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잘들 지내셨죠? 그동안 바람직한 불교 공부와 수행을 위해 이렇게도 얘기해 보고 저렇게도 얘기해 보면서 지내왔습니다. 어떻게 보면 갈팡질팡 우왕좌왕했다고 할 수도 있고, 또 어떻게 보면 바르고 참된 길을 찾기 위해 골똘히 애써 왔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지나온 시간을 되짚어보면 그런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조사선 전통의 사유 방식’이라는 표현을 써 왔는데, 그 사유 방식으로 부처님 삶을 한번 정리해 보자고 착안하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소 타고 소 부리는’ 대목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가 견지해온 입장은 불교 공부와 수행이란 경전의 내용을 설명하는 데 머물기보다는,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현장 상황에서 생기는 합리적 의심에 답이 될 수 있도록 해야 된다는 뜻에서 이런저런 시도를 해왔습니다. 그런데 ‘소 타고 소 찾는 이야기’, 또 ‘소 타고 소 부리는 이야기’를 부처님 삶과 연결시키고, 나아가 불교 공부와 수행의 문제로 이어서 정리하다 보니, 100% 다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동안 제가 판단하고 선택해 왔던 방향들이 대체로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다행이다 싶은 마음, 그리고 조금은 안도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요즘입니다. 여전히 이런 시도와 이야기들은 미완성의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작업을 그동안 계속해 왔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소 타고 소 부리는’ 불교 공부와 수행의 이야기를 정리해 가다 보니, 이 내용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예로부터 현장 곳곳에서 비슷한 문제의식과 방식으로 이미 많이 펼쳐져 왔다는 사실을 더 분명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은, 같은 맥락에 있으면서도 조금 더 진전된 차원에서 짚어볼 필요가 있는 한 가지 내용을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어느 날 한 수행자가 조실 스님을 찾아가 대화를 청했습니다. 흔한 말로 법문을 청해 들었다는 이야기인데 더 일반화시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 수행자가 묻습니다.
“조실 스님도 수행을 하십니까?”
조실 스님이 답합니다.
“내가 하는 수행과 자네가 하는 수행은 다르네.”
다시 묻습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조실 스님이 말씀합니다.
“내가 하는 수행은 깨닫고 하는 수행이고, 자네가 하는 수행은 수행해서 깨달으려고 하는 수행이네.”
말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다시 묻게 됩니다.
“그럼 무엇이 다릅니까? ”
제가 조실스님의 답을 책의 문장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고, 제 방식대로 풀어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깨닫고 하는 수행은 허물이 생길 위험이 없지만, 수행해서 깨달으려고 하는 수행은 늘 허물이 생길 위험을 안게 되네’ 입니다.
차이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앞에서 ‘소 타고 소 부리는 이야기’를 해왔습니다.
보통 우리는 ‘수행을 깨닫기 위해서 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내용을 조금만 더 짚어보면, 깨달음을 목표로 삼고 달려가는 수행은 자칫하면 소를 타고 있으면서도 다시 소를 찾는 수행이 될 위험이 매우 큽니다.
반면에 깨달음을 실천하는 수행, 곧 깨닫고 하는 수행은 ‘소 탄줄 알고 소를 부리는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소를 타고 계속 소를 찾아다니는 수행’과 ‘소를 잘 부려서 내가 원하는 좋은 삶을 마음껏 창조해 가는 수행’이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보면, 수행자와 조실 스님이 나눈 대화의 내용이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결국 이런 대화들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 의도는 분명합니다. 본인 자신이 이미 소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사실대로 알고, 그 소를 잘 부리는 삶을 사는 것, 즉 깨닮음을 삶으로 사는 것이이야 말로 인생에 답이 되고 희망이 되는 길임을 사람들에게 분명히 일러주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은 소를 타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모르고 죽어라하고 소를 찾아 다니는 수행, 곧 이미 본래부처인데 그 사실을 모르고 지금 여지 자신밖 어딘가에 불가사의한 무엇이 있는 것이라는 무지와 착각에 빠져 찾아다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흐름을 바로잡기 위한 방편이 바로 조실스님과 수행자의 대화들입니다. 이 점은 반야심경에 나오는 “구부득고(求不得苦)”라는 표현과도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찾고자 혹은 얻고자 하는 신비한 무엇은 무지와 착각으로 만들어낸 거북이털 토끼뿔처럼 생각과 말로만 있고 실제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얻으려고 해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끝내 얻지 못하기 때문에 괴롭다는 뜻이지요. 반면 소를 탄 줄을 알고 소를 부리는 삶을 살 때는, 지금 여기 이 자리가 이미 최고요, 전부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또 다른 무엇을 구하려고 하는 생각이 작동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해서 깨달으려고 하는 수행은 다릅니다. 언제나 수행을 통해 더 좋은 무엇인가를 얻어야 비로서 완성된다고 여기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하는 더 좋은 것, 더 높은 것, 다른 어떤 상태를 구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게 됩니다. 수행해서 깨달아야 한다든지, 수행해서 부처가 되어야 한다든지 하는 조건이 붙게 됩니다. 이 소를 부리는 것하고 소를 찾는 것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입니다.
소탄 줄 알고 소를 부리는 수행의 자리엔 그것이 전부입니다. 더 이상은 없고, 그것이 최고이며 전부라는 사실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것 말고 다른 것을 더 구하려고 하는 마음이 따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수행해서 깨닫겠다고 하는 수행으로 접근하게 되면, 수행해서 부처 되겠다는 조건이 붙습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의 수행은 불완전한 것이 되고, 더 완성된 어떤 상태를 따로 구하려고 하는 마음이 남게 됩니다. 조실 스님이 말한 허물이 있다는 이야기는 바로 이런 차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이야기를 꺼내면서, 아까 말씀드렸던 내용과 다시 연결해 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사실은 긴가민가하하는 마음이 들면서도 현실의 자리에서 볼 때, “아, 그렇게 하는 것이 타당하겠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네”, “그렇게 하는 것이 유익하겠네”하고 스스로 납득이 되도록 계속 무언가를 시도해 왔습니다. 그동안 제가 해온 이야기들이 경전적 근거로 보자면 충분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저는 우선 현실의 자리에서 적재적소에 맞게 적용이 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렇게 적용했을 때 실제 삶에 도움이 되는가 하는 점을 더 중요하게 보아 왔습니다. 그래서 경전적 근거가 다소 약하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삶의 현장에서 유익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풀어오곤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조사선 사유 방식으로 이런저런 내용들을 다시 정리해 보면서 확인하게 된 것은, 비록 경전적 근거는 좀 부족했을지라도 현실에서 적재적소에 맞게 적용되어 좋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구성해온 이야기들이 여래의 본래 취지에 크게 어긋나지 않고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근본의 뜻과 어긋나지 않으면서 나름대로 잘 맞아떨어지도록 진행되어 왔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최근에 제 나름대로 정리한 내용을 함께 나누는 것 정도로 말씀을 드리고, 이후에는 여러분과 조금 더 활발하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할까 싶습니다.
