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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거법문[불기 2567년(2023년) 동안거 해제 법문] - 정의[연기의 진리]가 빛나면 어떻게 평화가 빛나는가

정의[연기의 진리]가 빛나면, 어떻게 평화가 빛나는가

- 정의[연기의 진리]는 수행자의 살림살이 -



안녕하세요. 

동안거를 마치고 해제의식을 함께 하는 자리입니다. 전통적인 질서 속에 안거제도가 있는데, 이미 만들어진 틀에 맞추어서 살다보면 우리도 모르게 형식에 빠져서 지내는 경우도 생기곤 합니다.

 

우리 역사에서 지금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마지막 전통으로 대표되는 게 선종불교인데, 선사스님들은 생사대사 그 현장 어디에 해제가 있고 결제가 있느냐고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생사대사라는 적과 마주해서 그 적을 무찌르고 그 적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감옥으로부터 해탈하고자 하는 자유자재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니만큼 결제니 해제니 하는 형식에 구애받지 말고 언제 어디서나 매 순간 순간 용맹정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된다고 경책하신 것입니다.

 

우리 살림살이도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결제와 해제라는 안거의 격식을 지키는 동시에 생사대사를 화두로 삼아 결제는 결제대로 산철은 산철대로 매순간 용맹정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떻든 오늘이 해제날이니 저는 또 저 나름대로 해제날에 무슨 이야기를 나누면 좋을까 궁리를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제가 요즘 초기불교, 대승불교, 선종불교,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가 말로만 보면 표현이 다르지만 뜻으로 보면 같은 내용이라는 사실을 더 많이 파악하게 되었는데, 그 이야기를 한 번 나눠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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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동안거 결제를 하면서 사부대중이 함께 붙잡고 갈 화두로 “정의도 빛나고 평화도 빛나라”를 정하고, 동안거 동안 그 내용을 잘 탐구하여 ‘정의도 빛나고 화도 빛나는’ 살림살이가 되도록 하자는 원을 세웠습니다.

 

물론 백장선원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안거를 하고 있고, 각자가 붙잡고 있는 화두가 있기 때문에 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어쨌든 사부대중공동체란 이름으로 길을 찾고 있는 실상사 사부대중은 ‘정의도 빛나고 평화도 빛나라’는 말을 화두로 정했습니다. 그런데 동안거 기간 동안, 법회에서 제가 이 주제를 잠깐 언급했을 뿐 사부대중이 함께 이 주제를 화두로 붙잡고 탐구하지는 못해서 아쉽습니다.

 

 

초기경전 《이띠웃따까》에서 보는

출가수행자의 일상생활

 

우리가 실상산중을 어떻게 사부대중공동체 도량으로 잘 가꿔볼까 모색을 많이 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고민거리가 ‘어떻게 출가비구승가의 위상을 잘 세워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면한 여러 가지 과제 중에서도 가장 큰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갖고 나온 이 책은 각묵스님이 번역한 <이띠웃따까>란 초기불전인데, 출가수행자들의 삶과 관련해서 이 책에 생각해볼 수 있는 내용이 있어서 들고 나왔습니다. 먼저 그 내용을 읽어드리고 말씀을 좀 보태보겠습니다.

 

“비구들이여, 네 가지 값나가지 않고 쉽게 얻을 수 있고 허물이 없는 것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비구들이여, 의복 중에서는 분소의가 값 나가지 않고 쉽게 얻을 수 있고 허물이 없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음식 중에서는 탁발로 얻은 한 덩이의 음식이 값 나가지 않고 쉽게 얻을 수 있고 허물이 없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거처 중에서는 나무 아래의 거처가 값 나가지 않고 쉽게 얻을 수 있고 허물이 없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약 중에서는 썩은 오줌으로 만든 약이  값나가지 않고 쉽게 얻을 수 있고 허물이 없는 것이다.“

 

여기서 분소의(糞掃依)는 버려진 헝겊으로 만든 옷입니다. 화장터에서 시체를 태울 때 남은 천 쪼가리나 똥 닦고 버린 헝겊 등을 주워 모아 기워 만든 옷이지요. 그러니 값나가지 않고 쉽게 얻을 수 있고 허물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분소의((糞掃依), 이것이 부처님이 이야기하신 출가비구가 취해야 될 의생활의 기본입니다. 두 번째는 걸식(乞食), 탁발음식을 기본으로 삼는 식생활이고, 세 번째는 주거생활로 나무 밑을 거처로 삼는 것[수하좌(樹下坐)]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건강을 관리하기 위한 약입니다. 여기서는 오줌을 발효시켜서 만든 약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민간요법 또는 대체의학요법이겠죠. 

