에게 ‘우리 소 못 봤소?’ 하고 잘 묻고 배우면 바로 ‘지금 본인이 소 타고 있다.’ 는 사실을 사실대로 알게 되고, 그때부터 그 소를 마음껏 잘 부리며 사는 싯다르타, 붓다가 된다.
잘 묻고 배운다는 말을 불교 언어로는 법문법담이라는 말로 설명을 합니다. 불교에서는 법문이 어떤 참선보다도 어떤 기도보다도 어떤 절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더 최우선적으로 중요한 거예요. 법문 또는 대화를 잘하면 본인이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사실대로 알게 되는 거예요.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는 얘기는 곧 깨닫는다는 말이에요. 더 쉽게 얘기하면 인생을 제대로 알고 살게 된다 이 말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어떤 전제도 없이 지금 여기 삶의 주체인 본인 자신의 참모습에 직접 대면하여 잘 관찰 사유하면 바로, ‘아, 지금 내가 소를 타고 있네.’ 하고 있는 사실을 사실대로 바로 알게 되고, 그때부터 바로 소를 부리는 싯다르타, 붓다가 된다.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사실대로 알고 그 소를 마음껏 잘 부리며 살 때, 비로소 부처가 됐고 부처로 산다는 말이 가능해진다는 얘기입니다. 그 다음에
5) 비로소 처음부터 자신이 소타고 있었음을 사실대로 앎으로써 소 찾아 헤매는 삶을 버리고 소를 부리는 삶을 살아가기 시작하는 싯다르타, 붓다
비로소 부처가 됐다는 얘기입니다. 그 뒤로는 쭉 읽어가겠습니다.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사실대로 아는 순간 오랜 세월 소 찾기 위해 동분서주 했던 모든 헛된 수고로움을 바로 멈추게 됐다.
우리는 지금 뭐 하고 있죠? 소타고 소 찾아서 헤매고 있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바빠요. 힘들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한심스럽기도 하고 통탄스럽기도 하고 그런 거죠.
동시에 편안하고 기쁜 마음으로 타고 있는 소를 잘 부려서 반야바라밀행을 생활화하여 날마다 좋은날의 삶을 창조하는 싯다르타, 붓다가 되었다.
바로 여기까지가 석가모니 부처님이 소 타고 소 찾는 중생으로서의 살림살이하고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소를 부리면서 사는 부처의 살림살이를 간추린 겁니다.
바로 이어서 누구나 소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할 경우 잘 이해하고 공감할 만한 사람을 찾으려고 마음먹었다.
부처님이 깨달은 다음에 처음 뭐 하시는지 아십니까? 부처님이 소를 찾고 보니까(깨달음) 이게 너무 좋은 거예요. 이게 최고인 거예요. 이것만 있으면 삶은 희망찬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한테 이걸 알려주고 싶은데 이게 인생의 답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사람들이 이걸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부분이 걱정이 된 거예요. 그래서 아무한테나 가서 설명한 게 아니고 대화가 될 만한 사람을 찾아서 대화를 해야 되겠다 마음먹고 그 사람을 찾게 됩니다.
처음엔 선정수행을 가르쳐준 두 스승을 생각했는데, 안타깝게도 이미 돌아가시고 안 계시는 상태였다.
이분들이라면 말이 통하겠다 싶어서 그분들을 만나려고 했는데 알아보니까 이미 다 돌아시고 안 계신거예요. 그분들은 다 종교 수행자들이에요.
그 다음에 싯다르타 본인이 고행을 포기했을대 싯다르타는 이제 변절했다 이제 타락했다 하고 비난하면서 떠나간 다섯 친구들을 생각해요. 자기를 비난하고 떠났던 이 친구들 정도면 그래도 대화가 되겠지 이렇게 해서 알아보니까 천리 떨어진 곳에 있는 거예요. 천리면 한 400킬로죠? 맞습니까? 한 2 300킬로 떨어진 곳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거예요. 그래서 물어물어 걸어서 그 친구들을 찾아갑니다.
여러분들 머릿속에 들어있는 부처님 이미지하고 말이 될 만한 친구를 찾아서 물어물어 천리길을 걸어가는 부처님 모습하고 연결이 됩니까? 연결이 안 되죠. 그렇게 한심스럽고 초라한 인간이 부처님이야? 그렇잖아요. 너무 한심스럽고 초라해 보이지 않습니까?
어쨌든 그렇게 해서 찾아가요. 찾아갔는데 환영은 커녕 무시당해요. 어떻게 해서든 대화를 해보려고 했는데 안 돼요. 고행할 때도 못 깨달았는데 고행을 포기한 사람이 깨달았다는 게 말이 되냐 고행을 해도 못 깨달았는데 선정 수행을 해도 못 깨달았는데 그거 다 포기하고 그야말로 이제 범속한 인간으로 돌아갔는데 깨달았다는 말을 믿으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되냐고 하며 거부하고 또 거부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들이라면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별 수 없죠. 사정사정하는 수 밖에. 내 얘기 좀 들어봐. 내 얘기 좀 들어봐. 이렇게 사정하고 또 사정하고 또 사정하죠. 경전에는 꼭 이렇게 돼 있지는 않습니다. 이건 내방식 의 해석이에요.
그냥 대충 보면 부처님은 신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알아서 무릎 꿇게 돼 있어요. 그런데 좀 꼼꼼히 사실적으로 따져보면 그렇지 않아요. 잘 관찰 사유하는 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불교 수행은 한마디로 하면 관찰 사유예요. 결국 내 얘기 들어봐 들어봐 하고 해도 해도 안 되니까 마지막 카드를 내놓습니다.
그게 뭘 것 같아요? 선정 수행 할 때도 같이 수행을 했고 고행 수행을 할 때도 같이 수행을 했어요. 이 다섯 친구들이 같이 수행을 해보니까 싯다르타라는 인물이 굉장히 천재성을 갖고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대단한 스승들보다도 더 탁월하다는 걸 알게 된 거예요. 이 사람이 그런 천재성을 갖고 있는 건 알지만 변절 타락자이기 때문에 깨달았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죠. 그러니까 싯다르타가 마지막 카드로 내놓은 게 뭐냐 하면 너 나 알잖아. 그전에 우리 같이 살았잖아. 같이 살 때 일찍이 내가 한 번이라도 이렇게 강하게 주장하는 걸 본 적이 있어? 이렇게 얘기해요.
그 얘기를 듣고 보니까 실제 그런 거예요. 한 번도 이렇게 하는 걸 본 적이 없는 거예요.
그때 비로소 마음을 열고 대화가 시작이 돼요. 그리고 대화 끝에 이 다섯 친구들도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소를 마음껏 부리면서 날마다 좋은 날의 삶을 살게 돼요.
자 그러면 또 읽어보겠습니다.
다음에 생각한 사람이 자신을 타락했다며 비난하고 떠난 다섯 친구 고행자들이다.
소를 타고 있음을 사실대로 잘 알고 잘 부리는 붓다가 된 싯다르타가 물어물어 다섯 친구들을 찾아가서 소 찾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많은 대화(법문) 끝에 다섯 친구들도 자신이 본래부터 소를 타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사실대로 잘 알게 되었다.
