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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법회[2025년 12월] 좌선과 행선을 넘어, 삶에서 드러나는 불교수행

2026-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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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보현법회 녹취록

좌선과 행선을 넘어, 삶에서 드러나는 불교 수행

 

안녕하세요. 여러분, 진짜 안녕하신가요. 저는 요즘 전전긍긍하며 살고 있습니다. 요즘에 안녕하지 못합니다.

 

수행에 대한 몇가지 생각들

 

오늘은 불교 수행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불교 수행이라고 하면, 대체적으로 좌선 수행, 참선 수행이라는 말이 많이 강조됩니다. 좌선 수행, 참선 수행이라는 말로 수행을 표현하는데, 그런 말로 표현될 때 현장에서는 어떻게 실천되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앉아서 하는 수행, 그걸 보통 좌선 수행이라고 합니다. 즉 수행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깊은 산중의 고요한 선방에 들어가서 가부좌 틀고 앉아 수행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그런 이미지로 수행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옛 수행자들이 남긴 기록들을 살펴보면, 수행의 형식이나 수행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에서 좌선 수행이라는 말과 서로 상대 되어지는 수행으로 행선 수행이 있습니다. 다닐 행(行)자 참선할 때 선(禪)자 행선 수행이라고 하는 개념도 중요하게 강조가 되고 있습니다. 또 이것을 반행 반좌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반은 앉고 반은 걷고 이런 말로 표현되기도 하고요.
또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이라는 수행이야기도 있습니다. 하루 일을 안 했으면 하루를 굶어라, 이런 가르침을 생활화해야 된다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이런저런 다양한 수행의 내용들이 전해지고 있는데, 현재 우리가 몸 담고 있는 한국 불교 특히 한국 선불교의 전통 속에서는 좌선 수행이 많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어떤 선방에서는 하루 8시간 앉는 좌선 수행을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10시간 앉는 좌선 수행을 하기도 하며, 또 어떤 때는 12시간 앉는 좌선 수행을 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14시간 앉는 좌선 수행을 하기도 합니다. 그다음에는 장좌불와라고 하는 좌선 수행을 하기도 하는 형태로 강조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물론 장좌불와를 하든, 14시간을 하든, 12시간을 하든, 좌선을 할 경우에 1시간 중 약 10분 정도는 방 안에서 포행, 거닐기도 하고, 또 방 바깥으로 나가 바람을 쐬고 돌아오기도 합니다. 한 10분 정도는 걷기도 하고, 쉬기도 하는 시간이 사이사이에 들어 있습니다. 죽창 앉아 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1시간에 한 10분 정도 사이사이에 이런저런 활동을 하는데 그 시간을 포함하여 우리는 참선 수행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행선 순례와 죽음을 사유하는 수행

 

보통 그렇게들 이야기를 하고 있는 반면에, 행선의 의미는 전해오는 기록이라든가 말씀들 속에는 남아 있지만, 실제 참선 수행이 이뤄지는 도량에서는 그런 것들이 균형있게 적용되거나 사용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개인이 알아서 참고할 수는 있지만, 선 수행이 하나의 문화로서 행선 수행과 함께 가꾸어지고 만들어져 있지는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늘 좌선 수행 문화와 행선 수행 문화가 서로 균형을 이루는 수행 문화로 가꾸어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내가 몸담고 살고 있는 이 산중에서라도 그런 문화가 가꿔지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행선 순례라고 하는 수행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행선 순례 안거라는 이름으로, 산중을 한 바퀴 침묵으로 걸으면서 수행할 수 있도록 그러기 위한 길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 길은 실상사에서 시작해서 뺑 돌아 백장암을 거쳐서 다시 실상사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하루길인데, 줄일 수도 있고 늘릴 수도 있습니다. 빠르게 걸을 수도 있고 느리게 걸을 수도 있는데, 대체로 한 여섯 시간에서 일곱 시간 정도 걸으면 한 바퀴를 돌 수 있는 그런 길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제가 글 하나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 글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에는 우리가 만일 결사하면서 천일마다 주제를 정해 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 천일 주제 가운데, 이번에는 죽음의 문제를 우리가 좀 더 진지하게 다뤄야겠다는 이야기가 있었고, 그 주제 속에 죽음의 문제가 들어 있었습니다.
아마 그런 문제의식들이 작용해서, 죽음에 대한 생각을 불교적 사유 방식으로 풀어내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이 글이 만들어졌습니다. 이전에도 비슷한 작업이 있었습니다. 무엇이 만들어졌습니까. 「생명의 노래」가 만들어졌습니다.

