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더우니까 이래저래 불편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제 계절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렇죠? 한동안 날씨가 들쑥날쑥했는데 이제는 정상으로 돌아온 느낌이 있어서 그런지 기분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법문을 무슨 내용으로 해야 되나 궁리를 해도 마땅하게 떠오르질 않아서 새벽부터 잠을 설쳤습니다. 그동안은 어쨌든 ‘부처님 생애’를 한번 제대로 얘기를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드려왔는데요, 그중에 부처님께서 깨달음에 도달하는 과정이 십이연기(十二緣起)입니다. 깨달음에 도달하는 과정이 십이연기를 잘 아는 과정이죠. 그러니까 십이연기를 잘 아는 것을 깨달았다라고 얘기할 수가 있고 그 십이연기 내용으로 보면 우리 삶이 고통스럽게 나타나는데 왜 고통스럽게 나타나게 되는 걸까하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 십이연기의 하나고 또 하나는 어쨌든 우리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잖아요. 그러면 고통으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어떻게 해야 고통으로 벗어나서 우리가 편안하게 살 것인가 이걸 열두가지로 설명하는 것이 십이연기입니다.
하나는 고통이 발생해 가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통이 소멸하는 과정을 설명한 것입니다. 하지만 보현법회가 몇 달 만에 열렸기 때문에 이야기 나누었던 내용이 우리 기억에 별로 안 남아 있습니다.
어쨌든 십이연기를 좀 명료하게 해서 조금만 진지하게 공을 들이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또는 실제 생활에 적용해 보면 고개가 끄덕거려질 수 있도록 해보려고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있습니다. 마음은 그렇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이것도 저것도 모두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그 얘기를 할까 하다가 현재 상황이 준비가 안된 상태라 그럼 뭘 해야 하나 하고 전전긍긍하는데 아침에 전화가 왔습니다.
완주에 가면 대승불교를 표방하는 단체가 있는데, 그 단체와 마을 주민들이 환경 문제 때문에 오랫동안 갈등이 있어 왔습니다. 한참 됐는데 제가 그 마을 분들의 초청을 받아서 그 마을에 갔었거든요. 그 마을 분들의 초청을 받아서 가니깐 불교 단체 쪽에서 저에게, “왜 스님이 불교단체를 공격하는 사람들 편에서 서서 얘기를 하냐, 이건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며 항의가 와서 “그렇다면 내가 거기도 한번 가보겠다”고 해서 거길 갔었습니다.
그 단체에 가서 돌아보기도 하고 얘기를 나누기도 했어요. 어쨌든 저는 ‘화쟁’적으로 문제를 다루고 풀고 만들어보자고 줄기차게 제안하고 주장하는 사람인만큼 거기서도 그런 제안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불교 단체 쪽에서는 그렇게 하겠다고 반응을 주는데 주민들 쪽에서는 안 하겠다고 해서 결국은 더 이상 진천을 못했습니다.
그런에 오늘 아침 밥 먹기 직전, 한 7시쯤 됐는데 그 문제를 다루는 분으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전라북도 문제를 우리가 나서서 잘 풀고 만들어 보자라고 하는 뜻을 가진 여러 종교계분들하고 시민사회 분들이 ‘신흥계곡 평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이라는 이름으로 화정의 길을 열어내겠다고 하며 지금 활동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분들이 활동을 하는 동안 나름 작업이 많이 진척됐고, 실제로 어느 정도 성과도 이뤄졌어요.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려면 화쟁위원장 출신인 제가 나서서 역할을 해줘야 되겠다는 얘기였습니다. 그 역할을 해줘야 이 일이 좀 더 효과적으로 갈 수 있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러면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하고 물었더니 다투고 있는 사람들이 감동과 감화를 받을 수 있는 멋있는 편지를 하나 써 보내라는 주문이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나서, ‘이걸 어떻게 해야 되지’. 안 할 수도 없고 하자니 묘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끙끙거리며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제 방에 있는, 돌아가신 태공월주 조실 스님께서 상좌들을 위해 호를 짓고 당신 사진에다 귀일심원 요익유정(歸一心源 饒益有情)이라고 써서 나눠준 액자가 눈에 띄었습니다.
