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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법회[22년 7월 보현법회] - 하루 낮 하루 밤 사이에 만 번 태어나고 만 번 죽는다

7/17(일) 7월 보현법회 / 회주 도법스님 법문

 

 

안녕하세요. 더위에도 잘들 지내셔서 오늘 이렇게 만나는 거죠? 잘 못 지냈으면 못 만났을 텐데. 맞습니까? 다행입니다.

 

법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금 전에 우리가 의식을 집전했습니다. 지금도 하고 있는 중이고요. 보현법회 형식을 보면 그 안에 의식이 있고, 법문이 있습니다. 그러면 보현법회 전체를 놓고 봤을 때 가장 중요한 의식 또는 내용이 어떤 거라고 생각하세요? 사람마다 다 다를 수 있겠죠.

우리가 오랫동안 익숙해진 불교 신행 내용으로 보면 당연히 목탁 치고 염불하고 절하는 것이 중요하게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 법회를 추진하는 취지에 맞춰서 보면,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아니한 것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중요한 부분이 입정시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입정시간의 중요성에 대한 이해나 인식이 없다보니까 전체의식 속에서 제일 짧습니다.

염불할 때 우리는 염불하는 사람이 되고 절 할 때는 절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절하는 사람도 아니고 염불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냥 나로 온전하게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이 입정시간입니다. 군더더기가 붙지 않고, 도법은 도법으로서 온전하게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이 입정시간인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그 시간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짧은 시간에도 자기 자신으로 온전하게 존재하지 못합니다.

과거로 갔다가 미래로 갔다가 저 동네로 갔다가 이 동네로 갔다가 어저께 누구 만나서 고스톱 쳤어, 고스톱 치는 데로 갔다가, 어디서 누구를 만나 밤새 술 먹었어, 술판으로 갔다가. 그것을 우리는 망상이라고 얘기합니다. 온통 망상의 존재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망상들이 끼어들지 않고 오롯하게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온전하게 존재하기 위한 시간이 입정 시간입니다. 그러니까 단단히 마음먹고 침착하게 차분하게 고요하게 그 시간을 정말로 내용 있게 오롯하게 보내야 맞는 거죠. 그렇게 생각하고 그냥 요식적인 행위로 입정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해야 마땅합니다. 이 부분에 대한 우리들의 깊은 성찰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 입정시간이 중요한 이유는 법문 때문입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인데,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법문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입정을 하는 이유도 이 법문을 잘 듣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와글와글 끓고 있는 망상들이 발붙이지 못하게,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 온전한 나로 존재할 수 있도록. 마치 바닷물이 잔잔하고 맑으면 하늘의 달과 별이 환하게 반영되는 것과 같이, 그렇게 법문의 내용이 들어오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 스스로가 그렇게 차분하고 잔잔하고 평온했을 때, 맑고 잔잔한 바다에 하늘의 별과 달이 환하게 나타나듯이 법문의 내용이 그렇게 들어오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법문 내용 자체가 우리가 깨달아야 할 내용입니다. 깨달았을 때 생기는 효과는 어떤 것일까? 우리는 ‘깨달으면 모든 게 만사형통이야’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아주 신비하고 황홀한 일이 벌어지리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깨달으면 나타나는 현상은 여러 가지 비유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눈에 콩깍지가 끼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콩깍지가 끼면 제대로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이죠. 주로 결혼한 사람들이 그 얘기를 많이 하더군요. 그때 콩깍지가 끼어서 결혼했노라고. 콩깍지가 벗겨지는 현상이 깨달음입니다. 또 다른 비유는 내 눈 앞에 짙은 안개가 자욱하게 덮혀있었는데 안개가 싹 걷혔다. 그게 깨달았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삶에 대해서 의심이 없어지는 거예요. ‘아, 인생이란 그런 것이구나. 아, 그렇게 살면 되는 것이구나.’ 이런 생각이 환해지는 겁니다. 그 정도면 전 충분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우린 이제 수행, 신앙, 깨달음 이런 언어들이 너무나 왜곡되고 과장되게 신비화 되어 있다 보니까 안개가 걷히는 정도면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보다 더 특별한 것이 있어야 된다 생각하죠. 더 기가 막힌 것 깜짝 놀랄만한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그 부분을 하나하나 확인해보면 특별한 게 있다고 하는 얘기들이 요새 말로 하면 다 가짜뉴스들입니다. 우린 거기에 속고 지배 받고 있습니다. 진짜 뉴스는 눈앞에 자욱했던 안개가 걷히는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히 멋있고 괜찮은 삶이 가능해진다.

