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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법회[2025년 7월 지리산 실상사 보현법회 - 도법스님]-"눈을 뜨게 하는 일보다 더 큰 자비는 없다 - 문자반야 바라밀불사"

2025-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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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8월 보현법회

“눈을 뜨게하는 일보다 더 큰 자비는 없다”

— 실상사 2025 문자반야 바라밀 불사 이야기

 

잘들 지내셨어요? 이제는 확실하게 가을로 접어드는 것 같습니다. 그렇죠? 그동안 다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어쨌든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변화들이 천지자연에서 벌어지기도 하고, 인간 사회에서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근심 걱정을 안 할 수 없는, 또는 전전긍긍하면서 이 궁리 저 궁리를 할 수밖에 없는 세월인 것 같습니다.이렇게 거친 파도가 칠 때, 우리가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가야 될 길을 제대로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법회도 열고 기도도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함께하는 기도와 법회가 구체적으로 힘이 되고,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그런 바램을 가져봅니다.

 

 

법문의 진정한 의미: '눈을 뜨게 하는 것'

 

오늘도 반복해서 했던 얘기 중에 “법문하는 게 이제 두렵고 힘들다”는 얘기로 시작하게 됩니다. 이번 보현법회는 실제와 달리 유난히 오랜만에 하는 느낌이 듭니다. 사실 지난달에도 했었는데, 그래서 이번에는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지,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습니다. 마침 그 즈음에 “문자반야 이야기를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잘 됐다, 그럼 그 이야기를 하자’하고 마음을 정했습니다.

조금 전에 우리가 부른 노래가 보현행원이죠? 그 가사에 보면 **두 눈 어두운 이 내 몸** 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 말은 결국 ‘두 눈 어두운 이 내 몸을 굽어 살펴 좋은 법문을 좀 해 주십시오’ 하는 내용이잖아요. 그렇다면 법문을 통해서 이루고 싶은 게 뭘까요? 우리가 법문을 통해서 하고자 하는 일이 뭐죠?그렇죠. 눈 뜨는 일입니다. 눈 뜨는 일. 그렇습니다. 만일 실제적으로 우리가 눈 먼 봉사인 상태라고 한다면 세상에 눈 뜨게 하는 일보다 더 좋은 일이, 더 큰 일이, 더 중요한 일이, 더 고마운 일이, 더 위대한 일이, 이보다 더한 기적이, 이보다 더한 신비가 있을까? 어떨 것 같습니까?생각해보면, 눈을 뜨게 하는 일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일인가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실상사에서 하고자 하는 일이 ‘눈을 뜨게 하는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 눈을 뜨게 하는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결국은 법문하는 일, 즉 말씀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통해서 눈이 밝아진다는 뜻입니다. 그냥 대충 생각하면 ‘두 눈 어둡다’는 말이 생물학적인 봉사를 얘기하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잘 아시다시피, 이 말은 생물학적인 봉사 상태의 어떤 해결책을 강구하는 그런 내용이 아니고, 우리가 알아야 될 걸 몰라서 문제라는 뜻입니다. 알아야 할 것을 잘 알고 살아야 되는데, 모르는 채 사니까 애써 뭘 하긴 하지만, 끝없이 헤매는 결과로 귀결된다는 얘기죠.

그래서 “알아야 될 걸 제대로 알게 좀 해 주십시오.” 라고 말하는 건, 곧 눈 뜨게 해 달라는 간절한 바람인 것이지요. “법문해 주십시오.” 하는 이 말도 꼭 알아야 될 것을, 참되게, 잘 알게 좀 잘 가르쳐 주십시오 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동안 실상사에서는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을 참되게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다양한 일들을 해왔습니다.

