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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거법문[2023년 6월] - 하안거 결제 법어: 청매조사 십무익송과 불교수행론


청매조사  <십무익송(十無益頌)>과 더불어 생각해본

여래의 진실한 뜻에 부합하는 ‘불교수행론’


여름 안거가 시작되는 날입니다.

우리 현실이 안팎으로 걱정할 것들이 많은 상황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제 어떻게 해야 될까?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현실 속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어쩌면 세상이 이렇기 때문에 우리가 안거를 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큰 의미가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안거를 잘 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그리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지역사회 대중들도 편안하고 흐뭇하고 평화로울 수 있는 그런 안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습니다.

 

우리 실상사에서는 “정의도 빛나고 평화도 빛나라”라는 주제로 올 일 년을 살아보자고 결의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안거 때도 그 내용을 공유하고 깊이 새겨보아야 합니다. 역사적 경험을 보면, 정의의 명분으로 오히려 정의가 짓밟히고 파괴되어지는 역사가 되풀이되고 있고, 평화의 명분으로 평화가 짓밟히고 파괴되고 온 세상이 아수라장이 되는 역사가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정의와 평화는 영원히 실현될 수 없는 허망한 꿈, 부질없는 망상에 불과한 것인가, 하는 싶은 실망감, 패배감, 좌절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늘 정의 또는 평화를 위해서 무엇을 한다고 애를 쓰는데, 그 과정과 결과는 늘 정반대로 나타나게 될까요? 도대체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거듭거듭 투철하게 묻고 투철하게 답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들 나름대로 부처님께서는 정의와 평화를 어떻게 이야기 하셨을까, 하고 찾아보기도 하고, 연구자들과 얘기해보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부처님이 뜻한 정의는 불의에 맞서는 상대적 개념으로서의 정의라는 의미보다는 세상의 이치, 진리, 불교적 개념으로는 다르마, 법이라는 의미에 가깝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의미로 사용되어야 부처님 뜻과도 부합하고, 우리가 원하는 정의로운 삶, 평화로운 삶도 가능해진다는 판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상사에서는 정의라는 개념을 다르마(진리, 법)의 다른 개념으로 쓰고 있다는 것을 먼저 공유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설명을 좀 했습니다.

 

 안거, 세상과의 단절일까

 

앞에서 안거에 대해 설명하는 말을 들으면서 문득 ‘부처님이 안거를 제도화할 때 실제 상황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안거를 불교전통으로 계승해오고 있는데, 실제 안거제도는 부처님이 처음 제도화한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불교 이전부터 인도 전통문화로 안거 풍속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당시 사회, 대중들의 제안과 요청을 받아들여 부처님께서 불교제도로 정착시켰고, 지금 우리는 그것을 계승하고 있는 셈입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우리가 출가수행이라는 관점에 경도돼 있다 보니 세상을 바라보거나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세상과 소통하고 호흡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과연 그렇게 하는 것이 내용적으로 괜찮은 것인가. 여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인가, 하는 물음으로 출가와 안거의 본래 취지를 잘 살려갔으면 하는 마음이 듭니다.

 

잘 아시다시피 여래십호에는 세간해(世間解), 부처님은 세상을 잘 아시는 분이라는 칭호가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세상의 병을 잘 아시는 분[大醫王, 대의왕]이라고도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응병여약(應病與藥)이라고 하는 것도 같은 관점입니다. 이 말은 결국 의사가 병을 잘 알아야 하듯이 불교수행자들도 세상을 잘 알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만일 세상ㄷ을 알지 못하면 당연히 불교를 제대로 알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불교를 전하는 것도 제대로 될 수 없게 됩니다.

 

출가수행 또는 안거의 본래취지를 꼼꼼하게 짚어보면 과연 출가수행이 세상과 무관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절대 불가능하기도 하고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병과 관계없이 의사가 존재할 수 없고 병을 모르고는 의사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죠. 그렇게 볼 때 절이나 수행처가 세상과 단절된 곳이 아리나 세상과 소통함으로써 세상사람들의 의지가 되고 격려가 되는 곳이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안거를 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비록 한 곳에 머물러 안거를 하더라도 출가의 본래정신, 안거의 본래취지를 깊이 새기면서 안거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하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비록 한 곳에 머물러 안거를 하더라도 이런 내용과 문제의식들을 좀 깊이 새기면서 안거를 하면 좋겠다는 바람을 먼저 말씀드렸습니다.

