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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법회[2022년 6월 보현법회] - 감탄하는 실력을 키웁시다!

6월 보현법회

 

<근황1: 자유에 대한 성찰>

 

안녕하세요.

목소리가 자꾸 잠기네. 세월 앞에 장사가 없다는 이야기를 매일매일 실감하는 것이 요즘의 근황입니다.

 

<근황2: 연관스님 입적>

연관 스님은 소문 들어서 대충 아시겠지만 늦게 병이 발견이 된데다 나이도 있고 또 상태도 안 좋았습니다. 더 이상 회복을 위한 치료를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판단을 본인 스스로도 하고 주변에서도 거기에 공감을 했습니다. 그래서 회복을 위한 치료는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정리 했습니다. 실제 뒷바라지를 하고 마무리를 하는 데는 수경 스님이 애를 많이 썼습니다. 또 부산관음사 회주스님이 크게 역할을 해주셔서 잘 마무리 했습니다. 이제 49재가 남았는데 7월 5일 세 번째는 실상사에서 하기로 했습니다.

 

수경스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했는데, 화장 마치고 하동에 가서 산골하려고 하는데 가슴에서 울컥 솟구치더라고 해요. 그동안 멀쩡 했는데 산골을 하려고 보니까 울컥한 마음에 한바탕 통곡했노라고 그러더라고요. 조금만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사실은 매 순간 순간 살고 죽고 살고 죽고 하는 게 우리의 삶입니다. 이 실상을 평소에 제대로 직시하고 제대로 인식하고 거기에 온전하게 함께 하도록 학습되어지고 연마되어지고 자기 삶으로 무르익어지면 언제 죽더라도 허둥지둥 법석을 떨지 않을텐데 늘 그게 잘 안돼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이번에도 지켜보면서 평소에 끊임없이 학습하고 대화를 통해서 더 분명하게 인식하여 그 내용이 생활화되고 체질화되도록 하면 우리가 삶을 자연스럽게 살아가듯이 죽음도 자연스럽게 전개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따라서 마지막 순간까지 공부를 계속 잘 하는 것이 좋겠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최근을 보냈습니다.

 


☸ 법문 제5권(법사)

 

오늘 실상사 청정도량에서 함께 수행정진하는 살아있는 대중들과 돌아가신 대중들이여!

붓다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신기하고 신기하도다. 어리석음에서 깨어나보니 사람이 그대로 오롯한 붓다이네” 뭇생명들의 참모습이 대비원력으로 살아갈 수 있는 본래붓다이건만 무지와 착각에 빠져 탐욕과 분노, 시기와 질투, 소유와 지배욕이라는 나쁜 습관에 젖어 끝없는 고통과 불행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본래붓다인 자신의 참모습에 대한 무지와 착각에 빠져 터무니없는 갈등과 대립을 일으켜 부모・형제・식구와 스승・도반과 이웃 사이에 서로 미워하고 원망하고 헐뜯고 성내면서 고통과 불행의 싹들을 키우고 있습니다.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아득한 우주생명의 길에서 본래붓다인 자신의 참모습을 망각한 채 우리가 얼마나 많은 원결을 맺었는지 헤아리기 어려우며, 그로 인해 받는 고통과 불행 또한 무궁무진합니다.

지금이라도 더 늦기 전에 대비원력의 마음으로 모든 이들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화해하여 맺힌 원결을 풀고, 외롭고 슬픈 이들을 헌신적으로 보살피며, 무능하고 약한 이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등 고통과 불행의 씨앗인 나쁜 업을 버리고 좋은 업을 짓는 수행을 하여야 합니다.

 

오늘 함께 수행정진하는 대중들이여!

우주질서를 따르는 생명의 길은 좁고도 멀며 고통과 불행의 늪은 깊고도 넓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렵고 본래붓다의 길인 정법을 만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인생이란 아침이슬처럼 덧없는데 언제 어느 때에 다시 붓다의 정법을 만나게 될지 기약할 수 있겠습니까.