그 순간 다섯 친구들도 붓다, 싯다르타처럼 소 찾기 위해 갈팡질팡 동분서주하는 바보 같은 헛수고를 바로 멈추게 되었다.
동시에 편안하고 기쁜 마음으로 붓다, 싯다르타처럼 소를 잘 부려서 반야바라밀행을 생활화하고 나아가 날마다 좋은 날의 삶을 창조하는 멋진 삶을 살기 시작했다.
여기까지가 다섯 친구들에게 법문을 해서 그들도 깨달은 자로 살아가도록 하게 됐다는 이야기입니다.
6) 드디어 붓다, 싯다르타처럼 본래부터 자신이 소 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그 소를 잘 부려서 날마다 좋은 날의 삶을 창조하는 도반이 60여명
그다음에 야사비구라고 하는 청년들을 만납니다. 오비구 다음 야사비구라고 하는 청년들을 만나는데, 이 청년들은 종교인들이 아니에요. 그 시대 그 동네에서 제법 똑똑한 부잣집 청년들이에요. 제법 똘똘한 이 친구들이 우연히 부처님을 만나 부처님과 대화를 하게 되고 대화를 통해서 다 출가를 해요. 출가하고 바로 얼마 안 가서 아라한들이 돼요. 깨달은 사람이 된 거예요. 그러니까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된 거죠. 지금 그 얘기입니다.
60여 명이라고 하는 것은 그 친구들이 50여명 되고 다섯 비구들하고 이렇게 합치면 한 60여 명. 그러니까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삶을 살게 된 사람들이 60여 명 된 거예요.
소를 잘 부리는 60여명의 도반들과 함께 뭇 생명들로 하여금 자신이 소를 타고 있음을 사실대로 잘 알고 소를 잘 부려 반야바라밀행을 생활화함으로써 날마다 좋은날의 삶을 창조하도록 하는 길잡이로 나서자고 뜻을 모았다.[전법선언]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삶을 살아보니까 이것이 인생의 정답이고 이것이 세상의 희망이다 이런 자각과 확신이 생긴 거죠. 그 좋은 걸 혼자 하면 어쩝니까? 혼자만 하면 안 되잖아요. 좋은 걸 혼자만 하려고 든다고 할 경우는 아무리 좋은 걸 하더라도 그건 쓸모없는 물건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볼 적에는. 그래서 내용이 너무 좋으니까 다른 사람들에게도 같이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게 너무나 마땅한 일인 거죠.
그래서 그 첫 번째는 대화할 사람을 찾고 두 번째는 이 내용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함께 할 친구들을 찾는 거예요. 그것이 한 60여 명 만들어지니까 “자~ 요이땅!”하고 이제부터 우리는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길을 떠나자 이렇게 된 겁니다. 그걸 전법 선언 이라고 얘기합니다.
불교역사의 입장에서 보면 전법 선언은 대단히 중요하고 유명한 내용입니다. 60여명이 뜻을 함께 하기로 결의하고 각자 인연이 있는 곳으로 길을 떠납니다. 60여 명이. 근런데 길 떠나는 친구들에게 부처님이 뭐라고 얘기하냐면 두 사람이 한 길을 같이 가면 안 되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얘기해요. 이런 점이 기독교하고 다른 거예요. 기독교는 정반대로 혼자 가면 안 된다고 합니다. 여기까지가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고 전법 선언을 하기까지의 내용입니다. 지금까지 설명 드린 얘기가 여기 써졌네요.
뜻을 모은 도반들 모두가 뭇 생명들로 하여금 자신이 본래부터 소를 타고 있음을 알고 그 소를 잘 부려서 반야바라밀행을 생활화하고 나아가 날마다 좋은 날의 삶을 창조하도록 길을 안내하기 위해 각자 인연 따라 자기 길을 떠났다.
그리고 싯다르타 붓다는 그때부터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까지 그 길을 걸었고, 그 삶을 살았다. 누구나 할 것 없이 그 길을 가고 그 삶을 살면 그 일생이 멋있고 좋을 터이니 우리 모두 손에 손잡고 죽는 날까지 함께 가자며 그 길을 걷고 또 걸었다.
부처님은 죽는 날까지 그 길을 걸었어요.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비로소 희망의 길, 오래된 미래의 길이 시작되었다. 이제 소타고 소 찾는 바보 같은 역사는 끝났다. 본래부터 소를 타고 있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고 그 소를 잘 부려서 본인에게도, 상대에게도 우리 모두에게도 좋은 멋진 삶을 창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 될 터이다. 그때부터 붓다는 주어진 매 순간 순간을 타고 있는 소를 잘 부려서 날마다 좋은 날을 창조하는 나날의 삶을 살았다. 황홀한 저녁노을처럼 평화롭고 아름답게 생을 마감하는 그날 그 순간까지 그렇게 살다 그렇게 갔다.
이게 부처님의 일생을 그 어마어마한 내용을 이렇게 간추린 것입니다. 그다음은 이제 제 얘기입니다. 나의 불교 수행론 이것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이걸 어떻게 정리해 낼 것인가? 근데 하다 보니까 간단하게 정리가 되었어요. 나의 불교 수행론은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나도 부처님처럼. 이게 나의 불교 수행론입니다. 지금까지 부처님의 일생을 정리했잖아요. 정리한대로 나도 부처님처럼 살면 돼요. 그 이상 더 뺄 것도 없고 보탤 것도 없어요. 그게 전부고 최고예요. 그거 말고 다른 걸 찾는다면 소타고 소 찾는 헛수고의 삶이 되고 말죠.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2. 나의 불교 수행론, 나도 붓다처럼 살리
이제 소타고 소 찾는 바보천치의 삶은 끝났다. 지금 이 순간부터 타고 있는 소를 잘 부려서 본인 마음껏 본인에게도 상대에게도 우리 모두에게도 좋은 멋진 삶을 창조하는 나날의 삶을 세세생생토록 살아갈 일이다. 비로소 미혹문명을 넘어 깨달음의 문명 길을 열어가는 희망의 서광이 시작되었다. 우리 모두 손에 손잡고 함께 그 길을 세세생생토록 그렇게 살다 그렇게 간다면 참으로 멋진 삶, 좋은 삶, 편안하고 흐뭇한 삶일 터이다. 그래, 가는 삶도 오는 삶도 날마다 좋은 날이다.
이렇게 살면 멋지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살기 위해서 함께할 것을 우리가 약속할 수 있습니까? 결의할 수 있습니까? 누구처럼? 소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소를 부리며 살기 시작한 60여 명의 비구들처럼. 그렇게 결심할 수 있겠습니까? 약속할 수 있겠습니까?
우린 그렇게 해야죠. 그걸 우리는 만일 결사라는 이름으로. 지금 우리는 길 찾기를 하고 길 만들기를 하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런 길이 활짝 열리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함께 하자고 발심도 하고 또 결심도 하고 그런 약속을 확실히 해서 나는 만일 결사를 잘 하겠노라고 결심하고 다짐하는 차원에서 크게 한번 박수 한번 칩시다.