사실은 이런 것들을 내 삶에 적용시켜서 내용을 잘 파악하고 이해하고, 그 이해가 다시 삶에 적용되도록 하는 것도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늙음의 문제라든가, 죽음의 문제라든가, 또 이별의 문제라든가, 이런 것들은 우리를 슬프게 하기도 하고, 괴롭게 하기도 하고, 두렵게 하기도 하는 문제들입니다. 때로는 공포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런 문제들을 원천적으로 없어지도록 만드는 것까지는 쉽지 않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우리가 그것들을 대하는 태도만큼은 달라지게 할 수 있다고 봅니다. 훨씬 더 유연하게, 크게 두려워하지 않고, 좀 더 자연스럽게, 그리고 좀 더 품위 있게 그런 문제들을 삶 속에서 소화해 낼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선사들이 말하듯이 무슨 생사해탈을 했네, 무엇을 이루었네 하는 거창한 경지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더라도, 보통의 상식과 노력으로도 그런 문제들, 그러니까 불안과 공포 같은 문제들로부터 조금 더 가볍게, 조금은 더 편안하게, 좀 더 홀가분하고 자연스럽게 그 문제들을 대할 수는 있다고 봅니다. 너무 거기에 휘말려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되면 우리는 어느 순간, 사람으로서의 품격을 다 잃어버리게 되지 않습니까.
뭔가를 조금 더 격조 있게 정리해 가는 데에 있어서, 사실 「생명의 노래」는 내 삶을 그렇게 만들어가고, 그렇게 정리해 가고, 또 그렇게 마무리해 갈 수 있도록 하는 데 아주 좋은 내용으로 만들어진 글입니다. 「생명의 노래」는 그렇습니다. 그래서 비슷한 문제의식으로 제가 이번에 행선 순례길을 만들기도 하고, 또 직접 행선순례를 해보기도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마천 쪽으로 쭉 내려가다 보면 전라북도에서 마천으로 넘어가기 직전쯤에 하천을 하나 만나게 됩니다. 그 하천에 가면 물에 잠기는 다리, 이른바 잠수교가 있는 길이 있습니다. 아시지요, 잠수교. 그 길을 만들고 행선 순례를 하던 과정에서 그곳에 잠시 쉬게 되었는데, 쉬다 보니 자연스럽게 물이 흘러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물 흐르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이 장면을 참고하면 아까 이야기했던 죽음의 문제, 늙고 병드는 문제, 만나고 헤어지는 문제 같은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데 도움이 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글이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번 이 글을 낭독해 드리고, 그다음 이야기로 넘어가고자 합니다.


<< 해탈교 위에 서서 >>

 

 

친구야 해탈교 위에 서서 람천을 바라보네.

그 시작을 알 수 없는 람천이 어디선가 끊임없이 흘러오고 흘러오네.

오는 곳도 가는 곳도 알 수 없는 람천이 지금 여기를 끊임없이 스쳐가고 스쳐가네.

그 끝을 알 수 없는 람천이 어디론가 끊임없이 흘러가고 흘러가네.

친구야 해탈교 위에 서서 내 일생 삶을 바라보네.

 

그 시작을 알 수 없는 내 일생이 어디에선가 끊임없이 흘러오고 흘러오네.

오는 곳도 가는 곳도 알 수 없는 내 일생이 지금 여기를 끊임없이 스쳐가고 스쳐가네.

그 끝을 알 수 없는 내 일생이 어딘가를 향해 끊임없이 흘러가고 흘러가네.

친구야. 지금 여기 나는 흘러오고 스쳐가고 흘러가는 내 일생 삶을 바라보네.

그대도 무수히 경험해 온 그 삶을 바라보고 있을 터.

망각하고 있을 뿐. 기억하지 못할 뿐.

 

흘러오는 삶도, 스쳐가는 삶도, 흘러가는 삶도 별탈 없었네.

경험을 미루어 볼 때 충분히 흘러오고 스쳐가고 흘러갈 만했을 터.