 

 

실상사의 자랑 – 살아있는 현대적 불교 실천

 

물론 다른 절에서도 하지만, 실상사는 조금 특별하게, 어쩌면 자랑해도 좋을 그런 내용들을 많이 해왔다는 얘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혹시 뭐 짐작되는 게 있으십니까? 얼른 떠오르는 게 있다면, 뭐가 있을까요? 오늘은 제가 실상사를 자랑하는 얘기를 좀 해보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실상사에서 하고 있는 일들이 단순히 내부적으로 ‘우리는 잘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아전인수 격으로 “우리는 잘하고 있어요.” 라고 자화자찬하는 게 아니라, 제3자의 눈으로 보는 사람들도 좋은 평가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 그런 것이 불교지.”, “그렇게 하면 참 좋지.”, “그렇게 하면 많은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겠네.” 이렇게 평가되고 있는 내용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그 내용을 글로 쓰기도 하고, 또 어떤 분들은 강연이나 인터뷰에서 언급하기도 합니다.

 

그중에서, 우리가 직접 실천하고 있는 내용들 중에 하나를 꼽는다면, 조금 전에도 함께 했던 21세기 약사경 독송이 있습니다. 이 21세기 약사경은 사실 어마어마한 의미를 가진 일입니다. 지금은 민주주의 사회가 이루어져서 많은 부분에서 개방과 다양성이 허용되고, 서로 다른 생각과 시도를 함께 할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이나 분위기가 만들어져 있으니까, 별문제 없이 우리가 이런 일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이건 큰일 나는 일이에요. 아무 데서나 경전을 만든다는 일 자체가 그 당시에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그런데 우리가 이 21세기 약사경을 만들게 것은 경전에 있는 내용을 현대인들이 잘 알고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내용을 해석하고 설명해야 된다는 마음으로 이루어진 것이 이 21세기 약사경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실상사만이 갖고 있는 특별한 것들을 꼽아본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청중: “아침법석!”) 그렇죠. 아침 법석도 그중에 하나입니다. 아침에 하루를 여는 그 자리. 실상사의 일상 속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이고, 다른 데서 쉽게 볼 수 없는 실상사만의 문화죠. 약사경은 금방 얘기했고 「붓다로 살자 발원문」은 경이라는 말은 붙이지 않았지만 내용은 경전 못지않은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어디다 내놔도 자랑스러울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또 뭐 있을까요? 생명평화 백대사원 절명상. 그렇습니다. 사실 이것은 불교만을 위해서 만든 건 아니지만, 우리가 가장 많이 쓰고 있죠. 냉용을 보면 불교 언어는 가능하면 쓰지 않고, 대중적인 언어로 표현되어 있어서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습니다. 백대서원 절명상 내용도 그중에 하나죠. 그런 것들이 또 뭐 있을까요? (청중: “생명평화 무늬!”) ‘생명평화 무늬’도 그렇습니다. 이것도 역시 어디에 내놓아도 우리가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또 뭐가 있을까요? (청중: “사부대중 공동체”,“동서삼층 석탑”)사부대중 공동체, 또? 석탑은 여기저기 다 있습니다. 대부분 옛날 것들은 비슷비슷합니다.

실상사에 있는 거. 옛날 거 말고. 예를 들어 실상사의 약사전 후불탱화 이름을 ‘생명 평화의 춤’이라고 했죠. 약사전 후불탱화 말고 또 뭐가 있을까요? (청중: “선재집”) ‘선재집’ 보다는 ‘선재집’이라고 적힌 한글 편액은 그중에 들어가겠습니다. 또 뭐가 있을까요?

(청중: “공동체 수행의 날”) 그것도 좋은 거네.

사실은 따지고 보면, 농장이나 공방, 매장 운영 같은 것들도 생명살림의 조건을 마련하기 위해 우리가 하고 있는 것들이잖아요. 생명을 잘 살리고, 더 건강하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 농장을 운영하고 매장과 공방도 함께 꾸려가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국제적으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는 다른 사찰에서 보기 드문 사례입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생명들이 보다 안전하게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그에 도움 되도록 생활 조건들을 만들어 가자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공방도 있고, 매장도 있고, 농장도 있고, 숨단지도 있고 그리고 작은 학교도 있습니다.

