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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결사지리산 마을절 실상사 만일기도 2000일 입재 법문-"붓다는 어려웠지만 우리는 어렵지 않다"

2025-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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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번째만일결사

붓다는 어려웠지만 우리는 어렵지 않다 - 중도적으로 산다는 것

 


오늘은 날씨가 참 덥습니다. 그렇죠? 저는 너무 더워서 가사를 벗었습니다. 잘한 일일까요? 여러분들도 더위로 불편하시면, 너무 의식하지 마시고 자유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덥다면 옷을 벗기도 하고, 공간이 좁다면 넓히기도 하면서, 더위로 인해 마음이 불편하지 않도록 하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더워서 가사를 벗었을 때, 여러분들이 “잘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는 걸 불교적으로는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바로 “중도적으로 했다”라고 합니다. 중도라는 말이. 너무 싱겁죠? (웃음)
조금 전에 중도적이지 않은 예도 하나 있습니다. 뭐였을까요? 우리 상연 스님께서 청법가를 부르며, “법을 설하옵소서”하고 우리가 법을 청하는 절을 했습니다. 그런데 절을 이미 드렸는데, 또 절을 하자고 했습니다. 이건 중도적이지 않은 일입니다.

 

생활 속의 중도


불교 교리적 언어들은 사실 모두 생활의 언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생활 속의 언어로 소화를 못 시키고 자꾸만 일상에서 멀리 떨어진, 거창하고 특별한 무엇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전제하에서 교리 공부를 하다 보니까 해석이 엉뚱하게 흐르고, 설명이 복잡해지고 결국은 어렵고 혼란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법문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법문이 중도적으로 이루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재미있어야 한다고요?(웃음) 법문이 중도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잘 들어야 합니다. 듣는 이가 지극 정성을 다해서 듣고, 또 법문을 하는 사람도 지극 정성으로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걸 뭐라고 한다? 중도로 한다. 오늘은 이 정도로 공부하면 끝내도 안 되겠습니까?

사실은 오늘, 마음 단단히 먹고 잘해보려고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데 준비를 아무리 해도, 이게 잘 될지는 모르겠어요. 오늘 자료집의 7쪽을 보시면, 제가 준비한 내용이 있습니다. 나름 멋있게 한 번 해보려고 준비를 했는데, 멋있게 잘 될지는 조금 걱정이 되네요. 요즘 들어 느끼는 게 하나 있습니다. 나이 들면서 달라지는 게 있다면, 예전에는 준비한 만큼 잘 전달이 됐는데 이제는 그게 잘 안 돼요. 그래서 요즘은, ‘아, 이제는 말을 좀 덜 해야겠다’ 이런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나는 죄 많은 중생이다’는 낡은 믿음

 

 오늘 공부 주제는 ‘중도(中道)에 대한 공부이야기’ 입니다.


붓다로 살자 발원문은 다 잘 아시는 내용인데, 발원문 앞에 구절만 제가 한번 좀 읽고 가겠습니다.


신기하고 신기하도다.

어리석음에서 깨어나 보니 사람이 오롯한 붓다이네.


자, 여기서 **어리석음**이라는 게 뭘까요? 이 ‘어리석음’이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함께 보고 있는 ‘붓다로 살자’ 발원문의 맥락에서 말하는 어리석음은 조금 다르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죄 많은 업보 중생이다.” 사실은 이런 사고방식이 어리석은 사고방식이에요.
우리 대부분이 “나는 죄 많은 업보 중생이야” 이렇게 생각하고, 그 기조 위에서 불교를 배우고 수행을 합니다. 그런데 이 발원문에서는, 그 어리석음에서 깨어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나는 죄 많은 업보 중생이야” 이런 전제를 가지고 삶의 문제를 바라보고 다루고 있잖아요. 그런데 바로 그 전제 자체가 어리석음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으로부터 깨어나야 된다. 그리고 깨어나 보니까, 뭐라 그래요? “붓다이더라.” 이렇게 얘기하는 거잖아요.
자, 그다음 구절 한 번 보겠습니다.


안타깝고 안타깝도다.
어리석음과 착각에 빠져 붓다인 사람이 중생 노릇하고 있네.


이건 얼른 들어보면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아, 그 말 당연하지.”하고 본인이 이미 아는 것처럼 느껴지죠. 그런데, 꼼꼼히 들여다보면 이 말은 보통 이야기가 아니라 어마어마한 이야기예요. 굳이 표현하자면, 팔만대장경을 압축해 놓은 말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8만 4천 법문을 압축해서 한마디로 딱 이렇게.