 

사자좌의 실상

그 다음에 하나 더 생각해보고 가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청법가’ 중에 ‘사자좌’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사자좌에 올라앉아서 법문을 하시라고 청하는 거잖아요.

인류 역사에서 사자라고 평가될 수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 부처님입니다. 처음부터 사자가 아니었고 부처가 되는 바람에 사자로 평가되어지는 겁니다. 사자를 백수의 왕이라고 합니다. 깨달아서 부처가 됐기 때문에 그 분을 사자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최고인 부처님, 사자인 부처님이 앉았던 자리는 어떤 자리일까? 처음에 앉았던 자리는 풀방석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조건이 좋은 강변에 좋은 그늘을 드리운 좋은 나무가 있었고 거기에 앉기 좋은 반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방석이 필요한데, 당신은 떠돌이기 때문에 방석을 짊어지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누가 준비해주는 것도 아니었죠. 그렇지만 반석에 그냥 앉기에는 여러 가지로 바람직하지 않으니까 주변에서 풀을 베고 있던 목동한테 부탁합니다. ‘이 바위가 너무 딱딱하니까 네가 벤 그 풀 나 좀 주면 크게 도움이 되겠다.’고하여 목동한테 풀을 얻어서 깔고 앉습니다.

그러니까 실제 부천님이 앉으셨던 자리의 모양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광실의 사자좌하고는 전혀 다른 내용입니다. 만일 실제 부처님이 고대광실의 사자좌에 올라앉으면 우리는 무릎 꿇고 우러러 봐야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강변의 나무그늘 아래 있는 반석 위에 풀을 깔고 앉아있는 사람이 사자였다. 비록 사자이기도 하고 부처라 하더라도 저 위에 앉았을 때 하고 반석 위에 앉았을 때 하고는 어떨 것 같습니까? 당연히 저위에 앉으면 나와 비슷한 사람 같지가 않죠. 가까이 가서 농담을 좀 걸고 싶은데 감히 걸 수가 없죠. 근데 반석 위에 앉아 있으면 어떨까요. 당연히 가까이 가서 말을 걸어 보려고 마음을 낼 수가 있습니다.

어떤 부처님이 좋습니까? 가서 말도 걸고 농담도 할 수 있는 부처님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감히 말을 못 붙이는 부처님이 좋겠습니까? 실상사는 바로 말 걸고 농담도 할 수 있는 부처님 불교를 해보자 하는 겁니다. 실상사는 그러기 위해서 피눈물 나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경전 공부를 하든, 기도문을 외우든 우리가 공부하고 독송하는 내용이 건성으로 한번 휙 읽어본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꼼꼼히 내 피가 되고 살이 될 수 있도록 곱씹고 곱씹고 곱씹고 그래야 깨달음이 이루어집니다. 깨달음이 이루어지는 현상은 어떤 것인가? 신비한 것이 아니고 눈앞을 가렸던 안개가 걷힌다. 가야 될 길이 환히 보인다. 그 정도면 괜찮지 않습니까? 그래 이 길이야. 이 길로 가면 틀림없어. 가기만 하면 돼. 하고 그렇게 되면 무엇이 걱정이겠습니까?

 

우리가 지금 ‘미혹의 문명을 넘어 깨달음의 문명을 열어가야 한다’는 뜻으로 기도도 하고, 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주로 그 내용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깨달음의 문명의 사고방식을 한국사회 현실로 가져와서 적용을 해보면 여당도 빛나라, 야당도 빛나라, 전 정권도 빛나라, 현 정권도 빛나라, 진보도 빛나라, 보수도 빛나라, 전라도도 빛나라, 경상도도 빛나라, 남성도 빛나라, 여성도 빛나라, 젊은이도 빛나라, 어른도 빛나라 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만약 우리 삶이 이렇게 이루어진다면 편안하지 않겠습니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기쁘지 않겠습니까? ‘야, 살 만하다’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과연 그 길이 가능한 것일까 하는 겁니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 깨달은 자인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처럼 깨달아야 될 내용도 바로 그 내용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는 이유도 참선을 하는 이유도 명상을 하는 이유도 경전을 공부하는 이유도 법회를 하는 이유도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활동은 바로 이 길을 발견하고 이 길을 우리가 가보자고 하는 거죠.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그렇게 하고 싶은데 불행하고 안타깝게도 우리 눈앞에 안개가 자욱해서 그 길이 잘 안 보이는 거예요. 그 자욱한 안개를 걷어내는 작업이 바로 보현법회인 겁니다.

