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적으로 보면 가을로 넘어온 것은 맞는데 이전의 가을 같지는 않습니다. 가을인지 여름인지 분간이 잘 안 되는 그런 가을입니다.
요즘에는 누가 근황이 어떠냐고 물으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늙는 삶도 살아가야 하고 죽는 삶도 살아가야 해서 매우 바쁘다’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늙기 위해서도 바쁘고 죽기 위해서도 바쁩니다. 그러면 반드시 반문이 따라옵니다. 늙기도 바쁘고 죽기도 바쁘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달리 얘기하면 늙음도 열심히 늙어야 되고 죽음도 열심히 죽어야 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늙음을 열심히 늙어가고 죽음을 열심히 죽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달리 수가 없습니다. 늘 하던 대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부지런히 세끼 끼니를 잘 찾아 먹고 또 부지런히 마당에 풀도 뽑고, 사람들 만날 일 있으면 부지런히 만나서 이야기도 나누어야 합니다. 결국은 젊음을, 또는 삶을 잘 살기 위해서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고 늙음을, 그리고 죽음을 잘 늙고 잘 죽기 위해서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살림살이의 내용이 그렇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은 윤회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볼까 싶습니다. 최근에 향봉스님이 책을 냈는데 ‘윤회는 없다’는 내용의 글을 써서 상당히 많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 책에다 도법스님하고 친하다고 이야기를 해 놓아서 사람들이 ‘향봉스님은 윤회가 없다는데 스님은 어떻게 생각하시오?’하고 묻는 사람들이 제법 있습니다. 그래서 윤회에 대해서 내 나름대로 생각했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윤회: 있을까, 없을까?
저는 주로 불교 교리보다는 부처님 삶을 중심에 놓고, 또 내가 경험하는 나의 삶과 연결시켜서 교리를 해석하고 체계를 잡는 방식의 접근을 하고 있습니다. 윤회에 대해서도 그렇게 접근을 해 보았습니다. 누가 부처님한테 ‘윤회는 있습니까?’하고 물으면 부처님이 어떻게 답할까? 또 ‘윤회는 없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또 뭐라고 답할까?
제가 파악한 바로는 ‘윤회가 있다’고 이야기하면 부처님께서는 ‘그건 단견이야’라고 말씀하리라봅니다. ‘윤회가 없다’고 이야기하면 ‘그것도 단견이야’라고 답하실 겁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실입니까? 당연히 양극단을 버리고 중도적으로 보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씀하실 겁니다. 제가 생각할 때 부처님의 기본 입장은 그러리라고 봅니다.
여기 계신 분들 대다수는 교리 공부를 많이 안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설명을 좀 더 덧붙여 보겠습니다. ‘인생은 죽으면 끝이야. 그래서 인생은 허무해.’ 이렇게 단정하는 사고방식을 불교 교리적으로 이야기하면 ‘단견’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단정하는 것은 잘못된 사고방식입니다.
‘인생은 영원불멸한 거야.’ 이렇게 단정하는 것을 교리적으로 말하면 ‘상견’이라고 합니다. 인생이 영원하다고 하는 것은 죽음 없이 계속 살아간다는 이야기인데 그것을 교리적으로는 상견, ‘늘 항상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허무하게 없다고 단정하는 것도 잘못된 견해고 영원히 있다고 단정하는 것도 잘못된 견해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진실일까요? 교리적으로는 ‘중도적으로 보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중도적으로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실제 상황을 놓고 직접적으로 확인되도록 해 봅시다. 사는 것, 또는 죽는 것은 마치 손뼉 소리와 같은 것입니다. 지금 손뼉소리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왜 없죠? 조건이 안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손뼉을 한번 쳐볼까요? (짝짝짝) 지금 손뼉 소리가 있었습니까? 있었습니다. 왜 있었을까요? 조건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어떤 조건이 만들어지느냐에 따라서 끊임없이 인연 따라 나타나기도 하고 인연 따라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연 따라 나타나고 인연 따라 사라지는 활동이 계속 반복됩니다. 그것을 우리 삶으로 가져오면 조건 따라 태어나기도 하고 조건 따라 죽기도 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힌두 전통 속 윤회설
지금부터 제 나름대로 터득한 불교 사유방식의 관점으로 정리한 윤회이야기를 말씀 드려볼까 합니다. 윤회설은 불교가 생기기 이전부터 오랜 전통으로 인도에 있었습니다. 인도인들은 오래전부터 윤회가 있다고 믿어왔습니다. 보통 바라문교, 오늘날로 말하면 힌두교 전통으로서 윤회설은 예전부터 있었습니다.
