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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법회[2023년 10월 보현법회] 여성도 빛나고 남성도 빛나는 페미니즘 운동

2023년 10월 보현법회

 

여성도 빛나고 남성도 빛나는 페미니즘 운동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해

우리 사회에는 차별 때문에 괴로워하고 차별받는 것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근래에는 ‘차별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없는가? 또는 불교계나 실상사가 차별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만들어 가는데 역할을 해주면 좋지 않겠는가?’하는 주문을 여러 차례 받았습니다.

여러분들도 차별 받아본 경험이 있으시죠? (예.) 우리사회에 차별문제가 심각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답답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차별문제를 고민하는 분들에게 ‘한국사회에서 차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하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차별금지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차별금지법 제정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니, 차별을 없애자고 하는 것에 반대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그걸 반대하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누가 그것을 반대하는지 아십니까?

차별은 인권문제와 연결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부분은 이미 제도가 많이 만들어져 있기도 합니다.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관련 제도가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종교적 신념과 관련되는 부분이 있어서 종교계에서 제동을 걸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치권에서는 종교계 눈치를 보느라 법제화하겠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진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떠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스님들이 처음 출가하면 배우는 내용 중에 평등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스님들은 부모 형제와 인연을 끊고 절에 들어옵니다. 부모, 형제와의 인연은 혈연, 그러니까 피로 맺어진 인연, 인연치고는 가장 강력한 인연인 셈입니다. 또 인간적으로 너무 소중한 인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다른 건 몰라도 이것은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 되는, 거의 불문율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출가하는 사람들은 그런 혈연을 끊고 떠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이런저런 의심이 생기기도 하고 또 이런저런 물음을 묻는 것이 마땅한 것이기도 합니다.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혈연까지 끊고 출가하는 이유가 뭐냐? 도대체 그렇게 지독하게 혈연을 끊는 이유가 무엇이냐?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나?’ 하는 물음을 스스로 하게 됩니다.

그런 물음에 대해서 불교는 이렇게 답을 합니다. ‘세상의 진리는 평등하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는 유형무형의 그 어떤 것들도 차별해도 괜찮은 것은 없다. 모두가 소중하다.’ 이런 내용을 불교, 특히 화엄경에서는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부처 아닌 것이 없다’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물 하나하나가 부처 아닌 것이 없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인종 등 모든 존재는 어떤 이름으로도 차별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존재, 평등한 존재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 평등이 구현되지 않고 있습니다. 내용적으로는 모두가 평등한데 현실에서는 평등이 실현되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고 불행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스님들은 나 하나라도 혈연, 개인적 인연, 사적인 인연을 넘어서서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이 갈망하고 있는 평등의 진리가 실현되는데 나의 열정을 다 바쳐서 살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한 인간으로서 가장 인간답게 사는 길이라고 생각해서 마음이 아프고 안타깝지만 혈연까지 끊는 결단을 하고 출가하는 것입니다.

‘법계의 진리가 평등하기 때문에 그 평등의 진리가 구현되도록 하는데 내 인생의 열정을 불사르겠다. 그것이 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선택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삶이고 위대한 삶이기에 마음이 아프지만 결단을 하고 그 길을 가고자 출가한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것을 문장으로 표현하면 ‘할애사친(割愛私親) 법계평등(法界平等)’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부모, 형제의 인연을 끊고 출가하는 이유는 모든 존재가 평등하기 때문에 그 평등함이 현실에서 구현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고자 나는 이 길을 가는 것이다.’ 물론 그 사람들에게는 내 부모 형제도 다 포함이 되죠. 그런 기억과 연결되어지면서 실상사에서라도 그 부분에 더 관심을 갖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이 절이 존재하는 이유, 스님들이 존재하는 이유, 또는 불교인들이 존재하는 이유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내용을 내 삶으로 살아내기도 하고 이 사회가 그렇게 갈 수 있도록 삶의 문화를 가꾸는 것이 우리의 역할인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차별받아서 고통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차별로 인해서 불행해지지 않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누구나 평등하게, 서로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절이 있고 부처님이 있고 탑이 있고 스님이 있고 불자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것을 좀 더 제대로 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마음을 냈으면 좋겠습니다. 근황의 하나로 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무엇을 사경하고 독경할 것인가

실상사가 부족함이 많긴 하지만 자부심을 갖고 자랑해도 좋을 내용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그런 부분도 한두 가지 같이 생각을 해볼까 싶습니다. 조금 전에 함께 읽은 ‘약사경’에는 앞서 이야기했던 차별 그리고 평등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차별과 평등 이야기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파악이 되십니까? 어떤 것이 차별 이야기고 어떤 것이 평등 이야기일까요?