 

‘꿈 깨는 인생학교’라는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을 했는데 거기에 독실한 카톨릭 신도 한 분이 오셨습니다. 어떤 계기로 불교를 만나게 되어 템플스테이까지 왔다고 합니다. 불교를 만나면서 하게 된 공부가 [망설일 것 없네 당장 부처로 살게나]를 다섯 번 읽었다 합니다. 그리고 안개가 싹 걷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카톨릭 신자로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는데 마음에 갈등이 생겼다고 합니다. 쉽게 말해 개종을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이런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개종할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표층적으로 보면 기독교와 불교가 달라 보이지만 심층적으로 보면 다 통한다. 비유를 들자면 지금 제가 손을 들었는데, 뭐가 보이세요? 손가락 다섯 개가 보이죠. 그러면 내 손은 다섯 갠가요? 그건 아니죠. 다시 보면, 더 깊숙이 보니까 한 손이 보이잖아요. 여기만 볼 때는 손가락만 보였고 좀 깊이 보니까 한 손이 보이는 거잖아요. 손가락만 보면 다 다른 것 같습니다. 손가락만 보면 다 남남인거예요. 만나거나 소통하거나 함께 하는 게 불가능하죠. 그런데 좀 더 깊이 보니까 한 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 통한다, 다 만난다, 서로 인정하고 존중하고 배려하고 협력하고 나누면 훨씬 더 바람직하게 갈 수 있다. 그래서 ‘굳이 비유를 들자면 카톨릭은 친정집이라고 생각하고 불교는 시댁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갈등할 것 없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하루 낮 하루 밤 사이에 만 번 태어나고 만 번 죽는다

우리가 공부할 교재를 놓고 보면 법문 제6권해야 될 차례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진도를 나가는데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복습을 한 번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른 생각하면 제가 편하고 쉬운 길을 선택한 것이고, 내용적으로 생각하면 복습하는 것이 훨씬 더 바람직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지난 주 법회 때 공부내용을 갖고 왔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읽으면서 이야기를 진행해볼까 합니다.

 

여기서 법문으로 다시 한 번 음미해야 될 부분은, ‘조금만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사실은 매 순간순간 살고 죽고 살고 죽고 하는 게 우리들의 삶’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아세요? 매 순간순간 살고 죽고 살고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잖아요. 왜 그럴까요? 눈앞에 안개가 자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눈앞을 가리고 있는 안개란 바로 내 머릿속에 꽉 차 있는 잘못된 지식과 믿음들인 겁니다. 요새 말로 하면 가짜 뉴스들이죠. 가짜 뉴스라고 하는 안개가 내 눈앞을 짙게 가리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순간순간 살고 죽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모르는 겁니다. 그리고는 기껏 알아봐야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어, 또는 한 칠팔십 년 살면 다 죽어. 이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인 겁니다.

그것이 틀리진 않죠. 그러나 그것이 전부인가? 당연히 전부가 아니죠. 더 세밀하게 보면, 더 심층적으로 보면 마치 아까 표층, 껍데기로만 봤을 때엔 손가락 다섯 개가 각각 달랐는데 조금 더 깊이 보니 한손인 겁니다. 마찬가지로 조금더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사실은 매 순간 순간 살고 죽고 살고 죽고 하는 게 우리들의 삶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나는 모르고 있지만 실제는 살고 죽고 살고 죽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경전에선 뭐라고 하는가? “일일 일야 만사 만생(一日一夜 萬生萬死)”, ‘하루 낮 하루 밤 사이에 만 번 태어나고 만 번 죽는다.’ 이게 무슨 소리인지 우리는 모르죠. 그런데 요즘은 이런 사실이 과학적으로 설명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이 안에서 끊임없이 살고 죽고 있는 거예요. 생멸 생멸 생멸 생멸 생멸는 상태로 지금 내 모습이 유지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사실을 제대로 직시하자, 제대로 이해하자, 제대로 인식하자. 그리고 그 내용이 내 사고가 되고 언어가 되고 행동이 되고 생활이 되도록 하자.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삶에 대해 집착을 해야 될 이유도 없게 되고 죽음에 대해 불안과 공포를 가져야 될 이유도 없게 된다. 생에 대한 집착도 없어지고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도 자유로워지는 걸 불교적 언어로 생사해탈이라고 합니다. 자유롭다는 얘기입니다.