오늘도 람천을 바라보며 람천처럼 흘러오고 스쳐가고 흘러가려고 하네.

편안한 마음으로 그대와 함께

 

어떤가 친구야.

 

 

이렇게 만들어졌습니다. 뭐 좀 그럴듯하지요. 어떻습니까.
그러니까 이런 내용들을 실제 내 삶과 연결시켜서 사유하고 음미해 본다면, 우리 삶을 훨씬 더 품위 있게 만들어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이 글을 만들었습니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 삶을 좀 더 자연스럽고, 좀 더 유연하고, 의연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고, 나아가 삶을 잘 마감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입니다.
이 글은 그런 마음에서 그냥 함께 나누고 싶어서 공유해 드린 것입니다.
오늘 제가 나누고 싶은 내용은, 제가 최근에 겪기도 했고 앞으로도 겪어야 될 그런 내용들을 ‘수행의 생활화’라는 말과 연결해서 함께 생각해 볼 수 있도록 그런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하는 마음입니다.

 

생사에 대한 불교적 이해

 

조금 전에 제가 만든 글을 읽어드렸는데, 이런 사고방식은 옛 선사들에 의해서도 많이 사용되었고, 또 자주 회자되어 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글이 하나 있어서 제가 메모를 했는데요. 그것도 함께 살펴보면서 조금 설명을 드리는 것이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 글은 한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부터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生從何處來 死向何處去 (생종하처래 사향하처거)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생야일편부운기 사야일편부운멸)

浮雲自體本無實 生死去來亦如然 (부운자체본무실 생사거래역여연)

獨有一物 常獨露湛然 不隨於生死 (독유일물 상독로담연 불수어생사)

 

여기에서는 구름을 비유로 들고 있습니다. 제가 앞에서는 강물을 비유로 들었다면, 여기에서는 구름을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즉흥적으로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생종하처래(生從何處來)’, 태어나는 것은 어디서부터 오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나는 태어났는데, 어디서부터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가, 태어남은 어디에서 비롯되어 이 자리까지 이르게 되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사향하처거(死向何處去)’, 그러면 죽어서는 어디로 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다음 구절로 이어지는 물음입니다.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생야일편부운기 사야일편부운멸)’ 태어나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나는 것 같고, 죽는 것은 뜬구름이 사라지는 것과 같네. 다음 구절, ‘浮雲自體本無實(부운자체본무실)’을 보면, 뜬구름 그 자체에는 내가 붙잡고 매달려야 할 어떤 실체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구름이라는 것은 단지 모양으로만 있을 뿐, 실제로 우리가 붙잡거나 소유할 수 있는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이, 우리의 삶도 본질적으로 실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즉, 뜬구름 자체가 본래 실체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삶 역시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뜻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생사거래역여연(生死去來亦如然) 살고 죽고 가고 오는 것도 또한 마찬가지네.
여기에 욕심부려야 할 어떤 것도 없고, 두려워서 벌벌 떨어야 할 것도 없습니다. 그냥 뜬구름처럼, 인연을 따라왔다가 인연을 따라갈 뿐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런 부분들을 충분히 사유하고 음미해서 내 사고로 만들고, 내 정서로 스며들게 한다면, 우리가 태어나고 죽고, 오고 가는 일들을 좀 더 편안하게, 좀 더 자연스럽게, 좀 더 홀가분하게, 또 좀 더 품위 있게 받아들이고 정리해 가는 데 분명히 도움되지 않겠습니까.
그다음 구절, ‘獨有一物 常獨露湛然不隨於生死(독유일물 상독로담연 불수어생사)’를 보면 뜬구름처럼 실체가 없기 때문에 살고 죽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구절이 말하는 바가 단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비록 삶이 뜬구름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처럼, 살고 죽는 일도 그런 것처럼 보이지만, 그 끝에 덧붙여진 말이 있습니다.
‘獨有一物 常獨露(독유일물 상독로)’.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모두 허망해 보이죠. 그러나 이 허망한 것처럼 보이는 그 자체 안에 한 가지 특별한 것이 있습니다. 허망하게 사라지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늘 변함없이 존재하고, 늘 빛나고 있는 한 물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 구절, ‘湛然不隨於生死(담연 불수어생사)’는 홀로 우뚝한 한물건은 늘상 의연하게 생과 사를 따르지 않는다. 생과 사에 구애받지 않는다 이런 얘기죠. 즉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마치 영원 불멸의 무엇이 존재한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렇죠? 실제로 옛 선사들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내용을 연기법, 즉 연기법으로 이해합니다. 조건생 조건멸. 근데 이 조건생 조건멸의 논리로 보면 이 말은 안 맞아요. ‘영원 불멸의 무엇이 존재한다’라는 말은 연기의 논리와 극단적으로 충돌합니다. 사실 이 문제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충돌하는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부처님께 가서 물어보면 부처님은 어떻게 답할까요? 부처님께 가서 “영원 불멸의 무엇이 존재합니까?”라고 묻는다면, 부처님께서는 아마 이렇게 대답하실 것입니다. “그건 상견(上見)입니다.” 저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상견을 잘못된 사고방식이라고 부정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죽으면 끝입니까? 그냥 허망하게 끝나는 겁입니까?” 하고 묻는다면 부처님은 그것 역시 단견(斷見)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즉, 하나는 영원주의, 다른 하나는 허무주의입니다. 부처님은 영원주의도 단견이고, 허무주의도 단견이라고 보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보면 대부분이 영원주의 아니면 허무주의예요. 대부분 그렇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걸 다 비판하고 부정했습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다음 물음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영원주의도 아니고 허무주의도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질문이 생기는 것이죠.
영원도 아니고, 허무도 아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뭐라고 하셨을까요?
중도, 지금 여기 있는 사실을 사실대로 보면 그 실상이 드러나는데 그것을 굳이 말로 하여 ‘연기’라고 합니다. 즉 연기라는 개념은 허무주의를 넘어선 것이기도 하고, 영원주의를 넘어선 것이기도 합니다. 삶의 형태로 나타날 조건이 만들어지면, 삶이라는 형태로 활동이 전개되고, 죽음의 형태로 나타날 조건이 만들어지면, 죽음이라는 형태로 활동이 전개된다는 뜻입니다. 삶으로 전개될지, 죽음으로 전개될지는 어떤 조건이 만들어지느냐에 따라 좌우됩니다. 즉, 영원히 허무한 것이나, 영원히 영원한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늘은 이 정도 수준에서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얘기가 생각보다 길어졌네요.