‘우리도 부처님같이’라는 노래가 있죠. 아까도 어디 가사에 나오는 것 같던데 우리도 부처님같이 이런 노래가 있죠. 그러면 떠오르는 첫 이미지가 뭐예요? 나도 부처님 같이 살 거야. 그렇게 강조도 하고 권하기도 하고 그래서 노래로도 만들어지고 그랬거든요. 그럴 경우 내가 본받을 부처님의 이미지가 어떤 이미지예요?
대부분은 6년 고행상을 떠올립니다. 오늘 우리 축원문에도 보니깐 길 잃고 힘들고 안타깝고 갑갑할 때는 부처님의 고행상을 떠올린다. 이렇게 돼 있어요. 부처님은 고행하지 말라고 그랬어요. 그건 길이 아니야. 그건 잘못된 길이야. 그 길로 가선 안 돼. 그런데 우리는 길을 못 찾아 헤맬 때 부처님의 고행상을 떠올립니다. 아마 대부분 기성불교인들은 나도 부처님처럼 살아야 돼. 나도 부처님처럼 살 거야. 이렇게 할 때 그때 떠올리는 이미지는 6년 고행상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저도 그렇게 알고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잘 관찰 사유하고 또 관찰 사유하고 또 관찰 사유해 보니까 아닌 거예요.
이건 비밀인데 오늘 여러분들한테 제가 공개하는 거예요. 지금 이거 함부로 누설하면 안 되는데, 왜냐하면 이건 누설하면 왕따 당해요. 여러분들 왕따 당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그러지 않고서는 우리가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사는 삶을 대중화시킬 수가 없어요. 왕따 당할 각오를 안 하면.
그리고 맨날 고행상만 생각하는데 거기에 무슨 편안함이 있겠습니까? 거기에 무슨 아름다움이 있겠습니까? 거기에 무슨 멋있음이 있겠습니까? 늘 찡그리고 앉아서 고민만 해야 되지. 이제는 그런 바보 천치 같은 불교를 그만하자. 그리고 진짜 희망이 되고 답이 되는 불교를 하자는 얘기죠.
그게 뭘까?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사실대로 잘 알고 소를 잘 부려서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우리 모두가 좋을 수 있는 그러면 된 거 아닌가요? 뭔가 끝내기를 멋있게 해야 될 것 같은데. 멋있게 할 수 있는 뭐가 있었는데 어디로 가고 사라져 버렸어요. 이게 나이가 드니까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금강경 얘기로 끝내야 되겠네요. 어저께도 얘기하는 거 보니까 마찬가지예요. 해도 해도 잘 안 된다. 한 방이 필요한데 한 방이 안 된다. 오늘 내가 한 방을 설명했습니다. 망상이 부글부글 끊는 것은 수행을 한다고 해서 화두를 하든지 염불을 하든지 진언을 하든지 절을 하든지 독송을 하든지 해보면 수행할 때 처음 나타나는 대표적인 수행 공덕이 바로 망상이 부글부글 끓는 걸 확인하게 돼는 거예요. 평소는 잘 몰라요. 망상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뭐가 망상인지도 잘 몰라요. 수행을 해봐야 알아요.
근데 신경 쓸 거 없어요. 냅둬 버려요. 망상이 끓거나 말거나 부글부글하거나 폭발하거나 신경 쓸 거 없어요. 냅둬 버려요. 그럼 중요한 건 뭘까? 신경 쓰지 말고 냅둬 버려라. 그걸 금강경에서 뭐라고 얘기해요? 그걸 무주상 이렇게 얘기하고 있어요. 응무소주 이생기심 그러잖아요. 무주상이라는 말이 그 말이야. 냅둬 버려라. 신경 쓰지 마라. 망상이 끓든지 말든지 폭발을 하든지 말든지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거 아니죠. 그럼 그다음에 뭐예요?
응무소주 다음에 이생기심. 매 순간순간 새로운 마음을 일으켜라 이렇게 하고 있어요. 이게 중요한 거예요. 매 순간순간 새로운 마음을 내는 거야. 망상이 있네. 없네. 끓네. 안끓네. 좋네. 궂네. 왜 이것이 안 되는 거야? 뭐 등등등 그런 거 신경 쓰지 마라.
그걸 응무소주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어요. 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마라. 지나간 것에도 구애받지 말고 미래에도 구하지 말라. 오로지 지금 여기 온전하게 이런 얘기죠. 어떻게? 새로운 마음을 일으켜라. 새로운 마음이 뭐예요?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사람은 관세음보살 부르는 게 새로운 마음이에요. 화두를 드는 사람은 화두를 드는 게 새로운 마음이야. 진언을 외우는 사람은 진언을 외우는 게 새로운 마음이야.
대혜종고는 수행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익숙한 것은 생소하도록 만들고 생소한 것은 익숙하도록 만드는 게 수행이다.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염불하는 얘기를 갖고 한번 해보죠. 번뇌 망상을 하는 게 익숙한가요? 염불하는 게 익숙한가요? 그렇죠. 번뇌 망상은 하지 말라고 해도 저절로 하게 됩니다. 익숙합니다. 그러니까 대혜종고는 수행을 하는 사람은 번뇌 망상에 자꾸 끌려 다니면 안 된다고 지금 그 얘기하는 거예요. 그럼 뭘 해야 됩니까?
그 다음에 ‘낯선’ 것이 뭐예요? 낯선 것은 진언를 외운다든가 아니면 염불를 한다든가 독경을 한다든가 화두를 든다든가 이거 절로절로 돼요? 안 되죠. 망상은 절로절로 되는데 이건 안 돼. 이건 어떻게 해야 돼요? 마음먹고 해야 돼요. 낯설어요. 이 낯선 것을 익숙해지도록 만드는 게 수행이라고 얘기하고 있어요. 절로절로 되는 것을 낯설게 만들어내는 것이 수행이라고 했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나도 부처님처럼 살 거야. 왜냐하면 그렇게 강조하기도 하고 권하기도 하고 하니까 그랬을 때 기성불교인들의 머릿속의 이미지는 6년 고행상을 떠올리게 돼 있어요. 근데 그건 부처님 뜻하고는 정반대예요. 오히려 부처님 뜻을 완전히 어그러뜨리는 길이예요. 그리고 사람을 오도하는 길, 더 막말로 하면 사기 치는 거죠.
그럼 뭘 떠올릴까? 뭘 떠올려야 됩니까? 소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사실대로 잘 알고 이 소를 잘 부려서 나도 좋고 너도 좋고 우리 모두에게도 좋은 삶을 창조자하는 사람으로 살아간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누구라고 한다? 우리의 스승 부처라고 한다.
그 부처의 제자인 나는 어떻게 한다? 부처님처럼 소 탄줄 알고 마음껏 잘 부려서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우리 모두에게도 좋은 그런 삶을 창조해 간다. 그러면 그 스승과 제자가 어떻습니까? 잘 맞아떨어지지 않나요? 궁합이 잘 맞지 않습니까? 아귀가 쩍쩍 맞죠. 우리가 불교를 이렇게 한다면 멋있겠습니까? 안 멋있겠습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할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우리 불교를 이렇게 합시다. 네 고맙습니다.
