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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법회[2023년 1월 보현법회] - 이것이 불교다. 기쁜 소식 법문 "출가의 의미와 절의 존재이유를 돌아보다."

 <월간 불광>에서 2023년 신년호 특집으로 실상사를 다루었는데, 거기에 나온 실상사의 활동사진들과 기사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불교가 무엇인가, 절은 왜 있어야 하는가, 불교수행은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고맙고 기쁜 소식입니다. <월간 불광>에 나온 기사들이 인연이 된 이야기들로  오늘 이야기를 시작해보고 싶습니다. 

 

 # 출가, 법계평등의 진리를 위한 떠남

 

출가를 하면 기본적으로 배우는 교과서가 있는데, <초발심자경문>이라는 책입니다. 거기에 보면 출가에 대한 게 있는데, 출가라고 하는 것은 부모형제와의 혈연을 끊고 떠나는 것입니다. 부모 형제와 혈연을 끊는 것은 일반적인 상식으로 보면 도저히 이해하거나 용납할 수 없는 일이죠. 그런데도 기어이 출가하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초발심자경문에는 그런 질문에 답이 있습니다. 

"할애사친 법계평등(割愛辭親 法界平等) - 사랑하는 사람과 부모를 떠나온 까닭은, 우주법계의 진리가 평등한데, 그 진리가 일상의 삶으로 실현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출가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평등하게 인정받고 존중받고, 평등하게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공통적 바람입니다. 그런데 부모형제라는 혈연의 울타리에 갇혀 살다보면, 나와 내 식구, 우리 집안, 나아가 우리 종교, 우리 나라, 우리 민족이라는 관점에서 삶을 다루게 되기 때문에 모두 함께 평등하게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마음 아프고 죄송스러운 일이지만 우리 모두의 염원을 실현하기 위해 내 인생의 열정을 불사르겠다는 대장부의 마음으로 출가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법계평등의 정신을 세상에 구현하기 위해 개인의 입장을 포기하고 출가의 길로 나서는 그 정신은 출가자들이 항상 명심해야 될 부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엄정하게 보면 진짜 출가한 스님들은 자기중심적이거나 이기적으로 삶의 문제를 바라보고 다룰 권리가 없습니다. 오로지 평등의 정신이 구현되도록 하기 위해 자기 삶을 오롯하게 살아야 되는 의무만 있는 겁니다. 그 의무에 맞춰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탐진치도 저절로 떨어져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 부분은 불교공부와 수행을 하는 사람이라면 재가자의 입장에서도 깊이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리해보면, 진리는 평등한 것이고, 크게는 온 주주의 모든 존재들이, 좁히면 뭇생명들이, 더 좁히면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살 권리와 염원을 갖고 있는데, 이 권리와 염원이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대의를 위해 온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이 출가의 본래취지라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저는 이런저런 것을 알지도 못하고, 출가했습니다. 별 생각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는 어린 시절에 어머니의 안내에 따라 절에 들어왔으니까요. 그런데 절에 와서 배워보니 출가의 의미가 그런 것임을 알게 되었고, 이제는 어쨌든 죽으나 사나 거기에 맞춰서 마음 쓰고 살아가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 절, 법계평등의 진리가 실현되어야 할 중심현장

 

출가가 그런 의미라면 절은 어떤 곳인가. 

절은 바로 평등의 진리가 일상적으로 실현되어야 할 제일의 현장입니다. 다른 데는 온갖 차별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죽을 힘을 다해 평등의 정신을 구현해야 될 중심현장인 절에서만큼은 보편적 진리요 염원인 평등이 생활화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막상 해보면 그게 잘 안 돼요. 생각도 있고 바람도 있고 뜻도 있지만 막상 해보면 그게 잘 안 되는 거예요. 

 

만약 절에서 우리의 바람대로 평등한 삶이 실현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첫째는 절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격조가 달라지겠죠. 대단히 아름다운 삶, 멋있는 삶, 품위있는 삶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고 그런 절을 만들어냈을 경우, 우리를 관심있게 눈여겨 볼 사람이 누구일까요? 당연히 주변 마을의 이웃들이죠. 그러면 그 이웃들이 우리 모습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요? 다음으로 아름답고 멋있고 품위있는 삶을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은 또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요? 