혹시라도 잊어버릴 수도 있는 일이니까, 기억을 다시 한 번 상기하는 뜻에서 ‘소 타고 있는 이야기’를 간단히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소를 타고 있습니다. 각자 자기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소를 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로, 이 소라고 하는 것은 삶을 만들어 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최고의 보배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소를 탔으면 소를 탄 줄 알아서 그 소를 잘 부리면 되는데, 우리는 소를 타고 있으면서도 소를 탄 줄을 모른 채 살아갑니다. 그래서 삶에 자기도 모르게 필요한 소를 밖에서 다시 찾아 여기저기 쫓아다니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소를 찾아다니는 일이 아니라, 내가 이미 소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사실대로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찾아다니는 쪽으로만 가고, 정작 아는 쪽은 놓친 채 살아갑니다. 중도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짚어보면 길이 복잡하고 어려워 보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바로 정리됩니다. 그렇다면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소를 탄 줄 알고 소를 잘 부리며 살고 있는 스승이나 도반에게 잘 묻고 배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바깥으로만 향해 있던 시선을 거두어서 자기 자신을 관찰 사유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들여다보면 “아, 내가 소를 타고 있구나” 하는 사실을 바로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찾아다닌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고, 이미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 사실을 아는 순간, 거기 바로 답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기본 내용이 이런 것이니까, 이것을 참고해서 이야기를 이어가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결국 결과적으로 보면, 내가 타고 있는 몸과 마음이라는 소를어떻게 잘 부리느냐의 문제입니다. 몸과 마음이라고 표현되는 이 소를 잘 부리면 그 결과로 좋은 삶의 내용이 만들어진다는 뜻입니다. 이 사고방식의 표현 양식은 다양합니다. 예를 들어 화엄경에도 이런 내용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그것을 한마디로 표현해 온 말이 화엄경에는 ‘선용기심(善用其心)’이라는 말로 나타나 있습니다. 착할 선(善), 쓸 용(用), 그 기(其), 마음 심(心), 곧 “그 마음을 잘 쓴다”는 뜻입니다. 우리말로 풀면 몸과 마음을 잘 쓴다는 말이고, 앞에서 이야기한 ‘소를 잘 부린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뜻은 같습니다. 몸과 마음을 잘 활용한다는 의미입니다. 화엄경을 보면 장황한 설명이 많습니다만, 그 핵심 메시지를 압축해 보면 의외로 단순합니다. “내가 부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복잡한 이론을 제시하기보다 즉답의 형식으로 “그 몸과 마음을 잘 쓰면 된다”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 한마디를 선용기심이라고 표현해 놓은 것입니다. 실제 삶에 적용해 보아도 그렇지 않습니까. 내 몸과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삶의 내용이 달라집니다. 결국 삶의 방향과 결과는 밖의 조건 이전에, 내가 이 몸과 마음을 어떤 태도로 쓰고 있느냐에 따라 좌우됩니다. 그러니 이것이 무슨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일상적인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매일 겪고 있고, 조금만 돌아보면 바로 경험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을 다른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참고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질문 1.)
개인의 실존적 고뇌에서 출발한 깨달음이 어떻게 모든 존재에 대한 자비로 확장되는지, 그리고 그런 큰 자비심이 지금 제 안에 없다고 느껴질 때 저는 수행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요?
그것이 무슨 한순간에 딱 이루어지는 일은 아닙니다. 부처님을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부처님이 태어나서 출가할 때까지가 29년이라는 세월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을 천재적인 인물로 생각합니다. 천재성을 지닌 분이었고, 동시에 비록 약소국이었다고는 하지만 왕자의 신분이었습니다. 그러니 보통 사람과는 여러 조건에서 다른 위치에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분의 고민이 하루아침에 정리되었겠습니까. 29년이라는 시간 동안 본인 나름대로 답을 찾고자 여러 모색을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면서 출가로 귀결이 되었을 것입니다. 저는 그 대목을 제 경험하고 연결해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저는 어머니의 임종 소식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삶이 참 허무하다는 감정이 강렬하게 가슴에 꽂혔고, 그 이후로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고민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고민하다 보니, 이 문제의식은 나만 있는 게 아니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는 문제의식이라고 하는 걸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싯다르타 역시 그런 과정을 거쳤으리라고 봅니다. 최근 “테스형, 인생이 세상이 왜 이래”하는 노래가 가사가 있듯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구나, 이런 질문을 하게 되고 또 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구나. 이런 것들을 나는 그 과정 안에서 그렇게 좁혀지고 정리가 되다보니까 부처님의 삶이 비로소 이해되고 공감이 되는 거예요. 아, 부처님이 그러셨던 것과 내가 이렇게 정리되어 가는 과정이 전혀 다른 특별한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구나. 어쩌면 누구도 예외 없이 겪을 수밖에 없는 문제의식의 전개이겠구나 하는 자리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제 경우를 말씀드리면, 저는 석가모니 부처님은 저보다 훨씬 더 깊고 치열하게 그런 문제를 붙들고 계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어느 한순간에 ‘팍’ 하고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라, 골똘하게 문제의식을 품고 답을 찾기 위해 탐구하고 관찰하고 사유해 가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렇게 나아가다 보면 결국 개인의 문제와 사회의 문제가 분리된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는 지점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로 통합되어 이해되었기 때문에 출가를 결심하고 길을 떠나게 되었다고 저는 보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부처님 생애를 다룬 여러 경전 가운데서 제가 가장 많이 보았던 경전이 『불본행집경』입니다. 『불본행집경』은 도솔천에서 내려오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끝까지 보면, 부처님께서 자기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무엇을 하셨다는 이야기는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태어나시는 순간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중생을 위해서 행하신 것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당시 대승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했던 분들 또한 이 부처님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두고 얼마나 많은 탐구와 모색을 했겠습니까. 그런데 부처님 생애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고 있는 정신이 무엇이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는 그것이 결국 뭇생명들의 안락과 행복이 실현되는 길을 열고자 했던 원력과 실천이라고 봅니다.