1900일 입재법회
중도로 본 나의 붓다관과 붓다수행론
소 찾는 눈으로 본 붓다의 일생 삶
안녕하세요. 지금 괜찮으세요? 날씨가 좀 썰렁하죠. 그늘진 곳도 괜찮은가요? 나중에 원망이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준비된 자료를 갖고 얘기를 할까 싶습니다.
제가 요즘에 뭐 하며 사느냐고 물으면 그냥 뒷방 노인으로 산다. 보통 그렇게 얘기를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뒷방 노인으로 살면서 또 아무것도 안 하면 그것도 그렇잖아요. 뒷방 노인은 뒷방 노인의 역할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 이 자료는 뒷방 노인이 만든 내용입니다. 제 입장에서는 우리 속담에 소가 뒷걸음질하다가 쥐를 밟는다. 또는 쥐를 잡는다. 그런 얘기를 하잖습니까. 그러니까 소가 뒷걸음질하다 쥐를 밟은 격으로 저에게 이 내용은 기적 같은 내용입니다.
제 나름대로는 불교를 제대로 해보자. 또 머리 깎고 중이 됐으니까 폼 나게 중노릇 해보자 그러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라고 하는 문제의식으로 그 답 찾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답 찾기를 해보면 불교라고 하는 게 사실은 너무 혼란스러워요. 이유는 역사도 너무 오래됐고 또 병에 따라서 약 처방하듯이 이 사람 저 사람 또는 이 시대 저 시대 이 지역 저 지역에서 만들어지다 보니까 양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요. 그래서 어지간해서는 엄두를 내기 어려운 게 우리 현실입니다.
그렇지만 전체 불교 역사를 통틀어서 크게 나누어 보면 첫째는 부처님의 뜻에 의해 만들어진 불교가 있고 둘째는 보살들에 의해 만들어진 불교가 있고 그 다음은 중국에 건너와서 선사들에 의해 만들어진 불교가 있습니다. 통틀어서 크게 묶어서 보면 세 가지로 얘기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불교를 우리는 보통 초기불교라고 얘기하고 보살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불교를 대승불교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중국으로 들어와서 선사들에 의해 만들어진 불교를 선불교라고 합니다.
공통적으로 끝에 붙는 불교란 말을 놓고 보면 하나의 불교처럼 보이는데 내용을 보면 이게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어떤 것이 진짜인지 사실은 헷갈릴 수 있는 요소들이 너무 많습니다. 맨날 헷갈려 하는 사람을 뽑으라고 하면 대표로 저 자신이 그렇게 헷갈려하면서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한 육십 년 세월을 머리 깎고 절에서 불교를 하며 살아왔는데 지금 차분하게 살펴보니 대부분 헷갈리면서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헷갈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당연히 헷갈리지 않는 뭔가를 찾을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여기도 기웃 저기도 기웃 때에 따라서는 갈팡질팡 우왕좌왕 하면서 여기까지 온 셈인데요. 그런 과정에서 제 자신이 납득될 수 있는 그래 이런 것이구나 이렇게 하면 되겠네 하고 좀 속 시원하게 되는 내용의 불교를 만들어 내야 된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는데 드디어 이제 탄생 한 셈입니다.
이 내용은 매우 단순하지만 부처님 불교인 초기불교와 보살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대승불교 또 선사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선불교 등이 하나의 불교로 관통되고 있음을 조금만 주의 기울여서 보면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도록 해보자 해서 만들어진 내용입니다. 물론 아직은 미완성품입니다. 계속 다듬고 다듬어서 완성도를 높여야 됩니다. 하지만 기본적인 방향과 입장이 잡혔다고 볼 수가 있죠. 그러니까 길을 헤매다가 확실한 길을 찾았고 이제 그 길을 잘 가면 되는 그런 상태의 내용이라고 말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준비된 내용을 읽으면서 같이 공부 해 보죠.
『중도로 본 나의 붓다관과 붓다 수행론』 이건 제 방식으로 그동안 보고 들었던 내용들을 해석하고 정리한 거예요. 제 방식을 다른 분들이 동의 할지 동의 안할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부연 설명으로 「소 찾는 눈으로 본 붓다의 일생 삶」 이렇게 돼 있습니다.
이 소 찾는다는 사고방식은 선불교의 사고방식이에요. 그러니까 선불교의 사고방식으로 부처님의 일생 삶을 관찰해 본 겁니다.
1. 나의 붓다관과 붓다 수행론
1) 세상에 있는 두 부류의 사람
사람은 그 누구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본인 삶을 본인 마음껏 창조해 낼 주체인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소를 타고 있다.
이거 설명 안 해도 뭔 말인지 아시겠죠? 이제 쭉쭉 가겠습니다.
그 중에 한 부류는 소를 타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필요한 소를 찾기 위해 온 세상 구석구석을 뒤지고 다니느라 일생 바보처럼 좌충우돌 동분서주하다 허망하게 끝나는 경우이다.
나 같은 사람이죠.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비슷해 보입니까? 달라 보입니까? 비슷해 보여요? 팔자가 비슷하네.
또 한 부류는 소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사실대로 알고 그 소를 잘 부려서 일생 너에게도 나에게도 우리 모두에게도 좋고 멋있는 삶을 마음껏 창조하며 살다가는 경우이다.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은 누구일 것 같습니까? 적어도 불교 역사 속에서 짚어본다면 부처님 같은 사람, 보살 같은 사람, 선지식 같은 사람 이런 사람들이죠. 여러분들은 거기에 속합니까? 안 속합니까? 아직은 아닌 것 같아요? 그 다음에
2) 지금 여기 소 타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모르고 세속의 길에서 계속 소를 찾는 사람 범부 싯다르타
이 내용은 부처되기 이전 싯다르타의 삶을 얘기하는 겁니다. 우린 부처님은 태어날 때부터 부처님인 것처럼 뒤죽박죽 혼동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어요. 오늘 이야기 하는 내용은 부처님의 일생을 선의 사고방식으로 해석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재수 좋은 거예요. 일생 8만 4천 법문을 다 들어도 불교를 제대로 하기 어려운데 그 모든 불교를 여기 있는 한쪽으로 다 해결되도록 만들어 놨으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처음엔 세속에서 소타고 소 찾는 길을 치열하게 갔지만 끝내 찾아야 할 소를 못 찾았다.
누가? 싯다르타가 그랬다는 얘깁니다.
그 과정에서 얻은 답은 세속엔 답이 없다는 사실과 출세간의 길, 종교의 길에 답이 있다고 알게 되었다.
이때는 불교가 없을 때입니다. 불교 말고 다른 종교들이 판치고 있을 때인 거죠.
출가, 답이 없는 세속의 길을 버리고 답이 있다고 하는 종교의 길을 선택했다.
출가했다는 얘기는 종교의 길을 선택했다. 이 말입니다.