 

 

부처님의 뜻에 부합하는 

불교수행론은 무엇일까

 

지금까지는 안거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즉흥적으로 생각난 것을 말씀 드린 것입니다. 사실 오늘 나누고 싶은 내용으로 준비한 것은 청매조사의 십무익송(十無益頌)입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부처님 뜻에 부합하게 초기불교, 부파불교, 유식, 공사상과 같은 대승불교, 선불교, 현대불교 등을 잘 종합하고 통합할 수 있는 불교관과 수행론이 만들어져야 된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다양한 불교수행들이 공존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더 나아가 불교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수행과 관련한 세상의 모든 형식들이 공존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불교수행론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입니다. 

첫 번째는 나의 수행을 위해서입니다. 동시에 보통사람들이 불교공부와 수행을 통해 현재의 삶을 훨씬 더 잘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데 도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나의 불교수행론, 또는 실상산중의 불교수행론, 또는 한국불교의 불교수행론을 만들어보려고 제 나름대로는 많은 고민을 했지만, 제 역량만으로는 되는 일이 아니어서 여전히 화두처럼 갖고 삽니다.

 

그 과정에서 불교공부, 불교수행의 내용을 가장 압축적으로 잘 표현한 개념들은 어떤 것이 있을까, 하고 천착을 해봤는데, 지역마다 시대마다 다 다르게 표현된 경우들이 많았습니다. 과연 이 모든 것들이 다 같은 하나의 불교인가, 하고 의심스러울 정도로 다 다릅니다.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인지, 한 예를 소개해볼까 합니다.

승조스님은 중국사상사에서 천재적인 인물로 평가받는 분으로 구마라집 스님의 제자입니다. 구마라집 스님이 제자인 승조를 평한 말이 있습니다.

“공의 이치를 꿰뚫어보는 안목은 나와 다름이 없다. 그런데 글 솜씨는 나보다 훨씬 더 탁월하다”라고.

그런 평가를 받는 승조스님이 남긴 저술을 《조론(肇論)》이라고 합니다. 

최근에 어떤 분이 그 책을 보내주셔서 참고할 만한 게 있어서 오늘 소개를 드립니다.

 

불교를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개념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본무(本無), 본성(本性), 법성(法性), 실상(實相), 성공(性空), 연회(緣會) 등이 대표적이죠. 어쩌면 여래장(如來藏)이나 불성(佛性) 개념들도 다 연결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승조스님이 이야기합니다.

“개념들은 각각 다 다르지만 말하고자 하는 뜻은 다 한 뜻이다”라고.

말은 다른데 뜻은 하나라는 말입니다. 다른 개념들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알려주려는 여래의 본뜻은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보통사람들에게 양이 많고 복잡하고 어려우면 힘들텐데, 왜 그렇게 했을까, 하는 의심이 생깁니다. 이에 대해 승조스님은 말합니다. “듣는 사람들의 상황이 다 다르므로 그에 맞춰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라고.

꼼꼼하게 짚어서 사실확인을 해보면 “뜻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말라, ”병에 따른 약처방“이라고 하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잘 연결된다고 봅니다.

 

 

반야바라밀행(般若波羅蜜行)

 

연장선상에서 우리가 공부해야 할 불교수행론을 압축해서 한마디로 잘 표현한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를 생각해봤습니다. 초기불교의 관점에서 봐도 괜찮고, 부파불교, 대승불교, 선불교의 관점으로 봐도 괜찮고, 현대불교의 관점으로 봐도 괜찮을 수 있는 수행론을 찾아본 거죠. 그 결과 실제 불교수행론을 압축해서 한 마디로 표현한 개념은 대단히 많습니다. 그런데 그많은 표현 중에 대표적인 것 하나를 고르면 “반야바라밀행”이 아닐까 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제 경험을 말씀 드려보겠습니다. 

제가 조계종단에서 결사본부장을 할 때였습니다. 종단이 늘 정치적으로만 문제를 다루는데 그런 것은 현실적으로 흘러가는 대로 그냥 놔두더라도 어느 한 곳에서는 불교를 제대로 하기 위한 모색들이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문제의식을 가진 입장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결사라는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에 결사의 정신을 잘 살려내서 제대로 된 불교를 만들어보자고 하는 마음들이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불교계에서 수좌계, 강학계, 율학계, 또는 이판사판 등 여기저기서 애쓰고 계신 분들, 예를 들어 적명스님, 고우스님, 무비스님, 해남스님 지안스님 등등을 모셔서 결사자문위원회를 꾸리고 첫 회의를 봉암사에서 했습니다.