그다음에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뭇생명들을 향한 대자비심으로 출가하고 수행했다는 그 대목을 두고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저것은 특별한 부처님에게나 가능한 일이지, 나 같은 범속한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가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내 고민 하나도 제대로 감당 못해서 쩔쩔매고 있는데, 무슨 중생을 위해서 출가하고 수행한다는 말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하는 문제의식인 거잖아요. 그렇죠. 지금 질문한 내용이. 아니, 이것도 너무나 당연한 겁니다. 그렇게 느끼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 당연한데 그 문제의식을 거기에서 멈추지 말고 더 골몰해서, 밀고 나가보면, 결국은 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뭇 생명의 안락과 행복을 위해 마음을 내고 그렇게 마음을 쓰며 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것은 교리적으로 보아도 그렇습니다. 요즘 우리가 흔히 하는 이야기와 연결해서 한 말씀 드려보면, 요즘에는 자존감, 자기 사랑이라는 말을 참 많이 합니다. 자기를 사랑해야 한다, 자존감을 길러야 한다, 결국은 다 자기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했을 때 과연 그것이 진짜 답이 되고 희망이 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습니다. 실제로 그런 현상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이 답이 되고 희망이 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이런 문제와 관련해서 경전 속 사례 하나를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왕과 왕비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왕이 왕비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구인가?” 왕비가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더니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나 자신인 것 같습니다.” 그러자 왕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합니다. “나도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소.” 그렇게 서로 공감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제대로 된 판단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을 찾아가 한 번 여쭤봅시다.” 하고는 부처님을 찾아갑니다. 전후 사정을 다 말씀드리고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도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여기까지는 왕과 왕비의 생각을 그대로 인정해 주신 셈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이야기가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나를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말로 나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로 이어지게 됩니다. “나를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바로 그 질문으로 이야기가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대목에서 어떻게 설명이 되느냐 하면, 사실은 해석에는 제 생각이 많이 들어가 있어서 표현이 조심스럽습니다. 정확한 문구가 지금 또렷이 기억나는 것은 아닙니다만, 결론적으로 자기를 사랑하려고 할 때, 나를 챙긴다고 해서 바로 나를 사랑하게 되는 것일까. 아니네. 오히려 반대로, 너를 사랑했을 때 비로소 나를 사랑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의미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핵심은 인간은 행위 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존재라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실제로 내가 누구에게 잘하면, 그 결과 나는 ‘누구에겐가 잘하는 사람’이 됩니다. 누구에겐가 잘하는 사람은 괜찮은 사람일까요, 안 괜찮은 사람일까요? 당연히 괜찮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이 괜찮은 인간이 되도록 행위를 하는 것이 진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반면, 내가 스스로를 형편없는 인간이 되도록 만드는 행동을 한다면, 그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만약 나를 챙기는 방식으로만 문제를 다루게 되면, 결과적으로 ‘나밖에 모르는 인간’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기 때문에 나를 사랑한다고 할 수가 없죠. 오히려 너를 사랑할 때 내가 괜찮은 인간이 되기 때문에 내 행위에 의해서 내가 괜찮은 인간이 되도록 행위가 되어야 나를 사랑한다는 이야기가 성립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볼 때, 내가 형편없는 인간이 되도록 행동한다면, 그것은 나를 사랑하는 일이 될 수가 없습니다. 즉, 나를 중심에 놓고 답을 만들어 가게 되면, 결과적으로 나밖에 모르는 형태로 빠져들 위험성이 대단히 높아집니다. 이러한 결과는 연기적 사유 방식을 적용해 보더라도, 결국 그렇게 결론이 정리됩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조금 더 깊이 천착해서, 차근차근 정리해 가면 되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생명 평화 탁발 순례를 할 때에도, 그런 사고방식을 근거로 해서 ‘세상에 평화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평화가 되자’라는 슬로건으로 탁발 순례를 했던 걸로 기억이 됩니다. 그러니까 세상에 대한 관심과 나 자신에 대한 관심이 분리되어서 따로따로 다뤄야 할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실제로 다뤄 보면, 그것은 결코 따로따로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질문 2.)
직장이나 사회생활에서 누군가의 명백한 잘못과 갈등 상황을 마주할 때, 상대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이 곧 나를 사랑하는 길이라고 하셨는데, 실제 삶 속에서 남을 진짜로 사랑하는 태도는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나를 사랑하는 일이 되는지 궁금합니다.
남에게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사실 너무나 상식적인 얘기입니다. 예를 들면 상대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는 것, 존중하는 것, 배려하는 것, 이런 것이 다 상대에게 잘하는 거잖아요. 상대를 사랑한다고 해도 자연스러운 이야기입니다. 또 상대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 상대가 화를 내든 내지 않든 관계없이 마주하는 것 등도 모두 포함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부지기수로 예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간디 같은 경우는 조금 더 깊이 들어갑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열 번 속았어도 나는 신뢰로 만나야 한다.” 즉, 사람에게 열 번 속았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신뢰로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간디의 이런 태도가 당시 세계적인 양심과 지성들로부터 지지를 받게 한 힘이었던 겁니다. 간디가 독립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만약 세계적 양심과 지성들로부터 지지를 못 받았으면 그 독립운동을 그렇게 끌고 가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관점과 태도 때문에 간디는 세계적인 양심과 지성들로부터 공감과 지지, 협력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결국 상대에게 잘한다는 것도, 사사건건 다 설명할 수 있겠지만 그중, 몇 가지를 범주화하면 간단해집니다. 예를 들어, 우리 ‘붓다로 살자’ 발원문 내용도 결국 같은 맥락이 아닙니까? ‘고귀하게 맞이한다’라는 표현이 있잖아요. 첫 구절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과 자연을 고귀하게 맞이하고 만난다는 것이지요. 즉, 사람과 자연을 고귀한 존재로 인정하고 존중하며, 필요하면 배려하고 돕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행동의 혜택은 1차적으로 누구에게 돌아갈까요? 제일 먼저 본인한테 돌아갑니다. 내가 누군가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배려하고, 서로 돕고 나누는 행위를 하면, 그것 자체가 훌륭한 일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상대에게도 좋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세 번째는, 우리 모두에게 괜찮지 않습니까? 결국 행위는 하나인데, 그 행위가 나에게도, 너에게도, 우리 모두에게도 좋게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거죠. 이런 사유 방식으로 부처님을 해석하고 불교를 이해했던 것이 대승불교입니다. 사실 내용을 들여다보면. 대승불교는 정말 놀라운 내용입니다. 초기 불교나 남방불교와 비교해 보면, 그 깊이와 범위가 확연히 다릅니다. 바로 그 점이 대승불교의 놀라움입니다. 그러니까, 어쩌면 그 메시지를 보면, 개인의 실존적 문제나 자기 자신에게 부닥치는 문제들도, 비록 개인에게 직접적으로 부닥쳤다 하더라도, 그 문제는 결국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혼자 만들어지는 문제가 아니지요. 모든 문제는 누구와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풀어내고 답이 되도록 하려 할 때, 대승불교는 주로 자비심을 강조합니다. 그런 자비로운 태도로 문제를 다루면, 개인의 문제도 바람직하게 풀려나갑니다. 개인의 문제 역시 세상 이치 속에서 그렇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세상 이치를 우리는 연기라고 표현하는 것이지요. 이 정도로 설명하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질문 3.) 금강경에서 부처님이 수백 생 동안 신체를 훼손당하면서도 가해자에게 분노 대신 자비를 냈다는 구절을 회주 스님은 어떻게 해석하시는지요?