3) 지금 여기 소 타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모르고 종교의 길에서 소를 찾으려고 하는 범부 싯다르타
출가했어도 아직은 부처님이 아닙니다.
처음엔 스승에게 배운 선정수행을 통해 온갖 황홀하고 신비한 체험을 하는 ‘무소유처’ 선정에 도달했지만 찾아야 할 소를 못 찾았다.
대부분의 우리들은 신비 체험, 종교 체험이라는 말에 다들 약합니다. 그렇죠? 기적에 약하고 신비에 약하고 신통에 약하고 대부분 그렇죠. 그런데 여기서는 황홀한 신비 체험, 신통 체험, 불가사의 체험 그런 거 다 별거 아니다. 지금 그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럼 뭐가 별건가?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느냐 모르느냐가 별거다 이런 얘기입니다.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깨달음) 이상의 신비는 없다. 기적은 없다. 불가사의는 없다. 황홀함은 없다. 지금 그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일(깨달음)이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이 부분은 정말 놀라운 부분이에요. 여기에서 소 타고 있다는 사실을 사실대로 알고 그 소를 잘 부리면서 멋있게 산다는 이야기를 불교집안 언어로 바꾸어 보겠습니다.
출가의 길을 선택한 싯다르타 가 무상정각을 이루어서 부처가 된 다음 언제 어디에서나 매순간순간 깨달음을 일상의 삶으로 살아서 그 삶이 나도, 너도, 우리 모두가 날마다 좋은 날의 삶을 살게 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어떻습니까. 불교 공부와 수행이 이처럼 단순명료 하다면 대단히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다음엔 또 다른 스승에게 배운 선정수행을 통해 더 신비하고 황홀한 체험을 하는 ‘비상비비상처’ 선정에 도달했지만, 이번에도 찾아야 할 소를 못 찾았다.
결국 소를 찾지 못하는 선정 수행을 버리고 고행 수행을 했다.
부처님 생애의 이야기입니다.
온갖 고행 수행들을 두루두루 실험 검토한 끝에 대표 고행 수행인 단식 고행 수행과 숨 멈춤 고행 수행을 최정점에 도달할 때까지 진력했다.
하지만 그 어느 길에서도 끝내 소를 찾지 못했다.
고행 수행의 최정점을 실감하게 하는 불상이 있죠. 보신 적 있습니까? 안 보신 분, 못 보신 분들이 많이 계신가 보네요.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 있죠. 그 고행상을 보면 설명이 필요 없어요. 고행의 극치가 어느 정도인가를 너무나 강렬하게 매우 사실적으로 실감하도록 만들어진 불상이죠. 그런데 안 본 사람한테 내가 더 이상 어떻게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본 사람은 고개를 끄떡끄떡 할 거고 언제든지 기회가 있으면 한번 보시길 바랍니다.
세속의 길이든 종교의 길이든 소타고 소 찾는 기존의 길은 안 가본 길 없이 다 가봤지만 소를 못 찾았다.
끝내 선정 중에 최고로 높은 경지까지 도달해 봤어요. 거기 가면 신통도 나오고 신비 체험도 하고 뭐 황홀한 기쁨도 있고 행복도 있고 평화도 있어요. 그래도 싯다르타 본인이 찾고 싶은 답은 없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버리고 떠날 수밖에 없죠.
그다음에 고행 수행을 선택 하는데 그것도 최정점까지 간 거예요. 최정점까지 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게 고행상으로 묘사되고 있는 겁니다. 다 해봤지만 답이 안 나오니까
어쩔 수 없이 소타고 소 찾는 선정 수행과 고행 수행이라는 기존 종교의 길, 양극단의 길을 포기 했다.
이제 싯다르타가 지금까지 누구에겐가 묻고 배운 것은 다 해봤어요. 해봤는데 거기서 제시하는 최정점까지 못 가서 포기한 게 아니고, 정점까지 다 가봤지만 자기가 찾는 답이 없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버릴 수밖에 없죠. 그래서 그동안 보고 듣고 배웠던 길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것은 모두 양극단의 길이다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는 겁니다. 양극단의 길이기 때문에 모두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자기 방식의 길을 찾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어요. 다 해봤지만 안 되기 때문에.
4) 주의 기울여 관찰 사유한 끝에 소타고 소 찾는 두 극단의 길을 버리고 중도, 자문자답의 방식을 선택하는 범부 싯다르타
이제 더 이상 누구한테 묻고 배우는 것은 안 하는 거예요. 스스로 묻고 답을 찾아야 되는 상황인거죠. 그런데 여기도 그 자료가 나온 다음에 보니까 더 다듬고 채우는 게 필요하겠다 싶어서 더 채웠습니다. 스스로 묻고 또 물어도 다시 묻게 되는 물음들 인생이 무엇인지 자신이 누구인지 왜 살아야 하는지 왜 죽게 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깜깜한 채 죽기 살기로 악을 쓰고 살고 있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바보들인가? 미쳤는가? 사람들 보면 뭣도 모르면서 죽기 살기로 살잖아요. 그러니까 소타고 소 찾는 삶을 그렇게 살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싯다르타타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런 문제의식을 갖고 자기 방식으로 답을 찾게 돼요. 훗날 자기 방식으로 한 수행을 뭐라고 표현하는가? 중도라는 말로 표현을 합니다. 어저께도 얘기할 때 보니까 세수하다 코 만지는 것처럼 된다는 얘기를 누가 하더라고요. 그런데 아무렇게나 한다고 해서 세수하다가 코 만지는 것처럼 되느냐? 절대 안 그래요. 제대로 해야만 세수할 때 코 만지듯이 될 수가 있어요. 그러면 부처님은 제대로 하는 걸 뭐라고 표현했는가? 그걸 중도라는 말로 표현한 겁니다.
중도적으로 하면 불교가 어렵지 않습니다. 세수하다 코 만지는 것처럼 되게 돼 있어요. 중도적으로 하면 그렇지만 양극단 방식으로 하면 ‘비상비비상처’ 선정의 경지에 올라가도 안 되고 ‘무소유처’ 선정에 올라가도 안 되고 불가사의, 신비, 기적을 일으켜도 안 돼요. 천지를 다 얻었다 뒤집었다 해도 안 돼요. 전생을 보고 내생을 보고 물위를 걷고 하늘을 날고 별별짓을 다 해도 안 돼요. 지금 그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중도, 삶의 주체인 지금 여기 본인 자신을 직접 대면하여 꼼꼼하게 관찰 사유한 결과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소를 찾는 길에선 세속의 길이든 종교의 길이든 외부의 길이든 내부의 길이든 정신의 길이든 물질의 길이든 그 어떤 길에서도 답이 나올 수 없음을 알게 됐다.
그럼 어떻게 해야 범부 싯다르타가 본인 자신이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사실대로 알 수 있을까
하나는, 선지식 또는 친구에게 ‘우리 소 못 봤소?’ 하고 잘 묻고 배우면 바로 ‘지금 본인이 소 타고 있다.’ 는 사실을 사실대로 알게 되고, 그때부터 그 소를 마음껏 잘 부리며 사는 싯다르타, 붓다가 된다.
