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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법회[2022년 보현법회] - 획일성을 강요하는 미혹문명 넘어서기

바로 지금 여기에서 있는 그대로, 

소유가치가 아니라 존재가치로 살아가는

여유롭고 풍요롭고 자유로운 삶

 

안녕하세요.

자연현상도 그렇고, 인간이 만들어가는 우리 세상도 그렇고, 정신차리기가 어려운, 매우 불안하고 혼란스럽고 막막한 나날입니다. 어쩌면 사는 게 참 만만치 않구나, 하는 걸 이래저래 실감할 수밖에 없는 게 요즘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답답한 현실에서 길이보이고 숨통이 트이고 혼란스러움이 정리가 되게 하자고, 어두워서 답답한 것을 환하게 만들고, 무거워서 힘든 것을 홀가분하게 만들고, 그래서 삶을 좀 괜찮게 살아가는 실력을 기르자는 것! 이러한 것들이 불교의 존재이유이기도 하고, 절의 존재이유이기도 하고, 불교인들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우리가 법회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막상 갑갑함을 좀 시원하게 만들고, 무거움을 좀 홀가분하게 만들고 어둠을 환하게 만들기 위해서 법회를 하는 것인데, 뜻한 바와는 반대로 뭘 복잡하게 자꾸 보태고 있어요. 안 해도 괜찮은 것들, 계속 덧씌워지다보니까 불공이나 제사나 법회가 오히려 삶의 무게를 더 무겁게 만드는 현상들이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조금 전에 축원할 때 목탁이 시작과 끝, 그리고 대중이 다 같이 합송하자고 할 때는 필요하니까 치지만, 그 밖에는 목탁을 더 이상 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축원할 때는 그 내용을 잘 듣고, 깊이 새겨서 그 내용이 내 생각이 되고 말이 되고 그리고 행동과 삶이 되는데 도움되도록 해야 짐이 가벼워지는 법회, 어두움이 환해지는 법회, 혼란스러움이 명료해지는 법회가 되거든요. 그런데 옛날 했던 것이니까 옛날 식으로 목탁을 치면 그 내용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제대로 들을 수가 없으니까 깊이 새기는 것도 잘 안 되죠. 깊이 새겨지지 않으니까 우이독경, 즉 쇠 귀에 경 읽는 꼴이 되기 때문에 맨날 축원해봐야 소용이 없게 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이제 군더더기들을 깔끔하게 걷어내고 정리해야 합니다. 

 

그 중 하나가 목탁을 치지 않아도 될 일을 더 치게 만드는 것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청법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청법가를 통해서 이미 법을 청하는 의식을 잘 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청법가를 마치고 똑 목탁을 쳐서 법을 청하는 절을 하라고 합니다. 이런 게 짐을 더 늘게 만들고, 더 혼란스럽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는 겁니다. 오늘은 이렇게 잔소리로 법회를 시작하는 게 되었는데, 우리가 일상에서도 얼마나 짐을 더는 방식이 아니라 짐을 보태는 방식으로 살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되어 말씀드렸습니다.

 

 

요즘 사는 이야기 1. 

몸의 불편함을 통해 더 실감하게 되는 일상생활의 신비

 

요즘 까닭 없이 허리가 아파서 좀 불편했습니다. 

여기 나이 많으신 분들이 계신데, 제가 이런 말씀 드리기가 좀 뭐하지만, 어쨌든 늙어가니까 이것저것 불편하고 힘든 게 많습니다. 늙음 자체가 불편한 것이고 힘든 것이더라고요. 그러할 때 늙음 자체가 그런 것이구나 하고 잘 알고 기꺼이 내가 감내하면서 살 거야 하고 마음 먹으면 훨씬 편안해지는 반면, 왜 이렇게 힘든 거야, 왜 이렇게 아픈 거야 하고 긴장을 하면 삶이 편안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근심걱정이 늘어나게 되고 더 나아가 불만이 생기게 되고 누구를 탓하게 되고 그러는데, 사실은 무엇에 대한 불만, 누구에 대한 원망 - 이런 것이 다 삶의 짐, 삶의 혼란스러움인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누구를 탓함이 없는 삶, 원망이 없는 삶이야말로 사실은 편안한 삶이고, 홀가분한 삶이고, 괜찮은 삶인 거죠. 