아마 핵심 메시지는 ‘화내지 않았다’는 점일 겁니다. 왜 그랬느냐 하면, 그 이유는 바로 무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즉, 자기라는 실체가 고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화낼 근거가 없다는 말입니다. 다만 너무 극단적인 사례를 들면서 설명하는 것은 나는 지혜로운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만약 분노로 반응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분노로 반응했다면, 그 순간의 나는 ‘분노하는 사람’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증오로 반응하면 그 사람은 증오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반대로 인욕과 자비로 반응하면 인욕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인간은 행위하는 대로 만들어진다는 점입니다. 괜찮은 인간이 되려면, 괜찮은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대승불교에서는 이러한 사고를 자리이타라고 표현합니다. 이런 사유 방식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다루면, 그 결과는 나에게도 괜찮고, 너에게도 괜찮으며, 우리 모두에게도 좋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반대로, 나만 챙기는 방식으로 문제를 다루면, 결과적으로 나에게도, 상대에게도, 또 다른 누구에게도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로 귀결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수행 이야기가 나왔으니,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행 이미지와 실제 부처님이 뜻한 수행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답은 다를 것입니다. 말은 같지만, 내용적으로는 상당히 다릅니다. 사실 이런 차이는 대화와 토론을 통해 잘 정리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수행’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밥 먹는 것이 떠오르나요, 아니면 대화하는 것이 떠오르나요? 제가 다른 질문을 하나 해보겠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오해가 생길 수도 있는 일이긴 한데, 그렇다 하더라도 단순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취지에서 누구를 비난하거나 그런 생각이 있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단순하게, 제 방식으로 한번 문제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한 사람은 깊고 맑고 고요한 곳에 좋은 도량을 잘 만들어 놓고, 가부좌를 틀고 용맹정진을 잘합니다. 수행하면 흔히 그런 모습이 떠오르죠. 부처님도 6년 고행을 하셨지만, 실제로는 “6년 고행 그거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부처님을 본 받아야 한다면서, 마치 6년 고행을 해야 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부처님은 분명히 “그거 하지 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용맹정진은 잘합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수행’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그런 면에서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평화롭게 말하는 것은 못해요. 반대로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용맹정진 같은 것은 잘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지만, 평화로운 대화를 잘합니다. 자, 이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수행을 갖고 한번 얘기를 해본다면, 누가 수행을 잘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수행’이라고 하면, 평화롭게 대화를 잘 나누는 것과 연결되나요? 솔직히 말하면 안 됩니다. 머릿속에 그려진 수행의 이미지와 잘 맞지 않죠. 하지만 사실을 보면, 부처님이란 어떤 분이십니까? 팔정도를 생활 속에서 실천한 분을 부처님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팔정도를 생활화한 사람을 부처라고 부르고, 석가모니 부처님도 바로 그런 분이셨어요. 그 팔정도 안에는 여러 항목이 있는데, 그중 언어를 다루는 부분이 있습니다. 평화롭게 대화한다는 것은 바로 팔정도의 정어正語에 포함되는 덕목이죠. 우리는 평화로운 말과 바른 언어 사용을 수행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어요. 기성 불교인에게 물어보면, 이런 것을 수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이 지금 문제인 거예요. 그래서 흔히 수행하면 ‘3천 배, 용맹정진, 100일 기도’ 이런 것만 떠올리고, 그것만 강조하게 되죠. 물론 필요하면 그런 수행을 할 수도 있어요. 그걸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중요한 것은, 일상을 바람직하게 만들어내는 것이 수행이라고 정의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일상을 기본으로 하지 않고 수행 얘기를 하게 되면, 결국은 수행은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곡된다는 것은 실제 삶과 무관한 수행을 한게 된다는 뜻입니다. 삶과 연결되지 않는 수행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무리 장좌불와를 한다 하더라도, 평화롭게 대화할 줄 모르는 사람이 우리 대중에 들어왔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떨까요? 대중의 평화로운 삶이 가능하겠습니까? 평화는 깨지게 됩니다. 일상적인 평화를 깨뜨리는 일을 수행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당연히 그것은 불합리합니다. 그래서 우리 머릿속에 ‘수행’이라는 말로 이미지화해 놓은 내용은, 사실상 삶과 수행을 일치시키지 못하도록 되어 있어요. 수행과 삶이 따로 노는 구조인 것이죠. 수행 따로 하고, 삶 따로 있는 상태가 되는 겁니다. 이런 것들은 일치할 수가 없습니다. 그 수행과 삶이 일치하려면, 먼저 우리 머릿속에 그려져 있는 수행에 대한 선입견부터 걷어내야 합니다. 그걸 붙잡고 있는 한, 수행과 삶은 늘 따로 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행을 따로 하고, 삶을 따로 사는 상태에 머물게 되는 거죠. 현재 우리 머릿속에서는 탐진치가 문제라고 여기고, 여러 편견과 함께 불교 자체가 잘못된 이미지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잘못된 이미지를 들여다보고 걷어내야만, 수행과 삶이 제대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이걸 걷어내야 수행과 삶이 일치되어지는 불교 공부와 수행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수행과 삶이 일치되려면 수행에 대한 선입견, 수행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 이런 것들을 정리해 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씀인 거죠. 어쨌든 우리는 삶과 수행이 하나가 되는 불교를 실천하자고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여기는 일반적인 불교인들이 말하는 ‘수행’으로는 우리가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실상사에서는 장좌불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용맹정진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삼천 배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또 뭐가 있을까요? 천일기도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하여튼 일반적으로 ‘수행’이라고 얘기될 수 있는 그런 내용들을 우리가 자신 있게 자랑거리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실상사에는 없습니다. 그 이미지로 보면 실상사는 빵점입니다. 그렇다면 실상사는 수행을 안하고 있는 걸까요? 어떻습니까? 여기 실상사 인연이 있는 분들이니까, 한번 얘기를 나눠보면 좋겠습니다. 실상사는 수행을 안 하는 곳인가, 한다고 한다면 어떤 수행들을 하고 있는가, 그 얘기를 나눠보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좀 자신 있게 “나는 이렇게 수행하고 있다”라고 서로 얘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우리가 10시부터 같이 보현법회를 하고 있습니다. 10시부터 2시간 정도 진행되는데, 하나는 기도를 했고 하나는 지금 우리가 법회를 하는 거잖아요. 법담을 나누는 거죠. 이건 수행일까요? 아닐까요? 우리는 평화롭게 법담을 나눴어요. 그런데 왜 이건 수행으로 평가하면 안 되죠? 이걸 수행이라고 본다면 우리는 뭐가 되겠습니까? 사실 이건 일상생활의 한 장면입니다. 수행과 일상생활이 분리될 이유가 없습니다. 저절로 일치가 되는 거죠. 일상이 곧 수행이고 수행이 곧 일상입니다. 이렇게 접근하지 않고, 우리 머릿속에 전제되어 있는 수행이라는 상을 갖고 접근하는 한, 우리의 일상적 삶과 수행은 일치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분리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좀 자신 있게 얘기를 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26년 1월 보현법회
“소탄 줄 알고 그 소를 부리며 사는 수행: 일상의 삶과 수행의 일치”
안녕하세요. 잘들 지내셨죠?