 

당연히 “야, 좋다. 참 부럽다.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 거기다 더 보탠다면, “야, 우리 이웃에 저렇게 멋있게 사는 사람들이 있어서 참 좋고 고맙다. 저런 절이 있어서 참 좋고 고맙다” 이러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된다면 사람들이 저절로 절에 오지 않겠습니까. 절이 그런 곳이 되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번에 나온 불광에 사진이 멋지게 나왔는데, 우리 공양간에 가면 제일 먼저 마주치는 게 있습니다. 바로 원형식탁이죠. 왜 굳이 원형식탁을 만들었을까요? 그것은 평등의 정신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평등의 정신이 우리 절에서 생활화되도록 해보자고 해서 상징적으로 원형식탁을 만들었던 거죠. 

 

그 원형식탁이 만들어지고 나서 나타난 변화의 현상을 평등과 연결시켜서 생각해보면 무엇이 있을 것 같습니까. 출가와 재가, 남녀노소 누구나 다 평등하게 앉아서 함께 공양을 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었죠. 그리고 불광지와 인터뷰하면서 우스갯소리처럼 이렇게 되기까지 30년이 걸렸다고 이야기했는데, 그것을 그냥 써놨더라고요.(웃음) 

 

 

# “실상사를 통해 불교의 미래를 보았다”

 

아시다시피 제가 요즘 전북불교의 미래를 주제로 제17교구 금산사에 있는 불자들과 스님들을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회의도 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전북불교 백년대계본부의 원탁회의 활동에 대한 홍보를 담당하는 불자님이 있는데, 아주 확실한 불자이기도 하고 정말 괜찮은 젊은 친구입니다. 그런데 그 불자님이 <불광> 신년호에 실린 실상사 특집 기사를 읽고 모임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원탁회의의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하다 보니 홍보를 적극적으로 잘하지 못한 아쉬움이 컸다. 그런데 <불광>에 나온 원형식탁 사진과 기사를 딱 보는 순간, ‘아, 이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째는 전북불교 원탁회의를 통해서 구현하고자 하는 불교가 무엇인가를 잘 웅변해주었고, 둘째는 불교집안에 정말로 평등의 진리가 생활화 된다면 틀림없이 불교의 미래는 희망찰 것이고, 당연히 전북불교의 미래도 저절로 빛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불자님은 젊다 해도 40대 전후한 세대인데, 그 이야기를 통해 불교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진 젊은 불자들이 갖고 있는 바람과 기대가 무엇인가를 잘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실상사에서 하고 있는 일들이 바로 이런 내용들입니다. 사실 여러 가지 얘깃거리가 많지만, 한 마디로 요약하면 법계평등의 진리가 구현되는 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절을 우리가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이런저런 불사들을 하고 있다는 점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 불광지에 좋은 사진과 기사가 나온 김에 함께 이야기 나눠봤습니다.

 

 

# 해인삼매(海印三昧), 

  어떤 존재도 차별 없이 다 빛나는 법계평등의 상태

 

오늘은 최근의 기쁜 소식 몇 가지를 법문 대신으로 얘기하고 싶습니다.

불교의 공부와 수행의 가르침으로 강조되는 것 중 하나가 삼매, 선정입니다. 그리고 삼매 중의 삼매, 삼매의 왕, 최고의 삼매로 ‘해인삼매(海印三昧)’를 이야기합니다. 

 

<법성게(法性偈)>에 보면 ‘능인해인삼매중(能仁海印三昧中)’이라는 구절이 있지요. 해인(海印)은 바다에 찍힌 도장이라는 말입니다. 쉽게 예로 풀어보면, 바닷물이 아주 맑고 고요하고 물결 하나 없이 잔잔한 상태가 되면 온 우주 삼라만상이 도장을 찍은 것처럼 그 바다에 하나도 빠짐없이 환하게 비칩니다. 하나의 바다에 모든 것이 다 환하게 반영된다는 말입니다. 

 

보통 해인삼매는 높은 수행을 해야 들어갈 수 있는 불가사의한 경지라고 가르치고 배웁니다. 그리고 그런 삼매에 들어가기 위해 열심히 참선도 하고 기도도 하고 여러 가지 수행을 다 하는데, 실제로 현실에서는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런 경험이 없습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제 주변의 다른 스님들이랑 이야기를 해봐도 해인삼매가 자기 경지로 실현되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비슷한 얘기를 하는 경우가 어쩌다 있긴 한데 썩 신통스러워보이진 않았습니다.

