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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거법문[2023년 8월 하안거 해제법문] - 부처님 생애를 통해 바라 본 불교 수행론

2023년 8월 하안거 해제법문

 

부처님생애를 통해 바라 본 불교수행론


안녕하세요.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도 많이 오셨네요.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여름 안거를 마무리하는 자리에 백장암 스님들도 내려오시고 멀고 가까운 곳에 계시는 신도님들도 오시고 두루두루 고맙습니다.

더운 여름을 지내는데 도움을 주었던 선풍기가 어제까지는 잘 돌아갔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켜보니까 돌아가셔버렸습니다. 어제 봤던 모습 그대론데 왜 멈췄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선풍기가 돌아가셨습니다. 어쩌면 나라고 하는 인간도 그런 세월을 겪고 또 필요한 역할을 나름대로 하다가 인연이 되면 선풍기가 멈추고 다른 길을 가듯이 나의 삶도 그렇게 멈추고 또 다른 길을 가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 이제 여름이 끝나고 가을로 넘어가는 것 같은데 지금 그대로 지내다가 내년 여름쯤 선풍기를 준비할까 아니면 여전히 필요하니까 새로 준비를 해야 될까, 오늘 아침에는 그런 궁리를 했습니다. 이런 정도가 평상심도, 위대한 일상적 우리의 삶인 것 같습니다.

 

조금 전에 우리는 한철 살림을 성찰적으로 짚어보고 그 이후의 삶을 좀 더 바람직하게 갖고 가도록 하기 위해서 포살의식을 했습니다. 각자 개개인이 어떻게 살았는지 또 어떻게 살 것인지는 포살의식을 통해서 우리가 정리했기 때문에 지금 이 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또 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그런데 여름안거를 하면서 기쁜 소식일 수 있겠다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그 내용을 잠깐 소개를 할까 합니다.

 

▸ 한 걸음 더 나아간 공동체 만들기

지금 돌이켜보면 처음부터 우리가 실상산중에서 ‘공동체적으로 바람직한 불교를 해보자’, ‘바람직한 불교가 이 산중에서 내 삶이되기도 하고 공동체의 삶이되기도 하고 우리와 인연이 있는 가까운 마을 분들에게 희망의 공간이 되게 하자’는 마음으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잘 해보자고 했지만 우리의 역량과 노력이 부족하다 보니까 현재의 수준까지 온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조금 더 발전적으로 완성되도록 해보자’해서 그동안 생각했던 것과 경험했던 것을 잘 종합해서 언어로 표현해 보았습니다. 그 표현된 언어를 가지고 우리가 늘 ‘내 얼굴을 비춰보는 거울처럼 비춰 보면서 반영해 가도록 해보자’해서 만든 것이 우리가 같이 낭독한 발심과 서원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내용들이 처음부터 충분하게 함께 논의하고 합의하고 결의해서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그러다보니까 어떤 분들은 새로 와서 처음 접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상황이 이러하기 때문에 산중에 몸은 함께 머물러 있지만 내용적으로 충분하게 소통되고 공감되어서 ‘함께 해보자’하는 정리되지 못한점들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실상사를 중심으로 해서 사는 사람들은 좀 나은데 백장선원은 공간적으로도 떨어져 있기도 하고 전통선원으로서 위상을 갖고 있는 특수한 곳이다 보니까 백장암 식구들하고 충분하게 소통하고 뜻을 모아내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한 6년 세월 걸려서 그동안 이렇게 저렇게 논의하는 과정을 거쳐 왔습니다.

이야기의 핵심적인 내용은 실상산중의 사부대중 모두가 한신구 되어 함께 공부하고 수행하고 활동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부하고 수행하는 것에 대한 입장과 견해가 다르다 보니까 상이한 서로 다른 생각을 잘 종합하고 정리해내는데 많은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비록 낮은 수준이긴 하지만 올 여름에 ‘그래, 같이 모여서 함께 공부하고 수행하자’는 데에 공감대를 이루었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을 만들어내는 것은 앞으로의 지속적인 과제이기 때문에 앞으로 함께 논의하면서 만들어 가야 합니다.

