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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법회[21년 4월 보현법회]-약사여래 천일기도, 21세기 약사경 - "깨달음 문명으로 가자는 것"

세상이 변하면 결국은 불교도 따라서 정신은 변할 수 없지만 표현하는 언어나 또는 표현하는 형식, 방법 이런 것은 바꿔야 불교가 유지되어 가고 사람들에게도 희망의 가르침으로 전달되고 받아지고 그런 거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늘 익숙한 것에 젖어 살기 때문에 변화하는 건 낯설잖아요? 낯서니깐 어색하니까 불편하고, 변화를 두려워하고 어려워하고 그렇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정신은 잘 계승하되 표현하는 언어나 다루는 방식이나 형식은 계속 변화를 해야만 불교가 살아남기도 하고 불교가 발전하기도 하고 불교가 사람들에게 희망의 종교가 되기도 하고 그런다는 얘기죠.

 

<여래의 진실한 뜻, 정법불교>


우리는 오랫동안 천수경을 최고의 기도문으로 삼고 살아왔습니다. 근데 핵심 내용을 보면 여러 가지 얘기할 게 많지만 아까 우리가 축원문 내용에 들어있는걸 잠깐 연결시켜 보겠습니다.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사부대중 모두 함께 지성 발원하옵니다.

하루속히 부처님의 정법불교 활발하게 펼쳐지고 정법불교 위력으로 실상사 창건 1200주년 중창불사 시작부터 회향까지 크고 작은 장애 없이 원만성취 하옵소서.


천수경에는 정법불교라는 개념은 안 나와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법불교의 중요성이나 정법불교를 배우고 익히고 지키고 실현시키겠다는 원력이 없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런 내용을 천수경 속에서는 어떻게 표현되어지고 있느냐?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개경게’ 여래의 진실한 뜻을 원해 여래의 진실이…. 우리가 천수경 외우면 바로 앞에 나오잖아요. 개법장진언 그 다음 뭔고? 개법장진언 다음이 뭐요? 법의 창고 여는 진언, 또 하나, 몰라? 기억이 안나? 진언하고 개경게에 마지막 구절이죠. 여래의 진실한 뜻을. 여래의 참뜻을, 부처님의 진실한 뜻을, 부처님의 참뜻을 잘 알기를 바랍니다. 이런 내용이잖아요. 이게 바로 정법불교에 대한 절실한 바램, 염원을 그런 식으로 표현을 했죠.

 

또 뒤에 가면 여래 십대 발원문 내용 중 하나로써 세세 생생토록 부처님을 본받아 배우고 살겠다는 내용입니다. 항수불학원 항상 부처님처럼 삶이 실현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배우고 연구하고 탁마하고 살겠다. 이런 내용이죠. 이런 것들이 다 정법불교를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어떻게 지켜갈 것인가? 어떻게 내 삶이 되도록 할 것인가? 어떻게 이 땅에 실현되도록 할 것인가? 어쩌면 모든 불교인들이 그야말로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붙잡고 가야 될 핵심내용이죠.

 

저희들은 어쨌든 그런 정법불교를 시대에 맞게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구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런저런 모색을 하고 있고 그 중에 최근에 우리가 했던 일은 천일결사 이야기이고 천일결사에 한 내용으로 21세기 약사경이라고 하는 약사경을 대중적 지혜와 뜻을 모아서 만들어내고 지금 우리가 독송을 하고 있습니다.

 

<21세기 약사경>

 

오늘은 어쨌든 300일 회향이기도 하고 400일 입재일이기도 한데 그 동안 21세기 약사경을 우리가 잘 만들어서 좀 더 완성도 있게 해보자 그렇게 해서 이런저런 작업을 해오긴 했지만 이 내용이 지금 여기 나의 일상 속에서 지금 여기 내 현장에 구체적 삶 속에서 어떻게 적용이 되어야 불교수행의 의미가 살아날 수 있을까? 좀 이런 이야기들을 이런 구체적으로 할 필요가 있고 오늘이 짧지만 그 출발점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게 이 일을 준비한 대중들의 주문이었어요.