또 한 번 가보죠.

언제나 분주하고 고달프게 소를 타고 소를 찾고 있네

 

최근에 우리가 소 찾는 얘기를 법회 때 몇 차례 했었죠. 같은 얘기입니다.
이 내용들이 다 사실은 어마어마한 내용들입니다.

 

내 이제 마땅히 중생이라는 낡은 믿음을 버리게 하리

갈피 못 잡고 헤맴에서 깨어나게 하리

 

여기서 말하는 *낡은 믿음*은 뭘까요? 바로 “나는 죄 많은 업보 중생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믿는 오래된 사고방식을 말합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이미 소를 타고 있으면서도, 어디엔가 소가 있다고 믿고 그걸 찾아 헤매는 것들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런 모습들이 다 낡은 믿음에 사로잡혀서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결국, 이 낡은 믿음을 걷어내기 위해서 부처님이 오셨고, 또 일생을 그렇게 살다 가신 것이죠. 부처님이 일생 하신 일이 바로 그겁니다. 이 잘못된 믿음, 이 낡은 믿음으로부터 우리가 벗어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거예요. 그래서 제가 오늘 ‘붓다로 살자 발원문’의 앞부분 몇 구절을 말씀드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저 역시 그동안 불교 수행자로서 삶을 살아보겠다고 이런저런 가르침을 보고 듣고, 또 스스로 탐구하고 따져보면서 오늘까지 살아왔습니다. 그 긴 과정 속에서 제가 내린 결론은 이 ‘붓다로 살자 발원문’이야말로 불교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글이다. 이 내용만 제대로 이해하고, 또 삶에서 소화시킬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렇게 말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어디에 내놔도 우리가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고 봅니다.
그리고 여러분, 이거 제대로만 하면요, 다른 공부 안 해도 충분합니다. 이 내용을 기본 바탕으로 해서 염불을 하든, 참선을 하든, 다 그 위에서 해야 하는 거예요.
그런 바탕 위에서, 그런 기조 위에서 진언도 하고, 염불도 하고, 화두도 들고, 좌선도 하고 명상도 하는 겁니다. 이 기조 위에서 수행을 하면, 그 다양한 수행들이 다 바람직한 불교 수행으로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조가 없이 그런 그 수행을 하게 되면 어떻습니까? 거의 대부분 소 타고 소 찾는 공부, 소 타고 소 찾는 수행으로 귀결될 위험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부분을 우리가 좀 간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말씀을 드립니다.

 

 증도가(證道歌) – 절학무의한도인(絶學無爲閑道人)

 

이제 특별히 준비한 내용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우리 선종 어록 가운데 아주 유명한 어록이 하나 있습니다. 현대의 대표적인 고승이였던 성철 스님께서도 그 어록을 높이 평가하시고, 많은 분들께 권하셨습니다. 그 책이 바로 『증도가(證道歌)』입니다. 거기에 이런 멋진 구절이 있습니다.


“절학무의한도인(絶學無爲閑道人), 부재망상불구진(不除妄想不求眞).”


참 멋있죠? 그런데 이게 무슨 뜻일까요?

‘절학(絶學)’ — 배움을 끊는다.

‘무위(無爲)’ — 인위조작이 없다. 자연 그대로이다.

‘한도인(閑道人)’ — 한가한 도인.

그러니까 전체적으로 보면,

“더 배워야 할 것이 다 끊어진, 꾸며서 할 일 없는 한가한 도인”

이런 뜻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더 배워야 할 게 굉장히 많죠.
배워야 할 게 많으면 편안할까요? 한가할까요? 편안하거나 한가할 수가 없죠. 만약 더 배워야 할 것이 없으면 어떨까요? 당연히 편안하고 한가하지 않겠어요? 지금 이 구절이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더 이상 배워야 할 것이 없는 한가한 도인.” 이런 얘기죠.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한가한 도인이라면 여러분들은 좋겠습니까?
안 좋겠습니까? 좋을 것 같죠? (네)