이렇게 함께하는 사람들이 ‘그래, 함께 해보자’하는데 까지 나아갈 수 있도록 소통하고 합의를 이끌어내는 일은 만만치 않습니다. 그런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대단한 인내도 필요하고 대단한 지혜도 필요하고 또 각자 입장을 고집하지 않고 함께할 수 있도록 마음도 열어야 가능합니다. 그럼 그렇게 된다고 해서 입장과 생각이 다 똑같아지냐,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입장과 생각은 여전히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그럼 무엇이 달라져서 공감대를 이룰 수 있었던 걸까요? 사람들이 함께 해보자고 마음을 모을 수 있었던 걸까요?

입장이나 생각이 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함께 논의하는 과정에서 우리 스스로가 서로에 대한 이해와 신뢰가 생기기도 하고 더 유연해지기도 하고 더 너그러워지기도 하고 더 겸손해지기도 하고 더 자유로워지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이나 입장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함께 공부하고 수행하자라고 하는 대의에는 ‘못할 바 없지 않겠느냐’하는 마음이 모아져서 가능했습니다. 경험적으로 볼 때 저는 입장이 똑같아야 되고 생각이 꼭 같아야만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차이를 품어 안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인내력도 길러야 되고 더 너그러울 수 있는 품도 길러야 되고 또 더 품어 안으려고 하는 자유로운 마음도 길러야 합니다. 이런 실력이 생기면 비록 생각이나 입장이 달라도 함께하는 데 어려움 없이 해갈 수 있습니다. 말씀 드린 것처럼 올 여름, 실상 산중 대중들이 함께 하는 쪽으로 한걸음 더 진전 된 셈입니다. 대단히 바람직한 일이죠. 그러므로 기쁜 소식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함께 나누었습니다.

 

▸ 부처님 삶으로 본 불교

오늘은 비가 오기 때문에 차분하게 이야기하기가 좋은 분위기 같습니다. 저는 오늘 해제법회를 할 때 무슨 내용으로 이야기를 할까 고민을 했습니다. 평소 저는 부처님이 가르쳐준 불교가 실제 삶으로 나타났던 가장 원형적인 모습이 어떤 것일까 하는 물음에 답을 찾는 것을 제 일생의 화두로 삼고 나름 골몰해 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가장 원형적인 것을 불교 교리보다는 부처님 생애 자체에서 그 답을 찾고 만드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일생 부처님 생애를 붙잡고 궁리를 해왔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동안 고민해 온 ‘‘나의 불교 수행론’의 뿌리인 붓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저의 요즘은 주된 관심사가 ‘나의 불교수행론, 또는 한국 불교 수행론’을 완성시키는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의 불교 수행론의 근본적 뿌리가 부처님 삶 자체로 나타나 있다고 보고 그동안 어떻게 다뤄져 왔는지 하나의 불교로 관통되어질 수 있는 것인지 관통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지 하는 차원에서 궁리를 해왔습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같이 나눌까 합니다.

부처님 삶에 나타나 있는 불교의 원형을 중심주제로 삼아서 이야기를 하는 자리는 처음인 것 같습니다.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전에 들었던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대강 듣지 마시고 제 나름대로는 땀뻘뻘 흘리면서 정리해 온 내용이니까 단단히 마음 먹고 잘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부처님은 ‘나의 진리, 나의 가르침은 함께 대화를 나눌 경우 바로 이해될 수 있다. 바로 실현된다. 바로 증명된다. 대화를 나눴을 때 바로 이해되고 실현되고 증명되는 것이 나의 진리이고 나의 가르침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철저하게 여기에 맞춰서 불교를 해보자고 하는 것이 제 입장입니다. 왜 그러냐? 첫째는 저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두 번째는 나와 인연 있는 사람들에게 불교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데 내가 해보니까 너무 복잡하고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복잡하고 어렵게 하지 않아도 가능한 불교였으면 좋겠다는 심정 때문에 ‘바로 이해, 실현, 증명 되는 불교’를 해보려고 고심고심해왔습니다.