이분은 교리적으로 밝은 분은 아니에요. 이론적으로 연구하고 탐구하신 분도 아니고요. 늘 종단의 정치와 행정 현장에서 종단을 위해 일했던 분이죠. 그렇기 때문에 치밀한 이론은 없지만 핵심을 잘 짚어서 아주 단순명료하게 실천하시는 분입니다. 그 분이 좋아하는 몇 가지 중요한 구절이 있는데 ‘귀일심원 요익유정’도 그중에 하나입니다. 이 글귀를 보는 순간 ‘아 이 얘기를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오늘은 그 얘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이 구절은 「화엄경」에 나오는 내용이기도 하고, 한국 불교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원효 스님의 저술에도 들어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압축적인 것 두 가지를 중심으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하나는 금방 말씀드렸던 대로 ‘귀일심원 요익유정’ 또는 ‘요익중생’이라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많이 이야기 해왔던 ‘일심동체, 동체대비’입니다. 이 두 구절에 덧붙여서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의 내용을 갖고 간단하게 편지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이쯤에서 거두절미하고 일단 편지 전체를 한번 낭독해보겠습니다. 직접 들어보시고, 느낌이 어떤지를 함께 나눠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편지의 대상은 양쪽 갈등 당사자를 대표하는 분들입니다. 그러니까 편지를 받는 대상을 변호사님으로 명명했습니다.
변호사님.
잘 내시죠. 실상사 도법입니다.
좋은 인연을 계기로 제 마음을 전하고자 간단하게 몇 자 적습니다.
귀일심원 요익중생(歸一心源 饒益衆生)
일심의 근원에 입각하여 뭇 생명 너도 나도, 우리 모두 다 함께 유익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일이다.
일심동체 동체대비(一心同體 同體大悲)
우리 모두 한 몸, 한마음 한 생명이니 큰 자비의 마음으로 두루 함께 잘 어울려 나날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일이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어제는 이미 지나갔다.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다. 거두절미하고 온몸과 마음을 다해 지금 여기, 오늘을 장부의 마음으로 장부답게 살아갈 일이다.
위 내용은 부처님과 원효스님의 말씀입니다.
고맙고 고맙습니다.
이웃 사촌과 품앗이 정신으로 두루 함께 잘 어울려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전북 특별자치도를 꿈꾸는 고마운 종교인과 시민 사회 분들께서 좋은 마음 큰마음 내주셨습니다. 도법도 언제나 함께 하겠습니다.
부디 대승불교 양우회 도반들도 신흥 계곡 마을 주민분들도 저희와 함께해주시기를 두 손 모아 청합니다.
변호사님 걱정이 많으시리라 봅니다.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좋은 뜻으로 우리 함께 바보 셋이 머리를 맞대면 문수지혜가 발현된다고 하는 절집의 오랜 전통에 따른다면 무슨 문제인들 못 풀 것이며 무슨 희망인들 못 만들겠습니까? 부디 불교인들도 또 마을 분들도 그 길을 여는 데 큰 마음 큰 뜻 내줄 것을 청하며 이만 줄입니다.
수연방광(隨縁放曠)
부디 나날이 좋은 인연으로 빛나길...
신흥계곡 평화를 기원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도법 두 손 모음
어떻습니까? 이만하면 감화를 받겠습니까? 반응이 없네. 이거 낙점인가 보네. 어떻게 해야지.
절집에서는 아무 말 없으면 동의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제 경험을 갖고 보면 자리이타(自利利他)라고 하는 건 대승불교는 나타내는 대표적인 개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그것이 나만 좋거나 너만 좋거나 그런 게 아니고 나도 너도 괜찮게, 너도 나도 유익하게 그렇게 하는 걸 우리는 대승불교라고 얘기를 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자리이타가 실제 삶이 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 했을 때 “우리 모두는 일심동체의 식구들이다.” 그걸 우리는 “한마음, 한 몸, 한 생명” 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일심동체 공동 운명체다 이런 얘기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최선을 다해서 더 나아가서는 죽을 힘을 다해서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우리 모두도 좋게 될 수 있도록 마음도 쓰고 말도 하고 행동을 하자.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는가. 지금 바로 너도 좋고 나도 우리 모두도 좋게 된다. 이런 얘기죠.