 

이렇게 살펴보면,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해온 모든 활동들이 사실은 ‘실상사 산중 불사’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불사라고 하면 탑을 세우거나, 부처님을 모시거나, 법당을 짓는 일만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물론 그런 전통적인 불사도 당연히 소중하고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앞으로 더욱 깊이 생각해야 될 중요한 불사들이 있지 않을까요? 바로 지금 설명 드린 내용들처럼, ‘어두운 두 눈을 뜨게 하는 불사’, 달리 표현하면, 알아야 할 것을 제대로 알게 하는 데 필요한, 또는 도움 되는 불사들입니다. 그중에서 특히 법문과 연결되는 것은, 우리는 언어로 표현되거나 글로 기록된 것들을 문자반야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사람에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법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현실은 주로 사람 중심으로 가고 있죠.

 

 

문자반야 바라밀 불사 – 실상사의 핵심 프로젝트

지금 우리 불교계의 핵심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법을 중심으로 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교를 법을 중심으로 또는 법을 기본으로 해보자 할 때 ‘문자반야’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문자반야는 말 그대로 글로 표현된 지혜, 즉 언어와 문자로 남겨진 법을 뜻합니다. 예를 들어 21세기 약사경, 하루를 여는 법석, ‘붓다로 살자’ 발원문, 생명평화 백대서원 절명상 등등의 내용들이 다 문자반야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우리가 문자반야 불사를 좀 더 본격적으로 해보자고 해서, 아주 조심스럽게 지금 진전시키는 것이 있습니다. 혹시 뭔지 아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주련 불사’를 하고 있습니다. 주련불사에 해당하는 사례들이 몇 가지 이루어졌는데요, 하나는 ‘선재집’이라고 적힌 한글 편액입니다. 보통 이렇게 큰 건물을 잘 지어놓고 한글로 편액을 거는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다 한문으로 돼 있어요. 우리는 현대인들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한글로 편액을 걸었습니다. 사실상 굉장히 획기적인 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진행된 문자반야 불사의 사례가 있습니다. 혹시 무엇인지 아시겠습니까? (청중: “천왕문 주련”) 그렇죠. 천왕문에 있는 주련에 어떤 문구가 적혀 있는지 아십니까? 예. “가득함도 빛나고, 비움도 빛나라.” 불교 언어로 좁혀서 보면, 우리가 너무나 자주 쓰고 있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의미를 우리말로 풀어낸 표현입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런 사고방식을 우리말로 표현한 거예요. 우린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하는 말을 늘상 의식 할 때 또는 불교 얘기할 때 많이 얘기를 합니다.그런데, 이게 뭔 말이지? 뭘 알려주려고 하는 거지? 우리가 알아야 될 내용이 어떤 거지? 명료하게 딱 떨어지기가 않습니다. 이 문제는 여전히 우리에게 남겨진 중요한 과제입니다. 아무리 좋은 내용을 담고 있어도, 사람들이 알아들어야 이해하고, 공감하고, 내 피와 살이 되도록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이건 우리가 심혈을 기울여서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그런데, 사천왕문 앞에 있는 주련의 글씨, 누구의 글씨인지 아세요?

안상수 교수체예요. 우리 실상사 입장에서는 안상수 교수님은 너무나 고마운 분입니다. 실상사 불사(佛事)를 종합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정리해 나가는 데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신 분이거든요. 단지 고마운 것을 넘어서,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대단하고 소중한 분입니다. 우리는 주로 ‘유명한 사람’ 위주로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정말 귀하고 의미 있는 것을 이야기할 때, 흔히 그 사람의 유명세를 기준 삼곤 합니다. 안상수 교수님은 분명 매우 유명한 분이지만, 우리는 그분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이분의 유명함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분은 디자인계의 대가로, 그 분야에서는 ‘노벨상’에 비견될 만큼 권위 있는 상을 독일에서 수상한 분이에요. 그 상은 디자인계에서 노벨상이라 불릴 정도로 세계적인 명성과 권위를 가진 상이며, 이를 수상했다는 것은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이분은 국내를 넘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디자이너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의 글씨체로 실상사의 주련이 만들어졌습니다.