 

그래서 사실을 잘 보고 잘 파악하고 잘 이해해서 이걸 기꺼이 잘 소화시키는 것이야말로 어두운 삶을 환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고, 무거운 삶을 홀가분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고, 혼란스러운 삶을 명료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근데 허리가 아파보니까, 다 아시는 얘기지만, 평소에 몰랐던 사실을 훨씬 강력하게 깨닫게 됩니다. 짐작이 되십니까?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게 되는 거죠. 건강이 어떤 신비보다도 가장 위대한 신비다, 건강이 어떤 기적보다도 가장 위대한 기적이다, 건강이 어떤 불가사의보다도 가장 위대한 불가사의다 - 이걸 실감하게 돼요. 어떻습니까? 공감이 됩니까? 

 

저는 이런 걸 제대로 아는 것을, 불교적으로는 깨달음이라고 얘기합니다. 이런 것을 제대로 알고 실제 일상의 삶에 그대로 실현되도록 그렇게 생각도 하고, 말도 하고, 행동도 하고, 일도 하고, 활동도 하고, 그런 걸 우리는 깨달음의 삶이다,라고 얘기하고 있다고 봅니다. 

 

건강이 가장 위대한 신비이고 기적이고 불가사의다,라고 하는 사실을 제대로 알고 일상생활 속에서 그런 것이 삶으로 적용되어지면 어떨 것 같습니까? 삶이 충만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우리들은 대부분 안타깝게도 소유가치를 중심으로 살기 때문에 내 삶이 궁핍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못났어! 죄가 많아! 업이 많아! 가진 게 없어! 배운 게 없어! 능력이 없어! 온통 다 이런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살고 있으므로 본의와는 다르게 삶이 불안하고 여유롭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제가 허리가 아파보니까 다시 한 번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삶의 얘기를 오늘은 해봐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요즘 사는 이야기 2.

절집 안의 초라한 살림살이에 서글픔을 느끼다

 

또 하나는 전북불교를 새롭게 디자인해보자고 해서 제17교구 일 때문에 전주를 왔다갔다 합니다. 최근에는 조계종단의 총무원장과 종회의원, 사회로 말하면 대통령과 국회의원인 거죠. 그러니까 조계종단의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를 치르는 상황이예요.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이게 바람직한지 여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선거를 치를 때마다 온갖 홍역을 치르면서 우리 스스로가 한심스럽게 되고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는 그런 현상들로 가게 되니까 그런 것들을 예방해보자라고 하는 취지에서 정치실력자들이 나름대로 의견을 잘 종합하고 조율해서 총무원장 선거는 하지 않고 합의추대하는 방식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우리 입장에서 보면 일단 편안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종회의원선거는 각 본사마다 따로 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17교구 불교계도 두 분의 종회의원을 선출해야 합니다. 

 

옛날에는 돌아가신 조실스님의 영향력이 커서 종회의원 공천도 조실스님의 뜻대로 했습니다. 근데 이제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 공천권이 문도운영위원회로 넘어갔습니다. 어쨌든 백년대계원탁회 대중공사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가 한 걸음 더 나가는 차원에서 운영위원회가 직접적으로 권한을 행사하지 말고, 오히려 합리적으로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사람들로 9인 정도의 추천위원회를 꾸려서 정리하도록 하자는 제안을 했고, 그 제안이 받아들여졌습니다. 결국 각 지역의 대표사찰 주지스님으로 9인 추천위원회를 꾸려갖고 정리하는 것으로 결의를 했습니다. 

 

후보는 네 분이 나와서 정견발표도 하는 검증과정을 거쳐 두분으로 좁혔는데, 떨어진 사람중에서 승복할 수 없다며, 선거를 해야 된다는 요구가 나왔습니다.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까 어떻게 결론이 날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정도에서 정리가 될지, 아니면 선거판으로 가게 될지. 약간 혼란스러운 상황입니다. 