‘절학무의한도인(絶學無爲閑道人)’,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한가한 도인은 그 살림살이가 어떨 것 같습니까? 아까 뒤에 이어지는 구절이 있었잖아요. ‘부재망상불구진(不除妄想不求眞)’ 망상을 제거하려고도 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보통 어때요? 망상을 제거하기 위해 아등바등하고,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서 또 아등바등하죠. 그런데 이 구절은 말합니다. 제거해야 할 망상도 본래 없고, 추구해야 할 진리도 본래 없다. 그 사실을 정말로 알게 되면 어떨까요? 망상을 없애려는 고생도 사라지고, 진리를 구하려는 애씀도 사라집니다. 그러면 남는 건 뭐겠습니까?
무사태평(無事太平) - 할 일이 없어지니, 그냥 저절로 편안하고 한가해지는 거예요. 그게 바로 ‘절학무의한도인’, 더 이상 배울 게 없는 한가한 도인의 모습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런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을가요? 그걸 부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의 깨달음과 중도의 발견

 

부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첫 번째 길, 그게 바로 중도(中道)입니다. 중도적으로 살아간다는 건, 망상을 없애려고 아등바등할 일도 없고 진리를 구하기 위해서 아등바등할 일도 없어서 저절로 자유로워진다는 얘기입니다. 불교의 핵심 개념불교의 핵심 개념을 정리하면 이렇게 자문자답해볼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 나의 본래 면목은 무엇인가?”

 

이렇게 묻고 관찰사유하는 태도와 방식이 바로 중도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럼, 붓다는 깨달음을 어떻게 얻으셨을까요? 부처님 생애를 놓고 보면, 6년 고행을 포기한 이후입니다. 출가 후, 부처님께서는 당시 인도 사회에서 ‘인생의 답이 있다’고 여겨진 모든 길을, 말 그대로 괜찮다고 알려진 길은 안 가본 길 없이 다 가본 거예요. 그 6년 동안, 세상 사람들이 주장하는 다양한 수행법과 사상을 몸소 체험하시면서, ‘이 길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하신 겁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동안 무소유처 선정에도 도달해보고, 비상비비상처 선정에도 도달해보셨습니다. 그래서 신비한 체험도 해보고 불가사의한 체험도 해보고, 신통 체험까지, 말 그대로 온갖 것을 다 해보셨습니다. 그런데 본인이 찾고 싶은 답은 나오지 않았던 거예요. 결국, 다 해봐도 답이 안 나오니까, 그 모든 것을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엔 무엇을 하셨을까요? 이미 그때 부처님은 자문자답으로 자기 방식의 길을 가십니다.
그 자기 방식의 길에서, 본인이 찾던 답을 얻으셨습니다. 소위 말해서 깨달음을 이루는 거죠. 지금 우리가 핵심 개념이라고 부르는 자문자답, 중도, 관찰·사유, 여실지견, 연기 실상은 부처님이 고행주의를 포기하시고 당신 방식으로 깨달음을 이루신 그 경험을 개념화한 것이 바로 이 내용입니다. 이때까지는 이런 이야기들은 없었어요.
즉, 부처님께서 첫 제자들에게 법문을 전하실 때, “내가 내 방식으로 해보니까, 이렇게 해서 부처가 된 거야.” 이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말씀드린 이 내용은, 기존의 길을 다 포기하고, 당신 방식으로 깨달음에 도달한 과정의 내용을 개념화시킨 겁니다.

 

