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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법회[2025년 11월] 소를 부리는 삶 - 일상 속에서 완성되는 깨달음의 실천, 불교수행

2026-01-05
조회수 78


11월 보현법회
“소를 부리는 삶 ― 일상에서 완성되는 깨달음의 실천 불교 수행”


최근에 우리는 이미 소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사실대로 잘 아는 것, 그리고 그 소를 잘 부려서 나에게도, 너에게도, 우리 모두에게도 유익한 삶을 창조해 가는 것, 그것이 곧 불교 공부와 수행의 전부라는 이야기를 틈틈이 해 왔습니다.
오늘은 이와 관련해서 먼저, 소를 타고 있음을 알고 소를 부리는 삶이 부처님 삶 속에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아울러, 부처님이 뜻한 불교 정신을 선적으로 잘 계승해 왔다고 하는 조사선 불교의 선사들은 이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그 점도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또 시간이 된다면, 제가 직접 수행하며 경험하고 겪었던 이야기들도 곁들여서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이런 이야기들을 통해서 불교 공부와 수행을 일상생활 속에서 실제로 적용하고, 일상의 삶과 불교 수행이 통일될 수 있는 길을 찾고 만들어가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런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같은 문제의식이지만, 부처님께서 설명하신 내용과, 또 조사선의 정신으로 선사가 설명한 내용은 어떻게 다르고, 또 어떻게 같은지. 이 점을 참고삼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선사들에 의해서 쓰인 한 대목을 제가 우리말로 풀어낸 내용을 한번 읽어보려 합니다. 이 글은 육조 혜능 선사의 제자인 영가 현각 선사, 보통 영가 스님이라고 부르는 분의 글입니다. 잘 알려진 「증도가」라고 하는 저술 속에 들어있는 내용입니다.

그럼,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누군가로부터 비난의 소리를 듣게 될 때,

단단히 마음먹고 그냥 물처럼 흘려보내라.
마치 횃불로 하늘을 태우려는 것 같아,

스스로 피곤하고 초라해질 뿐이니

 

또 한 구절이 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비난의 소리를 듣게 될 때,

기꺼이 감로수를 마시듯이 하면,

바로 시비분별이 녹아내려,

즉각 불가사의한 해탈 경계에 들어가네.


이건 우리가 일상에서 늘 경험하는 내용이잖아요.
누구로부터 욕을 듣거나 비난을 듣는 일, 이런 일은 우리가 사는 일상 속에서 늘 겪게 되지 않습니까? 직접 부닥치기도 하고, 직접 부닥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음모적으로, 뒤에서 그런 상황을 당하게 되기도 합니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 습관 때문에 남 흉보고, 비난하고, 이런 일도 우리가 참 잘하잖아요. 나도 모르게. 습관이 돼서 뒤에서 꾸시렁꾸시렁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그 말 때문에 누군가는 상처를 받게 되기도 하고, 그런 일들이 벌어집니다.
너무나 평범한 일상, 어쩌면 모든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는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영가 선사는, 소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이런 상황에 직면했을 때 자기가 타고 있는 그 소를 잘 부려서 이 상황에 잘 대응하니, 그 결과가 바로 앞에서 읽은 경계로 나타났다, 지금 영가 선사는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부처님의 삶에 나타난 소를 부리는 모습



이런 문제의식은 부처님 생애 속에서도 설화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누군가가 부처님을 찾아옵니다. 일부러 찾아왔다고 볼 수도 있고,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만나서 벌어진 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부처님을 상대로 온갖 비난을 퍼붓습니다. 거짓말쟁이라고도 하고, 사기꾼이라고도 하고, 할 수 있는 욕이라는 욕은 다 쏟아냅니다. 그 배경을 보면,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룬 이후에 불교가 그 시대에 상당히 주목을 받는 종교로 부상하게 되면서 곳곳에서 출가자들이 많이 생깁니다.
그 출가자들은 누구의 남편이기도 하고, 누구의 아들이기도 하고, 형님이거나 동생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에 의해서 내 남편이 출가를 했다” 또는 “부처님 때문에 내 아들이 출가를 했다”, “내 동생이, 내 형님이 출가했다” 이런 원망과 분노가 부처님을 향해 쏟아지게 되는 거죠.