그때 고우스님이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람직한 불교관과 실천론의 토대를 확립하는 것이다. 이 기본이 잘 다듬어지는 게 제1과제다. 일단 이 점을 주목하고 우리 마음을 모아서 해보자”고 강력히 주장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소위원회가 꾸려졌고, 그 위원들이 범어사에 모여 심도있는 논의를 통해 총론적으로 모아진 표현이 <중도로 본 본래부처와 동체대비>였습니다. 이 표현이 전체 불교를 잘 종합하고 통합하면서도 바람직하게 불교수행을 하는데 가장 적절하겠다고 뜻을 모았습니다. 오늘 그 이야기를 다 할 수는 없지만 앞에서 전통적인 불교수행론의 대표적 개념으로 ‘반야바라밀행’을 꼽았는데, 그 뜻을 한국불교 정서에 맞추어 표현하면 ‘중도로 본 본래붓다와 동체대비’라고 할 수 있겠다 싶습니다. 제가 볼 때, 지금 생각해도 정말 잘 정리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거기에 맞춰서 내용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지만.  

 

같은 관점에서 고민을 하고 있던 차에 어떤 인연으로 청매조사의 〈십무익송〉을 보게 되었는데, 그 내용에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십무익송〉의 내용을 나누려고 합니다.

 

 

청매조사 십무익송(十無益頌)

 

청매조사는 실상사에서도 그렇게 멀지 않은 도솔암에 꽤 오래 사셨다고 합니다. 청매조사는 서산스님의 제자입니다. 제가 어릴 때엔 대부분의 수좌들이 은둔수행자의 표상으로 청매조사를 꼽았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승병장도 역임했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단순한 은둔수행자가 아니었던 거죠. 

 

〈십무익송〉은 청매조사가 남긴 10가지 이야기입니다. 여러 가지 번역이 있는데, 오늘은 제가 이해한 것으로 소개하면서 주의 깊게 천착해야 할 것에 대해 간단하게 언급하겠습니다.

 

1. 심불반조 간경무익 (心不返照 看經無益) 

삶(마음)과 직결시켜 살피지 않으면 경전을 보아도 이익이 없다.

 

2. 부달성공 좌선무익 (不達性空 坐禪無益) 

존재의 본질이 실체없음(空)을 달관(사실을 사실대로 보고 인정하고 받아들임)하지 않으면 좌선을 해도 이익이 없다.

좌선한다고 해서 능사가 아니다. 공의 이치를 잘 파악하고 이해하는 탄탄한 토대 위에서 참선수행도 해야지 기본토대 없이 무조건 앉아 있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거죠. 

 

3. 불신정법 고행무익 (不信正法 苦行無益)

바른 법에 대한 이해와 믿음에 근거하지 않으면 고행을 해도 이익이 없다.

오늘날의 수행자들이 잘 살펴보면 좋을 내용입니다. ‘정법에 대한 바른 이해와 믿음에 근거하지 아니하면 목숨을 건 고행을 해도 이익이 없다.’ 방향과 길이 옳지 않으면 아무리 애써도 백해무익하다는 이야기입니다. 

 

4. 부절아만 학법무익 (不折我慢 學法無益) 

아만심을 극복하지 않으면 법을 배워도 이익이 없다.

아만심에는 독선적인 것, 권위적인 것, 이기적인 것, 자기도취적인 것 등이 다 포함되겠죠.

 

5. 흠인사덕 제중무익 (欠人師德 濟衆無益)

스승이 될 덕이 없으면 대중을 모아도 이익이 없다.

스승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저절로 되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죠. 이런 내용을 보면 저는 참 부끄럽고 죄송스럽습니다. 아무도 나를 스승으로 생각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늘 제가 법문을 하고 특별한 대접도 받는 입장이다 보니 그렇습니다.

 

6. 내무실득 외의무익 (內無實德 外儀無益) 

안으로 참다운 덕이 없으면 밖으로 점잖은 행동을 해도 이익이 없다.

참다운 덕이 없으면 아무리 멋있게 꾸며봐야 허망한 일이다. 아무리 폼잡아봐야 다 부질 없다. 결국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고 세상을 속이는 일이다.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보다 더 부끄러운 일, 한심스러운 일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죠?