미혹의 사고방식이 차별의 사고방식인 겁니다. 평등의 사고방식은 깨달음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평등을 더욱 적극적으로, 긍정적으로 표현한 내용이 있습니다. 뭘까요? 약사경에서는 그것을 ‘-빛나라, -빛나라’라는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경도 많이 권유하고 독경도 많이 권유합니다. 그런데 저는 뜻 모르는 경전을 사경하기보다는 ‘붓다로 살자 발원문’이라든가 ‘약사경’같이 뜻을 알 수 있는 내용을 사경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문으로 된 경전은 내용이 어렵습니다. 뜻을 잘 파악하고 이해해야 그것이 내 사고가 되고 내 말이 되고 내 행동이 되어 집니다. 그럴 때 실제 신행생활이 내용 있는 신행생활이 됩니다.

그런데 뜻이 잘 파악이 안 되고 이해가 안 되고 공감이 안 되면 그것을 내 사고가 되도록 하고 말이 되도록 하고 행동이 되도록 하는 것이 잘 안됩니다. 그래서 형식은 불교신행을 하고 있는데 내용은 공허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내가 불교신행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자신감이 생기기 어렵습니다. 자신감과 자부심이 안 생기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불교신행하면 이런 것이 좋아’라는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스스로의 불교 신행생활에 대해 자신감과 자부심이 생길 수 있도록, 또는 누구를 상대하더라도 ‘불교신행의 내용은 이런 것인데, 참 좋아’라고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는 노력을 하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뜻을 알 수 있는 내용을 독경하고 사경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우리가 하고 있는 것 중에서는 ‘붓다로 살자 발원문’과 ‘21세기 약사경’이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여성도 빛나고 남성도 빛나는 페미니즘운동

최근에 차별문제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직접 와서 묻기도 하고, 실상사가 할 수 있는 역할을 해달라고 요청을 해서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사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 부분에 대한 답이 되게 하려고 많은 노력을 해오고 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천왕문 앞에 있는 주련입니다. 천왕문 주련에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가득함도 빛나고 비움도 빛나라.’ ‘삶도 빛나고 죽음도 빛나라.’ 이런 내용을 내걸고 있는 절은 아마 지구상에 실상사밖에 없을 겁니다. 내가 볼 때에는 이런 점에서는 실상사가 세계 유일의 사찰일 겁니다. 난 이런 부분을 우리가 잘 알고 자부심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내용을 골동품처럼 걸어놓고 쳐다만 보지 말고 내 마음과 내 몸에 도장처럼 딱딱 찍히도록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도장 찍듯이 내 마음에도 그 내용을 새기고 몸에도 새기는 것, 이것이 수행인 겁니다. 이것이 기도고 정진이고 진정한 공부인 것입니다. 이렇게 안 하면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소용없습니다. 골동품에 지나지 않는 것이죠.

우리가 살아야 할 내용을 몸과 마음에 새기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 내용이 내 마음에도 찍히고 몸에도 찍혀서 무언가를 생각할 때 그런 사고방식으로 생각하게 되고 무언가를 말하게 되면 그런 사고방식으로 말하게 되고 행동할 땐 그런 사고방식으로 행동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을 뭐라고 합니까? 부처라고 합니다. 부처가 특별한 사람이 아닌 겁니다.

우리는 주로 나, 혹은 내 편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부처는 우리하고 다른 점이 ‘나를 위해서, 내 편을 위해서’라는 관점에서 삶을 다루지 않습니다. ‘나에게 괜찮게, 동시에 너도 괜찮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도 괜찮게 한다.’ 이것이 부처님의 마음씀입니다.

어떤 것이 인간답습니까? 어떤 것이 아름답습니까? 어떤 것이 멋있습니까? ‘나만, 우리 편만, 우리 식구들끼리만 좋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름답습니까? 멋있습니까? 설사 그런다고 해서 정말 행복해질까요?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행복할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편안해지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는 여유로워지지도 않습니다. 유연해지지도 않고 멋있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도 빛나고, 너도 빛나라’라는 방식으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더 쉽게 정리하면 ‘나도 괜찮게, 너도 괜찮게, 우리 모두 괜찮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불교 언어로 바꾸면 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자리이타(自利利他).

‘나만 괜찮게, 우리끼리만 괜찮게’ 이 사고방식으로 삶을 다뤄가면 삶이 어떻겠습니까? 너와 나의 관계도, 집안 식구들끼리의 관계도, 또 이 사회의 판에서도 창과 방패의 싸움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는 인간다운 아름다움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멋있게 말을 꾸며봐야 결국 ‘센 놈만 산다. 이기는 놈만 산다’ 이렇게 됩니다. 거기에 어떻게 인간다움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반면에 ‘너도 괜찮고, 나도 괜찮고, 우리 함께 괜찮을 수 있도록 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면 어떻게 삶을 다루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당연히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삶이 다뤄지게 되는 거죠. 백지장을 맞들면 어떻습니까? 누구한테 좋습니까? 너도 괜찮고 나도 괜찮아. 이렇게 되는 거죠.

이런 것을 우리는 보살행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보살행이라는 내용을 또 다른 표현으로 하면 자리이타(自利利他), 더 쉽게 풀면 ‘백지장을 맞드는 방식으로 너도 괜찮고 나도 괜찮게 한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가 올바른 길을 가는 것입니다. 바람직한 길을 가는 것이고, 대단히 인간적으로 괜찮은 길을 가는 것이 됩니다.

