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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법회[2024년 2월] 스님, 아닌 '승가'에 귀의하는 이유

2024년 2월 보현법회

 

스님, 아닌 ‘승가’에 귀의하는 이유

 

쉬운 불교 하는 절, 실상사

안녕하세요. 이제 확실하게 새해로 넘어와서 새 살림을 이야기해야 하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앞서 우리 신도회장님이 데니스 노블 교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는데 정정해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그분이 방문한 한국 절이 많지 않습니다. 대 표적으로 통도사, 실상사, 해남 미황사, 백양사의 암자 이렇게 네 군데를 다니며 인터뷰를 했습니다.

백양사 암자에는 사찰음식으로 아주 유명한 비구니스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미황사는 금강스님이 ‘참사람 향기’라는 수련프로그램을 아주 잘하고 계십니다. 통도사는 종정(?)스님이 계시는 절입니다. 그런데 실상사는 왜 왔는지 궁금해서 기획팀에게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실상사가 불교를 가장 쉽게 설명하는 절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왔다고 합니다.


드높은 뜻을 품고 출가했지만

최근의 근황은 좀 서글픈 마음이 드는 경우와 혼자 헛웃음을 웃는 경우, 두 가지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우리가 출가수행자의 길을 선택할 때는 무언가 좋은 점이 있으니까 선택하지 않겠습니까? 청춘을 불사르고 또는 인생을 불사르고 가는 길인데 어줍지 않으면 선택할 턱이 없지요.

나도 기대를 가지고 출가수행자의 길을 선택했고 또 그 길을 잘 가겠노라고 스스로 다짐했습니다. 그런 과정으로서 행자생활도 하고 수계의식도 하고 아침저녁으로 예불도 하게 됩니다. 그러한 전 과정이 출가수행자의 길로서 참 멋있고 좋은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도 유익한 길이고 세상을 위해서도 꼭 있어야 할 길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출가생활이 좀 더 구체적으로 무엇이 좋아보였을까요?

우리는 살아 보면 늘 선과 악, 옳음과 그름, 마음에 들어 안 들어, 이해득실 등에 구속받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에 구애받지 않고 그런 것을 훌쩍 뛰어넘어서 정말로 인간답게, 불교적으로는 장부답게 당당하고 활달한 삶을 살 수 있는 길이 출가수행자의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청춘을 불사르고 인생을 불사르고 그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제가 출가한 지가 60년 가까이 됩니다. 그러니까 내 인생 전부가 출가생활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살아온 과정들을 되짚어보면 뜻한 바와는 다르게 스스로도 선악, 시비, 이해득실 속에 갇혀서 터덕터덕 살아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한 가지, 한국불교와 조계종단, 더 좁히면 금산사 17교구 불교, 더 좁히면 실상사가 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그렇게 얽혀 있다 보니까 선이냐 악이냐, 옳은 일인가 그른 일인가, 이익이 있는 일인가 손해를 보는 일인가, 성공하는 일인가 실패하는 일인가, 이런 내용을 갖고 꾀를 부리고 머리를 써야만 하는 상황에 계속 부닥칩니다. 주지라는 이름을 놓고 그런 상황에 부닥치기도 하고 종회의원이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부닥치기도 합니다.

활달하고 당당하게 삶을 살 수 있다 해서 출가수행자의 길을 선택했는데 그렇게 잘 안 되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도 잘 안 되고 나와 인연 있는 조건들 속에서 불가피하게 휘말릴 수밖에 없는 상황들도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마주하면 좀 씁쓸하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합니다. 출격장부의 길을 가겠노라고 출가수행자의 길을 선택을 했는데, 출격장부는커녕 졸장부 중에서도 바닥을 헤매는 최근의 상황이 씁쓸하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늙음도 빛나라또 한 가지는, 이런 것은 늙어가는 분들이라면 대체적으로 경험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요즘에 ‘저기를 갔다 와서 뭘 해야지’하고 갔다 왔는데 뭘 하려 했는지 잊어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엉뚱한 짓거리를 한참 하다가 ‘아, 내가 이거 하려고 했었지?’하고 뒤늦게 생각나는 상황들이 가끔 생깁니다. 그때마다 혼자 ‘허허’하고 헛웃음을 웃곤 합니다.

늙어가는 현상으로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일도 좀 자연스럽게, 기꺼이 마주하려 합니다. ‘그래, 그것도 내 삶이야. 그것도 내 인생이야. 늙음은 늙음대로 괜찮은 거니까 너무 두려워하거나 슬퍼하거나 불안해할 일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혼자 헛웃음을 웃는 경우가 가끔 생깁니다. 보살님들 사는 것하고 비슷해 보이죠? 그래서 위로가 되지요? 제 근황은 그렇습니다.