다행히 지금 삶의 고통과 불행을 직시하고 붓다의 정법을 우러러 용맹심을 일으켰으니 밤을 낮 삼아 참회발원하고 또 합시다. 경전에 “고통의 씨앗인 무지와 집착의 나쁜 업에서 벗어나는 길은 참회발원이 으뜸”이라고 했고 “진정한 참회 발원은 첫째 나쁜 업을 되풀이하지 않음이요, 둘째 몸과 마음 다 바쳐 나쁜 업을 뉘우침이요, 셋째, 대비원력의 용맹심으로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좋은 업을 짓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했으니 이 말씀을 부디 가슴 깊이 새기고 또 새기십시오.

 

오늘 함께 수행정진하는 대중들이여!

고통과 불행으로부터 벗어나는 대비원력의 붓다행으로 살기 위해 오늘 함께 한 대중들은 인욕과 관용이 안락의 길이며, 화해와 용서가 평화의 길이며, 기꺼이 나누고 돕는 것이 기쁨의 길이며, 이기심을 버리고 겸손하게 헌신하는 것이 행복의 길임을 깊이 자각하고 확신하십시오.

그리하여 큰 뜻 큰 마음으로 “중생을 다 건지리, 번뇌를 다 끊으리, 법문을 다 배우리, 진리를 다 이루리”라는 사홍서원을 실천하여 오늘부터 영원토록 매 순간순간 뭇생명들을 구제하고 보호하며, 다 함께 해탈열반의 삶을 살도록 헌신하고 또 헌신해야 합니다.


<본래붓다: 내 삶의 창조주는 누구인가?>

오늘은 ‘신기하고 신기하도다 어리석음에서 깨어나 보니 사람이 그대로 오롯한 붓다이네’ 이 이야기를 같이 해보면 어떨까 싶네요. 사람들은 ‘본래부처’라는 말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가 봐요. 우리 신도님들은 어떠세요? 잘 안 받아들여지죠? 왜 그럴까요? 그 이유가 뭘까요. 그것도 내가 하는 것도 아니고 부처님이 그랬다는데. 우리가 진정 부처님을 믿고 존경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가르침 때문이거든요.

지금은 옛날과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부처님 당시, 이천육칠백 년 전 그때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로 놓고 보더라도 한 삼사십 년, 전 한 오십 년 전후 까지만 하더라도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가 ‘죄 많은 인간’이라는 생각을 갖고 살았어요. 거의 죄의식에 사로잡혀 산거죠. 부처님 당시는 말할 것 없고요.

부처님도 그런 줄 알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겪고 있는 죄의식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찾지 않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사로잡혀서 살아갖고는 도대체 사는 것이 당당할 수도 없고 자유로울 수도 없고 평화로울 수도 없고 멋있을 수도 없고 아름다울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인간답게 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던 거죠. 결국은 해답을 길을 나서게 됩니다. 하지만 세속 현실에서 해결하려고 해봤지만 길이 없었습니다.

그 다음엔 ‘저쪽에 가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해서 찾아간 곳이 출가수행, 종교의 길입니다.

종교의 길, 출가해서 육년 고행이라는 말로 표현되듯이 목숨을 걸고 노력을 했습니다. 선정, 정신통일의 최정점까지 도달하여 신비한 체험도 하고 극한적인 고행의 정점까지도 갔지만 답을 못찾았습니다. 답이 안 나오니까 당연히 버릴 수밖에 없죠. 그동안 준비한 지도를 다 썻기 때문에 이제 지도가 없는 백지상태가 된 겁니다. 당신 방식으로 해서 답을 찾습니다. 당신 방식으로 해서 답을 찾았고 나중에 설명할 때 중도라고 표현합니다. 중도적으로 하니까 답이 나오더라 이런 얘깁니다. 그 답이 제대로 알고 보니 사람은 죄많은 업보 중생이 아니라 본래 부처더라는 얘기입니다. 몰랐을 땐 죄 많은 중생이었는데 내용을 제대로 알고 보니까 사람이 본래 부처더라. 노예가 아니고 주인이더라. 운명의 종이 아니고 창조주더라.