또 한 가지는 ‘니까야’와 아함경을 읽으면서도 저는 부처님의 삶 자체에 주목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성제, 오은, 12연기와 같은 교리를 중심으로 자료를 보지 않는 편입니다. 또 부처님은 ‘내가 이 세상에 오고 오지 않고에 관계없이 또 내가 깨닫고 깨닫지 않고에 관계없이 법은 본래 있었다. 나는 그 본래 있는 법을 발견하고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내 삶을 만들어가기도 하고 사람들에게 알려주기도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고 안 오고에 관계없이 깨닫고 안 깨닫고에 관계없이 ‘본래 있는 법을 발견했다.’,‘ 본래 있는 법을 깨달았다.’ 이것이 핵심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또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나는 다만 길을 가리킬 뿐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길로 이렇게 가면 정말 좋은 과정도 되고 좋은 결과도 이루어지니 걱정 말고 이 길로 가’ 이렇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길을 잘 가르쳐주지만 가고 안 가고는 본인의 몫입니다. 부처님은 틀림없는 길을 가르쳐 줍니다. ‘직접 가보아라. 그 길이 틀림없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부처님이 가르쳐주고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너무나 많이 듣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개념으로 표현하면 ‘중도‧연기’라고 하고, 더 구체적인 실천적 개념으로 말하면 ‘중도의 팔정도’라고 표현합니다. 여러분들이 기도를 하고 안 하고 관계없이 참선을 하고 안 하고 관계없이 경전 공부를 하고 안 하고 관계없이 천배 만배 절하고 안 하고 관계없이 지금 여기 실제 생활에서 팔정도의 사고방식을 적용해보십시오. 부처님이 말씀하시길 ‘나는 다만 길을 가리킬 뿐이다. 가고 안 가고는 본인의 몫이다. 본인이 한번 가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 이것을 적용해보면 즉각즉각 영험효과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실제로 해보지 않습니다. 교리공부만 하고 끝냅니다. 교리 공부만 하지마시고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실제 적용을 해보십시오. 부처님은 실제 해보면 틀림이 없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기만 하면 하는 만큼 바로 실현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하기만 하면 틀림없이 바로 된다니 얼마나 좋습니까. 진정 희망의 길이지 않습니까? 저는 불교가 이래야 된다고 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계속 그 작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무엇으로 이끄셨나: ‘대화’

하기만 하면 바로바로 실현되는 불교가 진짜 불교라는 문제의식으로 ‘부처님 생애에서 진짜 불교공부와 수행의 내용이 뭘까. 원형적인 게 뭘까’ 하고 탐구를 해오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모델을 저는 ‘야사비구의 불교’라고 표현을 합니다.

부처님 생애에서 볼 때 다섯 명의 비구가 첫 번째 제자들입니다. 이들은 보통 일반사람들이 아니고 당시의 전문 출가수행자였습니다. 그러니까 특별한 사람들이었지요. 두 번째 제자들은 약 5~60명 됩니다. ‘야사’라는 청년과 그 친구들입니다. 이 친구들은 제법 똘똘한 보통의 청년들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두 그룹의 제자들을 만나서 무엇을 하셨을까요? 굳이 일반적 언어로 표현하면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고 할 수 있고, 불교적으로 말하면 법문을 하고 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법문도 이야기입니다. 당신이 깨달은 내용, 당신이 살고 있는 내용을 직접 말로 설명한 것입니다.

5비구는 오랫동안 수행한 보통 사람이 아닌, 특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 야사와 그 친구들은 보통의 청년들이었습니다. 보통 청년들인데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바로 깨달아서 ‘아, 불교가 그런 거예요? 그거 참 좋네요. 나도 그렇게 살래요’ 이렇게 마음먹고 출가를 합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불교도 이렇게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는 지금 우리가 하는불교도 그렇게 돼도록 해보려고 제 나름대로 궁리를 하고 있습니다.

 

▸삶이 곧 수행

오늘은 제가 자료를 만들었습니다. 제목이 ‘붓다의 생애를 중심으로 정리한 붓다의 수행과 깨달음: 깨달음의 삶(수행)과 가르침’입니다. 수행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음을 삶으로 사는 것이 수행입니다. 깨달은 내용이 삶이 돼지 않는다면 그 깨달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수행이란 깨달음이 삶이 되도록 하는 구체적인 실천을 의미합니다. 깨달음을 삶으로 생활화 하는 것이 바로 참되고 바람직한 수행인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설명만으로는 ‘도대체 무슨 말이지?’ 하는 생각이 들것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시간이 많지 않아서 세세하게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만 오늘은 하안거 해제 날이니까 오늘 법문을 참고해서 해제 기간에 우리 스스로 더 탐구하고 모색해 봤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하는 것입니다. 준비한 내용을 하나하나 설명하려면 2시간 정도는 차근차근 설명해야 되는데 지금은 그럴 수 있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개괄적으로만 설명하고 끝내겠습니다.