 

승가 앞에 귀의합니다

방금 우리가 약사경을 독송했습니다. 오늘은 약사경 11쪽에 나와 있는 내용을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모든 발원 마치옵고 삼보전에 귀의합니다. 시방세계 항상 계신 보배로운 부처님께 지성귀의하옵니다. 시방세계 항상 계신 보배로운 가르침에 지성귀의하옵니다. 시방세계에 항상 계신 보배로운 승가 앞에 지성귀의하옵니다.’ 마지막 줄에 있는 ‘시방세계 항상 계신 보배로운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는 내용이 ‘승가 앞에 귀의합니다’로 바뀌었습니다. 정직하게 고백을 하면 오늘은 어떤 내용으로 법문을 할지 정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법회 날이 다가오면 늘 법문 내용을 궁리하게 됩니다. 궁리하는 것이 마땅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솔직하게 말하면 오늘은 법문할 내용이 잘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르겠다. 법회 자리에 가서 보자. 어떻게 되겠지’하는 마음으로 왔습니다. 그렇게 있는데 종무소의 한나법우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우리가 예불문이나 발원문에서 ‘삼보에 귀의한다’는 내용이 들어갈 때, 마지막에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는 말로 마칩니다. 이것을 ‘승가 앞에 귀의합니다’라고 바꾸자고 해서 오랫동안 검토를 해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바꾸는 것이 적절하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시행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그 이야기를 대중들에게 전해야 한다’라고 전화가 온 것입니다. 전화를 받는 순간 ‘무슨 법문을 해야 할지 대책이 없었는데 잘 됐다’하는 생각을 하며 법회에 왔습니다. 이런 걸 ‘궁죽통’이라고 하나요? 궁지에 몰리니까 수가 생기네요.

제가 지금 드리고자 하는 말씀은 우리가 수없이 이야기해 왔고 들어왔던 내용들입니다. 우리가 독경할 때 보기도 하고 발원문에서 보기도 하고 또 곳곳에 이런 내용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내용이 명료하게 정리되어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볼 때는 ‘이게 뭐지?’ 하고 생각했다가 설명을 하면 ‘아, 그렇구나’ 합니다. 그렇지만 또 잊어버리고 대충 지나가게 됩니다.그래서 어떻게 보면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고 너무나 많이 들은 이야기고 너무나 많이 했던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극소수일 겁니다. 대다수는 긴가민가하는 분들일 텐데, 그 분들을 위해서 오늘 이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분명하게 아는 분들은 다시 되새김질한다는 심정으로 들으시면 됩니다. 긴가민가하는 분들은 더 정신을 바짝 차려서 ‘이제 긴가민가하는 불자를 끝내야 되겠다, 긴가민가하는 살림살이를 넘어서야 되겠다’ 이렇게 단단히 마음먹고 들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부처님은 뭘 하시는 분일까요? 우리가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뭘 어떻게 하셨길래 우리가 부처님을 거룩하다고 이야기할까요? 그 물음에 답이 될 수 있는 이야기를 할 분이 안 계세요? 여전히 긴가민가 한가 보네요.

부처님이 거룩한 이유는 많이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내용들이 있지만, 그런 것을 다 늘어놓으면 자꾸 긴가민가하게 되니까, 압축하고 단순화시켜서 몇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부처님은 깨달으신 분이라는 겁니다. 보통 ‘꿈에서 깨어나신 분’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또는 ‘무명에서 밝음으로, 어두움에서 밝음으로 나오신 분’, ‘인간이라면 알아야 될 내용을 제대로 아신 분’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꿈에서 깨어나신 분, 몰랐던 것을 잘 아신 분, 그리고 깨달은 내용, 알아낸 내용을 온전하게 자기 삶으로 살아가신 분. 그 외에도 부처님이 거룩한 이유를 많이 이야기 할 수 있지만 단순화시켜서 압축적으로 이야기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스스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자기 자신을 뭐라고 표현하고 있는가? ‘나는 다만 길을 가리킬 뿐이다.’ 길 안내하는 사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길을 잘 가르치고 안내하는 것이 부처님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다만 길을 가르칠 뿐이다. 가고 안 가고는 본인의 몫이다.’ 길을 가는 것은 네가 알아서 하라는 것입니다. 부처님 스스로가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 대한 비유가 있습니다. 부처님이 살던 시대에도 농사짓고 살 때인데, 농사짓는 데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소가 제일 중요합니다. 소가 없으면 농사짓는 일이 죽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할 수 있죠. 부처님 당시에도 소가 중요한 시대였기 때문에 소를 비유로 듭니다.