 

7. 심비신실 교연무익 (心非信實 巧言無益)

마음(삶)이 진실하지 않으면 교묘하게 말을 잘 해도 이익이 없다.

마음으로 진실하지 않으면 말을 잘해도 말장난일 뿐이고, 수행자가 아니라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얘기꾼일 뿐이죠. 

 

8. 경인망과 구도무익 (輕因望果 求道無益)

원인을 가볍게 여기고 결과만을 중요하게 여기면 도를 탐구해도 이익이 없다.

사실 원인과 과정을 가볍게 여기는 마음과 태도로 수행한다면 그것은 이미 잘못된 수행인 거죠. 당연히 결과도 엉뚱하게 되죠. 이 부분도 정말 깊이있게 내용들을 잘 파악하고 자기 삶속에 깊이 반영되도록 하는 게 반드시 필요합니다. 

 

9. 만복무식 교만무익 (滿腹無識 驕慢無益) 

뱃속에 교만이 꽉 차 있으면 유식해도 이익이 없다.

교만함이 가득하면 팔만대장경을 종횡으로 다 꿴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이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10. 일생괴각 처중무익 (一生乖角 處衆無益)

한평생 괴각으로 사는 사람은 대중과 함께 살아도 이익이 없다.

여기서 괴각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요. 우리와 연결시켜서 설명한다면, ‘대중과 함께 하지 않는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상가의 의미 자체가 화합해서 대중과 죽을 힘을 다해서 대중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대중과 함께 한다는 것은 주체적으로 기꺼이 대중과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함께 할 수 없는 상황이 있다면, 그것 역시 대중들에게 충분하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해야 합니다.

 

대중과 함께 한다는 뜻을 보현행원품에서는 항순중생원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중생들의 뜻을 잘 파악하고 이해하고 인정하고 존중하고 또 함께 할 수 있도록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중생의 뜻에 수순한다는 표현을 다른 경론에서는 못봤습니다. 부처님 뜻을 존중하고 따르고 도반의 뜻을 존중하고 따르라는 것은 곳곳에서 강조되고 있고, 어떤 경우에는 스님들의 뜻을 존중하고 따르라는 말도 있지요. 그런데 보현행원품에서는 ‘항순중생’을 이야기합니다. 중생의 뜻을 잘 파악하고 이해하고 인정하고 존중하고 그런 뜻들이 잘 살려질 수 있도록 마음 쓰고 노력하는 게 반야바라밀행의 한 내용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괴각병은 주체적으로 아주 흔연하게 대중과 함께 하기 위해 노력하면 저절로 치유가 됩니다. 우리는 탐진치를 없애야 된다, 없애야 된다고 늘 말하는데, 함께 살기 위해 마음쓰고 살아가면 탐진치 문제도 그 과정에서 저절로 정리가 됩니다. 함께 살고 있는 대중들과 충분하게 소통하고 공감하고 서로 의지하고 격려하고 돕고 나누는데 마음을 쓰고 노력을 하면, 어떤 길이 열릴까요? 탐욕은 더불어 함께 하는 것으로 전환되고, 분노는 서로에게 자애심을 갖는 쪽으로 전환되고, 어리석음은 존재가치를 잘 알고 존재가치를 서로 존중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지혜로움으로 전환이 될 것입니다.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가 주체적으로 기꺼이 대중과 함께 할 때, 탐진치는 우리가 실현하고 싶은 이상과 가치로 전환되어서 작동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야말로 진짜 수행 아니겠습니까? 불교를 하게 되면 삶과 수행이 절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런 것이죠.

 

이렇게 해서 청매조사가 남긴 〈십무익송〉을 다 소개드렸습니다.

이런 내용을 갖고 같이 공부도 하고 대화도 하고 토론도 해서 정말로 여래의 진실한 뜻에 부합하는 사상과 정신을 토대로 수행을 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그런 도반이 되고 그런 실상산중이 되는데 적극적으로 마음내서 함께 하면 좋겠다고 하는 게 실상사의 바람이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시대를 관통하는 불교수행의 개념들

 

초기불교, 대승불교, 선불교로 관통되어지는 불교수행이 어떤 개념으로 표현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제 나름대로 천착해봤을 때 몇 가지가 파악되었습니다.

 

초기경전에 보면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 묻습니다. 