그런데 그 사람들은 불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불교가 당시 신흥 종교였기 때문에 “삿된 가르침이다”, “대중을 현혹시키는 가르침이다”, “사람들을 기만하는 가르침이다”하면서 온갖 비난을 쏟아내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그 안에는 단순한 비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에 대한 불만, 그리고 스스로 안고 있던 상처와 아픔이 함께 들어 있었습니다. 그 불만과 아픔, 그런 것들이 있는 사람이 부처님을 만나서, 결국 그 모든 감정을 온갖 비난의 말로 퍼붓는 거죠.


그때 부처님께서는 아무런 반발도 하지 않으시고, 아주 차분하고 침착하게 그 사람의 말을 끝까지 다 들으십니다. 한참을 퍼부어 놓고 그 사람이 멈추자, 그제서야 부처님께서 반응을 하십니다.

“지금 하시려던 이야기를 다 하셨습니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끝까지 충분히 다 하셨습니까? 혹시 남아 있다면 마저 더 하셔도 됩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내가 할 소리는 다 했다”는 것이 확인되자, 그때 부처님께서 하나의 비유를 들어 설명을 하십니다.

“집에서 고마운 분이나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을 손님으로 초청하게 되는데, 그때 집주인은 어떻게 합니까?”

그러자 “당연히 진수성찬을 잘 차려서 정성껏 대접을 합니다.”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그러면 부처님께서 다시 물으십니다.
“그런데 만약에 초청받은 손님이 그 진수성찬을 먹지 않고 그냥 돌아간다면, 그 진수성찬은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준비했던 집주인인 내가 먹습니다.”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 대답을 들은 뒤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지금 나에게 온갖 비난을 퍼부었는데 그것은 마치 손님을 초청해 진수성찬을 차려 놓았는데 손님이 음식에 손을 대지 않고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욕을 퍼부었지만 내가 그것으로 인해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는다면, 그 욕은 어디로 가겠습니까? 결국은 다시 당신이 가져가게 되지 않겠습니까. 당신의 마음만 더 불편해지고 당신의 입만 더러워질 뿐입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일상에서 겪었던 장면을, 아주 생활적인 비유를 통해 이야기로 풀어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영가 현각 스님은 같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 내용에 대해 풀어낸 것을 보면, 부처님과는 달리 굉장히 고급진 문장으로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고, 감동을 일으키고, 또 혹할 만큼 아주 멋있는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 번 다시 읽어볼게요.

 

『증도가』에서 표현하는 선사의 언어

 

 

누군가로부터 비난의 소리를 듣게 될 때,

단단히 마음먹고 그냥 물처럼 흘려보내라

 

이 말은 곧, 직접적으로 반응하지 말라 지금 그런 이야기인 거잖아요.


마치 횃불로 하늘을 태우려는 것 같아,

스스로 피곤하고 초라해질 뿐이니.

 

이 “하늘을 태운다.”는 이야기와 연결되는 옛말, 지혜의 말씀이 하나 전해옵니다.
“허공에서 타는 불은 그냥 놔두면 저절로 꺼진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그렇게 나에게 덤벼들 때, 맞대응하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더 차분하게 더 침착하게, 어쩌면 인내와 관용의 마음으로 또는 관심과 연민의 마음으로 지켜보면, 지금 여기 삶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문제들이 흐르는 물이 흘러가듯이 흘러가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얼른 보면 내가 비난받아서 창피할 일 같이 보이지만 그런 일에 휘둘리지 않고, 그런 말에 상처받지 않도록 대응하게 되면, 내 삶은 훨씬 더 격조 있어지고, 나를 비난했던 사람은 오히려 더 초라해지고 남루해진다는 겁니다. 삶이란 게 결국 그런 것이고 지금 이 구절이 전하고 있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다음에 더 적극적으로 두 번째 구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군가로부터 비난의 소리를 듣게 될 때,

기꺼이 감로수 마시듯이 하면

 