잘 묻고 배운다는 말을 불교 언어로는 법문법담이라는 말로 설명을 합니다. 불교에서는 법문이 어떤 참선보다도 어떤 기도보다도 어떤 절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더 최우선적으로 중요한 거예요. 법문 또는 대화를 잘하면 본인이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사실대로 알게 되는 거예요.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는 얘기는 곧 깨닫는다는 말이에요. 더 쉽게 얘기하면 인생을 제대로 알고 살게 된다 이 말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어떤 전제도 없이 지금 여기 삶의 주체인 본인 자신의 참모습에 직접 대면하여 잘 관찰 사유하면 바로, ‘아, 지금 내가 소를 타고 있네.’ 하고 있는 사실을 사실대로 바로 알게 되고, 그때부터 바로 소를 부리는 싯다르타, 붓다가 된다.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사실대로 알고 그 소를 마음껏 잘 부리며 살 때, 비로소 부처가 됐고 부처로 산다는 말이 가능해진다는 얘기입니다. 그 다음에
5) 비로소 처음부터 자신이 소타고 있었음을 사실대로 앎으로써 소 찾아 헤매는 삶을 버리고 소를 부리는 삶을 살아가기 시작하는 싯다르타, 붓다
비로소 부처가 됐다는 얘기입니다. 그 뒤로는 쭉 읽어가겠습니다.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사실대로 아는 순간 오랜 세월 소 찾기 위해 동분서주 했던 모든 헛된 수고로움을 바로 멈추게 됐다.
우리는 지금 뭐 하고 있죠? 소타고 소 찾아서 헤매고 있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바빠요. 힘들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한심스럽기도 하고 통탄스럽기도 하고 그런 거죠.
동시에 편안하고 기쁜 마음으로 타고 있는 소를 잘 부려서 반야바라밀행을 생활화하여 날마다 좋은날의 삶을 창조하는 싯다르타, 붓다가 되었다.
바로 여기까지가 석가모니 부처님이 소 타고 소 찾는 중생으로서의 살림살이하고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소를 부리면서 사는 부처의 살림살이를 간추린 겁니다.
바로 이어서 누구나 소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할 경우 잘 이해하고 공감할 만한 사람을 찾으려고 마음먹었다.
부처님이 깨달은 다음에 처음 뭐 하시는지 아십니까? 부처님이 소를 찾고 보니까(깨달음) 이게 너무 좋은 거예요. 이게 최고인 거예요. 이것만 있으면 삶은 희망찬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한테 이걸 알려주고 싶은데 이게 인생의 답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사람들이 이걸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부분이 걱정이 된 거예요. 그래서 아무한테나 가서 설명한 게 아니고 대화가 될 만한 사람을 찾아서 대화를 해야 되겠다 마음먹고 그 사람을 찾게 됩니다.
처음엔 선정수행을 가르쳐준 두 스승을 생각했는데, 안타깝게도 이미 돌아가시고 안 계시는 상태였다.
이분들이라면 말이 통하겠다 싶어서 그분들을 만나려고 했는데 알아보니까 이미 다 돌아시고 안 계신거예요. 그분들은 다 종교 수행자들이에요.
그 다음에 싯다르타 본인이 고행을 포기했을대 싯다르타는 이제 변절했다 이제 타락했다 하고 비난하면서 떠나간 다섯 친구들을 생각해요. 자기를 비난하고 떠났던 이 친구들 정도면 그래도 대화가 되겠지 이렇게 해서 알아보니까 천리 떨어진 곳에 있는 거예요. 천리면 한 400킬로죠? 맞습니까? 한 2 300킬로 떨어진 곳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거예요. 그래서 물어물어 걸어서 그 친구들을 찾아갑니다.
여러분들 머릿속에 들어있는 부처님 이미지하고 말이 될 만한 친구를 찾아서 물어물어 천리길을 걸어가는 부처님 모습하고 연결이 됩니까? 연결이 안 되죠. 그렇게 한심스럽고 초라한 인간이 부처님이야? 그렇잖아요. 너무 한심스럽고 초라해 보이지 않습니까?
어쨌든 그렇게 해서 찾아가요. 찾아갔는데 환영은 커녕 무시당해요. 어떻게 해서든 대화를 해보려고 했는데 안 돼요. 고행할 때도 못 깨달았는데 고행을 포기한 사람이 깨달았다는 게 말이 되냐 고행을 해도 못 깨달았는데 선정 수행을 해도 못 깨달았는데 그거 다 포기하고 그야말로 이제 범속한 인간으로 돌아갔는데 깨달았다는 말을 믿으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되냐고 하며 거부하고 또 거부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들이라면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별 수 없죠. 사정사정하는 수 밖에. 내 얘기 좀 들어봐. 내 얘기 좀 들어봐. 이렇게 사정하고 또 사정하고 또 사정하죠. 경전에는 꼭 이렇게 돼 있지는 않습니다. 이건 내방식 의 해석이에요.
그냥 대충 보면 부처님은 신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알아서 무릎 꿇게 돼 있어요. 그런데 좀 꼼꼼히 사실적으로 따져보면 그렇지 않아요. 잘 관찰 사유하는 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불교 수행은 한마디로 하면 관찰 사유예요. 결국 내 얘기 들어봐 들어봐 하고 해도 해도 안 되니까 마지막 카드를 내놓습니다.
그게 뭘 것 같아요? 선정 수행 할 때도 같이 수행을 했고 고행 수행을 할 때도 같이 수행을 했어요. 이 다섯 친구들이 같이 수행을 해보니까 싯다르타라는 인물이 굉장히 천재성을 갖고 있다는 걸 알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대단한 스승들보다도 더 탁월하다는 걸 알게 된 거예요. 이 사람이 그런 천재성을 갖고 있는 건 알지만 변절 타락자이기 때문에 깨달았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죠. 그러니까 싯다르타가 마지막 카드로 내놓은 게 뭐냐 하면 너 나 알잖아. 그전에 우리 같이 살았잖아. 같이 살 때 일찍이 내가 한 번이라도 이렇게 강하게 주장하는 걸 본 적이 있어? 이렇게 얘기해요.
그 얘기를 듣고 보니까 실제 그런 거예요. 한 번도 이렇게 하는 걸 본 적이 없는 거예요.
그때 비로소 마음을 열고 대화가 시작이 돼요. 그리고 대화 끝에 이 다섯 친구들도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소를 마음껏 부리면서 날마다 좋은 날의 삶을 살게 돼요.
자 그러면 또 읽어보겠습니다.
다음에 생각한 사람이 자신을 타락했다며 비난하고 떠난 다섯 친구 고행자들이다.
소를 타고 있음을 사실대로 잘 알고 잘 부리는 붓다가 된 싯다르타가 물어물어 다섯 친구들을 찾아가서 소 찾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많은 대화(법문) 끝에 다섯 친구들도 자신이 본래부터 소를 타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사실대로 잘 알게 되었다.
그 순간 다섯 친구들도 붓다, 싯다르타처럼 소 찾기 위해 갈팡질팡 동분서주하는 바보 같은 헛수고를 바로 멈추게 되었다.
