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큰 탈은 없는데 사는 게 그렇게 썩 편안하고 좋은 거 같진 않습니다. 왜 그런가 하고 보면 온 세상이 불안해요. 그러니 나도 덩달아서 불안할 수밖에 없겠지요.
좀 좁혀서 보자면 우리는 늘 새로운 불교를 만들어보자고 대내외적으로 이런저런 일들을 하고 있는데, 늘 벽에 부딪칩니다. 절집에서 어떤 문제를 다룰 때 보면, 스님이든 재가자들이든 불교의 내용을 어떻게 잘 담아낼 것인가 보다는 누가 주지를 할 것인가, 나와 친한 사람인가 아닌가, 늘 그런 것에 더 관심을 갖고 이야기를 하는 현실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편이 갈리게 되지요. 편이 갈린다는 것은 좋게 이야기하면 경쟁이지만 막말로 얘기하면 싸움판으로 가는 거죠. 치고받고는 안 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에 이기는 것이 희망이고 답이고, 이기는 것이 해결책이라는 사고방식이잖아요. 그러다보니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내용을 담는 데 마음을 모아보자고 노력하는데, 해보면 늘 뜻한 것처럼 쉽지 않습니다.
나 일신상에는 큰 탈이 없는데, 우리 불교의 상황에 대해 이런저런 걱정을 하고 있는 게 요즘 근황입니다.
깨달음의 문명이란 무엇인가
어쩌다 보니 인연이 되어 천일기도를 하게 되었고, 이제 만일기도를 하자는 이야기로 진화했습니다. 그런데 회의에서는 그런대로 논의와 합의를 통해서 잘 해보자는 쪽으로 결의가 되는 것 같은데, 내용적으로는 좀 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완성하지는 못하고 있고, 그러다보니 우리 사부대중 모두가 흔연하게 “그래, 한번 해보자”가 되면 좋겠는데, 아직은 좀 미흡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오늘 보현법회에서는 특별히 만일결사 이야기를 하면 좋겠다는 주문을 받았습니다.(웃음)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천일결사, 천일기도, 그리고 나아가려고 하는 만일결사, 만일기도 - 어떻게 보면 별것도 아닌데, 또 어떻게 보면 대단히 별것이기도 합니다.
천일이냐 만일이냐도 어마어마하지만 그보다 내용적으로는 더 어마어마 합니다. 우리가 지금 무슨 내용으로 천일기도니 만일결사니 하고 있죠? ‘미혹문명을 내려놓고 깨달음의 문명으로 우리의 삶을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보자’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것이 어마어마한 내용이고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기도, 결사, 수행이란, 그렇게 단순한 말들이 아닙니다. 그 말 하나하나가 매우 엄중한 내용들입니다. 많이 들어본 말이라고 그냥 지나치고 있는데, 똑같은 말이 반복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내용 하나하나는 매우 엄중한 내용들입니다. 그런 것을 한 번 더 상기하는 차원에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
금방 우리가 불렀던 보현행원 노래에 보면 “두 눈 어둔 이 내 몸 굽어살피사 위없는 대법문을 널리 여소서‘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이 갖고 있는 뜻이 무엇일까요? 한글로 되어 있으니까 어려운 말도 아니고, 늘 부르던 노래니 그냥 그런 말이지 하고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내용이지요. 그런데 이 구절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진짜 핵심내용은 무엇일까요?
”두 눈 어둔 이 내 몸 굽어살피사 위 없는 대법문을 널리 여소서.“
어떠세요? 확연하게 잘 이해가 되고 정리가 되십니까?
우리는 불교를 어떤 종교라고 설명하는가요?
흔히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 얘기합니다. 그동안 보고 듣고 알고 있는 아주 단편적인 상식들을 놓고 보면 깨달음의 종교라고 천명을 하고 깨달음의 종교로 평가되고 깨달음의 종교로 다루어지는 종교는 불교 외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잘 모르는 것일 수도 있으니, 혹시 아시는 분 있으면 얘기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 얘기를 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가 특별하기도 하고 탁월하기도 한 그런 종교로 평가되기도 하고요. 그런데 정작 불교를 하고 있는 우리 스스로는 그걸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가 불교 공부를 중도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교를 중도적으로 공부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나의 가르침, 나의 진리는 함께 대화를 나눌 경우 바로 이해할 수 있다. 바로 실현된다. 바로 경험된다. 바로 증명된다. 이게 나의 가르침이고 나의 진리다.”
제 얘기가 아니고 초기불교 경전 니까야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해보면 어떻습니까? 바로 이해되고 바로 경험되고 바로 증명되던가요? 어떠세요? 불교 공부해보면 그렇게 되던가요?
(……)
아무 반응도 없네요. 왜 그렇게 될까요?
정직하게 보면 해도 해도 잘 모르겠고, 잘 안되고, 힘들고 어렵고 그렇죠. 왜 그렇게 될까요? 저는 중도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진단을 합니다.
어떠세요? 바로 이해되고 바로 실현되고 바로 경험되고 바로 증명되는 거라면 그렇게 복잡하고 어렵지 않다는 얘기인 거잖아요. 붓다의 가르침은 상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조금만 더 진지하게 접근하면 누구나 바로 이해할 수 있고, 누구나 바로 실현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로 이해되는 것, 바로 실현되는 것, 바로 경험되는 것, 바로 증명되는 것을, 붓다는 한마디로 ‘깨달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깨달음이라는 말 속에 ‘바로 이해된다. 바로 실현된다. 바로 경험된다. 바로 증명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보면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워야 될 하등의 이유가 없는데, 우리는 해도 해도 잘 모르겠다고 아우성치게 되는 그런 불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현행원’에서는 “두 눈 어둔 이 내 몸”이라고 표현한 것이죠. 눈이 어둡다는 얘기는 뭘 못 본다는 얘기죠. 못 보니까 모르는 것이고요.
그리고 “굽어살피사”하고 청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굽어살펴서 무엇인가를 해준다면, 여러분은 부처님이 무엇을 해주면 좋겠습니까.
만약 눈 먼 사람에게 무수한 소원들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무엇이라고 답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 눈 뜨는 일이겠죠?