진성심심극미묘와 불수자성 수연성


제가 오늘 나누고자 하는 이야기는 법성게의 ‘眞性甚深極微妙(진성심심극미묘), 不守自性隨緣成(불수자성수연성)’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먼저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를 우리말로 풀어보면, 진성(眞性), 즉 참된 성품은 지극히 깊고, 지극히 미묘하다는 의미입니다. 매우 심오하고, 매우 미묘해서, 보통 상식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특별한 수행을 통해서 깨달아야만 알 수 있는 심오하고 신비롭고 불가사의한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하게 되면, 보통 사람들이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하려 해도, 공부한 내용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생활화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됩니다. 즉, “그건 아주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만 가능한 것”처럼 들리게 되지요. 저는 그렇게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 뜻하신 불교는 그렇게 일부 특별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심심미묘(甚深極微妙)’라는 말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그다음 구절인 ‘不守自性隨緣成(불수자성 수연성)’을 보면, 여기서 ‘자성’이라는 말을 우리가 일상 언어로 쉽게 풀어보면, 자기 자신이라고 이해해도 괜찮습니다. 즉, 불수자성 수연성이라는 말은, 자기 입장이나 생각을 고집하지 않고, 주어진 인연을 따라서 그 인연을 잘 완성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제가 풀면 그렇게 풀어야 된다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주어진 인연을 더 바람직한 인연이 되도록 잘 가꿔 내는 것. 주어진 인연을 더 아름다운 인연으로 가꾸어 낸다면, 이루어지겠습니까? 안 이루어지겠습니까? 이루어지죠. 그 주어진 인연을 더 완성도 높게 잘 가꾸었을 경우 완성도 높은 인연으로 가꾸어진다고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자, 불가사의하고 신비로운 일이자, 미묘한 일, 즉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인 것입니다.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진짜 심오함이고 진짜 미묘함이다. 저는 이렇게 해석을 해야 된다고 보는 거예요. 그 진성심심미묘라고 하는 것은 주어진 인연을 더 완성도 높게 가꿔서 완성도 높은 인연이 만들어지도는 것을 진성심심미묘라는 말로 표현했다고 해석되어야 우리가 하는 불교 공부를 생활화하는 것이 가능해지지 않겠냐 하는 얘기입니다.