‘소에게 물을 먹여야 하는데 좋은 물을 마실 수 있는 곳까지 소를 데려갈 수는 있지만 물을 먹고 안 먹고는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물을 마시는 것은 알아서 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와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나는 길을 가르칠 뿐이다. 가고 안 가고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

여기에는 더 보태야 할 설명이 있습니다. ‘이 길로 가기만 하면 틀림없다. 그 길로 가기만 하면 네가 원하는 것이 반드시 실현될 수 있다. 그것은 털끝만큼도 의심할 것이 없다. 그렇지만 길을 가고 안 가고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본인이 가야 된다.’ 이런 말입니다.

이 말에 직접적으로 해당되는 예가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아기가 배가 고파서 울고 있는데, 자기 목숨보다도 아기를 더 사랑하는 엄마가 대신 밥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 아기의 배고픔이 해결될까요? 엄마가 아기를 당신 목숨보다 더 사랑한다 하더라도 엄마가 대신 밥을 맛있게 먹는 것으로 아기의 배고픔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삶이란 끝내 본인이 해야 될 몫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다만 길을 가리킬 뿐이다.’ 구체적으로는 ‘물을 먹여야 될 소를 물이 있는 데까지 잘 안내해서 도착하도록 할 수는 있다. 하지만 물을 먹고 안 먹고는 본인의 몫이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이 이야기로 보면 그동안 여러분이 생각했던 부처님 이미지하고 부처님이 자기 자신을 이야기한 것이 같아 보입니까, 달라 보입니까? 아마 백이면 백, 다를 거라고 봅니다. 다시 말하면 부처님은 우리한테 복을 주고 벌을 주는, 그런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처님이 우리한테 복, 혹은 벌을 준다고 생각을 합니다. 부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누구도 사람한테 벌을 주거나 복을 줄 수 없습니다. 세상에 그런 일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잘못 알아서 만들어진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이 벌을 준다. 하느님이 복을 준다. 이런 이야기들은 잘 모르고 잘못 생각해서 만들어진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 구속당하고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아무리 좋은 길이라 하더라도 내가 직접 가는 것보다 부처님이 알아서 힘든 것은 막아주고 좋은 것은 몽땅 전해주면 훨씬 편하고 좋지 않겠어요? 우리는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또 그렇게 접근해서 그런 것이 이루어졌다고 생각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열심히 하니까 그렇게 되더라’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경우도 있긴 합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도 잘 관찰하고 내용을 잘 파악해 보면 누군가가 복이나 벌을 주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길을 대신 가주면 좋겠다고 생각 할 수는 있지만, 실제 내용을 잘 살펴보면 그것이 잘 가르쳐주는 길을 본인이 직접 잘 가는 것만큼 좋지 않습니다. 부처님을 비롯하여 누군가가 대신 이루어주는 것처럼 보이는 일에는 주로 요행수들이 있어 위험합니다. 반면 부처님이 가르쳐 준 길은 잘 알고 가기만 하면 100%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대충 생각하면 부처님이 알아서 길을 가주면 좋을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는 부처님이 가르쳐 준 길을 본인이 제대로 알고 제대로 가는 것이 최고임이 확실합니다.

그 틀림이 없는 것은 어느 정도 틀림이 없을까? 엄마가 아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배고파서 우는 아이를 위해서 열심히 맛있는 걸 먹습니다. 누군가가 갖다 주기도 하고 부처님이 갖다 주기도 하고 하느님이 갖다 주기도 한 맛있는 음식을 먹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해도 아이의 배고픔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배고파서 우는 아이는 아이 스스로가 젖을 받아먹어야 해결되지, 엄마가 아무리 좋은 것을 먹어도 아이의 배고픔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먹을 것을 갖다 주고 하느님이 갖다 준다고 해도 아이 스스로가 받아먹지 않는 한 아이의 배고픔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반면, 부처님이 가르쳐 준 길은 제대로 알고 제대로 가기만 하면 당연히 삶이 문제들이 깔끔하게 해결될 수 있습니다. 또는 우리가 희망하는 것들이 분명하게 실현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잘 찾아 갈 수 있도록 길을 잘 알려주는 것이 바로 불교입니다. 또 한 가지, 부처님이 유언처럼 하신 말씀 중에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또 ‘뜻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말라’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늘 사람에, 혹은 말에 의지하곤 합니다.

실상사를 한 예로 살펴보겠습니다. 실상사가 사부대중공동체라는 이름으로 공부, 수행,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활동을 통해서 스스로에게도, 함께하는 대중들에게도, 또 실상사를 바라보고 있는 지역사회 주민들, 멀고 가까운 곳에서 실상사와 인연 맺은 분들에게도 유익할 수 있도록 이런저런 모색들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이 잘 되려면 우리 모두가 화합을 이루어서 함께하는 것이 최상의 길입니다. 그래서 화합하기 위해 많은 이야기들을 합니다. 화합해서 함께 잘 해갈 수 있도록 공부도 하고 대화도 많이 해야 합니다. 또 회의도 많이 하고 여러 회의 체계도 만들어야 합니다. 다른 분들은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처음부터 지금까지 늘 같이 해 온 제가 보기에는 이런 부분이 굉장히 많이 성장하고 발전했습니다. 물론 더 완성도를 높여가야 되는 것은 지속적인 과제로 있습니다.