처음이 뭐죠? 자문자답, 그리고 “너의 본래 면목” 또는 “나의 본래 면목”이라는 개념입니다. 이건 주로 선가(禪家)에서 많이 사용되는 개념들입니다.
불교 사상사를 보면, 선불교는 전체 사상사에서 마지막 단계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기 불교에서부터 역사 현장에서는 사실 엄청난 변화들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그 변화의 하나가 바로 대승불교의 등장이었고, 그다음에 중국에 와서 선불교가 등장합니다.
그 이후로는, 천 년 이상의 역사가 지나오면서 새로운 흐름이 크게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를 보면 어쩌면 우리 시대에 맞는 새로운 불교가 등장해야 맞지 않겠느냐, 그런 생각이 듭니다. 역사적으로, 그것이 어떻게 나타날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렇게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서 ‘자문자답(自問自答)’, 즉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한다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보통 조실 스님을 찾아가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가져와 봐라.” 또는 “너의 본래면목을 찾아야 한다.”, “너의 본래면목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합니다.
이 ‘본래면목’이라는 말은 순전히 선적(禪的) 언어인 셈인데, 이를 불교 교리의 언어로 바꾸면 ‘본래 부처’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즉, “즉심즉불(卽心卽佛)” - ‘마음이 곧 부처’라는 가르침과 같은 뜻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극단적인 기존의 길을 버리고, 자포자기의 지점에서 새로운 길을 찾으셨습니다. 그동안 세상에 알려진 수행의 길이라는 길은 모두 시도해 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답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자기 방식으로 진리의 길을 찾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때 꼼꼼히 종합 정리해서 보니까, 그동안 안 해본 게 하나 남아 있었습니다.
그게 뭐일 것 같습니까?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단순한 부처님 생애의 해설이 아니라, 제가 수행하면서 직접 경험하고 고민했던 것과 연결된 해석입니다. 즉, 부처님 삶의 여정을 제 방식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모든 길을 다 걸어보시고, 모든 수행법을 다 시도해 보셨지만 마지막에 깨달으신 것은 ‘아직 해보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관심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동안 세상의 모든 길, 모든 방법을 탐구하셨지만, 정작 ‘자신’이라는 존재를 어떤 전제도 없이 주의 깊게 관찰해 본 적은 없었던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세상 구석구석을 다 뒤지고 다니며 ‘소’를 찾아 헤맸지만, 정작 지금 자기가 타고 있는 소, 즉 자신의 본래 참모습에 대해서는 한 번도 눈길을 준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부처님께서 외부를 향하던 시선을 거두고, 처음으로 “답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삶의 주체인 너 자신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물건이야?”라고 물으며 관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스스로에게 물으며 지금 여기 자기자신에 직접 대면하여 관찰하유하는 것을 훗날 중도(中道)라고 표현합니다.

‘중도’란,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앉아 있는 자기 자신을 직접 대면하는 태도와 방식입니다. 부처님은 직접 대해서 무엇을 하셨을까요? 바로 관찰과 사유입니다. 다른 존재나 대상이 아니라, 어떤 전제도 없이
자기 자신의 진면목(眞面目), 자기의 참모습, 있는 그대로의 모습, 그 사실적인 자기 자신을 직접 관찰하고 사유하신 것입니다.

  

연기실상(緣起實相)

 

그 결과사실이 사실대로 드러나게 되고 ‘여실지견(如實知見)’, 즉 사실을 사실대로 아는 지혜를 얻게 된 것입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알고 그것을 개념으로 표현한 것이 ‘연기실상(緣起實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실상(實相)은 말로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실상을 이해하고 삶을 잘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개념화한 것이 연기실상이라는 말입니다.

 

즉 연기실상은 부처님께서 어떤 전제도 없이 직접 자기 자신을 주의 기울여 관찰 사유한 결과, 그 경험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정리한 표현입니다. 그동안은 신과 관계된 신비한 무엇, 아트만이라고 하는 신령스러운 무엇과 관계된 것들을 전제로 다뤄져 왔습니다. 그 연장선에서 삼매에 들기도 하고, 신비 체험도 하고, 신통 경험도 하고 온갖 것을 다 해봤지만 찾았던 답이 안 나오니까 그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자기 방식으로 했단 말입니다.
자기 방식으로 관찰하고 사유한 결과로 드러난 것을 개념화한 그것이 바로 ‘연기실상(緣起實相)’이라는 말입니다. 이 ‘연기실상’이라는 말속에는 더 구체적인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첫째로 “모든 존재는 오온(五蘊)의 인연이 화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불교의 기본 교리죠. 즉 우리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모든 것은 실체적으로 분리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인연이 모이고 흩어짐에 따라 잠시 형성된 오온의 화합체라는 것입니다.
또 관찰을 해 보니까, 우리가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이라고 하는 것을 갖추고 있죠. 이걸 불교에서는 육근(六根)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육근을 갖추고 있는 존재예요.

그런데 다시 관찰해보니까, 이 육근이 홀로 있는 게 아닙니다. 무엇과 함께 있습니까? 바로 육경(六境)과 함께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한 번 더 깊이 관찰해보니까, 이 육근과 육경이 각각 존재하는 것이 아니에요. 육근과 육경이 서로 만나서 작용할 때 육식(六識)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걸 교리적으로 정리하면 오온(五蘊) 십팔계(十八界)라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너라고 하는 존재가 어떻게 생겨 먹은 물건인 거야?”라고 묻는다면, 지금 설명한 이론적이고 교리적인 답이 될 수 있는데 이것은 그냥 참고하십시오. 반면 선사들의 답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 전개됩니다. 그 이야기는 따로 할 기회가 있을 때 다시 다루기로 하고, 지금은 교리적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이론적인 흐름만 정리해 보겠습니다.
‘오온(五蘊)’이란 무엇입니까?