 

글씨체로 유명한 걸 얘기하면 지금 종각에 걸려있는 글씨는 누구겠어요? 그 글씨를 쓴 분도 굉장히 유명한 분입니다. 바로 강암 선생님으로, 송하진 전 도지사의 아버지이기도 하시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필로, 그 시대를 대표하는 대가였습니다. 또 사천왕문에 걸려 있는 ‘천왕문(天王門)이라는 편액도 권갑석 선생님의 작품인데, 이분 역시 명필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처럼 실상사 곳곳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명필들의 작품이 걸려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보면, 단순한 글씨 하나에도 더 큰 의미와 가치를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을 제대로 알고 있어야 그것의 진정한 가치를 이해하고 더 귀하게 생각하게 되기도 하고 소중하게 바라보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말씀드리고 싶은 문자반야 불사는 우리가 오기 이전부터도 일정 부분 진행되어 왔다는 점입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온 다음에는, 이 불사를 좀 더 현대적인 방식으로 진행해보자는 취지로 접근했고, 실제로 꽤 도발적이고 진취적인 방향으로 진척이 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시도들이 외부로부터도 객관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문자반야바라밀’ 불사를 잘 해야 한다는 점을 이야기 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어떤 불사보다도, 이 문자반야 불사가 중요한 불사입니다. 왜냐하면 불교는 이 ‘법’을 중심으로 해야 되고, 또 도량의 운영도 법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선재집을 조성하면서 불상을 모시지 않고 법회장으로 사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법’을 중심에 두고 공동체의 방향을 잡고자 하는 취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로서는 우리가 거창하게 뭘 할 수 있는 형편이 안 되다 보니까 우리 수준에서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해보자고 마음을 모았습니다. 템플스테이 공간에 문자반야 바라밀 불사의 한 내용으로 주련 불사를 하자고 해서 지금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이것(홍보물)이 우리 실상사를 ‘지혜의 향기’로 장엄하고자하는 2025 문자반야 프로젝트 홍보물입니다. 이번 주련 불사는 템플스테이 공간이 새로 만들어진 공간이기도 하고, 무작위 대중들이 오가는 곳이기도 하기 때문에, 오히려 이 공간이 우리가 생각하는 문자반야 프로젝트의 취지를 담아낼 수 있는 좋은 장소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한글화된 주련을 통해 초등학생들도 보고 읽고 알 수 있도록 할려고 했지만, 아직까지는 그렇게 못 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한글도 함께 담고, 예술적인 감각도 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주련을 만들어보자고 마음을 모았습니다. 그 결과, 그 분야의 대가라 할 수 있는 분을 우리 안상수 교수님이 모셔왔어요. 이분도 굉장한 분이더라고요.

서예가이신 다천 김종원 선생님께서 이번 주련 작업을 맡아주셨습니다. 원래는 주지스님이 머물고 있는 원융당과 템프스테이 공간의 주련을 다는 것으로 계획했었는데, 원융당의 경우에는 주련을 거는 위치나 형태가 적절치 않아 보여, 현재는 좀 유보된 상태입니다. 반면, 템플스테이의 공간은 김종원 선생님의 필체로 만들었습니다.

이름은 ‘휴휴당(休休堂’)인데, ‘휴’와 ‘당’은 한자이고, 가운데 ‘휴’는 한글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한자와 한글을 함께 담아 표현한 편액, 즉 현판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1차적으로 현판부터 시작했습니다.

현판인데 한글을 같이 담아놓으니까 글씨라는 느낌보다는 그림이라는 느낌이 있습니다. 이러한 조합이 상당히 독특하기도 하고 매력적이에요. 대단히. 저는 잘 모르지만 이런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공유하면 좋을 것 같아서 자랑도 할 겸, 설명을 드리는 겁니다.