 

어떻습니까? 놀랍지 않습니까? 감격스럽지 않습니까? 감격스러운 그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신기하고 신기하도다 어리석음에서 깨어나보니 사람이 그대로 오롯한 붓다이네’ 인 것입니다. 신기하고 신기하도다. 제대로 알고 보니 사람이 죄 많은 업보 중생이 아니라 자기 마음껏 삶을 창조해갈 수 있는 자기 삶의 주인공이더라는 말입니다. 자기 삶을 창조하는 창조주는 전생의 죄업도 아니고 사주팔자도 아니고 저 어디엔가 알 수 없이 존재하는 신도 아니고 바로 자기 자신이다, 마찬가지로 니 인생은 니가 주인이다. 니 인생은 니 마음대로 창조해가는 것이다. 본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인간이란 대단한 내용을 갖고 있는 존재다. 그 대단한 내용을 한마디로 ‘사람이 그대로 오롯한 붓다이다.’ 라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참으로 천지가 놀랄 내용입니다. 이럴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당연히 부처님 고맙습니다, 그래야 돼죠. 온몸으로 막 환호해야 되는 거예요. 환희용약이라는 말이 경전에 나옵니다. 환이용약하는 마음으로 정근을 합시다. 부처님 부처님하고.

 

<꽃밭과 풀꽃밭, 어떻게 다를까요?>

왜 이렇게 될까요? 현실 경험으로 보면, 말만 듣고도 ‘신기하고 신기하도다’ 하는 이런 감탄이 터져 나올 때가 있죠. ‘어리석음에서 깨어나 보니 사람이 그대로 오롯한 붓다이네’ 이 말만 듣고도 뭔가 번쩍하고 번개 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어떤 계기가 오면 누구나 그럴 수 있습니다. 누구나 반짝하고 불이 켜지는 수가 있죠. 그런가 하면, 또 다른 경우엔 이거 십 년 전에도 들었는데 오늘도 또 듣네, 이렇게 되기도 하죠. 법회 오면서도 ‘가봐야 또 그 얘기겠지 뭐’ 하는 심정으로 오게 되죠.

 

그렇게 되면 불교 공부와 수행을 하는 것이 기쁨이 아니라 짐이 됩니다. 사실 이 점이 우리가 뚫어야 할 중요한 과제입니다. 교리적으로 답하면 중도적으로 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제가 극락전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꽃밭 사고방식과 풀꽃밭 사고방식이 같은가 다른가 하고 물어봅니다. 꽃밭과 풀꽃밭. 별로 생각 안 해봤으니 당연히 모르죠.

사람들은 그런 질문을 하면 긴장을 합니다.

늘 하는 얘기를 오늘 다시 하게 되는데, 만날 했던 얘기 또 하는 거예요. 꽃밭 사고방식으로 삶을 바라보고 다루게 되면 반드시 선택과 소외가 생깁니다. 선택받는 자와 버림받는 자. 우리 일상적으로 선택 받았을 때 하고 버림받았을 때 어떻습니까? 자식으로부터 내침을 받았다. 부모로부터 내침을 받았다. 아내로부터 내침을 받았다. 또는 반대로 선택을 받았다. 우린 내 마음에 들면 선택하고 내 마음에 안 들면 내치고 그렇잖아요.

꽃밭 사고방식에는 반드시 선택과 내침이 개입하게 됩니다. 반드시 선택받는 꽃이 있는 것이고 버림받는 꽃이 있는 거죠. 선택과 버림이 있으면 그다음은 뭐예요. 차별이죠. 차별 다음은 뭐죠? 다툼이죠. 안 그렇습니까? 차별과 다툼. 다툼이 최악의 상황으로 벌어진 상황을 전쟁이라고 하는 거잖아요.