다른 것도 해주면 좋긴 좋겠죠. 돈도 주면 좋겠고, 출세도 시켜주면 좋겠고, 그런 것도 좋긴 좋겠지만 그런저런 거 다 젖히고 최고의 것, 반드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하는 건 눈 뜨는 일일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눈뜨는 일이 가능하도록 하는 건 무엇입니까?
보현행원의 바로 다음 구절 “위없는 대법문을 널리 펴소서.”입니다.
부처님 법문은 바로 이 미혹의 눈, 무명의 눈, 어둠의 눈, 무지몽매한 눈을 뜨게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우리에게 해주는 특별한 일인, 법문인 거예요. 이것을 바꾸어 보면 어떻게 될까요? 법문을 잘 듣고 새기면 어떻게 된다? 눈이 뜨인다! 바로 그런 이야기입니다.
어떠세요? 일생일대에 반드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하는 유일한 소망, 최고의 소망이 이루어지도록 해주는 게 법문이라고 할 때, 그 법문 듣는 일을 우리가 건성건성 하면 되겠습니까? 그 법문을 잘 듣고 이해하기 위해 지극정성을 다해야 되지 않겠어요? 지금 우리 불자님들이 부처님한테 가서 “나 도와주시오, 나 잘 봐주시오” 하면서 열심히 기도하는데, 법문을 들을 때도 그렇게 간절하게 듣고 있습니까. 그렇게 간절하게 곱씹고 있습니까.
물론 다들 나름대로 정성스럽게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더 절실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한 번 더 생각해봤으면 좋을 것 같아서 이 이야기부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눈 뜬다는 말이 바로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이걸 한 번 더 확인하고 갑시다.
예를 들어 내가 눈이 먼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말하기를, “부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해보세요. 맛있는 밥도 주고, 필요한 돈도 주고, 좋은 집도 주고, 어디 가고 싶을 때는 차 태워서 데려다주기도 하고, 부족할 것 없이 다 해달라고요.”
그 사람 말대로 했더니, 부처님이 그 기도를 다 들어주셨다고 해봅시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눈이 먼 상태입니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부처님은 그런 건 아무것도 안 해줘. 맛있는 밥도 안 주고, 돈도 안 주고, 어디 데려다주지도 않고, 그런데 눈을 뜨게 하는 것은 확실합니다.”
자, 여러분에게 양자택일 하라고 하면, 어떤 것을 선택하겠습니까? 당연히 눈 뜨는 걸 선택하겠죠? 아닌 분도 계신가 봐. 반응이 영 그렇네요.(웃음)
여기서 여러분은 어떤 것이 진짜 자비롭다고 생각하십니까? 밥 주는 것, 돈 주는 것, 좋은 집 주는 것입니까? 그런 것보다는 눈 뜨게 해주는 게 가장 큰 자비가 아닐까요? 눈먼 사람에게 최고의 자비는 눈 뜨게 하는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부처님을 대자대비하신 분이라고 하는 이유도 사람들로 하여금 눈뜨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눈 뜨게 하는 핵심 역할이 법문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최선을 다해서 법문을 하셨고, 그 법문이 기록되어 경전으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깨달음이라는 말이 본래 취지와는 다르게 너무 과장되고 왜곡되고 신비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가 오늘 깨달음에 대해 한 말들이 마치 불교를 함부로 취급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신비화된 불교를 배웠고, 오랜 세월 그런 생각들을 많이 갖고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도 그런 생각들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제 나름대로 결단을 내려서 더 이상의 그런 구태에 지배를 받아서는 안 되겠고, 미뤄둘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깨달음으로 하는 보시여야 바라밀행이다
불교에서 깨달음과 관련된 표현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마하반야바라밀’입니다.
의식문에도 계속 나오고, 우리가 늘 염송하는 반야심경도 본래 이름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입니다. 반야바라밀이 바로 깨달음이라는 말입니다. 반야라는 말이 깨달음, 바라밀은 깨달음을 온전하게 실천한다는 뜻이지요.
우리가 보살행이라고 이야기하는 육바라밀이 있는데, 그 첫 번째가 보시바라밀입니다. 보시는 누구에게 나눠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눠준다고 해서 그게 다 바라밀이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바라밀로서의 보시가 있고, 바라밀이 아닌 일반 보시가 있는데 우리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잘 구분을 못합니다.
반야바라밀의 반야는 알아야 될 것을 참되게 잘 알았다, 깨달아야 될 것을 참되게 잘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보통 반야라는 말은 지혜라고 번역합니다. 지혜라는 말속에는 깨달음도 있지만 현실에 응용되는 것까지도 다 포함됩니다. 어떻든 반야라는 말도 지혜라는 말도, 알아야 될 것을 참되게 알았다는 뜻입니다.
지혜라는 말을 불교적 언어, 특히 경전적 언어로 연결시키면 본래부처임을 참되게 알았다고 할 수 있고, 선적 언어로는 자신의 본래면목을 참되게 알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걸 깨달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바라밀은 그 참된 앎, 즉 깨달음을 온전하게 실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깨달음으로 실천되는 것이라야 바라밀행으로서의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깨달음 없이 그냥 보시를 행하는 것으로는 바라밀행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깨달음의 정신에 맞게 보시했을 때 그것을 바라밀행이라고 하는 것이고, 깨달음과 관계없이 그냥 인정으로, 착한 마음으로 보시하는 것은 바라밀행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깨달음과 관련된 세 가지 개념
천태학에서는 깨달음과 관련하여 세 가지 개념을 이야기합니다.
문자반야, 관조반야, 실상반야입니다.
사실 쉽고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제가 오늘 만일결사 이야기를 하는데, 좀 복잡하더라도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어서 한 번 짚고 가려고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문자반야(文字般若)
실상사 불사 중 하나로 <문자반야프로젝트>라는 게 있습니다.
문자반야라는 말은 천태학에서 사용하는 개념인데, 실상사에서 문자반야 프로젝트라는 말을 쓰게 된 경위는 참 우연적입니다.
실상사 불사를 함께 논의해왔던 분 중에 시종일관 중심을 잡고 함께 가는 분이 안상수 선생님니다. 생명평화무늬를 만든 그 분입니다.