 

 

불사의 의미 – 포교와 전법의 본질

 

결론적으로는, 이 작업 역시 불사의 일환이기 때문에 우리가 불사금을 많이 모아야 됩니다. 사실 오늘 법회에서 이 내용을 말씀드리게 된 것도, 그런 현실적인 필요를 함께 나누기 위함입니다. 탑 불사나 불상 불사, 법당 불사와 같은 전통적인 불사들은 우리 신도님들께서 이미 너무도 잘 해오고 계시기 때문에, 굳이 많은 설명이 없어도 자연스럽게 참여해 주십니다. 그런데 이번에 우리가 진행하고 있는 이 ‘문자반야 프로젝트’는 그동안에는 그리 중심에 두고 이야기 된 적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이 불사의 의미를 부각시키고, 함께 만들어가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으로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이 작업은 조용히, 그러나 조금씩 진행이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문자반야 프로젝트도 최소한의 재정이 필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 자리를 빌려, 두루두루 많은 분들이 동참해 주시기를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덧붙여서, 이 불사는 본인만 참여하는 게 아니라 주변에 인연이 있는 사람들한테도 널리 권유해 주셨으면 합니다. 본인이 직접 불사에 참여하는 것을 우리는 ‘시주’라는 말로 표현하고, 직접 참여는 어렵지만 다른 이에게 권유해서 동참하게 하는 것을 ‘화주’라고 얘기를 합니다.즉, 내가 시주를 하든, 누군가에게 권유하는 화주가 되든, 두 가지 모두 전통적으로 대단히 큰 공덕이 있는 행위로 평가를 해 왔습니다. 시주자와 화주자의 공덕은 예로부터 불교 신앙 안에서 중요하게 강조되어 왔고, 그 가치를 높게 평가해 왔습니다.

이번 문자반야 불사가 원만하게 잘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재정의 뒷받침이 꼭 필요합니다. 우리 신도님들께서 오늘 제가 설명 드린 것을 참고하셔서 문자반야 프로젝트 불사가 원만 성취될 수 있도록 많은 동참을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주변의 인연 있는 분들에게도 널리 알려 주시고, 함께 참여하실 수 있도록 권유해 주시기를 당부 드립니다. 끝으로 우리가 실상사에서 하고 있는 불교를 보통 ‘새로운 시도’처럼 느끼실 수도 있지만, 사실은 새삼스러운 내용을 하고 있거나 새로운 내용을 하고 있거나 그렇지 않습니다. 전통적으로 해왔던 내용들입니다. 다 전통적으로 해왔던 내용인데 다만 실상사에서 하는 것은 현대적인 언어로 해석하고, 설명하고, 글로 풀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지간하면 보고 읽고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하려는 노력입니다.

우리가 실상사에서 하고 있는 불교는, 이미 전통 속에서 해오던 내용들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풀어내는 작업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사부대중 발원문’, ‘붓다로 살자 발원문’,‘21세기 약사경’등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다 현대적 언어로 표현되어 있어서, 굳이 따로 설명을 하지 않아도 그냥 읽어보면 아 뭔 말을 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이해하도록 돼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부분에 실상사와 인연 있는 우리 사부대중이 자신감과 자부심을 갖고 생각을 해도 좋겠다. 이런 말씀입니다.

 

 

소타고 소 찾는 이야기 – 부처와 중생의 공통점과 차이점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는 차원에서, 최근에 우리가 집중하고 있는 한 가지를 덧붙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동안 실상사에서는 부처님의 생애와 불교를 어떻게 하면 더 단순하고 명료하게 전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 속에서 여러 가지 실험과 시도를 해왔습니다. 그 가운데, 이거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 아닐까 하는 얘기들이 몇 차례 있었습니다. 혹시 짐작되는 게 있을까요? 법회 때 몇 번 얘기했는데, 그렇습니다. ‘소타고 소 찾는 이야기’입니다.이 이야기는 선불교의 사유 방식입니다. 이 방식이 선불교 때 갑자기 돌연변이처럼 등장했나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비슷한 사유 방식이 경전들 속에서 많이 나옵니다. 비록 형식은 다를지라도, 그 메시지는 매우 유사합니다. 다만 ‘소 타고 소 찾는 이야기’는 선불교 쪽에서 많이 사용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그 얘기, 소 타고 소 찾는 문자반야를 주제로 이 불사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합니다. 소 타고 소 찾는 사고 방식의 내용을 갖고 봤을 때 부처와 중생의 공통점은 무엇이고, 차이점은 뭘까? 이 질문에 대해 제가 정리해 봤습니다. 이제 그 내용을 한번 읽으면서 설명을 드리는 것으로 문자반야 불사 내용이 이런 것이다 하는 것을 좀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첫 번째 붓다와 중생의 공통점