 

저는 이 상황을 겪으면서 좀 서글픈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생살이가 어떻게 보면 별 것도 아닌데, 우리가 살면서 자주 경험하는 것 중에, 어른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하찮은 일인데 아이들은 목을 매잖아요. 그렇죠? 딱지 한 장 갖고 ‘죽네 사네’ 하잖아요. 인생을 좀 제대로 알고 인생을 좀더 수준 높게 관찰하고 모색하고… 그렇게 보면 우리가 목숨을 거는 문제들이 사실은 별것 아닌 경우들이 허다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기에 목을 매서 그야말로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 부끄러운, 정말 한심한, 정말 초라한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깨달음의 삶을 살아야 된다고 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점과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상황을 보면서 좀 서글픈 생각도 들고, 이제 내가 할 역할은 끝난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하여튼 제 근황은 좀 그렇습니다. 

 

획일성만 강요하는 미혹문명 넘어서서

다양성을 꽃피우는 깨달음의 문명으로

 

그동안 <하루를 여는 법석>을 교재로 해서 법문을 해보자고 했는데, 몇 차례 해보니까 대부분 같은 내용이에요. 대부분 같은 내용인데 표현하는 언어들이 좀 다를 분인 거예요. 그래서 제가 다시 정리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만든 자료가 세 가지 정도입니다. 하나는 <붓다로 살자 발원문>입니다. 저는 이거 한 가지면 불교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붓다로 살자 발원문>을 곱십고 곱십어서 내 생각이 되게 하고, 말이 되게 하고, 삶이 되게 만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봅니다. 아무 부족할 것 없습니다. 그래서 <붓다로 살자 발원문>과 오늘 우리가 합송한 <21세기 약사경>, 그리고 하루를 여는 법석에서 함께 읽는 <참회와 발원>을 기본 교재로 해서, 그때그때 얘기를 해가는 게 훨씬 더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21세기 약사경> 중에서 “획일성만 강요하는 미혹문명 넘어서서 다양성을 꽃피우는 깨달음의 문명으로” - 이 내용과 연결시켜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일상을 한번 같이 확인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혹시 살면서 내 얼굴하고 똑같은 사람을 보신 적 있으세요? 없지요? 그런 경우가 있을까요? 거울에서? 그건 그림자잖아요. 실상은 없죠. 막연하게 생각하면 있을 것 같은데 실상은 없어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각자 나의 색깔대로 사십니까? 아니면 누군가가 사는 방식으로 나도 살고 있습니까? 이건 무슨 굉장히 어려운 얘기하는 거 아닙니다. 잘 모르겠죠? 그게 정직한 답일 것 같아요. 실은 다 내 폼대로 사는 것 같지만 우리는 나도 모르게 획일화되어 살고 있는 게 너무 많습니다.

 

 

● 획일화를 불러오는 상대비교의 사고방식

 

우리는 획일화시키는 사고방식들이 대표적으로 어떤 게 있을 것 같습니까? 나도 모르게 무언가에 사로잡혀 전전긍긍하고, 온갖 상처를 받고, 분노를 일으키고, 원망을 합니다.  그렇게 되도록 만드는, 아주 본질적인 것이 바로 ‘상대비교’입니다. 우리는 거의 상대비교의 사고방식으로 획일화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세요? 상대비교 하지 않고 사십니까? 우리가 생대비교의 사고방식을 갖고 삶을 살아가는 한, 삶은 편안해질 수가 없습니다. 넉넉해질 수도 없고, 충만해질 수도 없고, 만족해질 수도 없습니다. 불행이 뭐죠? 불만족이 불행이죠. 행복은 뭘까요? 자기 삶에 대해 만족하는 게 행복이죠. 