그동안 바람직한 불교 공부와 수행을 위해 이렇게도 얘기해 보고 저렇게도 얘기해 보면서 지내왔습니다. 어떻게 보면 갈팡질팡 우왕좌왕했다고 할 수도 있고, 또 어떻게 보면 바르고 참된 길을 찾기 위해 골똘히 애써 왔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지나온 시간을 되짚어보면 그런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조사선 전통의 사유 방식’이라는 표현을 써 왔는데, 그 사유 방식으로 부처님 삶을 한번 정리해 보자고 착안하게 되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소 타고 소 부리는’ 대목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가 견지해온 입장은 불교 공부와 수행이란 경전의 내용을 설명하는 데 머물기보다는,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현장 상황에서 생기는 합리적 의심에 답이 될 수 있도록 해야 된다는 뜻에서 이런저런 시도를 해왔습니다.
그런데 ‘소 타고 소 찾는 이야기’, 또 ‘소 타고 소 부리는 이야기’를 부처님 삶과 연결시키고, 나아가 불교 공부와 수행의 문제로 이어서 정리하다 보니, 100% 다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동안 제가 판단하고 선택해 왔던 방향들이 대체로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다행이다 싶은 마음, 그리고 조금은 안도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요즘입니다.
여전히 이런 시도와 이야기들은 미완성의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작업을 그동안 계속해 왔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소 타고 소 부리는’ 불교 공부와 수행의 이야기를 정리해 가다 보니, 이 내용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예로부터 현장 곳곳에서 비슷한 문제의식과 방식으로 이미 많이 펼쳐져 왔다는 사실을 더 분명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은, 같은 맥락에 있으면서도 조금 더 진전된 차원에서 짚어볼 필요가 있는 한 가지 내용을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어느 날 한 수행자가 조실 스님을 찾아가 대화를 청했습니다. 흔한 말로 법문을 청해 들었다는 이야기인데 더 일반화시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 수행자가 묻습니다.
“조실 스님도 수행을 하십니까?”
조실 스님이 답합니다.
“내가 하는 수행과 자네가 하는 수행은 다르네.”
다시 묻습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조실 스님이 말씀합니다.
“내가 하는 수행은 깨닫고 하는 수행이고, 자네가 하는 수행은 수행해서 깨달으려고 하는 수행이네.”
말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다시 묻게 됩니다.
“그럼 무엇이 다릅니까? ”
제가 조실스님의 답을 책의 문장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고, 제 방식대로 풀어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깨닫고 하는 수행은 허물이 생길 위험이 없지만, 수행해서 깨달으려고 하는 수행은 늘 허물이 생길 위험을 안게 되네’ 입니다.
차이가 무엇일까요?
우리가 앞에서 ‘소 타고 소 부리는 이야기’를 해왔습니다.
보통 우리는 ‘수행을 깨닫기 위해서 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내용을 조금만 더 짚어보면, 깨달음을 목표로 삼고 달려가는 수행은 자칫하면 소를 타고 있으면서도 다시 소를 찾는 수행이 될 위험이 매우 큽니다.
반면에 깨달음을 실천하는 수행, 곧 깨닫고 하는 수행은 ‘소 탄줄 알고 소를 부리는 수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소를 타고 계속 소를 찾아다니는 수행’과 ‘소를 잘 부려서 내가 원하는 좋은 삶을 마음껏 창조해 가는 수행’이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보면, 수행자와 조실 스님이 나눈 대화의 내용이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결국 이런 대화들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 의도는 분명합니다. 본인 자신이 이미 소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사실대로 알고, 그 소를 잘 부리는 삶을 사는 것, 즉 깨닮음을 삶으로 사는 것이이야 말로 인생에 답이 되고 희망이 되는 길임을 사람들에게 분명히 일러주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은 소를 타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모르고 죽어라하고 소를 찾아 다니는 수행, 곧 이미 본래부처인데 그 사실을 모르고 지금 여지 자신밖 어딘가에 불가사의한 무엇이 있는 것이라는 무지와 착각에 빠져 찾아다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흐름을 바로잡기 위한 방편이 바로 조실스님과 수행자의 대화들입니다. 이 점은 반야심경에 나오는 “구부득고(求不得苦)”라는 표현과도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찾고자 혹은 얻고자 하는 신비한 무엇은 무지와 착각으로 만들어낸 거북이털 토끼뿔처럼 생각과 말로만 있고 실제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얻으려고 해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끝내 얻지 못하기 때문에 괴롭다는 뜻이지요. 반면 소를 탄 줄을 알고 소를 부리는 삶을 살 때는, 지금 여기 이 자리가 이미 최고요, 전부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또 다른 무엇을 구하려고 하는 생각이 작동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해서 깨달으려고 하는 수행은 다릅니다. 언제나 수행을 통해 더 좋은 무엇인가를 얻어야 비로서 완성된다고 여기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하는 더 좋은 것, 더 높은 것, 다른 어떤 상태를 구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게 됩니다. 수행해서 깨달아야 한다든지, 수행해서 부처가 되어야 한다든지 하는 조건이 붙게 됩니다. 이 소를 부리는 것하고 소를 찾는 것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입니다.
소탄 줄 알고 소를 부리는 수행의 자리엔 그것이 전부입니다. 더 이상은 없고, 그것이 최고이며 전부라는 사실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것 말고 다른 것을 더 구하려고 하는 마음이 따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수행해서 깨닫겠다고 하는 수행으로 접근하게 되면, 수행해서 부처 되겠다는 조건이 붙습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의 수행은 불완전한 것이 되고, 더 완성된 어떤 상태를 따로 구하려고 하는 마음이 남게 됩니다. 조실 스님이 말한 허물이 있다는 이야기는 바로 이런 차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오늘 이야기를 꺼내면서, 아까 말씀드렸던 내용과 다시 연결해 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사실은 긴가민가하하는 마음이 들면서도 현실의 자리에서 볼 때, “아, 그렇게 하는 것이 타당하겠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네”, “그렇게 하는 것이 유익하겠네”하고 스스로 납득이 되도록 계속 무언가를 시도해 왔습니다.
그동안 제가 해온 이야기들이 경전적 근거로 보자면 충분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저는 우선 현실의 자리에서 적재적소에 맞게 적용이 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렇게 적용했을 때 실제 삶에 도움이 되는가 하는 점을 더 중요하게 보아 왔습니다. 그래서 경전적 근거가 다소 약하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삶의 현장에서 유익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풀어오곤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조사선 사유 방식으로 이런저런 내용들을 다시 정리해 보면서 확인하게 된 것은, 비록 경전적 근거는 좀 부족했을지라도 현실에서 적재적소에 맞게 적용되어 좋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구성해온 이야기들이 여래의 본래 취지에 크게 어긋나지 않고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근본의 뜻과 어긋나지 않으면서 나름대로 잘 맞아떨어지도록 진행되어 왔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최근에 제 나름대로 정리한 내용을 함께 나누는 것 정도로 말씀을 드리고, 이후에는 여러분과 조금 더 활발하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할까 싶습니다.