 

붓다의 6년 수행과 깨달음.’ 우리는 보통 ‘6년 고행과 깨달음’ 이렇게 표현해왔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원효스님의 저술에도 마치 고행을 해야 하는 것처럼 표현된 곳이 있습니다. 원효스님처럼 해박한 분이 쓴 글에도 고행을 해야만 깨달음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생각되게 표현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검토해 봤을 때 ‘고행’으로 표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자칫 잘못된 해석과 설명을 낳을 위험이 있습니다. 6년 수행은 출가 이후에 이루어진 일인데 대표적으로 하나는 선정수행이고 다른 하나는 고행수행입니다. 그 당시에도 많은 수행들이 있었는데 고행수행은 그 중에 한가지일뿐이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6년 전체를 말할 때엔 수행으로 표현하고 여러 가지 중에 한가지로 말할때엔 고행으로 표현 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6년 수행과 깨달음’ 이라고 제목을 붙이고 거기에 구체적으로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1. 신비하고 황홀한 경지를 갈망하는 선정수행과 고행수행

 


‘1. 신비하고 황홀한 삼매 체험의 선정 수행.’ 신비하고 황홀한 선정의 최고 경지까지 도달했지만 신비하고 황홀한 평온과 기쁨은 있어도 가슴에 똬리 틀고 있는 인생 화두는 풀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길이 참된 길이 아님을 알게 되었고 즉시 그 길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당시는 바라문 전통 속에서 선정수행이 대단히 중요하게 강조될 때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부처님이 찾고 싶은 답을 못 찾았습니다. 거기가 나쁘거나 형편없는 곳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자료를 보면 ‘황홀한 삼매체험’이라는 표현이 있고 ‘신비하고 황홀한 평온과 기쁨이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얼핏보면 거기에 굉장한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싯다르타가 갖고 있었던 화두가 풀리지는 않았던 겁니다. 그래서 ‘이건 내가 갈 길이 아니다. 사람들이 갈 길이 아니다. 인생의 답을 제시할 수 있는 길이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그 길을 버립니다. 싯다르타가 버리고 떠난 길이 ‘선정수행’으로 표현되어 집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불교계의 해석을 보면 거의 선정 중심으로 가는 것이 불교수행인 것처럼 설명되고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흘러오게 된 것은 아마도 부처님의 삶자체에 대해 투철하게 탐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 아닌가 합니다.

싯다르타가 출가 이전에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오욕락을 마음껏 누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욕락을 누리는 일은 대단히 기분 좋은 일입니다. 감각적인 기쁨, 감각적인 재미가 넘쳐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인생 문제에 대한 답이 안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오비구도 그건 마찬가지였습니다. 부처님만 그렇게 했던 것이 아닙니다. 오비구도 오욕락의 길을 다 버리고 출가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비구와 싯다르타가 함께 수행을 합니다. 선정수행도 같이 했고 고행수행도 같이 했습니다. 선정수행 당시, 싯다르타는 최고 높은 경지까지 갔는데 다섯 비구는 그 경지까지 가지 못 했습니다. 싯다르타만 최고 경지에 도달했는데 그 경지엔 황홀한 기쁨도 있고 황홀한 신비함도 있었지만 인생의 답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걸 버립니다. 그러니까 그 동료인 다섯 친구들도 ‘야, 싯다르타가 굉장하다. 우리도 같이 가자’라고 하며 싯다르타와 함께 선정 수행공동체를 나오게 됩니다.

 

2. 신비롭고 황홀한 해탈 열반의 고행 수행.