선재집을 지으면서 선재집에 어울리는 편액과 주련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안상수선생님이 그 논의자리에 서예박물관에서 일하는 이동국 선생을 모시고 왔습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편액이나 주련에 꼭 한자만 쓸 필요는 없다, 한글화하는 게 더 좋은 곳은 한글로 하는 것도 좋겠다는 제안이 있었고, 참석자들이 모두 공감했습니다. 그런 논의과정에서 이동국 선생이 ‘문자반야프로젝트’라는 걸 제안한 것입니다. 실상사에 있는 편액이나 주련을 비롯해서 작은 안내판까지 문자로 되어 있는 모든 것을 <문자반야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잘 가꾸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스님도 아니고 불자도 아닌 사람이 ‘문자반야’라는 말을 들고 나왔을 때 저는 상당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불교에서 굉장히 중요한 내용인데, 실상사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분이 문자반야를 실상사불사에 반영해야 된다고 할 때 나는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우리 실상사 불사는 대부분 말 그대로 인연 따라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뭐 대단한 실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뜻하지 않게 고마운 분들을 만나 많이 배우기도 하고, 실력이 늘어나기도 하고,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는 거죠.
반야심경을 갖고 설명을 해봅시다.
모두 아시다시피 반야심경은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로 시작해서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로 끝납니다.
문자반야는 글로 쓰여진 반야심경 자체입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될 내용을 글로 쓴 것이죠. 우리가 배워서 알아야 될 내용, 법문을 듣고 알아야 될 내용을 글로 쓴 것입니다. 문자로 다루어진 지혜의 내용, 문자로 다루어진 깨달음의 내용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관조반야(觀照般若)
관조반야는 무엇일까요?
반야심경 첫대목에 있는 ‘관자재보살 행심반야 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에서 조견이 바로 관조입니다. ‘글로 쓰여진 그 내용을 실제 삶과 연결시켜서 잘 관찰사유하면’ - 이런 이야기인 거예요.
관조(觀照)는 볼관(觀), 비칠조(照)입니다. ‘잘 관찰해서 살펴보면’이란 의미입니다.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에서 조견(照見)이란 말을 ‘관찰사유한다’로 바꿔보면 ‘오온(五蘊)을 잘 관찰사유한다’는 말이지요. 오은을 잘 관찰사유하면 그 다음에 뭐라고 나와 있습니까? ‘개공(皆空), 모두 비어있다’고 합니다. ‘오온이 비어있음을 확연하게 잘 알면’에서 이 안다는 말이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무엇일까요? 핵심은 바로 깨달음입니다.
알아야 될 것을 참되게 알면, 깨달으면 온갖 근심‧걱정과 불안‧공포로부터 편안하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합니다. 편안하다는 것을 열반이라고 하고, 자유롭다는 것을 해탈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글로 된 문자반야를 실제와 연결시켜 관찰사유하는 관조반야에 대한 설명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현실은 불교공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장의 실제와 연결시키지 않고 글로 표현되어진 광범위한 문헌자료들만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이해된다, 바로 실현된다, 바로 경험된다, 바로 증명된다”는 공부·수행과는 정반대인 “해도 해도 잘 모르겠다, 잘 안 된다, 힘들고 어렵다.”라고 아우성치는 불교공부와 수행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글로 표현된 내용을 현장의 구체적인 내용과 직결시켜서 음미해봅시다.
‘조견오온’. 즉 오온을 조견한다, 오온을 관찰사유한다는 말인데, 지금 관찰해야 될 오온이 어디에 있습니까? 글로는 반야심경에 오온이라고 나오지만, 이 오온이라는 말에 해당되는 현장의 내용은 어디에 있는 무엇이죠? 바로 지금 여기 각자 자기 자신입니다. 오온의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진 것을 나라고 하지 않나요? 예를 들어 저기 벽추거사가 있는데,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라는 다섯 가지 조건[오온]들이 모여서 벽추거사라는 한 존재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걸 나한테 적용하면 지금 여기 나 자신인 거죠.
이 오온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실물 대상에 직결시켜서 관찰 사유해야 된다는 얘깁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불교공부가 지식불교가 아니라 수행불교로 가게 되는 겁니다.
실상반야(實相般若)
그래서 오온을 잘 관찰 사유[觀照般若]하게 되면, 실상반야가 드러난다고 되어있습니다. 문자반야를 현실과 직결시켜서 잘 관찰 사유해보면 오온의 실상이 환히 드러난다는 것이죠. 오온이라는 실상반야가 환히 드러난 것인데, 그 실상반야의 내용이 무엇일가요? 그것을 반야심경에서는 공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같은 내용인데, 해인삼매는 정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원융무애라는 말은 동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왜 만일결사를 하는가
지금 살펴본 바와 같이, 언어로 표현된 것을 그냥 들으면 별것 아닌 것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존재의 실상을 말로 제대로 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하고 간절히 원을 세운 수행자들이 뼛골 빠지게 노력해서 나온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 말이 듣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실적으로 생각하면 말한 사람보다 듣는 사람이 더 지극정성의 노력을 해야 된다고 봅니다. 그리고 피가 되고 살이 되어야 현실적인 효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피와 살이 되도록 하지 않고 건성건성 하기 때문에 해도 해도 잘 모르겠고, 해도 해도 잘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옛 스승들의 마음가짐과 노력을 염두에 두면서 만일결사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사실은 밑자락을 깐 겁니다. 그렇다고 기죽으면 안 됩니다.
실상사의 30년 공부와 실천,
미혹문명과 깨달음문명이라는 개념을 낳다
이제 《실상사법요집》 4쪽에 있는 <21세기 약사경>을 보시죠.
거기에 보면, ‘미혹의 문명을 넘어 깨달음의 문명으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뒤는 다 그 말에 맞춰서 만들어진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미혹의 문명을 넘어 깨달음의 문명으로’라는 이 단순한 표현이 만들어지기까지 한 30년 걸렸습니다. 제가 실상사에 산 지가 이제 30년입니다. 그동안은 우리가 세상을 잘 모르니 주로 바깥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제공받으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언제부터인가는 우리 실력도 많이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우리 실력이 늘어나는 것에 비해서 바깥의 실력은 크게 늘어난 것 같지 않습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우리 실력이 늘어난 것과 동시에 우리 사부대중공동체도 많이 성장했습니다. 우리 실상사가 세상의 도움을 받아서 실력이 늘어난 만큼 이제는 우리도 세상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무엇인가를 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제 자신감도 좀 생긴 거죠.