그때의 윤회설은 영원불멸,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 자아, 인도식으로 말하면 ‘아트만’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트만’을 쉽게 풀어 말하면, 영원불멸의 영혼, 영원불멸의 정신, 영원불멸의 자아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라문교의 윤회설은 영원불멸의 자아, 또는 영혼이라는 것이 있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영혼은 사람이 죽는다 하더라도 육체는 허무하게 사라지지만 영원불멸의 자아는 사라지지 않고 인연 따라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등의 세계를 계속 돌아다닌다는 윤회설입니다.
경전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이 직접적으로 윤회는 있다, 혹은 없다고 단정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설화적인 이야기들 속에서 윤회설을 이야기하고 있긴 하지만, 윤회가 있다거나 혹은 없다고 분명하게 이야기하는 경우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윤회는 없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윤회에 대해서 아무 입장도 취하지 않았을까? 제가 볼 때 매우 단호한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바로 ‘무아(無我)설’입니다. ‘무아’는 잘 아시다시피 쉽게 말하면 ‘나는 없다’는 말입니다. 반야심경 등 여러 경전에서 ‘연기’, ‘무아’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주의 기울여 잘 보십시오. 무아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고 ‘바라문교에서 이야기하는 그런 자아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른 이야기입니다.
불교에서는 ‘공하다’, ‘비었다’, 또는 ‘없다’ ‘아니다’와 같은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한자로는 아닐 비(非), 아니 불(不), 없을 무(無), 빌 공(空)과 같은 단어로 많이 표현합니다. 이 내용과 단어는 반야심경 같은 경전에서 많이 접할 수 있습니다. 이 때 텅 비었다(空), 또는 ‘아니다(不)’,‘없다(无)’라는 것을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공(空)’, ‘무(無)’, ‘불(不)’, ‘비(非)’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그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고 ‘어떤 것 또는 무엇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것이 비었다’, ‘무엇이 없다’, ‘무엇이 아니다’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텅 비었다’,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무아’라는 개념입니다. ‘무아’라는 개념의 뜻도 ‘바라문교에서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영원불멸의 자아(아트만)는 없다’라는 의미입니다.
언뜻 보면 부처님이 윤회설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는 듯 보이지만, 실은 아주 단호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나는 윤회설에 대한 부처님의 아주 단호한 입장이 바로 ‘무아설’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영원불멸의 아트만(자아)이 있어서 죽어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돌아다닌다는’는 윤회설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영원불멸의 아트만은 없다’라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러면 윤회설은 있다는 이야기입니까, 없다는 이야기입니까? 영원히 존재하는 아트만이 없다고 한다면, 생과 사를 따라 뺑뺑 도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그런 윤회설은 없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향봉스님이 윤회는 없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윤회설에 관심이 많은 분들 사이에서 이 이야기가 상당히 화제가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화를 내는 분도 계시고, 비난을 하는 분도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볼 적에 바라문교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윤회이 일반적인 윤회설입니다. 불멸의 자아, 불멸의 영혼이 있어서 이것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생과 사를 따라 돌아다닌다는 윤회설입니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무아를 주장하는 불교가 아트만을 전제로한 일반적인 윤회설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 너무 당연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향봉스님의 ‘윤회는 없다’라는 말도 이렇게 꼼꼼히 따져서 제가 더 첨언을 한다면 ‘바라문교에서 이야기하는 그런 윤회설은 없다’
연기적 윤회설
윤회는 있는가, 없는가? -
안녕하세요?