혹시라도 잊어버릴 수도 있는 일이니까, 기억을 다시 한 번 상기하는 뜻에서 ‘소 타고 있는 이야기’를 간단히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예외 없이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소를 타고 있습니다. 각자 자기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소를 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로, 이 소라고 하는 것은 삶을 만들어 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최고의 보배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소를 탔으면 소를 탄 줄 알아서 그 소를 잘 부리면 되는데, 우리는 소를 타고 있으면서도 소를 탄 줄을 모른 채 살아갑니다. 그래서 삶에 자기도 모르게 필요한 소를 밖에서 다시 찾아 여기저기 쫓아다니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소를 찾아다니는 일이 아니라, 내가 이미 소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사실대로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찾아다니는 쪽으로만 가고, 정작 아는 쪽은 놓친 채 살아갑니다. 중도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짚어보면 길이 복잡하고 어려워 보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바로 정리됩니다. 그렇다면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소를 탄 줄 알고 소를 잘 부리며 살고 있는 스승이나 도반에게 잘 묻고 배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바깥으로만 향해 있던 시선을 거두어서 자기 자신을 관찰 사유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들여다보면 “아, 내가 소를 타고 있구나” 하는 사실을 바로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찾아다닌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고, 이미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 사실을 아는 순간, 거기 바로 답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기본 내용이 이런 것이니까, 이것을 참고해서 이야기를 이어가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결국 결과적으로 보면, 내가 타고 있는 몸과 마음이라는 소를어떻게 잘 부리느냐의 문제입니다. 몸과 마음이라고 표현되는 이 소를 잘 부리면 그 결과로 좋은 삶의 내용이 만들어진다는 뜻입니다. 이 사고방식의 표현 양식은 다양합니다. 예를 들어 화엄경에도 이런 내용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그것을 한마디로 표현해 온 말이 화엄경에는 ‘선용기심(善用其心)’이라는 말로 나타나 있습니다. 착할 선(善), 쓸 용(用), 그 기(其), 마음 심(心), 곧 “그 마음을 잘 쓴다”는 뜻입니다. 우리말로 풀면 몸과 마음을 잘 쓴다는 말이고, 앞에서 이야기한 ‘소를 잘 부린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뜻은 같습니다. 몸과 마음을 잘 활용한다는 의미입니다. 화엄경을 보면 장황한 설명이 많습니다만, 그 핵심 메시지를 압축해 보면 의외로 단순합니다. “내가 부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복잡한 이론을 제시하기보다 즉답의 형식으로 “그 몸과 마음을 잘 쓰면 된다”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 한마디를 선용기심이라고 표현해 놓은 것입니다.
실제 삶에 적용해 보아도 그렇지 않습니까. 내 몸과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삶의 내용이 달라집니다. 결국 삶의 방향과 결과는 밖의 조건 이전에, 내가 이 몸과 마음을 어떤 태도로 쓰고 있느냐에 따라 좌우됩니다. 그러니 이것이 무슨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일상적인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매일 겪고 있고, 조금만 돌아보면 바로 경험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을 다른 표현으로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참고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질문 1.)
개인의 실존적 고뇌에서 출발한 깨달음이 어떻게 모든 존재에 대한 자비로 확장되는지, 그리고 그런 큰 자비심이 지금 제 안에 없다고 느껴질 때 저는 수행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요?
그것이 무슨 한순간에 딱 이루어지는 일은 아닙니다. 부처님을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부처님이 태어나서 출가할 때까지가 29년이라는 세월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을 천재적인 인물로 생각합니다. 천재성을 지닌 분이었고, 동시에 비록 약소국이었다고는 하지만 왕자의 신분이었습니다. 그러니 보통 사람과는 여러 조건에서 다른 위치에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분의 고민이 하루아침에 정리되었겠습니까. 29년이라는 시간 동안 본인 나름대로 답을 찾고자 여러 모색을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면서 출가로 귀결이 되었을 것입니다. 저는 그 대목을 제 경험하고 연결해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저는 어머니의 임종 소식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삶이 참 허무하다는 감정이 강렬하게 가슴에 꽂혔고, 그 이후로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고민을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고민하다 보니, 이 문제의식은 나만 있는 게 아니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밖에 없는 문제의식이라고 하는 걸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싯다르타 역시 그런 과정을 거쳤으리라고 봅니다. 최근 “테스형, 인생이 세상이 왜 이래”하는 노래가 가사가 있듯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구나, 이런 질문을 하게 되고 또 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구나. 이런 것들을 나는 그 과정 안에서 그렇게 좁혀지고 정리가 되다보니까 부처님의 삶이 비로소 이해되고 공감이 되는 거예요.
아, 부처님이 그러셨던 것과 내가 이렇게 정리되어 가는 과정이 전혀 다른 특별한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구나. 어쩌면 누구도 예외 없이 겪을 수밖에 없는 문제의식의 전개이겠구나 하는 자리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제 경우를 말씀드리면, 저는 석가모니 부처님은 저보다 훨씬 더 깊고 치열하게 그런 문제를 붙들고 계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어느 한순간에 ‘팍’ 하고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라, 골똘하게 문제의식을 품고 답을 찾기 위해 탐구하고 관찰하고 사유해 가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그렇게 나아가다 보면 결국 개인의 문제와 사회의 문제가 분리된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는 지점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로 통합되어 이해되었기 때문에 출가를 결심하고 길을 떠나게 되었다고 저는 보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부처님 생애를 다룬 여러 경전 가운데서 제가 가장 많이 보았던 경전이 『불본행집경』입니다. 『불본행집경』은 도솔천에서 내려오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끝까지 보면, 부처님께서 자기 자신의 문제를 가지고 무엇을 하셨다는 이야기는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태어나시는 순간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중생을 위해서 행하신 것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당시 대승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했던 분들 또한 이 부처님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두고 얼마나 많은 탐구와 모색을 했겠습니까. 그런데 부처님 생애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삶을 처음부터 끝까지 관통하고 있는 정신이 무엇이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는 그것이 결국 뭇생명들의 안락과 행복이 실현되는 길을 열고자 했던 원력과 실천이라고 봅니다.
그다음에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뭇생명들을 향한 대자비심으로 출가하고 수행했다는 그 대목을 두고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저것은 특별한 부처님에게나 가능한 일이지, 나 같은 범속한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가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내 고민 하나도 제대로 감당 못해서 쩔쩔매고 있는데, 무슨 중생을 위해서 출가하고 수행한다는 말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하는 문제의식인 거잖아요. 그렇죠. 지금 질문한 내용이.