그러면 한 번 봅시다.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 많은 모순과 부작용 때문에 힘들고, 미래는 대단히 위험합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좋은 세상을 만들어보겠다고 어마어마한 노력을 했고, 어마어마한 성취가 이루어졌는데, 왜 비명소리는 계속 커지고 확대되고, 불안과 공포는 피할 길이 없어 보이는 걸까요? 이걸 불교적으로 어떻게 볼 것인가. 또는 어떻게 성격규정을 할 수 있을까요?
그 동안 나름대로 많은 이야기들을 하고 공부도 하면서 ‘미혹’과 ‘깨달음’이라는 개념을 쓰게 되었습니다. 문제의 핵심개념이 미혹[무지, 어리석음, 어두움]이고 해답의 핵심개념이 깨달음(지혜, 밝음)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문제의 핵심원인은 미혹의 사고방식, 무지의 사고방식, 어리석음의 사고방식으로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까 보현행원 노래에서 나온 표현대로 하자면, ‘두 눈 어둔’ 사고방식, 눈먼 사고방식으로 삶의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고방식으로 문제를 다루면 아무리 천지개벽할 듯 난리법석을 떨어도, 어마어마한 성취를 이루어도 비명소리가 해결되지 않는 상황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진단한 것을 미혹문명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무엇일까요?
깨달음의 사고방식으로 가야 답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깨달음, 지혜로움, 참되게 앎 등과 같은 개념으로 표현했습니다. 그것을 깨달음의 문명이라는 말로 바꾼 것입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미혹문명이니 깨달음문명이니 하는 말 역시 하루아침에 갑자기 이루어진 게 아닙니다. 아까 이렇게 오기까지 한 30년 걸렸다고 말씀드렸는데, 그 가운데 2014년 세월호 참사도 큰 계기였다고 생각됩니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무엇이 불교적 진단과 응답일까에 대한 문제의식이 컸습니다. 요즘 더 가속화되고 있는 기후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이고, 인류문명이 끝날 것인가 지속될 것인가, 하는 어마어마한 문제들이죠.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불교는 어떻게 진단하고 대안을 내놓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게 “미혹의 문명을 넘어 깨달음의 문명으로”라는 표현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라 꾸준히 고민하고 모색한 결과로 진화해온 거지요.
지속적으로 그런 모색을 해오던 중 어떤 스님이 천일기도를 발원했고, 그 뜻을 실상사 사부대중이 받아 천일결사, 천일기도란 이름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천일결사를 통해 하고 싶은 일들도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우리 역량이 그에 미치지 못해 천일기도만 겨우 붙잡고 온 거잖아요.
그런데 천일기도를 해보니까 천일기도 한 번 하는 걸로 우리가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자각이 생겼고, 그래서 또 만일결사 이야기가 나오고 공론화되었던 거죠. 그렇게 해서 현재는 우리 모두가 함께 마음을 내서 만일 결사를 해보자는 데까지 왔습니다.
만일결사,
깨달음의 밝은 문명을 가꾸자는 것
그럼 만일결사의 내용은 무엇인가.
천일결사와 다르지 않습니다. 바로 미혹의 문명을 내려놓고 깨달음의 문명으로 삶이 이루어지도록 살아보자는 것입니다. 실상사가 그런 절이 되도록 해보자, 산내마을이 그런 마을이 되도록 해보자, 세상이 그런 세상이 되도록 해보자는 것입니다. 만일결사는 그런 일을 우리가 서로 손을 잡고 함께 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깨달음의 문명은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
다 알고 있는 얘기지만 여러 가지 얘기들 가운데 앞부분을 볼까요?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혐오하는 미혹문명 내려놓고’
삶이 좋은 걸까요. 죽음이 좋은 걸까요.
우리는 삶을 좋다고 생각하는데, 좋아하는 그 삶과 한 몸으로 딱 붙어있는 게 죽음입니다. 손으로 말하면 손바닥과 손등 같은 관계죠. 손바닥이 삶이라면 손등은 죽음이겠죠. 실상이 이러할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다. 좋은 것만 붙잡을 수 있겠습니까. 그럴래야 그럴 수가 없습니다.
삶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혹문명의 사고방식이고, 그것을 붙잡으려고 하는 것이 어리석은 욕심이고 집착입니다. 사실이 아니라 다 내 생각이고 욕심이고 망상일 뿐이죠.
그 다음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삶도 빛나고 죽음도 빛나라”
여러분은 어떤 게 좋습니까?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혐오하는 미혹의 사고방식’과 ‘삶도 빛나고 죽음도 빛나는 깨달음의 사고방식’ 중에 어떤 게 답이 되겠습니까.
그 뒤에 나오는 내용들도 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남성만 존중하고 여성을 비하하는 미혹문명 내려놓고,
여성도 빛나고 남성도 빛나는 깨달음의 밝은 문명 피어나게 하옵소서.”
이 구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멸시, 차별, 불평등은 미혹문명이고, 평등, 상호존중은 깨달음의 밝은 문명입니다. 이와 같이 미혹과 깨달음이 어떤 것인가를 잘 살펴보면 우리 삶 전반에 적용되는 내용들입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결사와 기도는 우리가 그동안 미혹의 사고방식으로 살아왔는데, 이제는 정신 차리고 공들여서 깨달음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가자, 그래서 차별은 없어지고 평등은 실현되어서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이쪽도 좋고 저쪽도 좋을 수 있는 깨달음의 문명을 만들어가자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깨달음의 문명을 이루어내기 위해서 만일 정도는 공을 들였으면 좋겠다는 게 만일결사의 문제의식인데, 우리 신도님들은 어떻습니까? 해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대중 박수)
만일결사,
깨달음의 밝은 문명을 가꾸자는 것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저는 큰 탈은 없는데 사는 게 그렇게 썩 편안하고 좋은 거 같진 않습니다. 왜 그런가 하고 보면 온 세상이 불안해요. 그러니 나도 덩달아서 불안할 수밖에 없겠지요.