우리는 보통 비난을 들으면 바로 짜증을 내게나, 화를 내거나, 미워하거나, 억울해하거나 하게 됩니다. 그런 식으로 반응합니다. 그런데 지금 영가 스님은 그 비난을 기꺼이 감로수 마시듯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감로수란, 음료 중에서 가장 귀하고 최고의 음료를 의미합니다. 즉, 기꺼이 감내한다, 그렇게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부글부글 끓거나, 버럭버럭 화를 내거나, 이런 방식으로 반응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차분하고 침착하게, 때로는 더 의젓하게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꺼이 받아들이면,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다음 구절에서는 더 깊은 의미와 깨달음의 경지가 이어집니다.


바로 시비 분별이 녹아내린다.

 

여기서 말하는 시비분별이란, 그런 상황이 왔을 때 즉각 튀어나올 수 있는 모든 문제거리, 혹은 우리 마음속에서 끓고 있는 분노와 갈등 같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조건이 갖춰지면, 그동안 잠재되어 있던 마음속 문제들이 순식간에 튀어나오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영가 스님이 말씀하신 대로 기꺼이 감로수 마시듯 받아들일 때, 그 모든 시비분별이 녹아내려 즉각 불가사의한 해탈 경계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불가사의한 해탈 경계라는 말은 어쩌면 우리가 마음을 바로 쓰고 삶을 지혜롭고 자비롭게 만들어가면 그 자체가 바로 해탈의 세계고 열반의 세계다. 지금 이런 얘기인 거죠.

근데 부처님 얘기 속에는 이렇게 멋지고 황홀한 내용은 없습니다. 그렇죠. 부처님 얘기 속에는 이렇게 황홀하거나 거창한 내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선사들이 표현한 것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멋있는 문장입니다. 즉, 내용을 단순히 옮긴 것이 아니라, 대단히 멋있게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가사의한 해탈 경계에 들어가네”라는 말은 부처님이 일상속에서 깨달음을 실천하며 사는 삶을 불교적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 삶이 곧 열반의 삶, 해탈의 삶이라는 뜻이 됩니다. 열반은 편안하다는 이야기고 해탈은 자유로움을 의미합니다. 즉, 평화롭고 자유로운 사람, 그 자체가 바로 깨달음으로 살아가는 삶이라는 말입니다.


즉각 불가사의한 해탈 경계에 들어가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을 보면, 우리가 흔히 불교 수행을 떠올릴 때 참선 수행해야 하고, 기도 수행을 해야 하고, 절 수행을 해야 하고, 격식을 갖추어서 특별한 수행을 주로 떠올리잖아요. 그런데 이 내용 속에는 그런 장면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저 누구나 일상에서 겪게 되는 생활상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생활상은 어쩌면 평범한 일상이라고 할 수도 있고, 누구나 살아가는 일상화된 삶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평범한 삶을 어떻게 소화 시키느냐에 따라서 그 삶이 열반의 삶이 되기도 하고 해탈의 삶이 되기도 한다는 겁니다.
지금 그런 얘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삶이 수행이 되는 길

 


실상사에서는 어쨌든 간에 삶이 수행이 되고, 수행이 삶이 되는 불교를 해보자는 이야기를 계속해 오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계속하고 있지만, 그것이 실제 생활 속에서 얼마나 구현되고 있는지, 얼마나 삶의 자리에서 살고 있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이것이 공동체적으로는 과연 어느 정도까지 완성도 있게 가고 있는지 그 점 역시 잘 검토해 보면 스스로 판단이 될 수 있지 않겠나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부처님처럼 깨달음을 삶으로 사는 것, 깨달음으로 삶을 사는 것이 인생의 답이고 희망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깨달음으로 삶을 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부처님은 서른다섯 살에 깨달음을 이루셨고, 여든에 열반에 드셨으니까, 45년 동안을 깨달음으로 삶을 사신 것입니다.
그 45년 동안의 부처님의 일상, 부처님이 어떻게 일상적으로 사셨는가가 기록으로 잘 드러나 있는 대표적인 사례가 우리가 여러 번 이야기해 온 금강경의 첫 장면입니다.