 

이 내용을 보실 때, 각자 ‘붓다와 나의 공통점’ 이렇게 읽으면 좋겠습니다.첫 번째 공통점은, 생물학적으로 똑같습니다. 생물학적으로는 무슨 말인지 아시죠?생물학적으로 똑같다는 얘기는 그건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두 번째, 똑같이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소를 타고 있습니다.부처님도 몸과 마음이라는 소를 타고 있고 우리도 몸과 마음이라는 소를 타고 있습니다.

세 번째, 똑같이 행위하는 대로 그 삶이 만들어집니다.부처님도 그렇지만 나도 그렇다. 우리도 그렇다 그런 얘기입니다.네 번째, 싯달타 당시나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이나 똑같이 소를 타고 있으면서도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몰라서 소를 찾아 동분서주하는 삶을 산다는 얘기죠.이건 똑같아요. 싯달타나 나나. 부처가 되기 전에는 똑같습니다.부처님 당시도 소타고 소를 찾아 동분서주하는 그런 삶을 싯달타도 우리하고 똑같이 살았다는 얘기죠.

그다음에 다섯 번째, 그때는 소를 찾아서 동분서주하도록 만드는 스승들만 있었지, 소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스승이 없었습니다. 싯달타에게도 그랬고 우리에게도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소타고 소 찾아 헤매도록 만드는 스승들만 있지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사실대로 알려주는 스승은 없었습니다. 그 시대에도 부처님 이전에는 “소타고 있다” 는 사실을 잘 알려주는 스승은 없었던 것입니다.따라서 부처님도 소를 찾아 동분서주해야 하기 때문에 인생의 답을 찾기 위한 과정이 고생고생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어려운 과정을 밟아서 답을 찾는 데까지 도착하게 된다는 얘기죠. 이런 지점이 부처와 우리의 공통점입니다. 부처님에게도 그때 당시에는 소타고 부리는 스승이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다음에 차이점입니다.

붓다와 중생의 차이는 바로 부처님은 ‘몸과 마음’이라는 소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우리는 모른다는 얘기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은 잘 알기 때문에 소 찾아다니는 헛고생을 안 합니다. 반면 우리는 계속 소를 찾아다니는 헛고생을 하고 살아요. 이것이 우리와 부처님의 차이점이에요.그리고 우리는 계속해서 소를 찾아 헤매기만 할 뿐, 소를 부리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합니다. 근데 부처님은 소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이 소를 마음껏 부리며 본인이 살고 싶은 멋진 삶을 잘 만들어 가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소를 찾아 헤매느라고 삶을 제대로 이끌어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죠. 이런 점들이 부처님과 우리의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소를 부리신다고 해도, 어떻게 부리느냐에 따라서 또 차이가 생깁니다. 대부분 우리는 소를 잘 부려서 내 삶을 잘 만들어 가는 쪽에만 머물러 있어요. 하지만 부처님은, 그것도 당연히 포함되겠지만 그 너머까지 가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전통적으로 뭐라고 표현하고 있는가하면 ‘소탄줄을 잘 알고 그 소를 잘 부려서,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 한다는 이 말, 들어보셨죠? 너와 나, 우리 모두 다 같이 소를 마음껏 부려서, 멋있는 삶을 창조해내는 부처님처럼 삶이 되도록 하자 이런 얘기입니다. 자타일시성불도. 나만 잘 사는 데 멈추지 않고, 내 삶만 잘 만드는 데 멈추지 않고 우리 모두 다 같이 함께 잘 살도록 하자 이런 얘기죠. 이런 점이 우리하고 다른 지점입니다. 정리해 보면 부처님도 당시에는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체 소를 찾아다니도록 만드는 스승들만 만났셨던 겁니다. 하지만 그런 스승들의 지도를 받아서는 아무리 수행을 해도 답이 안 나오는 거예요.