아니, 이것도 너무나 당연한 겁니다. 그렇게 느끼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 당연한데 그 문제의식을 거기에서 멈추지 말고 더 골몰해서, 밀고 나가보면, 결국은 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뭇 생명의 안락과 행복을 위해 마음을 내고 그렇게 마음을 쓰며 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것은 교리적으로 보아도 그렇습니다. 요즘 우리가 흔히 하는 이야기와 연결해서 한 말씀 드려보면, 요즘에는 자존감, 자기 사랑이라는 말을 참 많이 합니다. 자기를 사랑해야 한다, 자존감을 길러야 한다, 결국은 다 자기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했을 때 과연 그것이 진짜 답이 되고 희망이 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습니다. 실제로 그런 현상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이 답이 되고 희망이 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이런 문제와 관련해서 경전 속 사례 하나를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왕과 왕비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차를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왕이 왕비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구인가?” 왕비가 한참을 곰곰이 생각하더니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나 자신인 것 같습니다.”
그러자 왕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합니다. “나도 생각해 보니 그런 것 같소.” 그렇게 서로 공감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제대로 된 판단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을 찾아가 한 번 여쭤봅시다.” 하고는 부처님을 찾아갑니다. 전후 사정을 다 말씀드리고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도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여기까지는 왕과 왕비의 생각을 그대로 인정해 주신 셈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 이야기가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나를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말로 나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문제로 이어지게 됩니다. “나를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바로 그 질문으로 이야기가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대목에서 어떻게 설명이 되느냐 하면, 사실은 해석에는 제 생각이 많이 들어가 있어서 표현이 조심스럽습니다. 정확한 문구가 지금 또렷이 기억나는 것은 아닙니다만, 결론적으로 자기를 사랑하려고 할 때, 나를 챙긴다고 해서 바로 나를 사랑하게 되는 것일까. 아니네. 오히려 반대로, 너를 사랑했을 때 비로소 나를 사랑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의미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핵심은 인간은 행위 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존재라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실제로 내가 누구에게 잘하면, 그 결과 나는 ‘누구에겐가 잘하는 사람’이 됩니다. 누구에겐가 잘하는 사람은 괜찮은 사람일까요, 안 괜찮은 사람일까요? 당연히 괜찮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이 괜찮은 인간이 되도록 행위를 하는 것이 진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반면, 내가 스스로를 형편없는 인간이 되도록 만드는 행동을 한다면, 그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만약 나를 챙기는 방식으로만 문제를 다루게 되면, 결과적으로 ‘나밖에 모르는 인간’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게 되기 때문에 나를 사랑한다고 할 수가 없죠. 오히려 너를 사랑할 때 내가 괜찮은 인간이 되기 때문에 내 행위에 의해서 내가 괜찮은 인간이 되도록 행위가 되어야 나를 사랑한다는 이야기가 성립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볼 때, 내가 형편없는 인간이 되도록 행동한다면, 그것은 나를 사랑하는 일이 될 수가 없습니다. 즉, 나를 중심에 놓고 답을 만들어 가게 되면, 결과적으로 나밖에 모르는 형태로 빠져들 위험성이 대단히 높아집니다. 이러한 결과는 연기적 사유 방식을 적용해 보더라도, 결국 그렇게 결론이 정리됩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조금 더 깊이 천착해서, 차근차근 정리해 가면 되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생명 평화 탁발 순례를 할 때에도, 그런 사고방식을 근거로 해서 ‘세상에 평화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평화가 되자’라는 슬로건으로 탁발 순례를 했던 걸로 기억이 됩니다. 그러니까 세상에 대한 관심과 나 자신에 대한 관심이 분리되어서 따로따로 다뤄야 할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실제로 다뤄 보면, 그것은 결코 따로따로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질문 2.)
직장이나 사회생활에서 누군가의 명백한 잘못과 갈등 상황을 마주할 때, 상대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것이 곧 나를 사랑하는 길이라고 하셨는데, 실제 삶 속에서 남을 진짜로 사랑하는 태도는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나를 사랑하는 일이 되는지 궁금합니다.
남에게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사실 너무나 상식적인 얘기입니다. 예를 들면 상대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는 것, 존중하는 것, 배려하는 것, 이런 것이 다 상대에게 잘하는 거잖아요. 상대를 사랑한다고 해도 자연스러운 이야기입니다. 또 상대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 상대가 화를 내든 내지 않든 관계없이 마주하는 것 등도 모두 포함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부지기수로 예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간디 같은 경우는 조금 더 깊이 들어갑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열 번 속았어도 나는 신뢰로 만나야 한다.” 즉, 사람에게 열 번 속았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신뢰로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간디의 이런 태도가 당시 세계적인 양심과 지성들로부터 지지를 받게 한 힘이었던 겁니다. 간디가 독립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만약 세계적 양심과 지성들로부터 지지를 못 받았으면 그 독립운동을 그렇게 끌고 가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관점과 태도 때문에 간디는 세계적인 양심과 지성들로부터 공감과 지지, 협력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결국 상대에게 잘한다는 것도, 사사건건 다 설명할 수 있겠지만 그중, 몇 가지를 범주화하면 간단해집니다. 예를 들어, 우리 ‘붓다로 살자’ 발원문 내용도 결국 같은 맥락이 아닙니까?
‘고귀하게 맞이한다’라는 표현이 있잖아요. 첫 구절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과 자연을 고귀하게 맞이하고 만난다는 것이지요. 즉, 사람과 자연을 고귀한 존재로 인정하고 존중하며, 필요하면 배려하고 돕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행동의 혜택은 1차적으로 누구에게 돌아갈까요? 제일 먼저 본인한테 돌아갑니다. 내가 누군가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배려하고, 서로 돕고 나누는 행위를 하면, 그것 자체가 훌륭한 일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상대에게도 좋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세 번째는, 우리 모두에게 괜찮지 않습니까? 결국 행위는 하나인데, 그 행위가 나에게도, 너에게도, 우리 모두에게도 좋게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거죠. 이런 사유 방식으로 부처님을 해석하고 불교를 이해했던 것이 대승불교입니다. 사실 내용을 들여다보면. 대승불교는 정말 놀라운 내용입니다. 초기 불교나 남방불교와 비교해 보면, 그 깊이와 범위가 확연히 다릅니다. 바로 그 점이 대승불교의 놀라움입니다.
그러니까, 어쩌면 그 메시지를 보면, 개인의 실존적 문제나 자기 자신에게 부닥치는 문제들도, 비록 개인에게 직접적으로 부닥쳤다 하더라도, 그 문제는 결국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혼자 만들어지는 문제가 아니지요. 모든 문제는 누구와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풀어내고 답이 되도록 하려 할 때, 대승불교는 주로 자비심을 강조합니다. 그런 자비로운 태도로 문제를 다루면, 개인의 문제도 바람직하게 풀려나갑니다. 개인의 문제 역시 세상 이치 속에서 그렇게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세상 이치를 우리는 연기라고 표현하는 것이지요. 이 정도로 설명하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질문 3.) 금강경에서 부처님이 수백 생 동안 신체를 훼손당하면서도 가해자에게 분노 대신 자비를 냈다는 구절을 회주 스님은 어떻게 해석하시는지요?