실상사는 대중이 함께해서 여러 일들을 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이런 내용을 잘 모르는 분들은 실상사 와서도 ‘회주스님한테 가서 이야기하면 다 해결 된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이건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하지 말자고 하는 것이 부처님의 뜻입니다.‘바보 세 사람이 모여서 대화를 나누면 문수지혜가 나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대중이 함께 대화하고 토론하고 화합을 이루어서 함께 잘 해 가면 그것이 최고’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정신을 잘 살려가기 위해 부처님께서 ‘사람에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 ‘말에 의지하지 말고 뜻에 의지하라’는 가르침을 폈던 것입니다.

‘법’은 ‘교리’를 뜻하지만, 교리가 삶이 되도록 만들어내야 합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우리의 삶이 될 수 있는 방법을 한마디로 요약해서 말하면 ‘화합해서 더불어함께 잘 해 가자’입니다. 화합해서 더불어함께 잘 해가려면 공부도 많이 해야 하고 대화와 토론도 많이 해야 하고 회의도 많이 해야 됩니다. 그런 공론의 과정을 거쳐서 ‘그래. 그게 맞아. 그게 좋겠어. 우리 그렇게 한번 해보자’ 이렇게 합의된 내용을 가지고 활동을 해 나가야 합니다. 그런 걸 세상에서는 ‘민주주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보면 정반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실상사는 이런 것을 완성도 있게 해 나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민주적 합의를 위한 제도도 만들고 그런 문화도 만들어 가고 공동체 구성원 개개인도 우리 모두가 진정 더불어 함께해야 될 도반으로 살 수 있도록 실력을 길러가고 있습니다.

아마 이렇게 되면 세상에서 ‘실상사야말로 진짜 민주주의가 완성도 있게 운영되고 있다. 거기 가서 배우자’ 그러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가 뭘 한다면 그 정도는 해야 되지 않겠나 싶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실상사 가면 길이 있어. 실상사 가면 답이 있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좋지 않겠습니까? 어떠십니까? 그렇게 한번 해보겠다고 박수 쳐서 결의를 합시다. (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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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귀의에 담긴 의미

지금까지는 ‘사람에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음은 ‘말에 의지하지 말고 뜻에 의지하라’는 내용으로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앞서 보았던 약사경의 마지막 구절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했을 때와 ‘승가 앞에 귀의합니다’라고 했을 때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에는 같은 내용으로 들립니까, 다른 내용으로 들립니까? ‘스님들’이라고 하면 사람에게 의지하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부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내용하고는 정반대가 되어 버립니다.

종단에서는 한문으로 된 내용을 한글화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삼귀의(三歸依)’도 한문으로 되어 있던 것을 한글화했습니다. ‘귀의불 양족존 귀의법 이욕존 귀의승 중중존(歸依佛 兩足尊 歸依法 離欲尊 歸依僧 衆中尊)’을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로 번역했습니다. 한문에는 부처님이 어떤 분인지가 표현되어 있습니다(귀의불 양족존). 또 가르침이 어떤 내용인지도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귀의법 이욕존). 또 승가가 어떤 곳인지에 대한 내용도 한문에는 담겨 있습니다(귀의승 중중존). 그런데 이것을 한글로 바꾸다보니 한문에 담겨있는 내용을 다 담을 수가 없었습니다. ‘거룩하다’는 말 한마디로 두리뭉실하게 정리된 것입니다. 한문에 담겨있는 내용을 모두 담지 못하고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로 번역되었습니다.

한문으로 된 내용을 한번 짚어보겠습니다. ‘귀의불 양족존’,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왜 부처님께 귀의해야 합니까? 부처님은 두 가지를 구족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가 무엇일까요? 지혜와 자비입니다. 또는 지혜와 복덕입니다. 부처님은 지혜와 자비가 원만구족한 분, 지혜와 복덕이 원만구족한 분이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의 이러한 특성을 ‘명행족’이라는 말로도 표현합니다. 알아야 될 것을 잘 아시고 그 내용을 삶으로 온전하게 잘 사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부처님이 그러하기 때문에 거룩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명행족’이라는 말을 더 쉽게 풀면 ‘앎과 실천이 일치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거룩한 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귀의법 이욕존’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귀의법’을 번역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합니다’가 됩니다. ‘가르침에 귀의한다’는 것은 가르침대로 살겠다는 의미입니다. ‘가르침의 내용에 잘 귀의하겠다’ 또는 ‘가르침 내용대로 잘 살겠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되는가?