선정수행의 길을 버리고 나온 싯다르타와 다섯수행자들은 고행수행을 선택합니다. 특비 싯다르타는 신비롭고 황홀한 해탈열반을 위해 고행의 최고 경지까지 도달합니다만 고통이 계속될 뿐 인생 화두가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길도 참된 길이 아님을 깨닫고 즉시 버리고 떠났다고 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우리가 세속을 버리고 출가할 때 물질과 육체 중심으로 접근하는 세속에는 답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출가의 길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우리들은 물질과 육체를 버리고 정신 또는 심리적인 것을 대상으로 삼게 됩니다. 왜냐면 눈에 보이는 육체적 혹은 물질적으로는 이미 나름의 시도를 해보고 그 결과가 신통치 않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적, 정신적인 것을 대상으로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는 선정수행을 통해서 답을 찾으려고 했는데 답이 없었습니다. 두 번째는 고행수행을 통해서 답을 찾고자 했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볼 것은, 고행수행을 통해서 답을 찾으려고 했는데 고행을 하니까 고통스럽기만 했다는 겁니다. 행위하는 대로 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고통을 가하면 고통스럽기만 할 뿐, 다른 답이 없었습니다. 해탈 열반의 경지가 나타나리라고 생각했는데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고행을 하니까 그냥 고통스러울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정수행에서 그랬듯이 고행수행에서도 답이 안 나왔기 때문에 싯다르타는 그길을 버리고 떠납니다. 나중에 오비구에게 설법할 때 ‘나는 향락주의도 버리고 고행주의도 버리고 중도의 길을 갔다’고 설명합니다. 보통은 오욕락을 추구하는 것을 향락주의라고 설명 합니다. 물론 그것도 포함 되지만 보지만 그것만을 향락주의로 해석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로 눈에 보이는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문제이므로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문제는 안 다뤄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들을 미루어 볼 때 향락주의라는 말에는 정신적 황홀함, 정신적 신비함, 심리적 불가사의함에 대한 갈망을 뜻하는 내용으로 봐야 마땅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는 이런 점들을 세밀하게 탐구를 하지 않고 두리뭉실하게 묶어서 적당히 넘어가는 경향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래의 진실한 뜻에 부합하는 원형적인 불교가 왜곡되게 해석는 바람에 많은 모순과 혼란을 겪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입니다.

 

▸ 누구도 가본 적이 없는 중도 수행

미혹의 수행인 선정수행과 고행수행으로는 깨달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버리고 떠납니다. 그다음에 붓다는 자기 방식의 수행을 하고 깨달음을 얻습니다. 훗날 당신 방식의 수행을 중도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거니까 당신이 발견한 또는 깨달은 중도 수행을 통해 연기실상을 깨닫습니다. 내용이 이러함으로 ‘붓다의 깨달음과 수행’ 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통상적으로 보면 깨닫기 위해서 수행을 하는 것인데 무슨 깨달은 다음 수행이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죠. 왜냐하면 그동안 우리는 불교가 깨달음의 종교라고 강조해 왔지만 그 내용이 깨달음을 실천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경전에 보면 오비구를 상대해서 첫 설법을 할 때 당신 방식으로 한 수행을 ‘중도’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나는 향락주의와 고행주의를 버리고 중도의 길을 발견(깨달음)했고 중도의 길을 갔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누구도 가본 적이 없는, 스스로 발견한 본래의 길 중도 수행에 대한 설명입니다. ‘삶의 주인공인 지금 여기 자신의 참모습을 어떤 전제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직접 대면하여 관찰 사유하는 것’이 바로 ‘중도수행’입니다.

선정수행할 때도 고행수행할 때도 부처님 방식으로 수행할 때도 똑같이 가부좌 틀고 앉아서 수행했습니다. 선정수행도 고행수행도 모두 가부좌를 틀고 앉았지만 그것은 미혹의 수행이지 깨달음의 불교수행이 아닙니다. 그럼 불교 수행은 뭔가? 부처님이 발견한, 또는 깨달은 중도수행을 해야 그것이 불교수행입니다. 가부좌라는 형식은 똑같습니다. 그러나 내용은 다릅니다. 중도 수행을 했을 때 비로소 불교수행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대로 미혹의 수행, 양극단의 수행을 했을 때는 답이 없었는데 깨달음의 수행인 중도수행을 하니까 답이 나왔다, 깨달음을 이루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도 가본 적이 없는 본래의 길, 중도수행으로 연기의 실상을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앞서 중도수행을 이야기할 때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참모습을 관찰 사유함으로써 지금 여기 자신의 참모습이 연기적 존재임을 깨달음, 참되게 알게 되었고 그 내용은 5온, 12처, 십팔계, 일심동체, ‘인드라망 존재’등의 개념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일심동체 인드라망 존재라는 개념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연기의 존재임을 참되게 알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인생 화두도 확연하게 풀렸습니다. 훗날 첫설법을 할 때 스스로 깨달은, 발견한 본래의 길을 중도로 설명했습니다. 전체적으로 정리하면 붓다의 깨달음은 ‘실천의 진리 중도, 존재의 진리 연기’라고 요약될 수 있겠습니다.