시간적으로 보면 가을로 넘어온 것은 맞는데 이전의 가을 같지는 않습니다. 가을인지 여름인지 분간이 잘 안 되는 그런 가을입니다.
요즘에는 누가 근황이 어떠냐고 물으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늙는 삶도 살아가야 하고 죽는 삶도 살아가야 해서 매우 바쁘다’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늙기 위해서도 바쁘고 죽기 위해서도 바쁩니다. 그러면 반드시 반문이 따라옵니다. 늙기도 바쁘고 죽기도 바쁘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달리 얘기하면 늙음도 열심히 늙어야 되고 죽음도 열심히 죽어야 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늙음을 열심히 늙어가고 죽음을 열심히 죽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달리 수가 없습니다. 늘 하던 대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부지런히 세끼 끼니를 잘 찾아 먹고 또 부지런히 마당에 풀도 뽑고, 사람들 만날 일 있으면 부지런히 만나서 이야기도 나누어야 합니다. 결국은 젊음을, 또는 삶을 잘 살기 위해서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고 늙음을, 그리고 죽음을 잘 늙고 잘 죽기 위해서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야 하는 살림살이의 내용이 그렇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은 윤회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볼까 싶습니다. 최근에 향봉스님이 책을 냈는데 ‘윤회는 없다’는 내용의 글을 써서 상당히 많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 책에다 도법스님하고 친하다고 이야기를 해 놓아서 사람들이 ‘향봉스님은 윤회가 없다는데 스님은 어떻게 생각하시오?’하고 묻는 사람들이 제법 있습니다. 그래서 윤회에 대해서 내 나름대로 생각했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윤회: 있을까, 없을까?
저는 주로 불교 교리보다는 부처님 삶을 중심에 놓고, 또 내가 경험하는 나의 삶과 연결시켜서 교리를 해석하고 체계를 잡는 방식의 접근을 하고 있습니다. 윤회에 대해서도 그렇게 접근을 해 보았습니다. 누가 부처님한테 ‘윤회는 있습니까?’하고 물으면 부처님이 어떻게 답할까? 또 ‘윤회는 없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또 뭐라고 답할까?
제가 파악한 바로는 ‘윤회가 있다’고 이야기하면 부처님께서는 ‘그건 단견이야’라고 말씀하리라봅니다. ‘윤회가 없다’고 이야기하면 ‘그것도 단견이야’라고 답하실 겁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진실입니까? 당연히 양극단을 버리고 중도적으로 보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씀하실 겁니다. 제가 생각할 때 부처님의 기본 입장은 그러리라고 봅니다.
여기 계신 분들 대다수는 교리 공부를 많이 안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설명을 좀 더 덧붙여 보겠습니다. ‘인생은 죽으면 끝이야. 그래서 인생은 허무해.’ 이렇게 단정하는 사고방식을 불교 교리적으로 이야기하면 ‘단견’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단정하는 것은 잘못된 사고방식입니다.
‘인생은 영원불멸한 거야.’ 이렇게 단정하는 것을 교리적으로 말하면 ‘상견’이라고 합니다. 인생이 영원하다고 하는 것은 죽음 없이 계속 살아간다는 이야기인데 그것을 교리적으로는 상견, ‘늘 항상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허무하게 없다고 단정하는 것도 잘못된 견해고 영원히 있다고 단정하는 것도 잘못된 견해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진실일까요? 교리적으로는 ‘중도적으로 보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중도적으로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실제 상황을 놓고 직접적으로 확인되도록 해 봅시다. 사는 것, 또는 죽는 것은 마치 손뼉 소리와 같은 것입니다. 지금 손뼉소리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왜 없죠? 조건이 안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손뼉을 한번 쳐볼까요? (짝짝짝) 지금 손뼉 소리가 있었습니까? 있었습니다. 왜 있었을까요? 조건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어떤 조건이 만들어지느냐에 따라서 끊임없이 인연 따라 나타나기도 하고 인연 따라 사라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연 따라 나타나고 인연 따라 사라지는 활동이 계속 반복됩니다. 그것을 우리 삶으로 가져오면 조건 따라 태어나기도 하고 조건 따라 죽기도 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힌두 전통 속 윤회설
지금부터 제 나름대로 터득한 불교 사유방식의 관점으로 정리한 윤회이야기를 말씀 드려볼까 합니다. 윤회설은 불교가 생기기 이전부터 오랜 전통으로 인도에 있었습니다. 인도인들은 오래전부터 윤회가 있다고 믿어왔습니다. 보통 바라문교, 오늘날로 말하면 힌두교 전통으로서 윤회설은 예전부터 있었습니다.