결과적으로 다 포기하고, 자기 방식으로 답을 찾습니다. 자문자답의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관찰 사유하니까 “아, 내가 몸과 마음이라는 소를 타고 있었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거예요. 부처님은 스승들의 지도를 받아서 답을 찾은 게 아닙니다. 그 방식으로는 답이 안 나오니까 자기 방식으로 답을 찾는 작업을 하게 되고 그 안에서 답을 찾습니다. 훗날 깨닫는 방식과 내용을 ‘중도(中道)’라는 말로 표현하셨습니다. 중도적으로 하니까 답이 나왔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어떨까요? 우리는 이미 소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그 소를 잘 부려서 멋있게 삶을 살아가고 있는 부처라는 스승한테 묻고 배우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에겐 소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살아가는 스승이 있고, 또 그분의 가르침도 존재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굳이 부처님처럼 고생고생하지 않고도,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잘 부려서 좋은 삶을 만들어 가는 게 충분히 가능합니다.

결국 이 모든 이야기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소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소를 찾아 헤매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소를 잘 부리고 멋있는 삶을 살도록 할 것인가? 하는 얘기입니다.아까 이야기했던 눈 먼 봉사와 연결시켜 보면 눈 먼 채로 우왕좌왕 동분서주하면서 살 것인가, 눈을 떠서 알아야 할 것을 제대로 알고, 내가 살고 싶은 멋있는 삶을 내 마음껏 살 것인가? 하는 얘기죠.

 

 

문자반야 바라밀 불사는 법을 밝히는 일, 전법의 길, 지혜를 전하는 길

 

정리해 보면, 문자반야 프로젝트의 목적은 바로 ‘소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사실대로 알고, 그 소를 잘 부려서 멋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이 목적을 위해서 문자반야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해보면 어떻습니까? 문자반야라고 하는 일이 부처님을 모시는 일보다 덜 중요하다고 생각되십니까? 법당을 짓는 일에 비해, 문자반야가 별로라고 생각이 되신가요?내용을 잘 들여다보면 알 수 있습니다. 법당도 소중하고, 불상도 소중하고, 탑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불상이나 법당, 탑이 갖는 의미가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달되기 위해서는 문자반야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 점을 생각해보면, 불교라는 이름으로 하고 있는 모든 일들 가운데 가장 우선하고 중요한 것이 문자반야 바라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불사를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하기는 어렵지만,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은 꾸준히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 사부대중들도 여기에 깊은 관심과 참여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 길은 단순히 무엇을 아는 것을 넘어, 바르게 알고 제대로 살아보자는 의미에서 열어가는 길입니다. 특히 ‘소타고 소 찾는 불교 이야기’와 같은 메시지가 사람들에게 잘 전달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문자반야 바라밀 불사는 큰 의미를 가집니다. 지금 구체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주련 불사도 단순히 예술성이 있는 작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소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게 하고 잘 부리게 하는 내용까지 잘 드러날 수 있도록 이 불사가 발전하고 진행이 되면 더 없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불사의 의미가 잘 드러나게 되면, 실상사를 찾아오는 무작위 대중들도 자연스럽게 불교의 정신과 사상에 저절로 눈을 뜨게 되기도 하고, 스스로 불자가 되겠다고 발심하는 계기가 만들어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포교를 해야 된다, 전법을 해야 된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문자반야 바라밀의 불사가 그 의미와 내용을 잘 담아낼 수 있게 이루어진다면, 굳이 따로 전법과 포교를 외치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정성스럽게 마음을 모아 주시기를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이상으로 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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