 

우리가 어마어마하게 생각하는 깨달음도 마찬가지죠. ‘깨달음이 현실적으로 뭐지?’ 하고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면 이것도 사실은 명료하지가 않습니. 그러니까 “신비한 깨달음의 경지, 깊은 삼매의 경지에 도달하느 것이 중요하다고들 강조하는데, 실제는 잘 모르겠습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불교수행을 한다고 하는 많은 분들과 얘기를 해봐도 그렇고, 실제 내용들을 검토해봐도 애매모호하고 아리송합니다. 현실이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 나름대로 불조의 가르침들을 현실의 경험과 연결시켜 이것저것을 꿰맞춰 보는데, 제가 공부한 바로는 경전에서 얘기하는 삼매라고 하는 것이 수행해서 실현해야 할 어떤 경지라기보다는 우주의 실상 또는 생명의 실상 또는 나의 실상, 즉 존재의 실상을 정적으로 표현하는 말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니까 실상, 즉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에 대한 정적 표현의 여러 가지 모습을 말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실상, 즉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는 말을 합니다. 그래서 심행처멸 언어도단(心行處滅 言語道斷)이라고 합니다. 

 

제 나름대로 정리해본 바로는, 해인삼매는 존재의 실상, 생명의 참모습, 또는 나의 참모습, 우주의 참모습을 정적으로 표현한 개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동적인 표현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법성게의 ‘법성원융(法性圓融)’이란 개념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이건 정말로 어마어마한 논란거리입니다. 이런 걸 갖고 얘기해보자고 하는 사람들이 없어서 그렇지 말하자면 어마어마한 문제입니다. 따라서 나는 언제든지 이런 것들을 갖고 깊고 투철하게 해봤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이야기를 내놓는 것입니다.

 

제가 얼마 전 보름 무렵에 잠을 자다가 한 열두 시쯤에 깼습니다. 정말 달 밝은 밤이었습니다. 몸이 무겁고 힘든 느낌이었으면 그냥 드러누워서 다시 잤을 텐데, 그런 대로 몸 상태가 괜찮아서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어슬렁어슬렁 도량을 배회하다가 목탑지에 올라가서 또 어슬렁어슬렁 배회를 했습니다. 하늘도 보고, 동서남북도 보고, 마을 쪽도 바라보고, 발바닥 아래 목탑지도 보고… 이렇게 두루두루 보다가 ‘아, 지금 이 순간의 실상을 경전에서는 해인삼매라고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상은 우주의 실상, 생명의 실상, 존재의 실상 등 여러 가지 말로 할 수 있습니다. 그 판에서 나로 좁히면 나의 실상이고, 그 판 전체로 보면 우주의 실상인 거죠. 그 판을 틀어서 생명을 중심으로 놓으면 생명의 실상으로 표현될 수도 있고, 그런 식으로 나아가보면 큰 것의 실상, 작은 것의 실상, 이것의 실상, 저것의 실상, 너의 실상, 나의 실상, 하늘의 실상, 땅의 실상, 동쪽의 실상, 남쪽의 실상, 북쪽의 실상, 마을의 실상 등으로도 표현할 수 있겠죠. 

 

우리가 ‘미혹의 문명을 넘어 깨달음의 문명으로’라는 주제로 천일결사 천일기도를 해왔는데, 깨달음의 문명을 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설명하고 있어요? ‘깨달음 문명이 빛난다, 빛난다, 빛난다’ 이렇게 돼 있잖아요. ‘너도 빛난다 나도 빛난다’, ‘남자도 빛난다 여자도 빛난다’, ‘늙음도 빛난다 젊음도 빛난다’, ‘삶도 빛난다 죽음도 빛난다’ 등등. 그러니까 깨달음의 문명이라는 것은 평등의 진리가 온전하게 구현된 상태입니다. 그 안에서는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차별 없이 다 빛나는 것입니다.

 

집집마다 불이 밝혀져 있는 마을도 너무 아름답고, 하늘을 봐도 좋고 땅을 봐도 좋고 왼쪽을 봐도 좋고 오른쪽을 봐도 좋고 나를 봐도 좋고 목탑지에 주춧돌을 봐도 좋고…  그야말로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고 다 좋은 이것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아, 이것이 세계의 실상이구나, 나의 실상이구나, 생명의 실상이구나, 존재의 실상이구나… 그 순간 이런 이해와 공감과 확신이 들었는데, 그것이 어찌 내가 포착한 그 순간만 그렇겠어요. 내가 포착을 못했을 뿐이지 사실은 세상의 실상이 늘 그러고 있죠. 곳곳에서 밤낮없이 사실은 다 그렇게 빛나고 있다는 말이지요.