‘이욕존.’ 진리는 인간의 분별심으로 만들어내는 선악, 시비, 이익과 손해, 성공 실패를 떠나 있습니다. ‘이욕’이라고 하는 것은, ‘진리 자체는 그런 것이 없다’, ‘그런 것을 다 떠나 있다’는 뜻입니다. 진리 자체는 우리가 ‘콩이야, 팥이야’하는 것, ‘네가 옳네, 내가 옳네’하는 것을 다 떠나 있습니다. 그것은 다 인간이 조작해 낸 것입니다. 그런 것이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사람들이 무지와 착각의 사고방식으로 조작해낸 내용일 뿐입니다. 진리 자체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진리 자체는 어떤 차별도 없고 실패와 성공도 없고 이익과 손해도 없습니다.

‘21세기 약사경’을 보면 미혹문명이 어떤 내용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삶은 좋은 것이고. 죽음은 나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미혹문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죽음도 빛나고 삶도 빛나게 해야 합니다. 진리는 이런 것입니다. 진리는 평등합니다. 삶도 괜찮고 죽음도 괜찮습니다. 늙음도 괜찮고 젊음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로 생각합니다. 젊음은 좋은 것이고 늙음은 안 좋은 것이다, 삶은 좋은 것이고 죽음은 좋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좋다. 나쁘다, 이익이 있다, 없다, 옳다, 그르다 등으로 차별하는 것 때문에 다툼이 생깁니다. 다투기 때문에 고통과 불행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런데 진리 자체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런 것들을 다 떠나 있습니다. ‘이욕존’, 그런 것들이 발붙일 수 없는 곳이 진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리는 거룩한 것이다’ 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로부터 훌쩍 다 벗어날 수 있도록,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도록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고 편안할 수 있으면 ‘열반’이라고 표현하고 그런 것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으면 ‘해탈’이라고 합니다. 편안하다고 하면 ‘열반’이라는 개념을 쓰고 자유롭다고 하면 ‘해탈’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이 거룩한 이유는 선악, 시비, 이익과 손실, 성공과 실패, 좋음과 나쁨과 같이 우리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탐진치가 본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본래 없는 것을 스스로가 조작해서 자승자박하고 있을 뿐입니다. 부처님은 ‘너희들을 구속하는 무엇이 본래 있는 것이 아니야. 스스로 만들고 있는 것이지’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진리 자체에는 탐진치라고 하는 것이 본래 없는데 자기 스스로 만들어서 고통스럽다고 아우성 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욕’의 또 다른 의미를 보겠습니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하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 부처님 가르침대로 하면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면 네가 원하는 진짜 괜찮은 삶이 가능해져’라는 의미가 그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은 거룩한 것이 됩니다.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을 다시 정리해보면, ‘귀의불 양족존’은 두 양(兩)자에 만족할 족(足)자, 그러므로 두 가지(지혜와 자비)가 모두 만족하다, 두 가지가 원만하게 잘 갖추어져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거룩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귀의법 이욕존’은 진리는 본래 선악, 시비 등 인간을 갈등, 분열하게 하고 다투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그런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부처님이 가르치는 대로 하면 그런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이욕존’이라고 합니다. 떠날 리(離), 욕심 욕(慾). 모든 분별 망상, 분별 욕심을 다 떠나 있다, 다 떠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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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람에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

그다음에 ‘귀의승 중중존’. 무리 중(衆), 가운데 중(中). 무리 가운데 존귀한 분, 대중 가운데 존귀한 분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승가는 대중 가운데 존귀하다. 존귀하기 때문에 승가는 거룩하다. 그래서 우리는 승가에 귀의를 해야 된다.’ 그런데 승가가 왜 존귀한 것일까요? 여기에 대한 물음이 당연히 있어야 합니다. 앞서 한 보살님께서 ‘승가’보다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는 내용이 더 좋다고 하셨습니다. 신앙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경우, 내용적으로 결함이 있게 됩니다. 또 위험성도 있습니다. 내용을 그렇게 할 경우, 부작용이 날 수 있는 위험성이 굉장히 많습니다. 우리 조계종단이 오늘날 혼란을 겪는 것도 이런 부분들을 명료하게 하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가 너무 많습니다. 이런 것을 명료하게 하지 않아서 생기는 부작용들이 많은 것입니다.