 

지금 우리들의 의식주 생활과 비교해보면 어떻습니까. 이렇게 산다는 게 상상이 잘 안 되죠? 어쨌든 이것이 2600년 전 부처님 당시에 출가수행자들이 영위할 생활에 대해 제시된 네 가지 기본방침입니다. 분소의(糞掃衣), 걸식(乞食), 수하좌(樹下坐), 진기약(陳棄藥) - 이것들을 출가수행자들이 의지할 네 가지 것이라고 하여 비구사의법(比丘四依法)이라고도 합니다. 

 

어쩌면 이 네 가지 법에 의지해서 살았을 때 진실로 청정비구라는 표현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더 읽어보겠습니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네 가지 값 나가지 않고 쉽게 얻을 수 있고 허물이 없는 것이 있다. 비구들이여, 비구가 값나가지 않고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할 때 이것은 또 하나의 사문생활(사문됨)의 구성요소라고 나는 말한다.”

 

그리고, 다시 게송(偈頌)으로 정리해 놓았습니다.

 

허물이 없고 값나가지 않고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하는 자

거처와 의복과 음식에 대해 마음이 편안하고

[가야 할] 방향에 구애받지 않노라.


이렇게 [수행하는] 그의 법들은

사문 생활에 적합하다 일컬어지나니

값나가지 않는 것으로 만족하는 그 비구에게

이것은 참으로 뛰어난 것이로다.

 

주목할 것은 ‘만족하는 삶’

출가수행자의 삶이 어떤 것인지 간단하지만 잘 드러나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중요하게 주목해야 될 부분은 ‘만족’이라는 말이라고 봅니다. 출가 수행자에게 주어지는 의식주 생활의 조건은 너무 열악하고 형편없는데, 그 조건에 대해 만족해야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만족하면 그것이야말로  뛰어난 것이라고 합니다. 요즘 말로는 괜찮은 삶, 아름다운 삶, 거룩한 삶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또 다른 경전에서는 이런 삶을 소욕지족(少欲知足), 즉 욕심은 적게 하고 주어진 조건에 기꺼이 만족하며 사는 것으로 표현하고, 우리 실상사 사부대중공동체에서는 ‘단순소박한 삶’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주어진 조건에 만족할 줄 아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여러 곳에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표현된 말은 다르지만 뜻은 한 듯임을 잘 이해하면 세계의 다양한 불교인들이 함께 공부하고 수행하고 신행활동을 해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출가비구가 의지해야 할 네 가지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해봤습니다.

 

 

《금강경》에서 본 부처님 일상생활

 

다음으로는 대승경전 가운데 《금강경》을 한 번 보겠습니다. 

금강경의 첫 장, ‘법회의 인연’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부처님께서 천 이백 오십 명의 비구와 함께 기수급고독원에 계셨을 때라고 소개한 뒤 바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부처님이 공양 때가 되어서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 사위성에 들어가 걸식을 하고, 다시 처소로 돌아와서 공양을 하신 뒤, 가사와 발우를 잘 정리하고, 발을 씻고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이것은 부처님의 하루 일상생활 속에 있는 평범한 한 장면입니다. 매일 반복되는 삶의 장면이죠. 특별한 어떤 것이 아니라 너무나 평범한 일상의 한 장면을 표현한 것인데 바로 이어서 제자 수보리가 대중 가운데서 일어나 부처님을 찬탄합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세존이시여!

희유합니다. 위대합니다. 거룩합니다. 

 

수보리는 왜 그렇게 찬탄을 했을까요? 

 

불교에서 또는 불교인들이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이 있는데, 바로 깨달음, 부처, 열반, 해탈, 신통, 삼매입니다. 수보리는 매일매일 반복되는 평범한 일상 안에 부처도 있고, 깨달음도 있고, 삼매도 있고, 신통도 있고, 해탈도 있고, 열반도 있음을 직접 보았기 때문에 찬탄하고 또 찬탄한 것입니다.

 

수보리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후대의 금강경 주석서에서도 ‘이 장면 하나로 부처님의 법문이 다 끝났다’고 합니다. 일상생활의 평범한 행동으로 ‘해야 할 법문을 다 했다’는 것입니다. 깨달음, 삼매, 해탈, 열반 등 불교에서 강조되는 최고의 가치들이 이 한 장면에 다 있다고 합니다.