 

어떻습니까. 일상 속에서 늘상 이렇게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포착하고, 그 포착한 것이 내 삶이 된다면 그 삶이 어떤 삶이겠습니까? 좋은 삶일까요, 안 좋은 삶일까요? 멋있는 삶일까요, 멋없는 삶일까요? 무한히 충만하지 않겠습니까?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무엇이 아쉽겠습니까. 이렇게 충만하고 충분한데도 가서 부처님한테 나 좀 봐달라고 빌래요? 이렇게 충만한데 뭘 더 보태고 싶으신가요? 

 

사실은 내가 포착을 못하고 있을 뿐이지 실제로 우리 모두는 해인삼매 속에서 깨기도 하고, 자기도 하고, 밥을 먹기도 하고, 가기도 하고, 오기도 하고… 해인삼매 속에서 살고 있는 거예요. 해인삼매가 정적 표현이라면 동적 표현으로는 법성원융이 아닐까 싶네요. 잘 살펴봐야 할 것은 다만 내가 그것을 잘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일상에서 해인삼매의 삶, 법성원융의 삶이 펼쳐지고 있음을 잘 포착해서 ‘아, 그렇구나’ 하는 것을 불교적 언어로 바꾸면 무슨 말일 것 같습니까? 전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얘기합니다. 그것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을 모르면 어떻게 되는가. 소에 타고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내 소 어디 갔지?’ 하며 소를 찾는 꼴이 되는 거죠. 스스로 소에 타고 있는 줄 모르면 소를 찾아 헤맬 수밖에 없는 건데, 소에 탄줄 알기만 하면 판이 달라지는 거잖아요. 자기 마음대로 소를 부리고 살면 되니까 놀고 싶으면 놀고, 일하고 싶으면 일하고.

 

조간의 소식을 임제선사는 ‘수처작주입처개진(隨處作主立處皆眞)’이라고 했습니다. ”소 탄줄 알고 주체적으로 삶을 살면 그 삶은 멋진 삶이다, 무엇을 하든 그 삶은 자유로운 삶이다, 당당한 삶이다.“ 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 불교, 부처님이 전해주신 기쁜 소식

 

우리가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내용 때문입니다. 무엇인가를 쌓아 모아서 부족했던 것이 채워진다거나, 시원치 않았던 것이 좋아진다거나 하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인 것입니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실상을 제대로 포착하고 제대로 알고, 제대로 안 것을 일상화시켜내기만 하면 그것으로서 충분하다. 당당하게 살고 싶은가. 충분히 당당한 삶이 된다. 충만한 삶을 살고 싶은가. 충분히 충만한 삶이 된다.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은가. 충분히 자유로운 삶이 된다. 평화로운 삶을 살고 싶은가. 충분히 평화로운 삶이 된다. 실상을 제대로 포착하고, 제대로 알고, 제대로 안 것을 일상화시켜내기만 하면! 단, 헐벗고 굶주리고 거리에 나앉지 않을 만큼의 기본조건을 전제로.’ 

 

이번 <겨울 배움의 숲>에서 중론을 공부했는데, 중론에서는 맨날 공(空),공,공,공 이야기를 합니다. 중론식으로 이야기하면 위와 같은 삶이야말로 그 공이 삶으로 형상화되어진 모습인 것입니다. 그 공의 사유방식을 형상화시킨 그림이 무엇인지 아세요? 바로 이 생명평화무늬입니다.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지점 때문입니다. 이런 부분을 우리가 좀더 상식적으로 이해되고 잘 활용될 수 있도록 잘 짚어서 정리하면 우리 자신이 불교를 통해서 정말로 괜찮은 사람이 되고, 또 사람들이 부러워서 “야, 저거 참 좋다.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얘기를 제 방식으로 설명해 봤습니다.