좀 좁혀서 보자면 우리는 늘 새로운 불교를 만들어보자고 대내외적으로 이런저런 일들을 하고 있는데, 늘 벽에 부딪칩니다. 절집에서 어떤 문제를 다룰 때 보면, 스님이든 재가자들이든 불교의 내용을 어떻게 잘 담아낼 것인가 보다는 누가 주지를 할 것인가, 나와 친한 사람인가 아닌가, 늘 그런 것에 더 관심을 갖고 이야기를 하는 현실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편이 갈리게 되지요. 편이 갈린다는 것은 좋게 이야기하면 경쟁이지만 막말로 얘기하면 싸움판으로 가는 거죠. 치고받고는 안 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에 이기는 것이 희망이고 답이고, 이기는 것이 해결책이라는 사고방식이잖아요. 그러다보니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내용을 담는 데 마음을 모아보자고 노력하는데, 해보면 늘 뜻한 것처럼 쉽지 않습니다.
나 일신상에는 큰 탈이 없는데, 우리 불교의 상황에 대해 이런저런 걱정을 하고 있는 게 요즘 근황입니다.
깨달음의 문명이란 무엇인가
어쩌다 보니 인연이 되어 천일기도를 하게 되었고, 이제 만일기도를 하자는 이야기로 진화했습니다. 그런데 회의에서는 그런대로 논의와 합의를 통해서 잘 해보자는 쪽으로 결의가 되는 것 같은데, 내용적으로는 좀 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완성하지는 못하고 있고, 그러다보니 우리 사부대중 모두가 흔연하게 “그래, 한번 해보자”가 되면 좋겠는데, 아직은 좀 미흡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 오늘 보현법회에서는 특별히 만일결사 이야기를 하면 좋겠다는 주문을 받았습니다.(웃음)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천일결사, 천일기도, 그리고 나아가려고 하는 만일결사, 만일기도 - 어떻게 보면 별것도 아닌데, 또 어떻게 보면 대단히 별것이기도 합니다.
천일이냐 만일이냐도 어마어마하지만 그보다 내용적으로는 더 어마어마 합니다. 우리가 지금 무슨 내용으로 천일기도니 만일결사니 하고 있죠? ‘미혹문명을 내려놓고 깨달음의 문명으로 우리의 삶을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보자’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것이 어마어마한 내용이고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기도, 결사, 수행이란, 그렇게 단순한 말들이 아닙니다. 그 말 하나하나가 매우 엄중한 내용들입니다. 많이 들어본 말이라고 그냥 지나치고 있는데, 똑같은 말이 반복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내용 하나하나는 매우 엄중한 내용들입니다. 그런 것을 한 번 더 상기하는 차원에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
금방 우리가 불렀던 보현행원 노래에 보면 “두 눈 어둔 이 내 몸 굽어살피사 위없는 대법문을 널리 여소서‘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이 갖고 있는 뜻이 무엇일까요? 한글로 되어 있으니까 어려운 말도 아니고, 늘 부르던 노래니 그냥 그런 말이지 하고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내용이지요. 그런데 이 구절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진짜 핵심내용은 무엇일까요?
”두 눈 어둔 이 내 몸 굽어살피사 위 없는 대법문을 널리 여소서.“
어떠세요? 확연하게 잘 이해가 되고 정리가 되십니까?
우리는 불교를 어떤 종교라고 설명하는가요?
흔히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 얘기합니다. 그동안 보고 듣고 알고 있는 아주 단편적인 상식들을 놓고 보면 깨달음의 종교라고 천명을 하고 깨달음의 종교로 평가되고 깨달음의 종교로 다루어지는 종교는 불교 외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잘 모르는 것일 수도 있으니, 혹시 아시는 분 있으면 얘기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 얘기를 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가 특별하기도 하고 탁월하기도 한 그런 종교로 평가되기도 하고요. 그런데 정작 불교를 하고 있는 우리 스스로는 그걸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가 불교 공부를 중도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교를 중도적으로 공부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나의 가르침, 나의 진리는 함께 대화를 나눌 경우 바로 이해할 수 있다. 바로 실현된다. 바로 경험된다. 바로 증명된다. 이게 나의 가르침이고 나의 진리다.”
제 얘기가 아니고 초기불교 경전 니까야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해보면 어떻습니까? 바로 이해되고 바로 경험되고 바로 증명되던가요? 어떠세요? 불교 공부해보면 그렇게 되던가요?
(……)
아무 반응도 없네요. 왜 그렇게 될까요?
정직하게 보면 해도 해도 잘 모르겠고, 잘 안되고, 힘들고 어렵고 그렇죠. 왜 그렇게 될까요? 저는 중도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진단을 합니다.
어떠세요? 바로 이해되고 바로 실현되고 바로 경험되고 바로 증명되는 거라면 그렇게 복잡하고 어렵지 않다는 얘기인 거잖아요. 붓다의 가르침은 상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조금만 더 진지하게 접근하면 누구나 바로 이해할 수 있고, 누구나 바로 실현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로 이해되는 것, 바로 실현되는 것, 바로 경험되는 것, 바로 증명되는 것을, 붓다는 한마디로 ‘깨달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깨달음이라는 말 속에 ‘바로 이해된다. 바로 실현된다. 바로 경험된다. 바로 증명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보면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워야 될 하등의 이유가 없는데, 우리는 해도 해도 잘 모르겠다고 아우성치게 되는 그런 불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현행원’에서는 “두 눈 어둔 이 내 몸”이라고 표현한 것이죠. 눈이 어둡다는 얘기는 뭘 못 본다는 얘기죠. 못 보니까 모르는 것이고요.
그리고 “굽어살피사”하고 청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굽어살펴서 무엇인가를 해준다면, 여러분은 부처님이 무엇을 해주면 좋겠습니까.
만약 눈 먼 사람에게 무수한 소원들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무엇이라고 답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보다 눈 뜨는 일이겠죠?
다른 것도 해주면 좋긴 좋겠죠. 돈도 주면 좋겠고, 출세도 시켜주면 좋겠고, 그런 것도 좋긴 좋겠지만 그런저런 거 다 젖히고 최고의 것, 반드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하는 건 눈 뜨는 일일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눈뜨는 일이 가능하도록 하는 건 무엇입니까?