 

그다음, 뒤로 넘어가면 ‘붓다의 깨달음삶과 가르침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삶’이라는 말과 ‘수행’이라는 말은 같은 의미로 쓰여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수행 따로 있고 삶 따로 있는 것처럼 이야기되는 것은 불교 본래의 뜻하고는 거리가 멀다고 봅니다.

‘붓다의 깨달음삶과 가르침.’,‘깨달음삶’은 미혹의 수행인 선정주의와 고행주의는 길이 아니고 깨달음의 수행인 중도 연기가 참된 진리임을 참되게 아는 것과 본인이 깨달은 ‘중도의 팔정도’와 ‘연기의 진리’를 생활화하는 것을 뜻합니다. ‘중도의 팔정도’와 ‘연기의 진리’를 생활화하는 것을 불교수행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겁니다.


▸ 부처님의 자비: 진리를 삶으로

 


1. 붓다의 깨달음. 2. 붓다의 깨달음 삶. 3. 붓다의 가르침


 

붓다의 가르침은 뭘까? 붓다 자신이 깨닫고 실철하고 생활화 한 중도의 팔정도와 칠불통계(七佛通戒)가 생활화되도록 가르치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은 본인이 삶으로 살지 않는 걸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부처님 당신이 그렇게 살아보고, 그렇게 살아보니까 참 좋네. 틀림이 없네, 이런 내용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실제 내용으로 볼 때 같은 말로 표현된다 하더라도 제가 말하는 것하고, 삶으로 살고 있는 부처님이 하는 말하고는 그 힘이 다르다고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중도의 팔정도와 칠불 통계를 생활화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인 것이죠. 율장의 전법선언 내용과 연결시켜서 꼼꼼히 따져보면 훨씬 더 명료해질 수 있다는 점을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부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다. 보통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지혜와 자비의 실천자, 그가 붓다다. 지혜와 자비 중에서 우리는 ‘자비’라는 말을 많이 강조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생 속에서 자비라는 말로 표현되어 질 수 있는 그의 삶은 어떤 것들일까?

우리는 보통 무엇을 나누어주고 잘 먹여주는 것을 자비라고 합니다. 배고픈 사람한테 밥 주고, 헐벗은 사람에게 옷 주는 것. 당연히 그것도 자비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그런 자비를 행하셨을까요? 부처님은 그런 자비의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가? 얻어먹고 살았기 때문에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나누어 줄 수 있는 형편이 못 되었습니다. 늘 얻어먹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자비행을 했기 때문에 부처님이 자비로운 분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잘 모르고 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럼 부처님은 무엇을 했을까요? 부처님은 일생 팔정도를 생활화 했습니다. 당신이 깨달은 진리의 길을 그대로 삶으로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부처님이 일생하신 자비행은 당신이 깨닫고 삶으로 산 진리를 잘 가르쳐주는 것이었습니다. 자비의 길을 잘 가르쳐주는 역할이 부처님의 자비행인 것입니다. 물론 본인보다 더 배고픈 사람이 있으면 본인의 밥을 나눠주기도 하고 본인보다 더 헐벗은 사람이 있으면 옷을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진리를 가르치는 부분이 기본이 되고 근본이 되어 있지 아니하면 그것은 부처님이 삶으로 보여줬던 자비하고는 상당히 거리가 멀 수 있습니다.