“인생이란 뭐냐, 나는 누구냐”라는 물음에 쉽게 얘기하면 그 물음에 “너는 인연이 화합하여 이루어진 존재다.” 이것을 개념화한 것이 바로 오온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활동하고 있을까요? 육근(六根), 육경(六境), 육식(六識)이 서로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가 함께하여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입니다.


다시 한 번 또 짚어봅시다. 오온이라고 하는 것과 육근·육경·육식이라고 하는 것이 따로따로 떨어져 있을까요? 아니죠. 다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런 걸 우린 인드라망이라고 얘기합니다.
그중에서 ‘눈’이라는 그물코만 하나 딱 들어봅시다. 눈이라고 하는 게 혼자서 존재할 수 있을까요? 존재할 수가 없죠. 눈으로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없죠. 그건 불완전한 상태죠. 그럼 어떻게 해야 눈이 완전해질까요? 눈 하나만 떼어내는 방식으로는 완전해질 수가 없어요.
그럼 뭐가 있어야 돼요? 눈에는 색(色)이 같이 있어야 되고 또 그것을 인식하는 식(識)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이 셋이 서로 어우러질 때 비로소 눈이 ‘눈으로서’ 작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실 확인을 해보면 오온·육근·육경·육식으로 개념화된 우리의 존재, 즉 오온십팔계(五蘊十八界)라 불리는 나의 모습은 결국 인드라망처럼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 인드라망처럼 이루어졌다는 말은 곧 그 자체로서 원만구족(圓滿具足)하다는 뜻입니다.
미완성이거나 부족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충분히 원만구족하다 이런 내용을 대승불교나 선불교로 가게 되면 ‘한 몸’, ‘한 마음’, ‘본래 부처’, ‘본래면목은 원만구족하다.’ 이런 표현들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중에 어떤 것 하나라도 분리되어 떨어져 버리면 다 불완전해져 버립니다. 다 연결돼 있어야만 완전한 거예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이런 장황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사실 오늘의 주제인 바로 ‘중도(中道)’를 이야기하기 위해서입니다. 경전들을 보면 ‘중도(中道)’라는 말도 있고, 또 그냥 ‘중(中)’이라는 한 글자로만 쓰인 경우도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대부분 ‘중도’와 ‘중’은 서로 다른 개념이다.”이렇게 구분해서 설명합니다.
그런데 내가 볼 적에 굳이 다르게 쓸 필요 없다고 봅니다.
저는 같은 말로 봐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그 이상의 얘기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역경(譯經)의 천재’라고 불리는 구마라집(鳩摩羅什) 법사의 번역을 보면, 이분은 ‘중도’라고 써진 것하고 ‘중’이라고 써진 것을 같이 쓰고 있습니다.
즉, 한 글자 ‘중(中)’만 써진 경우에도 그것을 ‘중도’의 개념으로 이해했고,

‘중도’라고 풀어서 써진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그 ‘중(中)’의 의미를 확장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니까야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분들은 이 둘을 구분해서 봐야 한다는 견해가 대체적인 경향인 것 같습니다. 물론 100% 그런 것은 아니고, 구마라집의 해석에 동의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그걸 동의하지 않고 구분해서 다뤄야 한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는 그 가운데서 구마라집의 견해에 동의하는 입장입니다.

 

중도적 사고의 세 가지 비유


‘중도(中道)’라는 말은 경전에서 여러 가지 비유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 네 가지 비유를 잠깐 살펴보려고 합니다. ‘독 묻은 화살 이야기’, ‘소 타고 소 찾는 이야기’, ‘응병여약(應病與藥) 이야기’ 그리고 ‘두 개의 진리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 ‘두 개의 진리’ 이야기는 《중론(中論)》의 내용으로, 다소 복잡하기 때문에 오늘은 잠시 빼고 앞의 세 가지 비유만 중심으로 보겠습니다.
이 ‘독 묻은 화살’ 이야기는 초기 경전, 즉 **니까야(Nikāya)**에 나오는 유명한 비유입니다. 설명을 드리면 누군가가 독 묻은 화살을 맞아서 위독한 상황에 놓였어요.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지금 이 사람은 독 묻은 화살을 맞고 죽네 사네 하는 절박한 위기 상황에 놓여 있는 현실이에요. 이게 바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에요. 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입각해서 판단한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이 독이 무슨 독인지?” 이런 거 연구하고 검토하는 게 맞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역할을 해야 되겠습니까?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하는 겁니다.
그렇죠. 만사 제쳐 놓고,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적으로 화살을 뽑고 독을 제거해야 하겠죠. 혹시 “나는 그렇지 않을 거야. 다른 시선, 다른 더 좋은 길이 있을 거야” 이렇게 말할 분 계십니까?