때가 되면 가사를 수하고 발우를 들고 마을에 내려가서 밥을 얻고, 돌아와서 공양을 하고, 공양을 마치면 발우를 정돈하고 자리 잡고 앉아 법문을 하신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식생활에 관한 아주 일상적인 한 장면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그렇게 살고 있잖아요.
다만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공동체적으로 이루어져 있는 식생활을 하고 있고, 부처님은 걸식으로 이루어지는 식생활을 한다는 점에서 똑같지는 않습니다. 똑같지는 않지만, 내용은 대부분 비슷합니다. 지금 실상사만 놓고 보더라도, 제가 극락전에서 살고 있는데, 때가 되면 극락전에서 나와 공양간으로 가서 준비된 밥을 얻어먹고 다시 또 돌아와서 일 보고하는데 대부분 다 그런 장면들이잖아요.
그 장면들이 다 언어로 표현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분은 깨달음을 삶으로 살고있는 분이기 때문에 그 일상에는 이미 우리가 갈망하고 또 갈망하는 깨달음이 그대로 다 들어 있습니다. 그 안에는 당연히 깨달은 자가 누리는 삶인 열반과 해탈의 내용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말로 기록되어 있지 않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 “지금 불가사의한 해탈 경계에 들어가네” 하는 말과 부처님의 일상적인 식생활의 장면을 함께 놓고 봤을 때 느낌이 어떠세요?
부처님의 일상적인 식생활은 지극히 평범하잖아요. 거기에 신비하고 황홀한 의미를 부여해서 불가사의한 해탈이니 신비한 열반이니하고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특별하게 느껴질 뿐이지, 그런 의미 부여를 하는 말을 빼고 보면 평범한 우리의 일상 삶과 다를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영가 스님의 글을 보면 그 평범한 장면을 두고 “불가사의한 해탈 경계에 들어간다” 또는 심심미묘한 열반에 들어간다는 식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어마어마하게 들립니다. 어떠세요? 비슷하게 들리십니까? 아무 반응도 없네요. 모르겠다는 얘긴가요? 어마어마하게 다르죠.
바로 이것이 종교 언어입니다. 우리가 지금 불교라는 종교의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대표적으로 종교 언어의 문제를 짚어보자는 겁니다. 이 종교 언어가 사실 우리를 현혹하는 요소가 너무 많습니다. 명예, 권력, 돈, 사랑 같은 것들을 조심하라고하고 조심 안 하면 큰일 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종교적 의미를 부여한 황홀한 표현들에 대해서는 조심하라고 말합니까? 잘 안 합니다. 오히려 종교 안에서 계속 강조되고, 나아가 분별없이 믿어야 된다고 중요하게 권장되는 말들이 있습니다. “저건 좋은 거야.” “저건 대단한 거야.” 로 넘쳐납니다. “신비한 거야, 거룩한 거야, 불가사의한 거야, 성스러운 거야, 위대한 거야.” 등등 이런 표현들에 대해 “조심하라”고 하는가요? 아니죠. 오히려 그거 열심히 쫓아가라고 이야기하지 조심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이 부분이 굉장히 조심해야 할 대목입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세속적인 차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종교적으로도 대단히 조심해야 할 부분이 너무 많습니다. 따라서 조심해야 된다는 문제 의식이 반영된 것이 들어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말만 갖고는 안 된다.” “언어도단 말로는 안 되는 것이다.” “불립문자” 이런 표현들 모두가 결국은 말에 속지 말라, 말만 쫓아서는 안 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사실은 그 속에 “조심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기도 하고 조심해서 접근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하고 권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혹하게 만드는 내용에 비해서 경계의 메시지들은 쉽게 간과하고 그냥 흘러가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결과가 오늘날 종교계의 폐단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런 부분들을 제대로 짚고 살피지 못한 결과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종교계의 여러 문제로 드러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소를 부리는 이야기, 우리가 근래 나누었던 그 이야기와 연결해서 보면 이렇습니다. 부처님은 어쨌든 몸과 마음이라는 소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그 소를 잘 부리면서 살아가신 분입니다. 그 소를 잘 부려서 나에게도, 너에게도, 우리 모두에게도 유익할 수 있도록 삶을 만들어가신 것입니다. 그렇게 삶을 만들어가신 분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이전에 부처님을 비난하는 사람을 상대했을 때, 온갖 비난을 다 받을 때 부처님은 타고 있는 소를 어떻게 부리셨습니까?