하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서, 승가가 대중 가운데 특별한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실상사에 30명 대중스님들이 살고 있다고 칩시다. 30명 대중스님들이 모두 여러분들에게 감동을 주고 또는 감화를 받게 할 수 있는 스님들일까요, 아닐까요? (아닙니다.) 마음에 안 드는 스님들도 있어요? 하하. 바로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에 의지하게 되면 그런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편이 갈리게 되고, 다툼이 되기도 하고, 혼란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승가가 대중들 가운데 가장 존귀하다’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 무엇이 있을까요? 부처님은 깨달은 분이니까, 가섭존자는 두타행을 잘하는 분이니까, 목건련은 신통이 뛰어나니까, 사리불은 지혜가 뛰어나니까, 아난존자는 ‘다문제일’라고 해서 많이 듣는 것이 뛰어나니까. 부처님의 10대 제자마다 특별하게 뛰어난 부분이 다 있습니다. 10대 제자라고 하면 부처님 제자를 대표하는 인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왜 사람, 부처님, 스님에게 귀의하라고 하지 않고 법에 의지라고 했을까요?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 ‘사람에게’라는 말에는 부처님도 포함됩니다. 사리불, 목건련, 라홀라도 다 포함됩니다. 불교 역사 속에서 쟁쟁한 인물들이 모두 포함되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설명을 조금 더 보태야겠습니다. 부처님도 사람입니다. 부처님이 나하고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네.) 사람인 건 맞지요. 그런데 우리와 똑같은 사람인가? 사람인 건 틀림이 없지만 우리와 똑같은 사람인가? 부처님만 우리와 다르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다 똑같은 사람인가?

모두 다 각각 다릅니다. 다만 부처님하고 스님들을 비교 한다면, 부처님은 진리를 잘 알고 아는 대로 사시는 분이고 스님들은 부처님처럼 살려고 마음을 먹은 사람들입니다. 부처님과 우리 사이엔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똑같은 사람인데 잘 알아서 헤매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잘 모르고 헤매며 사는 사람이 있는데 그중에서 스님들은 잘 배워서 부처님처럼 화합하여 잘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승가가 많은 대중들 중에서, 가장 거룩하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넓혀서 보면 ‘대한민국 5000만 대중 중에서 실상사 대중이 제일 거룩하다’고 또는 남원시의 8만 대중 중에서 실상사 대중이 제일 거룩하다. 산내면의 2000명 대중 중에서 실상사 대중이 제일 거룩하다. 더 좁혀서 입석마을 80명 대중 중에서 실상사 식구들이 제일 거룩하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 ‘거룩하다’라고 하는 내용 중에 많은 내용이 있습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을 하나 꼽으라면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무엇 때문에 거룩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냥 모여 사는 것은 남원에도 함께 모여 살고, 서울에도 함께 모여 살지 않습니까? 단지 같은 곳에 모여 사는 것을 넘어 화합해서 더불어함께 사는 대중이기 때문에 승가가 특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화합하지 아니하면 그건 공동체라고 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서 ‘오역죄’라는 것이 있습니다. 다른 나쁜 짓은 좀 봐줄 수 있는데, 절대 봐줄 수 없는 다섯 가지 죄를 오역죄라고 합니다. ‘오역죄’는 ‘다섯 가지 대역죄’라는 뜻으로, 사람으로서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잘못을 말합니다. 대중의 화합을 깨뜨려서 불화하게 만드는 것은 오역죄 중의 하나입니다. 오역죄의 하나로 취급할 정도니까 화합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잘 모릅니다. 잘 모르니까 화합하기 위해 진력하질 않습니다.

실상사 대중이 30명 정도 된다고 할 때, 30여명 대중이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가 화합해서 더불어함께 잘 살도록 전심전력을 다한다고 하면 그 자체가 바로 수행입니다. 그 자체가 바로 탐진치로부터 벗어나는 길입니다. 수행이 특별하게 따로 있어야 되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화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화합의 조건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그중에 한두 가지만 이야기해 보면, 일단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가 그러하기도 하고, 그래야 마땅하다고 부처님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상대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배려하는 등, 그런 기조 위에서 상대 이야기를 잘 듣고 내 이야기도 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소통을 잘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소통을 잘해서 공감을 이루고 합의를 이루고 합의해서 함께 뜻 모아 활동을 하면 그것을 ‘화합’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너와 내가, 이쪽과 저쪽이, 아내와 남편이, 부모와 자식이. 이웃과 이웃이 화합을 이루어서 더불어함께 산다면 그 집안 살림살이는 아름답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아름답죠. 너와 나의 관계도, 이쪽과 저쪽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산내면도 약 2000명 인구가 정말 내용적으로 화합해서 더불어함께 잘 살아가고 있다면 아마 세계가 주목할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나는 화합하는 산내 가서 살고 싶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가 산내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좁혀서 적어도 실상사만이라도 자신 있게 ‘와서 봐. 우린 이렇게 화합해 살고 있어’ 그렇게 되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하면 가장 먼저 누구한테 좋을까요? 자신에게 좋습니다. 그리고 실상사에서 함께하고 있는 대중 모두에게 좋습니다. 당연히 우리가 그렇게 해낸다면 실상사를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중중존’을 짧은 문장으로 번역하다 보니 ‘거룩하다’는 말로 표현하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삼귀의 공부를 제대로 안 하고 건성으로 하게 되면 내용을 빠뜨리거나 놓치게 될 위험성이 높다는 것을 같이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이어서 마지막 구절이 ‘스님들’에서 ‘승가(공동체)’라고 바뀐 부분에 대해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그동안 종단에서는 삼귀의를 포함한 예불문구를 한글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습니다. 삼귀의의 앞 두 구절,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와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라는 부분은 그렇게 표현해도 크게 왜곡되거나 크게 잘못되거나 치명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한자로 된 단어의 내용을 다 표현하다보면 문장이 너무 길어집니다. 길어지면 노래로 부르는데도 적당하지 않은 부분이 생깁니다.