 

들어보니까 어떠세요? 여전히 아리송하죠? ‘뭔가 좋은 것 같긴 한데, 그래서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저도 늘 그래왔으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더 찬찬하게 생각해보고, 또 엄밀하게 새겨보면 그 과정에서 아리송했던 것들이 좀 더 선명해지고, 고개를 갸우뚱했던 것들이 나도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리게 됩니다. 전 우리가 그렇게 성장해 간다고 봅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면, 우리가 뭘 더 가져야 멋있어지는 게 아니라 이미 다 멋있는 존재들이고, 뭘 쌓아모아야 풍요로워지는 게 아니라 이미 다 풍요로운 존재들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그 사실을 제대로 알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법회를 하는 것도 기도를 하는 것도, 참선을 하는 것도, 명상을 하는 것도, 다 따지고 보면 이것을 알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부처님은 정말 대단히 괜찮은 분이고, 탁월한 분이고 매력적인 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이런 것을 다 알고 우리한테 가르쳐주었으니까요. 너무나 고마운 분입니다. 우리가 부처님으로부터 이런 좋은 선물을 받았으면 자기도 잘 쓰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잘 전해줘야 되겠죠.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잘 전해주려면 그것이 그냥 공짜로 되나요? 안 돼요. 굉장히 노력을 많은 노력을 해야 되죠. 만일 우리가 노력을 해서 그런 것이 이루어진다면, 정말로 한바탕 뛰어들어서 열정을 불살라 볼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지 않습니까. 스스로를 위해서도 그렇고 세상을 위해서도 그렇고. 그러니 ‘그래, 맞아. 그렇다면 우리 한 번 해보자’ 하고 말이죠.

 

얘기를 하노라니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예를 하나 더 말씀드리고 다음 얘기로 넘어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번개 치는 건 많이 경험하죠? 

예를 들어봅시다. 캄캄한 밤중에 우리가 이 방 안에 있습니다. 캄캄하니까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무엇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번쩍~하고 번개가 쳤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이 방에 있는 게 다 보이죠. 그런데 금방 다시 어떻게 돼요? 바로 다시 캄캄합니다. 그렇죠. 그런데 번개가 번쩍~ 하기 전에 캄캄한 것과 번개가 번쩍~ 친 다음에 캄캄한 것이 같을까요, 다를까요? 

(대중 : 달라요)

 

번쩍하는 순간에 한 경험, 그것이 어떻습니까. 별것일까요, 별것이 아닐까요?

그 경험은 사실 굉장한 겁니다. 번쩍한 경험이 없으면 계속 캄캄한 어둠 속에서 자기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찾아 전전긍긍하게 됩니다. 그야말로 엎치락뒤치락의 삶이 되죠. 어떻게 해볼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보려고 들면 끝없이 부딪치고 깨지고 엎어지고 뒤집어지는 상황이 되지요. 그런데 번개가 번쩍 치면 순간적으로 여기에 사람이 있는 것도 보이고 카메라가 있는 것도 보이고,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것저것이 다 보이죠. 그러니까 번개가 번쩍~ 하고 난 다음에 다시 어두워져도 상황에 대한 앎이 있기 때문에 뭘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판단이 가능합니다. 필요한 것, 좋은 것이 다 있기 때문에 두리번 거리며 찾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오로지 불을 밝히는 작업만 하면 됩니다. 지금 경전공부를 하거나 법문을 듣는 것도 어쩌면 번개가 번쩍 치는 경험, 또는 그런 실력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봅니다. 중론을 공부하는 것도 마찬가지이고요. 

 

번개가 번쩍하는 순간 이전과 이후는 확실히 다릅니다.

그런 것을 초기 선종어록에서 “깨달은 다음에 하는 것이 불교수행이지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하는 수행은 불교수행이 아니다”라고 얘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번쩍 치기 전 캄캄한 상태에서 가는 것과 번쩍 친 다음 캄캄한 상태에서 가는 것은 하늘과 땅처럼 질적으로 다르다고 봅니다.

화엄경이나 여러 선사들은 이런 내용들을 ‘본래부처’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본래부처니까 망설임 없이 바로 본래부처로 살자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사람들은 무언가 황홀하고 통쾌하고 짜릿한 체험에 대한 환상을 쫓는 경우들이 많은데, 말 그대로 허망하기 그지 없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히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상식적으로 이해되고 공감되고 그 이해와 공감이 끊임없이 깊어지도록 하는 것이 더 건전하고 안전하고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불교수행에 대한 초월적이고 신비한 것에 대한 환상을 내려놓고 인간적으로 상식적으로 진지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데, 마음을 모았으면 합니다. 