지금까지 설명 드린 내용으로 보면 누군가를 위해서 뭔가를 애써 하라고 하는게 강조되고 있잖아요. 나 아닌 너를 위해서, 중생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누군가를 위해서 열심히 해라. 그렇게 강죄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얼핏 생각하면 그렇게 할 경우 나만 손해보는 것처럼 생각을 할 수도 있죠.
피상적으로 생각할 경우 우리가 현장에서 누군가의 아픔을 누군가의 슬픔을 누군가의 억울함을 잘 풀어내고 녹여내고 그래서 뭔가 좀 더 상처들이 치유되어지고 회복되어지고 그리고 바람직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 도움 되도록 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지금 그 얘기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할 경우 얼른 보면 저 사람에게는 실제도 도움이 되는 것 같은데 “나는 뭐야”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죠. 얼른 생각하면 그래요.
그런데 현장에서 직접 그 문제를 다뤄보면, 누군가를 위해서 내가 그렇게 마음 쓰고 말하고 행동해서 누구에겐가 도움이 되는 형태로 이것이 작동이 되면 가장 먼저 혜택을 받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자기 자신이에요. 그 과정에서 내 아픔도 내 상처도 내 슬픔도 내 억울함도 다 풀리고 녹아나게 돼 있어요.
얼른 보면 ‘너한테만 도움 되고 나한테는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실제 진정성을 갖고 접근을 해보면 누군가를 위해서 생각도 하고 말도 하고 역할도 하고 또 누군가를 돕기 위해서 그렇게 했을 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기 문제도 잘 풀리고 또는 잘 만들어지고 또 새로운 것을 빛나게 가꿔 내는 것도 가능해진다. 사실 대승불교 사고방식은 이런 사고방식이죠.
어떠세요? 상당히 멋있지 않습니까? 하도 많이 했던 얘기를 되풀이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이 정도만 할까 싶어요. 이제 금강경 이야기 한 가지만 보태고 끝낼까 싶습니다.
금강경 이야기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사실은 현장에서 이루어져 있는 누군가의 아픔, 슬픔, 억울함, 한 맺힘에 직면해서 문제를 풀어내고 크게 전환시켜내고 승화시켜내서 정말 괜찮게 될 수 있도록 내가 최선을 다할 경우, 그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있었던 문제들이 얼어붙은 것은 녹아날 수도 있고 얽힌 것은 풀릴 수도 있고 더 나아가서는 늘 우리가 염원했던 바람직한 희망의 길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하고 열리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걸 우리는 자리이타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 어떻게 보면 앞에 그 부분을 제대로 하면 앞에 얘기했던 내용들이 정말로 제대로 되기만 하면 그 안에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고 하는 말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내용들이 다 들어 있게 돼요. ‘그건 그것대로, 이건 이것대로 따로따로 해야 한다’는 것이 아이라는 얘기죠.
귀일심원 요익유정의 내용이 너의 삶, 나의 삶이 되고, 우리의 삶이 되도록만 해내면 중군오세 강조하고 있는 공(空)의 사상도 그 안에 다 녹아나게 돼 있고 금강경에서 말하는 무주상(無主相)의 내용들도 그 안에 다 녹아나게 되어 있어요.
그 속에 법성게의 원융무애(圓融無礙) 정신도 또 무아의 정신도 다 구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불교 공부와 수행이라고 하는 게 꼭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만 된다 라고 하는 이 강박 관념들을 우리는 좀 과감하게 떨쳐낼 필요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런 부분을 참고하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 설명을 더 보탰습니다.
그러면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는 말은 왜 했겠습니까?