그때의 윤회설은 영원불멸,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 자아, 인도식으로 말하면 ‘아트만’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트만’을 쉽게 풀어 말하면, 영원불멸의 영혼, 영원불멸의 정신, 영원불멸의 자아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라문교의 윤회설은 영원불멸의 자아, 또는 영혼이라는 것이 있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영혼은 사람이 죽는다 하더라도 육체는 허무하게 사라지지만 영원불멸의 자아는 사라지지 않고 인연 따라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등의 세계를 계속 돌아다닌다는 윤회설입니다.
경전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이 직접적으로 윤회는 있다, 혹은 없다고 단정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설화적인 이야기들 속에서 윤회설을 이야기하고 있긴 하지만, 윤회가 있다거나 혹은 없다고 분명하게 이야기하는 경우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윤회는 없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윤회에 대해서 아무 입장도 취하지 않았을까? 제가 볼 때 매우 단호한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바로 ‘무아(無我)설’입니다. ‘무아’는 잘 아시다시피 쉽게 말하면 ‘나는 없다’는 말입니다. 반야심경 등 여러 경전에서 ‘연기’, ‘무아’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주의 기울여 잘 보십시오. 무아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고 ‘바라문교에서 이야기하는 그런 자아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하고는 근본적으로 다른 이야기입니다.
불교에서는 ‘공하다’, ‘비었다’, 또는 ‘없다’ ‘아니다’와 같은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한자로는 아닐 비(非), 아니 불(不), 없을 무(無), 빌 공(空)과 같은 단어로 많이 표현합니다. 이 내용과 단어는 반야심경 같은 경전에서 많이 접할 수 있습니다. 이 때 텅 비었다(空), 또는 ‘아니다(不)’,‘없다(无)’라는 것을 ‘텅 비어서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공(空)’, ‘무(無)’, ‘불(不)’, ‘비(非)’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그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고 ‘어떤 것 또는 무엇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것이 비었다’, ‘무엇이 없다’, ‘무엇이 아니다’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텅 비었다’,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무아’라는 개념입니다. ‘무아’라는 개념의 뜻도 ‘바라문교에서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영원불멸의 자아(아트만)는 없다’라는 의미입니다.
언뜻 보면 부처님이 윤회설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는 듯 보이지만, 실은 아주 단호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나는 윤회설에 대한 부처님의 아주 단호한 입장이 바로 ‘무아설’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영원불멸의 아트만(자아)이 있어서 죽어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돌아다닌다는’는 윤회설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영원불멸의 아트만은 없다’라고 주장하셨습니다.
그러면 윤회설은 있다는 이야기입니까, 없다는 이야기입니까? 영원히 존재하는 아트만이 없다고 한다면, 생과 사를 따라 뺑뺑 도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그런 윤회설은 없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향봉스님이 윤회는 없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윤회설에 관심이 많은 분들 사이에서 이 이야기가 상당히 화제가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화를 내는 분도 계시고, 비난을 하는 분도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볼 적에 바라문교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윤회이 일반적인 윤회설입니다. 불멸의 자아, 불멸의 영혼이 있어서 이것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생과 사를 따라 돌아다닌다는 윤회설입니다. 그런데 잘 살펴보면 무아를 주장하는 불교가 아트만을 전제로한 일반적인 윤회설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 너무 당연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향봉스님의 ‘윤회는 없다’라는 말도 이렇게 꼼꼼히 따져서 제가 더 첨언을 한다면 ‘바라문교에서 이야기하는 그런 윤회설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