 

 

# 기쁜소식 :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기

 

그 다음 기쁜 소식은 드러내어 이야기하는 것이 조금은 조심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어디나 할 것 없이 함께 살다 보면 싸움도 생기고 상처도 생깁니다. 그리고 상처가 생겨서 떠나는 사람들도 있지요. 실상사에서 같이 살다가 갈등 때문에 마을에 가서 사는 사람도 있고, 마을에서 살다가 상처가 생겨서 멀리 다른 지역으로 떠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멀리 떠났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물론 이 지역으로 다시 와서 살겠다는 것은 아니고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자신이 가진 상처를 정면으로 마주서서 풀고 정리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겁니다. 정상적으로 살아갈 때는 편안하게 절에도 오고 절 사람들도 만나고, 마을에 같이 살면서 마을 사람들도 만났는데, 상처가 생기니까 ‘차라리 안 보는 게 낫겠어’ 하고 떠나는 식으로 문제를 다루었다는 거죠. 

 

그런데 그렇게 문제를 다루었는데, 별로 안 좋더랍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상처가 있지만, 피하기보다는 용기를 내어 정면으로 마주하여 풀어내고 회복해가야 되겠다는 결심을 했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평소처럼 산내와 실상사에 오고 가면서 만나기도 하고 모임에도 참여하면서 정리하려고 결단을 했다는 내용입니다. 

참 반갑고 기쁜 소식이죠? 한 개인의 문제이긴 하지만 스스로의 삶을 주체적이고 용감한 결단으로 풀어내고 만들어갈 수 있다면, 이건 정말 좋은 일이기도 하고, 참 훌륭한 일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얘기를 해봤습니다. 

 

 

# 기쁜소식 : 여기저기 만일결사

 

실상사에서는 지금 천일결사를 넘어서 만일결사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결사 이야기를 하는 게 우리만이 아니더라고요. 이것은 무슨 현상일까요? 보통은 만일결사 이야기하면 다 미쳤다고 얘기하거든요. 30여 년 세월을 기도한다니까 사람들이 그러지 않겠어요? 지금 정토회에서 만일결사를 회향했는데, 그걸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내용을 보면 법륜스님 혼자 시작해서 지금까지 키우고 또 키우면서 오늘의 결과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우리가 <세월호 지리산 천일기도>를 한다고 할 적에도 많은 사람들이 ‘무슨 천일’이냐고 그랬어요. 나중에 얘기 들어보니 세월호 유족들도 서너 달쯤이면 왠만한 건 다 정리가 될 줄 알았다고 해요. 그런데 천일이 뭡니까. 세월호 참사 이후 10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아직 제대로 해결이 안 되고 있죠. 

 

그런데 최근에 만난 한 분이 만일기도를 하겠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왜 하려고 하느냐”고 물었더니, “기독교도 아니고 불교도 아니고, 누가 보더라도 ‘그래, 종교는 저런 거야’라고 하는, 진짜 종교다운 수도회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겁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 물었더니, “답이 안 보인다”는 겁니다. 그동안 진보다, 개혁이다, 온갖 얘기를 하고 활동도 했고, 최근에는 생명평화운동이다, 뭐다 하면서 여러 가지를 해봤는데, 세상은 더 어려워지고 길이 안 보인다는 거예요. 시작은 자기 혼자서부터 한다고 합니다. 물론 그렇게 하면서 이런 모색도 하고 저런 모색도 하고, 이런 사람도 만나고 저런 사람도 만나고, 연대해가겠죠.  

 

부처님도 선정주의 수행으로 비상비비상처선정에도 올라가보고, 고행주의 수행으로 별의별 고행을 다 해봤는데, 안 되니까 백지상태에서 이제 내 길을 만들어보겠다고 하며 자기 길을 나섰지요. 부처님이 그랬던 것처럼 용기있는 도전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전 이것도 정말 놀라운 소식, 반가운 소식, 기쁜 소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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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제 근황 중에서 상당히 의미 있고, 기쁜 소식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몇 가지 말씀을 드리는 것으로 법회시간이 다 갔네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전 이런 게 불교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삶을 질적으로 변화시키고 향상시켜서 좀 더 완성도 있게, 좀 더 거룩한 삶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또 절도 그런 절이 될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도 그런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렇게 하는 것이 불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뜻에서 이런 기쁜 소식들을 법문이라고 해도 충분히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동의하십니까.

 (대중 : 네에~~~)

(웃음) 법문이라고 인정해주신다니,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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