보현행원의 바로 다음 구절 “위없는 대법문을 널리 펴소서.”입니다.
부처님 법문은 바로 이 미혹의 눈, 무명의 눈, 어둠의 눈, 무지몽매한 눈을 뜨게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우리에게 해주는 특별한 일인, 법문인 거예요. 이것을 바꾸어 보면 어떻게 될까요? 법문을 잘 듣고 새기면 어떻게 된다? 눈이 뜨인다! 바로 그런 이야기입니다.
어떠세요? 일생일대에 반드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하는 유일한 소망, 최고의 소망이 이루어지도록 해주는 게 법문이라고 할 때, 그 법문 듣는 일을 우리가 건성건성 하면 되겠습니까? 그 법문을 잘 듣고 이해하기 위해 지극정성을 다해야 되지 않겠어요? 지금 우리 불자님들이 부처님한테 가서 “나 도와주시오, 나 잘 봐주시오” 하면서 열심히 기도하는데, 법문을 들을 때도 그렇게 간절하게 듣고 있습니까. 그렇게 간절하게 곱씹고 있습니까.
물론 다들 나름대로 정성스럽게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더 절실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한 번 더 생각해봤으면 좋을 것 같아서 이 이야기부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눈 뜬다는 말이 바로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이걸 한 번 더 확인하고 갑시다.
예를 들어 내가 눈이 먼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말하기를, “부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해보세요. 맛있는 밥도 주고, 필요한 돈도 주고, 좋은 집도 주고, 어디 가고 싶을 때는 차 태워서 데려다주기도 하고, 부족할 것 없이 다 해달라고요.”
그 사람 말대로 했더니, 부처님이 그 기도를 다 들어주셨다고 해봅시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눈이 먼 상태입니다.
그런데 또 어떤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부처님은 그런 건 아무것도 안 해줘. 맛있는 밥도 안 주고, 돈도 안 주고, 어디 데려다주지도 않고, 그런데 눈을 뜨게 하는 것은 확실합니다.”
자, 여러분에게 양자택일 하라고 하면, 어떤 것을 선택하겠습니까? 당연히 눈 뜨는 걸 선택하겠죠? 아닌 분도 계신가 봐. 반응이 영 그렇네요.(웃음)
여기서 여러분은 어떤 것이 진짜 자비롭다고 생각하십니까? 밥 주는 것, 돈 주는 것, 좋은 집 주는 것입니까? 그런 것보다는 눈 뜨게 해주는 게 가장 큰 자비가 아닐까요? 눈먼 사람에게 최고의 자비는 눈 뜨게 하는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부처님을 대자대비하신 분이라고 하는 이유도 사람들로 하여금 눈뜨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눈 뜨게 하는 핵심 역할이 법문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최선을 다해서 법문을 하셨고, 그 법문이 기록되어 경전으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깨달음이라는 말이 본래 취지와는 다르게 너무 과장되고 왜곡되고 신비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가 오늘 깨달음에 대해 한 말들이 마치 불교를 함부로 취급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신비화된 불교를 배웠고, 오랜 세월 그런 생각들을 많이 갖고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도 그런 생각들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제 나름대로 결단을 내려서 더 이상의 그런 구태에 지배를 받아서는 안 되겠고, 미뤄둘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깨달음으로 하는 보시여야 바라밀행이다
불교에서 깨달음과 관련된 표현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마하반야바라밀’입니다.
의식문에도 계속 나오고, 우리가 늘 염송하는 반야심경도 본래 이름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입니다. 반야바라밀이 바로 깨달음이라는 말입니다. 반야라는 말이 깨달음, 바라밀은 깨달음을 온전하게 실천한다는 뜻이지요.
우리가 보살행이라고 이야기하는 육바라밀이 있는데, 그 첫 번째가 보시바라밀입니다. 보시는 누구에게 나눠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눠준다고 해서 그게 다 바라밀이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바라밀로서의 보시가 있고, 바라밀이 아닌 일반 보시가 있는데 우리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잘 구분을 못합니다.
반야바라밀의 반야는 알아야 될 것을 참되게 잘 알았다, 깨달아야 될 것을 참되게 잘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보통 반야라는 말은 지혜라고 번역합니다. 지혜라는 말속에는 깨달음도 있지만 현실에 응용되는 것까지도 다 포함됩니다. 어떻든 반야라는 말도 지혜라는 말도, 알아야 될 것을 참되게 알았다는 뜻입니다.
지혜라는 말을 불교적 언어, 특히 경전적 언어로 연결시키면 본래부처임을 참되게 알았다고 할 수 있고, 선적 언어로는 자신의 본래면목을 참되게 알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걸 깨달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바라밀은 그 참된 앎, 즉 깨달음을 온전하게 실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깨달음으로 실천되는 것이라야 바라밀행으로서의 보시가 되는 것입니다. 깨달음 없이 그냥 보시를 행하는 것으로는 바라밀행이라고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깨달음의 정신에 맞게 보시했을 때 그것을 바라밀행이라고 하는 것이고, 깨달음과 관계없이 그냥 인정으로, 착한 마음으로 보시하는 것은 바라밀행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깨달음과 관련된 세 가지 개념
천태학에서는 깨달음과 관련하여 세 가지 개념을 이야기합니다.
문자반야, 관조반야, 실상반야입니다.
사실 쉽고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제가 오늘 만일결사 이야기를 하는데, 좀 복잡하더라도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어서 한 번 짚고 가려고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문자반야(文字般若)
실상사 불사 중 하나로 <문자반야프로젝트>라는 게 있습니다.
문자반야라는 말은 천태학에서 사용하는 개념인데, 실상사에서 문자반야 프로젝트라는 말을 쓰게 된 경위는 참 우연적입니다.
실상사 불사를 함께 논의해왔던 분 중에 시종일관 중심을 잡고 함께 가는 분이 안상수 선생님니다. 생명평화무늬를 만든 그 분입니다.