 

상대적인 비교 때문에 내 것이 최고인줄 알았는데, 저 사람 것이 더 좋네 하는 식이면, 비교할 게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렇잖아요. 돈으로 비교, 학력으로 비교, 힘으로 비교, 키로 비교, 피부색깔로 비교, 밥으로 비교, 지식으로 비교, 모든 게 다 비교대상입니다. 어쨌든 상대비교로부터 벗어나기만 하면 삶은 확 달라지죠. 여기에 눈을 뜨도록 하는 것이 사실은 불교입니다. 그래서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 말홥니다. 실상을 알고 보면 상대비교할 것이 없습니다. 그물의 그물코처럼 이루어진 자신의 참모습대로 살면 될 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막무가내로 내 멋대로 살면 된다는 얘기하고는 다른 얘기입니다. 

 

 

● 소유가치로 획일화된 사고방식

 

그러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주로 뭘 갖고 비교를 하는지 살펴봅시다. 대표적인 한 가지가 소유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렇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누구와 비교해서 얼마를 가졌는지, 비교하면서 살고 있고, 그로 인해 삶이 엉망진창입니다. 우리가 자주 듣고 쓰는 말 가운데, 소유의 사고방식을 표현한 대표적인 말들이 몇 가지 있죠? 1등, 최고, 승리 그리고 부자… 부자 되는 건 좋은 거야, 부자 되면 행복해, 그래서 부자가 최고야. 1등이 최고야, 1등만이 희망이야. 죽기살기로 1등 해야 돼… 우리 사회에 만연해있는 이 말들은 우리가 얼마나 소유의 사고방식에 길들여져 있는지, 사고방식 자체가 얼마나 획일화되어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1등, 최고, 부자가 되기 위해 ‘더 많이 더 많이, 더 빨리 더 빨리, 더 쉽게 더 쉽게 등을 답이고 희망이라고 생각하며 삽니다. 그것을 얻게 되면 따라오는 결과도 더 재밌게, 더 맛있게, 더 멋있게, 더 편리하게, 더 예쁘게, 더 기분 좋게 등등의 사고방식으로 완전히 획일화되어 있지요. 이런 것들이 모두 소유의 사고방식입니다. 

 

 

● 소유의 사고방식이 가져오는 결과

 

그런데 이런 소유의 사고방식으로 보면 인생은 형편없는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자신감도 가질 수 없고, 자부심을 가질 수도 없고, 만족감을 가질 수도 없어요. 그런데도 우리는 ‘내 것 내 것’, ‘더 편한 것’, ‘더 쉬운 것’ 등을 갈구하고 있지요. 그러나 그렇게 하는 한은 더 편하게 하면 할수록 사실은 삶이 더 바빠지고, 더 혼란스러워지지요. 더 빨리하면 할수록 문제는 더 복잡해지고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매일매일 무수하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더 편리를 추구하는 것은 삶이 좀 편안하고 여유로워지길 바라는 것인데, 편리해질수록 결과는 어떻습니까. 더 바빠져요. 안 그렇던가요?

 

예를 들어 100년 전 같으면 금산사와 실상사는 아득히 먼 거리입니다. 그러니까 일상적으로 만나서 뭘 함께 하자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고, 불가능한 일이니 그런 얘기를 하지 않지요. 그런데 지금은 교통, 통신수단이 편리해지니까 실상사에서도 금산사 일을 함께 도모하는 일이 가능해졌습니다. 결과는 일이 더 많아졌고 바빠졌다는 것입니다. 

 

쉽게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면, 그냥 실상사에서 내 마음껏 편안하게 여유롭게 내 폼 대로 누릴 수 있게 되죠. 낮잠도 자고, 뒹굴기도 하고, 꽃구경도 하고, 냇가에 가서 발도 씻고, 저 먼 산에 구름도 쳐다보고… 얼마나 삶이 풍요롭습니까? 그 정도면 충만하다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새소리도 듣고, 매미소리도 듣고, 시원한 바람도 쐬고 쨍쨍한 가을 햇볕도 쬐고…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요즘은 금산사 왔다 갔다 하느라고 편안하게 매미소리 들을 여유도, 먼 산에 구름을 바라볼 여유도 없게 되었어요. 예전에 비해 오히려 삶은 팍팍해진 셈이죠.