부처님은 먼저 묵묵히 인내와 관용의 태도로 상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습니다. 끝까지 듣고 나서 그다음에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그렇게 하는 것은 당신에게 유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신에게 해가 됩니다.” 이때 부처님은 대부분 비유를 들어서 상대가 스스로 깨우칠 수 있도록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바로 소를 잘 부리는 모습입니다. 몸과 마음이라는 소를 그렇게 부린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떨까요? 첫 번째는 부처님 자신한테 좋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역시 부처님은 다르다” 이렇게 되는 거잖아요. 혹은 ”부처도 별수 없네“ 라는 생각이 들 만큼 인간적인 모습이라 하더라도, 자기 몸과 마음을 잘 다룰 수 있다고 한다면 스스로 편안하고 홀가분한 상태에서 문제를 소화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마 그 얘기를 들은 사람에게도 많은 깨우침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 정신이 번쩍 차려지고, 새로운 삶으로 전환하거나 자기 성장이 이루어지는 경험도 있었을 겁니다. 이런 것이 바로 감화입니다. 즉, 본인이 타고 있는 몸과 마음이라는 소를 시절 인연이 만나는 현장에서 잘 부리고 잘 써서 본인에게도, 상대에게도, 우리에게도 유익하도록 삶을 만들어 가는 것. 이것이 곧 불교 공부와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참선해야 하고, 절해야 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 특별한 장소, 특별한 시간, 특별한 형식을 통해서 수행해야 된다고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기본은 일상을 잘 만들어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일상을 잘 만들어가는 것이 기본이어야 되고 그 기본 위에서, 불가피한 필요에 따라 특별한 시간을 정해서 100일 기도를 하거나, 동안거를 다녀오는 등의 수행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현실이 정반대라는 점입니다. 정반대로 되어 있는 이런 부분들을 우리가 주의 기울여서 불교 공부와 수행 얘기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다음은 현각 스님의 말씀입니다. 증도가 내용에서 보면 현각 스님은 소탄 줄 알고 내 몸과 마음이라는 소를 잘 부리는 내용은 부처님이 보여주는 장면하고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비슷하지만, 차이가 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비난의 소리를 듣게 될 때, 현각스님은 단단히 마음먹고 그냥 물처럼 흘려보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마치 남을 비난하는 사람이 횃불로 하늘을 태우려는 것 같이 스스로 피곤하고 초라해질 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영가 현각 스님의 글은 보면,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기보다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사람들에게 가장 매력적이고 감동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특별한 마음씀과 노력이 들어간 글로 보입니다.
반면, 같은 조사선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현각 스님의 스승인 육조 스님은 법문은 다릅니다. 현각 스님이 대단한 지식인의 글로 표현했다면, 육조 스님은 부처님처럼 자신의 경험을 사실적으로 소박하게 그대로 이야기하는 방식입니다. 육조 스님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글을 몰랐던 분이지만, 법문을 듣고 깨닫고, 깨달은 다음에 자신의 방식으로 설명을 하니까, 문장을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이야기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육조단경이 어록 중에서는 제일 쉬울 거예요. 다만 번역을 할 때, 평범한 언어로 읽힐 수 있도록 하는 게 필요한데 그런 부분들은 여전히 좀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만난 내용들을 보면 제가 오늘 이런 얘기 좀 해볼까 하고 준비한 건 대충 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소 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그 소를 잘 부려서 좋은 삶을 만들어내는 그런 경우를 부처님 경우와 현각 스님의 저술인 『증도가』의 내용과 연결해서 참고가 될 만한 지점들을 함께 짚어보았습니다. 오늘 제가 설명드릴 수 있는 부분은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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