 

▸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 뭇생명을 이익케 하라

그 밑에는 앞에 이야기했던 내용을 더 압축적으로 단순화시켜서 우리가 생활화할 수 있는 수행론이 되도록 정리한 내용을 소개했습니다. 그것을 삼학수행이라는 말로 표현을 했습니다. 그것보다 더 압축한 것으로는 원효스님의 기신론소의 내용과 원효스님의 오도송을 소개했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들을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너무나 많은 이야기 거리들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아주 단순화시키면 그렇다는 말씀이고, 이런 것을 더 단순화시키면 계‧정‧혜 ‘삼학수행’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누구나 함께할 수 있도록 하는 불교수행론이 가능해진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점들은 참고해서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그 다음에 이런 것들을 더 압축해서 한마디로 요약한 것이 기신론 내용입니다. ‘歸一心源 饒益有情(귀일심원 요익유정)’ 한글로 풀면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 뭇생명을 두루 이익케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물의 그물코처럼 연결되어 있는 한 몸이고 한 마음이고 한 생명체의 존재이기 때문에 온갖 노력을 다해서 자비롭게 마음 쓰고 자비롭게 말하고 자비롭게 행동해야 된다. 그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전부다. 이 한 구절이면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모두 포함할 수 있습니다.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가 뭇생명을 두루 이익케 하자. 여기에 맞게 마음 쓰고 여기에 맞게 말하고 여기에 맞게 생활하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괜찮은 삶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동시에 그 내용으로 보면 나도 좋고 너도 좋고 우리 모두에게도 좋다. 그래 단단히 마음먹고 그렇게 살자 하고 딱 이렇게 결심하면 됩니다. 해볼 만하지 않습니까?

 

▸ 분별심 없으면 차별도 없다

끝으로 이런 내용이 원효스님의 오도송 속에도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그것을 참고했으면 좋겠다 싶어서 제가 원효스님의 오도송을 이렇게 풀었습니다. ‘분리 차별의 마음 생기니 온갖 차별 현상 생기네.’ 이 말은 구체적으로 차별해야 할 무엇이 있어서 우리가 차별하는 게 아니고 내 생각이 차별을 만들어내고 있고 내가 차별을 만들어서 또 차별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허물이 누구한테 있습니까? 세상에 있는 게 아니고 본인 생각에 있는 것입니다.

‘분리 차별의 마음 생기니 온갖 차별 현상 생기네. 분리 차별의 마음 사라지니 무덤과 토굴이 둘이 아니네.’ 해골바가지 이야기 들으셨죠? 무덤과 토굴이라는 말은 그 내용입니다. 무덤과 토굴은 하나는 더러운 곳이고 하나는 깨끗한 곳을 말합니다. 그런데 분별심 없으니까 그것이 다르지 않더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너와 나가 다르지 않더라 이런 이야기인 것입니다.

‘온 세상이 오직 한 마음이오.’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일심’이란 말입니다. 온 세상이 다 그물에 그물코처럼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모두가 한 마음이오. 한마음이요. 한생명이다. 그런데 왜 차별하죠? 차별 현상은 누가 만들었을까요? 차별할 무엇이 따로 있지 않은데 본인 스스로의 생각으로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온갖 차별 현상도 오직 분별심일 뿐이네. 나의 분별심, 너의 분별심, 우리의 분별심이 그 차별을 만들어내고 있다. 차별해야 할 뭐가 있는 게 아니고 우리가 뭘 잘 몰라서 마치 차별해야 될 것이 있는 것처럼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유식, 유심 이 두 가지 개념을 다 묶어서 일심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음 밖에 그 어떤 법도 없는데(차별현상) 굳이 법을 찾아 당나라에 갈 필요가 있겠는가.

 

▸ 원효스님, 한국불교의 탄생

그런데 유학도 가지 않았던 원효 스님의 불교관과 불교정신은 당시 세계의 지성들을 감동시켰습니다. 당시 세계의 중심은 당나라였습니다. 오늘의 미국 같은 곳이죠. 원효스님은 유학도 가지 않은 국내파였는데 이분이 얼마나 탁월한가를 잘 보여주는 거죠. 국내파로서 그분이 연구하고 탐구하고 실현해낸 불교관과 불교정신을 저술로 지었습니다. 그 저술이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당나라, 세계적인 지성들, 사상가들, 철학가들, 종교인들을 감동 시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원효스님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원효스님에 의해서 비로소 한국불교가 인도불교나 중국불교의 아류가 아닌, 명실상부한 한국불교가 시작됐다라고 보는 겁니다. 이런 부분들을 우리가 같이 공유하면서 진지하게 지속적으로 이야기를 발전시켜갔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으로 이야기를 정리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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