 

이런 점들을 놓고 보면 대상이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심리적인 것이든, 신체적인 것이든, 소유의 사고방식, 상대비교, 더 좋은 것, 더 쉬운 것, 더 편한 것, 더 여유로운 것을 추구하는 방식으로는 기대하는 결과를 결코 충족할 수 없습니다. 편안하고 여유로운 삶, 풍요로운 삶, 만족한 삶을 살 수가 없다는 거죠. 그러한 사고방식으로는 종교적인 길을 가든, 세속적인 길을 가든, 다를 것이 없습니다. 대상이 정신이냐, 물질이냐, 마음이냐, 몸이냐 그런 차이가 있을 뿐이지 내용은 다를 게 없습니다. 

 

바로 이런 문제를 풀기 위해 반야심경에선 공(空), 공(空), 공(空), 하고 얘기하는 겁니다. “야, 그건 사람들 생각이지, 실제는 그렇지 않아.”라고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공’이라는 말이 무슨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믿을 뿐이지, 실제는 그렇지 않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공(空), 공(空), 공(空), “그건 네 생각일 뿐이야, 네 말일 뿐이야, 사람들 생각일 뿐이야, 사람들 말일 뿐이야,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 거기에 속으면 안 돼. 거기 사로잡히면 안 돼.”라고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처음부터 끝까지 그 얘기입니다.

 

자, 이제 한 번 봅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소유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럴까요? 우리가 누리고 있는 삶 중에 내 것으로 소유해서 누리는 것이 몇 가지나 될까요? 먼저 한 가지 짚고 가자면, 어떤 것이 내 것이라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진짜 내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 차원에서 저의 경우를 본다면, 신발이나 장삼 같은 것은 내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이 안경, 지팡이, 모자… 확인해봐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네요. 그러면 내가 사는 집은? 사실 실상사는 내 집이 아닙니다. 내가 쓰고 있을 뿐이지, 내 소유는 아닌 거예요. 그러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 즉 내 소유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다 모아보면 열 가지 정도밖에 안 돼요. 그러하니 내 것으로 소유해서 내 마음대로 해야만 그 삶이 좋고 행복한 것이라는 관점에서 저를 보면 너무나 궁핍하고 불행한 인간이겠지요. 그러나 정말 그럴까요?

 

 

● 존재의 사고방식으로 누리는 풍요로운 삶

 

제가 누리는 삶은 어떨까요? 저는 실상사를 잘 누리고 있습니다. 제 것은 아니지만 실상사의 풍경도, 문화재도 누리고, 지리산도 누리고, 저 멋있는 구름도 누리고, 바람소리도 누리고, 새 소리며 매미 소리도 누리고… 내 소유는 아니지만 ‘있는 것 그 자체’를 마음껏 누리고 있는데, 그 수는 헤아릴 수가 없어요. 소유가 아니고 누리는 것으로 보자면 이보다 부자가 없지요. 

 

우리나라 최고 부자가 누군가요? 제가 잘 모르니, 그냥 삼성 이재용 씨라고 칩시다. 사람들은 그가 대단히 많은 것을 소유했으니 마음껏 누리고 살 것이라고 얘기할 텐데, 정말 그럴까요? 소유한 것을 누리는 것과 내 소유는 아니지만 있는 것을 다 누리는 것을 비교한다면, 누구의 삶이 더 풍요로울 것 같습니까? 누구의 삶이 더 다양하겠습니까? 누구의 삶이 더 여유롭겠습니까?

 

우리가 ‘있는 것 그대로’를 누리는 실력만 있다면 누릴 것은 넘쳐납니다. 지금 실상사에서 천일결사를 하면서 ‘미혹문명 내려놓고 깨달음의 문명으로 가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것도 내용을 보면 바로 이런 실상에 눈을 뜨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데는 다른 능력이 필요 없습니다. 실제 우리가 얼마나 획일화되어 있는가를 정확하게 직시하면 됩니다. 

 

 

● 소유가치가 아니라 존재가치에 눈뜨기

 

그런데 문제는 길을 잃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모르니 길을 찾지도 않지요. 그 때문에 일상적으로 삶에서 경험하고 있는 내용을 가지고 우리가 찾을 길이 소유가치에 있지 않고 존재가치에 있음에 눈을 뜨자고 이렇게 반복하고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럼 다시 한 번 복습해볼까요? 