그런데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는 이후에도 계속 논란이 되었습니다.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이것은 부처님 뜻하고는 안 맞아. 부처님이 가르쳐 준 내용과는 어긋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부작용이 생길 수 있는 위험요소가 너무 많아 비판이 계속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조계종단에서는 여전히 공식적으로 정리가 안 되어 있습니다. 아직도 논란 속에 있는 상황입니다. 이 부분이 더욱 비판을 받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예전에는 교통수단, 정보수단이 발달하지 않다 보니까 우리는 한문으로 된 공부만 했지, 빨리어로 된 불교 경전들은 잘 몰랐습니다. 불교전통을 잘 계승하고 있다고 하는 남방 쪽, 미얀마, 태국, 스리랑카 등은 전통 불교의 맥을 잇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는 나라들입니다. 그런 나라에서는 우리가 초기경전이라고 부르는 빨리어로 된 경전을 공부합니다. 예전에 우리는 빨리어 경전은 잘 몰랐는데, 지금은 학문 수준도 높아지고 교통수단도 발달하고 통신수단과 정보수단도 고도화되다 보니까 이제 빨리어 경전도 다 번역해서 들어옵니다. 또 전문가들도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서 이런 것 저런 것을 따져보니까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하는 건 아무래도 위험하다, 문제가 있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종단은 아직 정리를 못 하고 있습니다. 종단은 거대하다 보니까 제도가 한번 만들어지면 고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체적인 경향이나 전문가들의 이야기는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표현된 것은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성들이 굉장히 높기 때문에 그 부분은 손질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는 견해들이 많습니다. 종단적으로는 정리가 안 돼 있지만, 종단 내에서도 어떤 절에선 정리해서 가는 데가 있고 어떤 절은 종단에서 늘 했던 데로 계속 가고 있기도 합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인데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천착해본 결과, 실상사에서도 이 내용은 바꾸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그래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를 ‘승가 앞에 귀의합니다’로 고쳤습니다.

끝으로, ‘승가’와 관련해서 우리가 혼란을 겪고 있는 또 다른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드릴까 합니다. ‘승가’라는 말은 ‘출가한 스님들의 모임’이라는 의미입니다. ‘출가한 비구, 비구니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불교역사가 길게 이어지고, 공간적으로도 각 지역으로 번져나가기도 하면서 시대마다, 지역마다 새로운 해석이 생겨나게 됩니다. 새로운 해석을 하는 데를 주로 ‘대승불교’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는 대승불교 문화권입니다. 대승불교, 대승경전을 보면 출가한 스님들 중심으로만 불교 문제를 다룰 수 없는 상황들이 생깁니다.

예전에는 승가를 비구와 사미, 비구니와 사미니 이렇게 네 그룹의 출가대중 공동체라는 의미로 ‘사부대중’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런데 대승불교로 오게 되면서 출가자뿐 아니라 재가자를 포함해서 사부대중이라는 개념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현재 조계종단법에는 출가자(비구, 비구니)와 재가자(우바새, 우바이)를 묶어서 사부대중이라는 개념을 쓰고 있습니다. 그것이 종헌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다만 내용을 잘 만들어내고 있지는 않습니다.