여기서 시작부터 지금까지는 과거죠. 지금까지 서로 다투는 과정 싸우는 관계가 돼 있는 거잖아요. 그 과정 속에서 서로 상처를 주고받기도 하고 막 엉켜 있는 거죠. 현재도 그런 것이죠. 이제는 이걸 풀고 미래로 가자고 하는 거잖아요.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과거에 사로잡혀서는 미래로 갈 수가 없거든요. 그렇잖아요. 과거를 툴툴 털어야 미래로 갈 수 있단 말이죠. 여기서 응무소주 이생기심을 언급한 건 바로 그 부분이죠. 이쪽이든 저쪽이든 지나간 일은 이미 지나갔다 그건 그것대로 놔두버리자 흘러가 버렸다. 거기에 연연하지 말자 툴툴 털고 넘어서라는 그런 얘기인 거죠.
동시에 우리는 이쪽도 저쪽도 더불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열고 만들어가는 데, 오롯이 온전하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는 뜻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답이 있기도 하고 희망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해서 금강경 얘기를 끌어왔떤 겁니다.
결국, 부처님의 가름 또는 원효 스님의 말씀에 들어있는 정신들을 우리 현실에 적용해서 문제를 풀고 답을 만들어 냈으면 좋겠다는 마음들이 모여 이 일이 여기까지 진척이 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일을 상당히 의미 있게 보고 있습니다. 이 활도응ㄹ 하고 있는 종교인들, 시민사회 분들이 주로 반대 투쟁의 최전선에 계셨던 분들입니다. 그러니까 ‘화쟁’하고는 거리가 먼 분들이죠. 제가 갖고 있는 갈지자 행보 또는 회색분자처럼 보이는 태도를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분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지금 이렇게 화쟁의 마음을 낸 거예요. 제 입장에서는 정말 고맙고, 또 의미 있게 다가오는 내용입니다.
지금 나라도 마차가지 아닙니까? 나라도. 지금 니게 작은 일 같아 보이지만 갈등과 대립의 현장문제를 화쟁적으로 풀고 답을 만들어내려는 그 자체가 나라의 문제를 풀어가도록 하는데 길을 밝히는 등불역할도 하게 됩니다. 내용적으로 보면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죠.
20250615_보현법회
갈등을 넘어 함께 살아가는 길(귀일심원 요익유정)
안녕하세요. 더우니까 이래저래 불편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제 계절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렇죠? 한동안 날씨가 들쑥날쑥했는데 이제는 정상으로 돌아온 느낌이 있어서 그런지 기분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법문을 무슨 내용으로 해야 되나 궁리를 해도 마땅하게 떠오르질 않아서 새벽부터 잠을 설쳤습니다. 그동안은 어쨌든 ‘부처님 생애’를 한번 제대로 얘기를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드려왔는데요, 그중에 부처님께서 깨달음에 도달하는 과정이 십이연기(十二緣起)입니다. 깨달음에 도달하는 과정이 십이연기를 잘 아는 과정이죠. 그러니까 십이연기를 잘 아는 것을 깨달았다라고 얘기할 수가 있고 그 십이연기 내용으로 보면 우리 삶이 고통스럽게 나타나는데 왜 고통스럽게 나타나게 되는 걸까하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 십이연기의 하나고 또 하나는 어쨌든 우리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잖아요. 그러면 고통으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어떻게 해야 고통으로 벗어나서 우리가 편안하게 살 것인가 이걸 열두가지로 설명하는 것이 십이연기입니다.
하나는 고통이 발생해 가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고통이 소멸하는 과정을 설명한 것입니다. 하지만 보현법회가 몇 달 만에 열렸기 때문에 이야기 나누었던 내용이 우리 기억에 별로 안 남아 있습니다.
어쨌든 십이연기를 좀 명료하게 해서 조금만 진지하게 공을 들이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또는 실제 생활에 적용해 보면 고개가 끄덕거려질 수 있도록 해보려고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있습니다. 마음은 그렇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이것도 저것도 모두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그 얘기를 할까 하다가 현재 상황이 준비가 안된 상태라 그럼 뭘 해야 하나 하고 전전긍긍하는데 아침에 전화가 왔습니다.