‘더 예뻐야 돼’, ‘더 키가 커야 돼’, ‘더 잘 생겨야 돼’, ‘더 지식이 많아야 돼’, ‘더 학벌이 좋아야 돼’ 등등. 모든 것에 다 적용됩니다. 그러나 용모든 지식이든 학벌이든 내 것으로 소유해야만 되고, 그래야만 삶이 행복해진다는 사고방식에 붙잡혀 사는 한, ‘업은 아기 삼 년 찾는 꼴’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어떻습니까? 업은 아이를 어떻게 찾을 수 있겠습니까? 하늘로 날아가면 찾을 수 있겠습니까? 바다로 깊숙이 헤엄쳐 들어가면 찾을 수 있겠습니까? 정신통일하는 신비한 경지로 가면 찾아지겠습니까? 천지개벽하는 짓을 다 한다고 해도 아기를 찾을 수 없습니다. 정신통일이네, 삼매네, 신비네, 신통이네, 하고 온갖 복잡한 얘기들을 하고 있는데, 그런 것들은 모두 부질없는 헛수고일 뿐입니다. 

 

그럼 업은 아이는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을까요? 불교에는 ‘조고각하(照顧脚下)’라는 말이 있습니다. ‘발밑을 잘 살펴보라’는 얘기죠. 뭘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지금 이 순간 너 자신을 잘 보라는 거죠. 업은 아기를 찾으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신을 잘 보면 내가 아기를 업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자신을 보면 바로 알게 됩니다. 

 

또 한 가지 방법이 있어요. 만나는 누군가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 못봤어요?”라고. 그러면 바로 “지금 당신이 업고 있잖아요.”하고 알려주겠죠. 굳이 설명을 보탠다면 ‘도반, 선지식에게 물어보라, 배우라“는 이야기인 거죠. 이러한 것을 수행이라고 합니다. 

 

그걸 반야심경에서는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라고 하지요. 조견(照見), 잘 관찰사유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 너 자신을 잘 관찰 사유해라. 그러면 뭐가 보인다? 자신이 제대로 보인다. 자신이 제대로 보이면 ‘어, 내가 아기를 업고 있네’를 깨닫는 거죠. 저기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아기 찾아 삼만리’ 했는데, 잘 살펴보니 또는 물어보니 ‘어, 이 아기를 내가 업고 있네’ 하면서 한바탕 웃게 되는 거죠. 그런 게 바로 깨달음입니다. 이제 더 이상 아기를 찾아다닐 이유가 없어졌지요. 자,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그 삶이 편안할까요, 안 편안할까요? 물어볼 것도 없이 즉각 편안하겠죠. 그 삶이 여유로울까요, 안 여유로울까요? 넉넉할까요, 안 넉넉할까요? 더 물어볼 것도 없지요. 

 

자유로움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요? 내 멋대로 놀고, 내 멋대로 뛰어다니면 삶이 자유로워질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순간순간 자유롭다고 착각할 뿐이죠. 자유는 스스로 자유로울 때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겁니다. 감옥 안에 있으니 자유롭지 못하고 감옥 바깥이라고 자유롭고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런 건 다 표층적인 생각들이에요. 실상을 보면 스스로 자유로운 사람은 감옥에서도 자유롭습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이 또한 아기 찾겠다고 삼만리를 쫓아다닌 사람이 자신이 아기를 업고 있다는 것을 알고 쓸데없이 헤매지 않고 편안해진 것과 마찬가지예요. 무슨 다른 능력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바로 자기 자신의 참모습을 아는 일입니다. 단지 무지와 착각을 벗어나면 됩니다. 어떻게? 아기 찾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를 잘 관찰사유하거나 도반이나 선지식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무엇을 더 가져야 문제가 해결된다는 소유의 사고방식으로 길을 찾는 것은 사막에서 신기루를 쫒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죽을 힘을 다해 달려가도 손에 잡히지 않는 것, 그것을 잡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합니다. 이 점을 빨리 분명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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