21세기 약사경과 일상 속에서의 불교수행이 연결되어서 이것이 해석이 되고 설명이 되고 사용이 되고 또는 그런 효과를 볼 수 있도록 그래야 이것이 불교의 생활화, 대중화라고 하는 게 가능하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들이 모아져서 저한테 그런 주문을 한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러면 21세기 약사경 내용 중에서 21세기 큰 서원이라고 하는 단락에 쭈욱 나와있는데, 그 중에서 어쩌면 가장 직접적으로 또는 지금 당장 바로 다뤄야 할 대표적인 것. 두 가지를 가지고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약사여래 21세기 큰 서원>이라는 제목으로 제목에 남겨있는 내용을 처음에 보면

 

“삶을 좋아하고 죽음 혐오하는 미혹문명 내려놓고

죽음도 빛나고 삶도 빛나는

깨달음의 밝은 문명 피어나게 하옵소서”

“젊음만을 좋아하고 늙어감을 싫어하는 미혹문명 내려놓고

늙음도 빛나고 젊음도 빛나는

깨달음의 밝은 문명 피어나게 하옵소서”

“남성만을 존중하고 여성들을 비하하는 미혹문명 내려놓고

여성도 빛나고 남성도 빛나는

깨달음의 밝은 문명 피어나게 하옵소서”


오늘은 요 대목을 갖고 설명을 좀 해볼까 합니다. 여기 지금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 계신데 죽음도 빛나고 삶도 빛난다면 어떻습니까? 좋을 것 같습니까? 안 좋을 것 같습니까? 좋겠죠! 그러면 그야말로 근심걱정 할 것이 없게 되는 거죠. 그런데 정법불교. 여래의 참 뜻, 부처님의 진실한 뜻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불교공부를 통해서 잘 파악하고 잘 이해하게 되면 죽음도 빛나고 삶도 빛나는 삶이 내 삶이 되어 질 수 있다. 우리의 삶이 될 수 있다. 이 얘기거든요. 아마 이 내용이 내 삶이 되어질 수 있다고 한다면 첫 번째는 본인에게 좋겠죠.

두 번째는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아마 직접적인 인연 맺은 식구들, 그렇죠? 식구와 이웃들이 좋아하죠. 그래서 불교가 생활화 되어지고 대중화 되어지려면 이런 내용을 내 삶으로 만들어내고 나와 인연 있는 사람들이 삶이 되도록 만들어 내는 것이 생활화 되었을 때 사실은 불교는 흥하게 되어있습니다. 발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을 해야만 우리가 정법불교를 제대로 하고 있다. 정법불교의 위력이 현실 속에서 발현되고 있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귀의처가 되고 희망이 되고 당연히 귀의처가 되고 희망이 된다면 너도나도 불교를 하려고 하고 절에 와서 공부를 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불교가 발전하지 말라고 해도 발전 안 할 수 없어요. 불교가 이런 내용을 만들어내기만 한다면.

그런데 오늘은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기에는 너무나 시간이 짧아서 그것은 생략하고 그 다음에 더 구체적으로 우리 문제이죠.

 

“늙음도 빛나고 젊음도 빛난다”

 

이 말을 우리 생활로 가져와보면 어른도 빛나고 청년도 빛난다. 이런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렇죠? 또 직접적으로 가져와보면 부모도 빛나고 자식도 빛난다. 이렇게 얘기해도 되겠습니다.

이 부분은 지금 당장 마음 먹으면 해볼 수 있는 일입니다. 아내는 남편, 남편은 아내, 부모는 자식, 자식은 부모 서로서로가 빛나게 하는 것, 부모도 빛나고 자식도 빛나는 아내도 빛나고 부모도 빛나고 이걸 지금 내 삶이 되도록 만들어내면 그게 불교수행으로서는 최고의 수행입니다. 어떻겠습니까? 기도로서는 최고의 기도죠. 안그러겠습니까? 어떤 기도, 어떤 수행도 그 이상의 내용은 없다는 저는 봅니다. 내 삶의 현장에서 직접적으로 인연 맺고 있는 아주 구체적인 관계인 부모와 자식 사이, 또는 아내와 남편 사이. 삶의 문제를 이렇게 다루는 것을 불교적 언어로는 중도적으로 다룬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또는 중도행을 하는 것이다. 또는 중도수행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죠. 중도적으로 공부하고 중도적으로 생활을 하게 되면 당연히 아내도 빛나도 남편도 빛나고 부모도 빛나고 자식도 빛날 수 있다. 그런 것을 또 다른 언어로 바꿔보면 약사경식 표현을 하면 그것이 바로 깨달음의 문명인 거죠. 나에게 너에게 우리 모두에게 희망이 될 수 있는 미래가 될 수 있는 거죠.

 

그러면 꼼꼼히 한번 얘기를 해보시죠. 아내와 남편 얘기부터 해볼까요? 우리가 살다 보면 주로 그런 얘기를 많이 하게 되죠. 사는 정, 고운정 그렇게 얘기하나요? 살면 미운 정, 고운 정으로 산다. 어떨 땐 밉기도 하고 어떨 땐 좋기도 하고 그렇잖아요. 우린 얼핏 생각하면 미우면 더 이상 같이 하고 싶지 않을 텐데 현실은 미워도 같이 살아야 되는 상황이 있는 거잖아요. 또 그 반대일 수도 있어요. 좋아도 같이 할 수 없는 상황도 있을 수 있어요. 이게.