완주에 가면 대승불교를 표방하는 단체가 있는데, 그 단체와 마을 주민들이 환경 문제 때문에 오랫동안 갈등이 있어 왔습니다. 한참 됐는데 제가 그 마을 분들의 초청을 받아서 그 마을에 갔었거든요. 그 마을 분들의 초청을 받아서 가니깐 불교 단체 쪽에서 저에게, “왜 스님이 불교단체를 공격하는 사람들 편에서 서서 얘기를 하냐, 이건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며 항의가 와서 “그렇다면 내가 거기도 한번 가보겠다”고 해서 거길 갔었습니다.
그 단체에 가서 돌아보기도 하고 얘기를 나누기도 했어요. 어쨌든 저는 ‘화쟁’적으로 문제를 다루고 풀고 만들어보자고 줄기차게 제안하고 주장하는 사람인만큼 거기서도 그런 제안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불교 단체 쪽에서는 그렇게 하겠다고 반응을 주는데 주민들 쪽에서는 안 하겠다고 해서 결국은 더 이상 진천을 못했습니다.
그런에 오늘 아침 밥 먹기 직전, 한 7시쯤 됐는데 그 문제를 다루는 분으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전라북도 문제를 우리가 나서서 잘 풀고 만들어 보자라고 하는 뜻을 가진 여러 종교계분들하고 시민사회 분들이 ‘신흥계곡 평화를 염원하는 사람들’이라는 이름으로 화정의 길을 열어내겠다고 하며 지금 활동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분들이 활동을 하는 동안 나름 작업이 많이 진척됐고, 실제로 어느 정도 성과도 이뤄졌어요.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려면 화쟁위원장 출신인 제가 나서서 역할을 해줘야 되겠다는 얘기였습니다. 그 역할을 해줘야 이 일이 좀 더 효과적으로 갈 수 있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러면 제가 뭘 하면 되겠습니까?”하고 물었더니 다투고 있는 사람들이 감동과 감화를 받을 수 있는 멋있는 편지를 하나 써 보내라는 주문이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나서, ‘이걸 어떻게 해야 되지’. 안 할 수도 없고 하자니 묘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끙끙거리며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제 방에 있는, 돌아가신 태공월주 조실 스님께서 상좌들을 위해 호를 짓고 당신 사진에다 귀일심원 요익유정(歸一心源 饒益有情)이라고 써서 나눠준 액자가 눈에 띄었습니다.
이분은 교리적으로 밝은 분은 아니에요. 이론적으로 연구하고 탐구하신 분도 아니고요. 늘 종단의 정치와 행정 현장에서 종단을 위해 일했던 분이죠. 그렇기 때문에 치밀한 이론은 없지만 핵심을 잘 짚어서 아주 단순명료하게 실천하시는 분입니다. 그 분이 좋아하는 몇 가지 중요한 구절이 있는데 ‘귀일심원 요익유정’도 그중에 하나입니다. 이 글귀를 보는 순간 ‘아 이 얘기를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오늘은 그 얘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이 구절은 「화엄경」에 나오는 내용이기도 하고, 한국 불교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원효 스님의 저술에도 들어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압축적인 것 두 가지를 중심으로 말씀드리려 합니다. 하나는 금방 말씀드렸던 대로 ‘귀일심원 요익유정’ 또는 ‘요익중생’이라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많이 이야기 해왔던 ‘일심동체, 동체대비’입니다. 이 두 구절에 덧붙여서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의 내용을 갖고 간단하게 편지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이쯤에서 거두절미하고 일단 편지 전체를 한번 낭독해보겠습니다. 직접 들어보시고, 느낌이 어떤지를 함께 나눠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편지의 대상은 양쪽 갈등 당사자를 대표하는 분들입니다. 그러니까 편지를 받는 대상을 변호사님으로 명명했습니다.
변호사님.
잘 내시죠. 실상사 도법입니다.
좋은 인연을 계기로 제 마음을 전하고자 간단하게 몇 자 적습니다.
귀일심원 요익중생(歸一心源 饒益衆生)
일심의 근원에 입각하여 뭇 생명 너도 나도, 우리 모두 다 함께 유익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일이다.
일심동체 동체대비(一心同體 同體大悲)
우리 모두 한 몸, 한마음 한 생명이니 큰 자비의 마음으로 두루 함께 잘 어울려 나날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일이다.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어제는 이미 지나갔다.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다. 거두절미하고 온몸과 마음을 다해 지금 여기, 오늘을 장부의 마음으로 장부답게 살아갈 일이다.