여기 계신 분들은 이 얘기에 다 동의하시죠? 이게 중도적 태도라는 얘기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중도적으로 판단한 거예요. 우리는 경전에서 ‘중도’라는 말을 들으면 엄청나게 복잡하고 어렵운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상을 잘 관찰해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불교 교리를 알거나 모르거나 상관없이 우리 모두는 이미 중도적인 판단과 행동을 수도 없이 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많아요.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한 판단도 바로 그 예입니다. ‘지금 여기’의 절박한 현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대면해서 우리는 그런 판단을 한 거예요.
“만사 제치고, 그 어떤 것보다 우선적으로 독 묻은 화살을 빼내고 독을 제거해야 한다.”

이런 것을 기본으로 해서 다음 수순으로 가야 맞지 않겠어요?

이런 관점과 태도로 접근하는 것, 바로 이것을 우리는 ‘중도(中道)’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중도는 후대의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중도론과는 결이 다른 얘기입니다. 이것은 부처님 생애에서 깨달음을 이룬 직후, 최초의 설법, 즉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에서 가장 먼저 언급하신 그 ‘중도’의 의미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이때 중도의 의미가 어떤 뜻을 지니는가를 지금까지 계속 천착해 왔고, 제가 천착한 바로는 이렇게 정리가 되더라. 지금 그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불교 교리를 모른다 하더라도 불교 교리에 맞는 관점과 태도로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경우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그 사실을 잘 관찰해보면 ‘불교 공부’와 ‘수행’이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것만이 아니라는 걸 자연스럽게 수긍하게 됩니다.

다음으로 보죠. ‘소 타고 소 찾는 이야기’입니다. 소를 타고 있는 사람이 소를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이것도 마찬가지예요. 지금 여기의 사실, 바로 현장의 실상에 입각해서 봐야 합니다. 중도적으로 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소를 이미 타고 있는 사람이 소를 찾으려고 할 경우, 지금 여기 현장의 사실에 입각해 봤을 때 어떻게 하면 소를 찾는 게 가능할까요? (청중:옆에 있는 사람한테 물어봐야죠.)
그렇습니다. 이것도 사실에 입각해 봐야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싯다르타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 극단적인 고행주의를 최정점까지 간 다음에 포기하잖아요. 그때까지도 계속 소를 타고 있으면서도 소를 찾아 헤맨 거예요. 아니 헤맨 거라기보다는, 소를 찾기 위해 죽기 살기로 노력을 한 거예요.
그런데 결국 못 찾았어요. 그럼 어떻게 찾았을까요? 누군가의 말이나 경전, 혹은 외부의 방법들을 쫓아다니는 것을 모두 포기한 순간이였습니다. 다 포기하고 지금 여기에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자기 자신을 직접 대면한 것입니다.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대면해서 관찰 사유한 겁니다. 이 순간, 지금 여기에서 자기 자신에게 직접 대면하는 것을 뭐라고 한다? ‘중도적으로 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해보니, 두 가지 길이 보였습니다.

첫 번째 길은, 지금 여기, 그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직접 관찰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지?”하고 관찰해보니까, 지금 여기 내가 소 타고 있다는 사실을 사실대로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았던 사실이 환하게 드러난 것이죠.
온갖 신통을 부리고 황홀한 신비 체험을 하고 불가사의한 기적을 부리고 해도 알 수 없었던 것인데 바로 지금 여기에서 자기 자신을 직접 보는 순간 바로 “아, 지금 내가 소를 타고 있네”하고 알게 되는 겁니다.

두 번째 길은, 누군가에게 잘 묻고 배우는 것입니다. 잘 묻고 배우면, 본래 본인이 소타고 있음을 바로 알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설명이나 가르침을 통해 소 탄줄 알게 되면 그다음엔 어떻게 될까요? 첫째 소 찾아 전전긍긍하는 고생이 바로 끝납니다. 둘째는 소를 잘 부려서 본인이 살고 싶은 삶을 마음껏 창조하고 누리며 살게 됩니다. 앞서 이야기한 독 묻은 화살도 마찬가지고, 소 타고 소 찾는 이야기에서도 동일합니다.