 

생활 속에서 증명되는 수행


그런 관점에서, 제가 최근 겪은 두 가지 사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가 사부대중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불교 공부도 하고 수행도 한다고 하지만, 정말로 우리가 배우고 실천하는 불교 공부와 수행이 생활 속에서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가, 우리 삶 속에서 생활화되고 있는가를 확인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씀드립니다.
최근, 저희에게 뜻하지 않게 주어진 인연이 있었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인연이 주어진 것이죠. 우리가 원했던 인연이 아니었습니다. 어쨌든 자원봉사를 고리로 해서 인연이 맺어졌던 분이 있었는데, 그분이 뜻하지 않게 실상사 도량 주변, 가까운 지역에서 자기 생을 마감하고 저승길을 선택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는 우리가 원한 인연이 아니었고, 상식적으로 볼 때 좋은 인연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말하자면 궂은 인연, 흉사라고 볼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흉사가 주어지면 누구나 불편하고, 속상하며, 원망의 마음이나 미움의 마음까지 생기게 됩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뜻하지 않은, 궂은 인연이었고 “왜 하필이면 여기서 이런 일이?”라는 불만과 괘씸함까지 떠오를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뜻하지 않은 인연이 주어졌을 때, 우리 식구들이 어떻게 대응했는가 하는 점이 중요합니다. 물론 긴급하게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모든 대중이 함께 모여 논의하고 합의한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긴급히 의견을 모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몇몇이 모여 논의하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결론이 무엇이었냐 하면, 비록 우리가 원하지 않았고, 통상적으로 보면 불편하고 못마땅한 인연으로 주어졌지만, 이미 맺어진 인연이니만큼 이를 소중히 여기고 잘 정리하며, 잘 가꾸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 원래 계획되어 있었던 중대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시민붓다학림 대면 모임, 100일 기도 회향, 입재 등, 이런 일들이 다 오랫동안 계획하고 홍보해서 외지에서도 많은 분들이 오기로 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든 계획을 다 중단하고 뜻하지 않은 인연이긴 하지만 이 인연을 좋은 인연으로 갖고 가도록 결정했습니다.
몇 사람이 긴급히 모여 내린 결정이었지만, 전체 대중이 흔연히 공감하며 수용했고, 결국 계획했던 모든 일은 중단되고, 그 인연을 아름답게 정리하는 쪽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보면서, 우리 스스로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굉장히 성장해 왔다는 것을 느낍니다. “내가 불교 공부하고 수행한다고 하고 있는데 뭐가 뭔지 모르겠어.” 라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번 상황을 보면, 그 공부와 수행이 어느 정도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 과정에서 내부적으로 갈등하거나 혼란을 겪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서로에게 고마워하고, 서로의 마음을 인정하며, 함께 잘 정리한 것에 대해 서로 격려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이런 점이 안팎에서 공감으로 이어졌던 것 같습니다.
제가 볼 적에, 바로 이런 일들이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 불수자성 수연성(不守自性 隨緣成)**의 내용을 실제 생활 속에 구현한 하나의 사례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나에게도 좋고, 너에게도 좋고, 우리 모두에게도 좋은 인연으로 정리가 된 셈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내가 공부를 제대로 했냐 안 했냐 수행을 제대로 하냐 안 하냐” 이런 부분에 대해서 많은 회의도 들고, 그 과정에서 실망이나 아쉬움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뜻하지 않게 주어진 인연 속에서 우리는 불교를 공부하고, 함께 수행하면서 알게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젖어 들었습니다. 제가 예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콩나물 시루에 물을 주듯이, 수행이라는 것은 알게 모르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 불수자성 수연성(不守自性 隨緣成)

부처님 가르침의 내용이 우리 삶 속에서 조금씩 스며들고, 사고가 되고, 언어가 되고,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한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이번 경험은 개인에게도 유익했고, 전체적으로도 모두에게 유익한 인연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실제 상황과 연결시켜 보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공부와 수행은 결코 허무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모르고 있을 뿐이며. 우리가 그동안 제대로 해석해내고, 제대로 설명해내고, 제대로 정리하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이지 우리가 하고 있는 이 상식적인 공부와 수행이라고 하는 게 그렇게 터무니없거나 허망하거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고 있는 이 공부와 수행에 대한 자기 확신을 갖고 자부심을 가져도 충분히 좋다. 그래서 자부심을 갖자는 의미에서 박수 한 번 크게 칩시다.