결과적으로 보면 싸우면서 사는 것이 곧 지옥입니다. 전쟁 속에 사는 것이 지옥 아니겠습니까. 지옥이 뭐 따로 있겠어요. 좁혀서 말하면 싸움인 것이고 크게 벌려서 말하면 전쟁인 것이고 그런 거죠.

그렇게 보면 차별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가 확실해집니다. 차별은 다툼으로 가게 되고 다툼은 곧 지옥이라고 하는 말로 귀결되는 것으로 볼 때 매우 큰일이고 심각한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풀꽃밭 사고방식으로 접근하면 선택하거나 버릴 이유가 없죠. 왜 그럴까요? 다 꽃이니까. 꽃 아닌 게 없는 거죠. 풀꽃밭, 실제 식물이 꽃인 식물과 꽃이 아닌 식물이 있을까요. 없어요. 다 꽃이 피어요. 그러기 때문에 열매를 맺고 번식을 하게 되는 거죠. 꽃이 안 피면 열매를 맺을 수가 없고 번식할 수가 없어요. 다만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을 뿐이죠. 실상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잘못 알고 잘못 생각하고 있을 뿐이죠. 실제는 꽃이 없다는 무화과도 꽃이 피어요.

꽃이 따로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요새 말로 하면 가짜 뉴스인 거예요. 어떻습니까, 가짜 뉴스를 따라 살아야 되겠습니까, 다 꽃이야라고 하는 진짜 뉴스를 따라 살아야 되겠습니까, 어떠세요? 우리가 가짜를 따라 가면 안 되잖아요. 진짜를 따라가야지. 그러면 꽃이 따로 있다는 사고방식을 가짜 뉴스라고 한다면 가짜 뉴스를 따라 가게 되면 어떻게 돼요. 당연히 차별이 생기죠. 당연히 다툼이 생기죠. 당연히 삶이 편안하거나 자유로울 수가 없죠.

반대로 진짜 뉴스를 따르면 어떨까요. 차별을 안 하게 되죠. 차별을 안 하니까 다툼으로 안 가죠. 차별과 다툼으로 가지 않으니까 삶이 어떻습니까? 화목하고 평화로울 수 있지 않겠어요. 삶이 아름다울 수가 있는 거죠. 여유로울 수도 있는 것이고. 그래서 실상을 제대로 잘 보고 제대로 잘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깨달음이라고 얘기합니다. 그걸 잘 알고 거기에 맞춰서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차별하지 않고 평화롭게 더불어함께 사는 게 가능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여기, 내가 발딛고 있는 현장이 ‘신비’>

이쯤에서 극락전을 갖고 다시 얘기를 해보죠. 봄이 되면 방송에서 경쟁적으로 보도하는 게 뭐죠? 꽃 소식이죠. 유채꽃 또는 매화꽃. 또 개나리꽃 진달래꽃 벚꽃 등등해서 온통 꽃 소식이죠. 우린 꽃 소식에 따라서 설레기도 하고 쫓아다니기도 하고 그러죠. 그런데 그렇게 꽃소식을 경쟁적으로 보도할 때쯤 되면 극락전에도 꽃이 핍니다.

그런데 꽃 소식은 주로 바닥에 있는 꽃 소식을 전하는 경우는 없어요. 주로 저 높이 있는 꽃 소식들이죠. 어마어마한 꽃 소식들은 대부분 벚꽃이나 매화꽃, 그런 꽃 소식들이죠. 우린 대부분 찬란한 꽃소식에 현혹됩니다. 온갖 미사여구를 다 동원해서 뉴스를 전하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그 바람에 휩쓸려 갑니다.