 

아까 읽었던 초기경전의 내용도, 금강경에서 말하고 있는 부처님의 삶도 평범한 일상생활을 말하고 있습니다. 평범한 생활이 그런 내용으로 채워졌을 때, 불교에서 강조하는 최고의 가치들이 그 안에서 다 실현되기도 하고, 외형적으로는 거룩하고 빛나게 드러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초기 선종어록 《신심명》, 

지극한 진리는 어렵지 않나니-

 

그러면 선종불교에서의 표현에는 어떤 게 있을까요? 초기 선종어록 가운데 아주 높이 평가된 대표적인 책 가운데 하나가 《신심명》입니다. 신심명 첫 구절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지극한 진리는 어렵지 않다. 

오직 분리시켜서 취사선택하는 것을 꺼려할 뿐이다. 

 

다만 취사선택해서 내 마음에 든다느니 안 든다느니, 좋다느니 싫다느니 하는 쓸데없는 분별망상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바로 그 순간 그 자리가 해탈 열반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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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살펴본 바와 같이, 초기경전 《이띠웃따까》에서도, 대승경전의 대표경전인 《금강경》에서도, 선어록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신심명》에서도 평범한 일상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결국 일상의 삶을 떠나서는 깨달음도, 해탈도, 열반도, 기적도, 신비도, 불가사의도, 거룩함도 없다는 것입니다. 일상을 어떻게 사는가가 핵심이지 일상을 벗어나서는 그 어디에도 진정한 부처, 개달음, 삼매, 해탈, 열반, 신통, 신비, 기적, 불가사의 등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다 망상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 실상사 사부대중공동체 

“정의도 빛나고 평화도 빛나라”

 

이제 현대로 왔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앞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동안거 동안 ‘정의도 빛나고 평화도 빛나라’를 화두로 탐구하며 살자고 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초기불교, 대승불교, 선불교에서 표현된 말들도 서로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실상사에서 동안거 화두로 제시한 이 문장은 이전의 말씀들과 완전히 다른 말로 들리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내용은 어떨까요? 아까 말씀드린 대로 말은 다르지만 내용은 하나로 관통되고 있다는 것, 그게 제가 오늘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자, 그러면 ‘정의도 빛나고 평화도 빛나라’라는 화두를 우리에게 익숙한 불교적 언어로 연결시켜보면 어떤 내용이 될까요?

일반적으로는 ‘정의’라고 하면 불의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보통은 정의의 신념으로 불의의 세력을 무찌르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정의’는 불의에 대한 상대적 개념으로서의 정의가 아닙니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정의의 개념을 잘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전에 써왔던 대로, 보통 생각하는 대로 뒤섞어서 쓰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은 불의와 상대된 개념으로 정의를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고 하는 싸움판이 되거든요.

 

화엄학림 학장을 했던 재연스님과 ‘정의’라는 개념을 갖고 이야기를 나눴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재연스님은 ‘정의’라고 번역된 글을 보더니 자신이 그 내용을 번역한다면, 법(法)이라고 번역하고 싶고, 법(法)을 또 우리말로 푼다면 진리라는 말로 풀고 싶다고 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정의[正義]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바른 이치, 참된 진리로 되어 있습니다.

 

정의의 뜻을 ‘진리’, ‘바른 이치’로 풀면 어떻게 될까요?

불교에서는 진리를 연기법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보면 정의는 연기법 또는 연기의 진리가 됩니다. 그러하니 ‘정의도 빛나고 평화도 빛나라’는 ‘연기의 진리도 빛나고 평화도 빛나라’라고 바꾸어도 무방할 터입니다.

 

어쨌든 정의라는 말의 쓰임이 각자 다르기 때문에 이야기를 좀 덧붙여 봤습니다.

 

그런데 정의라는 말을 이렇게 풀고 보면, 우리가 갖고 있는 일반적인 생각처럼 정의는 불의의 세력을 상대로 하는 어떤 신념체계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식의 사고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얘기인 거죠.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사고방식으로는 영원히 평화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천지개벽을 해도 평화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끝없는 악순환일 뿐이죠.

 

그 끝없는 악순환, 해결할 수 없는 영원한 모순을, 우리는 창과 방패의 싸움이라고 얘기합니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사고방식으로는 말은 평화를 희망한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싸움판이 거듭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역사경험이 잘 웅변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의, 즉 연기의 진리가 빛나면 정말로 평화가 빛날 수 있을까” 하는 것에 관해 우리가 조금 더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적어도 불교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연기의 진리가 빛나면 평화도 빛나게 된다. 연기의 진리에 맞춰서 행위 하면 평화가 실현된다고.