그런 관점으로 실상사를 이래저래 둘러보면 이런 생각이듭니다. 낮에 보는 실상사의 아름다움, 밤에 보는 실상사의 멋과 아름다움이 같겠습니까, 다르겠습니까? 밤에 진지하게 살펴본 적은 없으시죠? 낮은 낮대로 정말로 괜찮고 밤은 밤대로 좋습니다. 그런데 밤에는 낮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 있습니다. 대부분은 비슷하지만 확연하게 다른 것이 있지요.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늘에 별이 빛나고 있습니다. 또 마을에도 별이 빛나고 있습니다. 하늘의 별과 마을의 불빛들이 두루두루 어울려서 실상사의 아름다운 밤풍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실상사’하면 낮보다는 밤풍경을 더 강조할 만하지 않겠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상사의 밤 풍경이 대단히 아름답다. 또는 뭐 실상사가 어떤 곳인가? 밤 풍경이 아름다운 절이다. 이렇게 표현돼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에 초점이 있는 건 아니고, 낮은 밝음이고 저녁은 어두움입니다. 그러니까 밝은 상태에서 실상사의 실상, 어둠 상태에서 실상사의 실상이 있습니다. 우리는 ‘밝음은 좋은 것, 어둠은 나쁜 것’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실상사를 놓고 생각해 보면 밝음 상태에서의 실상사도 매력적이고 어두운 상태에서도 실상사도 대단히 매력적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밝음도 빛나라 어두움도 빛나라’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밝음도 빛나고 어두움도 빛나면 밝음과 어두움이 차별이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차별이 없는 거죠.

이런 것과 연결시켜서 차별과 평등의 문제도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많이 생각하고 탐구하고 대화와 토론을 해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럴 때 어떤 것이 평등이고 어떤 것이 차별인지, 또 이 문제를 어떻게 다뤄가는 것이 바람직할지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약사경 내용도 글로 쭉 읽어보면 내용은 대강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평등의 관점에서 너에게도 괜찮고 나에게도 괜찮고 이쪽에도 괜찮고 저쪽도 괜찮을 수 있도록 하려면 실제 상황과 연결시켜서 내용을 곱씹어보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해서 파악된 내용을 가지고 서로 대화하고 탁마하면 함께 성장해가는 데 실제적으로 큰 힘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약사경 내용 중에 ‘남성만 존중하고 여성을 비하하는 미혹문명 내려놓고 여성도 빛나고 남성도 빛나는 깨달음의 밝은 문명 피어나게 하옵소서’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최근에 차별문제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제정하도록 하는데 뭔가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요청하는 사람들은 대표적으로 성소수자들입니다. 그런데 성소수자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 사회적 선입견이 심각한 부분이 대단히 많습니다. 그런 선입견이 가장 강한 곳이 개신교와 천주교입니다. 기독교의 신념 체계 속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용을 잘 따져보면 잘못된 이해와 잘못된 인식에 토대해서 만들어진 편견이고 선입견입니다. 과거는 그렇게 하는 것이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이제는 그런 잘못된 편견을 걷어내야 될 때인데 여전히 과거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는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그걸 강한 그런 신념으로 붙잡고 있고 종교적으로 차별하니까 종교계 눈치 보는 정치인들이 제대로 역할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민주주의 시대에 너무나 당연히 해결돼야 될 문제입니다. 국제사회에서 이런 모습을 본다면 굉장히 창피한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직접 차별의 문제에 부딪쳤던 경험은 가장 구체적으로는 남녀차별문제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남성도 빛나고 여성도 빛나라’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남녀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운동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차별철폐를 위한 운동들을 보면 또 다른 차별을 몰고 올 위험성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서로를 미워하게 하고 서로를 화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방식 말고 다른 방식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그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다른 방식의 운동을 고민해야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남녀차별문제는 우리가 현장에서 직접적으로 부닥치는 문제들입니다. 그에 대한 대안으로 ‘남성만 존중하고 여성을 비하하는 미혹문명 내려놓고 여성도 빛나고 남성도 빛나는 깨달음의 밝은 운명 피어나게 하옵소서’와 같은 방식의 운동을 해보면 어떨까. 실상사는 우리함께 빛나는 페미니즘 운동, ‘여성도 빛나고 남성도 빛나는 페미니즘 운동’을 모색해보면 어떨까요? 그러면 상당히 멋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남성도 빛나고 여성도 빛나는 페미니즘 운동을 실상사에서 해 보면 좋겠습니다. 많은 담론과 학습을 하면서 남녀가 다 좋아하고 남녀가 다 공감할 수 있는 페미니즘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이 운동이 효과적이지 않겠습니까? 남녀가 함께 할 수 있는, 남녀가 서로에게 유익할 수 있는 이런 페미니즘 운동을 함께 궁리해보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최근의 근황이기도 하고 또 하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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