위 내용은 부처님과 원효스님의 말씀입니다.
고맙고 고맙습니다.
이웃 사촌과 품앗이 정신으로 두루 함께 잘 어울려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전북 특별자치도를 꿈꾸는 고마운 종교인과 시민 사회 분들께서 좋은 마음 큰마음 내주셨습니다. 도법도 언제나 함께 하겠습니다.
부디 대승불교 양우회 도반들도 신흥 계곡 마을 주민분들도 저희와 함께해주시기를 두 손 모아 청합니다.
변호사님 걱정이 많으시리라 봅니다.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좋은 뜻으로 우리 함께 바보 셋이 머리를 맞대면 문수지혜가 발현된다고 하는 절집의 오랜 전통에 따른다면 무슨 문제인들 못 풀 것이며 무슨 희망인들 못 만들겠습니까? 부디 불교인들도 또 마을 분들도 그 길을 여는 데 큰 마음 큰 뜻 내줄 것을 청하며 이만 줄입니다.
수연방광(隨縁放曠)
부디 나날이 좋은 인연으로 빛나길...
신흥계곡 평화를 기원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도법 두 손 모음
어떻습니까? 이만하면 감화를 받겠습니까? 반응이 없네. 이거 낙점인가 보네. 어떻게 해야지.
절집에서는 아무 말 없으면 동의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제 경험을 갖고 보면 자리이타(自利利他)라고 하는 건 대승불교는 나타내는 대표적인 개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그것이 나만 좋거나 너만 좋거나 그런 게 아니고 나도 너도 괜찮게, 너도 나도 유익하게 그렇게 하는 걸 우리는 대승불교라고 얘기를 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자리이타가 실제 삶이 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 했을 때 “우리 모두는 일심동체의 식구들이다.” 그걸 우리는 “한마음, 한 몸, 한 생명” 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일심동체 공동 운명체다 이런 얘기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될 일은 최선을 다해서 더 나아가서는 죽을 힘을 다해서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우리 모두도 좋게 될 수 있도록 마음도 쓰고 말도 하고 행동을 하자.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는가. 지금 바로 너도 좋고 나도 우리 모두도 좋게 된다. 이런 얘기죠.
지금까지 설명 드린 내용으로 보면 누군가를 위해서 뭔가를 애써 하라고 하는게 강조되고 있잖아요. 나 아닌 너를 위해서, 중생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누군가를 위해서 열심히 해라. 그렇게 강죄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얼핏 생각하면 그렇게 할 경우 나만 손해보는 것처럼 생각을 할 수도 있죠.
피상적으로 생각할 경우 우리가 현장에서 누군가의 아픔을 누군가의 슬픔을 누군가의 억울함을 잘 풀어내고 녹여내고 그래서 뭔가 좀 더 상처들이 치유되어지고 회복되어지고 그리고 바람직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 도움 되도록 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지금 그 얘기거든요. 그런데 그렇게 할 경우 얼른 보면 저 사람에게는 실제도 도움이 되는 것 같은데 “나는 뭐야”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죠. 얼른 생각하면 그래요.
그런데 현장에서 직접 그 문제를 다뤄보면, 누군가를 위해서 내가 그렇게 마음 쓰고 말하고 행동해서 누구에겐가 도움이 되는 형태로 이것이 작동이 되면 가장 먼저 혜택을 받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자기 자신이에요. 그 과정에서 내 아픔도 내 상처도 내 슬픔도 내 억울함도 다 풀리고 녹아나게 돼 있어요.
얼른 보면 ‘너한테만 도움 되고 나한테는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실제 진정성을 갖고 접근을 해보면 누군가를 위해서 생각도 하고 말도 하고 역할도 하고 또 누군가를 돕기 위해서 그렇게 했을 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기 문제도 잘 풀리고 또는 잘 만들어지고 또 새로운 것을 빛나게 가꿔 내는 것도 가능해진다. 사실 대승불교 사고방식은 이런 사고방식이죠.