선재집을 지으면서 선재집에 어울리는 편액과 주련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안상수선생님이 그 논의자리에 서예박물관에서 일하는 이동국 선생을 모시고 왔습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편액이나 주련에 꼭 한자만 쓸 필요는 없다, 한글화하는 게 더 좋은 곳은 한글로 하는 것도 좋겠다는 제안이 있었고, 참석자들이 모두 공감했습니다. 그런 논의과정에서 이동국 선생이 ‘문자반야프로젝트’라는 걸 제안한 것입니다. 실상사에 있는 편액이나 주련을 비롯해서 작은 안내판까지 문자로 되어 있는 모든 것을 <문자반야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잘 가꾸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스님도 아니고 불자도 아닌 사람이 ‘문자반야’라는 말을 들고 나왔을 때 저는 상당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쩌면 불교에서 굉장히 중요한 내용인데, 실상사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분이 문자반야를 실상사불사에 반영해야 된다고 할 때 나는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우리 실상사 불사는 대부분 말 그대로 인연 따라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뭐 대단한 실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뜻하지 않게 고마운 분들을 만나 많이 배우기도 하고, 실력이 늘어나기도 하고, 그렇게 이루어지고 있는 거죠.
반야심경을 갖고 설명을 해봅시다.
모두 아시다시피 반야심경은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로 시작해서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로 끝납니다.
문자반야는 글로 쓰여진 반야심경 자체입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될 내용을 글로 쓴 것이죠. 우리가 배워서 알아야 될 내용, 법문을 듣고 알아야 될 내용을 글로 쓴 것입니다. 문자로 다루어진 지혜의 내용, 문자로 다루어진 깨달음의 내용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관조반야(觀照般若)
관조반야는 무엇일까요?
반야심경 첫대목에 있는 ‘관자재보살 행심반야 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에서 조견이 바로 관조입니다. ‘글로 쓰여진 그 내용을 실제 삶과 연결시켜서 잘 관찰사유하면’ - 이런 이야기인 거예요.
관조(觀照)는 볼관(觀), 비칠조(照)입니다. ‘잘 관찰해서 살펴보면’이란 의미입니다.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에서 조견(照見)이란 말을 ‘관찰사유한다’로 바꿔보면 ‘오온(五蘊)을 잘 관찰사유한다’는 말이지요. 오은을 잘 관찰사유하면 그 다음에 뭐라고 나와 있습니까? ‘개공(皆空), 모두 비어있다’고 합니다. ‘오온이 비어있음을 확연하게 잘 알면’에서 이 안다는 말이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무엇일까요? 핵심은 바로 깨달음입니다.
알아야 될 것을 참되게 알면, 깨달으면 온갖 근심‧걱정과 불안‧공포로부터 편안하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합니다. 편안하다는 것을 열반이라고 하고, 자유롭다는 것을 해탈이라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글로 된 문자반야를 실제와 연결시켜 관찰사유하는 관조반야에 대한 설명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현실은 불교공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장의 실제와 연결시키지 않고 글로 표현되어진 광범위한 문헌자료들만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이해된다, 바로 실현된다, 바로 경험된다, 바로 증명된다”는 공부·수행과는 정반대인 “해도 해도 잘 모르겠다, 잘 안 된다, 힘들고 어렵다.”라고 아우성치는 불교공부와 수행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글로 표현된 내용을 현장의 구체적인 내용과 직결시켜서 음미해봅시다.
‘조견오온’. 즉 오온을 조견한다, 오온을 관찰사유한다는 말인데, 지금 관찰해야 될 오온이 어디에 있습니까? 글로는 반야심경에 오온이라고 나오지만, 이 오온이라는 말에 해당되는 현장의 내용은 어디에 있는 무엇이죠? 바로 지금 여기 각자 자기 자신입니다. 오온의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진 것을 나라고 하지 않나요? 예를 들어 저기 벽추거사가 있는데,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라는 다섯 가지 조건[오온]들이 모여서 벽추거사라는 한 존재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걸 나한테 적용하면 지금 여기 나 자신인 거죠.
이 오온이라는 말이 가리키는 실물 대상에 직결시켜서 관찰 사유해야 된다는 얘깁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불교공부가 지식불교가 아니라 수행불교로 가게 되는 겁니다.
실상반야(實相般若)
그래서 오온을 잘 관찰 사유[觀照般若]하게 되면, 실상반야가 드러난다고 되어있습니다. 문자반야를 현실과 직결시켜서 잘 관찰 사유해보면 오온의 실상이 환히 드러난다는 것이죠. 오온이라는 실상반야가 환히 드러난 것인데, 그 실상반야의 내용이 무엇일가요? 그것을 반야심경에서는 공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이라고만 표현하고 있는가. 다른 데서는 또 다르게 표현합니다.
법성게에서는 첫구절에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오온의 실상을 원융무애하다고 표현합니다. 법성게에는 해인삼매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같은 내용인데, 해인삼매는 정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원융무애라는 말은 동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왜 만일결사를 하는가
지금 살펴본 바와 같이, 언어로 표현된 것을 그냥 들으면 별것 아닌 것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존재의 실상을 말로 제대로 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하고 간절히 원을 세운 수행자들이 뼛골 빠지게 노력해서 나온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 말이 듣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실적으로 생각하면 말한 사람보다 듣는 사람이 더 지극정성의 노력을 해야 된다고 봅니다. 그리고 피가 되고 살이 되어야 현실적인 효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피와 살이 되도록 하지 않고 건성건성 하기 때문에 해도 해도 잘 모르겠고, 해도 해도 잘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옛 스승들의 마음가짐과 노력을 염두에 두면서 만일결사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사실은 밑자락을 깐 겁니다. 그렇다고 기죽으면 안 됩니다.
실상사의 30년 공부와 실천,
미혹문명과 깨달음문명이라는 개념을 낳다
이제 《실상사법요집》 4쪽에 있는 <21세기 약사경>을 보시죠.
거기에 보면, ‘미혹의 문명을 넘어 깨달음의 문명으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뒤는 다 그 말에 맞춰서 만들어진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미혹의 문명을 넘어 깨달음의 문명으로’라는 이 단순한 표현이 만들어지기까지 한 30년 걸렸습니다. 제가 실상사에 산 지가 이제 30년입니다. 그동안은 우리가 세상을 잘 모르니 주로 바깥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제공받으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언제부터인가는 우리 실력도 많이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우리 실력이 늘어나는 것에 비해서 바깥의 실력은 크게 늘어난 것 같지 않습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우리 실력이 늘어난 것과 동시에 우리 사부대중공동체도 많이 성장했습니다. 우리 실상사가 세상의 도움을 받아서 실력이 늘어난 만큼 이제는 우리도 세상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무엇인가를 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제 자신감도 좀 생긴 거죠.