아마 핵심 메시지는 ‘화내지 않았다’는 점일 겁니다. 왜 그랬느냐 하면, 그 이유는 바로 무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즉, 자기라는 실체가 고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화낼 근거가 없다는 말입니다. 다만 너무 극단적인 사례를 들면서 설명하는 것은 나는 지혜로운 태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만약 분노로 반응했다면 어떻게 될까요? 분노로 반응했다면, 그 순간의 나는 ‘분노하는 사람’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증오로 반응하면 그 사람은 증오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반대로 인욕과 자비로 반응하면 인욕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인간은 행위하는 대로 만들어진다는 점입니다. 괜찮은 인간이 되려면, 괜찮은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대승불교에서는 이러한 사고를 자리이타라고 표현합니다. 이런 사유 방식으로 문제를 바라보고 다루면, 그 결과는 나에게도 괜찮고, 너에게도 괜찮으며, 우리 모두에게도 좋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반대로, 나만 챙기는 방식으로 문제를 다루면, 결과적으로 나에게도, 상대에게도, 또 다른 누구에게도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로 귀결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수행 이야기가 나왔으니,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행 이미지와 실제 부처님이 뜻한 수행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답은 다를 것입니다. 말은 같지만, 내용적으로는 상당히 다릅니다.
사실 이런 차이는 대화와 토론을 통해 잘 정리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수행’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밥 먹는 것이 떠오르나요, 아니면 대화하는 것이 떠오르나요? 제가 다른 질문을 하나 해보겠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오해가 생길 수도 있는 일이긴 한데, 그렇다 하더라도 단순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취지에서 누구를 비난하거나 그런 생각이 있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단순하게, 제 방식으로 한번 문제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한 사람은 깊고 맑고 고요한 곳에 좋은 도량을 잘 만들어 놓고, 가부좌를 틀고 용맹정진을 잘합니다. 수행하면 흔히 그런 모습이 떠오르죠. 부처님도 6년 고행을 하셨지만, 실제로는 “6년 고행 그거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부처님을 본 받아야 한다면서, 마치 6년 고행을 해야 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부처님은 분명히 “그거 하지 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용맹정진은 잘합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수행’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그런 면에서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평화롭게 말하는 것은 못해요. 반대로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용맹정진 같은 것은 잘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지만, 평화로운 대화를 잘합니다. 자, 이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수행을 갖고 한번 얘기를 해본다면, 누가 수행을 잘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수행’이라고 하면, 평화롭게 대화를 잘 나누는 것과 연결되나요? 솔직히 말하면 안 됩니다. 머릿속에 그려진 수행의 이미지와 잘 맞지 않죠. 하지만 사실을 보면, 부처님이란 어떤 분이십니까? 팔정도를 생활 속에서 실천한 분을 부처님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팔정도를 생활화한 사람을 부처라고 부르고, 석가모니 부처님도 바로 그런 분이셨어요. 그 팔정도 안에는 여러 항목이 있는데, 그중 언어를 다루는 부분이 있습니다. 평화롭게 대화한다는 것은 바로 팔정도의 정어正語에 포함되는 덕목이죠.
우리는 평화로운 말과 바른 언어 사용을 수행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어요. 기성 불교인에게 물어보면, 이런 것을 수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이 지금 문제인 거예요. 그래서 흔히 수행하면 ‘3천 배, 용맹정진, 100일 기도’ 이런 것만 떠올리고, 그것만 강조하게 되죠.
물론 필요하면 그런 수행을 할 수도 있어요. 그걸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중요한 것은, 일상을 바람직하게 만들어내는 것이 수행이라고 정의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일상을 기본으로 하지 않고 수행 얘기를 하게 되면, 결국은 수행은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곡된다는 것은 실제 삶과 무관한 수행을 한게 된다는 뜻입니다. 삶과 연결되지 않는 수행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무리 장좌불와를 한다 하더라도, 평화롭게 대화할 줄 모르는 사람이 우리 대중에 들어왔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떨까요? 대중의 평화로운 삶이 가능하겠습니까? 평화는 깨지게 됩니다.
일상적인 평화를 깨뜨리는 일을 수행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당연히 그것은 불합리합니다. 그래서 우리 머릿속에 ‘수행’이라는 말로 이미지화해 놓은 내용은, 사실상 삶과 수행을 일치시키지 못하도록 되어 있어요. 수행과 삶이 따로 노는 구조인 것이죠. 수행 따로 하고, 삶 따로 있는 상태가 되는 겁니다.
이런 것들은 일치할 수가 없습니다. 그 수행과 삶이 일치하려면, 먼저 우리 머릿속에 그려져 있는 수행에 대한 선입견부터 걷어내야 합니다. 그걸 붙잡고 있는 한, 수행과 삶은 늘 따로 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행을 따로 하고, 삶을 따로 사는 상태에 머물게 되는 거죠. 현재 우리 머릿속에서는 탐진치가 문제라고 여기고, 여러 편견과 함께 불교 자체가 잘못된 이미지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잘못된 이미지를 들여다보고 걷어내야만, 수행과 삶이 제대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이걸 걷어내야 수행과 삶이 일치되어지는 불교 공부와 수행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수행과 삶이 일치되려면 수행에 대한 선입견, 수행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 이런 것들을 정리해 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씀인 거죠. 어쨌든 우리는 삶과 수행이 하나가 되는 불교를 실천하자고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보면, 여기는 일반적인 불교인들이 말하는 ‘수행’으로는 우리가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실상사에서는 장좌불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용맹정진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삼천 배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또 뭐가 있을까요? 천일기도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하여튼 일반적으로 ‘수행’이라고 얘기될 수 있는 그런 내용들을 우리가 자신 있게 자랑거리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이 실상사에는 없습니다. 그 이미지로 보면 실상사는 빵점입니다. 그렇다면 실상사는 수행을 안하고 있는 걸까요? 어떻습니까? 여기 실상사 인연이 있는 분들이니까, 한번 얘기를 나눠보면 좋겠습니다. 실상사는 수행을 안 하는 곳인가, 한다고 한다면 어떤 수행들을 하고 있는가, 그 얘기를 나눠보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좀 자신 있게 “나는 이렇게 수행하고 있다”라고 서로 얘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우리가 10시부터 같이 보현법회를 하고 있습니다. 10시부터 2시간 정도 진행되는데, 하나는 기도를 했고 하나는 지금 우리가 법회를 하는 거잖아요. 법담을 나누는 거죠. 이건 수행일까요? 아닐까요? 우리는 평화롭게 법담을 나눴어요. 그런데 왜 이건 수행으로 평가하면 안 되죠? 이걸 수행이라고 본다면 우리는 뭐가 되겠습니까? 사실 이건 일상생활의 한 장면입니다. 수행과 일상생활이 분리될 이유가 없습니다. 저절로 일치가 되는 거죠. 일상이 곧 수행이고 수행이 곧 일상입니다. 이렇게 접근하지 않고, 우리 머릿속에 전제되어 있는 수행이라는 상을 갖고 접근하는 한, 우리의 일상적 삶과 수행은 일치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분리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좀 자신 있게 얘기를 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다음에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