불교를 제대로 하는 사람과 불교를 제대로 못하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부처님이 대답합니다. “불교공부와 수행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은 첫 번째 화살도 맞고 두 번째 화살도 맞게 되고, 제대로 하는 사람은 첫 번째 화살은 맞지만 두 번째 화살은 맞지 않는다.”라고.

교리적으로 보면 복잡한 얘기들인데, 그 복잡한 개념들을 사용해서 우리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부처님의 본뜻이 뭘까를 생각해보면, 제2의 화살을 맞지 않는다는 것을 생활화하는 것이 불교수행을 제대로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같은 맥락의 정신이 대승경전인 《금강경》에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저는 그 정신이 무주상(無住相) 또는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봅니다. 선악이니 시비니 그 어떤 것에도 머물지 말고 끊임없이 새로운 마음을 내라고 이야기하잖아요. 불교에도 머물지 말고, 선에도 머물지 말고, 이판에도 머물지 말고 사판에도 머물지 말고, 출가에도 머물지 말고 재가에도 머물지 말고, 초기불교에도 머물지 말고, 부파불교도 머물지 말고, 대승불교에도 머물지 말고, 선불교에도 머물지 말고 새로운 마음을 일으켜라.

저는 초기불교에서 제2의 화살을 맞지 않도록 하는 수행론이 대승불교에서는 ‘무주상’, ‘이생기심’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 다음에 선불교로 오게 되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간화선을 주창했던 대혜종고선사는 수행을 ‘생처방교숙 숙처방교생’이라는 말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生處放敎熟  熟處放敎生  생처방교숙 숙처방교생

생소한 것은 거듭거듭 다루어서 익숙한 것이 되게 만들고,

익숙한 것은 내려놓고 또 내려놓아 생소하게 만들어라.

 

여기서 익숙한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한 가지만 예를 들면 “나는 죄 많은 업보중생이야.” 정말 익숙한 말이죠? 많은 사람들이 그 말에 사로잡혀서 죄업에서 벗어나보겠다고 허우적거리는 과정에서 오히려 그 늪으로 더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공부가 안 돼도 그렇고, 일이 안 풀려도 그렇고, 수틀리기만 하면 무조건 전생의 죄업타령을 합니다. 정말 익숙하죠. 습관화되고 체질화되어서 거의 본능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뭐라고 얘기하셨는가.

“잘못 알았을 때는 사람이 죄 많은 중생이라고 생각했는데 제대로 따져서 알고 보니까 사람이 본인의 삶을 본인 마음껏 창조해갈 수 있는 주인공, 본래부처더라.”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본래부처’라는 말은 ‘사람은 죄 많은 업보중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생소한 것 정도가 아니라 큰 죄를 범하는 것처럼 벌벌 떨게 하는, 무시무시한 이야기입니다. 

 

이 사고방식을 화두로 연결시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죄 많은 업보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망상의 다른 표현입니다. 번뇌망상은 참으로 익숙한 거죠. 그야말로 절로절로 부글거리는 것이 망상이죠. 그렇기 때문에 번뇌망상은 계속 버리고, 또 버리고, 또 버리고 해서 생소한 것이 되도록 만드는 게 수행인 것입니다.

 

그러면 화두참선의 관점에서 생소한 건 무엇일까요? 

당연히 번뇌가 익숙한 것인 반면, 화두는 생소한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화두를 들고, 또 들고, 또 들고 해서 익숙한 것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화두참선 수행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는가. 바로 매 순간순간 화두를 드는 만큼 자유로운 삶, 평화로운 삶, 날마다 새로운 삶, 좋은 삶이 가능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짧은 시간에 아주 거칠게 말씀드렸습니다만, 이 산중에 인연된 사부대중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런 내용들이 본인의 상식으로 잘 파악되고 이해되고, 공감되어, 자기 확신으로 자리 잡는 토대 위에서 수행을 하면, 화두참선을 하든, 염불수행을 하든, 위빠사나수행을 하든, 사마타 수행을 하든, 이 기본토대가 제대로 갖춰지도록 하는 것을 늘 놓치지 말고 안거수행을 우리 모두에게 좋은 안거, 유익한 안거가 될 것임은 불 보듯 합니다.

 

끝으로, 여러 가지로 열악한 조건인데도 이 산중에 오셔서 함께 안거를 하시는 한 분 한 분 스님들, 또 함께하시는 우리 재가대중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면서 얘기를 정리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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