어떠세요? 상당히 멋있지 않습니까? 하도 많이 했던 얘기를 되풀이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이 정도만 할까 싶어요. 이제 금강경 이야기 한 가지만 보태고 끝낼까 싶습니다.
금강경 이야기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사실은 현장에서 이루어져 있는 누군가의 아픔, 슬픔, 억울함, 한 맺힘에 직면해서 문제를 풀어내고 크게 전환시켜내고 승화시켜내서 정말 괜찮게 될 수 있도록 내가 최선을 다할 경우, 그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있었던 문제들이 얼어붙은 것은 녹아날 수도 있고 얽힌 것은 풀릴 수도 있고 더 나아가서는 늘 우리가 염원했던 바람직한 희망의 길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하고 열리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걸 우리는 자리이타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 어떻게 보면 앞에 그 부분을 제대로 하면 앞에 얘기했던 내용들이 정말로 제대로 되기만 하면 그 안에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고 하는 말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내용들이 다 들어 있게 돼요. ‘그건 그것대로, 이건 이것대로 따로따로 해야 한다’는 것이 아이라는 얘기죠.
귀일심원 요익유정의 내용이 너의 삶, 나의 삶이 되고, 우리의 삶이 되도록만 해내면 중군오세 강조하고 있는 공(空)의 사상도 그 안에 다 녹아나게 돼 있고 금강경에서 말하는 무주상(無主相)의 내용들도 그 안에 다 녹아나게 되어 있어요.
그 속에 법성게의 원융무애(圓融無礙) 정신도 또 무아의 정신도 다 구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불교 공부와 수행이라고 하는 게 꼭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만 된다 라고 하는 이 강박 관념들을 우리는 좀 과감하게 떨쳐낼 필요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런 부분을 참고하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 설명을 더 보탰습니다.
그러면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는 말은 왜 했겠습니까?
여기서 시작부터 지금까지는 과거죠. 지금까지 서로 다투는 과정 싸우는 관계가 돼 있는 거잖아요. 그 과정 속에서 서로 상처를 주고받기도 하고 막 엉켜 있는 거죠. 현재도 그런 것이죠. 이제는 이걸 풀고 미래로 가자고 하는 거잖아요.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과거에 사로잡혀서는 미래로 갈 수가 없거든요. 그렇잖아요. 과거를 툴툴 털어야 미래로 갈 수 있단 말이죠. 여기서 응무소주 이생기심을 언급한 건 바로 그 부분이죠. 이쪽이든 저쪽이든 지나간 일은 이미 지나갔다 그건 그것대로 놔두버리자 흘러가 버렸다. 거기에 연연하지 말자 툴툴 털고 넘어서라는 그런 얘기인 거죠.
동시에 우리는 이쪽도 저쪽도 더불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열고 만들어가는 데, 오롯이 온전하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는 뜻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답이 있기도 하고 희망이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해서 금강경 얘기를 끌어왔떤 겁니다.
결국, 부처님의 가름 또는 원효 스님의 말씀에 들어있는 정신들을 우리 현실에 적용해서 문제를 풀고 답을 만들어 냈으면 좋겠다는 마음들이 모여 이 일이 여기까지 진척이 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일을 상당히 의미 있게 보고 있습니다. 이 활도응ㄹ 하고 있는 종교인들, 시민사회 분들이 주로 반대 투쟁의 최전선에 계셨던 분들입니다. 그러니까 ‘화쟁’하고는 거리가 먼 분들이죠. 제가 갖고 있는 갈지자 행보 또는 회색분자처럼 보이는 태도를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분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지금 이렇게 화쟁의 마음을 낸 거예요. 제 입장에서는 정말 고맙고, 또 의미 있게 다가오는 내용입니다.
지금 나라도 마차가지 아닙니까? 나라도. 지금 니게 작은 일 같아 보이지만 갈등과 대립의 현장문제를 화쟁적으로 풀고 답을 만들어내려는 그 자체가 나라의 문제를 풀어가도록 하는데 길을 밝히는 등불역할도 하게 됩니다. 내용적으로 보면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죠.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오늘 제 얘기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