불교 공부를 제대로 하면, 또 인생 공부를 제대로 하면 생사로부터 해탈한다. 해 볼만 하지 않습니까? 그거 제대로 하면 진보로부터도 자유롭고 보수로부터도 자유롭고 여당으로부터도 자유롭고 야당으로부터도 자유롭고 전 정권으로부터도 자유롭고 현 정권으로부터도 자유롭고 남자로부터도 자유롭고 여성으로부터도 자유롭고 젊은이로부터도 자유롭고 어른으로부터도 자유롭고 노동자로부터도 자유롭고 자본가로부터도 자유롭고 전라도로부터도 자유롭고 경상도로 부터도 자유롭습니다. 그리고 우리모두가 서로 편안하게 만나고 대화하고 소통하고 함께 하는 게 가능해집니다.

삶이, 세상이 이래야 되지 않겠습니까? 삶이, 세상이 그렇게 되는 것이 가능할 때 희망이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랬을 때 우린 인간답다고 할 수 있단 말이죠. ‘그래,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그렇게 살아야지. 그렇게 살다 가야지.’하고 말입니다. 바로 이런 사실을 좀 더 꼼꼼하게 새겨봤으면 좋겠다 싶어서 복습을 하자고 했던 겁니다.

 

사람이 그대로 오롯한 붓다이네

한 가지만 더 하고 끝내겠습니다.


오늘은 ‘신기하고 신기하도다 어리석음에서 깨어나 보니 사람이 그대로 오롯한 붓다이네’ 이 이야기를 같이 해보면 어떨까 싶네요. 사람들은 본래 부처라는 말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가 봐요 우리 신도님들은 어떠세요. 잘 안 받아들여지지요? 왜 그럴까요? 그 이유가 뭘까요? 그것도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이 그랬다는데. 우리가 진정 부처님을 믿고 존경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가르침 때문이거든요.

지금은 옛날과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부처님 당시 2600년 전 그때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로 놓고 보더라도 30-50년 전후까지만 하더라도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가 죄 많은 인간이라는 생각을 갖고 살았어요. 거의 죄의식에 사로잡혀 산거죠. 부처님 당시에는 말할 것도 없고요 사실은 지금도 우리는 사실 크게 달라지진 않았습니다. 다만 그때는 캄캄했다면 지금은 약간 더 환해져서 어스름한 상태인 거죠.

전 정권도 빛나고 현정권도 빛나야 되는데 전정권도 악마고 현정권도 악마처럼 돼버린 거죠. 현정권 사람은 전정권을 악마라고 얘기하고 전정권 사람은 현정권을 악마로 하고. 아무도 빛날 수가 없어요. 거기서 이기면 빛날 것 같죠? 그야말로 그거는 무지와 착각의 소견인 거예요. 절대 빛나지 않습니다. 빛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경험 한두 번 해보는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빛난다고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부처님도 그런 줄 알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겪고 있는 죄의식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사로잡힌 채 살아서는 도대체 사는 것이 당당할 수도 없고 자유로울 수도 없고 평화로울 수도 없고 멋있을 수도 없고 아름다울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인간답게 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었던 거죠. 결국은 해답의 길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하지만 세속 현실에서 해결하려고 해봤지만 길이 없었습니다. 그 다음엔 저쪽에 가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해서 찾아간 곳이 출가수행, 종교의 길입니다. 종교의 길, 출가해서 육년 고행이라는 말로 표현되듯이 목숨을 걸고 노력을 했습니다. 선정, 정신 통일의 최정점까지 도달하여 신비한 체험도 하고 황홀한 경험도 했습니다. 그리고 극단적인 고행의 최정점까지도 갔습니다. 하지만 답을 못 찾았습니다. 답이 안 나오니까 당연히 버릴 수밖에 없죠. 그 동안 준비한 지도를 다 썼기 때문에 이제 지도가 없는 백지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 방식으로 해서 답을 찾습니다. 당신 방식으로 해서 답을 찾았고 나중에 설명할 때 당신 방식의 길을 중도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중도적으로 하니까 답이 나오더라. 그 답을 제대로 알고 보니 사람은 죄 많은 업보중생이 아니라 본래 부처더라는 얘깁니다. 몰랐을 땐 죄 많은 중생이었는데 내용을 제대로 알고 보니까 사람이 본래 부처더라. 노예가 아니고 주인이더라. 운명의 종이 아니고 창조주더라. 어떻습니까? 놀랍지 않습니까? 감격스럽지 않습니까? 감격스러운 그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바로 ‘신기하고 신기하도다 어리석음에서 깨어나보니 사람이 그대로 오롯한 붓다이네’입니다.


이것은 설명을 따로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기억을 상기시키기 위해서, 또 지난번 들었던 것과 연결시켜서 생각을 해보면 어떨까 싶은 마음으로 한 번 읽었습니다.

일단 제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정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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