 

그리고 하나 더 있습니다.

응병여약, 즉 병에 따른 약 처방이라는 비유입니다. 이 비유로 예를 든다면 부처님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년에 너무 노쇠해서 힘드니까, “아, 나 힘들어 죽겠다” 할 때, 또는 부처님이 식중독에 걸리셔서 위독한 상황일 때가 있었습니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아까 말씀드린 독 묻은 화살 이야기를 떠올려 보십시오. 노쇠해서 너무 힘든 상황입니다. 이때 우리는 “좀 쉬어가자”라고 주문을 받았습니다. 자, 여러분들이 이런 상황에 직면한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와 고려할 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는, 현실적인 판단이 최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 가지 복잡한 이유나 조건들을 따지기 전에, 우선 쉬도록 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해야 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노쇠해서 생긴 문제이므로, 다른 이유를 찾으려고 기웃거리지 말고 즉각적으로 쉬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틱낫한 스님께서 실상사에 오셨을 때의 일입니다. 사실은 제법 됐는데요. 많은 분들이 스님을 명상가로만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분은 명상가 이전에, 베트남전 당시 현장에서 문제를 마주해서 대단히 치열하게 활동했던 분이에요. 그런 활동 이력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주로 걷기 명상가라고만 인식하고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새만금으로 가는 길에 실상사에 들러 이야기를 좀 하고 가기로 하셨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님을 고요하게 명상하는 분으로만 알고 계셨고, 그렇게 또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방문을 통해, 스님의 또 다른 면모가 드러나도록 얘기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실상사에서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약간의 논쟁적인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한 자리였습니다. 현실 문제와 직면해서 다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막상 오셨는데 보니까, 노인네가 너무 지쳐서 죽을 지경이였습니다. 그동안 여기저기서 많은 행사와 활동을 하신 탓입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논쟁적인 이야기를 나누려고 자리를 마련했지만, 얼굴을 보니 이대로 진행할 수 없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사람의 도리로서 생각했을 때,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모든 계획을 접고, 만사 제치고, 우선 쉬시게 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다른 계획은 포기하고 단순화했습니다. 의례적인 인사만 드리고, 그때 내가 주지를 할 때인데 주지실을 비워서 편히 쉬시게 했어요.
현장의 사실에 입각해서 보니까, 이런저런 계획들이 있었지만 실제로 적용하면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우선 이분이 쉬게 하는 것이 이분을 위해서도 바람직하고, 또 우리를 위해서도 그것이 인간적으로 바람직한 일이였습니다

결국 만사 제치고 우선 쉬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중도라는 관점과 태도로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현실에 입각하여 올바르게 판단하고 대응하는 것, 이것이 중도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스님께서 실상사를 다녀가셨습니다. 지금 주지 스님 차실을 가보면, 스님이 선물로 남기고 간 글이 있습니다. 내용을 보면“ 걸음걸음이 정토다”, 혹은 “걸음걸음이 부처 행이다”라고 할 수 있는 말이 적혀 있습니다. 그 뒤의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겠습니다. 수경 스님이 실상사에 계시던 시절, 세계적인 명상센터를 순례하면서 틱낫한 스님이 계시는 플럼빌리지를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당시 수경 스님은 대중운동가로 막 등장해서 바람을 일으키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대중운동을 하는 스님이 플럼 빌리지를 찾아가게 되었는데, 실상사에서 스님을 만사 제치고 쉬게 해드린 배려에 대해 틱낫한 스님께서 너무 고마워하셨다고 합니다.

이쪽저쪽에서 이것저것 하려고만 하는 상황인데, 어렵게 초청한 분임에도 불구하고 실상사에서는 만사 제치고 우선 쉬시라고 배려한 것을 너무 고마워하면서 특별한 배려를 하더라고 그래요.

독 묻은 화살 이야기, 소 타고 소 찾는 이야기, 응병여약 이야기 세 가지 이야기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중도적으로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중도의 정의

 

그럼 중도적으로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중도란 바로 “지금 여기 있는 사실에 직면하는 관점과 태도”를 말합니다. 저는 이렇게 문제를 접근하고 다루면, 경전의 언어들도 다르게 해석이 되기도 하고, 현실 물음에 답이 되는 해석과 설명이 가능하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비록 제가 학문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이런 이야기들을 좀 더 치열하게 탐구해보고 싶어 오늘 이 자리를 마음먹고 준비했습니다.