그러면 한 번 봅시다.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 많은 모순과 부작용 때문에 힘들고, 미래는 대단히 위험합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좋은 세상을 만들어보겠다고 어마어마한 노력을 했고, 어마어마한 성취가 이루어졌는데, 왜 비명소리는 계속 커지고 확대되고, 불안과 공포는 피할 길이 없어 보이는 걸까요? 이걸 불교적으로 어떻게 볼 것인가. 또는 어떻게 성격규정을 할 수 있을까요?
그 동안 나름대로 많은 이야기들을 하고 공부도 하면서 ‘미혹’과 ‘깨달음’이라는 개념을 쓰게 되었습니다. 문제의 핵심개념이 미혹[무지, 어리석음, 어두움]이고 해답의 핵심개념이 깨달음(지혜, 밝음)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문제의 핵심원인은 미혹의 사고방식, 무지의 사고방식, 어리석음의 사고방식으로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까 보현행원 노래에서 나온 표현대로 하자면, ‘두 눈 어둔’ 사고방식, 눈먼 사고방식으로 삶의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고방식으로 문제를 다루면 아무리 천지개벽할 듯 난리법석을 떨어도, 어마어마한 성취를 이루어도 비명소리가 해결되지 않는 상황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진단한 것을 미혹문명이라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무엇일까요?
깨달음의 사고방식으로 가야 답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깨달음, 지혜로움, 참되게 앎 등과 같은 개념으로 표현했습니다. 그것을 깨달음의 문명이라는 말로 바꾼 것입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미혹문명이니 깨달음문명이니 하는 말 역시 하루아침에 갑자기 이루어진 게 아닙니다. 아까 이렇게 오기까지 한 30년 걸렸다고 말씀드렸는데, 그 가운데 2014년 세월호 참사도 큰 계기였다고 생각됩니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무엇이 불교적 진단과 응답일까에 대한 문제의식이 컸습니다. 요즘 더 가속화되고 있는 기후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이고, 인류문명이 끝날 것인가 지속될 것인가, 하는 어마어마한 문제들이죠.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불교는 어떻게 진단하고 대안을 내놓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게 “미혹의 문명을 넘어 깨달음의 문명으로”라는 표현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라 꾸준히 고민하고 모색한 결과로 진화해온 거지요.
지속적으로 그런 모색을 해오던 중 어떤 스님이 천일기도를 발원했고, 그 뜻을 실상사 사부대중이 받아 천일결사, 천일기도란 이름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천일결사를 통해 하고 싶은 일들도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우리 역량이 그에 미치지 못해 천일기도만 겨우 붙잡고 온 거잖아요.
그런데 천일기도를 해보니까 천일기도 한 번 하는 걸로 우리가 하고자 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자각이 생겼고, 그래서 또 만일결사 이야기가 나오고 공론화되었던 거죠. 그렇게 해서 현재는 우리 모두가 함께 마음을 내서 만일 결사를 해보자는 데까지 왔습니다.
만일결사,
깨달음의 밝은 문명을 가꾸자는 것
그럼 만일결사의 내용은 무엇인가.
천일결사와 다르지 않습니다. 바로 미혹의 문명을 내려놓고 깨달음의 문명으로 삶이 이루어지도록 살아보자는 것입니다. 실상사가 그런 절이 되도록 해보자, 산내마을이 그런 마을이 되도록 해보자, 세상이 그런 세상이 되도록 해보자는 것입니다. 만일결사는 그런 일을 우리가 서로 손을 잡고 함께 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깨달음의 문명은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가.
다 알고 있는 얘기지만 여러 가지 얘기들 가운데 앞부분을 볼까요?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혐오하는 미혹문명 내려놓고’
삶이 좋은 걸까요. 죽음이 좋은 걸까요.
우리는 삶을 좋다고 생각하는데, 좋아하는 그 삶과 한 몸으로 딱 붙어있는 게 죽음입니다. 손으로 말하면 손바닥과 손등 같은 관계죠. 손바닥이 삶이라면 손등은 죽음이겠죠. 실상이 이러할 때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다. 좋은 것만 붙잡을 수 있겠습니까. 그럴래야 그럴 수가 없습니다.
삶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혹문명의 사고방식이고, 그것을 붙잡으려고 하는 것이 어리석은 욕심이고 집착입니다. 사실이 아니라 다 내 생각이고 욕심이고 망상일 뿐이죠.
그 다음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삶도 빛나고 죽음도 빛나라”
여러분은 어떤 게 좋습니까?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혐오하는 미혹의 사고방식’과 ‘삶도 빛나고 죽음도 빛나는 깨달음의 사고방식’ 중에 어떤 게 답이 되겠습니까.
그 뒤에 나오는 내용들도 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남성만 존중하고 여성을 비하하는 미혹문명 내려놓고,
여성도 빛나고 남성도 빛나는 깨달음의 밝은 문명 피어나게 하옵소서.”
이 구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멸시, 차별, 불평등은 미혹문명이고, 평등, 상호존중은 깨달음의 밝은 문명입니다. 이와 같이 미혹과 깨달음이 어떤 것인가를 잘 살펴보면 우리 삶 전반에 적용되는 내용들입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결사와 기도는 우리가 그동안 미혹의 사고방식으로 살아왔는데, 이제는 정신 차리고 공들여서 깨달음의 사고방식으로 살아가자, 그래서 차별은 없어지고 평등은 실현되어서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이쪽도 좋고 저쪽도 좋을 수 있는 깨달음의 문명을 만들어가자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깨달음의 문명을 이루어내기 위해서 만일 정도는 공을 들였으면 좋겠다는 게 만일결사의 문제의식인데, 우리 신도님들은 어떻습니까? 해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대중 박수)
박수 쳤다는 건 만일결사는 여러분이 책임진다는 얘기입니다. (모두 웃음)
제가 할 역할은 여기까지인 것 같네요. 이제 알아서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