동시에 편안하고 기쁜 마음으로 붓다, 싯다르타처럼 소를 잘 부려서 반야바라밀행을 생활화하고 나아가 날마다 좋은 날의 삶을 창조하는 멋진 삶을 살기 시작했다.
여기까지가 다섯 친구들에게 법문을 해서 그들도 깨달은 자로 살아가도록 하게 됐다는 이야기입니다.
6) 드디어 붓다, 싯다르타처럼 본래부터 자신이 소 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그 소를 잘 부려서 날마다 좋은 날의 삶을 창조하는 도반이 60여명
그다음에 야사비구라고 하는 청년들을 만납니다. 오비구 다음 야사비구라고 하는 청년들을 만나는데, 이 청년들은 종교인들이 아니에요. 그 시대 그 동네에서 제법 똑똑한 부잣집 청년들이에요. 제법 똘똘한 이 친구들이 우연히 부처님을 만나 부처님과 대화를 하게 되고 대화를 통해서 다 출가를 해요. 출가하고 바로 얼마 안 가서 아라한들이 돼요. 깨달은 사람이 된 거예요. 그러니까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된 거죠. 지금 그 얘기입니다.
60여 명이라고 하는 것은 그 친구들이 50여명 되고 다섯 비구들하고 이렇게 합치면 한 60여 명. 그러니까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삶을 살게 된 사람들이 60여 명 된 거예요.
소를 잘 부리는 60여명의 도반들과 함께 뭇 생명들로 하여금 자신이 소를 타고 있음을 사실대로 잘 알고 소를 잘 부려 반야바라밀행을 생활화함으로써 날마다 좋은날의 삶을 창조하도록 하는 길잡이로 나서자고 뜻을 모았다.[전법선언]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삶을 살아보니까 이것이 인생의 정답이고 이것이 세상의 희망이다 이런 자각과 확신이 생긴 거죠. 그 좋은 걸 혼자 하면 어쩝니까? 혼자만 하면 안 되잖아요. 좋은 걸 혼자만 하려고 든다고 할 경우는 아무리 좋은 걸 하더라도 그건 쓸모없는 물건일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볼 적에는. 그래서 내용이 너무 좋으니까 다른 사람들에게도 같이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게 너무나 마땅한 일인 거죠.
그래서 그 첫 번째는 대화할 사람을 찾고 두 번째는 이 내용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역할을 함께 할 친구들을 찾는 거예요. 그것이 한 60여 명 만들어지니까 “자~ 요이땅!”하고 이제부터 우리는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길을 떠나자 이렇게 된 겁니다. 그걸 전법 선언 이라고 얘기합니다.
불교역사의 입장에서 보면 전법 선언은 대단히 중요하고 유명한 내용입니다. 60여명이 뜻을 함께 하기로 결의하고 각자 인연이 있는 곳으로 길을 떠납니다. 60여 명이. 근런데 길 떠나는 친구들에게 부처님이 뭐라고 얘기하냐면 두 사람이 한 길을 같이 가면 안 되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얘기해요. 이런 점이 기독교하고 다른 거예요. 기독교는 정반대로 혼자 가면 안 된다고 합니다. 여기까지가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고 전법 선언을 하기까지의 내용입니다. 지금까지 설명 드린 얘기가 여기 써졌네요.
뜻을 모은 도반들 모두가 뭇 생명들로 하여금 자신이 본래부터 소를 타고 있음을 알고 그 소를 잘 부려서 반야바라밀행을 생활화하고 나아가 날마다 좋은 날의 삶을 창조하도록 길을 안내하기 위해 각자 인연 따라 자기 길을 떠났다.
그리고 싯다르타 붓다는 그때부터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까지 그 길을 걸었고, 그 삶을 살았다. 누구나 할 것 없이 그 길을 가고 그 삶을 살면 그 일생이 멋있고 좋을 터이니 우리 모두 손에 손잡고 죽는 날까지 함께 가자며 그 길을 걷고 또 걸었다.
부처님은 죽는 날까지 그 길을 걸었어요.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비로소 희망의 길, 오래된 미래의 길이 시작되었다. 이제 소타고 소 찾는 바보 같은 역사는 끝났다. 본래부터 소를 타고 있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고 그 소를 잘 부려서 본인에게도, 상대에게도 우리 모두에게도 좋은 멋진 삶을 창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 될 터이다. 그때부터 붓다는 주어진 매 순간 순간을 타고 있는 소를 잘 부려서 날마다 좋은 날을 창조하는 나날의 삶을 살았다. 황홀한 저녁노을처럼 평화롭고 아름답게 생을 마감하는 그날 그 순간까지 그렇게 살다 그렇게 갔다.
이게 부처님의 일생을 그 어마어마한 내용을 이렇게 간추린 것입니다. 그다음은 이제 제 얘기입니다. 나의 불교 수행론 이것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이걸 어떻게 정리해 낼 것인가? 근데 하다 보니까 간단하게 정리가 되었어요. 나의 불교 수행론은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나도 부처님처럼. 이게 나의 불교 수행론입니다. 지금까지 부처님의 일생을 정리했잖아요. 정리한대로 나도 부처님처럼 살면 돼요. 그 이상 더 뺄 것도 없고 보탤 것도 없어요. 그게 전부고 최고예요. 그거 말고 다른 걸 찾는다면 소타고 소 찾는 헛수고의 삶이 되고 말죠.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2. 나의 불교 수행론, 나도 붓다처럼 살리
이제 소타고 소 찾는 바보천치의 삶은 끝났다. 지금 이 순간부터 타고 있는 소를 잘 부려서 본인 마음껏 본인에게도 상대에게도 우리 모두에게도 좋은 멋진 삶을 창조하는 나날의 삶을 세세생생토록 살아갈 일이다. 비로소 미혹문명을 넘어 깨달음의 문명 길을 열어가는 희망의 서광이 시작되었다. 우리 모두 손에 손잡고 함께 그 길을 세세생생토록 그렇게 살다 그렇게 간다면 참으로 멋진 삶, 좋은 삶, 편안하고 흐뭇한 삶일 터이다. 그래, 가는 삶도 오는 삶도 날마다 좋은 날이다.
이렇게 살면 멋지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살기 위해서 함께할 것을 우리가 약속할 수 있습니까? 결의할 수 있습니까? 누구처럼? 소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소를 부리며 살기 시작한 60여 명의 비구들처럼. 그렇게 결심할 수 있겠습니까? 약속할 수 있겠습니까?
우린 그렇게 해야죠. 그걸 우리는 만일 결사라는 이름으로. 지금 우리는 길 찾기를 하고 길 만들기를 하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런 길이 활짝 열리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함께 하자고 발심도 하고 또 결심도 하고 그런 약속을 확실히 해서 나는 만일 결사를 잘 하겠노라고 결심하고 다짐하는 차원에서 크게 한번 박수 한번 칩시다.