또 한 가지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이번에는 금산사 조실 스님이 돌아가셨어요. 다 아시죠? 예. 저 저번 때 돌아가신 조실 스님은 이번에 돌아가신 스님의 은사스님이셨습니다. 즉, 우리 집안에 맏형이신데, 은사 스님은 지난번에 돌아가셨고 그다음에 대표하는 인물이 맏형이신데 이번에 또 돌아가셨어요.
그렇게 되니까,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가 집안의 가장 높은 위치에 서게 되었어요. 집안의 가장 어른처럼 돼버린 거예요. 저는 어른노릇 하고 산다는 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거든요. 그냥 친구처럼 함께 어울리면서 살아왔는데, 상황이 이렇게 갑자기 닥친 겁니다. 사실 참 막막하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도 들었습니다. 이 문제는 금산사에서 발생했지만, 실상사와도 밀접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는 일이에요. 즉, 실상사에서도 예상치 못한 인연이 주어진 거죠. 나에게만 주어진 게 아니고. 모두에게 예상치 못한 인연이었고, 현실적으로 부담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바깥에서 제기되는 주장과 우리 안에서의 논의가 충돌하고 있어요. 바깥과 안에서 요구되는 것이 서로 달라서, 이것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이 필요했습니다. 이 상황도 결국 불수자성 수연성의 논리로 풀어내야 되는 과제입니다.
즉, 너에게도 좋고, 나에게도 좋고, 바깥에도 좋고, 안에도 좋을 수 있는 그런 답을 찾아내야 한다는 거죠. 현재 진행 상황으로 보면 그 자체는 가능할 것 같긴 한데 그동안은 길이 안 보였습니다. 결국, 문중이 화합하고, 실상사 산중 대중도 화합하며 실상 산중에서 함께 모색하고 있는 일들도 지속적으로 잘 발전하도록 하려면, 이 충돌되는 문제를 어떻게 조화롭게 풀어갈지가 핵심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전전긍긍하면서 상당히 많이 고민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앞서 우리가 추모의 시간을 가졌던 그 일보다 먼저 생긴 일이에요. 즉, 그 일보다 먼저 생긴 일이지만, 뭔가 길이 잘 안 보이는 겁니다. 안팎이 화합하면서, 또 우리가 모색하는 일들도 지속적으로 잘 갈 수 있도록, 발전적으로 정리가 되어야 하는데, 그 방법이 잘 보이지 않는 거예요. 그냥 보통의 방식으로는 충돌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법성게의 진성심심극미묘, 불수자성 수연성의 논리를 적용해 보자고 했습니다. 자기 입장을 고집하지 않고, 주어진 인연을 모두가 화합하고 함께 잘 갈 수 있도록 마무리 하자는 관점에서, 무모하지만 그 방법과 논리를 사용해본거죠. 방법을 개발하고, 논리를 만들어내어, 바깥에서 요구하는 부분도 존중되면서, 안에서 해왔던 것들도 존중되도록 조정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모두가 화합하고 서로에게 유익하게 하고, 또 모색하는 일들도 지속적으로 잘 갈 수 있도록 하자는데 뜻을 모은 거죠. 그렇다면, 이를 위해서 1차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자기 입장을 고집하는 사고방식에서 한 걸음 벗어나, 좀 더 바깥으로 나와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이유를 자기 입장을 고집함 없이 좁혀보자고 했더니, 현재 한 70% 정도까지는 진척이 됐어요. 아! 이제 뭔가 고리가 딱 맞아떨어지고, 아, 그러면 되겠다고 하는 단계까지 왔습니다.
이런 경험들은 어쨌든 법성게의 사고방식을 실제 생활과 연결하여 생활화 되도록 효과를 본 사례입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상식적인 불교 공부와 수행이 생활화로 이어지도록, 그리고 그 효과가 실제로 나타나고 확인할 수 있도록 해보고 있는 것이죠. 최근 제가 이런저런 모색들을 해왔는데, 그 내용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준비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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