그런데 계절은 비슷하지만 극락전에서 피는 꽃들은 거의 바닥의 꽃들입니다.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내 눈으로 직접 본 내용을 말로 표현 할 경우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아마 온갖 아름다운 미사여구를 다 동원해서 표현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반짝반짝 빛난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고 매우 신비하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고 매우 오묘하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고 매우 신선하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고 매우 향기롭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고 매우 불가사의하다 등 온갖 미사어구를 다 동원해도 끝내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두발을 딛고 있는 현장에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도 다 표현할 수 없는 내용이 그 현장에 존재하고 있고 그 내용을 마음껏 누리고 있다면 그 삶은 어떨까요. 신비한 것 불가사의한 것 향기로운 것 아름다운 것 신선한 것 오묘 것 심오한 것 기적적인 것 이 모든 것들을 내 목전에서 내가 두발을 딛고 살고 있는 그 현장에서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느끼고 마음껏 누리고 있다면 그 삶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한마디로 ‘무사태평’ 이렇게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제 경험은 그렇습니다. 거기에 오묘하다, 심오하다, 신비하다라고 할 수 있는 사례가 여러 가지 있지만, 그중에서 제일 쉬운 거 하나를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꽃은 지는 것과 열매 맺는 것이 동시에 진행 됩니다. 하나는 죽음이고 하나는 탄생인 셈인데요. 죽음과 탄생이 동시에 진행이 되면 우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울어야 합니까 웃어야 합니까. 꽃이 떨어지는 것과 열매 맺는 것이 동시에 진행되는데 이걸 어떻게 설명죠. 그 실상이 오묘하고 신기하고 놀랍지 않습니까?


<감탄하는 실력을 키웁시다>


내가 두발을 딛고 있는 지금 여기 현장의 실상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그 신비하고 오묘하고 불가사의함을 기쁨으로 충만감으로 만끽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본인의 살림살이가 충만함으로 가득해도 상대와의 비교를 통한 열등감이 생기겠습니까?

 

절집에서 깨달음이라고 하는 말이 굉장히 신비화 돼 있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죠. 삶이 무한한 자부심과 충만함으로 가득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까요. 그러므로 너무 어렵게 생각들 하는데 실제 내용은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워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쩌면 매우 직접적이고 사실적인 내용입니다. 제가 극락전의 예를 들어서 얘기해보는 건데요. 사실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고 그곳의 실상에 대한 이해와 인식을 제대로 하면 저절로 신기하고 신기하도다 고 밖에 달리 뭐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 신기하다 신기하다’ 하고 감탄을 하는 실력, 그런 실력들을 계속 잘 길러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비록 내가 소유한 집이 크지 않더라도 내가 소유한 돈이 많지 않더라도 내가 받는 밥상이 진수성찬이 아니라 하더라도 충분히 충만감 속에서 삶을 누릴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특히 젊은이들 또는 우리 아이들에게 이런 실력을 갖게 해줘야 되거든요. 그런데 아이들이 그런 실력을 갖게 하려면 일차적으로는 어른들이 그걸 잘 소화를 시켜야 돼요. 어른들이 잘 소화를 시키면 당연히 젊은이들에게,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대단히 매력적으로 느껴지게 되죠.

매력적으로 느끼게 되면 어떻게 돼요. ‘아 나도 저렇게 공부하고 저렇게 실력을 길러서 저렇게 살아야지 하게 돼 잖겠어요.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인드라망 운동 또는 사부대중 공동체 운동, 마을 공동체 운동, 또는 마음밭을 가는 일로서 공부하고 수행하는 운동, 이런 운동들이 다 사실은 그 실력을 기르기 위한 겁니다.

그 실력을, 마음 밭을 가는 일과 흙밭을 가는 일이 늘 균형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했을 때 나에게도 좋고 너에게도 좋고 우리 모두에게도 괜찮은 그런 답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같이 공부를 하고 있는데 내가 두발을 딛고 있는 내 현장에서 매순간순간 ‘이야 신기하다 신기하다 불가사의하다 참으로 오묘하고 참으로 심오하다’ 이런 감탄을 터뜨리는 하루하루가 될 수 있도록 공부하고 정진했으면 합니다. 그러면 삶을 마무리하는 죽음 또는 저승길도 좀 편안하게 홀가분하게 자유롭게 보내기도 하고 가기도 하고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하도록 해봅시다.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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