이 말은 무슨 얘기입니까? 불가피성이 있는 거죠. 어쩔 수 없는 인연들이 있다는 거죠. 어쩔 수 없으니깐 사는 거예요. 그건 꼭 부모와 자식만 아내와 남편만 그런 게 아니라 너와 나 이웃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동료들 간에도. 그런 경우들은 인지상정상 어디에도 있는 거구요. 부처님 당시 부처님 제자들은 어땠을까? 거기도 마찬가지였어요. 제가 볼 적에는. 부처님도 그런 부분은 없지 않아 있죠. 다만 부처님 같은 경우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로 인해서 상처를 받거나 그걸로 인해서 상처를 받거나 많은 번민이 생기거나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이나 어려움을 겪지는 이러지 않은 거죠. 우리하고 다른 지점은. 그것을 이제 니까야 경전에서는 ‘제2의 화살을 맞지 않는다’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제 2의 화살을 쏘고 맞게 되면 계속 문제가 된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고 제2의 화살을 맞지 않게 되면 문제가 잘 관리되고 잘 정리하고 새롭게 만들어내는 게 가능해진다. 그래서 삶이 괜찮아진다. 이런 얘기인 거거든요.


우리사회도 지금 청년 문제, 세대간의 문제, 남녀간의 문제. 사실은 정말로 어마어마한 문제가 되어 있습니다. 국가적으로 문명사적으로 걱정을 해야 되고 해답을 찾아내야 되는 이런 상황에 와있는 거죠.

 

근데 큰 방향과 기조로서는 21세기 약사여래의 21세기 큰 서원의 내용이 큰 방향과 기조로서는 잘 제시를 하고 있는데. 이것이 구체적인 내용으로 구체적인 삶으로 심화시키고 그것이 생활화 될 수 있는 하는 작업은 대단히 우리가 많이 공을 들여야만 될 일이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서로를 빛나게 하는 삶이 바로 계정혜 삼학수행>

 

그러면 요 내용을 갖고 불교수행의 전통적인 기본을 보통을 우리는 계,정,혜 삼학 수행이라고 합니다. 그 앞에서는 팔정도 수행이라고 얘기를 했고, 이걸 또 세가지로 범주한 게 계,정,혜 삼학수행

오늘 우리가 어른도 빛나고 청년도 빛나고 또는 아내도 빛나고 남편도 빛나고 부모도 빛나고 자식도 빛나고 요 사안을 연결 시켜서 계,정,혜 삼학으로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계,정,혜 삼학에 맞춰서 한번 설명을 좀 해볼까 싶네요.

첫 째는 차분한 마음, 평정을 잘 유지하는 마음입니다. 그거 다 단단히 마음 먹어야 가능한 일이죠. 그렇죠? 평정을 잘 유지하도록 늘상 단단히 마음 먹고 정신 바짝 차려서 평정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끄덕하면 신경질이 바락바락 일어나고 끄덕하면 욕심이 와글와글 끓기도 하고 이런 게 우리들 이잖아요. 또 그렇게 표현하죠. 인생은 살아봐야 백 년인데 그런데 그 살림살이 내용을 들여다보면 천만년 살 것처럼 걱정들 하고 있다. 백 년 밖에 못 살면 백 년 몫까지만 걱정하면 괜챦을텐데, 천년만년 살 것처럼 근심 걱정한다는 얘기죠. 이게 지혜로운 일입니까? 어리석은 일입니까? 어리석은 일이잖아요. 그래서 인생의 짐이 내 의도와는 관계없이 계속 커지는 거예요. 무거워지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되는 이유가 우리가 차분하게 내 삶의 문제를 또는 나와 관계된 내용들을 차분하게 바라보고 다루지를 못하기 때문이에요. 그것이.

 

왜 그럴까? 자기도 모르게 익숙해 있는 습관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거의 습관에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거의 습관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이걸 우리는 보통 불교적 언어로는 전생의 죄라고 얘기를 하고 있는데요. 그렇게 해석되고 설명되어 지는 게 과연 장점이 많은가? 그리고 또는 괜찮은가? 바람직한가? 이렇게 따져보면 전 거기에 의심이 많습니다.

 

내가 살면서 경험해보면. 그러나 그 부분들은 너무 복잡하니깐 오늘 그 얘기를 그 쪽으로 갈 수는 없을 것 같고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거의 우리의 생각과 언어와 행동들이 거의 내가 주체적으로 마음 먹어서 생각하고 마음 먹어서 말하고 마음 먹어서 행동하고 이렇게 하고 있지 않고 내가 주체적으로 마음 먹는 거와는 관계없이 습관적으로 생각하고 습관적으로 말하고 습관적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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