끝으로 밑에

 

공통점: 중도, 지금 여기, 사실에 입각함

 

이것이 중도에 대한 정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붓다는 어려웠지만 우리는 어렵지 않다

 

그다음 두 번째는 결론입니다.

 

“붓다는 어려웠지만 우리는 어려울 것이 없다.”

 

사실 이 이야기가 오늘 이야기의 백미입니다.
이 말을 이해하려면, 즉 사실에 입각해서 읽어야 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부처님이 깨닫기 전, 즉 소를 타고 소를 찾아 쫓아다닐 때 많은 스승들을 만나고, 많은 걸 보고 배우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경험이 대부분 소 탄 줄을 모르고 소를 찾아 쫓아다니는 내용들인 거예요. 그러니까 소 탄 줄을 알고 소 찾는 이야기를 제대로 설명해 줄 어떤 책도 어떤 스승도 없었던 거예요. 그런데 그 스승한테 가서 배우고 그런 책을 통해서 배웠던 거죠. 그러니까 소 탄 줄을 모르고 소를 찾아 노력하는 스승들의 가르침들을 보고 듣고 배우는 방식으로 했기 때문에 결국은 소를 못 찾는 거예요.
부처님께서는 당시 최고의 경지까지 다 도달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 과정을 황홀한 삼매의 경지니 신비한 체험이니 불가사의한 신통력이니 등으로 표현합니다. 실제 모든 방법을 다 시도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은 소 탄 줄을 알고 소를 부리며 사는 길을 가르쳐주는 책도 스승도 만나거나 배워본 적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 이전에는 그런 길을 가르쳐 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걸 뭐라고 표현하고 있는가 “일찍이 그 누구도 가본 적이 없는 길”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즉 부처님이 깨달아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내용, 우리가 개념으로 말하는 핵심은 바로 ‘중도와 연기’입니다. 이 중도와 연기라고 표현 되어지고 있는 내용은 “일찍이 그 누구도 가본 적이 없는 길의 내용이다” 이런 얘기죠. 그러니까 어떤 스승이나 책을 통해서도 소 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소를 잘 부리며 사는 길을 안내해 주는 내용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실제 부처님께서 모셨던 스승들 중에도, 그러한 길을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결국 온갖 방법을 다 시도해도 답이 나오지 않자, 부처님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길을 찾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방식으로 한 결과, 답이 나왔고 답이 나온 그 방식을 훗날 개념화한 것이 중도라는 개념인 거죠.

그래서 “붓다는 어려웠다”라는 말은 아무리 초월적이고 신비하고 기적적인 신통방통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의미가 아닙니다. 부처님 자신이 깨달음을 이루기까지 과정이 너무너무 어려운 과정들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 어려웠을까요? 부처님은 소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사실대로 알지 못한 채 소 찾아 고행 정진에 목숨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 길이 너무나 험난했습니다. 어려운 과정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6년 고행상’입니다. 고행상이야말로 깨달음에 도달하기까지의 부처님 삶이 너무나 어렵고 고생스러운 과정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다음의 말, “우리는 어려울 것이 없다”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첫째, 우리는 소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소를 잘 부려서 멋있는 삶을 자유자재로 창조하기도 하고 누리기도 하는 부처라는 스승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분이 가르쳐준 내용이 있습니다. 소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가르침을 남겨주셨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기 이전에는, 그런 가르침이 없었습니다.
있어봤자 소를 탄 줄도 모르고 소를 찾게 만드는 가르침들이었던 거죠.
그런데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신 이후에는, 소를 탄 줄을 알고 삶을 다뤄가는 실물도 있고 역사적인 사례, 또 책과 가르침도 존재하므로 우리는 부처님 흉내만 내면 돼요.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본받을 스승이 확실하고, 배울 가르침도 확실하게 있기 때문에, 중도적으로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한다면 그렇게 복잡하고 어렵지 않게 멋있는 삶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낸 멋있는 삶을 우리는 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깨달음의 문명이 우리 삶이 되도록 만든다 이런 얘기입니다.

즉, 우리 모두가 소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의 소를 잘 부려서 나도 좋고, 너도 좋고 우리 모두가 함께 좋을 수 있는 삶을 만들어가는 것, 이것이 바로 깨달음의 문명길입니다. 우리가 잘 열어가기도 하고 또 많은 사람들과 함께 힘차게 가기도 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오늘 얘기를 끝낼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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