 

해탈, 열반, 무애자재, 또는 통연명백(洞然明白) 등은 우리가 불교공부와 수행을 잘했을 때 이루어지는 결과로서 표현되는 말들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 형태의 말로 표현할 수 있지만, 너나없이 생활 속에서 가장 가깝게 함께 할 내용으로 개념화하면 평화라는 말일 것 같습니다. 불교공부와 수행을 잘 하면 당연히 살아서도 평화롭고 죽어서도 평화롭다, 여기서도 평화롭고 저기서도 평화롭다는 얘기지요. 바꾸어 말하면 삶이 평화롭게 가꾸어졌을 때 사실은 불교공부와 수행을 제대로 했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겠지요.

 

앞에서 봤던 초기불교의 <이띠웃따까>, 대승불교의 <금강경>, 선종불교 선어록 <신심명> 에서 하는 이야기도, 그리고 지금 현대불교로 이야기한 ‘정의도 빛나고 평화도 빛나라’라는 화두도, 다 같은 내용으로, 하나의 불교로 관통되고 있는 것입니다. 

 

 

정의[연기의 진리]가 빛나면, 

어떻게 평화가 빛나는가

 

‘정의(연기의 진리)도 빛나고 평화도 빛나라’ 라는 말을 조금 더 설명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정리하겠습니다. 

 

연기법 또는 연기의 진리에 대해 설명하자면, 십이연기를 비롯해 여러 가지 복잡한 설명들이 있지만, 총론적으로는 상호의존이라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더 세세하게 설명하면 모든 존재들은 서로 의지해 있다, 서로 연결되어 있다,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이것을 화엄경에서는 인드라망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물에 있는 그물코처럼, 한 손의 손바닥과 손등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의지해있고,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그냥 말하려고 있는 게 아니지요. 우리 삶으로 실현하기 위해 진리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삶으로 실현해야 우리가 희망하는 삶, 즉 평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연기의 진리에 맞게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하다는 건 어떤 것일까요? 한 손에 손바닥과 손등이라는 관계를 예로 봅시다. 손바닥이 존재하려면 반드시 손등이 있어야 되죠? 그러니까 손바닥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손등에 의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너와 나의 관계로 가져와봅시다. 

너에 의지해서만 내가 존재할 수 있다, 나에 의지해서만 네가 존재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지금 여기 나를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너는 나에게 어떤 존재일까요? 귀한 존재인가요, 아닌가요? 귀한 존재죠! 고마운 존재인가요, 아닌가요? 고마운 존재죠! 함께 해야 될 대상인가요, 아닌가요? 당연히 함께 해야 될 대상이죠!

 

그렇다면, 연기의 진리가 삶이 되도록 하려면 나에게 너무 귀한 존재인 너를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진심으로 존중해야 합니다. 그 사람과 종교가 같은지 다른지에 관계없이, 내 마음에 들든지 안 들든지 관계없이, 나에게 이익이 되든지 말든지 관계없이 존중해야 합니다. 

 

적어도 우리가 진리를 탐구하고 진리를 구현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국가와 민족 이런 것까지 훌쩍 넘어서서 이러한 진리를 생활화하는데 모든 역량들을 써야 되는 것이죠. 그래야 지극정성을 다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연기의 진리를 실제 삶이 되도록 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첫째, 너는 나에게 너무나 귀한 존재이니, 진실로 존중한다. 

둘째, 고마운 존재이니, 진실로 감사한다.

셋째, 함께 살아야 되는 존재이니, 진실로 서로 돕고 나눈다.

 

그러면 너와 나의 관계가 어떻게 될까요? 

평화롭지 않겠습니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편안하지 않겠습니까. 멋있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런 내용을 “정의도 빛나고 평화도 빛나라”라는 대중적 언어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 동안거 동안에 좀 더 투철하게 탐구를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어서 해제 날이라도 이런 내용을 잘 상기해보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그리고 해제 살림살이가 탄탄해지는데도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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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겨울은 참으로 추웠습니다. 일기가 정말 변화무쌍하기도 했지요. 그런 조건 속에서도 큰 탈 없이 다들 안거를 잘 해주셔서 두루두루 감사합니다. 오늘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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