실상사는 사부대중공동체에 대해 이런 것 저런 것들을 궁리해왔고, 지금은 그것이 가시권에 와 있다고 봅니다. 지금은 여러 모로 사회는 커졌는데 출가자가 급감하기도 하고 불교 역량은 너무 부족한 상황입니다. 이 거대한 사회 속에서 불교가 세상을 위해서 유익한 종교로서 역할을 하려면 스님들만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실상사는 출재가가 함께 활동을 해가고 있습니다. 출가자는 비구, 비구니, 재가자는 남성 재가자, 여성 재가자 이 네 그룹을 사부대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실상사에서는 이러한 사부대중이 지금 함께 활동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승가’라는 말을 또 다른 말로 풀면 ‘공동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승가’라는 말은 인도식 발음을 가져온 것입니다. 이것을 뜻으로 풀면 공동체가 됩니다. 물론 공동체라는 말로 푸는 것에 대해서 논란이 많습니다. 논란은 많지만 조금 압축해서 단순화시키면 ‘공동체’라는 말로 풀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해석하는 데에는 우리가 조금 신중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공동체에 귀의합니다’로 해석하지는 않고 ‘승가 앞에 귀의합니다’로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끝을 맺겠습니다. 기억은 선명하지 않은데, 초기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서 들었던 내용입니다. 불교의 원형을 파악하는 데 있어 가장 대표적인 자료가 초기불교 자료인데, 그것을 근거로 해서 이야기하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어떤 분이 초기불교 자료에 있는 내용이라고 하면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범부 중생 100명에게 공양하는 것보다 출가한 비구 한 사람에게 공양하는 공덕이 더 크다. 비구 100명에게 공양 올리는 것보다 아라한 한 명에게 올리는 공양의 공덕이 더 크다. 아라한 100명에게 올리는 공양보다 부처님 한 분에게 공양 올리는 공덕이 더 크다. 부처님 100명에게 공양 올리는 것보다 공동체에 공양 올리는 공덕이 더 크다.’ 이런 내용입니다. 그만큼 불교 세계관과 정신, 불교 역사와 전통 속에서는 공동체가 중요하게 다루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개인을 지칭하는 ‘사람’, ‘부처님’보다 더 귀중한 것이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요즘 나라의 주인은 누구라고 합니까? 국민이라고 합니다. 같은 맥락의 이야기입니다. 누구도 화합하는 대중의 뜻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부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화합하는 대중의 뜻을 무시하거나 함부로 해도 괜찮은 존재는 없습니다. 그것은 부처님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공동체, 그리고 공동체의 화합을 중요하게 생각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체적으로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어쩌면 불교 공부와 수행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삼보에 대한 내용을 이 무늬와 연결시켜서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이 무늬를 일반적으로는 생명평화 무늬, 불교적으로는 인드라망 무늬, 종단적으로는 삼보륜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무늬와 관련해서는 전부터 여러 가지로 이야기를 많이 해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은 삼귀의와 연결해서만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부처님은 어떤 사람일까요?(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중생은 무늬안의 사람모양만 나 또는 사람이라고 알고 살아갑니다. 반면 붓다는 무늬 자체 또는 전체를 자신 또는 사람으로 알고 살아갑니다. 이 무늬는 자신의 참모습인 붓다 자체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부처님 삶의 내용은 어떠할까요? 이 그림에 담겨있는 뜻을 잘 알고 완전히 실천하는 삶을 사시는 분이 부처님입니다.

두 번째, 그분의 가르침은 어떤 내용일까요?(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이 그림에 담겨 있는 뜻을 사람들한테 잘 설명한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세 번째, 승가는 어떤 내용일까요? (거룩한 승가앞에 귀의합니다) 요즘에는 우리가 출가보살, 재가보살 이런 개념도 더러 쓰고 있는데, 불교 공부와 수행하는 삶을 살겠다고 출가한 사람들, 혹은 공동체 대중들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역사적으로 제일 첫 번째는 출가한 스님들이 되겠습니다. 출가한 스님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뭐 하는 사람들일까요? 출가수행자는 어떻게 생긴 사람들일까요? ‘부처님이 저렇게 생겼듯이(생명평화무늬) 나도 저렇게 생겼어’ 이것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부처님이 그렇게 아셨듯이 우리도 잘 알아야 됩니다. 두 번째는, 부처님은 자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잘 알고 안 내용대로 삶을 살았습니다. 또 잘 안 내용을 사람들에게 잘 알려 주는 가르침을 폈듯이 ‘나도 부처님처럼 나 자신이 본래 부처님임을 잘 알고 그분이 가르쳐준 내용대로 삶을 잘 살고 역할 하겠다’는 뜻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을 승가라고 합니다. 이것을 다시 요약하면, 우선, 부처님은 진리를 잘 알고 사신 분이고, 두 번째, 부처님 가르침은 사람들이 진리를 잘 알고 살아갈 수 있도록 설명한 것입니다. 세 번째, 그걸 전문적으로 소화시켜서 살겠다고 나선 사람들의 모임이 승가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처님이 안 내용을 잘 알고 부처님이 가르쳐준 내용을 잘 배워서 배운 대로 살기 위해서 전력투구하겠다는 마음을 낸 사람들의 집단을 승가, 또는 공동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불법승 삼보를 생명평화무늬를 가지고 이야기하면 아주 단순,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어서 이 이야기를 덧붙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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