‘우리도 부처님같이’라는 노래가 있죠. 아까도 어디 가사에 나오는 것 같던데 우리도 부처님같이 이런 노래가 있죠. 그러면 떠오르는 첫 이미지가 뭐예요? 나도 부처님 같이 살 거야. 그렇게 강조도 하고 권하기도 하고 그래서 노래로도 만들어지고 그랬거든요. 그럴 경우 내가 본받을 부처님의 이미지가 어떤 이미지예요?
대부분은 6년 고행상을 떠올립니다. 오늘 우리 축원문에도 보니깐 길 잃고 힘들고 안타깝고 갑갑할 때는 부처님의 고행상을 떠올린다. 이렇게 돼 있어요. 부처님은 고행하지 말라고 그랬어요. 그건 길이 아니야. 그건 잘못된 길이야. 그 길로 가선 안 돼. 그런데 우리는 길을 못 찾아 헤맬 때 부처님의 고행상을 떠올립니다. 아마 대부분 기성불교인들은 나도 부처님처럼 살아야 돼. 나도 부처님처럼 살 거야. 이렇게 할 때 그때 떠올리는 이미지는 6년 고행상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저도 그렇게 알고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잘 관찰 사유하고 또 관찰 사유하고 또 관찰 사유해 보니까 아닌 거예요.
이건 비밀인데 오늘 여러분들한테 제가 공개하는 거예요. 지금 이거 함부로 누설하면 안 되는데, 왜냐하면 이건 누설하면 왕따 당해요. 여러분들 왕따 당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그러지 않고서는 우리가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사는 삶을 대중화시킬 수가 없어요. 왕따 당할 각오를 안 하면.
그리고 맨날 고행상만 생각하는데 거기에 무슨 편안함이 있겠습니까? 거기에 무슨 아름다움이 있겠습니까? 거기에 무슨 멋있음이 있겠습니까? 늘 찡그리고 앉아서 고민만 해야 되지. 이제는 그런 바보 천치 같은 불교를 그만하자. 그리고 진짜 희망이 되고 답이 되는 불교를 하자는 얘기죠.
그게 뭘까?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사실대로 잘 알고 소를 잘 부려서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우리 모두가 좋을 수 있는 그러면 된 거 아닌가요? 뭔가 끝내기를 멋있게 해야 될 것 같은데. 멋있게 할 수 있는 뭐가 있었는데 어디로 가고 사라져 버렸어요. 이게 나이가 드니까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금강경 얘기로 끝내야 되겠네요. 어저께도 얘기하는 거 보니까 마찬가지예요. 해도 해도 잘 안 된다. 한 방이 필요한데 한 방이 안 된다. 오늘 내가 한 방을 설명했습니다. 망상이 부글부글 끊는 것은 수행을 한다고 해서 화두를 하든지 염불을 하든지 진언을 하든지 절을 하든지 독송을 하든지 해보면 수행할 때 처음 나타나는 대표적인 수행 공덕이 바로 망상이 부글부글 끓는 걸 확인하게 돼는 거예요. 평소는 잘 몰라요. 망상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뭐가 망상인지도 잘 몰라요. 수행을 해봐야 알아요.
근데 신경 쓸 거 없어요. 냅둬 버려요. 망상이 끓거나 말거나 부글부글하거나 폭발하거나 신경 쓸 거 없어요. 냅둬 버려요. 그럼 중요한 건 뭘까? 신경 쓰지 말고 냅둬 버려라. 그걸 금강경에서 뭐라고 얘기해요? 그걸 무주상 이렇게 얘기하고 있어요. 응무소주 이생기심 그러잖아요. 무주상이라는 말이 그 말이야. 냅둬 버려라. 신경 쓰지 마라. 망상이 끓든지 말든지 폭발을 하든지 말든지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거 아니죠. 그럼 그다음에 뭐예요?
응무소주 다음에 이생기심. 매 순간순간 새로운 마음을 일으켜라 이렇게 하고 있어요. 이게 중요한 거예요. 매 순간순간 새로운 마음을 내는 거야. 망상이 있네. 없네. 끓네. 안끓네. 좋네. 궂네. 왜 이것이 안 되는 거야? 뭐 등등등 그런 거 신경 쓰지 마라.
그걸 응무소주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어요. 그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마라. 지나간 것에도 구애받지 말고 미래에도 구하지 말라. 오로지 지금 여기 온전하게 이런 얘기죠. 어떻게? 새로운 마음을 일으켜라. 새로운 마음이 뭐예요?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사람은 관세음보살 부르는 게 새로운 마음이에요. 화두를 드는 사람은 화두를 드는 게 새로운 마음이야. 진언을 외우는 사람은 진언을 외우는 게 새로운 마음이야.
대혜종고는 수행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익숙한 것은 생소하도록 만들고 생소한 것은 익숙하도록 만드는 게 수행이다.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염불하는 얘기를 갖고 한번 해보죠. 번뇌 망상을 하는 게 익숙한가요? 염불하는 게 익숙한가요? 그렇죠. 번뇌 망상은 하지 말라고 해도 저절로 하게 됩니다. 익숙합니다. 그러니까 대혜종고는 수행을 하는 사람은 번뇌 망상에 자꾸 끌려 다니면 안 된다고 지금 그 얘기하는 거예요. 그럼 뭘 해야 됩니까?
그 다음에 ‘낯선’ 것이 뭐예요? 낯선 것은 진언를 외운다든가 아니면 염불를 한다든가 독경을 한다든가 화두를 든다든가 이거 절로절로 돼요? 안 되죠. 망상은 절로절로 되는데 이건 안 돼. 이건 어떻게 해야 돼요? 마음먹고 해야 돼요. 낯설어요. 이 낯선 것을 익숙해지도록 만드는 게 수행이라고 얘기하고 있어요. 절로절로 되는 것을 낯설게 만들어내는 것이 수행이라고 했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나도 부처님처럼 살 거야. 왜냐하면 그렇게 강조하기도 하고 권하기도 하고 하니까 그랬을 때 기성불교인들의 머릿속의 이미지는 6년 고행상을 떠올리게 돼 있어요. 근데 그건 부처님 뜻하고는 정반대예요. 오히려 부처님 뜻을 완전히 어그러뜨리는 길이예요. 그리고 사람을 오도하는 길, 더 막말로 하면 사기 치는 거죠.
그럼 뭘 떠올릴까? 뭘 떠올려야 됩니까? 소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사실대로 잘 알고 이 소를 잘 부려서 나도 좋고 너도 좋고 우리 모두에게도 좋은 삶을 창조자하는 사람으로 살아간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을 누구라고 한다? 우리의 스승 부처라고 한다.
그 부처의 제자인 나는 어떻게 한다? 부처님처럼 소 탄줄 알고 마음껏 잘 부려서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우리 모두에게도 좋은 그런 삶을 창조해 간다. 그러면 그 스승과 제자가 어떻습니까? 잘 맞아떨어지지 않나요? 궁합이 잘 맞지 않습니까? 아귀가 쩍쩍 맞죠. 우리가 불교를 이렇게 한다면 멋있겠습니까? 안 멋있겠습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할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우리 불교를 이렇게 합시다. 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